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 불안과 고통에 대처하는 철학의 지혜
존 셀라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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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쾌락주의와 동의어로 여겨지면서 오랜 세월 많은 오해와 폄하를 받아온 에피쿠로스 철학에 현대적 해석으로 다시 들려주는 책이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무신론, 부도덕, 감각적 탐닉과 결부되어 오랫동안 위험하고 부패한 사상으로 죄악시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니 매우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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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 아주 작은 수고로 생애 최정점의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
이승훈 지음 / 북폴리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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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의 눈이 집중되는 사건에서도 뇌졸중이 등장할 만큼 뇌졸중에 대한 일반인의 공포감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사실 내가 2020년 8월에 뇌졸중 전문의로서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을 때의 주제도 '살면서 안 만나면 좋을 사람' 특집이었으니 뭐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런데 정말 뇌졸중이 그 정도로 공포스러운 병일까? 뇌졸중 전문의로서 20년 가까이 환자를 살펴본 경험으로 볼 때, 이 공포는 반은 사실이고 반은 과장된 것이다.       p.131

 

누구나 살면서 병에 걸린다. 하지만 병에 걸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질병이 생기는 초기 신호를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거나 부인한다. 그런다고 해서 그 병에 걸리지 않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이승훈 교수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 당시 스스로 진단한 병이 스무 가지가 넘는다고 해서 진행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다양한 병이 있는데, 자신들만 모를 뿐이라고. 무서워서 병원에 안 가거나 무시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이다.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질병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한 개인으로서 이에 대한 대처 방식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해준다. 저자는 질병의 본질을 고찰하고 이를 받아들여 최대한 건강하게 살아갈 방법에 대해 직관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은 찾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병이 곧 우리의 적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병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그는 어차피 질병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면, 길들여 공생하는 것이 자신의 몸을 위해 가장 적절한 태도라고 말한다.

 

 

위험 요인에 대해 각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말을 먼저 하려고 한다. 제발 좀 약을 드시라고.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심방세동을 가진 분들은 항혈전제와 함께 각각을 조절하는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 물론 위험 요인 발생 초기엔 약물 없이 생활습관 개선을 시도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 약물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거부감을 느끼지 말고 약을 잘 챙겨 먹는 것이 훨씬 이롭다. 투약 여부는 처음에 신중하게 결정하되 결정된 다음부터는 확실하게 잘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약을 꾸준히 잘 먹는 사람은 위험 요인이 더 발전하지 않는다.           p.247

 

이 책은 우리 몸의 내장, 즉 오장육부에서 시작해 인간의 장기가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서 차곡차곡 설명을 시작한다. 호흡과 순환, 섭취, 소화, 흡수, 배설, 그리고 대사의 중추, 간, 뇌에 이르기까지의 기능에 대해 알기 쉽게 알려 준다. 이어 질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정리하고, 이승훈 교수만의 새로운 질병분류법에 따라 각각의 질병들에 대해 보여준다.

 

저자의 전공인 뇌졸중에 대해서는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알려 주는데, 뇌졸중은 우리나라 사망률 4위 질환으로 높은 사망률과 장애율을 보여주고 있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뇌졸중은 5분에 한 명씩 발병하고 15분에 한 명씩 사망하며 연간 5조 원씩 사회적 비용이 드는 비용이라고 하니 말이다. 저자는 뇌졸중 전문의로서 20년 가까이 환자를 살펴본 경험을 토대로 뇌졸중에 대한 일반인들의 공포감을 해소시켜줄 만한 비밀을 알려 준다. 평소 간단한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만으로 뇌졸중 발생 자체를 막거나, 발생한다고 해도 매우 약한 뇌졸중으로 오게 할 수 있는 생활 습관이 있다고 하니 놀라웠다.

