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흡혈귀전 : 흡혈귀 감별사의 탄생 조선 흡혈귀전 1
설흔 지음, 고상미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둑한 날에는 오싹한 이야기가 제격이다. 내가 이런 류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읽었던 시기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는데, 용돈만 생기면 동네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한 권씩 사곤 했다. 당시에 귀신이 등장하는 호러 물이나 미스터리로 가득한 추리 소설들을 주로 구매했었는데, 공포 소설은 집에 가져와서는 꼭 표지가 보이지 않게 뒤집어 놓곤 했다. 어린 마음에 그걸 보고 있으면 어쩐지 밤에 뭐라도 나타날 것 같아서 일부러 표지는 안 보려고 했던 건데, 그러면서도 무서운 이야기들은 주구장창 읽어 댔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무서워서 눈을 가리면서도 기어코 무서운 장면을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심리는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이런 책도 나오는 것일 테고 말이다.

 

 

세종 임금님은 고기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고기를 즐겨 먹었다. 보통 가마솥에 푹 삶은 수육, 소금으로 간을 한 구이, 매콤한 양념을 뿌려 구운 산적, 달짝지근한 맛이 나는 불고기로 마무리를 했는데, 고기반찬을 책임지는 수석 요리사는 이 순서를 '수구산불'로 줄여서 외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임금님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문서와 책에 파묻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목이 벌레에 물린 것처럼 따끔하더니, 참을 수 없는 배고픔이 느껴진 것이다. 배가 고파서 등이 아프고,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말이다. 새벽이라 고민을 하다 수석 요리사를 부르기 위해 문을 열었는데, 때마침 방문 앞에 붉은 기가 도는 고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걸 먹고 난 뒤로 이상한 증상이 시작된다.

 

 

임금의 입맛이 완전히 바뀌어 평소 먹던 '수구산불' 들이 전혀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를 탐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생고기를 먹지 않을 때는 무시무시한 배고픔의 증상이 찾아 왔다. 너무 배가 고파서 똑바로 앉기도 힘들 지경에, 이마에서 죽은 피처럼 검붉은 땀이 줄줄 흘렀을 정도로 말이다. 도대체 임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 이야기는 세종이라는 역사 속 인물과 흡혈귀 감별사라는 허구적 인물을 등장시켜 색다른 재미를 선하고 있다. 낯설고 기이한 흡혈귀의 정체만큼이나 독특한 '흡혈귀 감별사'라는 캐릭터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열두 살 소녀는 아버지가 대식국 출신이라 얼굴이 검고, 눈은 파랗다. 하지만 어머니가 조선 사람이고, 조선에서 나고 자라 우리말을 무척 잘한다. 게다가 외할아버지로부터 백정 일을 배워 고기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 자, 과연 이 소녀가 숨어 있는 흡혈귀를 찾아 내고, 임금을 구할 수 있을까? 

 

 

넷플릭스 <킹덤>에 K-좀비가 있다면, <조선 흡혈귀전>에는 K-흡혈귀가 있다! 이 책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흡혈귀를 물리치는 열두 살 흡혈귀 감별사 소녀가 등장하는 이야기로, 그 동안 역사 속 인물과 고전을 화소로 삼아 정갈하고도 성찰적인 소설을 써 온 설흔 작가의 역사 판타지 동화이다.

 

생각보다 꽤 오싹하게 만드는 삽화들이 수록되어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물론 매체의 발달로 좀비니, 흡혈귀니 하는 것들을 많이 접해본 탓에 요즘엔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읽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스무 고개 탐정 시리즈>의 고상미 작가가 그림을 맡아, 짙고 강렬한 연필 선 위에 피와 욕망을 상징하는 붉은색, 빛을 상징하는 노란색, 강조를 나타내는 파란색 등 절제된 몇 가지 색깔로 흡혈귀가 사는 조선 시대를 그려 내고 있다. 주체적이고 당당한 어린이 주인공, 흡혈귀 감별사의 탄생이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처, 비디오, 사이코 게임 킴스톤 2
안젤라 마슨즈 지음, 강동혁 옮김 / 품스토리 / 202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음... 대장, 잠 못 잔다고 투덜거린 거 죄송합니다."
"네가 진심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했으면, 넌 이미 짐 싸서 집으로 가고 있었을 거다."
케빈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갔다. 그는 괜찮은 형사였지만, 킴은 괜찮은 것 이상을 요구했다. 그녀는 팀원들을 더 나은 경찰관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으며 그들을 강하게 압박했다. 경찰 업무는 출근 도장을 찍으면서 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일자리만을 원하는 팀원이 있다면 맥도날드로 가서 하루 종일 햄버거를 만들면 될 일이었다.      p.76

