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 고백
미키 아키코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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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것은 아내에게 농락당한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진술서를 읽는 분은 부디 어리석은 저를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아내 중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아내와 아들을 죽이지 않았지만 저 자신을 옹호할 마음은 없습니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아버지라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비난은 달게 받겠습니다.          p.75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XX마을의 산속에 있는 한 별장에서 추락 사건이 발생한다. 별장 주인인 모토무라 히로키의 아내와 아들이 약 13미터 아래 바닥에 추락해 현장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당시 히로키는 1층 거실에서 쉬고 있다가 쿵 하는 큰 소리를 듣고 2층으로 올라갔고, 베란다 아래에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다음 날 히로키를 아내와 아들을 죽인 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이유는 아내인 미즈카가 사망하기 직전에 한 잡지 편집자에게 메일로 보낸 '수기'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그 수기에는 '남편이 아내와 아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미즈카는 만약 아들과 자신이 살해당하게 되면, 이 수기를 공개해 아들과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들 도모키가 죽기 전 할머니에게 보낸 메일이 공개된다. 그 메일에는 아빠와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충격적인 두 사람의 고발에 이어 남겨진 자의 변명이 피고인의 진술서로 이어진다. 그는 아내가 아들과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누가 들어도 궁지에 몰린 어리석은 남자의 비참한 변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애초에 아내의 수기와 아들의 메일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방법조차 없기에 사건의 시작부터 모든 진실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이다. 죽은 자들의 고발은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일방적인 증언이고, 피의자는 그 전제 자체를 의심하며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피고인의 변호사가 사건을 둘러싼 증인들의 진술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시종일관 이 작품은 등장인물의 주장과 증언으로만 이어진다. 피해자의 고발문과 피고인의 진술서와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으로만 서사가 진행되기에 더욱 긴장감 넘치는 작품이었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이 중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건 관계자 여덟 명이 저마다 다른 증언을 하고 있기에, 사건의 진상은 분명 그 속에 있을 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겪은 두 사람이 정반대의 사실을 말하면서 제삼자의 판단을 구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재판이란 참 이상합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진실은 정작 본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판사에게 결론을 지어달라고 맡기는 셈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판사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신중하게 고민하고 숙고하겠죠. 사실은 두 사람 모두 거짓을 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형사 재판에 무승부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 승자가 되든 반드시 판결이 나옵니다.           p.297


미키 아키코는 줄곧 변호사로 활동하다 60세에 은퇴하고 평소 즐겨 읽던 미스터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내에는 <기만의 살의>, <귀축의 집>에 이어 <패자의 고백>이 세 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기만의 살의>는 본격 미스터리의 진수를 보여줬었고, <귀축의 집>에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참상을 놀라운 반전과 함께 보여줬었다. 이번에 만난 <패자의 고백>은 별장 추락 사건 이후 관계자들의 '고백'만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미스터리로 역시나 대반전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사건을 진행하기 위한 증언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에도 정작 재판 장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과연 이것은 아내에게 농락당한 한 남자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파렴치한 범인이 결백을 주장하려는 이야기일까. 작품이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 독자들이 진상을 추리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작가가 작품 곳곳에 복선을 배치했으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나 위화감을 느끼더라도 전체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기란 어려울 것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리려면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진 시점이 필요한데, 알다시피 이 작품에는 대화나 지문이 전혀 없이 각자의 입장에서 이어지는 증언만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미즈카의 수기는 거짓말로 점철된 허구인 것일까. 어린 도모키가 자신의 동생을 죽였다는 것은 사실일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남편일까, 아내일까.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 것일까. 살인사건의 핵심은 피해자가 죽었기 때문에 피해자가 직접 증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목격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범행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은 범인밖에 없다는 뜻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죽은 자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 과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끝까지 예측할 수 없는 이 흥미진진한 미스터리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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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올리버
올리버 색스.수전 배리 지음, 김하현 옮김 / 부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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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평소 책을 읽을 때, 손에 연필을 쥐고 여백에 메모나 느낌표 같은 표시를 남기는 식으로 저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나는 색스의 책들이 마음에 꼭 들었고, 시력이 변하기 시작한 이후로 머릿속에서 줄기차게 그와 대화를 했다. 그러다 보니 살아 있는 올리버 색스와 나누는 대화가 종이 위에서 나누던 대화와 사뭇 다를까 걱정스러웠다. 알고 보니 거만하고 우쭐대는 사람이면 어떡하지?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색스 박사는 수줍어하며 쭈뼛댔고 호기심이 많았다.             p.42


이 책은 올리버 색스와 수전 배리, 두 신경 과학자가 10년간 15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눈 것을 기록한 서간집이자 남겨진 이가 먼저 떠난 이를 추억하며 써 내려간 회고록이다. 수전은 마흔여덟 살까지 사시에 입체맹이었기에 오로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 몇 달간 시력 훈련을 받은 끝에 입체의 깊이를 볼 수 있게 되며 납작한 세상이 아니라 3차원의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그녀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고, 그 놀라운 변화를 일지에 기록하기 시작한다. 


