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섬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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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남들이 철석같이 믿는 것 혹은 믿고 싶어 하는 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서, 그 착각을 바로잡아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데서 오는 어떤 달콤함.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도 우리에게는 달콤했다. 여자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항상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존재로 인식된다. 하지만 끈적끈적 아저씨가 그건 손해 보는 제로섬 게임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것이 우리 여자들의 고질적인 실수였다고.                  - '끈적끈적 아저씨' 중에서, p.71


그들은 마을에서 몇 킬로미터 안 되는 곳에서 어린이 성매매가 이루어진다는 소문을 듣는다. 돈을 내면 동유럽, 아시아, 중앙아메리카에서 건너온 열 살에서 열여섯 살 사이의 여자아이들을 살 수 있었다. 남자 어른들을 위한 깜짝 파티는 강가의 오래된 공장 마을에서 밤중에 벌어진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몸서리치게 하고 혐오감에 이를 갈게 한 그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직접 그들을 처단하기로 결정한다. 자신들이 밤중에 깨끗한 이불을 덮고 깔끔한 침대에서 자는 동안 또래 혹은 더 어린 어린이 성노예들이 마을 외곽의 모텔에서 구역질 나는 행위를 견뎌야 했다는 데 분노했다. 그렇게 여고생들은 학교 구내식당에서 모여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끈적끈적 아저씨라는 나선형 장치를 설계한다. 그것은 파리를 잡는 거대한 끈끈이 테이프 같은 장치였다. 


야밤을 틈타 몰래, 은밀하게, 강가의 버려진 무인지대에서 그들은 거짓 소문으로 성매수자를 유인한다. 깜짝 파티가 열린다는 소문은 산불처럼 인터넷을 타고 번진다. 남자들은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한 명씩 찾아왔고, 최대한 멀찌감치 조심스럽게 차를 댔다. 모두 이런 식의 눈 가리고 아웅에 경험이 있었고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손님으로 등장해 여고생들은 망연자실해진다. 고등학교 선생님, 마을의 시의원, 누군가의 아버지와 삼촌, 사촌, 이웃들이 있었다. 그들이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던, 평범한 남자 어른들이 성도착범이었던 것이다. 가면을 쓰고 있는 여고생들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렀다.  <끈적끈적 아저씨>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강력한 성범죄 처벌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가족도 있고 딸들도 있어요...'라는 한 남자의 간청은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가족이 있는데 왜 딸같은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서 왜 도덕적으로 해야 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지... 최악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변명과 구걸을 한다는 점이다.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여고생들이 그들을 직접 벌하는 서사는 분노와 공감을 동시에 불러 왔다. 




무관심한/제삼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기서 흥미진진한 대목은 뭔가 하면, 상상할 수 없고 일어날 법하지 않던 일이 놀라우리만치 짧은 기간 안에 상상할 수 있고 일어날 법한 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가정이라는 익숙하고 한계가 정해진 공간 안에서 매일, 매시간 맞닥뜨리다 보면 충격적이고 괴상했던 것이 그 짧은 기간 안에 평범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괴물둥이' 중에서, p .312


이 책에는 표제작인 <제로섬>을 비롯해 열두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고단한 여성의 삶과 이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해 섬세하고 유려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이를 지켜보는 딸의 모습을 그린 <참새>, 부모와 자식 간의 올바른 애착 형성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저 데려가세요, 공짜예요>, 뒤통수의 생긴 혹이 마치 사람처럼 성장해가면서 가족들로부터 점점 배제되어 가는 불안을 그린 <괴물둥이>, 여아 성매매 문제를 여고생들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끈적끈적 아저씨>, 스토킹을 당하는 여성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는 <상사병>, 유산을 겪은 여성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그린 <한기> 등 강렬한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담겨 있다. 


자의든 타의든 스스로의 삶을 통제할 수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들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고스란히 체험하게 해준다. 여성으로서 경험하게 되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분노는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들이기에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성매매, 스토킹 같은 범죄 행위 뿐만 아니라 임신과 출산, 유산, 육아 등 여성이기에 느낄 수 밖에 없는 경험들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강렬한 이야기 속에서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인 분위기와 극도의 긴장감이 잘 버무려져서 한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게 만들곤 한다. 인간이 가진 근원적 공포와 폭력적인 세상이 휘두르는 공포를 꿰뚫는 이야기를 조이스 캐롤 오츠만큼 잘 쓰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극중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한 여성들의 실상이 현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약자로 하여금 사적 제제를 집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 속에 우리가 살고 있기에, 이 작품 속 이야기는 현재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사회와 폭력에 대처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 음울하지만, 강렬한 방식으로, 사악하지만 매혹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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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기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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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그냥 살 수 있다】라는 상태에 가까워지면 바로 그 이상을 원합니다. 이대로 살아도 되나, 삶의 의미나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싶어, 무언가에 열중하고 싶어. 아무튼 그냥 살 수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인간 이외의 종(種)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은 어떤 개체도 하지 않습니다. 삶을 수행하는 것과 목숨을 다하는 게 동의어인 종과 비교하면 전쟁이나 재해 등 웬만한 일이 아닌 한 생명의 위협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이라는 종은 정말 생각이 많아서, 더 힘든 것 같습니다.                 p.9~10


