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숲 양조장집
도다 준코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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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빠의 말이 얼마나 기뻤던가. 그 기분을 잊지 않기 위해 최대한 많이 먹고 많이 웃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스즈메간장에는 여자가 네 명 있다. 늘 엄격한 얼굴의 '빠득빠득' 다즈코, 꿈속에 젖어 '둥실둥실' 떠다니는 엄마, 여왕처럼 도도한 '삐죽삐죽' 사쿠라코, 그리고 만사태평한 '헤실헤실' 긴카였다.
아빠와 오하라 도지가 죽고 양조장에는 다즈코 혼자 남았다. 긴카가 돕겠다고 나섰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p.158~159

 

제163회 나오키상 후보작이자, 국내에 두 번째로 소개되는 도다 준코의 신작이다. 150년 가까이 대대로 이어온 유서 깊은 간장 양조장 집안을 배경으로 한 소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초등학교 4학년인 긴카는 오사카에서 화가인 아빠와 요리를 잘하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아빠가 그리는 그림은 상업적이지 못해 거의 팔리지 않았고,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가게 물건이나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벽이 있다. 지갑에 돈이 있어도, 물건이 필요하지 않아도 갑자기 손이 움직여 훔치고는 금방 들켜버린다.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후회하고 울지만, 뒷수습은 언제나 딸인 긴카의 몫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있는지도 몰랐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아버지가 가업인 간장 양조장을 이어야 하기에 본가로 가서 살게 된다. 나라현에 있는 아버지의 본가는 뒤로는 대나무 숲이 펼쳐져 있고, 오래된 살림집과 양조장 건물이 넓은 부지에 함께 있는 곳이었다. 긴카는 그곳에서 엄격한 할머니와 열한 살짜리 고모와 함께 지내게 되는데, 아빠는 그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양조장 일을 소홀히 하고, 천진난만하고 무신경한 엄마는 절약이 몸에 밴 할머니와 잘 지내지 못한다. 그 사이에서 긴카는 아빠 대신 양조장 일을 거들고, 엄마가 친 사고를 뒷수습하며 홀로 고군분투한다. 그 와중에 엄마의 손버릇을 감싸주려다 친구들에게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고, 억울했지만 그저 견뎌낸다. 게다가 자신이 아빠의 진짜 딸이 아니라 의붓자식이라는 걸 알게 되는데, 긴카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들을 겪다 보니 무엇을 어떻게 느껴야 할지 혼란스럽다.

 

 

 

"너는 정말 잘 웃는구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마 단순해서일 거예요."
"내 말에 웃어주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다."
다즈코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얼굴은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눈빛에는 지금껏 알아차리지 못한 온기가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갓 찐 콩처럼 따뜻한 눈빛이다.        p.369

 

이 작품은 긴카라는 한 소녀가 환갑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의 수십 년을 고스란히 펼쳐 보이고 있다. 대대로 당주의 눈에만 보인다는 집안의 수호신 좌부동자가 나온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유서 깊은 간장 양조장에서의 삶은 어른들에게도, 어린이에게도 결코 수월하지가 않다. 그 와중에 각자가 숨기고 있는 비밀과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거짓말들이 쌓이고 쌓여서 독이 되고, 불행을 불러오고, 재앙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굴레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들 가족의 얽히고 설킨 인연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야기였다. 그 누구도 결코 바란 적 없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참고, 견디고,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일도 생기는 것이 삶이라는 걸, 작가는 긴카라는 소녀의 목소리로 들려 준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의 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고 괴롭고 힘들어서 원망하는 긴카, 한 집안의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벌이없이 생활비를 본가에서 받아 쓰던 아빠, 요리, 청소 등 실력은 뛰어나지만 도벽이 있어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엄마, 엄격한 성품과는 달리 엄청난 비밀을 간직한 할머니, 그리고 예쁜 외모와 달리 밖으로 엇나가기만 하는 고모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하나씩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이 모든 인물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도다 준코의 뛰어난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작품은 인간의 가혹한 운명을 드라마틱하게 그리기로 유명한 도다 준코의 작품 중에서도 주인공이 가장 고생을 덜하는 편이라고 하는데, 긴카의 드라마틱한 생을 함께 겪어 내고 나니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상상이 되었다. 도다 준코의 다른 작품들도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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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KUNAMATATA 2023-03-05 0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뿌고 기분좋아지는 피오나공주(?)의 방이네요~^^
잘 읽고갑니다

