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마이너스
손아람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용산참사를 모티브로 한 손아람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소수의견'이 완성되고도 2년 가까이 개봉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용산참사 6주기를 맞이하는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도심 재개발지구의 망루에서 벌어진 두 건의 살인사건을 두고, 이를 은폐하려는 국가권력과 진실을 밝히려는 변호인단의 공방을 다루었던 '소수의견'의 임팩트가 워낙 강렬했던 지라 이번 신작에선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내심 궁금했었다.

내가 맡은 학생은 5학년인 남자아이였다. 두 자릿수 곱셈. 아이 엠 어 보이. 그런 것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궁금한 거 있어?"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면 뭐가 좋아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일하러 올 수 있어서 좋지."

나는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버스만 타면 언제든지 일하러 올 수 있잖아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실제 손아람 작가 또한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고, 극중 주인공 태의 역시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다닌다. 그는 자신이 입학하고 졸업한 학교, 서울대학교에 대해 당당하게 언급한다. "으스댈 뜻은 없다. 굳이 그 이름을 피하고 싶지 않을 뿐. 이 이야기의 아름다운 면과 지저분한 면을 모두 이해시키려면 반드시 그 괴물 같은 고유명사와 맞닥뜨려야만 한다." 라고. "겸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어야 하지, 단어를 선택하며 발휘하는 게 아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주인공 태의, 그리고 그가 만난 대석 형, 미쥬, 진우, 담당 교수들과 노동자, 경찰... 들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학생운동의 마지막 세대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대우자동차의 부당 정리해고, 한일월드컵, 미선이 효순이 사건, 용산참사, 촛불 시위 , 한미 FTA 협상 타결,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의 시절을 통과하면서 대한민국의 과도기이자 그들 청춘의 과도기를 겪어 나간다.

제목인 디 마이너스는 낙제인 F를 간신히 면한 학점 D-를 뜻한다. 이 작품에 실린 154편의 이야기들은 용산 참사를 비롯해서 19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는 10년의 시간을 들려준다. 극중 에피소드 중에 공대학생회장 당선자인 윤구는 학생운동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느라 수업에 거의 들어갈 수가 없었고, 대부분의 과목에 F를 받는다. 다른 교수들은 그의 성적을 D-로 올려주어 낙제에서 복권시킴으로써 정치적 신념을 위해 희생된 제자의 학업 혹은 젊은 날의 추억에 최소한의 존중과 경의를 표시한다. 그런데 단 한 명 재료공학부의 구민용 교수는 수업에 들어온 적도 없는 학생에게 D-를 줄 수 없다며 F를 준다. 여러 번 교수의 방에 찾아가 정중하지만 간곡하게 하소연했지만,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는 구민용 교수는 그래야 자신의 교수 생활에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다며 학생의 사정 보다 자신의 경력과 신념을 완성하고 싶은 욕망에 충실한다. 결국 문제는 D-를 받느냐, F를 받느냐. 혹은 합격이냐, 낙제냐의 기로인데, 이것은 사실상 지금의 우리들이 처해있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항상 그렇지 않던가, 이것을 포기해야 저것을 얻을 수 있지만 우리는 모두 갖느냐, 모두 잃느냐로 한번쯤 선택의 기로에 서기도 한다는 것을.

주인공 태의는 이야기의 시작에서 진우에게 받은 청첩장에 대해서 떠올린다. 보고 싶다. 진심으로. 꼭 와줘. 라고 손 글씨로 쓰인 그 청첩장을 현관 앞 협탁 위에 잘 보이게 두고 매일 집을 나서거나 돌아올 때마다 그는 망설인다. 가야 할까? 갈 수 있을 까? 그러다 결혼식 날짜가 훌쩍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렇게 미루다 내심 지나가 버리기를 바랬던 걸 수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위로 삐뚤빼뚤 책들이 쌓이고, 그 책들을 묶어 이사를 하고, 결혼을 하고, 더 큰 집으로 또 이사를 하며 짐이 불어나고. 그렇게 모든 삶에는 이자가 붙는다. 보잘것없는 삶에도 보잘것없는 이자가. 태의는 그렇게 진우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고, 자신의 결혼식에 진우를 초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밤 진우를 만나게 된다.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태의가 진우를 만나는 것은 잃어버린 한 시절에 대한 사죄이자 죄책감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 시절을 잃어버리면서 어른이 되곤 한다. 누구나. 예외 없이.

