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자 신데렐라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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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란 있을 수가 없어. 왜냐하면 아름다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거든.... 또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하지. 어떤 사람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눈 내리는 숲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람은 많고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도 저마다 달라서 다 이야기하기도 힘드네.     p.9~10

 

옛날 옛적에 신데렐라라는 재투성이 소녀가 살았다. 자신의 친딸들만 예뻐하는 새어머니 덕분에 신데렐라는 하루 종일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빨래를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왕의 아들인 왕자가 대규모 무도회를 연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초대장을 받은 신데렐라의 두 언니는 갖은 치장을 하며 무도회를 고대했다. 언니들은 아름다운 드레스 차림으로 무도회장으로 떠났고, 초대받지 못한 신데렐라는 불가에 앉아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리고 잠시 후 대모 요정이 나타나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호박으로 마차를 만들고, 생쥐를 말로 바꾸고, 신데렐라가 입을 아름다운 파티 드레스를 만들어 준다. 신데렐라는 파티에 참석해 왕자와 멋진 춤을 추고, 무도회장을 빠져나오다 구두 한 짝을 잃어 버리고 만다.

 

왕자는 구두 한 짝을 놓고 간 손님을 찾기 위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신데렐라의 집까지 오게 된다. 새어머니는 자신의 딸들에게 구두가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어 준다. 자,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와 같다. 달라지는 것은 바로 다음 순간부터이다.

 

 

신데렐라는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이 그 전쟁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수도 있게 되었어. 신데렐라는 대모 요정은 아니지만 마법 능력이 없어도 해방자가 될 수 있었어. 해방자란 다른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는 길을 찾도록 돕는 사람이야.    p.39~42

 

갓 구운 케이크와 차를 들고 응접실에 들어오던 신데렐라는 왕자를 보게 되고, 문득 모든 게 너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한다. 부엌에만 있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부터 시작해 파티에 초대받지 못하는 것까지 모두 다 말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왕자에게 말한다.

 

"그거 제 신발이에요."

 

왕자가 건네준 구두는 신데렐라의 발에 꼭 맞았고, 신네델라는 주머니에서 다른 유리 구두 한 짝을 꺼낸다. 이제 신데렐라는 왕자의 신붓감이 되어 신분 상승을 하게 되고,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다. 신데렐라와 왕자에게 각자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리베카 솔닛의 첫 픽션이자 그림책이다. '신데델라'라는 동화를 비틀어 기존의 가부장적 서사에서 벗어나 '해방자'라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 것이다. 시작은 중고책방에서 파는 작은 그림 한 장이었다. 파본이 된 동화책에서 잘라 낸 책장 한 장에는 신데렐라를 맨발에 파란 누더기 드레스를 입은 활달한 소녀로 그리고 있었다. 리베카 솔닛은 그림을 뒤집어 신데렐라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읽으면서, 이 이야기가 단순히 왕자와 결혼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변신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쓰인 신데렐라 이야기는 ‘그 후로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아닌,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새로운 신데렐라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실루엣으로 표현되는 아서 래컴의 아름다운 일러스트레이션이 더 근사한 신데렐라를 탄생시키고 있다. 아서 래컴은 수많은 고전 동화에 그림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로 1919년작 신데렐라 이야기에 삽화를 그렸다. 리베카 솔닛의 '신데델라'는 원작의 오리지널 실루엣 일러스트를 재배치해서 이야기가 지닌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있다. 리베카 솔닛이 들려주는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동화 그 너머의 세계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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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는 괴물들 - 드라큘라, 앨리스, 슈퍼맨과 그 밖의 문학 친구들
알베르토 망겔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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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을 체계화하고, 규칙적인 정복 활동의 일환으로 삼고, 애인의 이름을 '할 일 목록'에 넣고 체크 표시를 하기. 애욕을 죽이는 데에는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돈 후안은 연인이라기보다는 유혹자이고, 유혹자라기보다는 수집가이며, 수집가라기보다는 저격수에 가깝다. 돈 후안과 일견 유사해 보이는 다른 바람둥이 인물들은 명확한 목적에 따라 애정 행각을 벌인다.... 그러나 돈 후안은 다르다. 그의 행각에는 동기가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다.     p.86

