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를 기다리는 그녀
이쓰키 유 지음, 김현화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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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연구. 그것이 '출구'가 되지 않을까 하고 구도는 한때 생각했다. 구도가 이 분야에 발을 들였을 무렵 인공지능은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기대와 두려움을 받고 있었다. 초지성의 탄생. 예상조차 할 수 없는 괴물. 그것이 완성된다면 자신의 거대한 권태로움을 덜어주지 않을까 구도는 그런 생각을 했다.

구도는 자신이 만든 괴물에 살해당하고 싶었다. 미도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본심은 그것이었다.

<리빙데드.시부야>라는 3D액션 게임을 개발한 미녀 프로그래머 미즈시나 하루는 빌딩 위에 서서 양팔을 펼친다. 공중에 정지해 있던 드론에는 카메라와 권총이 실려 있었다. 열네 살 다지마 준야는 왕따와 괴롭힘으로 인해 1년간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독학을 하며 주로 인터넷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요즘 준야가 빠져서 하고 있는 무료 인터넷 게임 속에서 갑자기 보너스 스테이지라는 문구와 함께 화면이 바뀐다. 평소와 달리 드론이 네 사람인 것만 빼면 여느 때와 같은 게임 화면이었고, 준야는 별 생각 없이 게임 속 좀비 무리에게 발포하기 시작한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어디까지나 게임을 플레이하는 걸로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실제 사람들이 공격 당하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그 중 한 대의 드론이 빌딩 위에 서 있는 미즈시나 하루를 총으로 쏴 죽이고 만다. 이 모든 걸 계획한 것은 바로 미즈시나 하루, 그녀는 대체 왜 이런 초유의 자살 사건을 일으킨 것일까.

그리고 6년의 시간이 흘러, 인공지능이 바둑으로 인간을 쓰러뜨리고, 스마트폰 어플을 통해 인공지능과 연애를 하는 시대이다. 인공지능 연구자인 구도 겐은 바로 그 바둑 소프트웨어와 인공지능과 대화할 수 있는 앱인 프리쿠토를 개발했다. 한편 프리쿠토에 대한 클레임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는데, 현실에서 인공지능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빠져 리얼한 인간관계를 훼손시키는 사람들의 가족들이 주로 불만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개선안으로 신개발 안건이 올라오고, 죽은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되살리는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그 동안은 가공의 캐릭터 인공지능을 만들어 왔으나, 실재하는 인물을 인공지능으로 만들어 보자는 거였다. 그 첫 대상으로 6년 전 초유의 자살 사건을 일으킨 미녀 프로그래머 미즈시나 하루가 선정되고, 개발자 구도 겐은 그녀를 완벽하게 되살리기 위해 그녀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인물이 그에게 조사를 중단하라는 협박을 가하기 시작하고, 조사가 위험해질 수록 구도는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게 된다.

"어때. 하루를 인공지능으로 만들면 이것과 같은 게 가능해. 당신은 하루랑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그건......"

"인공지능엔 수명이 없어. 그리고 인공지능은 계속 학습해나가지. 매일 다른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소생한 하루와 당신은 매일 새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죽을 때까지 하루와 같이 사는 거야."

미즈시마 하루는 무표정에 말수도 적고, 지나치게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엉뚱한 면도 있었고,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서툴고, 내면에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던 독특한 인물이다. 자폐적이라 할만큼 나서지 않고 타인과의 관계도 평범하지 않았던 그녀가  화려한 자살 방법이 매치가 되지 않았던 구도는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보기 시작한다. 이미 과거의 인물이 되어 버려 실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미즈시마 하루라는 캐릭터도 독특했지만, 극을 이끌어 가는 인물인 구도 겐이라는 인물 또한 굉장히 특별한 캐릭터였다. 그는 뛰어난 머리와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성격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자신은 타인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이 예상할 수 있는 뻔함을 경멸했다.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자의식을 모두 드러내지는 않고, 사람들 뒤에서 평범한 척 그들을 조종하는 생활이 편했으나 그에겐 너무나 무료하기만 했다. 그런데, 하루에 대해서 조사를 해나가다 그녀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는 순간,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가 어쩌면 지구 상에 유일할 지도 모를, 바로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야기는 크게 과거에 자살한 하루의 실체에 접근하게 되는 미스터리를 중심 축으로 인공지능 개발자인 구도와 게임개발자였던 하루의 삶이 차곡차곡 쌓이는 구조로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웹엔지니어로 활동하는 작가라 그런지 가상현실과 인공지능의 개발과 그 폐해에 대한 부분들이 굉장히 쉽고 읽히고,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사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제36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이라고 하는데, 데뷔작이라 하기엔 너무도 매력적인 요소가 많고 몰입감있는 스토리 전개가 멋진 작품이었다. 게임을 이용해 가상 현실과 실제 현실이 교차 되는 지점에서 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설정도 기발했고, 죽은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되살린다는 아이디어도 흥미로웠고, 그 과정에서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과 진짜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스토리 또한 충분히 개연성있게 진행되고 있어 공감되고, 이해가 되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은 미스터리로 읽어도 좋고, 로맨스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게다가 배경으로 인공지능과 스마트폰, 게임이 전면적으로 나서고 있어 인터넷 시대를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할 거리가 많았던 것 같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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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참 재밌는데 또 살고 싶진 않음 - 매일매일 소설 쓰고 앉아 있는 인생이라니
고연주 지음 / 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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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스터디를 하는 친구가 "누나의 인맥과 경험은 돈 주고 사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ㅈ선생님은 '그렇게 많은 경험을 했으니 이제 쓰기만 하면 된다'고 하신 적이 있다. 삶이 아까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다. 언젠가 영화관을 나오는데 한 남자가 '저 좋은 배우들을 데리고 이런 영화를 찍는 것도 재능'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에게 있는 하나의 재능을 발견한 느낌.

