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소년
오타 아이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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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죄를 지은 사람은 교도소에 간다. 교도소에 가서 죗값을 치른다. 이십삼 년 전 그 여름, 소마와 나오는 세계를 믿고 있었다. 죄를 지은 인간이 법의 엄정한 심판을 받은 후 죗값을 치르는 세계를.

그러나, 그 세계는 옳지 않았다.

방송국 직원, 고스트 라이터 시절을 거쳐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는 야리미즈에게 어느 날 23년 전 사라진 아들을 찾아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야리미즈는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사라진 아이를 찾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일인가 싶어서 의뢰를 거절하려다 300만 엔이라는 착수금을 덥썩 받아버려 일을 맡게 된다. 그런데 일을 의뢰한 여인은 그 길로 집 열쇠를 그에게 맡기고는 사라져 버린다. 이십삼 년 전에 열세 살 나이로 실종된 미즈사와 나오는 초등학교 정문 근처에서 깜박 두고 온 게 있다면서 돌아갔는데, 그 뒤로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집에도 들르지 않았으며, 당일 오후 집에서 한참 떨어진 강가의 상점에서 잠깐 목격되고, 강가에 서 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오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강에서 조난을 당했을 경우 혹은 사고의 경우 시체가 발견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고, 유괴라고 보기에도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남겨진 나오의 책가방에는 실종 당일은 금요일 시간표가 아니라 토요일 시간표대로 책이 들어 있었다. 야리미즈는 조사원 슈지와 함께 실종 당시 나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어떤 사건 때문에 형사과에서 교통과로 좌천된 소마는 주택가를 돌며 수상한 차량 목격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며칠 전 열세 살 난 소녀가 도서관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몇 분 사이에 없어진 것이다. 그는 아이가 사라진 현장을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도서관 근처를 둘러보다 소녀가 기대어 있었다는 나무에서 무슨 딱딱한 것으로 새긴듯한 표시를 발견한다. 그것은 이십삼 년 전 여름, 나오가 실종되던 장소에서도 있었던 표시였다. 그는 본부로 달려서 담당 순사부장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만, 본부에서 이미 용의자에 대해 세운 방침을 바꾸지 않는다는 말만 듣는다. 유괴 당한 아이가 최고검찰청 차장검사였던 이의 손녀라 이번 사건은 속전속결이 지상명령이었고, 벌써 용의자 체포를 전제로 공개 수사로 전환될 거라는 거였다. 사실 소마는 이십삼 년 전 여름, 나오와 같은 동네에서 그의 세살 터울 동생 다쿠와 셋이 친하게 지냈었다. 순직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형사가 된 지금까지도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던 소마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소녀의 실종 사건과 과거 친구 나오의 사건에 연관성이 있음을 직감하고, 두 사건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학 동창인 야리미즈가 자신과 같은 사건을 조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소마와 야리미즈, 슈지 세 사람은 정보를 교환하며 힘을 합치기로 한다.

 

", 현재 일본의 재판 현장에서 '열 명의 진범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라'는 격언은 그림의 떡이지. 수사관은 자신이 세운 가설에 맞춰 용의자를 체포하려고 혈안이고, 검찰관은 기소한 피고인에 대해 유죄판결을 얻어 내려고 기를 쓰고, 재판관은 사건 처리 선수를 올리는 데 급급하고. 그 결과 어쩌다 원죄가 발생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책임을 묻지도 않아."

이십삼 년 전 열세 살 소년의 실종과 현재 열두 살 소녀의 유괴 사건이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 과거에 있었던 원죄 사건이 그 중심으로 떠오른다. 그렇게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원죄 사건'이란 죄를 짓지 않은 무고한 사람이 경찰과 검찰, 그리고 재판부의 유기적인 범죄 조작으로 죄를 뒤집어쓴 경우를 말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은 단 한 순간도 페이지를 놓을 수 없도록 몰입하게 만들어 주고, 사법체계의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작가의 예리함으로 공감과 이해를 넘어 분노하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형사재판의 대원칙, '열 명의 진범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라'는 과연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사회는 개인이 저지른 범죄를 공정하게 조사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판단해, 제대로 처벌하고 있는 것일까. 극중 한 인물의 말이 머릿속에 자꾸 맴도는 기분이다. '한 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지키기 위해 열 명의 진범을 놓쳐도 상관없는 그런 사회를, 정말 세상이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냐'는 말. 그렇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회를 세상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지 묻는다면, 글쎄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잇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현대 사회는 과연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위해 열 명의 범인을 포기할 수 있는가.