 

경찰서 내에서 차갑고, 사회성이 떨어지며, 감정이 없는 인간으로 유명한 킴스톤 경위. 하지만 그를 대장이라 부르는 팀원들은 그녀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면모와 업무적으로 매우 유능한 경찰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사내 인사고과에서 킴에서 개선이 요구된 부분은 언제나 딱 하나였다.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기. 하지만 킴은 사교술이니 외교력 같은 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발명한 거라고 생각했고, 타인들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타고나지 못한 사람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쉽게 배울 수 있는 예절, 혹은 사교성을 전혀 갖추지 못했지만, 그녀는 지능이 높았고, 목적의식이 강했다. 킴스톤은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굳게 믿었으며, 정상 참작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저지른 짓이 있으면 대가도 치러야 하는 것이며, 오로지 그것을 위해 직진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대시를 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이 이렇게 냉소적이고 뾰족한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은 당연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신 병원에 있는 엄마, 어린 시절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갖고 있는 죽은 동생, 그리고 수차례 위탁가정을 전전해야 했던 기억 등 어두운 과거가 현재의 그녀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전편에 이어 두 번째 작품에서도 사건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수시로 킴스톤의 과거가 드러난다.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과거가 어떻게 현재를 만들었는지, 그녀가 운명에 맞서 싸워온 과정이 모자이크 퍼즐처럼 한 조각씩 맞춰진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중심이 되는 사건 플롯 자체도 흥미진진하지만, 킴스톤이라는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는 과정에서 압도적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19개국 번역 출간, 누적 판매 200만권 돌파라는 기록은 바로 제대로 된 걸크러쉬를 보여주는 킴스톤이라는 캐릭터에서 탄생한 것이니 말이다.

 

 

 

처음에 배리가 사랑하는 아내와 형을 살해하려 했다는 소식은 알렉스의 기대를 넘어선 것이었다. 살을 에는 바람을 맞으며 주차장 꼭대기에 서 있던 잠깐 동안, 알렉스는 배리야말로 그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느꼈다. 진정한 소시오패스는 도덕적 책임감을 결코 느끼지 못한다. 절대로 타고난 본성을 거부하고 죄책감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실험에는 딱 한 번의 성공만이 필요했다. 죄책감이라는 본능을 거부할 단 한 사람. 잠깐이지만, 배리는 그녀가 거둔 성공이었다.     p.230

 

<너를 죽일 수밖에 없었어>에서는 옛 보육원 부지의 유물 발굴사업을 배경으로 10년이 넘는 세월을 넘나드는 연쇄살인을 다루었었다. 이번 작품 <상처, 비디오, 사이코 게임>에서는 성범죄자의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타인의 심리를 조정하는 소시오패스가 등장한다. 유능하고, 매력적인 정신과 의사인 알렉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절대로 멈추지 않는, 무자비하면서 전혀 양심이 없는 인물이다. 킴은 명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직감적으로 알렉스에게 뭔가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 알렉스 역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킴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킴은 홀로 알렉스에 대해서 조사를 시작하고, 알렉스는 킴의 과거를 찾아 점점 그녀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킴은 알렉스에게 최고의 도전 대상이었고, 알렉스는 킴에게 막강한 적이었다. 최고의 걸크러쉬 형사 반장과 소시오패스 정신과 의사의 정면 대결이 숨가쁘게 펼쳐지며, 한시도 페이지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전작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반년 만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 출간되어 매우 반가운 마음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안젤라 마슨즈의 킴스톤 시리즈는 현재까지 총 13편이 출간되어 있다. 2015년 시리즈 첫 작품을 출간한 이래, 한 해에 두 편에서 세 편을 꾸준히 내고 있으니 작가가 얼마나 성실하게 작품을 써내고 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만큼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일 테고 말이다. 국내에 소개된 것은 'Silent Scream' (너를 죽일 수밖에 없었어), 'Evil Games' (상처, 비디오, 사이코 게임) 이렇게 두 작품이다. 재미있는 것은 번역본 두 작품 모두 원제와는 상관없는 제목을 붙였다는 건데, 앞으로 나올 작품들은 제목이 또 어떻게 붙여질 지 기대가 된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Lost Girls' 에서는 우리의 킴스톤이 또 어떤 일들과 마주하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국내에서도 부지런히 출간해주시길, 앞으로 읽을 수 있는 킴스톤 시리즈가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든든한 기분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 등을 번역한 역자가 오직 이 시리즈를 출간하기 위해 출판사를 차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는데, 두 작품을 읽고 보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리즈가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아서 계속 출간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웃게 하는 것들만 곁에 두고 싶다 - 오늘의 행복을 붙잡는 나만의 기억법
마담롤리나 지음 / 허밍버드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무엇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지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나를 다년간 지켜본 결과, 샤워하기 싫은 날 욕실에 크게 음악을 틀어 두면 흥이 솟아 저절로 씻게 된다거나, 제철에 따라 메뉴가 바뀌는 디저트 카페의 문을 여는 즉시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스스로를 잘 파악할수록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우울할 때, 실망했을 때, 외로울 때의 나를 위해 각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기분 전환의 매뉴얼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p.21