 

 

그 외에도 암과 당뇨, 고혈압 등의 질병에 대해, 그리고 가장 친숙한 병이기도 한 감기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감기 바이러스로 코로나19를 이해할 수 있다는 대목도 매우 흥미로웠다. 누구나 자신의 몸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 몸은 어떤 장기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도 해당 장기의 기능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 이상 여부를 알아챌 방법이 거의 없다고 한다. 통증이 없는 작은 암이 생겼어도 해당 장기의 기능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암의 존재를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내 몸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평소에 건강한 생활 습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적당한 운동, 적절한 체중 관리, 금연, 절주, 딱 네 가지만 잘 지켜도 우리 장기와 면역 시스템이 최선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도대체 질병이란 무엇인지, 이를 받아들여 최대한 건강하게 살아갈 방법이란 어떤 건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이승훈 교수가 직접 실천하고 있는 예방법 및 치료법, 의료 통계 데이터와 최신 연구자료들을 모두 담고 있고, 일상적으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가득해서, 내일의 건강을 위해 질병을 대처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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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3-28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접시의 음식은 이런 책을 읽으시면서 안넘어갈듯요^^

피오나 2022-03-28 17:17   좋아요 1 | URL
ㅎㅎ 나름 건강한 음식입니다만 ㅋㅋ
 
연필 한 자루로 시작하는 느낌 있는 인물 그리기 - 논리적 데생 기법 그리다
OCHABI Institute 지음, 김재훈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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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들은 틈만 나면 이곳 저곳에 자신만의 그림을 그린다. 공부하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신문지에, 모래 바닥에, 돌멩이에..  어느 곳이든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려댄다. 그림 실력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가면서 점점 여기저기 끄적이던 그림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잘 그린 그림에 대한 기준이 생긴데다, 제대로 된 도구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종이와 연필만 있다면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 책은 그림 초보들도 쉽게 도형, 인체를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준비물은 종이와 연필 뿐이다. 연필 한 자루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인체 드로잉과 연필 드로잉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다. 연필 쥐는 법, 선을 긋는 법부터 시작해서 명암을 그리고, 얼굴의 형태를 잡고, 선으로 소리와 촉감을 표현하는 연습을 거쳐 인체를 평면적으로, 입체적으로 그리는 법에 대해 알려 준다.

 

 

인체의 비율을 알려주고, 뼈와 관절의 위치를 잡아 골격을 표현하고, 그 비율을 참고해 사람의 형태를 그리는 과정이 굉장히 간단하면서도 놀라웠다. 특히나 움직임이 있는 자세의 중심선과 골격 잡는 법이 재미있었다. 움직임이 있어 더 생동감있게 느껴졌고, 정면을 지나 반측면의 인체를 그리는 단계가 되면 더 강한 약동감과 스토리가 느껴져서 나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길 것이다.

 

 

마지막 장의 인물이 있는 풍경 그리는 단계가 되면, 그림 그리는 것이 점점 더 재미있어 진다. 인물과 함께 건물과 차, 나무와 구름 등 우리 주변의 사물들을 단순한 형태로 변환해 평면적으로 표현하는 풍경 그림은 다양한 요소가 있어 그리는 동안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결과물이 놀라울 정도로 만족스럽다. 1점투시도법으로 방 안을 그려보고, 음영을 넣어 시간의 흐름과 분위기를 표현해보자.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뭐야 나도 그림을 꽤 잘 그리는데? 하는 말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림에 관심 있지만, 전혀 그려본 적이 없는 사람부터, 더 잘 그리고 싶은 사람까지 만족시킬 수 있도록 어렵지 않게 기본기를 다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디자인이나 기획 업무로 그림을 그릴 기회가 많거나, 만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가 목표인 사람, 그리고 인물 데생의 기초를 배워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이 책 한 권이면 누구나 연필 한 자루로 인물과 풍경을 꽤 그럴듯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물을 그리는 것은 유독 어려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알려주는 '대상의 형태를 잡는 방법'만 제대로 익히더라도, 쉽고, 재미있게 데생 실력을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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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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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갑옷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어차피 그것은 현실적 해법이 아니라 몽상적 해법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갑옷이란 나와 함께 움직이는 철장일 뿐 아니겠는가? 그래도 만약 갑옷을 입을 수 있었다면, 어떤 면에서는 자유로웠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시절에 나는 실제로 갑옷을 입었고 그래서 자유와 옥죄임을 둘 다 느끼면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요즘도 가끔 그렇지만, 그 시절에 나는 정말로 딱딱하고 빛을 반사하고 안을 보호하는 갑옷 같은 존재였다... 스스로 갑옷이 되기란 오늘날에도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줄곧 스스로 죽는다.        p.91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걷기의 인문학>, <멀고도 가까운>등의 저서로 동시대 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존재가 된 리베카 솔닛의 첫 회고록이다. '우리 시대 가장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가'라고 불리는 솔닛이 집을 떠난 19세부터 지난 40여년의 시간을 되돌아본다. 솔닛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낸 서문에서 이 책에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담았지만, 그것을 모든 여성이 겪는 집단적 경험의 맥락 속에서 서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여성이 침묵하기를 바라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선호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자 하는 여성의 분투는 그렇게 사적인 경험을 넘어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된다.

