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욱의 좋은 사람 행복한 요리 - 특별한 모임을 위한 메뉴 플래닝
우정욱 지음 / 비앤씨월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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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들고, 그리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 속으로 초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우리는 집에 온 사람들에게 항상 무언가를 대접한다. 커피든, 과일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말이다. 신혼 초에 집들이를 하면서 가족들을 모두 초대했는데, 그때 내가 혼자 차려낸 음식이 14가지였다. 두부전골을 끓이고, 탕수육을 튀기고, 갈비찜을 하며 잡채를 만들었다. 오징어순대를 만들어 쪄내고, 야채를 넣어 무쌈 말이를 하고, 새우를 삶고, 샐러드드레싱을 직접 만들었다. 몸이 좋지 않은 시기였던 데다 일주일 전에 갑자기 생긴 집들이 일정이라 나름 부담도 많이 됐었는데, 도마 위에 채소들을 늘어놓고 일류 요리사라도 된 것처럼 칼질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부엌이 난장판이 되는 동안 나는 나는 신나게 자르고 채치고 다졌다. 동생이며 엄마가 도와주겠다고 걱정스레 말했으나, 나는 기어코 그 요리를 혼자서 차렸었는데, 이유는 우리 집에 초대하는 나의 손님이니 내가 대접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이 많은 요리를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느라 일주일 전부터 계획 세우고, 장보고, 3일 전부터 재료 준비하고, 집들이 당일 날 손님들이 오기 직전까지 땀 뻘뻘 흘리며 요리를 해야 했던 탓에 정신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뿌듯하고, 행복했다. 물론 덕분에 나는 가족들에게 졸지에 음식을 너무 잘하는 사람이 되어 버려서 집안에 무슨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불려 다녀야 했지만 말이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내가 해준 음식을 먹고 기분 좋아할 사람을 떠올리며 요리를 하는 순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물론 맛이 조금 없거나, 간이 잘 맞지 않더라도 정성을 생각해서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옆에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요리를 준비하는 과정이 제일 행복한 것 같다. 새해에는 1월부터 집안 행사며 모임이 있어 집에서 요리를 해서 사람들을 대접해야 할 일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제일 중요한 건 메뉴 선정과 플레이팅인데, 그래서 일상식이 아닌 초대음식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우정욱의 좋은 사람, 행복한 요리>라는 책을 만났고, 나는 이거다 싶은 생각이 들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책은 일반적인 레시피 북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특별한 날 손님맞이 상차림이다. 특히 손님맞이 상차림의 최대 고민인 메뉴 플래닝에 초점을 맞춘 책으로서 목적과 비용을 고려한 메뉴 구성이 돋보이는 책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알려주는 손님맞이 상차림 팁은 이런 식이다. 손님을 초대할 때는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샐러드는 기본, 고기 요리와 해물 요리가 적절하게 섞이도록 하고, 반찬으로 먹을 수 있는 일품과 밥, 그리고 후식은 별도로 준비한다. 조리할 때는 접시보다 트레이를 많이 사용하고, 조리할 때 토치를 사용하면 음식의 모양을 살리면서 구운 효과와 불 맛도 살릴 수 있다. 샐러드나 냉채를 상에 올릴 때에는 미니 소스 피처를 사용하면 좋고, 큰 접시에 과일을 깎아 올리고 나눠 먹을 수 있게 하는 것보다 개인 접시에 담아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나눠주는 정성이 더 따뜻하다. 등등. 깨알 같은 팁들이 아기자기하게 실려 있다.

 

상황에 맞는 상차림 팁도 있는데, 부모님 생신, 결혼기념일, 외국 손님 초대, 설날 아침상, 포트럭 파티, 와인 테이블 등 특별한 날을 맞이할 때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멋진 상차림이 가슴을 설레게 만들어준다. 소개되어 있는 요리 레시피는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으면서도 평범하지 않아, 요리 솜씨를 뽐내고 싶을 때는 제격일 것 같다. 요리를 할 때는 무엇보다 행복해야 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기분이 나쁜 날 하는 요리는 이상하게 맛이 없게 마련인데, 아마도 기분이 그대로 재료에 전달이 되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상차림들은 사진만 보아도 요리를 하는 이가 행복한 마음이라는 것이 그대로 전해져서 참 좋았다.