시각의 변화는 엄청났다. 이제 수전에게 세상은 더 둥글고, 더 넓고, 더 깊고, 더 질감이 살아 있고, 더 세밀했다. 사물의 가장자리가 전처럼 흐릿하지 않고 또렷하고 명료했으며, 모든 것이 더 선명해졌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수전은 어린아이 같은 환희를 만끽한다. 하지만 평생을 사시로 살다가 마흔여덟 살의 나이에 입체시를 얻었다는 이야기는 시각 발달에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반세기간의 연구 결과를 뒤집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연구들에 따르면 입체시는 오직 유아기에만 발달할 수 있었다. 수전은 생물학 및 신경과학 교수로서 이러한 연구들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자신이 3차원을 보고 있다고 스스로 납득하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렸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색스 박사와 편지를 나누는 과정은 이렇게 수전의 시력에 일어난 변화가 얼마나 새롭고 경이로운지에 대해 타인을 이해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수전은 영원히 '납작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운명을 이미 오래전에 어느 정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례가 희망이 되어주길 바랐다. 




대화를 나누던 중 내가 편두통을 겪었을 때 올리버의 책 <편두통>을 읽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머리가 너무 지끈거려서 통증을 가라앉히려고 냉동 블루베리 봉지를 머리에 얹었다. 블루베리가 녹기 시작하면서 책이 파랗게 물든 모습이 책의 주제를 잘 보여 주는 듯했다. 이 말을 듣고 올리버는 자신이 욕조에 들어가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한번은 욕조에서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읽다가 책을 물에 빠뜨리고 말았는데, 나중에 그린을 만났을 때 물에 쫄딱 젖었던 그 책에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p.187~188


두 사람의 편지가 시작되었을 때 신경생물학과 교수인 수전은 50대였고, 유명한 신경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올리버는 70대였다. 만년의 우정은 꽤 긴 시간 이어졌고, 마지막 편지는 올리버가 세상을 떠나기 3주 전에 주고받은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두 사람의 우정이 싹트고 얼마 뒤, 올리버가 안구 흑색종을 진단받고 점점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수전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동안, 올리버는 익숙하던 자신의 세계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지적 교류를 멈추지 않는다. 수전은 올리버가 자신이 얻은 입체시를 잃어 갈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왜곡되고 뒤틀린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슬펐고,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 모두 회복의 힘을 굳게 믿었기에, 올리버는 투병 중에도 다정함을 잃지 않았고, 수전은 갑각류 봉제 인형을 선물하거나 음악을 찾아내는 식으로 그를 위로할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한쪽 눈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훈련 도구를 커다란 상자에 한가득 담아서 보내기도 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각에 대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법에 대해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자체도 흥미진진했지만, 색스 박사의 상징이기도 한 갑오징어 그림이 그려진 편지지에 쓴 편지 원문부터 그가 친필로 쓴 편지들까지 수록되어 있어 더 좋았다. 올리버의 첫사랑은 원소와 주기율표였는데, 심지어 사람들의 나이도 원자 번호로 세곤 했다. 올리버가 곧 74세가 되는 그해의 원소가 텅스텐이면, 자신의 텅스텐 생일이라고 말하곤 했으니 말이다. 올리버의 집은 부엌을 포함한 모든 방에 책꽂이가 늘어서 있고 선반마다 책 주제를 나타내는 카드가 놓여 있었다. 그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어 치우는 다독가였는데, 이는 그가 병을 얻어 시력이 점점 나빠졌을 때도 계속 되었다. 심지어 그는 마지막 즈음까지 연구하고, 자신의 책을 집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20년이라는 나이 차를 훌쩍 뛰어 넘는 두 사람의 우정과 과학과 의학에 대한 사유까지 가슴 뭉클한 책이었다. 올리버 색스의 책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꼭 놓치지 말고 읽어보길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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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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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 같은 무대장치가 스르르 위로 올라가자 완전히 다른 그림이 나타난 것 같았다. 세밀하게 그린 구상화. 가즈히코는 안개를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등진 은둔자도 아닌 것이다. 때로는 작업복을 입고 일할지도 모르는 가즈히코의 배경에 보이는 그림은 어딘지 칙칙한 색조였다. 비가 오는 날의 광경을 그린 것같이 탁하고 가라앉은 색조의 그림. 녹슨 철의 쇳내가 풍겨온다.            p.75~76


