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의 모우 미운오리 그림동화 1
나피 지음, 송지현 옮김 / 미운오리새끼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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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는 숲 속 집에서 아픈 할아버지를 돌보며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문 밖에 서 있는 작은 괴물을 보며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긴 꼬리에 털이 부슬부슬하고 작은 뿔이 달린 그 괴물 모우는 집 안으로 풀쩍 뛰어 들어 온다. 눈이 많이 쌓인 추운 날씨였기에 토토는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따뜻한 스프를 만들어 준다.

 

 

모우는 토토의 집에서 수프를 배부르게 먹고 새근새근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 모우가 보이지 않자 토토는 역시 꿈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창문 너머로 모우의 모습이 보였고, 토토는 모우를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간다. 가다 보니 어느 새 아주 깊은 숲 속이었고, 어디선가 웅얼웅얼 소리가 들려 온다. 처음 보는 커다란 괴물들에 둘러싸이게 된 모우는 무서워서 소리를 지를 뻔한다.

 

그때 나무 사이로 커다란 별이 떨어지고, 괴물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빛나는 돌 조각들을 모아 냄비 속에 넣고 수프를 만든다.

 

 

별 조각들이 냄비 속에서 녹아 투명한 수프가 되고, 토토는 괴물들과 수프를 나눠 먹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아팠던 다리가 금방 낫는게 아닌가. 착한 소녀 토토는 아픈 할아버지를 떠올렸고, 수프를 할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한다. 토토는 괴물들이 만든 특별한 수프를 할아버지에게 무사히 갖다 드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수프는 의사도 고치지 못한 할아버지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을까.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림책 작가인 나피 작가의 이 작품은 추운 계절을 따스하게 만들어 주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 준다. 색채를 최소한으로 쓰면서, 무채색의 배경들 속에 따뜻한 색감들이 포인트가 되어 주는 그림들이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토토와 할아버지의 집은 오렌지와 옐로우, 베이지 톤으로 포근한 느낌을 주고, 눈이 가득 쌓인 추운 숲 속의 풍경과 어두운 밤 하늘의 모습은 그레이, 블랙, 화이트를 주조로 해서 차갑지만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괴물들의 모습은 무섭다기보다 독특하고 신기하다는 느낌이 먼저 드는데, 그 덕에 괴물보다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생명체 같은 기분이 드는 존재들이다. 작고 귀여운 소녀 토토와 특별한 우정을 나누게 되는 모우와의 관계도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눈 덮인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추운 계절에 읽으면 더 따뜻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 같다. 아이와 함께, 소중한 이들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읽으면 너무 좋을 것 같은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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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것들의 도시 일인칭 4
마시밀리아노 프레자토 지음, 신효정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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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주 괴상한 도시가 눈앞에 나타났다. 비슷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마치 레고 블록처럼 꼭 맞게 조립되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런 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영혼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오히려 폐차장처럼 낡고, 오래되어 쓸모 없는 고철 덩어리들을 이어 붙인 듯한 집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바스락, 소리가 들려온다. 녹슬고 흔들리는 발코니 근처 어디선가, 미지근한 바람만 조용히 조용한 도시를 가르며 들려오는 소리의 정체는 뭘까.

 

 

가까이 가보니 한 까마귀가 창문과 씨름하고 있었다. 벽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 창문을 떼어 내려고 애쓰던 까마귀는 떼어낸 창문을 자신의 어깨에 올라탄 달팽이에게 먹이로 건네준다. 창문 하나 남지 않은 성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까마귀는 바로 이곳, 잊혀진 것들의 도시인 '샤'의 주인이었다.

 

이 도시에는 사람들에게 잊혀진 모든 것들이 모여 있었고, 까마귀는 쓸모 없는 것과 값진 것을 매일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었다. 책과 편지, 시계 등 중요하거나, 혹은 잡다한 물건들뿐만 아니라 '말'도 쉽게 사라져 버리는 것들 중 하나였다. 까마귀는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말들을 병에 담아 두었다.

 

 

물건, 말, 눈물 등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잊혀져 이곳으로 오게 된 유령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와 두려움, 장난감들도 있었다. 우리가 살면서 무심코 잊어 버리는 것들과 바쁘다는 핑계로 내버려두는 것들 또한 이곳 '샤'로 향할 것이다. 잊혀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샤에 도착하면, 온갖 기억으로 뒤덮인 사막에서 까마귀는 매일 아침 선별 작업을 한다.