왜 모르는 사람을 위해 이타적이기는 쉬운 걸까? 가까운 사람에게 이기적으로 상처를 입히기 쉬운 만큼.

나는 얼굴도 모르는 노동자들을 위해 싸웠고, 내 친구를 팔아먹는 배신을 저질렀다. 어쩌면 양심이란 스스로 초월적이며 초계급적인 존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고고하게 내려보며 탓하는 말들. ''를 세상에서 제외할 수 없다면 그런 문장은 입에서 나오는 즉시 논리적 모순을 범한 것이니까. 나는 내가 저지른 짓을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않았다. 나는 나를 논리적으로 변호해야 할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깨우쳤다.

인간은 논리적일 수 있을 때만 논리적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우선 책을 읽기도 전부터 의아했던 것은 이 작품의 형식이다. 분명히 '장편소설'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뒷면에 소개된 글에는 154편의 이야기들이라고 설명되어 있고, 띠지에 적힌 작가의 말에는 '느슨하게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수십 명의 사람들에 의해 쓰였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결코 소설이 아니다'라고 써 있다. 단편이라 하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 같고, 장편이라 하기에는 각 소제목의 호흡이 짧고 내용이 그저 생각의 편린이나 단상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의 전작으로 인한 기대감이 있었기에 그냥 이야기를 읽어나갔고, 중반부쯤 이르러서야 이 책이 왜 여러 명의 이야기이자, 하나의 장편 소설이 되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특히나 내가 작가와 비슷한 학번으로 대학을 다녔던 나이라 그런지 그가 그려내던 인물들의 대학시절, 청춘의 시간들이 매우 공감이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작가가 그리고 있는 시간은 90년대 초반부터이기에 내가 겪지 못한 시대도 많았지만, 직접적으로 겪지 못한 학생운동의 마지막 세대들이 풀어내는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역사의 한 시절이므로 그리 낯설지도 않았고 말이다.

이야기가 끝나고 책의 마지막에 '잃어버린 10'에 대한 연표가 정리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무심코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1997년부터 2007년까지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한번씩 되 집어 보면서 기억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나는 일종의 순례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작가가 왜 인물들의 지난 시간에 디 마이너스라는 성적을 매겨두었는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 - 암을 치유하며 써내려간 용기와 희망의 선언
이브 엔슬러 지음, 정소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처음 보고는 꽤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극작가 이브 엔슬러가 200여 명의 여성을 인터뷰해서 마든 작품으로 성폭력, 동성애, 오르가슴, 출산 등 여성이 겪는 모든 상황에 대해 거침없이 다루는 연극이다. 특히나 금기시되어왔던 여성의 성기를 소재로 삼아 공연함으로써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로 '여성의 억압된 성을 말하며 세계를 도발한 작가'로 기억되는데, 그런 그녀가 쓴 7개월간의 자궁암 투병을 토대로 한 회고록이라고 해서 이번 작품은 읽기도 전부터 기대감을 주었다.

나는 내 몸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 거기서 튕겨져 나왔고,길을 잃었다. 아기를 낳지 않았고 나무를 두려워했다. 대지가 나의 적이라고 느꼈다. 숲 속에 살아본 적이 없었다. 하늘도 노을도 별도 볼 수 없는 콘크리트 도시에서 살았다. 나는 엔진의 속도로 움직였는데 그건 내 호흡보다도 빨랐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과 대지의 리듬과 동떨어져 살았다. 그렇게 이질적인 정체성을 극대화하고 검은 옷을 입고는 우쭐해 했다. 내 몸은 짐이었다. 그것은 내가 운 나쁘게도 지고 가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몸의 요구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빠와의 나쁜 기억 때문에 자신의 몸에 대해 평범하게 느끼며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여성들에게 그들의 몸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태어난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녀는 세계 60개국 이상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잠자리에서 들볶이는 여성, 부르카를 입은 채 매질 당하는 여성, 부엌에서 산을 뒤집어쓴 여성, 죽은 줄 알고 주차장에 내팽개쳐진 여성들의 이야기들. 난민 촌의 불 타버린 건물과 마당에서 그녀들은 온몸에 생긴 칼과 담뱃불 자국을 그녀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는 콩고에 갔고,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산산 조각 낼 만한 이야기를 듣는다. 거의 13년 동안 극심한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그곳에서 여성 수십만 명이 강간과 고문에 시달렸고, 민병대들은 마을에 들어와 학살을 일삼았다. 그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전염병을 그렇게 목격한다. 몸의 종말, 인류의 종말, 세계의 종말.