피오나 2023-03-05 15:11   좋아요 1 | URL
자주 오셔서 책 이야기 나눠요^^
 
빅 도어 프라이즈
M. O. 월시 지음, 송섬별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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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삶은 어떤 삶인거지? 이런저런 일자리를 전전하고, 집안일을 하고, 일요일이면 십자말풀이를 하며 잡담을 나누느라 여태 미뤄왔던 꿈은 뭐였지? 그런데 살면서 이루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일들을 과연 꿈이라고 말해도 될까? 인생이 반이나 지나갈 때까지 자신에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그런 꿈이 숙명이 될 수도 있을까? 나의 진정한 소명은 뭘까? ... 디어필드에서 평생을 보내게 되는 걸까? 이렇게 살겠다고 태어난 걸까? 어째서 더 큰일은 못 해? 더 대단한 일은? 나 역시 조만간 마흔이 되지 않나?           p.29

 

루이지애나의 작은 마을 디어필드의 한 식료품점에 어느 날 이상한 기계가 하나 등장한다. 디엔에이믹스라는 기계는 ‘DNA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모든 것이 잘 이루어졌다면 될 수 있었을 나의 가능한 신분’을 알려준다. 비용은 단돈 2달러, 면봉으로 볼 안쪽을 문지르고 기계의 구멍 안으로 집어 넣기만 하면 된다. 결과지에 담겨 있는 가능성을 믿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된다. 결과지에 핵물리학자가 될 거라고 써 있다는 이유로 앞으로 역사 수업은 듣지 않겠다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사업가가 될 수 있다는 결과를 보고 갑작스레 가게를 시작해 일주일 만에 대박이 난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마냥 무모하다고만 할 수도 없는 것이, 지금의 나와는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에 흔들리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중년의 역사 교사 더글러스 하버드와 그의 아내 셰릴린, 더글러스의 학교 제자인 제이컵과 죽은 쌍둥이 형의 여자친구였던 트리나, 그리고 트리나의 삼촌이자 마을의 하나뿐인 신부인 피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다. 평범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던 그들의 잔잔한 일상에 디엔에이믹스라는 기계가 돌멩이를 던졌고, 그로 인해 생긴 작은 파문이 점점 더 커다란 물결이 되어 버린다. 운 좋게 얻은 큰 선물이라는 뜻의 제목 ‘빅 도어 프라이즈Big Door Prize’처럼, 이들이 얻게 되는 것은 예상치 못했던 선물일까, 아니면 받지 않는 것만 못하는 재앙일까. 과연 각자의 '진짜 운명'은 지금의 현실과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들어 줄까.

 

 

 

우리가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추억하며 웃으면 되잖아. 삶을 그런 방식으로 바라보는 건 애초부터 우리가 원한 게 아니지 않나? 기계가 우리의 운명을 알려주다니. 우리의 인생이 이미 정해진 거라니, 한꺼번에 정해진 거라니. 말도 안 되지 않나? 실망스럽지 않나? 차마 상상하기도 싫지 않나? 난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해. 그렇게 말할 것이다. 고작 종이 쪼가리 하나 때문에, 우리가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는 없어.        p.257~258

 

누구나 살다 보면 기습적으로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제대로 된 취미 하나 없이, 책장에 장식한 멋진 트로피 하나 없이,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게다가 자신이 좋아해서 시작한 일조차도 전만큼 보람차지 않고, 그 직업으로 인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도 아니고, 이 지구상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럴 때 단돈 2달러만 내면 나의 DNA를 읽어서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내 가능성을 알려주는 기계가 있다면 어떨까.