요리는 우리를 잠시나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곤 한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 거리들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일이 또 오늘 같이 반복될 거라는 거라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지루한가. 거기다 오늘도, 내일도 늘 비슷한 반찬에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가 된다면 식사 시간이 즐거울 수가 없다. 깨끗한 재료들과 정확한 레시피, 그리고 발과 프라이팬과 양념들로 정직한 노동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나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도 참 좋다.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요리들은 내 시린 마음마저 만져주곤 하니 말이다.

 

아이가 생기고 육아에 나의 스물 네 시간을 다 쏟아 부어야 하는 나날이 지속되니,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사랑스런 아이를 보는 것은 좋으나, 책을 제대로 읽을 시간도, 충분히 내 시간을 가질 여유도 없이 그저 아이만 쫓아다니다가 하루가 다 가버리곤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스트레스는 쌓여갔지만 그걸 풀 데가 없었던 나에게 유일한 위로는 TV요리쇼였다. 요즘은 스타 쉐프들이 많아서인지 공중파, 케이블 할 것 없이 요리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나 선택할 수 있는 폭도 넓어졌고, 전문 쉐프들이나 할 법한 레시피를 쉽게 집에서도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다. 요리 쇼를 보다 보면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을 먹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졌고, 하루 동안 나를 스트레스 받게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내일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유로움이 생긴다고 할까. 세상에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냐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문제도 더 이상 껴안고 있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 어찌 됐든 요리는 즐거운 것이라는 걸 잊지 말자. 특히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한 요리는 더욱 행복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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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세계문학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저/고정아 역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김연수 작가가 추천한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에도 서른 한편이 실려 있다. 짧은 생애 동안 오코너가 남긴 단편소설이 서른 두편이니, 거의 모든 단편이 다 실려 있는 셈이다.

 

20세기 미국 소설의 가장 독창적이고 도발적이며 강력한 목소리!! 꼭 읽어봐야 할 작품!!

 

 

 

 

 

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은이), 권수연 (옮긴이)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파트릭 모디아노의 노벨상 수상 이후 그의 번역되지 않았던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지평,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그리고 청춘시절이 한꺼번에 나왔는데, 다수의 지지자들이 '지평'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으므로,, 대세에 따르는 걸로..

 

 

 

 

 

 

 

붉은 밤의 도시들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5 
윌리엄 S. 버로스 (지은이), 박인찬 (옮긴이)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윌리엄 버로스의 작품이라 매우 궁금하다. 유토피아 공화국 리베르타티아를 건설한 실존 인물 미션 선장에 영감을 받아, 인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저질러진 치명적인 실수들을 돌이키기 위해 탄생한 유토피아 소설이라고 한다.

 

'신들린 천재성을 지닌 유일한 미국 작가'라는 칭송을 들은 윌리엄 버로스의 최고 걸작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문구를 보니, 새해를 열어갈 작품으로 제격!!

 

 

 

 

 

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가쿠타 미츠요 (지은이), 권남희 (옮긴이) | 예담 | 2014년 12월

 

얼핏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떠올리게 하는 줄거리이다. 범죄와 일탈에 빠져들어가는 평범한 주부의 어두운 내면을 집요하게 추적한 서스펜스로 일본에서는 드라마, 영화로도 선보인 적이 있는 작품이다.

 

일상을 재조명하는 농밀한 심리묘사의 대가로 알려진 가쿠다 미쓰요의 작품이라 스토리를 어떻게 풀어냈을지 궁금하다.

 

 

 

 

천지명찰 ㅣ 낭만픽션 1 
우부카타 도우 (지은이), 이규원 (옮긴이) | 북스피어 | 2014년 12월

 

권위의 상징과도 같았던 달력과, 그 달력을 새로이 바꾸는 개력 사업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스토리라, 2015년 새해를 여는 데 가장 어울리는 작품이라 하겠다.

 

주로 미래 사회와 SF 분야에서 활약하던 우부카타 도우가 2009년 처음으로 도전한 시대 소설이라고 한다. 독특한 소재만큼이나 재기 넘치는 스토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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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개 1~3 세트 - 전3권
강형규 지음 / 네오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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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한 식당의 지하실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책과 글로만 세상을 배운 남자가 어느 날 400kg에 달하는 금괴를 손에 넣게 된다. 그가 어머니가 남긴 금괴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표적이 되기 시작하고, 쫓고 쫓기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영화화를 앞두고 있는 다음 웹툰의 인기 작품 쓸개가 출간되었다.

