블랙 아이드 수잔
줄리아 히벌린 지음, 유소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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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무덤도 화재 때문에 움푹 팬, 바닥이 고르지 않은 경사진 구덩이였다. 우리가 거기 버려지기 오래전부터 블랙 아이드 수잔이 피어나서 화려하게 들판을 단장하고 있었다. 블랙 아이드 수잔은 버려져서 누렇게 뜬 땅에서 종종 제일 먼저 번성하는 탐욕스러운 식물이다. 치어리더처럼 아름답지만 경쟁심이 강하다. 빠르게 번식해서 다른 종을 몰아낸다. 끄지 않고 아무렇게나 던진 한 개비 성냥, 그 때문에 연쇄살인범 이야기에 영원히 새겨질 우리의 별명이 탄생했다.     p.31

 

테사는 타브로이드 신문 일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던 스타이자 캠프 파이어 때 등장하는 공포 괴담의 주인공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블랙 아이드 수잔 네 명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운이 좋았던 단 한 명, 유골이 흩어져 있던 곳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채로 발견된 유일한 피해자였다. 열여섯의 테사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들의 유골과 함께 살아 있는 채로 묻힌 채 발견되었다. 그녀가 발견된 공동묘지에 곳곳에 피어 있던 블랙 아이드 수잔 꽃 때문에 사람들은 희생자들을 '블랙 아이드 수잔'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18년 뒤,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고 있는 테사에게 그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자신이 18년 전에 했던 증언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범인에 대한 집행이 한 달 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일이 다가오고, 테사는 혹시 무고한 사람이 사형수 감옥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야기는 십대 딸을 둔 엄마 테사의 현재 시점과 18년 전 블랙 아이드 수잔 사건의 생존자로 무사히 구출되고 난 뒤의 열여섯 소녀 테사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과거 시점의 대부분은 테사와 정신과 의사의 상담으로 진행된다.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었다가 회복하고,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어 버린 테사가 뭐든 범인에 대한 단서를 찾아 주기를 바라는 어른들과 이상하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소녀의 구도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긴장감 보다는 다소 모호하게 흘러간다. 이백여 페이지가 지날 때까지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제대로 드러나는 게 없으니 말이다. 현재 시점의 이야기에서는 유명한 법과학자와 사형수 전문 변호사와 함께 혹시 다른 범인이 있지는 않을까, 무고한 사람이 갇혀 있는 건 아닐까 하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다.

 

 

 

 

"좋아요. 당신의 괴물이 바로 지금 저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그가 자리에 앉았어요. 모든 것을 자백했어요. 당신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어요. 이름도 알고, 어디서 자랐는지, 어머니가 그를 사랑했는지, 아버지에게서 얻어맞았는지, 고등학교 때 인기가 많았는지, 개를 사랑했는지, 개를 죽였는지... 다 알고 있어요. 그가 바로 저기, 1미터 떨어진 의자에 앉아서 당신의 모든 질문에 대답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달라질까요? 당신을 만족시킬 대답이 있을까요? 기분이 더 좋아질 수 있는?"
나는 의자를 응시했다.... 나는 내 괴물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가 죽기를 원했다.      p.268~269

 

수십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러서, 자신이 진범을 잡은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범인의 변호사와 협력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피해자의 심리는 복잡 미묘하다. 누군가 그녀의 집 창밖에 블랙 아이드 수잔을 심어 놓았고, 사실 그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사건 당시 테사의 단짝이었던 친구 리디아는 테사가 재판에서 증언한 이후 사라져버렸다. 테사가 입을 열면 리디아도 수잔으로 만들겠다는 협박의 편지가 있었다. 리디아도 블랙 아이드 수잔 중 한 명이 되어 희생당한 걸까. 아니면 스스로 자취를 감춰버린 걸까. 수잔들 중 두 명은 아직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고, 그들은 테사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 준다.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서, 그녀에게 말을 건다. 과연 감옥 안에 있는 범인은 무고한 걸까, 그렇다면 진짜 연쇄살인범은 누구일까.