 

다음 날 아침에 마실 커피를 자기 전에 미리 내려 텀블러에 담아 두기, 죄책감 없는 탕진을 위해 매일 천 원씩 자동이체 되는 적금을 개설하기, 의욕이 사라질 어떤 날들에 대비해 초콜릿을 하나둘 모아 놓기...등등 누군가에게는 사소하고 별 것 아닌 일들이 힘이 되고, 기쁨이 되어 주는 순간이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것이 나를 기운 나게 해주는지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산미가 없는 다크한 로스팅의 원두로 갓 내린 커피 한 잔과 깊은 풍미의 그윽한 단맛을 내는 디저트 한 조각이면 세상 만사가 다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당장 내일 머리 아픈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걱정거리와 고민거리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책은 일러스트레이터 마담롤리나의 첫 번째 에세이이다. 워낙 여기저기서 마담롤리나의 그림들을 자주 보아와서 인지, 이번이 첫 번째 에세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사실 언젠가부터 그림 에세이가 유행처럼 출간되었고, 그림이 있다는 이유로 함께 수록된 짧은 글들에는 깊이도, 여운도, 사유도 없음에도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책들이 많았다. 주로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그런 책들의 주인공이었는데,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서 꼭 글도 잘 쓴다는 보장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책은 계속 나왔다. 그래서 마담롤리나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별다른 기대 없이 이 책을 펼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겉멋 없이 솔직하고, 진실하며 담백하고, 소소하지만 따스한 글들을 담고 있었다. 물론 글만큼이나 많이 수록된 그림들은 보너스이고 말이다.

 

 

"너는 그림에 재능이 없어"라는 친구의 말 한마디에 나는 너무나 간단히 무너졌다. 당시 내가 생각했던 재능의 이미지란 갈고닦기보다 타고나야만 하는 무언가였고, 작은 노력만으로도 특출난 결과를 내는 치트키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계속 글을 써 왔던 사람이 뒤늦게라도 작가가 되는 걸 볼 수 있었다. 10년 전, 흑역사라 일컫는 첫 앨범을 냈던 친구는 10년이 지난 지금 나름의 히트곡이 생겼다. 꾸준히 하는 사람이 결국에는 잘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를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재능'이란 단어에 겁먹지 않게 되었다. 이제 나에게 재능이란 꾸준함이다.      p.230

 

마담롤리나는 좋지 않은 일을 더 잘 기억하는 편인데다, 그런 상황을 반복해서 곱씹어 보는 버릇도 있었고, 울적할 때마다 쇼핑으로 감정을 해소하다 보니 불필요한 카드 빚도 생겨버렸고, 회사도, 아르바이트도 오래 못 다니고 그만두었으며, 그림에 재능이 없다는 폭언과 별로 유명하지 않으니 이런 대접도 참으라는 무례를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 숱한 과정들을 거쳐 가면서 그녀가 깨달았던 것은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웃는 순간을 모아 하루를 좋은 날로 바꿔 보자'는 것이었다.