 

인류가 창조하고, 사랑하고, 잊어버린 모든 것들이 신비로운 그림들과 독특한 상상력이 버무려저 놀라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물건들이 우리의 삶을 거쳐 가고, 전부 간직할 수 없을 만큼의 기억들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 작품은 2021년에 단편 영화로 만들어 졌고, 이탈리아 다수 영화제 베스트 필름상 및 특별상을 수상했다. 책 역시 한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안겨준다. 독특한 질감과 어두운 색감을 바탕으로 한 그림들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우리가 잊고 사는 많은 것들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과 함께 읽어도 좋은 작품이지만, 어른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당장 다음 페이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겠다는 긴장감이 몰입감을 안겨 주고,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상상력으로 중무장한 그림들이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으니 말이다. 환상적인 모험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하고, 어둡지만 따스한 위로를 안겨주기도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우리가 잊어버리고 사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 작품은 우리에게 잊혀진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작별 인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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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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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수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뿐 아니라 자신에게서도 도망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잘못된 장소로 와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해도 되돌아 나가서 다른 경로를 찾기에는 두려운 나이, 결코 나아질 리 없는데도 그럭저럭 머물게 되는 계약직 생활,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불현듯 깨닫게 만들었던 깨어지고 부서져서 결국 사라져버린 관계들. 수진은 이곳으로 떠나오며 그녀를 규정하는 나이와 삶의 이력에서 잠시나마 이탈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 '장미의 이름은 장미' 중에서, p.90

 

책을 사서 볼만큼 용돈이 충분하지 않던 어린 시절. 나는 동네 책방이나 도서관에 가서 주로 책을 빌려 보았다. 책은 읽어야 하는 기간이 지나면 반납을 해야 했고, 반납하고 나면 다시는 볼 수가 없었으므로 가능한 많은 문장들을 머리 속에 집어넣으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나의 최애는 은희경 작가였다. 초기작인 <타인에게 말 걸기>와 <새의 선물>은 여러 번 빌려 보고, 필사하고, 결국 책을 사서 구입했을 정도로 많이 읽었던 작품들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면, 성격이며 외모며, 환경이며 너무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유일한 교집합은 그때 좋아했던 작가들을 다행히(?) 아직도 좋아한다는 것,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들의 신작이 출간되면 챙겨 본다는 것뿐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놀랍게도, 은희경 작가는 전성기때의 작품들에 비해서 힘이 떨어지기는 커녕 더 원숙한 깊이와 고루하지 않은 감성을 여전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당신의 이름은 당신, 그리고 은희경의 이름은 은희경, 이라는 문장이 떠오를 만큼, 은희경은 그 이름에 걸맞는 작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뉴욕 -여행자 소설 4부작으로 묶인 이 연작소설집은 팬데믹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난 2년 동안 쓰였다. 2020년 봄과 가을, 2021년 여름과 겨울에 발표된 네 편의 이야기는 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뉴욕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에 열흘 정도 머물 계획으로 한국을 떠나온 이가 바라보는 낯선 타지의 풍경들, 이혼을 하고 홀로 뉴욕으로 떠나온 이가 어학원에서 만난 인물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미국에 네번째 방문했지만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이가 현지의 친구들 사이에서 느끼는 이방인으로서의 감정, 문학 행사로 뉴욕을 방문한 오십대 소설가와 팔십대의 어머니와의 불편한 동행기가 그려진다. 각각의 이야기는 따로 완결성을 띠고 있지만, 연작소설이기도 하므로 인물들과 배경이 겹치고 교차된다.

 

 

 

처마밑 난간에 기댄 채 한참 동안 말없이 그쪽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늙으면 이상하게 평소 기억하던 것보다 더 어렸을 때 일이 기억이 나. 내가 마당에서 아장아장 걷고 있는데 우리 아버지가 마루끝에 앉아서 웃으며 손짓하던 것, 그런 게 말야.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작가니까, 제대로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그게 꼭, 죽으려고 연습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지금처럼." 어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 '아가씨 유정도 하지' 중에서, p.246

 