엄마는 조선족이었다. 엄마가 살던 고향에선 이런 미신이 있었단다.

아기는 어미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살덩이이니, 신체 기관이나 신체 부위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하고, 효도한다.

그 미신, 절반은 성공한 것 같다.

엄마가 곁에 없어 효도는 못 하지만 건강하긴 하니까.

이런 미신에 따라 붙여진 그의 이름은 바로 '쓸개'이다. 인간의 신체 중, 굳이 필요 없는 장기 하나를 뺀다면 쓸개를 뺀다는데 말이다. 출생신고 조차 되어 있지 않은 그는 신상 기록이 없는 무적자(국적이나 학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다. '우쇼우 왕 양꼬치' 식당에서 20년 일생을 살았고, 그곳을 벗어난 적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렇게 외부와 단절되어 살아온 그의 장난감은 몸과 책 밖에 없었고, 지하실 환풍기 사이로 보이는 한 웅큼의 볕이 그에겐 세상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연변에서 한국으로 왔을 때 구해준 사람인 마오수가 그의 양아버지로 그가 죽어가면서 어머니의 비밀을 하나 알려준다. 그녀를 처음 만나던 날 알게 된 400kg에 달하는 금괴에 대해서.

 

“이 금은 돈이 아니오. 이 금이 돈이 될라믄 많은 거짓부렁이 있어야 하지

이복동생인 희재와 함께 우선 한 덩어리의 금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만, 사실 보통 사람들에게 엄청난 양의 금은 처치하기가 힘들다. 한 덩어리에 무려 10kg이나 하는 금은 그 모양도 특이한데다 녹이려고 해도,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하니 말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고 금을 정당한 가치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그들은 종로의 금방으로 가보지만, 찜찜한 기분에 다시 돌아 나온다. 종로의 거의 모든 금은방에 세실리아 흥업이라는 회사의 문구가 박힌 달력이며, 시계가 쓸개의 마음에 뭔가 의구심을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매고 있던 낡은 가방의 끈이 끊어지며 금괴가 바닥에 떨어져버리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금괴를 본 금방의 주인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를 하고, 쓸개와 희재는 이유도 모른 채 누군가에게 쫓기게 된다.

 

작가가 8번의 수정 작업을 거쳐 9고째의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때, 그때서야 작화를 할 수 있겠다는 자신을 얻었다는 이 작품은 그만큼 탄탄한 이야기 구조를 자랑한다. 주인공 쓸개의 복잡한 가족사와 미스터리 한 금괴의 비밀을 둘러싼 인간의 욕망이 치열하게 그려지고 있어 매우 긴박감 넘치는 스토리를 자랑한다. 곧 영화화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매력넘치는 캐릭터와 바로 영상화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장면 컷들이 인상적이었다.

언젠가부터 웹툰 없는 한국영화는 상상하기 어렵게 되어 버린 것 같다. 할리우드영화가 코믹스와 슈퍼히어로에 매달리듯 한국영화도 소재가 필요할 땐 일단 웹툰부터 뒤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끼> <순정만화> <바보> <그대를 사랑합니다> <26> <이웃사람> <전설의 주먹> <은밀하게 위대하게> <더 파이브> 등 이미 영화화된 작품은 물론이고 앞으로 영화화를 기다리는 작품들까지 열거하자면 끝이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얼마 전에 엄청난 화제로 종영된 <미생>도 그렇고 이제는 안방 매체에서도 웹툰 원작의 드라마를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작품도 스크린을 통해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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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필요할 때 -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소설치료사들의 북테라피
엘라 베르투.수잔 엘더킨 지음, 이경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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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추워지면 어쩐지 공기도 퍽퍽해진 것 같고, 움츠러든 어깨만큼이나 사람들간의 관계도 삭막해지는 것 같고 그래서 그냥 마음이 쓸쓸해지곤 한다. 이런 계절엔 커다란 벽난로 앞에 놓여진 흔들의자에 무릎담요를 덮고 앉아서, 향이 좋은 커피와 함께 동화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갖은 시련을 겪지만 언제나 우리의 주인공이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착한 결말의 이야기, 현실에서는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마법 같은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어릴 때 안데르센의 동화 전집을 그렇게나 열심히 읽었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현실과는 너무도 접점이 없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환상적인 이야기의 세계가 나를 매혹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동심이다. 마치 '진짜 처럼 보이는 거짓말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어낸 이야기, 만들어낸 세계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속아넘어가 주고 싶은 그런 이야기를 구축하는 것 말이다. 모두 다 꾸며낸 이야기라도, 누군가 그걸 믿어준다면 그 순간부터 그 이야기는진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사랑한다. 그 허구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따뜻한 온기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은 세계적인 유명 작가 알랭 드 보통이 런던에 설립한 인문학 아카데미 인생학교에서 2008년부터 문학치료 교실을 운영하고 있는 엘라 베르투와 수잔 엘더킨이 공동 집필했다.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처방하듯이, 문학치료사인 이들은 소설을 처방한다. 「인디펜던트」에서 책 추천 코너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전화나 온라인을 통해 전 세계의 다양한 의뢰인들에게 일대일로 소설을 처방하는 것이다. 세계문학상 수상작부터 베스트셀러, 3세계문학, 숨어있는 명작에 이르는 751권의 다양한 소설 리스트로 구성된 이 책은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마치 보물상자와도 같은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각 페이지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소설들은 우리를 위로해주기도 하고,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고, 다시 사랑하고 싶어지게도 만들어준다.