우연한 사건은 없다. 혹은 모두가 우연한 사건인지도 모른다. 내 친구 폴은 이렇게 말한다.

"마치 네가 콩고 성흔을 갖게 된 것 같아."

사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당연하지만, 이브, 놀랍지도 않아. 최근 수년 동안 들은 그 많은 강간 이야기라니. 그 여성들이 네 안에 들어간 거야."

어쩌면 친구 폴의 말대로 콩고와 그곳 여성들이 겪은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그녀를 집어삼켜 암을 얻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렇게 그녀의 자궁에서 커다란 암세포가 발견된다. 나는 어쩌다 암에 걸렸을까를 무의미하게 생각하며 분노하고 거부하는 그녀에게 의사가 말한다. 당신은 아주 많은 일을 해왔지만, 환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이제 환자가 되는 법을 배우셔야 한다고. 이런 상황이 일종의 전환점이 될 거라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법을 알게 될 거라고' 말이다. 의사의 말은 그녀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면 이런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외면해왔던 과거와 마주서고, 이겨내서, 극복해내야 하는 그런 순간 말이다.

"이제는 삶을 바꿔야 해요.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요구 때문에 더 이상 몰아대서는 안 돼요. '이 망할 자식아', '두고 봐' 같은 반발로 살 수는 없어요. 그래서 당신이 병이 든 거예요. 당신의 병이라는 게 바로 그거예요. 몸을, 신경체계를 혹사시킨 것, '싸울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항상 상상의 적을 몰아내고 항상 자신을 압박하고 몰아친 것, 압박하고 싸우고 몰아댄 것 말이에요."

그녀가 자신이 환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야, 아빠의 높아지는 목소리를 들었던 이후 처음으로 그녀 몸 한 가운데에서 뭔가 긴장이 풀렸고, 진정으로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된다. 그녀는 7개월 동안 고통스러운 수술과 치료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토록 부인해왔던 자신의 ''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과 세상의 몸과의 완전한 연결을 경험하게 된다.

"빼앗아 가려거든 빼앗아 가라 하자. 그 대신 우리의 고통을 힘으로, 우리의 희생을 타오르는 불로, 우리의 자기혐오를 행동으로, 우리의 자기 강박 증을 봉사로, 불로, 바람으로 바꾸자. 바람. 바람. 바람처럼 투명해지고, 바람처럼 무자비하고 위험하면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자."