 

모든 것이 제대로 됐다면 내가 했을 수도 있는 일, 지금과 다른 세계에서는 내가 될 수도 있었던 것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이 작품은 그렇게 알게 된 각자의 운명으로 인해 삶이 바뀌고, 흔들리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재미없는 삶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디엔에이믹스가 알려준 미래에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삶이 '운 좋게 얻은 큰 선물'이 아니라, 사소한 선택들과 매 순간의 고군분투를 통해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을 사랑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마이 선샤인 어웨이>에서 사랑과 집착을 주제로 한 소년의 성장담을 그려냈던 M. O. 월시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한 시즌짜리 미국 TV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유머와 페이소스가 넘치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애플TV+ 10부작 드라마로 2023년 상반기 방영을 앞두고 있다고 하니 안락하고 평온한 마을 전체를 흔들어 놓은 마법 같은 이야기가 영상으로는 또 어떨지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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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학대에서 벗어나기
비벌리 엔젤 지음, 정영은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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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학대는 피해자에게 감옥이 된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관계를 끝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기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서적 학대는 피해자를 무너뜨린다. 피해자는 그 결과 자신감과 용기를 잃게 되며, 심지어 삶에 대한 의지를 잃기도 한다. 감옥의 목적은 무엇일까? 누군가를 가두고, 벌주고, 통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서적 학대 피해자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그러므로 처벌을 받을 이유 또한 없다. 정서적 학대를 겪고 있는 당신이 이 중요한 사실을 깨우치도록 돕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표다.        p.25

 

얼마 전에 아주 충격적인 뉴스 보도를 봤다. 전 직장 동료를 감금해 낮에는 자신들의 아이들을 돌보게 하고 밤에는 성매매를 시킨 40대 부부가 경찰에 검거됐다는 소식이었다. 보도된 내용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정상적인 성인 여성을 삼 년 넘게 이런 식으로 가스라이팅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피해자는 검거된 부부의 권유로 일면식도 없는 남자와 결혼까지 했고, 이들로부터 폭력과 감시를 받았으며, 수천여 차례 성매매를 하고 그 돈까지 모조리 빼앗겼다고 한다. 그야말로 가스라이팅의 최고 악질적인 단계가 아니었나 싶다.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신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하며 이런 무시무시한 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

 

세계적 권위의 35년 경력 전문 심리치료사 비벌리 엔젤은 수없이 많은 학대 피해자들을 마주하며 ‘정서적 학대’를 다룬 책을 네 권이나 펴냈다. 국내에도 여러 권 번역 출간이 되어 있다. 이번에 나온 책은 그 동안의 책들에서 미처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낸 것이다. 정서적 학대 사례들과 상담 경험을 토대로 피해자들의 심적 치유를 위해 개발한 프로그램을 총정리한 ‘완결판’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이 자신이 지금까지 쓴 책 중 가장 중요한 책이 될 거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당신은 아마도 파트너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의 감정을 살피는데 익숙할 것이다. 또 파트너가 살아온 고통스러운 인생에 대해, 그리고 그가 매일 마주하는 고난에 대해 깊은 연민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런 연민의 마음을 품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 자신의 고난은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치해왔을 것이며, 무시하고 상처주고 학대하는 파트너의 행동 때문에 받은 당신의 고통은 별 것 아니라고 치부했을 것이다... 나의 바람은 그 연민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p.221

 