그녀는 정확하게 열한 살 때부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하고 다녔고, 벌써 세 번째 책을 낸 작가이다. 그런데 그녀는 끊임없이 '소설'을 쓰려고 한다. 막상 소설을 쓰려고 하면, 소설을 뺀 모든 것이 흥미로워져, 소설이 아닌 모든 것들에 열과 성을 다하는 자신에게 투덜투덜. 나는 왜 누군가처럼 그렇게 열정적으로 소설을 쓰지 못할까. 나는 정말 소설을 좋아하는 걸까. 스스로를 형편없다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소설을 쓰는 덴 게으르지만 소설을 쓰지 않고 있는 자신을 책망하는 덴 열심인, 재미있는 인물이다. 대학에서 전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이 소설을 쓰고 싶어 얼마 전부터 소설 워크숍에 다니기 시작해, 7년 만에 소설이라는 걸 완성했단다. 하지만 그저 열심히 썼다는 걸로만 만족해야 하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이란다.

왜 나한테 아름다운 것이 당신에게는 도통 아름답지가 않고 당신에게 아름다운 것이 왜 나에겐 아무렇지 않은 거지.

 

왜 그녀는 소설을 써야만 하는 걸까. 이미 책을 세 권이나 출간한 작가이고, 게다가 너무도 맛깔스럽게 문장을 만들어내고, 주변에 사람도 많고, 이것저것 인생의 풍부한 경험도 해보았고.. 그래서 소설보다 더 흥미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만족스럽지 못한 걸까. 가만, 그런데 나 역시도 그렇지 않은가. 나 역시 다른 이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가치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었지 않은가. 나 역시 다른 이들이 부러워할만한 부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내가 가지지 못한 그것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책망하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녀의 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소설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버리면 행복해질 수도 있어." 물론 그럴싸한 논리다. 하지만 그걸 버리면,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닌 게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어쩌면 사는 게 소설보다 소설 같은데 이걸 소설로 못 쓰는 건, 사는 법을 알아버려서 인지도 모르겠다. 사는 데에는 개연성이 없이. 필연성이 없어. 사는 건 커다랗고 두루뭉술한 우연의 총체니까. 주변에서는 자꾸 무엇인가 일이 일어났고 나는 삶을 주섬주섬 적다 보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그것만으로는 쓸 수가 없어서. 나는 나의 몇 가지 불행을 생각하곤 금세 좌절했다. 나는 왜 불행마저도 상투적이지, 쓰는 글도 상투적인데. 내 불행은 클리셰해서 도무지 소설로 옮겨올 수가 없다.

정작 소설은 안 쓰고 소설소설 이야기만 하는 그녀의 부끄러운 고백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유쾌하고, 흥미진진하고, 이해되고, 공감되면서 읽힌다. 아니, 이렇게 글을 재미있게 잘 쓰는데, 굳이 소설을 꼭 써야 하나 싶을 만큼 말이다. 별반 특출할 것도 별날 것도 없이 서른다섯이나 먹은 그녀는, 별나지 않은 직업을 갖고 별나지 않은 외모로 별나지 않은 것들을 향유하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 단 하나, 성격은 별나다고 인정하는데, 바로 한 가지에 대해 남들보다 길게 말하는 초타이어드 '집요집요 파워'때문이라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녀가 특별해지는 것이고, 그래서 그녀가 세상에 약간 비스듬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올바르게만 살아가려고 하는 그 누구보다 그녀의 인생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게 아닐까.