워낙 세상과 투쟁하듯 살아온 그녀라 암을 치유하며 써 내려간 투병기 또한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바람처럼 무자비하고 위험하게 살아온 그녀의 인생을 지지하고, 결국 병을 이겨내 보고자 하는 용기를 보여준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 행복 플러스 - 행복 지수를 높이는 시크릿
댄 해리스 지음, 정경호 옮김 / 이지북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2004 6 7, <굿모닝 아메리카> 생방송 현장에서 댄 해리스는 불안 발작, 호흡 곤란을 일으킨다. 대타로 보조 앵커 석에 들어선 그는 뉴스를 보도하는 도중에 극심한 공포, 두려움을 느끼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목소리가 쉬지 않고 투덜댔고, 결국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면서 틱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황을 목격한 시청자는 무려 519천명이었다.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자신의 공황장애를 일으킨 모습이 전국적으로 방영된 뒤에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방송국에 첫 출근하던 스물여덟 살 이후로 인생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려왔던 그 동안의 시간을 말이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노이로제, 그리고 약물에 의존하려는 마음과 싸워가면서도 종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그가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어보고자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현재의 순간을 적이 아니라 친구로 만들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순간을 일종의 장애물로 간주하고 살아갑니다. 다음 순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장애물 말이지요. 그러니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이야기이다. 그는 가장 긍정적이고 가장 강력한 변화는 새롭게 각성된 의식 상태에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간디가 존경 받는 이유는 그 자신의 내면이 이미 평화로워진 상태에서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라는 그의 말은 극중 댄 해리스 처럼 나도 공감이 되는 대목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그는 서운하거나, 화가 나거나, 혹은 슬프거나 하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실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면 삶이 아주 단순해진다고. 댄 해리스는 톨레와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이중생활을 영위해온 목사와 엉뚱하고 괴짜 같은 자기계발 전문가, 그리고 한 무리의 과학자들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거울을 볼 때마다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곤 했던 그의 노이로제, 불안 장애에 시달리고, 정기적으로 약을 먹어야 했던 그는 어느 날 '명상'이라는 것을 접하게 된다. '그래도 난 명상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다' 에서 '한 번 해볼까? 까짓 거 한 번 해보자. 밑져야 본전 아닌가'로 바뀌어 명상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는 두 다리를 앞으로 뻗은 자세로 맨바닥에 앉아 등을 침대에 기대고, 휴대폰의 알람을 5분 뒤로 맞춰놓고, 눈을 감는다. '마시고. 내쉬고. 마시고. 내쉬고.' 그렇게 호흡에 집중하는 동안 어느새 5분이 지나 알람이 울린다. 그는 이 체험을 명상에 대한 생각을 상당수 바꾸게 된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 가치만은 인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꾸만 달아나려는 마음을 붙들어 매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그는 다음 날부터 매일 10분씩 명상 수련을 시작한다.

수련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삶에 일련의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현재에 보다 충실해진 것이 첫 번째 변화였다. 이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위층에서 곧 벌어지게 될 상황을 예상하면서 초조해하지 않았다. 호흡에 집중하는 훈련 덕분이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내 자신에게 한결 관대해진 것이 두 번째 변화였다. 실수를 하고 난 뒤에도 두 번이든 세 번이든 다시 노력해서 바로잡으면 된다는 생각에 예전처럼 나 자신을 심하게 다그치지 않게 된 것이다. 분심이 들 때마다 자책하지 않고 다시 집중하는 훈련 덕분이었다.