 

지금은 전세계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존재가 된 솔닛도 어리고 불안정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에 서툰 부적응자, 몽상가, 쉴 새 없이 떠도는 방랑자였던 깡마른 젊은 여성이 어떻게 작가이자 활동가로서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은 1980~90년대 여성의 성장 기록이지만 2022년 현재와 교차되는 부분이 꽤 많다. 이는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사회의 오래된 불평등과 만연한 폭력과 여러 구조들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선의 형태일 때, 논픽션은 세상을 도로 짜맞추는 행위다. 혹은 세상의 한조각을 뜯어냄으로써 세상의 통설과 관행 밑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는 파괴와 비슷한 데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열렬히 흥분되는 것일 수 있다. 뜻밖의 정보를 발견해서 그럴 수도 있고, 조각들을 조립해보니 차차 어떤 패턴이 드러나서 그럴 수도 있다. 잘 몰랐던 무언가가 차츰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세상이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혹은 기존의 통설에서 틀린 것이 발견되고, 그래서 내가 새로 쓰게 된다.       p.188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화장대처럼 생긴 작은 책상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상은 솔닛과 함께 세 번 이사했고, 그녀는 그 책상 위에서 수백 만개의 단어를 썼다. 스무 권이 넘는 책, 리뷰, 에세이, 연애편지, 이메일 등과 학생으로서, 선생으로서 숙제를 했다. 그 '책상은 세상으로 난 문이자 솔닛이 바깥으로 도약하거나 내면으로 잠수할 때 딛는 단상'이기도 했다. 그 책상은 한 친구가 솔닛에게 선물로 준 것인데, 그 친구는 책상을 주기 1년쯤 전 헤어난 남자친구가 휘두른 칼에 열다섯 군데를 찔려 과다출혈로 거의 죽다 살았다. 친구는 목숨을 건졌고, 당시 여느 피해자들처럼 그 일로 비난 받았다. 살인미수자는 법적 처분을 전혀 받지 않았고, 친구는 일이 벌어진 곳으로부터 멀리 이사했다. 가해자가 당당하게 세상을 활보하는 동안, 왜 피해자는 세상으로부터 숨어야 하는가. 여성의 안전도, 자유도, 권리도 과거와 비교해서 지금이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솔닛은 '남자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여성으로부터 받은' 책상에 앉아서 이 책을 비롯해 많은 글들을 썼다.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글을 통해 사회에서 지워진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주고, 집단과 사회의 지배서사를 조금씩 바꿔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이 책은 솔닛이 젊은 여성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그리고 사적인 에세이와 페미니즘과 정치, 환경비평까지 분야를 망라하며 유려한 글을 썼던 솔닛의 30여권에 달하는 전작을 모두 다 품고 있는 책이기도 하니, 지금껏 솔닛의 작품을 읽어 왔던 독자라면 이 책은 놓치지 말고 읽어보길 권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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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밤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놀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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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의 기억은 몹시 뒤죽박죽이다. 지나가던 사람이 부른 구급차. 이명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 기묘한 슬로모션으로 움직이는 구급대원들의 모습... 피투성이로 땅에 널브러진 에쓰코. 춤이라도 추듯 기묘한 방향으로 내뻗은 팔다리. 경차에서 내린 나이 든 여자는 망가진 기계처럼 온몸을 떨었다. 산산이 부서진 경차의 앞 유리창. 그 앞 유리창을 깬 물체는 박살 나서 아스팔트 위에 흩어졌다. 갈색 흙. 자홍색 꽃. 흰색 도자기 조각. 그 조각 중 하나에 ‘엉겅키’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내가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한 사이에 구급차는 달려갔다.       p.13~14