 

피해자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사람이 주인공이고, 그녀의 기억을 쫓아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 내는 구도라면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가 진행될텐데, 사실 이 작품은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독자들이 어느 정도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되는 것은 전체 사백 삼십여 페이지 중에서 사백 여 페이지가 가까워졌을 때 즈음이다. 그 뒤로 반전과 의외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그 전까지 이어지는 전개는 다소의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우선 테사라는 인물 자체가 뚜렷하지가 않아 다소 흐릿한 색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것 같기도 하다가 정말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덕분에 서사는 굉장히 느릿하게 흘러 간다. 물론 후반부의 속도감과 예상치 못한 결말을 위해 이 모든 과정을 즐길 수 있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영화 <컨텐더> 감독으로 영화화 제작 예정이라고 하는데,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는 또 어떤 분위기일지 기대를 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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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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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어떤 힘일까? 나는 삶이 고통스럽거나 누군가의 불행 앞에서 무기력한 마음이 들 때 이 소설 속 빵집 주인이 건넨 한 덩이의 빵을 떠올리곤 한다. 어떤 의미에서 내게 소설 쓰는 일은 누군가에게 건넬 투박하지만 향기로운 빵의 반죽을 빚은 후 그것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는 일과 닮은 것도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오늘 아들을 잃은 부부에게 빵을 건네는 이의 마음으로 허공에 작은 빵집을 짓는다. 젊은 부부에게 온기를 전하는 빵집 주인의 마음으로. 어딘가 있을 당신에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책들을 건네기 위해서.   p.22~23

 

어릴 때부터 워낙 빵을 좋아해서 평생 다양한 종류의 빵을 먹으면서 살아 왔지만, 그 중에서도 겨울만 되면 생각나는 특별한 빵이 있다. 말린 과일과 설탕에 절인 과일껍질, 아몬드, 향신료를 넣고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른 후 슈거파우더를 뿌려 만든 독일식 과일 케이크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만드는 음식 중 하나인 슈톨렌이다. 이 빵은 갓 구운 것보다는 건조하고 서늘한 곳에서 2~4주가량 숙성시킨 후 먹는 것이 좋은데, 그래서 독일에서는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두고 슈톨렌을 만드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처음에 이 빵을 처음 먹었을 때는 럼향 가득 품은 달콤하고 쫄깃한 건과일의 맛과 꾸덕하고 깊은 풍미에 반했었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달콤한 꿀과 럼주에 건과일들을 숙성하는 기간이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라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 정상을 들여서 만드는 빵이라는 점과, 그만큼 여타의 빵과는 달리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슈톨렌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올해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슈톨렌을 미리 주문했고, 12월을 앞두고 도착한 슈톨렌을 얇게 조각 내어 먹으면서 백수린의 신작 산문을 읽었다. 달콤함과 담백함 사이의 깊은 풍미와 묵직하고 건강한 맛이 커피와도 홍차와도 참 잘 어울리는 빵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리고 맛있는 빵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 근사한 책이 나의 오늘 하루를 또 버텨내게 해주었다. 다정하고, 온순한 마음으로, 위로 받고 또 용기를 얻으면서, 나는 그렇게 소중한 책을 또 한 권 만났다. 

 

이 책은 어느덧 등단한 지 10년 가까이 된 소설가의 첫 산문집이다. '경향신문'에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책 굽는 오븐'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소개하기 위해 연재했던 짧은 원고들을 수정, 보완하고, 거기에 새롭게 쓴 글들을 더했는데 '책'과 '빵'에 대해서 가볍고 경쾌한 마음으로 썼던 글들이라고 한다. 가볍지만 너무 따뜻하고, 경쾌하지만 뭉클하고, 다정다감하고 사려 깊고, 맛있는 그런 글이라 읽는 내내 설레이는 마음이었다.

 

 

사는 것이 힘들고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는 어느 날, 온기가 남은 오븐 곁에 둘러앉아 누군가와 단팥빵을 나누어 먹는 상상을 해본다. 긴 시간 정성껏 졸여 만든 달콤하고 따뜻한 앙금이 들어 있는 단팥빵을. 그것은 틀림없이 행복한 장면이겠지만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독할 것이라는 걸 나는 이제는 안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에게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상처와 자기모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충동을 감당하며 사는 존재들이니까.       p.227

 

백수린 작가는 '빵집 주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과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결국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여전히 책을 읽다가 빵이 나오는 구절을 만나면 내용과 상관없이 그 책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느끼곤 한다고. 아마도 대부분 빵을 좋아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방까지 빵집 투어를 다니고, 해외에 가서도 베이커리 맛집은 빼놓지 않고, 사다 먹는 걸로도 부족해 베이킹을 배우러 학원에 다니고, 급기야 오븐을 사서 집에서 빵을 만들어 먹고, 주변에 선물도 했던 터라 나 역시 그랬다. 빵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오는 책은 일부러 찾아 읽고, 누군가 빵을 나처럼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일단 호감부터 생겼으니 말이다. 그래서 페이지 곳곳에 빵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이 책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것도 단순히 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빵을 곁들이는 식이라 더 근사했다.