이들이 소설 처방은 이런 식이다. <알코올중독일 때>는 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추천한다. 술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소설을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들 테니까. <헌신하기 두려울 때>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추천한다. 충심과 사랑, 헌신을 제일로 치고 그 사실에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만이 극중 안과의사의 아내처럼 행동할 수 있으니까. 문장이든, 소설이든, 어떤 관계든, 당신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믿기로 한 것에 헌신한 보상은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에 정나미가 떨어질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추천한다.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사랑의 힘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는 작품이니까, 주인공 덴고와 함께 기나긴 여행을 떠나다 보면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어질 거라고. <기회를 잡는 데 실패했을 때>는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추천한다. 한정된 날들을 사는 우리에게 흐르는 시간인 매우 귀중하므로,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처럼 행동하는 대표적인 인물을 보여주니까 말이다. <키가 작을 때> J.R.R.톨킨의 '호빗'을 추천한다. 주인공 빌보 배긴스는 신장이 인간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호빗족이지만 장대한 모험을 통해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고, 가슴 속에서 뭔가 깨어남을 느끼며 위대한 영웅이 된다. <이가 아플 때>는 래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추천한다. 극중 브론스키가 치통에 고통 받다가 순간적으로 통증에 해방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철길을 보고 있던 그의 기억에 피범벅이 된 그녀의 몸이 떠오르면서 육체적인 고통을 감정적인 고통이 넘어서게 된다. , 그 외 에도 너무도 기발하고 재미있는 처방도 많고, 삶의 중요한 기로에서 힘이 되어주는 처방도 많으니 직접 읽어보아야 한다.

 

이 책에는 상황에 따른 책 처방 외에도 중간중간 소설 중독자들을 위한 '독서 질환'에 관한 팁도 실려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책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강박적으로 책을 사들일 때>는 전자 책 리더기 혹은 '지금 읽는 중' 선반을 마련하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책에서 모든 요소를 빼고 글자만 남기면, 당신이 정말 책을 읽고 싶은 것인지 단지 가지고 싶은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책을 단지 '수집'하는데 열중하는 몇몇 소설 중독자들도 주위에서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전자 책으로 읽었는데도 정말 마음에 든다면 그때 아름다운 양장 본을 한 권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라는 것이다. 혹은 전자 책 리더기가 맞지 않는다면 '지금 읽는 중' 선반을 하나 마련해서, 새 책을 한 권 사려면 우선 이 선반의 책을 한 권 읽고 책꽂이로 돌려보내 빈자리가 나야만 하는 걸로 규칙을 세우는 것이다. 기발하지만, 매우 공감되는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책 더미에서 원하는 책을 못 찾을 때>,<집안일에 책 읽을 시간을 빼앗길 때>, <배우자가 책을 읽지 않을 때> 등등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팁들이 잔뜩 수록되어 있다.