홋카이도의 작은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여자의 평범한 듯 그렇지 않은 연애 이야기를 그린 마쓰이에 마사시의 신작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모두 너무 좋았기에, 이번 작품 역시 두근거리며 읽었다. 마쓰이에 마사시는 평범한 일상의 풍경들을 담담하게 그려내지만, 기가 막힌 직유와 비유를 들어가며 표현하는 묘사들과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문장들로 인해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는 작가이다. 이번 작품 역시 어떤 극적인 사건 진행도 없지만, 특유의 섬세한 문장과 리듬감있는 묘사가 평범한 서사를 근사한 풍경화처럼 만들어주는 작품이었다. 


삼십대 중반의 게이코는 도쿄의 직장을 그만두고 어린 시절 잠깐 살았던 작은 마을 안치나이에서 우편배달부 일을 시작한다. 비정규직인데다 도쿄에서 받았던 월급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지만, 시골의 자연 속에서, 그날그날 끝나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만족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잔잔한 일상이 계속되고, 우연히 알게 된 한 남자와 가까워진다. 작은 수력발전소를 관리하며 소리를 채집하는 취미를 가진 그와의 연애는 갑작스럽게 시작되지만,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삼십대의 연애라 그런지 쉽게 익숙해지고 편해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설명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한 모호함의 가운데서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 서로 못 본 척하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억눌러온 것이 둑이 무너진 듯 흘러 넘치며 변화를 마주하게 된다. 과연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가즈히코와의 관계는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왜 이어지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하면 게이코는 늘 스위치를 켠 것처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자기 집에서는 물론, 가즈히코네 집에서도 부엌에 서서 요리를 만드는 것이다. 부엌칼을 쓰고 불을 쓰고 기름을 쓰는 것은 눈앞의 식자재에 커다란 변화를 주는 일이다. 식자재는 원래의 형태를 바꾸고 새로운 냄새를 풍긴다... 주말마다 만나는 관계를 그만둬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게이코의 바깥쪽에도 안쪽에도 있었다.              p.157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답더라도, 가까이에서 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아마도 연애가 아닐까. 기쁘고 즐거웠던 순간들만큼이나, 되돌리고 싶은 실수와 후회되는 순간들과 어쩔 수 없이 구차해져야 했던 시간들을 쌓아 가면서 두 사람은 앞으로 나아간다. 이 작품 속 게이코와 가즈히코와의 관계도 항상 즐겁고 설렐 수만은 없다. 과거를 묻는 게이코에게 가즈히코는 왜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을 일일이 전부 생각해내서 하나도 남김없이 말해야 하느냐고, 그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여서는 안되냐고 묻는다. 하지만 게이코는 지금 이 순간이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일도 다 알고 싶다고, 지금이라는 것은 경험과 기억 위에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진 거라고 말한다. 완전히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아온 두 남녀가 삼십대가 되어서 만났기 때문에 부딪힐 일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현실 속 우리의 연애처럼 말이다. 


마쓰이에 마사시가 포착해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슬픔과 기쁨과 아픔들이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담담하게 그려내는 일상 속에 숨겨진 미묘한 감정들을 세심하게 포착해 오감을 깨우는 어른의 연애를 보여준다. 서사를 완성시켜주는 것은 구름의 움직임과 물의 흐름, 무성한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흩날리는 눈, 그리고 푸른 하늘의 농도와 벌레 울음소리, 햇살의 강렬함이다. 덕분에 작가가 구축해낸 가상의 도시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극중 게이코가 가즈히코와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이 그가 모은 음을 듣고 있으면 정말로 눈앞에 그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였다. 해달 무리가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조개를 깨는 음,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언덕 위에 있는 교회 종의 음, 땅울림을 내면서 분화하는 아이슬란드의 화산음 등... 다양한 소리들이 눈을 감고 듣고 있으면 각각의 리얼한 광경이 냄새와 습도, 기온과 바람, 진동까지 수반하면서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다. 이는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에게도 고스란히 체감되는 묘사였다. 가을을 기다리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읽기 딱 좋은 작품이다. 짧은 분량임에도 긴 여운을 남겨주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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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자부심 - 상실감, 수치심 그리고 새로운 우파의 탄생
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이종민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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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미국인들이 물질 경제뿐만 아니라 물질만큼이나 중요한 '자부심 경제' 속에서도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부심과 수치심은 언제나 개인적인 감정처럼 느껴지지만 그 뿌리는 더 넓은 사회적 환경 속에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다양한 자부심의 기반을 발견했다. 지역적 자부심, 직업윤리에 대한 자부심, 아웃사이더로서의 자부심, 회복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한 공동체의 주요한 자부심의 원천인 고임금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p.28~29