사실 정서적 학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가장 알아보기 어려운 학대에 속한다. 너무도 교묘해서 피해자인 당사자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피해 자체를 부정하며 착각이라 믿으려 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정서적 학대 사실을 깨달은 후에도 관계를 끝내지 못하는 피해자가 더 많다. 바로 지독하고 유해한 수치심 때문이다. 정서적 학대를 알아채고 그로 인한 피해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치심을 극복하고 치유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누구도 피해자가 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이 됐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있다고 이 책은 알려준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학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이해한 후, 필요한 전략을 활용하여 학대적인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이 책이 훌륭한 가이드이자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창피주기, 깍아내리기, 폄하하고 비하하기, 반복적으로 과거의 실수 들이밀기, 부정적인 방식으로 타인과 비교하기 등은 모두 심한 수치심을 유발하는 정서적 학대이다. 언어폭력은 종종 '조언'이나 '충고'의 탈을 쓰고 있기에, 피해자로 하여금 그것이 학대라는 것을 눈치챌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나 가스라이팅은 성범죄, 데이트 폭력의 일환으로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되기도 하고, 가정폭력의 새로운 유형으로도 조명 받고 있어 점차 주위에 만연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내가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플 따름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피해자가 되었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자신이 정신적 학대의 피해자인지 여부를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피해자가 겪는 대표적인 증상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실제 사례와 더불어 스스로 삶을 지켜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자기강화 훈련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이 책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정서적 학대 피해자들에게 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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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 젤렌스키 대통령 항전 연설문집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지음, 박누리.박상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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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휴전을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겠느냐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이상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겠습니까? 저는 우리 나라 영웅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할 수 있습니다. 명성, 지지율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대통령 자리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는 우리의 영토입니다. 역사는 불공평합니다. 이 전쟁을 시작한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우리가 끝내야 합니다.             p.41

 

2022년 2월 24일 새벽 4시 30분, 러시아의 군대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수적으로 크게 열세인 우크라이나 군대가 무너지고, 우크라이나 정부 또한 붕괴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전쟁은 푸틴이 기대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맞서 싸우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 역시 함께 맞서 싸우고 있다. 그는 다른 나라로 도망가기는커녕, 수도 키이우에 남아 매일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가 대통령을 취임한 2019년부터 해왔던 천 번이 넘는 연설 중에 18편을 골라 수록했다. 이미 벌어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건 우리가 될 수도 있다.

 

뉴스 보도를 통해 만나는 평범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모습에 먹먹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많다. 그들은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는 대신,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서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이 책 속에 있다. 이 책을 읽기 전과 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생각이 바뀌진 않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에 대해서, 그들의 용기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침략에 맞서는 한 국가의 이야기이자, 이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에 앞장선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전쟁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답해야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당신은 침략과 전쟁 도발을 지지합니까, 아니면 자신을 지키려는 이들을 지지합니까? 우리 편에서는 그 무엇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단 한 사람도 사회와 우리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우리가 우리 국민을 구하는 것은 우리 나라를 구하는 일입니다.          p.184

 

젤렌스키의 연설 중 가장 중요한 연설은 전쟁이 시작되고 서른여덟 시간 만에 나온 32초짜리 영상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있다고. 우리의 군인들이 여기에 있고, 시민 사회가 여기에 있다고. 우리는 우리의 독립을 지켜낼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그 후로 몇 날,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젤렌스키는 끊임없이 연설을 해왔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고, 우크라이나의 수도는 푸틴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젤렌스키는 그 모든 순간들 속에서 우크라이나 말로 '투트', 즉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크라이나 국민들도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어느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남의 전쟁'이 아니다. 전쟁은 항상 세계 곳곳에서 끊이지 않았고, 만약 유럽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안전한 나라는 세상에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래서 항상 우크라이나의 현재 상황을 관심 가지고 지켜보고, 그들의 행보를 응원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일상을 파괴하고, 각자가 믿는 가치를 흔들리게 하며, 인류 문명 전체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전쟁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지켜내야 한다. 결코 전쟁이 일상적인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크라이나를 잊지 말자. 시대와 장소와 형태를 바꿔가며 지속되어온 폭력과 전쟁을 더 이상 무관심으로 바라보지 말자. 이 책의 인세는 전액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 설립된 유나이티드24에 기부된다고 한다.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위해 작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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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오브 아트 - 80점의 명화로 보는 색의 미술사
클로이 애슈비 지음, 김하니 옮김 / 아르카디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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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는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혹독한 대가도 치르게 했다. 미술의 역사에서 화가와 견습생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의학이 도래하기 전에는 미술 재료, 특히 안료가 인간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지지 않았다. 특정 안료가 인체에 치명적인 독성을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도 사용이 금지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했다.          p.80

