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메론 프로젝트 -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29개의 이야기
빅터 라발 외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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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코를 훌쩍였다. "우리 같은 여자들조차 우리 같은 여자들을 무서워하지."
나는 마스크를 내렸다. 마치 그것이 정말로 해야 할 말을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여전히 마땅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전생을 믿어?"
"당신이 내게 처음 물어본 말이네요."
"엘리베이터에서 널 처음 봤을 때, 난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걸 알았어. 알아본 거지. 가족을 만난 것 같았어."     - 빅터 라발, '알아보다' 중에서, p.29

 

뉴욕에서 좋은 아파트를 구하기란 쉽지 않지만, 나는 6층짜리 공동주택에 있는 괜찮은 원룸을 찾아냈다. 그리고 2019년 12월에 이사를 했는데, 이후 바이러스가 세계를 덮쳤고 4개월 반 만에 북적이던 건물은 텅 비어 버렸다. 그곳은 감염 취약 지구였기에, 일부는 별장으로 떠났고, 일부는 도심 외곽에 있는 부모님과 지내러 갔고, 늙고 가난한 이들은 병원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 즈음 4층에 사는 한 여자, 필라를 만났다. 이사 온 달에 마흔이 된 나보다 스무 살쯤은 더 많아 보이는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전생을 믿나요?" 낯을 가리는 성격의 나는 그 질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그렇게 그녀와 헤어진 채 6층으로 올라온다.

 

도시의 봉쇄조치에도 부모님은 집으로 오라고 하지 않았고, 딱히 갈 데가 없었던 나는 그렇게 홀로 지내는 일상에 익숙해진다. 재택 근무에 익숙해지고,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마스크를 한 채로 생사 여부를 확인하러 들르는 건물 관리인과 가끔 슈퍼마켓에 같이 가는 필라 밖에 없었다. 봉쇄는 3개월째에 접어들었고,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남겨진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여전히 팬데믹 시대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전염병의 시대를 견뎌야 하는 우리에게 소설가 29명이 써 내려간 이야기는 어쩐지 뭉클하다. 고립된 시간과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에게 지구 반대편에서도 누군가 우리처럼 두려워하고 있으며,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때 새벽의 첫 햇살과 정오의 현기증 나는 햇빛 사이의 특정할 수 없는 어떤 순간, 시간이 더 이상 의미를 지니기를 멈추었다. 팡파르도, 어떤 소리도, 이례적인 무언가를 알리기 위한 시끄러운 소음도 없었다. 당신은 어쩌면 시계가 마비되고 달력이 뒤죽박죽이 되고 밤낮이 뒤섞이고 하늘이 회색으로 물드는 것 따위를 상상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의미가 제거된 시간은 집단적인 사건이었지만, 그럼에도 절대적으로 사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무기력과 무관심, 이상하고 심각한 일종의 허탈감 말고는 아무것도 촉발하지 않았다.      - 줄리언 푸크스, '죽음의 시간, 시간의 죽음' 중에서, p.301

 

유럽에서 흑사병이 번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었던 14세기, 이탈리아의 문호 조반니 보카치오는 특별한 소설로 동시대 사람들에게 눈물과 웃음을 선사했다. 바로, 피렌체 근교의 저택에 피난해 있던 사람들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 소설 형식의 《데카메론》이다. 《뉴욕타임스》의 편집자들은 700여 년 전 《데카메론》이 공포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처럼,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집필한 단편소설들을 한데 모으는 '데카메론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 앤솔로지는 2020년 7월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29편의 단편들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으로, 세계 각지의 작가들이 팬데믹으로 고립된 시간과 제한된 장소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한 불안과 공포, 고통과 슬픔, 그리고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 빅터 라발, 리즈 무어, 레일라 슬리마니, 데이비드 미첼 등 작가 29명이 풀어내는 짧은 이야기들이 두려움과 고통을 이겨내는 문학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격리 중에 쓰인 신작 단편소설들을 모아 '우리 시대의 <데카메론>'을 만들어보자는 근사한 취지에서 출발한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를 안겨준다. '최고의 소설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리 데려갈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니 말이다. 지구촌 곳곳의 상황에 비해서 국내의 방역 수준은 안전한 편이었지만, 연일 신규 확진자 수가 최다 기록경신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요즘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러한 상황도 모두 끝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우리는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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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10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맥락으로 불안한 사람들 좋은 것 같아요 :-)
글 너무 잘 읽고 갑니다~
 