 

이 책은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장으로 재직했고, 작가이자 번역가, 편집자, 국제펜클럽 회원이자 '책의 수호자' '도서관의 돈 후안' 등으로 불리며 명실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독서가이자 장서가인 알베르토 망겔의 신작이다. 총 37편의 짧은 에세이로 구성된 이 책은 동화와 코믹북, 신화, 전설, 고전을 망라하는 텍스트들에서 길어 올린 문학 작품 속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망겔은 수년 전 신문 칼럼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들에 대해 다뤄보기로 했다. 그는 이 수많은 등장인물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문학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이다.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그 유명한 대사, '네가 나를 믿는다면, 나도 널 믿을게' 처럼 말이다. 우리가 그 등장인물들의 존재를 믿고 나면, 그들 또한 우리를 믿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나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작품 속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들이 꽤 등장한다는 점이다. 햄릿이 아니라 거투르드를, 홀든 콜필드가 아닌 피비를, 돈키호테가 아닌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를, 보바리 부인이 아닌 보바리 씨를 다루는 식이다. 주인공에 비해 평범하고, 매력이 없고, 그다지 공감을 받지 못하는 인물들처럼 보이는 이들 안에서 망겔은 어떤 이야기를 발견했을까. 그리고 망겔은 왜 이 캐릭터들을 ‘괴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독서가인 망겔이 추억하는 신화와 전설, 문학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상상의 친구들 속에서 그 비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누구에게나 잊지 못하는 캐릭터들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만의 상상 속 친구들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동화는 우리 세상에서 암울하고 공포스러운 많은 부분들을 특유의 은근한 방식으로 설명해준다. 회의주의자인 우리는 동화에 거짓, 가짜 희망, 공상 같은 의미를 부여해왔지만, 백 년간의 잠으로 저주를 풀 수 있으리라거나, 이빨을 드러낸 포악한 짐승이 기대감을 안고서 우리 할머니 침대에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우리가 좀처럼 잊지 못하는 까닭은 불신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일 것이다.     p.294

 

그 누구도 모든 책을 읽을 수 없고 그건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망겔의 말처럼, 모든 서재는 일종의 자서전일 수밖에 없다. 어떤 책을 읽느냐, 또는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느냐는 독서 목록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성격, 습관 등을 파악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각각의 서재를 이루고 있는, 내가 읽었던 책들과 앞으로 읽을 책들의 목록이야말로 한 사람이 살아온 역사이자, 세계이며, 구성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가끔 내 서재를 둘러보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고, 그때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며, 당시의 날씨며 풍경들이 고스란히 함께 떠오르곤 한다. 마치 시간이 멈춰지기라도 한 것처럼, 각각의 책 속에는 책을 읽었을 당시의 내 시간이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다.

 

망겔은 십대 후반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났고, 시력을 잃어가던 그에게 4년 동안 책을 읽어주었던 걸로도 유명하다. 말년의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었던 서점 소년이 어느 덧 노년이 되었다. 그가 긴 시간 동안 자신과 함께해온 가상의 친구들을 추억하면서 써 내려간 이 책은 문학을 재료로 삼아 쓰는 자서전이자, 문학의 가치에 바치는 찬사이기도 하다. 표지를 비롯해 각 장에는 망겔이 가상의 친구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 직접 그린 캐릭터 일러스트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특별히 한국어판에는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메시지와 서명이 함께 실려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

 

때로 잘 만들어진 허구적 인물들이 진짜 육신을 지닌 우리 친구들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 책을 꼭 만나봐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고전 문학 속 캐릭터들이 텍스트의 세계를 초월해 우리 삶을 인도해줄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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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메이드 과일 샌드위치 - 상큼하고 달달한 과일 한가득!
나가타 유이 지음, 황국영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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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과일 샌드위치, 일명 후르츠 산도가 국내에도 유행이 된 지 꽤 되었다. 빵과 크림, 그리고 제철 과일의 심플한 조합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그 풍미가 확연하게 달라진다.

