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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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각자의 스무 살 생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이 어떤 하루였는가, 라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스무 살 생일에 대해 잘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한 것은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이다.

 

당신은 스무 살 생일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는가. 하루키는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르바이트로 커피점 점원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일을 바꿔줄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 생일날도 종일 즐거운 일 따위는 하나도 없이 보냈다고. 하루키의 신작 단편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역시 고독한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하게 된다.

웨이트리스 일을 하는 그녀는 생일날 밤을 함께 보냈어야 할 남자친구와 며칠 전에 심각한 말다툼을 했고, 아르바이트 친구가 날짜를 바꿔주기로 했지만 감기가 도져 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급히 일하러 나오게 된다. 어차피 스무 살 생일이라고 딱히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녀는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일하는 곳은 롯폰기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플로어 매니저는 가게가 있는 빌딩의 육층에 자신의 방을 가지고 있는 사장의 방에 저녁식사를 가져다 주는 일을 했는데, 갑작스런 복통으로 그 일을 그녀가 맡게 된다. 정확히 8시에, 604호실로 식사를 가져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8시가 되어 사장의 식사가 차려지자 그녀는 왜건을 밀려 육층으로 올라갔고, 방에 있던 노인에게 요리를 전달한다. 그런데 노인은 그녀에게 의외의 제안을 한다.

"아가씨, 오 분쯤만 자네 시간을 내줘도 괜찮겠는가? 자네와 이야기하고 싶네." 라고.

 

 

인생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스무 살 생일을 이제 막 맞이한 그녀와 노인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사실 식당 직원들 사이에서 사장은 조금 미스터리한 존재였다. 그 동안 플로어 매니저 외에는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고, 원하는 요리 또한 항상 치킨으로 정해져 있었다. 조리법과 곁들이는 채소는 그날그날 조금씩 달라졌지만,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치킨 요리였다.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의문의 노인과 하필 생일날 아무런 특별한 일을 갖지 못한 고독한 여주인공. 세차게 내리는 비로 인해 공기 중엔 비 냄새가 섞여 있었다.  과연 그녀의 스무 살 생일날 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생일 축하하네." 노인은 말했다. "아가씨, 자네의 인생이 보람 있는 풍성한 것이 되기를. 어떤 것도 거기에 어두운 그림자를 떨구는 일이 없기를."

두 사람은 잔을 마주쳤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아트' 프로젝트, 그 네 번째 작품이다. <>, <이상한 도서관>, <빵가게를 습격하다>에 이어 독일의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카트 멘시크의 그림과 함께하는 이 작품은 일본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단편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짧은 분량의 이야기이지만, 독특한 분위기의 일러스트와 함께 보여지는 스토리는 꽤나 매혹적이다. 카트 멘시크의 일러스트들은 삽화 정도의 느낌이 아니라 하루키의 글을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짧은 단편이지만, 그림책으로도 소장 가치가 있을 것 같은 예쁜 책이기도 하고 말이다. 빨강, 주황, 핑크, 강렬한 세 가지 색과 과감한 클로즈업 컷 등 선명하면서도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일러스트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하루키는 "모든 사람이 일 년 중에 딱 하루, 시간으로 치면 딱 스물네 시간, 자신에게는 특별한 하루를 소유하게 된다."고 생일의 의미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생일이라는 것은 당신에게 일 년에 딱 하나밖에 없는 정말로 특별한 날이니까 이건 좀 더 소중하게 여겨야지요. 그리고 유례를 찾기 힘든 그 공평함을 축복해야지요." 라고.

이 작품 속 그녀처럼, 누군가 나에게 생일이니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단 그 소원은 하나여야 하고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도 도로 물릴 수 없다. 어떤 소원을 선택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소원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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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함은 분만실에 두고 왔습니다
야마다 모모코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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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클로 속옷 위에 줄무늬 티셔츠, 육아에 허덕이는 좌충우돌의 나날. 짬이 나면 스마트폰과 눈싸움을 벌이거나 과자 먹기..... 나의 심신도 여성스러움도 깨끗이 말라버렸습니다. 여성 호르몬의 사하라 사막인가?!