결국 댄 해리스는 명상의 유익함을 입증하는 과학실험 결과들을 확인하고, 대기업 회장들과 유수한 과학자들을 비롯해 명상 수련을 통해 행복을 증진시키고 있는 각계의 인사들을 인터뷰한 끝에 자신 역시 명상가의 대열에 합류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자신의 '머릿속 목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가부터 자기계발 전문가, 신경과학계와 정신문화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마지막에 도달한 결론이 바로 명상이었던 것이다. 그는 명상을 통해 10% 더 행복해졌다고 말한다. 우리도 100%의 행복을 욕심내지 않고, 10%의 행복을 이해한다면 그가 그랬던 것처럼 삶을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작년에 6개월 정도 요가를 다녔었다. 체력도 많이 떨어져있었고, 바쁜 일상에 스트레스도 많아 지쳐있었던 나에게 요가 수업은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였다. 요가 수업은 항상 호흡으로 시작한다. 너무도 행복했던 시간이었기에 아직까지도 요가 강사의 목소리, 호흡 방법, 단계 등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먼저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셔주고 편안하게 내쉬어준다. 그리고 주의를 좀더 자신 안으로 기울여준다.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 자신의 의식이 바깥으로 뻗어있다면, 지금 이순간 여기있지 못하다면, 자신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을 하는 지금 순간으로 모든 것들이 연결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한 호흡을 통해서 온전하게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요가 강사가 강조했었다. 그 호흡을 자신의 아름다운 몸과 연결하고, 함께하는 그 시간과 교감을 하고, 오로지 그 순간 여기에 있을 수 있도록. 이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두뇌는 잠시만 눈을 감고 있어도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가만두지 않으니까 말이다. 사실 처음에는 수업을 따라 하면서도 자꾸만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었다. 점심때 만날 친구들과의 모임, 저녁때 해야 할 일, 내일 진행될 일정, 더 나아가 다음 주에 준비해야 할 일들까지 온갖 걱정 거리들, 혹은 설레임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머릿속을 잠식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그 호흡과 명상 속에서 그런 것들을 떨쳐버리고, 오로지 그 순간 그곳에 집중할 수 있는 걸 체험했었다. 그랬기에 이 책에서 댄 해리스가 명상 수련을 통해 얻게 된 행복에 관해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다면, 댄 해리스의 솔직하고 흥미로운 여정을 따라가보자. 최소한 지금보다 10%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스트
스티븐 베이커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미래 예측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면 어떨까? 미국 일간지워싱턴 포스트미래에 살아남을 직업, 10년 후에도 살아남는 직업 고르기 노하우를 공개했는데, 인공지능·로봇 전문가, 빅데이터 분석가, 교사, 목수를 ‘10년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으로 꼽았다고 한다. 특히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은 공상과학 영화나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단골 소재로 정말 어느 정도 시점의 미래가 되면 인간의 두뇌를 넘어서는 컴퓨터가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달에는 MIT의 뇌 과학자들이 원숭이 수준의 사물 시작 능력을 구현하는데 성공했다는 기사도 보았다. 그 동안은 인간이 설계한 컴퓨터가 지각 능력 측면에서 영장류의 뇌를 넘어서지 못했었는데, 그 한계가 처음으로 깨졌다는 얘기다. 이것은 어쩌면 이제 곧 영장류의 뇌가 정복될 시점이 다가왔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정말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미래 예측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2072년 사람들은 머릿속에 두 개의 두뇌를 가지고 산다. 원래 자신의 두뇌인 천연두뇌와 '부스트'라 불리는 인공두뇌가 그것 이다. 간단히 말해 부스트는 컴퓨터를 두뇌 속으로 집어 넣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머릿속에 들어간 슈퍼 컴퓨터는 생각들을 일련의 단어나 명령어로 변환시킬 수 있게 해주고, 사람들은 그 가상 세계를 통해 음식도 먹고, 섹스도 하고, 친구들과 문자도 주고 받을 수 있게 된다. 연애도 가상 세계 속의 아바타를 통해 육체적 접촉 없이 시작하고, 가상세계에서 연인이 된다. 그 속에서 섹스도 하지만 그것 역시 신체 접촉 없는 버추얼 섹스이며, 사랑의 기억을 미세 조정하는 앱으로 가상 세계의 행동을 실제로도 체감할 수는 있다. 먹는 것 또한 맛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정상적인 음식이 아니라, 단백질, 탄수화물 식의 알약을 통해 섭취한다. 알약을 먹은 다음 부스트 속에서 그것을 음식 앱을 통해 기름에 튀긴 조개, 코브 샐러드, 땅콩버터 등을 먹은 것과 같은 가상체험으로 전환시켜 가상적으로 먹은 느낌을 즐긴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가상세계가 곧 현실세계와 같다는 얘기다.

랠프의 기억은 파괴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디지털 세계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표시된 정밀한 이미지, 비디오, 노트, 링크 등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천연두뇌뿐이었다. 이 두뇌 속에서 기억(그것을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면)은 식욕, 후회, 욕망 등의 물웅덩이에서 불쑥불쑥 솟아나왔다. 그는 대화의 단편적 조각들만 건져 올릴 뿐이었다. 떠올린 흐릿한 그림들은 이리저리 바뀌다가 사라져버렸다. 그것들은 선명한 그림이라기보다는 유령 같은 흐릿한 자취를 가진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이걸 뭐 두뇌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랠프는 보건복지부의 칩 실험실에서 긴밀하게 협력하며 해마다 실시되는 부스트 업데이트를 감독해왔다. 업데이트 덕분에 매년 3월 중순 약 4 3,000만 명의 미국인이 잠에서 깨어나면, 그들의 두뇌가 전보다 더 총명해지고 활발해졌다는 색다른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올해 업데이트 시행이 예정되어 있던 어느 날, 그는 칩 부서에 새로 부임한 수지로부터 게이트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는 얘길 듣는다. 그는 중국인들이 통신과 데이터를 보호해주는 칩의 감시 게이트를 활짝 열어놓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즉 정부와 기업이 개인 사용자의 생각과 꿈, 행동 등 사생활을 낱낱이 살펴보고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회사들이 한 개인의 평생 기억들을 마음대로 검색하고, 감시하고, 엿볼 수 있다니 랠프는 자신이 그 게이트를 폐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규 업데이트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려던 기관이 그를 납치해 부스트를 제거해버린다. 태어나던 날 머리에 칩을 삽입했던 그는 이제 허약한 천연두 뇌의 야생 상태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하다. 이 작품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태어나자마자 부스트를 사용했던 남자, 부스트 업데이트를 감독할 정도로 해킹, 디지털 쪽의 천재로 불리던 이 남자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로지 천연두뇌만으로 거대한 기업과 싸워야 하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 스토리이다. 그는 멕시코 인접 국경지역에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거부한 채 천연두뇌 상태로 살아가는 야생인간들을 찾아가 아날로그 세계의 사람들과 협력을 하게 되고, 부스트를 통해 전 인류를 통제하려고 하는 기업과의 전쟁은 매우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신기한 건 이들이 보여주는 미래 세계의 모습이 터무니없는 공상과학처럼 허황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 다는 것이다. 그건 아무래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인공지능의 발전에 관한 수많은 사례들을 보고,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데이터를 합리적으로 분석해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비즈니스와 연결되는 시대이니 말이다.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애플의 음성인식 서비스 '시리'처럼, 빅데이터로 수집된 정보를 기반으로 음성화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사용자에게 제시하는 것이 인공지능 소프트웨어의 일종이라는 걸 기억한다면 인간만큼 똑똑해진 컴퓨터를 만나는 것이 근 미래가 아니란 보장도 없고 말이다.