나는 딸 부잣집에서 태어나 네 자매 중에 셋째로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북적북적 시끄러운 집안이었다. 덕분에 책을 은신처 삼아 도피하는 법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고 할까. 가끔 부모님이 다투시거나, 언니들이 잔소리를 하거나, 동생이 말썽을 부릴 때, 나는 책을 방패 삼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잘 골라 펼쳐 든 책 한 권은 방패이자 방화벽이며, 투명인간의 망토'라고 했던 에리카 종의 표현처럼 나는 그렇게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보호받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지금도 책을 읽으면서 그 허구의 세계 속에서 자주 위안을 받는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미니 도서관을 담당하고 있다 보니 종종 사람들에게 책을 추천할 일이 생기곤 한다. 그럴 때 나는 그들의 성격에 맞추어, 그들이 처한 상황에 맞추어 책을 추천해주곤 했는데, 그들이 책을 대여해가서 읽고 반납하러 와서는 짧은 소감을 얘기해주면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 이 친구도 책을 통해 위로 받았구나. 싶어서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그 페이지의 한 문장, 하나의 단락, 그리고 숨겨진 여백을 통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아주 잠깐이라도 주마등처럼 스치는 우리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순간이다.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책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삶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세상이 나를 져버릴 때마다 나는 책에게 매달렸다. 그것은 나에게 적개심을 가질 일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상처를 줄 일도 없는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아주 사소한 뭔가만 삐끗하더라도 어긋나고, 깨어지기 마련이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은 마치 전투를 치르는 것처럼 만신창이가 되게 만들곤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되는 일상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다를 바 없이 그저 견뎌야 하는 하루가 되곤 한다. 하지만 나에게 책만 있다면, 나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도 특별한 순간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소설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 책을 만나보아야 한다.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많구나 동질감을 느낄 것이다. 삶이 퍽퍽해서 사는 게 재미가 없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 책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 당신의 상황에 맞춘 처방으로 새해에는 삶이 무지개 빛으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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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서 볼만큼 용돈이 충분하지 않던 어린 시절. 나는 동네 책방이나 도서관에 가서 주로 책을 빌려 보았다. 책은 읽어야 하는 기간이 지나면 반납을 해야 했고, 반납하고 나면 다시는 볼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가능한 많은 문장들을 머리 속에 집어넣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많은 문장들을 다 외울 수는 없었으므로, 맘에 드는 구절들을 노트에 메모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정말 매혹적인 작품을 만나면 아예 전체 책을 필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필사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책이란 건 눈으로 읽을 때와, 한 글자 한 글자씩 직접 옮겨 적을 때 전달되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만드는 섬세한 어휘들과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 문장들은 나의 감수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그렇게 나는 수많은 책들과 함께 질풍노도의 시절을 흘려 보냈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 단락을 만들고, 그 단락들을 이어 하나의 글이 만들어 질 때마다, 시시해 보이는 나의 일상들이 근사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니 종종 길을 걷다 우연히 책 속의 인물들을 마주치곤 한다. 지상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존재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보니, 나는 그 인물들에게서 위로를 받곤 했던 것 같다. 때로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카페에서, 때로는 쇼핑을 하던 백화점에서, 때로는 북적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어떤 문장들이 복병처럼 튀어나오곤 했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소설 속 그 인물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현실 속의 친구들 외에 여러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직도 기억나곤 하는 친구가 바로 <새의 선물> 속의 애어른 같은 열두 살 진희이다. 너무도 조숙하고 똑부러져서 아이처럼 느껴지지 않는, 하지만 유년 시절부터 삶의 이면을 보아 냉소적인 시선을 가져 안쓰러운 그런 소녀. 진희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면 먼저 스스로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 지탱했고, 언제나 자신의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했다. 여섯 살 때 죽은 엄마에 대한 기억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할머니에게서 자랐던 진희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면 자기만의 극기훈련을 했던 것이다. 실성해 목매달아 자살한 엄마와 사라진 아빠, 드러내놓고 애정표현 한번 하지 않는 외할머니와 이모, 삼촌과 함께 생활하는 열 두 살 소녀는 찬물을 조금씩 끼얹다 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되는 것처럼, 그러면 양동이째 끼얹어도 차갑지 않으니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똑똑히 느끼자고 생각했다. 어린 소녀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설정 자체가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고등학생이던 나랑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에 친근감 같은 것이 들었던 것 같다. 삶에 냉소적인 사람만이 삶에 성실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행복한 일이 생겼을 때는 내가 그것을 잃었을 때를 미리 걱정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는 헤어지게 될 때의 상실감에 대비하려고 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당시의 내가 왜 그랬나 싶긴 하지만, 뭐 그땐 나름 또래의 친구보다 많이 조숙했고, 생각도 많다 보니 나름 심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 나를 버티게 해준 건 은희경의 책이었다. 아직도 책장 구석에 손 때가 까맣게 타있는 낡은 책과 올 초에 한국문학전집으로 새로 출간된 책을 함께 보고 있자니, 1996년 겨울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2014년 겨울 어느덧 아이 엄마가 되어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내 친구들이 아이돌 그룹에 열광할 때, 나의 우상은 은희경 작가였다. 그래서 나는 구할 수 있는 그녀의 모든 책을 읽었는데, 아름다운 문장들과 예리한 표현들은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켰었다. 소설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의 작품 속에서만은 그 인물들이 모두 다 '진짜'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은희경 작가 특유의 생생한 묘사와 세밀한 관찰력이 인물들과 그들이 처해진 상황에 설득력을 부여해주어서, 어찌 보면 외로운 나르시스트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인물들이었지만, 내가 동화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설은 서사의 예술이지만, 나는 소설을 읽을 때 하여튼 그 인물과 만나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극중 인물들을 진짜라고 믿어야 그들이 처한 상황과 배경과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은희경 작가의 그런 '진심'이 참 좋다. 그래서 은희경 작가의 책을 처음 만난 지 십 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녀의 새로운 작품을 설레이며 기다린다.