하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태평양보다 넓고 깊습니다.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일이 바로 '육아'라 가끔은 누구나 하는 걸 과연 힘들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어려운 건 어쩔 수가 없다. 돈과 경력을 포기할 수 없어 눈물겨운 워킹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엄마도, 종일 집에서 아이만 돌봐야 하는 전업 주부인 엄마에게도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모자라 퇴근 하자마자 집에 와서 제2의 일을 시작해야 하는 워킹맘의 고달픔이야 실제 엄마가 아닌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알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24시간 아이와 함께 지내느라 온 마음과 시간을 다 투자해야 하는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맘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오죽하면 매일같이 그만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던 직장 생활을 다시 하는 게 아이를 종일 돌보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겠는가.

 

나도 엄마는 당연히 처음이다 보니,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매일매일이 새롭고, 매 순간이 실수투성이에 정신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다. 육아에 관련된 책도 읽을 만큼 읽었고, 주변 친구나 선배맘들에게 노하우도 많이 전수받았고, 이 정도면 엄마로서 준비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 부딪히는 육아의 세계란, 책을 통해 만나고, 사람들의 경험담을 통해 짐작했던 그 수준이 아니었다.

그 스트레스를 해소 하기 위해, 공감하고, 위 받고 싶어서 숱한 육아와 관련된 에세이들을 죄다 찾아 읽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유쾌하고, 공감되는 책을 만났으니, 바로 인기 일러스트레이터야마다 모모코의 리얼 엄마 데뷔전을 그리고 있는 이 책이다. 이름하여 '섹시함은 분만실에 두고 왔습니다'!! 이런 제목으로, 이렇게나 충격적인 비주얼의 일러스트가 어울리나 싶은 생각은 잠시 접어 두시길. 그야말로 유쾌한 자학이 작열하는 폭소 육아일기는 당신에게 엄청난 공감과 위로와 유쾌함을 안겨줄 테니 말이다.

 

산휴, 육휴 기간은, 뚜껑을 열어보니 정말 눈 깜짝할 새였다. 휴직 전에 예상했던 생활이나 외모와는 많이 다른 결과가 된 것도 아쉽다. 전혀 살이 빠지지 않았고, 옷으로 가려지지도 않는다. 스마트폰이나 기성 유아식에 의지한 채 아무렴 어때 하고 생각해버린 적도 있었다. 나는 전혀, 절대로, 완벽한 엄마가 아니었다.

야마다 모모코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라는 18개월의 대장정 동안 좌충우돌하는 진풍경을 담은 육아 카툰 에세이는 예쁜 엄마는 도시전설에 불과하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실제 저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일러스트로 그려내고 있는 모습은 전 프로레슬러 '라이오네스 아스카'랑 닮은, 섹시함은 원래 없었지만 출산 후 완전히 상실했다고 표현되는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릴 정도로 일부러 못생겨 보이도록 그려낸 인물이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눈이 가고, 자꾸 웃음이 나고, 이해되고, 공감되는 캐릭터이다. 임신 하고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달걀형 얼굴이 되고 싶었는데, 달걀형 몸매가 되고 말았다는 그녀의 한탄은 아마 대부분의 임신부들이 경험해본 이야기일 것이다. 날씬하게 임신 전 원래의 몸매 그대로 배만 볼록 나온 임신부도 참 많더만, 전체적으로 거대해져버려 마치 험프티 덤프티 같은 모습이 되어 버린 모습에 그만 빵 터져 버리고 말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의 하루는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밤이 왔다!'의 느낌.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루가 다 가버린 기분이다. 매일매일 아기가 중심인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아기가 낮잠을 자고, 밤에는 덜 보채고, 수유를 주기적으로 하고, 때 맞춰 병원에 가서 예방 접종을 하고 등등... 잠시도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아이 때문에 샤워할 때 욕실 문을 열어두고 하는 건 기본, 잦은 수유 때문에 노브라에 구질구질한 옷을 입고, 화장은커녕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닌 그 모습들이 너무도 리얼하게 그려져 있어 엄마들의 폭풍 공감을 불러올 것 같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내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궁극의 못생김에 가까워져 가는 낯선 얼굴에, 출산 후에 수유만 열심히 해도 원래 몸무게로 돌아간다고 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은 다 거짓말인 걸로, 나도 경험했고, 당신고 경험했을 그 모든 구질구질하고, 불쌍한 사연들이 특유의 자학형 유머로 유쾌하게 소개되고 있다. 정신 없이 웃으면서 읽히는 카툰 에세이지만, 촌철살인의 문장들이 가슴 속에 콕콕 남아 찡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집안 일, 청소해놓아도 바로 난장판이 되어 버리는 집,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을 한 꺼 번에 감당해야 하는 우리의 엄마들.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잊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엄마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행복한 일인지 충분히 느끼고, 그 상황을 즐기며 누리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그다지 녹록치 않으니 말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지만,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끌어 안고 살아야 한다는 굴레와도 같다.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감수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매 순간 자신이 잘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그리고 곧 엄마가 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엄마들의 고충을 알 수 없는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도. 이게 바로 진짜 '현실 엄마'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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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심리학 - 너의 마음속이 보여
송형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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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다시피 선입견이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상을 보고 자기 멋대로 내린 판단이다. 그러니 선입견이라는 게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제법 쓸 만한 견해일 수는 있다. 어차피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추정할 때 그것이 100퍼센트 맞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감안하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50퍼센트 이상의 확률만 있다면 일단 선입견을 가설로 인정하고 적용해도 좋다. 틀리면 "아님 말고" 하면서 없던 일로 하면 된다.