 

 

오랜 시간 반죽을 숙성시켰다가 구워야 하는 캉파뉴와 소박하지만 풍미 깊은 마틴 슐레스케의 <가문비나무의 노래>, 뉴욕의 대표적인 유대인 먹거리인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는 필립 로스의 <울분>과 재료 비율에 조금의 오차만 있어도 제대로 부풀어 오르지 않는 마카롱은 앤 카슨의 <남편의 아름다움>에서 만날 수 있는 정교하게 세공한 문장들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기시 마사히코의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일본인들이 유년 시절 즐겨 먹는 가장 흔한 빵인 멜론빵과 제임스 설터의 소설들은 예술품처럼 완벽한 형태를 지닌 티라미수, 그리고 침니 케이크와 아고타 크리스토프, 슈톨렌과 로맹 가리, 바나나 케이크와 윌리엄 트레버, 롤케이크와 켄 리우, 옥수수빵과 존 윌리엄스, 단팥빵과 앨리스 먼로 등등.. 갓 구운 빵의 온기만큼 따뜻한 글들이 가득한 책이었다.

 

무엇보다 소설을 쓰는 일을 빵의 반죽을 빚고 굽는 일과 함께 대하는 작가의 마음이 공감되고, 이해되고,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참 좋았다. 그날의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그날의 기분과 분위기에 알맞은 차를 끓이고, 티푸드나 초콜릿을 준비한다는 것도, 책상을 치우고 차를 우리는 시간 동안 소설을 시작했던 그 초심의 마음을 불러온다는 것도 그녀의 작품만큼이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고 말이다. 작가의 말에서 '읽고 쓰는 나날을 기록한 소박한 글들이 온기, 라는 단어와 어울렸으면' 한다고 했는데, 그 다정한 온기가 이 책을 읽는 모두에게 전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루하루 뉴스를 보기가 겁이 날 만큼, 나쁜 소식투성이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매일매일이 조금은 다정해지기를.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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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1-30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일러스트가 따뜻한 느낌이 드네요 피오나님께서 찍으신 사진도 그림처럼 예뻐요~! 정말 12월이 성큼 다가왔네요~

피오나 2020-11-30 21:34   좋아요 1 | URL
실제 책도 너무 따뜻하고 다정하고 예쁘답니다. 12월과 정말 잘 어울리는 책이에요^^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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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기회 균등에 대한 담론이 과거와 같은 반응을 얻지 못하는 이유라 볼 수 있다. 사회적 이동성은 더 이상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 빈부격차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무엇이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뤄야만 하며,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p.51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에 200만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리고,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마이클 샌델의 신작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후 8년 만에 쓴 신간으로,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이며 직역하면 ‘능력주의의 폭정: 과연 무엇이 공동선을 만드나?’로 국내 버전은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미국 현지에서 2020년 9월에 나왔으니, 정말 따끈따끈한 신작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샌델이 말하는 것은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가에 대한 것이다.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는 명제는 자유시장경제의 핵심이지만, 사실 공평한 기회제공과 능력발휘의 보장 장치는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샌델은 특권층 부모들이 불법적 수단으로 자기 자녀들을 명문대에 입학시켰던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떠오르게 하는데, 이 사건의 중심에 악덕 입시상담가가 있었고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부유한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교묘히 설계된 입시 부정을 저질렀다는 거다. 샌델은 실력이 경제적 우위와 구별해서 보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공정성 관점에서 뒷문과 옆문을 구분하기 쉽지 않은 입시의 윤리에 대해서 말한다. 능력주의의 문제는 원칙 자체보다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느냐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샌델은 그렇게 능력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견 불일치를 시작으로 능력주의의 장단점을 구체적으로 따져 보기 시작한다.

 

 

그것이 사회적 상승 담론의 포인트였다. 성공의 길에 놓인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성공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인종이나 출신 계층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락하는 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꼭대기에 선 사람은 그 성공과 관련된 보상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p.145

 

재산과 소득에서 똑같은 수준으로 불평등한 두 나라가 있다고 해보자. 한 사회는 귀족정이며 소득과 재산은 어떤 집에서 태어나느냐에 달려 있고 고스란히 대물림된다. 다른 한 사회는 능력주의로 각자가 노력과 재능에 따라 얻은 결과로 재산과 소득의 불평등이 생긴다. 대부분 능력주의 사회가 귀족정 사회보다 낫다고 여길 것이다. 출생에 따라 계급을 매기는 귀족정은 부정의하다고 여길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부잣집에서 자라날지 가난한 집에서 자라날 모른다는 전제 하에 당신은 어떤 사회를 선택하고 싶은가? 혹은 처음부터 자신이 최상위층이 될지 최하위층이 될지 알고 있다고 하면, 둘 중 어느 사회에서 살고 싶을까. 중요한 것은 두 나라의 불평등 정도가 똑같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결론은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두 사회 모두에서 극심하므로, 어느 계층에 속하든 한쪽 사회를 고르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샌델은 이런 식으로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능력주의의 이면을 다시 생각해보도록 한다.