 

대학에 들어가자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누구나 연애를 했고, 나에게도 찐한 첫사랑의 달콤함이 찾아왔지만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이별의 쓴맛을 봐야 했다. 사람이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는 법이 당연하거늘, 헤어짐 그 자체보다 과정에 있어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학과 선배이던 그는 후배들에게는 일종의 모범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교수들에게는 신임 받고, 동료들에게는 믿음직스러운 그런 남자였다. 거기다 스마트한 외모와 유행에 뒤쳐지지 않는 깔끔한 옷차림도 호감을 만들어주었기에, 우리 과에서 그에게 한번쯤 연정을 품어보지 않은 신입생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어찌하다 보니 나와 인연이 되어 두 해 동안 우리는 연인이었지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문자로 그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가 과대표가 되고 나서 한달 쯤 뒤의 일이었다. 원래 나서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친구들의 호응에 얼결에 과대표가 되고 보니 그게 너무 적성에 맞았던지 학교를 바쁘게 누비고 다니던 그였다. 자연스레 나와 만날 시간은 차츰 줄어들었고, 그러다 다른 학과의 신입생 퀸카가 그에게 마음이 있어 한다는 소문이 잠깐 나기도 했지만, 나는 그를 믿었기에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 사랑을 하다가 마음이 변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전에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없이 그저 일방적인 통보로 그만 만나자고 하는 건 함께한 두 해 동안의 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나는 너무 상처받아서 그에게 이유를 따져 묻는 것도, 왜 그러느냐고 애원하는 것도 하지 못한 채 며칠을 앓아 누웠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학교에 나왔을 때는 이미 그는 소문 속의 그 퀸카와 커플이 되어 캠퍼스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누군가를 순수하게 믿지 못하게 된 것이.