특히나 이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저자의 이력이다. 스티븐 베이커는 지난 10년 동안 비즈니스위크지의 수석 테크놀로지 필자로 활약했다. 데이터 경제, 무선 테크놀로지의 성장, 클라우드 컴퓨팅 등을 취재하여 보도했고, 첫번째 출간한 책으로 '빅데이터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을 '소설'로 쓴 것이 아니라 미래학자 입장에서 그가 예견하는 미래를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쓴 것일수도. 그렇다면 이 작품은 픽션이 아니라 예언이 되는 셈이다. 몇몇 미래학자들은 . 2029년이면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지능이 인간 수준으로 진화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에서처럼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지닌 로봇과 마주하게 된다는 말이다. 작품의 표지에 있는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20년 후부터 벌어질 현실이다!>라는 문구를 보고 이건 좀 지나친 억측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왜 이런 문구를 넣었는지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되었다. 그만큼 실재같은 미래를 그려낸 소설이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배수아 글.사진, 베르너 프리치 사진 / 가쎄(GASSE)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 그녀는 잠자는 남자로부터 다가올 봄에 LA에서 만나자는 메일을 받는다. 잠자는 남자는 글을 쓰는 작가이면서 영화를 찍는 독일 영화감독(베르너 프리치)이고, 극중 화자인 나(배수아)는 그의 촬영을 돕는다. 그들은 6년 전부터 그렇게 종종 촬영여행을 떠나곤 했다. 카메라 앞에서 그들은 지난밤 꿈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비밀과 기억에 대해 말하곤 한다. 이 작품은 배수아 작가가 ''을 필름에 담고자 하는 그와 LA에서 함께 보낸 일주일간의 매혹적인 여행 에세이이다. 화자인 ''가 여행길에서 읽고 있는 조르주 페렉의 소설 <잠자는 남자>의 페이지가    종종 펼쳐지는 이 여행기는 뭐랄까,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롭고, 고혹적이다. 여행에 관한 숱한 글을 읽었었지만, 이토록 황홀한 여행기는 난생 처음이다. 페이지 곳곳에 '잠자는 남자' ''가 실제로 촬영한 이미지 컷들이 실려 있어 글로 묘사된 것들이 고스란히 보여진다.

그녀는 여행 가방을 쌀 때, 꼭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가져가는 스타일이다. 옷가지 사이에 책을 서너 권 넣고, 화장품과 세면도구, 속옷, 스타킹, 두통약, 수면제, 모자, 머플러, 그리고 거울이 전부이다. 그의 여행 가방에는 항상 작은 도서관이 통째로 들어있다. 책과 영화 필름으로 가득한 그의 가방은 돌덩이가 든 것처럼 무겁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이동 도서관처럼 가방을 운반해서 끌고 온다.