가전 회사에 근무하는 서른두 살 남성 쇼세이는 최근 건강검진에서 몸무게와 체지방률 모두 인생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중성지방과 콜레스트롤, 요산 수치도 나빴다.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몸의 실루엣이 착실히 아저씨처럼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쇼세이는 맨션에서 걸어서 오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는 중이다. 최근 생물의 생식 본능이나 성도태 등과 관련된 지식을 정리한 생물학 책들을 잔뜩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암컷 개체에 성적 흥분을 느끼지 않는 인간 수컷 개체로 일본이라는 생식지에 발생해 삼십 년 이상 살아왔다. 당혹스러웠던 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그때마다 언어와 사고로 나름대로 '온전함'을 지켜 왔다. 하지만 스스로 동성애 개체임을 인식하면서 그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어진 것이다. 


화자 ‘나’의 눈에 비치는 인간이라는 종(種)은 복잡하고도 이상하다. 정체 불명의 화자는 인간에 대해 '유체', '성체'라고 지칭할 정도로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화자의 말을 따라 가다 보면 인간이 아닌 것임에는 분명한데, 정체를 쉽게 추측할 수는 없다. 그런 화자가 쇼세이라는 한 인간 개체에 대해 관찰하고, 판단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 서사이다. 어떤 꿈도 야망도 없이 세상의 성장과 발전에 조금도 기여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 가고 있는 쇼세이라는 독신 남성의 매일 일상을 관찰하며, 자신이 두 번째로 담당하게 된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쇼세이의 몸 안에서 느닷없이 떠들어 대는' 화자의 정체를 추측하는 것도 흥미롭고, 그 정체가 밝혀진 뒤에도 독특한 시각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을 따라가는 것도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 그것은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쇼세이, 아주 오래전부터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습니다. 물론 의태는 식은 죽 먹기라 행복 수준을 공동체 감각에 맡긴 개체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다른 개체와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밥을 먹고 함께 일하며 공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도 쇼세이는 줄곧 다른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단절은 이제까지보다 앞으로가 더 잘 드러나겠죠. 흥미롭군요. 인간의 경우, 같은 종의 개체라도 어떤 【온전함】을 쌓아 왔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사는군요.                p.268~269


아사이 료가 최연소 나오키상을 수상하게 해준 작품 <누구>를 읽었을 때만 해도 이십대 초반의 작가가 딱 실제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것 같은 현실성있는 이야기를 매우 리얼하게 그려냈다는 느낌 정도였는데, 이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면서 확실하게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게 된 것 같다. '바른 욕망'이라는 뜻을 가진 제목으로 바르지 않은, 사회적인 시선으로 볼 때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정욕 正欲>에 이어 삼 년 반 만에 발표한 신작 <생식기>는 독자들 사이에 '다양성'을 주제로 격한 논쟁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제목인 '생식기 生殖記'는 생식의 기록이라는 뜻으로 작가가 새롭게 만든 조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단어와 발음이 같지만, 한자어가 다르다. 왜 이런 제목을 지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이 작품을 읽어 나가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이 작품에는 아마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아주 특별한 화자가 등장한다. 현지 출간 당시 화자의 정체를 비롯해 주요 정보 공개하지 말아 달라는 요구에 담당 편집자가 난감했다고 하는데, 결과는 출간 삼 개월 만에 10만 부를 돌파할 정도로 성공이었다고 한다. 