영화와 사진 속에서 뉴욕은 언제나 높은 빌딩과 초록의 공원에 둘러싸여 있고, 분수대 앞에서 열리는 거리 공연과 화려한 다리의 야경 등으로 상징된다. 하지만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라는 작품을 통해 느끼게 되는 뉴욕의 모습은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끔찍한 더위와 가로막힌 창문들, 거리에 샇여 있는 쓰레기들과 시간을 지키지 않은 우편물들이다. 빌딩숲이 없는 대신, 지은 지 백 년은 넘었을 만한 낡고 오래된 집들이 있다. 이국의 낯선 곳에서 두 친구가 함께 보내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한 오해로 어긋나기만 한다. 각자가 알지 못하는 서로의 사정과 성격은 너무도 달랐고, 도대체 쟤는 왜 저러는 걸까와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를 따로 오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작가는 '장미의 이름은 장미'라는 작품에서도 서로의 다름에 대해서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자신의 소심함과 방어적인 수동성에 신물이 나서 갑자기 어학연수라는 최악의 결정을 내린 주인공이 세네갈 대학생과 나누는 기묘한 우정, 영어 실력이 부족한 덕분에 한국에서의 성격과는 전혀 달라지는 말투와 무심코 내뱉게 되는 거짓말들이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정체성이 뉴욕이라는 세계를 만나면서 더 예민하고, 다정하게 그려진다.

 

살면서 가끔 생각한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 결코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멀리 왔다. 그렇다면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을 때 나는 책장에 꽂힌 책을 꺼내어 페이지 속으로 숨곤 했다. 책 속의 어떤 문장에서 오래 전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어느 행간에서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책들은 내가 살아온 삶의 일부이고, 모든 텍스트는 언어로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이다. 언젠가 팬데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해외 어디든 원하는 대로 여행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작품을 다시 읽어 보고 싶다. 2020년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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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피플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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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 목표물은 계급 구조인 거로군요. 보편적인 현상 아닙니까. 미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물론이죠. 하지만 계급 구조가 정치적인 통제 수단으로 사용되는 곳은 여기뿐이에요. 그 실제 목적은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중산층을 억제해서 얌전히 굴종하게 만드는 거고요... 이곳 사람들은 중산층의 꿈이라는 강렬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어요. 삶의 목적이 그거죠. 자유주의적인 교육, 시민의 도리, 법규 준수 따위요. 자기네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사로잡혀서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거예요.”      p.140~141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마컴은 아내와 함께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산업심리학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공항으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공항에 문제가 생겨서 비행기가 전부 지연됐다는 연락을 받고,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공항의 2번 터미널에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화면에 떠오른 잔혹한 영상들 위로 세 명이 사망했고, 스물여섯 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자막이 나온다. 그리고 폭발의 충격으로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승객들과 경찰과 공항 보안 요원들 사이로 눈에 익은 한 여자가 보인다. 아무래도 그녀가 전부인인 로라같다고 생각한 그들은 직접 확인하기 위해 공항 근처의 병원으로 향한다. 결국 주동자는 물론이고 범행 성명조차 없는 이 테러로 로라는 죽음을 맞이하고, 데이비드는 죽음의 무작위성에 충격을 받는다.

 

과거에 노면전차 사고로 인해 다리가 불편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 데이비드의 현재 부인 샐리는 그에게 로라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내, 범인을 알아내길 바란다. 그는 샐리를 위해서라도 공항 폭탄 테러의 진실을 알아내겠다고 생각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고군분투한다. 그러다 런던의 호화로운 동네인 첼시마리나로 향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마침내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중산층의 계급투쟁, 혁명의 불길, 20세기를 전복시키려는 급진적인 사상 등이 주요 스토리의 소재이지만, 생각보다 어둡거나 무겁지만은 않다. 뒤틀린 군상들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과격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이고, 당혹스러울 정도로 허무하기도 하며, 놀라울 정도로 날카롭고 예리하기도 하다. 그리고 겉보기에는 제정신인 사람들이 얼마나 괴팍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어, 살짝 정신이 나간 사람들 틈에서 길을 잃어 버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으며 읽어야 하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렇습니다. 그곳의 수많은 죽음은 무의미하고 불가해한 것이었지만, 어쩌면 바로 그게 요지일지도 모르니까요. 동기 없는 행동은 우주의 움직임을 궤도 위에서 멈추게 합니다. 제가 당신을 죽이려 들면, 그건 여느 부랑자 범죄나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실수로, 또는 아무 의미도 없이 죽이면, 당신의 죽음은 단 하나뿐인 중요성을 획득하는 거지요. 우리는 세계를 제정신인 곳으로 인식하기 위해 동기에 매달리고, 인과관계에 의존합니다. 그런 지지대를 전부 걷어차 버리면 무의미한 행동이야말로 진정 의미가 있는 유일한 행동임을 깨닫게 돼요. 저도 깨닫기까지 한참 걸리기는 했지만, 당신의 ‘죽음’이야말로 제가 기다리던 청신호였던 셈이지요.”      p.416~417