십 년 가게 5 - 한가할 때도 있습니다 십 년 가게 5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사다케 미호 그림,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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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시, 왜 그러니? 너답지 않구나."
"그, 그게... 아니에요."
"안 되지. 손님의 물건을 탐내면 규칙 위반이야."
"알고 있습니다."
카라시는 힘없이 대답하면서도 피냐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피노는 카라시의 마음을 이해했다. 뭔가 갖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안다.     p.86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 시리즈의 히로시마 레이코가 시간의 마법을 소재로 그려낸 판타지 동화 <십 년 가게>가 어느 새 다섯 번째 이야기로 찾아왔다. 이번 작품의 부제는 '한가할 때도 있습니다'인데, 손님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계약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 십 년 가게가 한가해졌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마스터가 '손님이 와도 도통 물건을 맡기지 않고, 마법을 쓸 기회가 없어 실력이 녹슬 것 같다고 걱정을 하겠는가. 하지만, 십 년 가게가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할 리가 없다. 마법사와 고양이 카라시는 십 년 가게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낼까?

 

 

'십 년 가게'는 아끼는 물건이라 버릴 수 없는, 추억이 담긴 거라 소중하게 보관하고 싶은 그런 물건들을 손님의 마음과 함께 보관해준다. 마법으로 십 년간 보관되는 동안 그 물건은 처음 맡겼던 그 상태 그대로 보존된다. 단 마법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고, 이 가게는 대가로 손님의 시간을 받는다. 내가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이 보관되는 동안 절대 낡거나 상하지 않는다면, 그 대가로 나의 수명을 일 년 줘도 괜찮은 걸까?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은 이런 계약 조건을 듣고는 망설이지만, 대부분 자신의 수명을 지불하고 물건을 맡긴다.

 

 

"카라시, 포 님을 존경합니다."
"나도 그래. 그나저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포 님이 일부러 감기에 걸렸단 말, 트루 님에게는 절대 하면 안 된다?"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비밀이랍니다."
쉿! 카라시가 입 바로 앞에 발가락을 번쩍 세웠다.     p.134

 

이 시리즈에는 매 작품마다 새로운 마법사가 등장해왔다. 1권에서는 마법사 트루, 2권에서는 색깔을 만드는 마법사인 텐과 카멜레온 팔레트, 3권에서는 날씨를 바꾸는 마법사 비비, 그리고 4권에서는 봉인 가게의 포가 등장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은행 가게의 기라트 씨이다. 밤하늘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에 은화처럼 번쩍이는 은발을 지닌, 위엄이 넘치고 빈틈없는 성격으로 사실 마법 골목에서 가장 무섭게 생긴 마법사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 표지에는 새로운 마법사가 아니라 '장화 신은 고양이' 캐릭터가 있는데, 이 고양이가 누구인지는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번 작품에는 7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꽃병에 살고 있는 유령 이야기, 말하는 해골을 만난 겁쟁이 소년, 할머니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싶은 아이, 카라시가 반해버린 인형에 얽힌 사연, 그리고 나쁜 마음으로 물건을 맡기려 한 심술궂은 소녀의 이야기와 어떤 청년의 감기가 든 병을 사간 마법사의 이야기까지 흥미로운 사연들이 가득하다.

 

이 시리즈는 어른이 읽기에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랑스러운 책이고, 전천당 시리즈를 좋아했던 아이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누구나 각자의 이유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물건들이 있을 테니, 시간의 마법 대상이 되는 스토리들이 공감하기 쉬운 사연들이기도 하고 말이다. 히로시마 레이코가 들려주는 시간의 마법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꼭 시리즈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읽는 데 무리가 없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책부터 골라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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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계단 스토리콜렉터 93
딘 쿤츠 지음, 유소영 옮김 / 북로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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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누군지 알아요. 금발이 아니라 검은 머리, 파란 눈이 아니라 검은 눈이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군요."
"난 아무도 아니에요."
세라는 그녀가 한때 촉망받는 FBI 요원이었지만 이제 FBI 수배 명단 꼭대기에 올라가 있고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그녀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1면 제목을 가리켰다. "뉴스에는 진실이 없군요, 그렇죠? 당신에 대해서도, 다른 모든 것들도. 우리는 거짓말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어요."
"항상 진실은 있어요, 세라. 기만의 바다 아래 기다리고 있을 뿐."    p.47

 