<내 생애 꼭 하루 뿐일 특별한 날>에서 미흔은 크리스마스 날 남편 회사 직원이라고 찾아온 젊은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며 아주머닌 아무것도 모른다고 집안을 한바탕 휘젓는다. 남편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온 미흔은 남편의 애인을 만난 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그 이후 지독한 두통에 시달렸고, 남편은 바닷가 근처 시골 마을로 이사를 하자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윗집에 사는 남자 규는 그녀에게 구름 모자 벗기 게임을 제안한다. 게임의 유효 기간은 사 개월, 그 동안 서로를 허용하고, 누군가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게임은 끝난다고. 육체적인 탐닉에 빠져들게 된 그들의 게임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져 간다. 권태에 사로잡혀 게임을 하듯이 사랑을 나누는 불륜 그 자체에 공감하기는 내가 너무 어렸지만, 미흔이 받았던 상처때문에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이해하고 싶었다. 스물한 살에 만난 남자가 그의 전 생애 동안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 또한 단 하나의 남자만을 사랑하며 평생 하나의 생을 함께 사는 것이 꿈이었던 여자가 '순수'가 아니라 '순진'이 되어버리는 게 세상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말 행복이란 무지한 상태의 다른 말인 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나 행복이라는 단어가 성립되는 걸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바보 같았던 나 자신이 미워졌고, 그만큼 그런 나를 발견하게 만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런 감정이 쌓이다 보니 사랑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래서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는 열정보다는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다는 식의 냉소가 더 익숙해졌던 것 같다. 물론 덕분에 숱한 연애를 경험했고, 나를 스쳐간 수많은 남자들 중에 소울 메이트를 찾아 지금은 결혼까지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후 나의 연애는 전경린 작가의 책 한 권 때문에 꽤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래서 내게는 지금도 최고의 연애소설을 쓰는 작가는 전경린 하나뿐이다. 나는 여태까지도 이렇게나 발칙하고, 매혹적이고, 슬픈 연애 소설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때로 책 속 어떤 문장, 어떤 행간에서 그 시절의 내가 보이는 경험을 한다. 나에게는 그런 책이 유독 많은데, 이상하게도 책이 출간되었던 그 시간, 내가 만났던 그 시기가 나에게 모두 특별한 경험으로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었고 아직도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문장들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책이 있다. 바로 대학시절 방황하던 나를 잡아주었던 신경숙의 <외딴 방>이다. 나는 아빠와의 전쟁에 실패해 내가 원했던 학과가 아닌 취업률이 높은 학과에 들어갔는데, 그래서인지 학과 생활이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공부에 흥미 없이 그저 학점만 채우려고 학교를 다녔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집에 사고가 생겼다. 엄마가 한밤중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가셨고, 뇌출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 우리 가족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나는 엄마의 병실을 지키기 위해 학교에 미련없이 휴학계를 던졌고,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병원으로 가서 엄마 곁의 보호자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자면서 뭐랄까, 생각이 많아졌다. 몸은 지쳐가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은 빨리 흐르는데 나는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오로지 병원, 직장만 반복해 가다보니 내 삶이 방부처리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았고, 나만 홀로 외딴 공간에 놓여진 것 같았던 거다. 휴학했던 학교로 나는 다시 돌아가지 못했고, 결국 자퇴 후 아르바이트로 하던 일을 직업으로 하게 되었다. 그때 지친 몸을 이끌고 일을 하러 가던 지하철에서 읽었던 책이 바로 <외딴방>이다.

이 책에서 서른 두 살의 소설가인 ''는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공부하던 열여섯의 나를 떠올려본다. 구로공단 입구에 있던 직업훈련원에 들어가면서 살게 된 외딴방. 그곳에 간 것이 열여섯이었고, 거기서 뛰쳐나온 건 열아홉이었다.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희재 언니의 죽음 때문에 그 사 년의 삶과 좀처럼 화해하지 못했던 ''가 열여섯으로부터 십육 년이 흐른 어느 날,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어쩌면 나도 지금 내 삶의 '외딴방'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언젠가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 이 시절을 떠올려보았을 때, 나도 이 시기를 그저 건너뛰고 싶은 시간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당시 나에게 주어진 상황들이 어렵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조차도 못했기에,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전부였던, 그저 매일 해결해야 할 일들을 마치면 얼른 자거나 일어나는 게 전부였던 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극중 ''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대학은커녕 공장에서 일하며 겨우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공부하던 그녀가 작가가 되겠다는, 누가 보면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었지만 결국 소설가가 되었듯이 내 삶도 좀 오래 시간이 흐르면 이것 보다는 나아지지 않을까. 결국 엄마는 건강을 되찾으셨고, 현재까지 정정하게 잘 계시지만 나는 여간 친하지 않으면 그 시절 얘기를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무슨 비밀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하며, 천성이 낙천적이었던 나를, 내성적으로 만들어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글쓰기에 마음을 매고 있음으로써, , 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극중 ''처럼 나도 그렇게 이 책을 붙들고 몇 년을 보냈다. 그렇게 나의 대학 시절이 짧게 흘러가 버렸다.