 

SNS에서 '후르츠 산도'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보기만 해도 너무 예쁜 과일의 단면과 크림의 조합이다. 맛도 있지만, 색감도, 모양도 너무 근사한 디저트인 것이다. 그래서 국내의 카페에서도 후르츠 산도를 메뉴로 선보이고 있는 곳이 꽤 있다.

 

 

이번에 만난 책은 르 꼬르동 블루 출신의 메뉴 개발자이자 샌드위치와 빵이 있는 식탁을 꾸준히 연구하고 소개해 온 전문 푸드 코디네이터 나가타 유이 과일과 빵, 최상의 조합을 보여주는 레시피 책이다.

 

샌드위치로 활용할 수 있는 과일의 종류부터, 다양한 넛츠의 종류, 과일 자르는 법, 과일을 이용해 잼과 콩포트를 만드는 법, 과일과 어울리는 기본 크림 만드는 방법 등 최상의 조합을 찾기 위한 기본부터 차근차근 설명이 되어 있다.

 

 

본격적으로 과일 샌드위치 레시피로 들어가면 딸기, 멜론, 복숭아, 과일 믹스, 제철 과일과 넛츠 등 다양한 재료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들이 수록되어 있다. 무려 100가지에 달하는 종류를 만나볼 수 있으니, 신선한 과일과 빵을 조합해 샌드위치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면,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다.

 

 

후르츠산도는 심플한 재료에 비해 단면이 깔끔하고 예쁘게 나오는 것이 관건이라, 이 책의 레시피대로 사진을 참고해 과일을 배열해보면 완성했을 때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수록된 레시피 중에서 샤인머스캣을 통째로 활용한 샌드위치를 해보려고 한다. 좋아하는 샤인머스캣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고, 마스카르포네와 생크림만을 곁들여 심플하게 조합할 수 있는 레시피라서 누구나 쉽게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후르츠산도 레시피 외에도 바게트, 크루아상, 깜빠뉴, 호밀빵 등 다양한 재료와 어우러지는 과일과의 조합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과일이 조연으로 등장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샌드위치들과 빵에 어울리는 과일을 사용한 요리들의 레시피도 수록되어 있다.

 

후르츠산도가 사진 찍기에도 예쁘고, 맛도 근사하지만, 사실 카페에서 먹기에는 다소 비싼 감이 있다. 양에 비해 배가 부른 메뉴는 아니니 말이다. 이번 기회에 이 책을 통해서 다양한 레시피를 배우고, 직접 홈메이드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보다 재료가 간단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제철 과일을 사용하기 때문에 건강에도 좋다. 홈카페에 관심이 있다면, 과일과 빵을 좋아한다면, 더욱 활용도가 높은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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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 모멸에 품위로 응수하는 책읽기
곽아람 지음, 우지현 그림 / 이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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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삶이 주는 상처에 대한 면역력이 약하다"는 문장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므로. '혼자 잘 노는 사람'이라는 것이 나의 무기 중 하나라고 늘 생각해왔다. 회사 연수차 1년간 뉴욕에서 홀로 생활했던 서른여덟, 아홉 살 무렵 특히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모든 일을 혼자 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책벌레인 사람은 '혼자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 책읽기야말로 혼자 놀기의 '끝판왕'이기 때문에.     p.182

 

곽아람 작가는 책에 대한 책, 독서 에세이를 여러 권 썼다. 청춘의 독서를 이야기했고, 절판 아동 도서 수집기로 유년의 독서를 돌아봤고, 아메리카 문학 기행도 있었다.  첫 책을 썼을 때 6년차 직장인이었던 그녀는 이제 19년차 직장인으로, <조선일보> 최초의 여성 출판팀장이 되었다.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여러 권의 책을 낸 작가로서나 사회적으로 성공했음에도 자신은 야망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야망 따위를 갖지 않고 초연해지고, 직장에서 아무런 욕심도 갖지 않으며, 일터에서의 자아와 퇴근 후의 자아를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욕심과 질투로 마음에 옹이가 지는 게 싫었던,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밑바닥까지 추해지지 않고, 최대한 우아함과 품위를 유지하고 싶었던', 그러한 생각의 배경에는 어릴 적 읽은 책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영향이 컸다.