현대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을 다루고 있는 작품은 꽤 만나왔지만, 오타 아이의 이 작품은 단순히 원죄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마도 일본 최고의 형사드라마 시리즈의 각본가로서의 경력 때문이겠지만 구성도 훌륭하고, 캐릭터, 반전, 드라마 모두 흠잡을 데 없이 멋진 작품이다. '열 명의 진범을 잡기 위해 한 명의 무고한 피해자가 희생되어도 아무 상관없는 사회'를 너무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어 그 무고한 희생이라는 것이 시스템 속에서 필연적으로 계속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을 누구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 세계가 그런 사회라면, 사회도 그 한 명의 피해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드라마는 너무도 이해가 되어 함께 분노하고, 공감하고, 그러다 먹먹한 감정으로 슬픔에 휩싸이고 말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1 10은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래야 세계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의 제대로 된 의미가 보여지는 후반부에 이르면 마음이 아프고, 씁쓸해지고 만다. 특히나 사법 체계에 대한 신뢰를 위협하는 원죄 사건이 단지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픽션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사회의 부조리에 맞선 소년의 마음이 허구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실화보다 더 사실처럼 리얼하게 그려진 이 작품을 통해서 진실 뒤에 숨겨져 있는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이 사회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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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9
기예르모 델 토로 외 지음, 조영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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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말라 있다니. 그 다음엔 뭐지?

문득 이런 대사가 떠오른다.

'시체들이 바짝 말랐잖아. 피가 한 방울도 없다고.'

그게 아니면 댄 커티스의 1970년대 TV 호러쇼 대사를 인용할 수도 있겠다.

'중위, 저 세체들, 시체들엔 피가........ 한 방울도 없어!'

그리고 오르간 효과음.

피로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뉴욕의 JFK 공항, 최신 기종 보잉 777 대형여긱기 한 대가 착륙한 직후 관제탑과 통신이 두절된다. 완전한 암흑 속에 비행기는 완전히 작동을 멈춘 것처럼 보인다. 하이재킹 징후도 없었고, 화재경보도 없었고, 조종석의 이상경보도 없었으며, 뭔가 문제가 있었다면 승객들의 반응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비행기는 마치 죽은 것처럼 암흑 속에 있다. 탑승했던 백아흔아흡 명 중 구조요청 또한 한 건도 없었다. 대체 이 비행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에프 굿웨더 박사가 이끄는 미 연방 질병관리센터의 카나리아 프로젝트 팀이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방탄복에 방독면까지 착용한 그들이 기내에서 발견한 건은 시체들뿐이었다. 게다가 시체들엔 외상증후가 전혀 없었고, 표정 또한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시체들의 부검을 하면서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부딪히고, 대체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죽게 된 것인지 조차 알아낼 수가 없다. 뒤늦게 생존자 네 사람이 발견되지만, 그들 역시 별다른 기억을 하고 있지는 않았고, 화물칸에서 발견된 흙으로 채워진 검은 나무상자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마침 뉴욕 시는 4백여 년 만에 관측되는 개기일식을 맞아 온통 축제 분위기였는데, 달이 태양을 엄폐하는 짧은 순간 세상은 종말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부검실의 시체들이 하나 둘 깨어나고, 에프의 앞에 전당포를 운영하는 세트라키안이라는 노인이 찾아와 알 수 없는 말을 건넨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뱀파이어들의 습격과 생존자 네 명 또한 모두 뱀파이어로 변하게 되면서 도시는 점점 살아난 시체들로 뒤덮인다. 그리고 에프는 이 상황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한 세트라키안을 찾아가게 되는데...  2권에서는 에프와 세트라키안을 필두로 한 사람들이 이 모든 재앙을 불러온, ‘고대 종족혹은마스터라 불리는 최초의 일곱 뱀파이어들을 상태로 문명을 지키기 위한 전투를 벌인다고 하니 너무 궁금해진다. 아마 이 시리즈를 아예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1권만 읽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1권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 마자 바로 연결해서 2권을 밤새도록 읽고 싶은 기분이 들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 시리즈는 <스트레인>에 이어 <더 폴> <나이트 이터널>로 이어지며 뱀파이어 삼부작으로 완결되니 일단 읽는 순간, 다른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빠져들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자네가 싸운 건 시체였어. 병균에 사로잡힌."

