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텃밭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캐시 슬랙 지음, 박민정 옮김 / 로즈윙클프레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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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자연은 나를 위로하고 삶의 가치를 일깨운다. 여기에 신은 필요 없다. 내게 필요한 모든 위로는 자연 안에 있다. 나의 도덕적 나침반도 자연에서 비롯된다. 자연이야말로 진짜 현실이다. 초자연 따위는 무시하자. 중요한 것은 지구고, 자연이며, 생명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일부임을 기억하는 순간, 마음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P.84


언젠가 나이들면 시골에 집을 짓고 살 거라고, 혹은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상상 속의 그 집에서는 텃밭을 가꾸는 풍경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 끼니 때가 되면 텃밭으로 나가 그날 텃밭에 무엇이 열렸는지 보고 그걸 수확해 그 채소들로 할 수 있는 요리들을 생각해 보는 거다. 그렇게 채소를 씻고, 다듬고, 조리하는 과정은 조록조록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싱그러운 채소의 향을 맡고, 도마에 칼이 탁탁탁 부딪히는 감촉을 느끼는 시간이다. 물론 도시에서도 요리를 할 때 비슷한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마트나 시장에서 구입한 채소는 직접 재배해서 수확한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물론 시골살이라는 것이 마냥 낭만적인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선뜻 불편한 삶을 시작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텃밭이나 정원을 가꾸며 사는 삶에 대한 책이 나오면 꼭 챙겨 보는 편이다. 이번에 만난 책도 그래서 궁금했다. 번아웃으로 인해 불안과 우울로 힘들었던 저자가 텃밭에 나가 밭을 일구고 채소를 키우면서 마음의 치유를 얻게 된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런던의 대형 광고 회사에서 글로벌 마케팅 전략 책임자로 일하며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빠르게 승진했고, 지미추 구두를 신고 비행기로 세계를 누비며 잠시라도 블랙베리 휴대전화가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성공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피도 눈물도 없는 세계였고, 10년 넘게 스트레스를 받아왔으니 번아웃은 너무나도 예상된 결과이기도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인지 기능에 문제를 만들었고, 감정적으로도 붕괴하기 시작했으며, 신체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삶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자, 어쩔 수 없이 힘들게 쌓아온 커리어를 포기하게 된 것이다. 그후 1년 가까이, 차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소파에서 꼼짝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다 뜻밖의 곳에서 회복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하지만 자연은 내게 삶의 고삐를 다시 넘겨주었다. 저녁거리가 없어 빈 바구니를 들고 아무 계획 없이 채소밭으로 올라가 케일, 양배추, 비트, 볼로티 콩을 수확해 돌아올 때면 내 머릿속은 요리에 대한 아이디어로 가득 찼다. 수확도 요리도 다 내가 했다. 그 모든 일을 해내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나는 바로 이 점 때문에 먹거리를 직접 기르는 일이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정원을 가꾸거나 시골로 나갈 때와는 다른 점이다. 여기에는 주체적인 삶의 태도가 있다.              P.147