 

유키히토는 15년 전 아내가 죽은 뒤 딸 유미를 홀로 키워왔다. 그날 아내는 유미의 어린이집 등하원용 가방을 만들 천을 사러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갑작스레 아파트 베란다에서 화분이 떨어졌고, 지나가던 경차 앞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면서, 그 차가 아내를 친 것이다. 그리고 그 화분을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기려다 떨어뜨린 것은 바로 네 살 딸 유미였다. 사고 이후 유키히토는 딸의 인생을 지키기 위해, 사고의 진상을 숨겨 왔다. 살던 동네를 떠나 이사를 했고, 사고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덮어버렸다. 그런데 15년 뒤, 누군가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비밀을 알고 있다고, 사고를 친 건 당신 딸이라고, 돈을 요구하는 그는 딸에게 전부 말하겠다고 그를 협박한다.

 

협박전화를 받은 뒤 불안에 떨던 유키히토는 대학교 기말 사진을 찍으러 하타가미에 가보고 싶었다는 유미의 말에 30년 전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으로 향한다. 협박자로부터 딸을 떼어놓고 싶었고, 오래 전부터 마음에 남아 있었던 과거의 의문을 낱낱이 풀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고향은 어머니가 의문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자신과 누나가 벼락을 맞았고, 독버섯 사건으로 마을 사람들이 죽었으며, 아버지가 사건 용의자로 지목되어 경찰 조사를 받았던 기억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누나는 번개를 맞은 뒤 몸에 무참한 흉터가 새겨진 상태로 살아왔고, 유키히토는 당시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었으며, 사건과 관련된 사실들을 외면하며 살았다. 그리고 수십 년 만에 다시 돌아간 고향에서, 어쩌면 죽은 아버지가 정말로 살인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살의는 분명, 언제나 수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겁니다. 그 대부분이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는 건 그저 운이 좋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아야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하타가미의 하늘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저 새의 그림자만이 울음소리도 없이 시야 가장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벼락처럼, 끌어들이는 요소와 응하는 요소가 우연히 맞닥뜨려서 살인이 일어나는 거겠죠. 약간의 불운이 살의를 살인으로 바꾸는 거예요.”
이 불운의 시초는 뭐였을까.         p.419

 

유키히토는 딸과 누나와 함께 찾아간 고향에서 자신이 외면하고 살아왔던 일들에 대해 직접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석 달 전까지 살아 있었던 아버지가 종잡을 수 없이 모호한 존재로 기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행복한 추억을 수없이 쌓아 왔고, 자신에게 요리와 장사를 가르쳐주었던 아버지였는데.. 자신이 알고 있었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난 30년간, 아버지가 독버섯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고 믿어 왔는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가슴속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그 믿음이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딸에게 비밀을 밝히겠다며 협박했던 남자가 고향에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유키히토는 딸의 인생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끝내기로 한다.

 

진실을 끝까지 숨기는 건 얼마나 큰 죄일까. 몰라도 되는 일을 영원히 알지 못하게, 기억에서 지워진 행동을 영원히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죄일까.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숨기더라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유키히토는 수십 년 전 고향을 떠날 때 아버지가 중얼거렸던 '난 틀리지 않았어'라는 말을 그제야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가족을 지켰다. 그게 올바른 행동이었는지 그른 행동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그 마음만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아들의 딸에 이르는 3대에 얽힌 비극은 서로가 서로를 지키기 위해 시작되었고, 각자 그 진실을 모른 채로 시간이 흘렀다. 이 작품은 '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에 대한 흥미로운 미스터리인 동시에, 수십 년간 이어져온 슬픈 가족사를 그려내고 있는 먹먹한 가족 드라마이기도 하다.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번 미치오 슈스케의 신작도 놓치지 말자. 특히나 이 작품은 작가 스스로 '앞으로 내가 쓰는 작품들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이라며 자신감과 애정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하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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