 

 

거창한 목표보다는 만족스럽게 잘 보낸 하루들이 모여 만들어 지는 것이 인생이니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고, 스스로를 미소 짓게 만드는 확실한 일상의 행복들을 그려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림만큼이나 섬세한 글들이 담담하게 공감과 위로를 불러오는 책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그리다가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그냥 시간 낭비면 어쩌나, 이 시간에 돈이 될 만한 무언가를 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일이 생계와는 거리가 먼 사치처럼 여겨질 때가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깨닫는다. 이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꼭 붙드는 일이고, 이런 순간들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거라고. 비록 아무런 수확 없이 끝나더라도 그 시도의 과정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경험과 기대가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현실을 바꾸진 못해도 나의 하루는 바꿀 수 있는 일상의 소소한 다짐들이 이제부터의 나를 웃게 만들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채색 일상에 색을 입히는 마담롤리나의 일상 속 숨은 행복 찾기를 함께 해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판의 날의 거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71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알고 싶었다.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내 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엔지니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그가 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의 미로에서 나가는 길을 알기라도 하는 양. 이 순간 내 적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이 우세했는지 나는 모른다. 분노였는지 초조함이었는지 흥분이었는지 짜증이었는지, 아니면 실망이었는지 말이다. 마음속에서 무엇이 일어났든 간에 그는 그것을 숨기는 데 성공했다. 그의 얼굴은 다시 정중하고 친절한 표정을 띠었다.    p.87

 

1909년 9월 26일, 요슈 남작은 유명 궁정 배우인 오이겐 비쇼프 집에 친구들과 함께 방문을 한다. 바이올린을 챙겨 간 그는 친구들과 실내악 연주를 하고, 오이겐 비쇼프는 자신이 초대한 손님들에게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오싹할 수 있습니다. 아마 오늘 밤 늦도록 잠을 못 이룰 겁니다....'로 시작된 그 이야기는 수수께끼 같은 한 자살 사건이었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젊은 장교에게 화가인 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자살을 했다고 한다. 유서조차 없었기에 유족들은 납득이 가지 않았고, 형이 진상 조사에 나선다. 형은 동생이 살던 집으로 이사해, 동생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자살의 원인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고, 그는 결국 동생처럼 자살을 하고 만다. 그가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오이겐 비쇼프는 잠깐 자리를 비운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권총 자살을 한다. 갑작스러운 죽음 뒤 남겨진 가족들과 손님들은 요슈 남작을 비쇼프를 죽음으로 몰아간 인물로 지목한다. 그는 비쇼프의 아내와 과거 연인 사이로 그녀에게 아직 연정을 품고 있고, 비쇼프의 자살을 유도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명을 벗기 위해 요슈 남작을 비롯한 일행들은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가면서, 이러한 자살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연 요슈 남작은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이유로 벌어지는 연쇄 자살 사건들의 진실은 무엇일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내일 만 쉰 살이 되고,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은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쉽게 이른 나이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오랜 세월 동안 글쓰기를 피한 끝에 오늘 진실을 고백하고, 그날 밤 조반시모네 키기, 일명 카테반차에게 닥친 일을 회고록으로 남기려 한다. 대단히 유명한 건축가이자 화가인 그를 오늘날 사람들은 <심판의 날의 거장>이라고 부른다. 내가 나 자신과 모든 피조물이 용서받기를 바라듯 하느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p.204

 

레오 페루츠의 작품은 전부터 궁금했던 터라 <9시에서 9시 사이>가 나왔을 때부터 구매해서 읽어 보려고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스웨덴 기사>, <심판의 날의 거장>이 나오기까지 시작하지 못했었다. 아직도 책장 한 구석에서 읽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상태로 먼지가 쌓여 가고 있는데, 어쨌든 그래서 이번에 출간된 <심판의 날의 거장>을 처음으로 레오 페루츠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레오 페루츠는 '환상 문학의 거장'이라는 문구로 설명되는 작가인데, 여기서 환상문학이란 초자연적 가공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사건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을 말한다. 물론 기이한 일을 표현한다고 해서 모두 환상문학이라고 하지는 않고, 보통 ‘단절과 공포감’, ‘애매성과 의혹’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그러니 이런 장르의 작품들은 자연스레 미스터리와 공포를 유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마련이고, 그래서 가독성도 좋은 편이다.