 

이 책은 작가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부터 최근에 나온 책까지, 20권의 책을 통해 마음을 이야기하는 독서일기이다. <소공녀>의 세라, <빙점>의 요코, <작은 아씨들>의 조, <유리가면>의 마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 <우아한 연인>의 케이트,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의 마플 양에 이르기까지.. 스무 권의 책 속 스무 명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문학 작품 속 인물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비커밍>의 미셸 오바마, <배움의 발견>의 타라 웨스트오버 등 여성 작가들도 만날 수 있다. '중년이라 하기엔 미숙하고 청춘이라기엔 무거운 나이, 40대의 책읽기'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가 되었다.

 

 

 

독서에는 여러 목적이 있겠지만 어린 날 책읽기의 가장 큰 효용이자 목적은 바로 이것이라 믿는다. 어린아이의 여린 마음을 둘러싸는 보호막이 되는 것. 그 막은 더 많은 책을 읽을수록 더욱 유연하면서도 튼튼해진다. 터지지 않는 비눗방울 같은 형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훗날 어른이 되어 금력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하는 세속적인 가치들이 마음을 어지럽힐 때 흔들림 없는 성채이자 단단한 방패가 되어준다.      p.191

 

<소공녀>의 세라는 한 순간에 '특별 학생'이었다가 학교의 하녀로 전락한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개발하던 아버지가 파산 후 세상을 쓰자, 공주 같은 삶을 살던 세라는 쥐가 우글거리는 다락방으로 쫓겨나 학교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세라는 춥고 어두운 다락방에 살면서 갖은 모욕을 받으면서도 견뎌낸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로 쌓아온 교양이 가장 힘든 순간에조차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하는 무기가 되어준 것이다. 갖은 역경과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고결한 품성을 지닌 '공주'라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온실 속의 화초'에서 벗어나 굴욕과 모욕과 억울함과 부당함의 순간들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마음속으로 세라를 떠올리며 버텨냈다고 말한다. 힘겨운 일이 생기면 고통을 겪고 있는 책 속 누군가를 생각하며 위로를 받았던 소녀의 마음이 성인이 되어서도 고스란히 이어진 것이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던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릴 때 읽은 책들은 자아의 일부분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작가는 <빙점>을 읽으며 비밀을 갖는다는 건 어른이 된 증거라고 여기게 되었고, <유리가면>을 읽으며 재능과 노력에 대해, 배경과 실력에 대해 고심했다. <빨강 머리 앤>을 다시 읽으며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나를 좋아해주었던 너그러운 친구들을 떠올려 본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을 통해 '일하는 여자'로서의 공감을 느끼기도 하고, 마흔 즈음이 되어서야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폭풍의 언덕>을 다시 읽으면서, 10대 때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열정과 광기 어린 사랑에 책장을 넘기는 손끝이 달아오르기도 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 분명 읽었던 책인데, 이 책이 이런 이야기였던가 싶었던 순간은 독서를 특별한 체험으로 만들어주곤 하니 말이다. 어린아이의 여린 마음을 둘러싸는 보호막이 되어주는 독서부터, 악의보다는 선의를 기억하는 인간으로 자라난 마흔 너머의 독서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돌아보는 시간은 우리가 이미 갖고 있었던 태도와 잊고 있었던 품위를 깨워준다. '모멸에 품위로 응수하는 책읽기'가 궁금하다면, 사회적인 성공보다 나답게 사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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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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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었고 책임감을 가지고 써야 하는 글도 있다고 생각했다. 두렵고 외롭고 허탈할 때가 많았지만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기록으로 남기려고 애썼다. 하지만 적의는 호의보다 훨씬 힘이 셌다. 내가 하지 않은 말들이 따옴표 안에 들어가 인터뷰 기사에 실렸고, 내 소설에 있지도 않은 문장과 에피소드가 인터넷 리뷰에 올라왔다. 결국 내가 졌다. 이용당한다는 생각, 절대 가지지 않으려던 그 마음이 드는 순간, 내가 망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분홍신을 신은 발은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내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신발을 벗는 것이었다.      - '오기' 중에서, p.57~58