텃밭 농사가 저자를 치유한 이유는 뭘까. 산책도 있고, 개를 키우는 것도 있고, 문학, 혹은 정원 가꾸기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채소 기르기가 삶에 행복을 가져다 준 구체적인 이유는 뭘까 너무 궁금했다. 이 책은 코츠월드의 사계절을 따라가며 6월부터 시작해 달마나 한 장씩 구성되어 있다. 여름비 덕분에 짙은 초콜릿색을 띠는 흙에서 식물들이 하늘을 향해 쑥쑥 자라는 6월, 온 천지에 생명이 가득 넘실거리며 매일매일 수확되기를 기다리는 7월, 게으름을 피워도 수확물이 넘쳐나 손이 바빠지는 8월, 여름 수확과 가을 수확이 잠시 겹치는 짧지만 찬란한 순간을 만날 수 있는 9월 등 각각의 달마다 계절의 풍경과 텃밭의 모습들이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어 읽는 내내 힐링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빈 요구르트 병에 무턱대고 씨앗을 뿌리고 임시로 만든 텃밭에서 울퉁불퉁 못생긴 당근을 돌보며 보낸 어느 한 해의 이야기는 채소밭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구해줄 수 있었는지에 대한 마법같은 드라마이기도 하다. 손으로 흙을 만지고 작은 씨앗을 심고, 땅에서 자란 채소들을 수확해 요리를 한다는 것. 사계절을 따라 제철 식재료로 요리를 하는 일은 그 재료를 길러낸 자연과 다시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냉장고 안, 부엌, 장바구니, 혹은 저녁 식탁 위에 존재하는 자연을 만난다는 것. 채소 재배와 요리 모두 저자에게는 자연과의 연결 통로가 되어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채소밭은 조용히 저자를 우울의 침잠에서 건져주었다. 자연과 이어주고, 자신과 타인을 돌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먹거리를 직접 생산한다는 것이 삶의 통제권을 되찾는 일이라는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혼자 힘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한 한 끼를 마련해 낸다는 것의 의미가 현실적으로 확 와닿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고요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얻는 힐링이라니, 자연에 둘러싸여 자연을 받아들이는 삶에 대한 로망이 한층 깊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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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이 여행 일본어 카와이 일본어
레이쌤(김하경) 지음 / 길벗이지톡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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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쉽고 귀여운 일본어 입문서' 라는 타이틀로 헬로키티와 함께 일본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던 <카와이 일본어 첫걸음>에 이어 후속작이 나왔다. 이번에는 산리오캐릭터즈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 일본어이다. 판형이 작아져서 여행 중에 들고 다니면서 보기도 딱 좋고, 단어 위주로 잘 정리가 되어 있어서 이해하고 활용하기도 쉽다. 페이지 곳곳에서 산리오 캐릭터들의 사랑스러움과 귀여움을 맛볼 수 있어 더 재미있게 일본어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카와이 일본어 시리즈의 특징은 캐릭터 책꾸 스티커가 포함되어 있어 나만의 책으로 마음껏 꾸며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요즘 '책꾸'가 SNS에서 유행인데, 자신만의 감각으로 책을 장식하다보면 책을 더 열심히, 자주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다. 


게다가 예쁘고 귀엽고 친근한 캐릭터와 함께 시작하는 일본어 공부라니, 너무 신난다. 포차코와 먹으러 가자, 시나모롤과 쇼핑하러 가자, 폼폼푸린과 타러 가자, 쿠로미와 구경하러 가자, 마이멜로디와 쉬러 가자... 라는 식으로 각각의 주제에 맞게 캐릭터들을 선정했다. 상황별 여행 단어를 모았는데, 모든 일본어에 한글 발음 표기를 해서 초보자들도 부담없이 현지에서 활용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 책은 일본어를 전혀 몰라도 여행지에서 써먹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일본 여행에 꼭 필요한 핵심 표현만을 담았기 때문이다. 상황에 맞는 페이지만 펼치면, 그 순간 필요한 표현들을 바로 볼 수 있어 일본어 초보자들도 한글 발음을 따라 읽는 것으로 소통이 가능하다. 


초보자라면 문장을 그대로 읽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여행 단어를 중심으로 만들었다는 것도 특징이다. 본문의 QR를 찍으면 레이쌤의 강의를 보고 원어민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단어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문장으로도 말할 수 있도록 필수 패턴 10개를 따로 정리해 두었다. 상황별 단어에 패턴만 조합하면 바로 말할 수 있도록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어 좋았다. 