세트라키안이 대답했다.

거스는 뚱보의 표정을 떠올렸다. 텅 빈 표정. 갈망. 그리고 하얀 피.

"뭐요?............ 그러니까 좀비 같은 거요?"

"그보다는 검은 망토를 걸친 사나이 쪽에 더 가깝지. 기다란 송곳니에 웃기는 악센트 알지? 하지만 지금은 망토와 송곳니 같은 건 없네. 웃기는 억양도 없고. 거기서 우스운 건 다 빼버리라고. 어차피 웃을 일도 없을 테니까."

이 작품은 최근에 <세이프 오브 워터>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첫 번째 소설이다. 사실 <판의 미로>, <호빗> 등등 그가 연출하거나 참여했던 수많은 작품들을 익히 보아왔지만, 그의 소설은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다. 워낙 그의 작품 세계가 독특한 세계관과 뚜렷하게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독보적인 연출 감각으로 판타지의 거의 최고였던 탓에, 소설이 어떨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살아있는 시체들의 이야기라고 하니,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워낙 그의 작품들이 B급영화의 정서를 가진 독보적인 색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뱀파이어 소설이야말로 그가 스크린으로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기괴한 상상력의 끝판왕을 보여줄 거라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 작품은 굉장히 치밀하고, 과학적이고, 현실적으로 그려진 뱀파이어 소설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 때문에 페이지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이 만들어졌고, 그야말로 웬만한 블록버스터 영화 못지 않게 강렬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었다.

사실 죽었던 시체가 되살아나는 언데드물이나 인간의 피를 빨아서 생명을 빼앗는 죽은 자들이 등장하는 뱀파이어물은 너무도 유명한 작품들이 많다. 그런데 그 작품들과는 다르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은 그런 고딕 호러 장르의 법칙을 고스란히 가져와 그야말로 관 위에 가득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21세기에 걸맞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일종의 재난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도시에 뱀파이어가 창궐하고, 인류 멸망의 위기를 앞두고 국가재난의 상황으로 치닫는 전개는 9·11사태를 환기시킬 수밖에 없고, 전세계에 확산되고 있는 알 수 없는 신종 바이러스들과 테러에 대한 두려움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 2차 대전 당시 폴란드의 유대인 수용소 트레블린카에서 뱀파이어와 대면했던 동유럽 민속학교수를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며 대량학살과 피로 얼룩진 20세기 현대사도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어 홀로코스트의 20세기와 테러의 21세기를 오가며 매혹적인 고딕호러를 완성시키고 있다. 덕분에 이런 작품을 이제야 읽었다는 게 억울할 정도로 눈을 뗄 수 없게 몰입해서 읽었던 것 같다. 기예르모델토로는 21세기의 브램 스토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매력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앞으로는 그의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도 빼놓지 않고 챙겨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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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8-03-09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은책이예요.
피오나님 때문에 잊고 있다가 검색해보니 드디어 3편이 출간되었네요. 마지막은 더 재미있게 끝나면 좋겠어요~ 즐겁게 읽으세요~^^

피오나 2018-03-12 23:46   좋아요 0 | URL
ㅎㅎ 보슬비님도 재미있게 읽으셨군요! 저는 이 책을 이제야 알게 되어 땅을 치고 아쉬워했답니다. ㅋㅋ
 
이에야스, 에도를 세우다
가도이 요시노부 지음, 임경화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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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는 기다림의 천재였다. 기학적이라고 할 만큼 '견뎌서 이겨내는' 것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간토 8주로 가시오.'