 

성공에 대한 모든 불공정한 장애물을 제거했을 경우,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개인의 능력은 정말 공정하게 측정되고 있는가?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마이클 샌델은 이번에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보다 '성적 기반 능력주의'인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책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과연 이번에도 샌델이 '공정' 열풍을 불러일으킬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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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 돈의 미래 - 세계 3대 투자자 짐 로저스가 말하는 새로운 부의 흐름
짐 로저스 지음, 전경아 옮김 / 리더스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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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는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성공한 투자자가 되고 싶다면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한다. 변화의 계기가 되는 것은 바로 위기다. 위기는 투자자에게 멋진 기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위기 관련 뉴스를 봤을 때 '아, 이건 대재앙이다'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거 정말 멋진 뉴스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테러나 천재지변이 세계를 공격하는 것은 정말로 비극적인 일이지만 투자자에게는 기회이기도 하다.     p.73~74

 

월가가 인정한 투자계의 거장, 짐 로저스는 10년간 4200%라는 놀라운 수익률을 기록하며 '세계 3대 투자자'로 불린다. 그는 1987년 블랙 먼데이와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 세계를 강타했던 경제 위기를 정확히 예견해 시장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는 2019년부터 지난 2008년 일어난 글로벌 금융 위기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큰 위기가 닥칠 거라고 경고해왔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계경제가 대혼란을 겪으며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증가하는 등의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사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경제가 교착상태에 빠졌다는 징후가 각 분야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있으며, 각국 정부는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수조 원을 지출하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현실이다. 자, 그렇다면 세계경제에 본격적인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 지금, 돈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짐 로저스는 이 책에서 현재 전 세계에 걸쳐 위기의 전조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경제 위기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위기가 닥쳤을 때 개인과 기업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말한다. 위기는 산불과 아주 흡사하다고. 산불 자체는 위험하지만, 오래된 나무들을 일거에 없애고 새로운 숲이 조성되는 놀라운 기회가 생기게 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위기가 생겼을 때 좋지 않은 시스템을 일거에 없애고, 이전에 해온 방식을 바꾸면서 상황을 개선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위기가 곧 새로운 기회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는 중국 광둥성의 선전이 혁신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 점점 존재감을 드러낼 거라고 본다. 인도의 방갈로르나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등도 떠오르는 혁신 도시다. 하지만 텔아비브에는 지정학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전장이 될지도 모르는 지역의 한복판이라는 것이 약점이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홍콩의 정치적 긴장감은 선전 입장에서는 손뼉을 치며 좋아할 만한 일이다. 또 선전은 다른 지역이 자랑하는 소프트웨어뿐 아니라 하드웨어 생산에도 강점이 있어, 혁신의 양쪽 바퀴를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에서 미래 혁신의 후보지 중 단 한 곳을 고르라면 나는 선전을 꼽을 것이다.     p.227

 