 

대표적인 환상 문학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레오 페루츠와 프란츠 카프카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라는 점도 흥미롭다. 생전보다는 사후에 명성을 얻은 카프카에 비해 페루츠는 당대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고 한다. <심판의 날의 거장>은 페루츠의 전성기 대표작으로, 당시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출간된 지 거의 100년이 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타의 고전들에 비해서 굉장히 잘 읽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탈로 칼비노, 앨프리드 히치콕, 그레이엄 그린, 이언 플레밍 등 세계의 많은 거장들이 페루츠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현대의 장르 문학들에 견주어도 될 만큼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환상 문학으로서의 작품성도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서스펜스, 추리, 공포와 환상이 절묘하게 조합된 이 작품을 만나 보자. 능숙한 이야기꾼 페루츠의 솜씨에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원국의 어른답게 말합니다 - 품격 있는 삶을 위한 최소한의 말공부
강원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말을 잘하려면 할 말이 있어야 한다. 할 말을 준비하는 것, 말을 잘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하지만 할 말이 있다고 말을 잘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할 말이 있다고 말을 잘하는 건 아니다. 할 말이 많은 데도 그것을 표현하지 못해 버벅거리는 경우를 흔히 본다. 가장 큰 요인은 어휘력 부족이다. 어휘력이 빈약하면 말이 빈곤해진다. 가진 것과 가진 것을 보여주는 것은 별개다. 어휘력이 부족하면 가진 게 많아도 없어 보인다. 어떻게 하면 어휘력을 키울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독서를 권한다. 책을 많이 읽으면 어휘력이 늘어난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p.62

 

저자 강원국은 김우중 회장을 모시면서 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말이 절실했던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아래서 '말'을 듣고 쓰고 고치는 일을 해왔다. 2014년부터는 메모하고 기고하고 책을 쓰며 말로 먹고 살고 있다. 이 책은 KBS1 라디오 <강원국의 말 같은 말> 진행을 위해 집필했던 내용에 새로운 원고를 추가해 만들어 졌다. 전직 청와대 연설비서관 강원국의 말하기 특강은 '말이 되는 삶, 삶이 되는 말'에 관해 들려주는 73가지 말공부 수업을 담고 있다.

 

누구나 말을 하지만, 그렇게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 말을 배우려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어른이 된다고 해서 누구나 어른답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다.  말이란 나다움을 드러내는 도구이자 존중 받기 위한 가장 어른다운 무기인데, 그에 걸 맞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배워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말하기에 자신이 없었던 자신이 어떻게 청와대 연설비서관이 되었는지, 그리고 대기업에서 17년, 청와대에서 8년을 일하는 동안 자신만의 말과 생각을 만들었던 과정을 들려준다. 언제나 말이 어렵고 두렵기만 했던 젊은 날의 그가 수천 번의 강연을 진행해온 강사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은 말하기에 자신이 없는 수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말은 현실을 만들어낸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다. 말을 늘려서 발음하면 '마알'이 되는데, 마알은 마음의 알갱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말이 마음의 알갱이란 말이다. 말은 곧 자기 생각과 마음이다. 말이 바뀌면 생각과 마음이 바뀌고,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야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현실이 바뀐다. 모든 것은 말한 대로 된다.     p.178

 

링컨은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살아온 시간만큼의 경험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자는 얼굴보다 말이 더 그 사람의 인격에 가깝다고 믿는다며, 자신은 쉰 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이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자신만의 법칙으로 자신이 하는 말을 되돌아보고, 남의 말을 유심히 듣고, 얼버무리지 않으며, 같은 말이면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목적에 맞게 말하며, 후회할 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려준다. 이러한 노력들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점점 연륜을 드러내게 될 것임을 그는 믿고 있다.

 

한 방에 통하는 보고의 정석, 쓴소리가 약이 될 수 있는 방법,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 눈높이 말하기의 7법칙, 협업에 필요한 소통의 법칙, 코로나 시대의 소통법 등 저자의 경험담에서 비롯된 진심 어린 이야기들이 진짜 어른다움의 완성은 말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말은 재능이 아니라 기술이라고 한다. 타고난 말재주라는 게 없다는 것은, 누구나 공부하고 연습하면 표현력과 수사법을 키울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법이 궁금하다면, 대화를 리드하고 말실수를 줄이고 싶다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말하기를 배우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