나는 종종 외로워졌고 그래서 비참해졌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자랑스러웠다.

 

가끔은 현실이 더 소설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일상을 통해서 대리 위안을 받게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 맞장구 치면서 공감을 하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고연주 작가의 책을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너무도 매력적이라 기존에 출간된 작품 두 권을 바로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을 살면서, 끊임없이 소설을 써야만 한다고 그것을 의무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독특함이 어쩐지 사랑스러웠고, 멋지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처럼 세상에 약간 비스듬한 사람들을 몇몇 알고 있다. 평범한 이들이 보기에는 다소 삐딱한 시선을 가진 이들로 통하는 그들의 씩씩하고 주눅들지 않는 태도를 사랑한다. 이 책은 그런 이들 편에서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다. 당신은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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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정의 (특별판) 라드츠 제국 시리즈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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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에게 자아와 감정을 부여한 기가 막힌 소설! SF나 스페이스 오페라를 처음 접한 독자들에게도 매혹적인 이 작품은 어느 순간 극중 화자에게 감정 이입해 광활한 우주를 체험하게 만들어 준다. 슬픔으로 미쳐버린 인공지능이라니... 정말 기가 막힌 설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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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철학 - 깊은 공부, 진짜 공부를 위한 첫걸음
지바 마사야 지음, 박제이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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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깊게 공부하는 이유는 환경의 동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근본적으로 깊은 공부, 즉 래디컬 러닝이란 언어 편중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언어 편중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행위 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언어를 그 자체로서 조작하려는 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언어의도구적 사용에서완구적 사용으로 향하는 것이다. ‘굳이 말하려면 할 수 있지하는 감각으로. 마치 장난감을 다루듯 언어를 조작하며 환경의 요구에서 벗어나 자신이 지니게 될 다양한 가능성을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공부란 무엇인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부'가 비단 학창시절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해외 여행을 위해 외국어를 공부한다거나, 회사 업무에 필요한 서류 작성이나 컴퓨터 기술을 공부한다거나, 정년 후에 철학이나 종교에 대해 배우거나, 취미로 미술이나 악기를 배워 본다거나, 재테크를 위해서도,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도, 아이를 낳고 육아를 위해서도, 우리는 매번 공부를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시작할 때는 누구에게나 '처음'이니 말이다. 공부란 책을 통해서도, 인터넷을 통해서도, 학원이나 모임 등을 통해서도 시작할 수 있다. 문제는 요즘 시대가 그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 넘쳐나는 시대라는 거다. 저자의 말처럼 현대는 그야말로 '공부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에서 정보 과잉 상황을 공부의 유토피아로서 적극 활용해 나름의 깊이 있는 사고를 하는 방법에 대해 고찰한다.

입시와 취업 때문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우리는 거의 평생을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며 살아간다. 공부란 무엇이고, 왜 필요하며, 어떻게 해야 남들과 차별되는 공부를 해나갈 수 있을까? 그런데 저자는 시작부터 '공부란 곧 자기 파괴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새로운 지식과 스킬을 더하는 것이 공부라는 생각부터 버리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냥 공부가 아니라, 깊이 있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보다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새로운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를 열어야 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새롭게 변신하며, 자기만의 언어를 갖는 일이 깊은 공부를 향한 첫 걸음이다.

정보 과잉 시대인 현대에는 유한화가 절실한 과제다. 날마다우선은 여기까지 해냈다는 경험을 쌓아가자. 하나의 임시 고정에서 새로운 임시 고정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공부는 어떤 단계에서 그만두더라도 나름대로 공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중단에 의한 임시 고정이다.