 

나는 아버지가 가출했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는다. 올해 나이 일흔둘, 치매 등 정신 질환도 없고, 정년까지 근무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결근한 적 없었던 아버지이다.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삼남매가 한자리에 모이지만, 딱히 아버지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다. '내가 살면 얼마다 더 살겠니. 이제라도 내 인생 살고 싶다. 나를 찾지 마라'고 쪽지를 남겨둔 아버지는 저금한 돈도 일부 찾아 나갔다. 이제 엄마 혼자 남겨진 집에는 각종 공과금 수납이며 돈 관리며, 평생 아버지가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도맡아 온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할 사람이 없다. 엄마는 그 동안 딱 살림에 필요한 금액만 생활비로 받아 썼을 뿐 다른 건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버지의 부재에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나는 간간히 오는 카드 문자로 아버지가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카드는 막내딸인 자신이 아버지에게 주었던 것으로 다른 가족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이기도 했다. 카드의 내역을 보며 나는 아버지도 가족을 떠나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쓰기 시작한 글이라고 한다. 각자의 생활에 바빠 자주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이 장례식으로 모두 모였는데, 정작 그 상황을 만든 아버지가 안 계신 상황이 기묘하기도, 괴롭기도 한 것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한다. 조남주 작가의 신작 소설집에는 10대부터 80대에 걸친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다양한 나이대의 여성들이 겪는 삶의 경험을 다시 읽고 다르게 읽는 확대된 여성 서사는 여러 시간대에 속한 ‘김지영들’이 연결되며 존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지영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함께 만나볼 수 있는 소설집이기도 하다.

 

 

"그런 말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평생 들었어."
평생 들어도 무뎌지지 않는 말이 있다. 껍데기만 남겨두고 몸 안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조그맣고 부드럽던 지혜가 그때의 나만큼 자라 거칠게 묻는다. 나한테 왜 그랬어? 대답할 수 없어, 지혜야. 대답하면 나는 껍데기까지 무너져 버릴 테니까. 네 질문과 내 대답은 부메랑이 되어 너에게 돌아갈 테니까.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 '오로라의 밤' 중에서, p.201~201

 

이 책에는 작가가 2010년에 쓰기 시작했던 작품부터 코로나로 일상이 무너졌던 2020년 여름에 쓴 최신작까지 총 여덟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공감이 되는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특히 노년의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두 작품, <오로라의 밤>과 <매화나무 아래>를 인상적으로 읽었다. 여든 살의 '나'는 임종을 앞둔 치매 환자인 큰언니를 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남편도 보냈고, 아들도 먼저 보내본 나는 곧 큰언니도 먼저 보낼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게 의미 있는 것인지,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하루하루 죽을 날을 향해 걸어가고만 있는 지금의 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한다.

 

쉰일곱의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인 '나'는 10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한 남편 대신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손자 양육을 거절한 탓에 워킹맘인 딸과 갈등 중이지만, 오랜 버킷 리스트를 실천하기 위해 캐나다로 오로라를 보러 떠난다. 아직 노년의 삶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이상하게 공감되고, 이해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의 삶은 우리의 미래 모습, 혹은 우리 어머니 세대 여성들의 모습일 것이다. 무엇보다 더 이상 젊지 않은 이들 여성들이 연대나 공감을 통해 성숙해지고,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점이 뭉클했다. '사는 일에 별다른 에너지를 쓰지 않으며, 가사 노동에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으며, 인정과 이해를 구걸하지 않으며, 물 흐르듯 나이 먹을 수(p.232)' 있다면,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해 본 세상 모든 여성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작품에 수록된 많은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이자,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그리고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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