'정상성'과 '다양성'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작품은 많이 있어 왔지만, 아사이 료는 그야말로 상식을 완전히 부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수많은 생명체를 담당하다 인간 담당으로 옮겨 온, 그리고 처음으로 ‘인간 수컷 개체’를 담당하게 된 ‘나’의 정체는 비교적 초반부에 밝혀지지만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작품을 읽었다면 그 파격적인 설정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정상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남들과 비슷한지, 사회적으로 평균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항상 주변 사람에 비춰 자신을 평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차별과 억압의 잣대를 들이밀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상'을 결정하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우리는 모두 정상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상이란 관념 자체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지금까지 옳다고, 정상적이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해 온 모든 것이 정말로 당연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자,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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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킹의 8개 국어 - 서른 넘어 시작해 인생 레벨 업
와인킹(이재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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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신에 저는 외국어를 어제보다 좀 더 배워나갑니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들어가는 거죠. 이렇게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누구보다 그 언어를 더 잘하게 되는 경험을 7개의 외국어를 배우면서 빠짐없이 했거든요. 여러분도 비교 대상을 다른 사람이 아닌 '어제의 나'로 잡아보세요. 언어를 마스터하겠다는 헛된 욕심은 버리세요. 대신에 오늘 조금이라도 언어 공부를 하는 겁니다.           p.55


와인 관련 유튜브 채널 중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구독자를 보유한 와인킹은 스물아홉에 독일어를 10개월간 공부해서 독일 전문대학 입학자격을 따내고, 서른다섯에 중국어를 10개월간 공부해서 HSK 5급까지 따냈다. 지금은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일본어까지 더해 총 8개 언어를 구사하고 있으며, 어느덧 오십이 된 지금은 아홉 번째로 어떤 언어를 배울까 고민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해외에서 살았다거나, 원래 어학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올바른 방법을 알고, 약간의 열정만 있으면 결국 해낼 수 있는 것이 외국어 학습'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어른이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을 안내해준다. 새로운 언어를 1년 안에 마스터하면서, 매년 하나씩 할 수 있는 외국어가 늘어날 수 있다니 정말 꿈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나도, 우리도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싶은 마음이 아주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외국어를 잘하고 싶다는 로망은 아주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새롭게 무언가를 배우는 일은 결코 쉬운 결심이 아니다. 사회적 성취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닮고 싶은 어떤 세계에 닿기 위해 하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생업과 피곤에 밀려 미뤄지는 것들이 먼지만 쌓인 채 우리는 나이를 먹어간다. 그런데 이 책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동기 부여가 되어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늘 하지 않으면 내가 필요로 할 때, 내가 원할 때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 외국어 능력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오늘 하지 않으면 절대로 해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오늘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응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섯 개 언어를 구사하게 되었을 때부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머릿속에 언어들의 방이 만들어지더라고요. 언어별 단어와 문장 구조 등이 각 언어의 방에 들어가 차곡차곡 정리된다는 느낌이 들었죠. 미국 친구와 얘기하다 독일 친구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영어의 방이 닫히고 독일어의 방이 열렸습니다. 영어의 방문은 이미 닫혔기 때문에 영단어를 섞지 않고 오로지 독일어로만 얘기할 수 있었어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속도는 공부를 계속할수록 점점 빨라졌습니다.               p.254


저자는 말한다. 아무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수업만 따라가서는 1년 만에 배울 수 있는 외국어를 10년간 배워야 한다고. 공부에는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오늘내일 쓰고 모레 버리게 되는 능력도 아니라고 말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외국어 학습의 어려움을 풀어내는 열쇠는 천부적인 재능이 아니라, 해당 외국어를 얼마나 절실히 배우고자 하는지 그 '필요성'을 스스로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는 그 외국어를 좀 더 빠르게 잘 배우고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본적인 공부만 하면서 본인의 외국어 실력이 쑥쑥 늘기를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두 번 수업을 듣거나, 며칠 공부하는 걸로 뭔가 달라지길 기대한다. 저자는 수업을 듣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수업과 수업 사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는가, 해당 외국어에 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야만 외국어 실력이 늘 수 있다고 말한다. 


어른들의 언어습득력은 마치 방수포 같다. 흡수는커녕 살짝 젖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보다 나은 사람이 제시하는 방법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릴 때 시작할수록 언어 습득 능력이 월등히 높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온 주입식 교육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졸업 후에는 사는 게 바빠서, 혹은 제대로 된 방법을 몰라서 외국어 실력을 키울 수 없었다. 하지만 십 대, 이십 대로 돌아가서 다시 외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제대로 된 방법으로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잘 맞는 최적의 언어학습법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저자가 8개 국어를 구사하게 된 데에도 올바른 학습법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그 경험을 나누고 싶어 이 책을 썼고, 이제 독자인 우리가 잘 읽고 활용해보기만 하면 된다. 이 책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늦은 나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와인킹의 1년 안에 끝장내는 언어 공부 노하우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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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0 : 구상섬전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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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요한 가을밤,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은, 무언가에 깊이 매료될 수 있느냐에 달린 거란다.' 나는 이제 아버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내 삶에는 빠르게 상공을 날아가는 미사일처럼 목표물을 폭파하고 싶다는 갈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출세나 성공을 위한 목표가 아니라 내 삶의 완결을 의미했다. 나는 내가 왜 거기에 가려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냥 가고 싶었다. 그곳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목표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p.23