 

<헬로 아메리카>, <콘크리트의 섬>에 이은 'JGB 걸작선' 그 세 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2009년 타계한 밸러드의 10주기를 기리며 2019년부터 시작되었다. 세계문학 단편선을 통해서만 만났던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만나고 싶다면 이 작품들을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다. 단편소설들에 비해 'JGB 걸작선'으로 소개되는 작품들은 좀 더 진전된 주제와 작가로서의 자신을 해방시킨 듯한 ‘밸러드풍Ballardian’ 장편소설들이다. <콜린스 영어사전>에 따르면 ‘밸러드풍’은 ‘J. G. 밸러드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에서 묘사된 환경―특별히 디스토피아적인 현대성, 암울한 인공 경관, 기술적이고 사회적 혹은 환경적 발전의 심리적인 효과―과 유사하거나 연상시키는’이라고 한다.  '지극히 밸러드스러운'이야기들을 일컫는 문학적 특수성이 형용사로 탄생해 사전에 등재되었을 정도이니 작가로서의 위상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J.G.밸러드는 단편집 후기에서 'SF에서 선호하는 만들어진 미래가 아니라, 다가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진짜 미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래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지뢰가 가득 깔려서 전진하는 사람의 발목을 언제라도 물어뜯을 채비를 마친, 진입하기에 극도로 위험한 영역'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이 여타의 SF소설이나 디스토피아 문학들과는 다른 지점에 있는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20년 전에 쓰인 소설 속 런던의 모습 속에서 2022년 현재의 우리 모습이 엿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특히나 이 책에는 작가 겸 영화감독 이언 싱클레어의 <해제>와 밸러드의 촌철살인이 돋보이는 저널리스트 배너라 베넷과의 「인터뷰>, 작가 트래비스 엘버러가 정리한 <전기적 약력>, 잡지에 게재된 단편소설을 비롯해 밸러드의 저작을 총망라한 <작품 목록>을 수록하고 있어 풍성한 읽을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21세기의 예언자’라 불리는 밸러드의 명성을 제대로 확인해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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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01~08 세트 - 전8권 전지적 독자 시점
싱숑 지음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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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하다 보니 조금 찜찜한 느낌이 든다. 멸살법은 결국 작가가 만든 세계다. 그리고 그 세계는 현실이 되었다.
영혼이 입증되지 않던 세계는 이제 영혼이 당연한 세계로 변했다.
그런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일까. 나라든가 영혼이라든가. 그런 건 원래부터 존재했을까? 아니면, 이런 '나'조차 작가가 만든 이야기의 일부일까?              - 3권, p.138

 

스물여덟의 평범한 직장인 김독자, 계약직으로 곧 계약기간이 끝나지만 정직원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의 유일한 취미이자 낙은 웹소설 읽기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소설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꾸준히 봐왔다. 무려 3,149화에 달하는 장편 판타지 소설로 100화부터는 계속 조회수가 1인, 대중성 없고 인기도 없는 그 작품이 독자의 인생 소설이었다. '멸살법'이라는 소설이 있어 일진들에게 찍혀 왕따를 당하던 학창 시절도, 입시를 망쳐 지방 삼류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이직을 반복하다 겨우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도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10년 동안 연재되었던 작품이 드디어 완결이 되었다.

 

 

작품의 유일한 독자였던 김독자에게 작가 tls123이 쪽지를 보내온다. 덕분에 완주할 수 있었다며 감사의 인사와 함께 특별한 선물을 보내주겠다는 거였다. 그리고 작품이 내일부터 유료화될 예정이며, 에필로그도 유료로 공개할 거라고 말이다. 다음 날 평소처럼 일을 하고 퇴근 하는 길에 독자는 지하철을 탄다. 작가에게 첨부 파일과 함께 쪽지가 온다. 7시부터 유료로 전환될 예정이라고, 오분 뒤 전등이 픽 꺼지며 지하철 내부가 어두워진다. 지하철이 크게 흔들리며 급정거를 하고, 정전된 객실에 갑작스럽게 괴생명체가 허공에 등장한다. 곧 지하철은 피바다가 되었고, 사람들 눈앞에는 제각기 메인 시나리오라는 작은 창이 떠오른다.