삭막한 인간 관계, 팍팍한 일상의 고단함, 매일같이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현대인들은 누군가의 위로나 공감을 필요로 한다. 아마도 그 어느 때보다 심리학 서적들과 에세이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심리학 서적들도 요즘에는 딱딱한 이론이나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에세이처럼 가볍고 친근하게 풀어내는 경우가 많아 읽기에 좋은 것 같다. 심리학 서적들이 주로 '나 사진을 알라'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은데, 이번에 만난 책은 '타인의 심리를 읽어라'는 색다른 방향이어서 흥미로웠다.

이 책의 저자 송형석 박사는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정신 감정 편에 출연해 멤버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행동 패턴을 예측하면서 뜨거운 호응을 샀다. 이 책도 당시 2009년 출간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았었고, 이번에 개정증보판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10여 년의 내공이 더 쌓인 저자가 당시 제시할 수 없었던 해결책을 대폭 보강했다고 하니, 기존에 만났던 이들도 새로운 버전으로 읽는 다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특별 부록으로 심리학이 알려주는 '문제 인간' 감별법과 대처법을 담은 미니북을 받을 수 있어, 더욱 실용적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상한 사람, 불편한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이 책은 사람으로 스트레스 받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어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가? 확 짜증이 나는가? 한 대 패주고 싶은가? 그런 감정은 다 나중에야 갖게 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 비교적 인상이 좋다. 특히 노는 스타일이 서로 비슷한 경우에는 이들이 화통하고 자유로운 성격의 소유자란 느낌도 받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개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온다.

1장에서는 우선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처음 만난 사람을 파악하는 방법부터 알려주고 있다. 여러 가지 단서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흥미로운 것은 바로 '선입견'이다. 저자는 선입견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선입견을 최대한 활용해, 정반대의 가능성도 고려하고, 자신이 세운 선입견들 간에 모순되는 부분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을 파악하고, 숨어 있는 심리를 찾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실전처럼 이어진다. 2장이 시작되면 심리를 읽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도구를 심리학 이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대상관계 이론, 자기 심리학, 융의 인격 분류 등 정신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론들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이렇게 첫 번째 파트가 끝나고, 두 번째 파트가 시작되면 본격적으로 여러 사람의 유형이 성격 별로 보여지고 있다. 관심에 목마른 사람들, 타인에게는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 그리고 타인에게 자신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과 성격 별로 구분되어 있어 이야기 자체로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사람의 마음은 초능력자가 아닌 다음에야 쉽사리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므로 반드시 누군가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관계를 맺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타인은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한 거울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타인에 대해서 관심 있게 지켜보고 알아갈 수록 나 자신도 그만큼 충분히 이해하고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또한 이른바 '문제 인간' 유형을 만났을 때 상대를 어떻게 대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를 위해 너를 배운다는 심정으로, 이 책을 가이드 삼아 한번 읽어 보자. 분명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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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항목을 참조하라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황가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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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홀로코스트에서 끔찍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모든 개인성의 흔적이 말소된 방식이야. 한 사람의 독특함, 그의 생각, 과거, 성격, 사랑, 결점, 비밀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어. 그냥 존재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지. 피와 살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그 사실에 화가 나. 그래서 <브루노>를 쓴 거고." "그리고 브루노가 당신한테 말소자들과 싸울 방법을 가르쳐 줬고?" "그래. 가상의 세계에서. 일상생활에서 브루노가 날 위해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브루노는 멋진 꿈이야. 하지만 그 이상이기도 해."