천둥 번개가 몰아치고 있던 밤이었다. 그날은 열네 살 소년 천의 생일이었다. 천은 날씨 덕분에 온 우주가 곳곳에서 번쩍이는 번개와 자신의 집만으로 이루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폭우는 갈수록 심해졌고, 사나운 폭우가 몰아치는 밤이라는 배경이 집을 더 소중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평소에 늘 바쁘던 부모님이었지만 그날은 케이크에 초를 켜고 둘러앉아 천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아버지는 천에게 '결국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은, 무언가에 깊이 매료될 수 있느냐에 달린 거'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케이크에 꽂힌 초를 가리키며, 이런 게 바로 생명이고 인생이라고, 미풍도 견디지 못할 만큼 약하고 불안정한거라고 말한다. 그떼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며 창밖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그리고 그것이 날아들어 왔다.


농구공만한 크기에 희미하게 붉은빛을 띤 그것은 검붉은 화염 같은 긴 꼬리를 매달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뜰 수 없는 섬광과 귀를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천의 부모님은 한순간 재로 변해 버렸다. 이상한 것은 주변의 다른 어떤 것도 불탄 흔적이 없었다는 거다. 부모님이 앉았던 나무 의자는 흠집조차 없이 멀쩡했고, 재를 떨어내자 얼음장처럼 차갑기까지 했다. 천은 구 형태의 기묘한 번개인 ‘구상섬전(Ball Lightning)’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고, 그것의 비밀을 풀어내겠다고 다짐한다. 아버지가 이야기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천이 물리학자가 되어 구상섬전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 서사이다. 구상섬전의 실체에 가까워질수록 기존의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잇따라 나타나는데, 과연 기존의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천은 부모님을 한순간에 데려가 버린 그것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까. 




"파커 박사님, 아주 중요한 연구가 될 겁니다. 만약 정말로 우리 세계를 관측하는 초월적인 관측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된다면 인류의 행동은 훨씬 더 신중해질 겁니다....... 비유하자면 인류 사회 전체도 불확정적인 양자 상태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렇지만 그런 초월적 관측자가 있다면 인류 사회를 다시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상태로 '붕괴' 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 초월적 관측자를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지난 전쟁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p.449