해외 여행을 갈 때마다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 누구나 한 번쯤 할 것이다. 학창시절 내내 외국어를 배워 왔지만, 정작 해외에 나가거나 외국인과 마주하게 되면 얼음처럼 굳어서 한 마디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말이다. 하지만 매일의 일상에 치여 마음 잡고 공부를 지속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부담없이, 쉽고, 재미있게 할 수 있다면 매일 조금씩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펼치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산리오 캐릭터들이 가득해 기분 좋게 그날의 공부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일본 여행을 가거나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일본어 단어들이 귀에 꽂히곤 하면, 다시 한번 일본어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자주 먹게 되곤 했다. 특히나 이 책은 어려운 문법이나 복잡한 문장을 모르더라도, 현지에서 소통할 수 있도록 구성했기에 여행시에 더욱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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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완벽주의자 - 내 안의 가혹한 비평가를 버리고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법
엘런 헨드릭슨 지음, 문희경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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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 같은 완벽주의자는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이 통제 불능에 이른 사람이다... 이 책은 당신이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자기 계발서가 아니다. 당신은 이미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지 않은가. 그보다 이 책은 하나의 허락, 숨을 돌릴 때 당신의 삶이 어떨지 탐구하게끔 하는 허락이다.  열심히 밀어붙이는 것을 멈추는 시간, 성과보다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다. 당신은 계속 완벽주의자겠지만 이제 그 완벽주의는 당신의 적이 아니라 조력자가 될 것이다.              p.42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매사에 노력해야 하고,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될거라는 말을 들어왔다. 혼자 뒤쳐질까봐, 누군가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까봐 불안해하고, 전전전긍긍하며 바쁘게, 열심히 살다보니 결국 스스로에게 너무도 인색하게 살아왔다. 남들에 비하면 아직도 부족하다거나, 이 정도로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다면 당신도 완벽주의자일지 모른다.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완벽주의 성향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 스스로에게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댄다. 이러한 기준이 좋은 결과로 이끌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만족, 외로움, 고립감으로 내몰기도 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20년 경력의 임상심리학자이자 그 자신도 완벽주의자로 살아온 저자 엘런 헨드릭슨은 이 책에서 완벽주의자들의 7가지 심리적 특징을 정리해 각각의 성향을 긍정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자기비판, 미루기, 실수 곱씹기, 남과의 비교가 완벽주의자들의 심리적 특징이다. 완벽주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부정적으로 나타날 때의 심리, 즉 끝끝내 자신을 괜찮다고 느끼지 못하는 마음이 문제이다. 이 책은 자신에 대한 평판에 집착하거나, 기대가 너무 높아서 시작을 못 하거나, 뛰어난 사람을 볼 때 위축되거나 화가 나는 사람 등 다양한 성격의 완벽주의자들을 통해 더 나은 일상을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보여준다. 규칙이나 성과가 아닌 가치관에 따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들은 아주 간단한 사고와 행동의 전환만으로 가능하다. 중간 중간 '내 삶과 연결하기'라는 항목을 두어 책의 내용을 현실에서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해 직접적인 가이드를 해준다. 




완벽주의는 우리가 인상적인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적 존재가 되기보다 유능하고 남달리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들과 공유를 한다기보다는 친구들 앞에서 공연을 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완벽주의는 우리에게 항상 적절히 행동해야 하며, 모든 것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데 필요한 것은 취약성이다. 남들에게 어느 정도 혼란하고 불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p.380


서점에서 '완벽주의자'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면 꽤나 다양한 완벽주의자들을 만날 수 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실패가 두려운 완벽주의자, 불안한 완벽주의자, 착하고 섬세하고 독특한 완벽주의자, 나태한 완벽주의자 등등... 제목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에 완벽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알 것 같다. 가장 최근에 읽었던 것이 <나태한 완벽주의자>였는데, 이 책은 왜 우리는 완벽한 결과물을 꿈꾸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항상 그 자리에 멈춰있는 것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번에 만난 <유연한 완벽주의자>는 완벽주의자의 내면에 있는 자신에게 가혹한 비평가를 삶의 방해물이 아니라 든든한 친구로 삼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완벽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향을 조금씩 바꿔, 자신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도록 말이다. 


완전히 상반된 완벽주의자 두 명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인상깊었다. 서른여섯에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제작한 월트 디즈니와 전설적인 아동 TV 프로그램 진행자인 프레드 로저스는 모두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다. <백설공주>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첫 개봉 당시 현재 화폐 가치로 약 92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결국 디즈니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영화사에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었고 말이다. 하지만 디즈니는 자신과 타인에게 높은 기준을 강요하며 지독히 불안정하고, 극심한 외로움을 겪었다. 반면 31시즌에 걸쳐 총 895편의 에피소드를 내보낸 <로저스 아저씨네 이웃>을 이끈 프레드 로저스는 높은 기준과 유연성을, 책임감과 창의력을 마법처럼 잘 버무려 친근함과 겸손함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두 완벽주의자의 삶이 얼마나 다르게 흘러갔을 지는 짐작이 될 것이다. 저자는 두 완벽주의자의 삶 중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 우리에게 묻는다. 110퍼센트 애쓰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5퍼센트 정도 자신을 덜 몰아붙이거나, 10퍼센트 정도 자신에게 더 관대해지는 것이라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이다. 이 책이 제안하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변화의 기술을 통해 '유연하고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면, 지금의 충분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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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의 도시
연여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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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설마."