이 책의 저자인 앨리 러셀 혹실드는 '감정노동'을 최초로 개념화한 '감정사회학'의 선구자이다. 국내에도 소개되었던 <감정노동>이란 책에서 그는 감정이라는 개인적인 행위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연구했었다. 이번에 그는 '자부심과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미국 정치를 뒤흔들었는지 탐구한다. 한 공동체의 주요한 자부심의 원천이 사라지고, 실제 문제에 대한 실질적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서 상실감과 수치심이 정치인들이 캐내려는 '광석'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실감과 수치심을 정치적 서사로 이용한 결과는 2020년 대선을 "도둑맞았다"는 주장으로 드러났다. 하나의 주장이 강렬한 전류처럼 미국 우파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나라를 둘로 갈라놓은 것이다


겉보기에 트럼프는 지지자들에게 자부심을 되찾아주고 있었다. 그는 대다수 미국인이 거짓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그들에게 제공했고, 그 거짓을 한 가지 진실과 결합했다. 바로 '잃어버린 자부심'이라는 진실이었다. 덕분에 그는 지지자들과 강하게 결속했고 심지어 하나가 됐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이 '도둑맞은 것'으로 바뀌면서 수치심도 차츰 비난으로 바뀌었다. 2019년 무렵 증오 범죄와 증오 발언이 급증했던 이유에 대해 대다수의 미국인이 "정치인들이 조장하거나 부추겼기 때문"이라며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이 이를 더욱 증폭시켰다고 답했다. 분노의 이면에 '정치를 움직인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 자부심과 수치심의 이야기 아래에 어떠한 보상도 애도도 받지 못한 끔찍한 상실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장면이 만들어졌고 그 장면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우연처럼 겹친 상실 속에서 수치심은 자부심의 역설 속으로, 마치 문화적 분쇄기에 고기를 집어넣듯 밀어 넣어졌다. 강한 자부심의 문화와 개인주의 윤리가 엄격히 지켜지는 사회에서 '성공하면 내 공, 실패해도 내 잘못'이라는 사고방식이 자리 잡으면 그 고통스러운 결과는 수치심일 수밖에 없다. 지역 사회의 몰락은 개인의 수치심으로 전이되고 이는 다른 형태의 수치심까지 끌어들이는 자석이 된다. 수치심은 가장 자주 겪는 사람에게도 때로는 당혹스럽게 느껴진다.            p.333


저자는 애팔래치아의 작은 도시에 사는 남성에게 초점을 맞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 지역은 미국에서 백인 비율이 가장 높고 두 번째로 가난한 선거구에 속했는데, 중도적 정치의 중심지에서 주민의 80퍼센트 이상이 트럼프를 지지하며 대표적인 보수 지역으로 변모한 곳이다. 저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대인 난민, 무슬림 이민자 출신 의사, 주지사, 시장, 사업가, 교사, 정원사, 예술가, 중범죄자, 마약 중독에서 회복 중인 사람들과도 직접 찾아가 대화를 나눈다. 위에서 아래까지, 좌에서 우까지 최대한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전 세계적인 우경화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감정적인 기반을 이해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공감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정이었다.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 대해 '문화적, 정치적 분열을 넘어서는 경청의 기술의 진수를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왜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었는지, 개인이 느끼는 상실감이 어떻게 '도둑맞았다'는 정치적 메시지로 전환되는지, 자부심과 수치심은 사회와 정치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념'이 아니라 '감정'에 집중한 것도 흥미로웠고, 수백 시간의 인터뷰와 7년에 걸친 심층 취재의 결과 답게 새롭게 부상한 우파의 도덕과 정치 심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책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선정한 ‘2024년 최고의 책’, 〈뉴욕타임스 북리뷰〉가 뽑은 ‘2024 올해의 책’에 이름을 올리리고 했는데, 그만큼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다. 우파 정치세력에 열광하는 것은 미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 경향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치적 양극화와 우경화 현상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이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전 세계에서 경제적 박탈감과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한 이들이 우파 정치세력에 열광하고 있는 요즘, 이념보다 빠르게 확산하는 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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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명아루 : 폐가 괴물 사건 - 제1회 셜록 홈즈상 대상 수상작 THE 미스터리
배연우 지음, 불키드 그림 / 비룡소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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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아루가 무섭지는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궁금했다.