딘 쿤츠의 '제인 호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에서 FBI 요원 제인 호크는 해병 대령인 닉과 결혼 6년차 부부였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는 메시지만 남긴 채 남편이 갑작스럽게 자살을 감행했고, 제인은 미심쩍은 죽음의 진실을 직접 밝히기로 한다. FBI 휴직 후 자살 위험군의 일반적인 특징에 전혀 들어맞지 않은 인물들이 갑작스럽게 자살한 건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우울증 병력이 없고 감정이나 경제 문제도 전혀 없는, 성공하고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들의 자살 사례가 최근 들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배후에 나노테크놀로지로 세상을 통제하려 하는 엘리트 소시오패스 집단이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그들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죽인다는 믿기 힘든 생각으로, 컴퓨터가 도출해 낸 위험인물을 매년 8천4백명 제거하면 모두가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완벽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비뚤어진 정치적 신념에 맞춰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그들 권력 집단에 맞서 스물 일곱의 여성 홀로 고군분투하는 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메인 플롯이다. 하지만 카메라가 사방에 있고, 드론, GPS로 위치를 발신하는 차량도 있으며, 각종 권력층의 손길이 어디든 손을 뻗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 혼자 뭘 할 수 있을까. 제인은 현재 미국 내 모든 수사기관의 긴급 수배자 명단에 올라가 있고, 언론에 얼굴도 보도된 상태라 늘 모습은 완전히 바꾸고 다녀야 했다. 그녀가 이 일에 목숨을 건 이유는 단순히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다. 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의 다섯 살짜리 아들 트래비스까지 살해 협박을 받은 상태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두고 홀로 움직여야 했다. 최고의 여성 FBI 요원에서 일급 수배자가 된 제인은 과연 인류의 뇌를 통제하려는 소시오패스 집단에 맞서 아들을 지켜내고, 남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빈은 견고하고 영원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실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나무 그루터기에서 일어서면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물 빠진 청바지 색 같은 사막의 하늘, 깃털처럼 잎을 드리운 여왕야자나무, 곧 저 멀리 산맥까지 꽃이 피어날 광대하고 평평한 사막. 그 모든 것은 일상적이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놀랍고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며, 세상 모든 공간은 실체가 주어진 환상적인 꿈이다. 그 꿈에서 깨어나서 죽음 속에서, 나노 임플란트 노예의 생활 속에서 눈을 뜨게 될 수도 있다니.      p.410

 

이 시리즈를 환상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제인 호크라는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이다. '화장도 하지 않고 립스틱조차 바르지 않았지만 화장이 필요 없어 보이는 얼굴'이라고 설명이 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뛰어난 액션, 영리한 두뇌와 직관, 그리고 어떤 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베짱과 추진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덕분에 사상 최악의 악당보다 언제나 두뇌 회전이 빨라 한 발 앞서갈 수 있었지만, 너무도 대규모의 조직과 홀로 맞서 싸워야 했기에 매 장면마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서스펜스를 만들어 낸다. 특히나 '자유의지와 불굴의 용기만 있으면 자연법칙 안에서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 그녀를 더욱 매력적인 캐릭터로 완성시켜주는데, 문제는 그녀가 마주해야 하는 적들이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수수께끼 같은 어둠'과도 같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에서 드디어 베일에 감싸 있던 압도적인 빌런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안전하다고 믿었던 아들의 신변마저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다음 이야기에서 마주하게 될 끔찍한 진실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사실 <사일런트 코너>를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제인 호크의 여정이 매 작품마다 새로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시리즈물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 시리즈는 독특하게도 이 무시무시한 집단과의 대결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물론 새로운 에피소드가 추가되고, 제인 호크가 마주하게 되는 인물들도 계속 달라지지만, '나노테크놀로지로 인류의 뇌를 통제하려는 권력 집단의 실체는 여전히 명확하게 보여지지 않는다. 매 작품마다 오백 여 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라 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악당의 뒤를 캐도 캐도 계속 뭔가 더 나오고 있으니, 자연스레 플롯은 복잡해지고, 베일에 싸여 있는 거대한 음모의 배경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확장되는 것이다. 딘 쿤츠가 그려내는 세계는 시리즈를 거듭할 수록 더욱 정교하고 탄탄하게 구축되고 있어, 매번 다음 작품이 전작보다 더한 재미를 안겨준다는 것이 장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시리즈 세 번째 이야기인 이번 작품이 가장 재미있었는데, 아마도 다음 작품은 그 재미가 더욱 증폭될테니 더욱 기다려진다. 현재까지 제인 호크 시리즈는 <사일런트 코너>, <위스퍼링 룸>, <구부러진 계단>에 이어 <The Forbidden Door>, <The Night Window>까지 다섯 편이 출간되어 있다. 네 번째 작품도 국내에서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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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토마시 예드로프스키 지음, 백지민 옮김 / 푸른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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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에 들어오는 네가 익숙해져 갔지만, 그래도 우리는 말 한번 섞지 않았다. 휴식 시간이면 우리 작업반이 밭 가두리에 있는 오두막이 드리운 그늘에서 쉬곤 할 때 너는 다른 남자애들 몇몇과 담배를 피웠고, 나는 여자애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너와는 잡담하지 않았다. 네가 나를 피할 수 없도록 내가 너를 피했다. 나는 네 영향력이 미치는 세력권 안에 있고 싶지 않았다. 네가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뿜는 경쾌함과 아름다움이 나는 부러웠다.    p.57