이 작품은 아시아 작가 최초로 ‘SF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삼체 신드롬’을 일으킨 SF 거장 류츠신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이 2005년에 출간되었고, <삼체> 3부작이 2006년부터 연재가 되었으니, 프리퀄 격인 작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삼체>는 전체 3권을 합하면 거의 이천 페이지 가까이 되는 압도적인 페이지라 엄청난 분량의 압박을 견뎌야 하는 작품이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삼체> 시즌 1도 8부작이나 되어서, 이 시리즈가 궁금했다면 이번 작품으로 시작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넷플릭스 시리즈로는 시즌 2와 시즌 3가 제작될 예정이라고 하고, 영화화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1960년대 문화 대혁명부터 시작해 텐안먼 사태, 양탄 공정 등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거쳐 수백 년 후 외계 함대와의 마지막 전쟁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스토리라 영상화 되어도 분량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삼체> 시리즈는 단순히 몇 줄의 줄거리 요약으로는 정리할 수 없을 만큼 우주에 관한 놀라운 상상력과 시간의 본질과 창세의 비밀에 통찰력이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작가의 방대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천체 물리학과 수학이라는 학문의 매우 리얼한 미래를 보여주었던 <삼체> 3부작만큼 프리퀄 격인 <삼체 O 구상섬전>도 과학적인 정보와 놀라운 상상력, 탄탄한 구성과 서사로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 작품은 부모를 잃은 과학자 천이 그 비밀을 밝히기 위해 무기에 매혹된 장교 린윈, 물리학자 딩이와 함께 집요하게 탐구해 나가는 과정을 주요 서사로 냉전 시대의 역사적 상흔과 과학적 열망이 전쟁과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아이러니를 함께 그려내고 있다. 인류 문명 전체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으면서도, 흘러가는 서사 자체가 굉장히 스릴 넘치고 흥미진진해서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작품이기도 했다. <삼체> 3부작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으며,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도 있기 때문에 함께 읽어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혹은 <삼체> 시리즈의 유명세는 알고 있었지만 방대한 분량 때문에 선뜻 시작하지 못했다면, 이번 작품이 그 세계로 향하는 완벽한 입문서가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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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미국사 - 트럼프를 탄생시킨 미국 역사 이야기
김봉중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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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와 균형'의 원칙은 미국 헌법의 뿌리 깊은 근간이다.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며, 단순한 법의 모음이 아니라 '건국의 아버지들'이 경험한 억압과 자유에 대한 열망의 산물이다. 그들은 영국 통치하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의 틀을 구축했다. 또한 당시 유럽에서 확산되고 있던 계몽주의 사상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사상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잇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헌법은 '견제와 균형'의 틀 위에 세워졌다.              p.63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은 미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기존 정치 문법을 거부한 채 부동산 재벌로서 쌓은 막강한 재력과 대중적 인지도를 앞세워 정계에 뛰어들었다. 미국에서 거대 자본가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는 일 또한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과 대담한 언변, 그리고 '아웃사이더'라는 신선함으로 정면 돌파했다. 하지만 지금, 트럼프의 독선적인 행보와 정책들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민주주의가 돌이킬 수 없는 퇴보를 겪고 있다는 우려가 널리 퍼지고 있다. 오죽하면 그가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될지 모른다는 걱정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트럼프가 미국과 세계를 회복 불가능한 혼돈으로 몰아넣을지, 아니면 뜻밖의 변화를 이끌어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전례 없는 혼돈과 불확실성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더욱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김봉중 교수는 국내 최고의 역사 스토리텔러이자 미국인에게 미국사를 가르쳤던 미국사 최고 권위자로 알려졌다. <벌거벗은 세계사>에 출연해 미국사 강의를 할 때마다 크나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책 한권으로 미국사 명강의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저자는 트럼프 시대를 미국 역사라는 큰 흐름 속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 책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트럼프 시대가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할지, 반대로 미국 역사의 전환점이 될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트럼프라는 인물을 통해 미국의 역사와 문명을 냉철하게 바라본다. 




9.11 테러 직후 부시 대통령은 의회에서 "누구든 미국 편에 서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의 적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말은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신호탄이었다. 전 세계 국가들에게 테러 지원을 멈추고 미국과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누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테러와의 전쟁은 실패로 귀결되었고 그 단순한 이분법은 미국 국내 정치에까지 번졌다. 보수와 진보, '우리'와 '그들'의 벽은 더욱 견고해졌다.            p.216~217


다양성, 문화유산, 불공정, 사회 정의, 격차, 암묵적인 편견, 양극화, 확증 편향, 페미니즘, 논바이너리, 성별 정체성, 젠더 이데올로기, 취약 계층, 마이너리티, 기후 위기.... 등등 이러한 표현들이 '트럼프 금지어'라는 사실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러한 금기어 리스트는 지금이 무슨 전체주의 국가 시절이라도 되나 싶게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1984>가 전체주의 국가가 사실을 왜곡하고 조장해 정부가 원하는 대로 여론과 역사를 통제하는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작품이듯이, 지금의 트럼프 금지어 정책 역시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의 토대를 흔드는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 책은 미국 정치, 경제, 외교, 사회, 문화의 역사적 흐름을 훑으며 트럼프라는 ‘결과’가 탄생하게 된 미스터리를 해부한다. 


트럼프는 정치적 아웃사이더로서 기존의 정치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경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게다가 그는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사업가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최초 사례이기도 하다. 기존 대통령들이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도 모두 제도적 틀 내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며 민주주의의 전통을 지켜냈던 것에 반해, 트럼프는 전통적 절차와 규범을 무시하거나 훼손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단순히 기존 정치권 밖의 인물인 데서 그치지 않고 헌법 정신과 민주적 전통을 한순간에 무시하고 흔든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이단아가 아닌 현대 미국 민주주의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인물이다. 현재 미국은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극단의 시대를 겪고 있으며, 무엇으로 이 분열을 조금이라도 완화할 수 있을지 진지한 고민이 절실하다.  오늘날 한국이 이 자리에 서기까지 미국의 영향력은 지대했는데, 트럼프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오랜 시간 쌓아온 양국간 가치와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에 대해서도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025년 현재의 미국이 왜, 이러한 모습이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앞으로의 미국과 한국, 세계의 모습을 조망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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