그럴 리 없다. 지난 23년간 줄곧 면역인이었다.

만약이라는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강한 거부감이 밀려왔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라는 단어는 이 모든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p.77


전 세계적인 토양 오염 이후 이제껏 인류에게서 볼 수 없었던 뿔을 가진 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도시마다 비율의 차이는 있으나 전체 인구의 절반은 각인이었고, 나머지는 면역인이라 불렀다. 각인은 뿔을 가진 인종이라고 멸시받았고, 아름다운 뿔을 노리는 커터의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뿔이 자라거나 회복할 때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야 했는데, 고통을 덜기 위해서는 흑각을 구해와야했다. 세계는 지상과 지하, 그리고 공중도시 라뎀으로 나뉘어 있었고, 자본가와 면역인을 위한 성역이 되어버린 라뎀이 도시 전체를 지배하고 통제했다. 라뎀은 재배부터 유통까지 엄격하게 관리한 흑각을 구매해 먹도록 했지만, 각인인 뱅커가 한 덩이에 40페이짜리 흑각을 고민 없이 집어 들어 살 수는 없었다. 결국 뿔이 자라는 고통은 각인과 그 가족이 감당해야 할 과제가 되어 버린다.


시진은 태어날 때부터 줄곧 빛이 들지 않는 그늘에서 자라왔다. 시진은 면역인으로 태어났지만, 가족 중 유일하게 누나는 '각인'이었다. 누나는 그로 인해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야 했고, 그래서 시진은 열 살 때부터 암석사막으로 나가 흑각을 구해와야만 했다.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신 뒤 세상에 둘만 남게 된 남매는 서로를 누구보다 아꼈지만, 각인과 면역인이라는 차이에서 오는 거리는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 오해를 쌓았고, 결국 자신의 삶을 비관하던 유진이 행방불명되고 만 것이다. 시진은 포기하지 않고 누나를 찾으면서, 암석사막의 야생 흑각을 불법 채취해 납품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평범했던 시진의 일상은 이웃이자 친구였던 ‘베르트’가 각인 혐오자에게 살해를 당하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시진은 친구의 사망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24시간 내내 햇볕이 들지 않는 위험한 지역 코어와 그늘을 넘나들며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산산이 조각난 세계에서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한 시진의 모험은 어떤 비밀들과 만나게 될까. 




동시에 '결코 가는 일 따위 없을 것'이라 장담했던 공중도시의 밤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시진은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시진은 꿈속에서 아주 생소한 장소에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체로 익숙하거나 직접 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시진은 거길 꿈의 입구라고 불렀다. 그러나 꿈이 흘러갈수록 일상에 없던 오류나 예외가 막무가내로 끼어들고 그때마다 새로운 당혹감과 충돌해야 했다... 지금이 딱 그런 기분이었다.               p.390


위픽 시리즈 <2학기 한정 도서부>와 핀 시리즈 장르 <부적격자의 차트>로 만났던 연여름 작가의 신작이다. 2005년, 영국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본 작가는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을 떠올린다. 이 소녀가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방법은 없었을까? 작가는 그렇게 미술관에서 강물에 빠진 오필리아가 죽기 전에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보며 ‘마침내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한다. 본격적인 작품 집필에 착수한 이후 장장 4년에 걸쳐 완성되었기에 탄탄하게 잘 직조된 서서가 만들어 졌다. 도시의 이름을 비롯해서 작품 여기저기에 셰익스피어의 희곡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도 또 다른 재미를 안겨 준다. 