 

이야기는 오늘 아침 폴란드 사회주의 공화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뉴스 특보로 시작한다.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루드비크는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 한 사람을 떠올린다. 사실 루드비크는 열두 달 전의 그날부터, 비행기에 올라타 바다를 건넌 그날부터, 그를 마지막으로 보고 나서 연옥과도 같이 느껴졌던 일 년간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국이 산산 조각나고 있는 지금, 그를 마음에서 지워버린 체하는 걸 그만두기로 한다.

 

1980년대 사회주의 체제 하의 폴란드였다. 마지막 대학교 기말고사를 마치고 맞이한 여름이었다. 당시 루드키브는 책을 통해 자신만의 갑옷을 입곤 했다. 책 속 이야기에 스스로를 가두었고, 스스로 책 속 인물인 양 행세했으며, 현실의 매서운 칼날을 막아주는 방패인 것처럼 어디를 가든 책을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졸업 전 떠난 농촌활동에서 야누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같은 학년이었음에도 그 전가지는 서로를 몰랐으니, 영영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지만, 운명의 방향은 그곳 호숫가에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루드비크는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제임스 볼드윈의 <조반니의 방>을 몰래 읽고 있었다. 책의 운율과 언어에서 은연중 암시되는 지식과 내재한 불운에 관한 직감이 그의 마음에 곧장 꽂혔던 것 또한 당시 그들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두 사람은 <조반니의 밤>을 함께 읽으며 누군가가 자신들을 온전히 이해해준다고 믿었고, 그들의 내일을 상상했다.

 

 

 

우리가 호숫가에서 며칠이나 머물렀는지 모르겠다. 하루하루가 하나의 온전한 세계와 같았고, 매 순간이 새롭고 다시 오지 않을 경험이었으니까. 어떤 면에서 호숫가에서의 나날들은 내 생애의 첫 나날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내가 그 호수와 호숫물과 네게서 태어난 듯이. 마치 내가 허물을 한 꺼풀 벗어 던지고 이전의 삶일랑 등져버린 듯이.    p.98

 

이 작품은 토마시 예드로프스키의 첫 장편소설로 '사회주의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는 감동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는 단순히 이 작품이 퀴어 소설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운 문장과 사유가 빛나는 작품이라서 일 것이다. '나는 너를 통해 다른 은하계로 빠져들어갔고 네 입은 더 나은 우주로 통하는 현창'이라는 설레는 문장부터, '기어이 우리라는 개념을 놓지 못한 채 아는 얼굴의 파편이라도 바라며 수많은 얼굴을 살펴보면서, 생경함 속에서 낯익음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이라는 마음 아픈 문장들까지..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페이지들마다 가득한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이들의 금지된 사랑은 일거수일투족이 감시 당하는 사회주의 체제라는 배경 속에서 더욱 더 애틋해진다. 동성애라는 죄목으로 체포가 가능했던 시대, 명단을 만들어 추적을 하고, 그렇게 모은 정보로 사람을 쥐고 흔드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들 사이는 언제나 비밀이었다. 게다가 서로를 알아보고, 갈망했던 루드비크와 야누시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체제의 정당성을 믿고 그 안에서 출세하고자 하는 사람과 자유의 가능성을 믿고 힘껏 부르짖는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반대편을 바라보며 양극단으로 향하게 되고, 사랑은 어긋나버린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지금 이 계절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시원한 표지 이미지도 그렇지만, 쓸쓸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주는 햇살의 반짝거림과 애처롭고 안타까운 이야기가 주는 서늘한 바람 같은 느낌 때문일 것이다. 올 여름 이 작품과 함께 계절을 만끽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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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토마시 예드로프스키 지음, 백지민 옮김 / 푸른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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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페이지들마다 가득한 아름다운 작품이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지금 이 계절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뜨거운 햇살처럼 반짝거리고, 서늘한 바람처럼 기분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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