책을 읽기도 전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무려 74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것도 홀로코스트 문학이라고 하니 말이다. 우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홀로코스트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과거를 되풀이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새겨진 글귀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픈 역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만 아픈 역사를 극복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는 영화, 연극, 문학, 음악, 미술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그 중 내가 어떤 경로로 그것을 접해 본 적이 있었나 떠올려보니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그리고 문학으로는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전부였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낯선 이스라엘의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의 이 작품이 굉장히 기대가 되었다.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강제수용소와 1950년대 건국 초창기의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전체 4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스토리를 단 몇 줄로 요약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존 소설의 형식과 문법, 그 어떤 걸로도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와 그 현실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환상과 은유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작가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잠시만 집중을 놓쳐도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이야기이고,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어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상상력의 내적 지평을 무한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은유라고 하면, 그것을 고스란히 문장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가 이야기를 써야 할 공책의 텅 빈 페이지 위로, 잠 못 이루는 밤에 하나의 단어가 번개처럼 스쳐 갔다. "조심해." 하지만 그가 무엇을 조심해야 했던 걸까? 그리고 그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무슨 목적으로 주위에 그렇게 능숙하게 요새를 쌓았던 걸까? 엄마 아빠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명령을 남겼다. 조심해. 그래야 네가 살아 남을 거다. 그리고 나중에 모든 전쟁이 끝나고 나면 네가 그토록 맹렬하게 지켰던 삶이 가진 모든 함의에 대해 차분히 앉아서 얘기할 시간이 있을 거야.

이야기는 아홉 살 소년 모미크의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한다. 어느 날 모미크에게 갑작스럽게 할아버지가 생긴다.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 버려야 마땅한' 나치에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했던 안셸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던 것이다. 역시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부모님들의 침묵은 더욱 깊어지고, 모미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망치는 괴물나치 짐승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애쓴다. 모미크는 비밀 공책에 몰래 발견한 책의 이야기를 베껴 쓰고, 길에서 데려온 작은 동물들로 나치 짐승을 길러내는 실험을 한다. 그래도 읽을 만했던 1부가 지나고 2부가 시작되면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한다. 3인칭으로 전개되던 소년 모미크의 이야기에 비해, 갑작스럽게 1인칭으로 전개되는 2부는 이야기를 따라 잡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야말로 환상과 은유로 뒤범벅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된 모미크는 실존 인물인 유대계 작가 브루노 슐스의 책을 우연히 읽고 나서 그에게 푹 빠진다. 실제로 브루노는 나치에게 살해되었지만, 이야기 속 그는 그곳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3부에서 작가인 모미크는 안셸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수용소에서 밤마다 수용소장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가로 자신의 처형을 요구한다. 그야말로 천일야화의 홀로코스트 버전인 셈이다. 소장은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 주인공인 카지크에 관한 전기가 바로 4부로 이 작품의 후반부를 장식하고 있다. 이 거대한 이야기를 읽는 내내 홀로코스트가 개인에게 남긴 비극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백만 개의 비극 중 하나의 비극, 살아남은 자들의 삶에 집중한 이 묵직한 이야기는 홀로코스트 문학의 새로운 한 지점을 그리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무엇보다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들이 인상적이었는데, 그것이 평범한 독자로서는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작가의 상상력에 힘겨웠지만 그 시간들을 견디게 해준 독보적인 매력이기도 했다. 다비드 그로스만은 한강 작가의 수상 이후로 국내에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의 작년 수상 작가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이렇게 그의 초기작을 국내에서 만날 수 있게 되어 굉장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은유'라는 장치를 가장 아름답게 문학 속에서 구현해내고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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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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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업계? 쿨하지.” 멜린다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옥이지. , 너도 미래를 찾으러 뉴욕에 왔구나. 세계를 재발명해주는 도시에 온 걸 환영해. 네가 원하는 게 뭐든 꼭 되길. 알았지?”