육 년 전 히데요시의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도 가장 밑바닥에는 이에야스의 이런 기질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국시대 3대 영웅하면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말하는데, 이 중 최종 승자는 기다림의 미학을 알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모 드라마에도 나왔던 이들에 관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로 만약에 울지 않는 두견새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이들 셋의 답은 이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먹이를 주거나 윽박지르거나 어떻게든 울게 만들겠다고 했고, 오다 노부나기는 울지 않는 새는 죽여 버려야겠다고 했다.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 암살 당했을 때 반란자를 제압하여 1인자의 자리에 올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해 1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 작품은 바로 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시대를 구축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전국시대의 대혼란기, 이에야스의 당시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대게 그 나이면 앞날을 생각하기보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은퇴를 하거나 자손들을 위해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보통일텐데, 에야스는 황폐하기 그지없는 땅을 바라보며 새 시대를 꿈꾼다. 이야기의 서두에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호조 가문의 옛 영지를 양도받게 되는데, 가신들은 모두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며 그를 내쫓아버리기 위한 교활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이에야스를 걱정한다. 하지만 그는 이번 일은 자신의 뜻대로 밀고 나가게 해달라며, 간토에는 미래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모두들 자신을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바로 그거야."

이에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세대에는 우리 세대만의 상식이 있지.'

화약 냄새, 피 냄새, 살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수많은 전쟁터.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육감이라는 것이 있다. 이에야스는 곧바로 천수각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이에야스는 에도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형편없는 에도성을 보자마자 자신이 실성했는지도 모르겠다며 망연히 중얼거리고 만다. 그곳은 도무지 방벽처럼 보이지 않았고, 나무들만 무성한 것이 마치 황폐한 절 같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 이곳을 오사카처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가신들은 하나 같이 온갖 최신 기술과 문물이 모인 히데요시 정권의 사실상 수도인 오사카를 목표로 삼다니, 너무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 과연 이에야스는 그의 장대한 계획대로 일본 최고의 도시를 건설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에야스의 등장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거다. 강중기를 바꾸고, 화폐를 주조하고, 식수를 끌어오며, 석벽을 쌓고, 천수각을 올리는 각 장 마다 령과 성격이 다양한 여러 기술자들이 등장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리고 그런 장인들의 뒤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다.

사실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것도 없고, 에도 시대라는 것은 미야베 미유키나 쓰네카와 고타로의 작품 속에서 만나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수도 시설 정비를 위한 기기들, 화폐 주조의 세밀한 과정, 에도 성 증축에 대한 건축학 정보 등 도시 건설에 대한 지식 등이 총망라되어 있어, 실제로 도시 건설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있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하고 있다. 400여 년 전에는 불모지였지만 지금은 세계 최고의 도시 도쿄가 된 땅인 과거의 에도가 구축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나처럼 일본 역사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은 이들이라면, '장인정신이 일구어낸 도시 탄생기'로 읽더라도 흥미로운 대목이 많을 것 같다. 그리고 역사 소설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지점, 바로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경험과 인내심의 대가 이에야스라는 독특한 인물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아 흥미로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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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범죄에 로그인 되었습니다 - 전 세계 사이버심리학 1인자가 말하는 충격 범죄 실화
메리 에이킨 지음, 임소연 옮김 / 에이트포인트(EightPoint)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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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나는 어디에 있을까? 주격 인칭대명사로서 나는 주관적이고 의식적인, 현실 세계 속 진짜 자아다. 사이버 공간의 최전선에서 사이버 자아를 나타내주는 셀피는 모두 목적격 인칭대명사 다. 셀피는 대상이고, 더 깊게 파고들 것이 없는 사회적 가공품이다. 이는 셀피 속 주인공의 표정이 텅 빈 것처럼 보이는 이유일는지 모른다. 그 속에 의식이란 없다. 디지털 셀피는 피상적 사이버 자아일 뿐이다.

사이버 공간은 실재하는 장소일까? 대부분 인터넷을 하다가 정신을 깜빡 놓고는 음식을 태우거나, 약속 시간에 늦거나, 뭔가를 깜빡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온라인에서는 시각 왜곡 효과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휴대전화 사용자들은 매주 1,500번이나 무심코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SNS 게시물을 수시로 체크한다. 그리고 이런 행동들은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무엇은 하고 하지 않는지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CSI, FBI, 인터폴, 백악관이 선택한 세계 최고 사이버심리학자라 불리는 저자는 인류가 점점 사이버 공간으로 이주하는 요즘, 그들의 사용 패턴을 분석하고 실제 그것을 이용한 범죄 사례들을 분석해 인류의 지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고찰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인간과 기술의 교차점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사이버심리학이 그 가치를 어떻게 보여줄 지 기대가 되었다.