 

김독자는 이 모든 상황들이 소설 속에서 존재하던 그대로라는 것을 알아 차린다. 안테나를 뻗은 도깨비, 객실에 쓰레기처럼 널린 시체들, 피투성이가 된 채 떠는 직장인, 노약자석에서 기도하는 할머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현실이 된 것이다. 갑작스럽게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고 있었다. 자, 그렇다면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당황스러워 하는 사람들 속에서 김독자는 '이 세계의 결말을 아는 유일한 독자'였다.

 

 

샤라락. 샤라락.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릴 때마다 활자가 눈처럼 쌓였다. 활자로 쌓은 견고한 이글루. 그 안에서 나는 주인공이 되어 모험을 하고, 사랑을 하고, 꿈을 꿨다. 그렇게 읽고, 읽고, 또 읽고.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야기가 끝나고, 처음으로 책을 덮던 순간.
세계로부터 박탈당한 듯한 그 기분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8권, p.106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평범한 독자였던 한 남자가 주인공이 되어가는 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모든 장면들을 다 섭렵하고 있는 진짜 애독자가 소설 속 판타지 세상으로 들어가 적들을 무찌르고, 아이템을 획득하고, 미션 클리어해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 된 현실은 원래 독자가 알던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소설이 현실이 되면서 갑자기 생겨난 인물도 있었고, 그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고, 원래 죽어야 하는 인물이 살거나 설정을 변경하면서 미래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다. 방대한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며 설정 하나하나를 이해했고, 설명의 의미를 곱씹었으며, 마침내 작가의 의도를 알아냈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멸살법을 이미 다 읽었다 하더라도,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사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을 직접 겪어 내는 것은 만만치가 않았다.

 

독자는 그렇게 조금씩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나가며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렇게 하나씩 쌓여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독자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멸살법의 세계를 그 동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텍스트를 열심히 읽고, 궁금해도 알 수 없었던 어떤 감각, 오직 손끝의 페이지로만 느꼈던, 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던 서사의 일부가 온전하게 이해되는 기분'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읽은 것과 이해한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순간 나 역시 독자처럼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이 어떤 건지 너무도 느끼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이 소설로 바뀌거나 소설 위에 덧씌워진 현실을 체험하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네이버 시리즈’ 누적 다운로드 1억, ‘네이버’ 수요 웹툰 1위 <전지적 독자 시점>의 원작. 웹소설의 현재진행형 레전드인 전지적 독자 시점, 일명 <전독시>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전 8권으로 나온 part 1은 전체 이야기의 1/3에 해당되는 분량이며 여름에 part 2,3이 출간될 예정이다. 웹소설은 평소에 잘 읽는 편이 아닌데, 이 작품은 워낙 재미있다고 소문난 명작인데다, 영화화도 앞두고 있어 기대가 되었다.

 

역사와 신화를 아우르며 펼쳐지는 방대한 세계관과 매력적이고 독특한 설정들 덕분에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 속으로 훅 빠져 들어가 읽었던 것 같다. 8권의 책을 단 며칠 만에 모조리 완독했을 정도로 완전히 몰입해서 읽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아주 오래 전, 처음으로 소설을 읽었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어 주어서 너무도 설레었다. 밤을 꼴딱 새면서 빠져 들었던 그 이야기의 마법, 활자와 활자가 만들어낸 공간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 모험을 하고, 꿈을 꿨던 그 순간을 새록새록 기억나게 만들어 주었다. 순수하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것저것 따지고 분석하지 않고 오롯하게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재미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그 시절들이 한 명의 평범한 독자인 나를 다시 깨어나게 한 것이다. 현실과 소설과 다르지만, 바로 그 이유로 위로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주었던 그런 작품이 분명 내게도 있었으니 말이다. 극중 김독자에게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웹소설이 그러했듯이.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8권 이후의 이야기를 읽으려면 또 몇 개월을 기다려야겠지만, 그렇게 더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설레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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