 

우리는 수많은 색을 보고 느끼며 살아 간다.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삶의 모든 순간에 색이 보내는 시각적 신호의 영향을 받고 있다. 컬러는 우리의 지각과 인식, 기억, 판단, 이해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정서를 대변하고 심리를 조율하며,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당장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음식을 먹을지, 무엇을 살지를 결정할 때도 색깔이 개입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우리는 색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살지만, 사실 특정 색이 왜 그런 색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매력적이며 때로는 과감한 색채를 보여준 80점의 명화를 통해 '색의 미술사'를 보여준다. 선사 시대의 고대 동굴벽화에서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로코코를 거치고,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인상주의를 넘어서 표현주의와 팝 아트, 그리고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색'을 통해서 살펴본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명화 작품을 두고, 왼쪽 페이지에는 해당 작품에 대한 배경과 관련된 설명이 있다. 무엇보다 각각의 명화에 사용된 팬톤 컬러 코드를 수록해 화가의 팔레트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명화에 대한 신선한 해석이자, 화가의 컬러 사용법을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책이다.

 

 

이 작품은 현실과 꿈 사이를 오가는 다채로운 색 팔레트를 보여준다. 빛을 한껏 끌어당긴 빨간색과 초록색의 사과, 옅은 색의 포도 그리고 귤이 가득 담긴 과일 그릇은 실재하는 것처럼 생생하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프랑스 남부의 풍경 또한 사실적이다. 야자수는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하늘은 파랑, 노랑,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다. 아마도 낮에서 밤으로 변화하는 해질녘에 그린 듯하다. 창문으로 들어온 자연광은 탁자 위를 은빛 라일락색으로 물들인다. 그러나 두 인물에게 오면 현실이 와해되기 시작한다.           p.142

 

인류가 그림을 그리기 전부터 색을 내는 안료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처음에는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대신 몸과 얼굴을 치장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 물건을 장식하는 데도 활용하게 되고, 이후 그림을 그리는 데도 점차 사용하게 된다. 인류 최초로 인공 안료를 만든 것은 이집트인들이었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은 검정, 하양, 노랑, 초록, 빨강, 파랑의 여섯 가지 색을 사용했다. 선사 시대의 벽화에 색이 사용된 것도 감탄스러웠고, 인류 최초의 인공 안료인 이집션 블루를 만들어 낸 것이 청동기 시대였다는 것도 놀라웠다.

 

연대기 순으로 나열된 각각의 작품들에 대한 글에는 색의 의미를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안료와 도구, 기법의 발전 과정이나 색 인식론, 색채 심리학 등 색의 역사와 함께 입체적으로 엮어내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오로지 '색'이라는 키워드로 명화를 재해석하고 있어 그 관점을 따라 가는 것도 매우 재미있었다.

 

 

한 페이지에 한 작품씩을 구성해서 한 눈에 들어오는 구성도 이 책을 더 쉽게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팬톤 컬러 코드가 포함된 인포그래픽 팔레트를 통해서 해당 작품에 사용된 색 중에서 작품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에 따라 구성된 색채 조합을 만날 수 있는 점도 여타의 미술사를 다루고 있는 책들에 비해 특별한 점이라 하겠다.

 

색의 역사는 재료와 과학, 기술, 심리학 및 인류 자체의 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현대미술에 있어서도 색은 예술가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표현적인 요소이다. 흙에서부터 보석과 으깬 곤충, 인체에 해로운 화학 물질에 이르기까지 색을 만드는 데 사용했던 재료들과 이를 위한 예술가들의 험난한 노력에 대해 알게 되면, 각각의 색상에 대해서 더 의미있게 바라봐야겠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우리는 색이 없는 세상은 물론이고 색이 고정된 세상도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색의 의미와 형태, 그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주위에 언제나 존재하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치는 컬러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색채'를 통해서 재해석된 명화로 보는 미술사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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