저자는 서두부터 이렇게 단언한다. '사이버 환경이 현실 세계보다 안전하며, 온라인에서 타인과 연결되는 것이 직접적인 만남보다 덜 위험하다는 것은 착각' 이라고. 실제로 사람들은 온라인 상에서의 '익명성'이라는 부분 때문 사이버 공간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대담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셀피(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와 섹스트(야한 이미지를 주고받는 것)를 비롯해 소셜 네트워크 사이에서 주고받는 추파 메세지 등으로 현실에서는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사이버 공간에서는 이성과 자제력을 내려 놓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인터넷은 전에 없던 성적 자유를 가능하게 했고,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통해서 누구나 온라인에서 쉽게 사이버 사회화되고 있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사이버 환경의 효과나 그 결과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이버라는 미지의 영역은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인류는 사이버 공간으로 빠르게 이주 중이고, 이런 대규모 이동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인터넷이 세상에 등장하고 고작 40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현재 32억 명의 사람들이 온라인에 접속해 있다. 2020년까지 15억 명이 더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곧 5년 이내에 약 50억의 인구가 사이버 공간에 공동 거주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없이 진행되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워진 오늘, 우리는사이버 세상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저자인 메리 에이킨 박사는, 중독될 수밖에 없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사이버 세상에 어떤 끔찍한 부비트랩이 숨어 있는지 우리가 알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게임 중독으로 인해 현실이 엉망진창이 된 사람들, 어른들의 스마트폰 중독이 어린 아이에게 교육적으로 미치는 무시무시함, 사이버 왕따, 소셜 네트워크로 인한 사회적 광기, 디지털 프랑켄슈타인에게 납치당하는 소녀들, 무책임한 셀피로 인한 심각한 문제들, 온라인 데이트 강간, 스마트폰 포르노 산업, 웹갬 성매매로 인한 아동 피해자들 등... 실제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이버 범죄들의 사례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이제 더 이상 사이버 범죄라 뉴스에서만 볼 수 있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닌 것이다. 해킹, 온라인 사기, 살인 청부 암거래, 아동 포르노 제작 등 그 범죄 양상 또한 다양하고, 무엇보다 무심코 클릭한 링크 하나 혹은 고작 몇 분 동안의 로그인이 우리를 무방비하게 범죄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범죄자는 사이버 세상에 잘 숨어 있지만, 그에 비해 우리는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어른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10대들을 제대로 보호하거나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0살짜리 소녀가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기술은 지능적이지만, 인공지능이 정보를 제공하는 상대가 10살짜리 아이라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때부터 그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아이는 우연히 부적절한 사이트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고, 아이의 호기심 때문에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거다. 우리는 아이가 기계나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데 도사리고 있는 윤리적 문제를 충분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에게 해를 끼칠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매우 재미있고 쉽게 술술 읽히지만, 그 기저에 깔린 심각성과 위험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이 두툼한 책을 다 읽고 나자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꼭 한번 이 책을 읽어보았으면 한다. 사랑하는 이들이 잔인한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이가 로그인하기만을 기다리는 사이버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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펫숍 보이즈
다케요시 유스케 지음, 최윤영 옮김 / 놀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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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펫숍의 뭐가 나쁘냐고!"

아니나 다를까, 고타가 폭발했다. 시카다 씨는 앉은 채로 빙그르르 의자를 돌려 우리를 정면으로 쳐다봤다.

"나는 동물을 좋아해. 당신들과 다르지. 잘 팔리는 동물만 모아놓고는 유행 지나면 홱 갖다 버리는 짓 너무 무책임하지 않아? 인기 있는 종류만 모아놓고선 그 다음은 나몰라라 하고. 진짜 싫어."

"우리는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일하고 있지 않아!"