티아는 예일대를 졸업한 뒤 NYU의 음식학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녀의 우상은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기자인 헬렌으로 <뉴욕타임스>에 실린 날카로운 비평과 저널리즘의 딱딱함을 벗어나 자유롭게 써 내려간 회고록과 요리책을 너무도 사랑했다. 그녀는 대학원 인턴쉽 과정으로 헬렌의 인턴이 되기를 목표했지만, 대학원 입학 환영회에서 우연히 <뉴욕타임스> 레스토랑 평론가인 마이클 잘츠를 만나게 되면서 엉뚱한 곳에 배치되고 만다. 티아는 고급 레스토랑매디슨 파크 타번’ 물품보관소에 배치되어 일하게 된 그녀는, 그곳에서 마이클 잘츠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에게서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푸드 칼럼니스트인 마이클 잘츠는 자신이 미각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단 맛, 강한 향신료 맛, 신 맛, 쓴 맛 등.. 그 맛이라는 게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렸다고. 그래서 티아의 그 예민한 미각이 필요하다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의 제자가 되어 최고의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어보고, 평가하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쓰라는 것이었다. 대신 이 모든 사실은 비밀로 해야만 했다. 사실이 밝혀지면 자신의 명성이 바닥으로 떨어질 게 뻔했으니 말이다. 티아는 '푸드 고스르 라이터'역할을 하겠다고 대답한다. 평소에 갈 수 없었던 최고급 파인 다이닝에서의 식사, 장소에 맞춰 입을 수 있는 명품 의상들.. 무엇보다 자신이 맛보고 평가한 글에 따라 뉴욕의 레스토랑이 사라질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 미남 셰프와의 로맨스까지 시작되어 티아에겐 남자친구와 룸메이트를 비롯해서 세상에 숨겨야 하는 비밀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이 도시는 이제 내 놀이터가 될 것이다. 내 말이 세상에 퍼질 것이다. 이보다 더 나은 시나리오는 상상할 수 없었다. 지하철로 걸어가면서 내가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불협화음의 도시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화려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도 기죽지 않았다...가능성이라는 파도가 내 가슴에 밀려들었고 나는 그 파도를 타고 집까지 걸어갔다.

이 책의 저자인 제시카 톰은 작가이자 푸드 블로거로 소설 창작을 전공했지만, 실제 레스토랑 리뷰를 기고한 이력도 있다. 덕분에 화려한 뉴욕의 미식 업계를 완벽하게 페이지 속에 재현해내고 있다. 특히나 고급 레스토랑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음식들의 맛을 표현하는 부분들이 정말 기가 막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클레멘타인과 엔다이브가 들어간 에다마메 퓨레는 밝고 쓰고 깊으면서 명랑하다. 가을 배우들이 등장하는 여름 요리처럼.' 혹은 '캐비어 알을 하나씩 터뜨려보았다. , 하나 먹는다. 실크처럼 부드럽고 상큼해, . 이건 짜릿하고 톡 쏘네. 또다시 톡, 이건 유혹적인 맛이야. 어둡고 신비롭고 깊어' 등등... 실제로 이렇게 창의적인 요리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운 묘사들이다. 덕분에 평범할 수도 있는 스토리라인이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주인공이 하룻밤에 신데렐라로 변신하게 된다는 기본 플롯은 얼핏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화려한 도시 속 미식 세계의 권력, 그리고 그 속에서 재능은 뛰어나지만 순진한 우리의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너무도 흥미진진하다. 티아가 허영심에 들뜬 속 빈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갓 사회에 진출해서 세상과 부딪히게 될 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공감이 무엇보다 이야기에 매력을 부여한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가면서 티아의 앞날이 그려지면서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 지 독자들은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도 티아의 입장이었다면 그녀와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에 그녀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꿈꾸던 그 분야에서, 간절히,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말이다. 특히나 그것이, 모델, 디자이너, 백만장자 셀러브리티들이 잔뜩 모여 있는 욕망의 도시, 뉴욕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악마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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