"알지 못하니까 무서워해. 그리고 무언가를 신비롭다고,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 다르게 말하면, 무언가를 알게 되면 더는 신비하지도 무섭지도 않아져. 그런데 너는 지금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무서워서, 알려고 하지 않고 있어."             p.46


오컬트와 호러를 좋아하는 서하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하준이는 단짝 친구이다. 점심시간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운동장으로 뛰어나가면 서하는 교실에 남아 있는 친구들을 모아 불 꺼진 교실에서 괴담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오늘의 괴담은 학교 뒷산에 있는 폐가에 대한 거였다. 학교를 둘러싼 담장 너머에 큼직한 언덕이 있었는데, 그 중간에 방 두 칸은 겨우 있을까 싶은 크기의 작은 폐가가 있었다. 학교 담장과 나무 사이로 언뜻 보면 귀신이 튀어나올 듯 음침한 곳이었다. 바로 그 폐가에 인간이 아닌 뭔가가 살고 있다는 거였다. 근처 중학교를 다니는 한 언니가 용기를 내 폐가에 가 보기로 했고,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좀비도 귀신도 거미도 아닌 것 같은 이상한 괴물이었다는데, 폐가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최근에 학교 주변에 오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하가 말한 괴담을 비롯해 학교 연못의 물고기들이 다 죽는 일도 있었던 거다. 어느 날부턴가 학교 연못에서 심상치 않은 냄새가 나더니 물고기들이 죽어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후로는 연못에 파란 천이 덮여있는 상태인데, 이러다 연못을 아예 메워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참이다. 그러던 중 서하의 사물함에서 '인형'이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저주를 막아 주는 인형으로 서하가 부적까지 넣어 만든 거였다. 범인을 찾기 위해 하준이는 옆반의 아루를 찾아 간다. 아루는 뭐든지 잘하고 모난 데 없이 똑똑한 모범생이었는데, 학교에서 '탐정'이라 불리고 있었다. 과연 아루는 범인을 찾고, 서하의 저주 인형을 찾을 수 있을까. 




"귀신을 믿지는 않아."

그 말에 서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런 와중에도 하준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장 서하와 몇 년을 함께 한 자신도 귀신이나 서하가 말하는 이야기를 전부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귀신이 없다고 증명할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알아. 귀신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귀신이나 괴물의 짓이 아니라고 밝힐 수 있는 일은 밝히고 싶어."             p.67


비룡소의 어린이를 위한 추리소설 시리즈 ‘더 미스터리', 그 첫 번째 책이다. 제1회 셜록 홈즈상 수상작인 <탐정 명아루>와 제2회 스토리킹 본심작 <행운음원>이 함께 출간되었다. 두 작품 중에 만나보게 된 것은 오컬트와 본격 미스터리를 결합한 <탐정 명아루>이다. 이 작품은 “괴이한 일이 탐정의 논리로 해결되는, 미스터리 장르의 매력을 잘 살린 모범적인 작품.”이라는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받으며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이공계생인 작가는 일본 추리 소설가 아야츠지 유키토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는데, 본격 미스터리 붐을 꿈꾸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위한 본격 미스터리 작품도 언젠가 써주시길 고대한다. 


이 작품에는 항상 탐정 수첩을 들고 다니며 관찰하고, 교내에서 벌어진 몇몇 사건을 해결하며 '탐정'이라 불리는 명아루를 비롯해 사건을 의뢰했다가 그를 도와주게 되어 결국 '조수'가 되는 하준이, 그리고 호러 소설들과 무섭게 생긴 인형, 부적 같은 것들을 사물함에 넣어 두고 다니는 괴담 마니아 서하까지 어린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킬 등장 인물들이 등장한다. 학교 연못의 미스터리, 폐가의 괴물, 사라진 저주 인형... 등 수상 쩍은 사건들을 해결하는 과정 또한 흥미진진했다. 개인적으로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를 처음 접했던 것이 초등학생때 였는데, 당시 미스터리 소설들을 정말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탐정 명아루의 모험은 그 시절 추리 소설을 사랑했던 나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수수께끼 같은 사건과 오싹한 괴담, 불길한 징조들과 조각난 퍼즐을 맞추는 재미까지... 앞으로 시리즈로 이어져도 좋을 것 같다. 탐정과 조수가 콤비가 되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어린이들이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의 매력을 알게 된다면 더 좋을 것 같고 말이다. 게다가 초등학생을 위한 본격 추리 동화가 '더 미스터리'라는 시리즈로 계속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앞으로의 이야기들도 매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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