그렇게 공부의 언어론적 고찰을 비롯한 원리가 이어지다 3장부터 공부의 주제를 찾아내는 방법과 관련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실천편이 시작된다. 특히나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4장인데, 공부를 진행하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기술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이 장에서 파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데, 바로 '완벽한 독서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독서라 하면 처음 나오는 문장부터 마지막 마침표까지 통독하는 거라고 생각할 텐데, 통독했다 하더라도 기억하는 내용은 부분적이므로 실제로 '완벽하게'는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띄엄띄엄 읽는 것도 충분히 독서라고 말한다. 심지어 목차만 파악해도, 나아가 제목만 보더라도 어떤 말은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하는 독서의 본질이란 대체 무엇일까. 깊이 있는 공부를 위한 것이 다독이나 통독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어지는 독서의 기술, 노트의 기술, 그리고 글쓰기의 기술에는 매우 실용적인 팁들도 함께 담겨 있다. 어떤 분야를 완벽하게 통달한 '공부 완료' 상태란 있을 수 없으므로, 어느 정도 '일다는 공부했다'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비로소 '중단을 통해, 일단 공부를 성립시킬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떤 단계에 있든 '나름대로 공부한' 것이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일단 중단한 후에는 반드시 재개해야 한다는 것.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포인트이다. 굉장히 흥미로운 책이었다. 애초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배경으로 시작된 이 책은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읽다 보면 그가 제안하는 공부 프로세스에 나도 모르게 현혹되고 말 테니 말이다. 철학적으로 읽어도 재미있고, 공부에 관한 에세이로 읽어도 훌륭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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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몰래 널 사랑하고 있어
뤼후이 지음, 김소희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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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같은 이야기로 건네는 위로는 확실히 비현실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어느 날 삶에 크게 일격을 당하고 나면, 우습게 보았던 문장들이 막막하고 어두운 밤에 희미한 한 줄기 빛이 되어주기도 한다. 마음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이야기 하나가 흐르는 피를 잠시 멎게 해줄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페이지에 써 있는 문구에 가슴이 쿵 했다. 그건 바로 <믿어도 좋다. 세상은 당신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다>라는 평범하지만 힘 있는 두 문장이었다. 사실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출간되는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전달하려는 이야기가 대부분 사랑과 희망, 꿈 등 긍정적인 메세지라서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 어느 정도 뻔한 이야기를 할 거라고 지레 짐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책을 읽기도 전에 어느 정도 마음에 방어막을 치고 시작했는데, 믿어도 좋다는 이 문구 하나에 뭔가 봉인 해제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거다.

이 책은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국에서 숫자 8은 부귀영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구성부터 뭔가 행운을 상징하는 것 같은 저자의 이야기는 뻔한 것 같으면서도 식상하지 않았고,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특별한 공감대를 만들어 주었다. 가족과 친구, 연인간의 사랑과 나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낯선 이들과의 관계, 우리가 삶에서 겪게 되는 역경과 실수 등 다양한 생각할 거리들이 실제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모두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어 중국의 그것이기도 하지만, 2018년 현재 대한민국의 그것처럼 고스란히 읽히고 이해되고 공감이 되고 있었다.

 

삶에서 놓치고 사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의 행동에 실린 호의와 진심을 우리는 돌아선 후에야 알게 되기도 한다.

삶이 나를 못난이 취급하며 마구 괴롭힌다는 생각이 들 때, 내가 만난 모든 것들이 못생긴 개구리처럼 보일 때, 비극으로 생각하는 대신 입을 한번 맞춰보자. 개구리가 왕자로 변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그녀가 만났던 할머니 세 분에 관한 이야기였다. 파리에서 만난 이웃 할머니는 일흔을 훌쩍 넘긴 분이었는데, 가까운 가족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쓸쓸함이나 슬픔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방안 구석구석 새로운 꽃들이 있고, 찻잎과 커피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고, 시를 읽으며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매력적이고 우아한 할머니. 두 번째는 소문난 대갓집의 친척 할머니인데, 고풍스럽고 단정했던 그 분은 가세가 기울어서도 기품과 품위를 잃지 않는 분이었다. 세 번째는 동네에 살던 가난한 할머니인데, 자녀들에게 버림받은 후 작은 집에 혼자 사시는 분이었다. 가난하고 고된 삶을 사시는 분이었지만,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으셨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청결 그 자체에, 입가에는 언제나 미소가 걸려있는 분이었다. 저자는 시시각각 할머니와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부끄러운 스스로를 돌이켜 반성하고는 한다고 했다. 운명과 처지는 제각각이었지만 모두가 품위 있는 삶을 살아냈던 세 할머니의 일화가 감동적이었다. 항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내 삶을 돌볼 시간도, 힘도 없다고 투정했던 시간을 돌이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중국 젊은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에세이스트 뤼후이의 최신작이다. 발표하는 책마다 100만 부 이상 판매되어 ‘100만 베스트셀러 작가로 불리기도 한다는데, 왜 젊은 세대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작가인 지 알 것도 같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에서 글감을 찾는다고 하는데, 덕분에 뜬구름 잡는 위로가 아니라 현실에 굳건하게 발을 디디고 있는 글을 통해서 진심을 전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샌가 정말 그녀의 말처럼 세상을 보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세상이 혹독하게만 보여도, 유독 운명이 나한테만 가혹한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세상이 몰래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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