특히나 마음에 드는 건 잠자는 남자의 여행법과 배수아 작가의 여행에 대한 의미였다.

잠자는 남자의 여행법은 이렇다.

드림 호텔에 도착한 첫날, 늘 그렇듯이 잠자는 남자는 제일 먼저 여행 가방에서 책들을 꺼낸다. 그리고 집에서의 습관 그대로 책들을 각각의 장소에 배치한다.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는 잠들기 전에 읽을 책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직 후 아침 햇살 속에서 가장 먼저 펼쳐 들 하루의 첫 책들을 골라 놓는다. 욕조 곁에도 한 두 권의 책이 있다. 목욕하면서 읽을 책들이다

그렇게 소파 테이블에도, 거실과 주방을 연결하는 카운터에도, 호텔 객실의 모든 공간에 책들이 놓여진다. 그는 심지어 사람들이 개나 고양이를 이불 속으로 데리고 오듯이 책들을 이불 속으로 데리고 들어온다고. 그렇게 잠자는 남자는 그 모든 책들을 여행길에 늘 들고 다니는데, .. 부러웠다. 사실 나도 배수아 작가처럼 여행 가방을 쌀 때는 최소한의 것들만 가져가려고 한다. 뭔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현지에서 구매하는 방법으로, 갈 때는 가볍게 올 때는 무겁게. 가 컨셉이다. 그러다 보니 항상 여행 전날 밤늦게까지 고민하는 것은 바로 무슨 책을 가져갈까 하는 것이다. 아직 읽지 않은 새 책을 가져가자니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비행시간이 지루해진다는 단점이 있고, 이미 읽었던 내가 좋아하는 책을 가져가자니 두께가 만만치가 않아 무거울 것 같고 말이다. 그러다 결국 종이 책을 포기하고 이북을 가득 다운로드 받아서 아이패드를 가져갔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낯선 여행지에서 익숙한 책을 가져가는 것은 친구, 가족 이상의 위안이자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잠자는 남자가 책을 잔뜩 가져가서 객실 이곳 저곳에 책을 놓아두는 것이 백 퍼센트 공감이 된다는 얘기다. 물론 무게 때문에 현실에서 따라 해보기는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배수아 작가에게 여행이란 이런 의미이다.

여행자가 길 위에 있듯이, 내 삶은 내가 쓰는 글 위에 있어요. 종종 여행지에서 나는 내 글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그 미래를 예감하곤 합니다.

여행을 떠날 때, 나는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하나의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한두 개의, 특정 장소와 관련된 어휘를 떠올리기 위해서 장소를 옮겨 다닐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정 나라에서 어떤 단어를 떠올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 단어는 다른 곳에 있었다면 아마도 떠올리지 않았을 단어이니까. 뿐만 아니라 여행지에서 무심하게 관찰한 것들, 샀던 물건들, 들었던 소리들, 냄새들이 자신의 무의식 저 깊은 곳에서 그 장소와 관련하여 훨씬 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점이다. 어쩌면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각성으로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아지고, 사고가 예민해지고, 또렷해져서 가능한 많은 것들을 눈 속에 담고, 머릿속으로 기억하고, 가슴으로 느끼려고 하는 그 순간들 말이다. 그곳이 아니면 절대 느끼지 못할 감각

혹시 밤중에 우연히 잠에서 깨어난다면, 그때 카메라로 내 잠을 찍어 줄 수 있겠어?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완전한 잠이어야 해. 잠든 척하고 있거나, 잠에서 깨어나 버리는 순간이 없는 순수한 잠을 촬영하고 싶어.

잠자는 남자는 자기 자신의 잠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 그녀에게 촬영여행을 떠나 이렇게 말한다. 우연히 잠에서 깨면 카메라로 자신의 잠을 찍어 달라고. 그러나 그녀는 아직 한 번도 잠자는 남자의 잠을 촬영하지 못했다. 그녀가 잠에서 깨었는데, 그가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던 탓이다. 그의 잠은 매우 희박하고 불완전해서, 그녀가 몸을 일으킬 때 침대의 미세한 흔들림이나, 화장실로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쉽게 깨어나 버리곤 했다. 언젠가 그가 순수한 잠을 촬영할 수 있을지 아직 그려지지 않은 그들의 앞으로의 여행도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