경이적인 수익률을 올렸던 전설의 투자자인 짐 로저스도 굉장히 많은 돈을 순식간에 읽었던 경험이 있다. 신출내기 트레이더이던 1970년의 일로 풋 옵션을 행사에 보유한 자금의 3배라는 큰돈을 벌었지만, 고작 2개월 후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일시적으로는 큰돈을 벌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실패한 것이다. 그러한 실패의 경험은 그에게 좋은 약이 된다. 분석은 꽤 훌륭하더라도 시장의 변화를 끝까지 읽어내지 못할 경우 많은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는 투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라는 것을 배웠고,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야말로 인내심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짐 로저스는 1929년 대공황과 1987년 블랙 먼데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과거의 세계경제 위기 당시 나타났던 공통적인 현상을 바탕으로 곧 다가올 위기의 실체를 읽어 낸다. 그리고 불황을 버텨낼 생존 비결로 '상식에 대한 의심'과 '역발상 마인드'를 제시한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위기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위기는 일정한 주기로 반드시 찾아오게 마련이고, 우리가 지금 옳다고 믿는 상식 중 대부분은 15년 후 상식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또한 현명한 투자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실패하고 손해를 볼 때 누구보다 재빨리 움직인다. 맹목적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냉철한 눈으로 상황을 판단하며, 최적의 타이밍이 왔을 때 투자를 해 위기에서 벗어나는 시점에 보상을 얻는 것이다. 위기의 시대에 살아남을 전략이 필요한 우리에게 짐 로저스가 알려주는 투자의 원칙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지름길이자 자산 관리 전략에 대한 넓은 시야를 제공해주고 있다. 위기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고 싶다면, 타인의 의견과 상식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세상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세간의 상식을 의심하고 스스로 정보를 수집하며,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부를 쌓고 성공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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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거짓말을 한다 - 통계와 그래프에 속지 않는 데이터 읽기의 힘
알베르토 카이로 지음, 박슬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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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의 의미와 극단값의 역할에 관한 비유를 들어보자. 당신은 술집에서 맥주 한잔을 즐기는 중이다. 당신을 포함해 9명이 술을 마시며 잡담하고 있다. 그때 또 다른 사람이 술집에 들어온다. 그는 전문 살인 청부업자이며 지금까지 50명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이제 그 술집에 있는 사람들의 1인당 평균 살인율은 5명으로 뛰어오른다! 그렇지만 당신이 암살범인 것은 아니다.     p.36

 

표, 그래픽, 인포그래픽 등의 시각 자료가 구구절절 설명하는 말보다 더 효과적이고, 임팩트있게 정보를 전달한다. 각종 회사의 매출 지표, 음원 차트의 순위, 주가 등락 폭, 코로나19 통계 그래프, 기후변화, 선거 개표 결과 등등 우리는 숫자와 그래프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만일 이 모든 숫자와 그래프가 보이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어떨까? 이 책은 객관성과 신뢰도의 상징과 같은 차트가 어떻게 데이터를 왜곡해 우리를 오해와 착각의 늪으로 이끄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뉴스나 기사, 소셜 미디어에서 흔히 접하는 표와 지도, 막대그래프, 산점도, 거품 차트 등 160여 개의 차트를 통해, 데이터에 숨겨진 욕망과 의도, 패턴을 정확히 읽어내는 안목을 길러준다.

 

저자인 알베르토 카이로는 시각 자료를 통해 뉴스를 전달하는 비주얼 저널리즘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다. 그는 차트를 단순한 그림이나 도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읽고 해석하는 법을 익힌다면, 차트 속에서 진실을, 나아가 세상을 바로 읽어내는 방법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빅데이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복잡한 데이터에서 핵심을 간파하는 통찰력이야말로 제대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힘이 될 테니 말이다.

 

 

차트는 추론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합리화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우리 인간은 전자보다 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차트의 시각적 정보를 근거 삼아 - 특히 기존의 믿음과 일치할 경우 - 기존 세계관에 끼워 맞추려고 한다. 근거를 도출하고 그에 따라 믿음과 세계관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추론과 합리화는 비슷한 정신적 메커니즘에 의존하므로 둘은 쉽게 혼동되며 종종 추리에 기반한다. 추리는 유효한 근거나 추정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생성하는 것이다.     p.252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떻게 읽는가에 따라 숫자는 글자만큼 주관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숫자와 통계가 '주관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훌륭하게 디자인한 차트도 주의하지 않으면 잘못 이해할 수 있다고. 차트를 제대로 읽을 줄 모른다면, 차트가 보여주는 것이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차트는 여러 방식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잘못된 데이터를 표기하거나 분량이 적절하지 않은 데이터를 포함하거나, 잘못 설계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일 피하더라도 차트에 속아 넘어갈 수 있는 요소는 꽤 많다. 그리고 이는 틀린 정보와 가짜 뉴스라는 거대한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저자는 차트의 기본 개념부터 시작해 잘못된 차트를 가려내는 기준에 대해 알려 준다. 무엇보다 선거 판세, 경제 전망, 출산율, 범죄율, 코로나19 현황 등 실제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사례들을 통해 차트에 알려주고 있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숫자와 차트는 실제 현실에 무감각하게 만들 수 있기에, 거기에 인간의 얼굴을 부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매일 같이 보도에서 접하는 팬데믹으로 인한 사망자 수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얼마 전까지 웃고 울고 즐기고 고통받고 사랑받고 사랑하던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이들을 단순히 숫자나 차트의 작은 점으로 기억해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긍정적이고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 책은 정보 과잉의 시대에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인 우리에게 단순히 데이터를 읽는 방법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통찰까지 함께 보여주고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 빅 데이터 시대 필수 교양서로 이 책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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