 

김연수 작가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가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인생은 신비롭다'라고 말했다. 누구든 그런 순간을 최소한 한 번은 만나게 되는 것 같다. 그날 이후의 나, 그날 이전의 나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완전히 색채를 달리하게 되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것이 누군가한테는 결혼일수도, 대학합격이나 유학일수도 있고, 주식투자처럼 선택의 문제일 수도, 혹은 친구를 사귀는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삼십대를 앞두고 있던 2007년의 나는 그런 일생일대의 선택 앞에 망설이고 있었다. 직장생활도 어느덧 안정이 되고, 경력도 인정받아 숙련된 업무처리가 가능하던 이십 대 후반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정된 직장과 연봉을 버리고, 모험을 해보려고 하는 중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할 것 같았기에, 어쩐지 서른이 넘어 버리면 이런 무모한 도전 같은 건 해보지 못할 것 같았기에 말이다. 결국 나는 기존 연봉의 반 토막도 안 되는 급여에, 업무시간도 두 배나 되는 새로운 일에 무작정 도전을 하게 되었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그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 마치 내가 직장 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 미친 듯이 열정을 퍼붓던 이십 대 초반으로 돌아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다들 이해가 안된다며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 그 동안 쌓은 경력이 아깝지 않으냐, 벌써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앞으로 어떻하려고 그러냐 등등..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지만 어차피 내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었던 일은 해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이 선택으로 인해 리스크가 많더라도, 언젠가 후회하게 되더라고 말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화자인 '' '5월투쟁'이 끝난 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던 대학생이다. 그는 방북 학생 대표 자격으로 베를린으로 건너가지만, 갑작스럽게 학생운동 지도부가 붕괴되고 교체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북한으로 들어가게 될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 아니면 독일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할지 말이다. 그렇게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내가 당시에 겪었던 상황과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매번 의도와 다르게 벌어지는 상황, 예상을 벗어나는 사고, 계획했던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곤 하는 어긋남들이 평탄치 않은 삶일 수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삶이야말로 살아있는 진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극중가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들은 온갖 사연들은 역사의 폭력에 의해 삶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물론 지금은 개인의 삶이 시대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공감이 갔던 이유는, 완전히 바닥을 치고 나서 남아있는 개인 각각의 삶이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나'이며, 우리의 삶이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있으니 말이다. 내가 공들여 지어온 집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가 반석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너의 인생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는 것.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나의 그 무모한 도전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당시에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위로를 받았던 것을 고맙게 기억하고 있다.

 

얼마 전에 김연수 작가의 신작 <소설가의 일>을 읽는데, 이런 대목이 나왔다. 뭔가 일이 안 풀릴 때,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 좋지만, 다시 태어나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는 거다. 다시 태어나려면 일단 나부터 죽어야 한다는 것. . 이 얼마나 명쾌한 진리인가. 다른 사람이 되려면 제일 먼저 내가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 다시 태어나려면 일단 내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 모든 건 내 쪽의 문제였다는 것. 내가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단순하지만, 언제나 삶을 꿰뚫어 보는 명쾌함 때문이다. 언젠가 토머스 H. 쿡의 글을 읽다가 문장과 단락들이 빚어내는 분위기가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꼭 이렇게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뭐 김연수 작가의 말대로 굳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길 기다릴 필요가 뭐 있나. 그런 글을 쓰고 싶다면, 그만큼 쓰고 공부하고 노력부터 하면 되지. 너무 너무 맘에 드는 책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태어나도 이 책들은 읽겠어! 그러나 기약 없는 다음 생을 위해 아껴두는 것보다는 현재 생에서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기억하고, 더 많이 느끼고 생각하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냔 말이다.

지금은 생후 60일을 넘긴 아기를 키우고 있어 사실 책을 읽을 시간을 내기가 굉장히 어렵다.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아기를 키운다는 건 단 일분도 나를 위한 시간이 없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던 초보엄마라 매일매일이 전쟁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돌아버릴 것 같아도 매일 책을 읽는다. 젖을 먹이는 동안 한 손으로 책을 읽었고, 아기가 잠들었을 때 한밤중 어두운 거실 소파에서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고 있다. 그러다 보니 책을 끝까지 읽으려면 시간이 한참 걸려 새로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어 읽고 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내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래서 시간에 쫓겨 읽느라 진도가 나가질 않아 조바심 낼 필요가 없는 그런 책 말이다. 특히 오늘 소개한 이 네 권의 책은 요즘 나를 새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당시에 너무 여러 번 읽어서 어떤 장면이 펼쳐져도 당황하지 않고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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