 

이야기의 배경은 '유어 셀프 가미조 지점 펫패밀리' 라는 대형 홈센터 내에 자리한 펫숍이다. 이곳에서는 포유류와 열대어, 곤충에서 파충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을 취급하고 있는데, 정직원은 점장을 포함해 단 세 명이고, 기본적으로는 파트타임 직원과 아르바이트생으로 운영된다. 주인공 미나미 가쿠토는 취업준비생이자 펫숍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씨 착한 인물이다. 펫숍의 분위기 메이커인 구리스 고타는 광적일 정도로 엄청난 동물 애호가로, 원래는 수의사를 꿈꾸며 대학에 들어갔지만 중퇴하고 지금은 아르바이트만 하는 프리터이다. 그리고 이십대 중반의 가게 주임인 가시와기 료야는 술도 약하고, 새소리만 들어도 기겁하는 겁쟁이지만 일을 매우 잘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의 교육 담당이다.

 

 

 

이들 세 인물은 동물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으로 똘똘 뭉치는데, 펫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풀어나가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깨달음도 얻어가며 성장한다. 여섯 가지 에피소드들은 각각 별개로 읽어도 재미있을 만큼의 아기자기한 사건, 사고를 보여준다. 펫숍의 직원과 단골손님, 그리고 의문의 인물들이 얽히는 여섯 가지 사건들은 당연히 모두 동물과 관련되어 있다. 사람처럼 말을 하는 잉꼬 유리, 사랑스러운 고양이 아메리칸 쇼트헤어, 야생의 북방여우, 도롱뇽의 일종인 일본얼룩배영원, 항상 웃는 인상의 개 사모예드 등이 그 주인공이다. 주인공인 가구토처럼 동물에 관한 전문 지식이 없더라도, 모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간단한 설명 들도 이야기 속에 있어 굉장히 재미있다. 시시하고, 엉뚱해 보일 수도 있는 사건들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평범하고도 중요한 문제가 되는 일상의 풍경들이라 공감할 만한 대목도 많았고, 무엇보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스토리라 따뜻했다.

 

 

정말 다행이야. 나보다 더한 둔감왕이 여기에 있었다니..........

가시와기 씨는 뒤이어 선생의 품에 안겨 있는 여우를 보며 "아이까지 있었다니....... 알았어요. 인간 대표로서 먹이는 댈게요"라고 말해서 선생님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고타는 웃어도 좋은 상황이라 판단했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여우에게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인간도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야.'

 

다케요시 유스케는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일본의 추리 작가이자 사서이다. 그의 기존 작품들이 정통 미스터리에 가까웠다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 <펫숍 보이즈>는 코지 미스터리 형식으로 아주 평범한 등장인물들이 힘을 모아 사건을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 속에서 유머와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매우 소소한 사건들이 코지 미스터리로서의 매력도 충분히 보여주고 있지만, 코믹한 청춘 소설로서의 재미도 그에 못지 않다. 깔깔대고 웃게 만드는 순간도 있었고, 뭉클함이 느껴지는 대목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동물을 사랑하고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입장에서 너무도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작품이었다.

 

 

극중 가쿠토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국 인간도 개도 서로 다른 개체이지 않나. 하지만 인간들은 개의 얼굴을 보며 '웃고 있으니 행복한가 보네' 하고 믿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개가 인간의 최고 파트너라고 할지라도 머릿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이건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언어로 말이 통해도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악의가 없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생긴다. 평생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 또한 많으며, 이렇게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일 자체가 어렵다는 거다. 이렇게 동물들의 경우에서 비롯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결국엔 사람들간의 관계에 대한 고찰로 이어지는 드라마도 훌륭했다.

그리고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한국어판에서만 볼 수 있는 일러스트가 아닐까 싶다.

<재수의 연습장>의 저자 재수가 그린 일러스트들은 에피소드의 한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물들을 사랑스럽게 포착하고 있기도 하다. 몇몇은 마치 웹툰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면서, 이 소설을 더욱 유쾌하고 사랑스럽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리고 띠지에는 소설 속 캐릭터들의 성격과 행동을 잘 포착해서 그린 인물 소개 일러스트가 숨겨져 있어 그것 또한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실제로 많은 동물들이 이기적인 인간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진심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서 더 많은 이들이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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