주권과 정체성을 빼앗긴 도시에서 방향을 찾고자 분투하는 소년의 이야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는 현실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세상은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으니까. 누구도 배척당하거나 차별받지 않고,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게 된다. 작가가 작품을 집필하면서 참고한 도서의 목록 대부분이 팔레스타인 사태를 다루고 있었다고 하는데, 매일같이 생사를 다투는 이들의 삶에 대해서 고스란히 이 작품에 담긴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부재함'보다는 '존재함'으로, '사라짐'보다는 '드러남' 쪽으로 향하기를 바라며 소년의 여정을 그렸다고 말한다. 소설 속에 그려진 참혹한 현실은 허구이지만 현실 속 그것에서 결코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어느 곳에는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매순간 무참히 죽어가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우리가 더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삶의 가치들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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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6
위수정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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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옥의 머릿속에는 스틸 컷으로 저장되어 있는 무수한 파일들이 있었다. 불면의 밤이면 그 파일들이 하나씩 재생되었다. 과거로 과거로 향하는 그 파일들에는 기옥의 실수와 실패와 상처와 기쁨과 환희의 순간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것의 내용이 무엇이건 그것이 과거라는 사실만으로 기옥은 공허해졌다. 어둠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고 기쁨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에. 어두운 방 안에 빠르게 늙어가는 내가 홀로 누워 있기 때문에.            p.55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 마지막 공연이 끝난다.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극장을 가득 메웠고, 배우들의 커튼콜이 시작된다. 주인공 메리 역을 맡은 중년의 배우 기옥은 스캔들을 딛고 8년 만의 연극 공연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50대 여배우는 무대의 안과 밖이 불과 몇 발자국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늘 고민한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한결같이 살뜰히 보살피는 매니저 윤주는 기옥을 비롯한 연예인들 모두 하는 일에 비해 돈을 많이 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가진 부는 과연 그들의 노력만으로 얻은 것일까 속으로 생각하며 코웃음을 친다. 윤주는 기옥을 위하면서도 언제부턴가 그 반대의 욕망이 자신의 내부에서 충돌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기옥의 상대역인 남편 제임스를 맡은 태인은 연극으로 시작해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 진출한 배우였다. 그의 처가가 유명 중식당을 운영하는 재력가라는 사실은 연극판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술버릇이 좋지 않다는 소문 또한 업계에서는 잘 알려진 얘기였다. 젠틀한 외모 덕분에 대중들은 그의 주사를 루머 정도로 취급했지만, 언젠가 증거가 발각되면 배우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다. 그는 만취하면 한 명에게 꽂혔다. 어린 여자 스태프인 경우도, 선배 배우거나 술집 종업원인 경우도 있었다. 추근거림이나 비아냥의 형태로, 또는 짖궂은 농담이나 지나친 칭찬 세례일 때도 있었는데, 무엇이든 상대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한달 간의 연극 공연이 끝난 뒤 벌어진 술자리에서 하필 태인이 꽂힌 상대는 운이 없게도 기옥이었다. 주변에 앉아 있던 이들을 모두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불쾌한 언사가 이어졌지만, 기억은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그 자리를 이겨낸다. 그리고 다음 날, 태인이 새벽에 지방 별장으로 내려가다 교통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 오고 기옥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나는 한 치 앞을 예감한다. 그걸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다. 상호가 고개를 돌려 내 팔을 잡는다. 그 힘이 달콤하다. 하지만 상호야, 이것은 운명도 뭣도 아니다. 행운도 불행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누구를 탓할 수 없다. 그게 무엇이든 아주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홀로 남았다.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타오르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비명이자 환호.             p.142~143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 쉰여섯 번째 작품은 위수정 작가의 <fin>이다. 자신만의 고통과 고독을 품은 채 그 감정들을 감추고 살아가는 네 남녀의 욕망으로 질주하는 삶이 단막극처럼 펼쳐지는 작품이다. 핀 시리즈는 늘 작품과 잘 어울리는 아티스트와의 작업으로 표지를 만들었는데, 이번에 책과 함께 받은 책자를 보니 아티스트별로 시리즈를 정리해 두었는데, 확실히 분위기가 각각 달라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더 좋았다. 


이 작품은 두 명의 배우, 그리고 각자의 메니저까지 네 남녀의 각기 다른 삶을 통해 선망과 질투, 분노와 연민, 동경과 증오 등으로 점철된 복잡 미묘한 우리 인생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천천히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암전되며 한 편의 연극이 끝나면, 무대 뒤와 무대 바깥에서의 삶은 그제야 다시 시작된다. 그러니 이 작품은 시작과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도 하다. 무대 위 연극은 삶을 가장하고 연출되지만, 정작 무대 밖 일상에서도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게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조금씩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 싫은데 그렇지 않은 척, 좋은 데 티내기 싫은 척, 환멸과 분노를 감추고, 고통과 외로움을 모른 척 외면하면서 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각자의 인생에서 스스로가 맡은 배역은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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