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도서관
김이경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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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다 좋은 불쏘시개는 없느니!"

정신을 좀 슬게 하는 책들을 불살라 왕국의 난방까지 해결한다면 그보다 좋을 수 있으랴. 광장에는 거대한 용광로가 놓이고, 사람들은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 책들을 던져 넣었다. 골수에까지 좀이슨 자들은 불길을 피하기 위해 몰래 책을 감췄다. 그자들에겐 철퇴가 필요하다. 철퇴는... 활자판을 녹이면 되었다. 왕은 기꺼이 재활용을 허락했다. 문자의 시절은 끝났다. 이제 칼의 시대였다.  

-'분서' 중에서

만약 저승이 커다란 도서관이라면 어떨까.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저승에서 할 일이란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이고, 그걸 잘 써서 통과가 되면 니르바나의 세계에 들지만 안 되면 될 때까지 계속 써야 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과연 내 삶은 책으로 쓸 만큼 특별하고, 감동적인 뭔가가 있었던 걸까.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극중 누군가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니르바나에 가지 못하고 저승에서 자서전 쓰기를 하고 있었다. 주인공 역시 지극히 평범하고 평범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쉽게 글을 쓰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것, 그것이 시작이고 끝이었다. 모든 은유를 무색케 하는.' 이라고 말이다.

이 책 <살아 있는 도서관>은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던 <순례자의 책>이 무려 9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된 것이다. 초판에는 책에 관한 단편 10편이 실려 있었고, 이번 개정판에는 처음과 끝에 2편의 이야기가 덧붙었다. 추가된 처음 프롤로그는 애초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었던 동화 같은 짧은 상상, 이라고 작가가 밝히고 있으며, 마지막 에필로그는 오랫동안 작가가 마음속에서 궁글려온 이야기로 지난해 발표한 최신작이다. ‘책에 관한 소설집이라는 전무후무한 형식도 놀랍지만, 이 소설집 속에 실린 단편 이야기 하나하나가 너무도 다양하고, 흥미진진하고, 기발하고, 매력적이어서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마치 어린 시절 막 세계 명작 동화에 입문했을 때의 그런 기분이랄까. 책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페이지들에서 느껴지는 이야기의 힘이란, 그야말로 굉장했다.

"길을 잃었소?"

"아니오. 책을 구하러 가는 길이오."

흰 수염을 늘어뜨린 대상이 물었다.

"책이라고? 그게 무어요?"

"거짓은 죽이고 진실은 영원히 살아남게 적어두는 거라오. 내 혀가 죽은 다음에도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책이 있기 때문이오."                           

                 -'순례자의 책' 중에서

세상에 없는 책을 상상하고, 그런 책들이 꽂힌 도서관을 꿈꾸는 마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저승의 도서관'이라는 그림을 완성시켰고, 고대 서구사회에서 책의 주재료였던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넘어 13세기부터 시작되어 16세기 이후 유행했던 인피로 제본한 책도 등장한다. 조선시대 패설에 얽힌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와 일본 에도 시대의 책 대여상 가시혼야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너무도 흥미진진해서, 하나의 소재로 발전시켜 장편으로 발전시켜도 좋을 만한 이야기들이었다. 거기다 책을 독점하려는 욕망이 책을 어떻게 훼손하고 통제하는지 보여주는 분서의 역사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도 있고, 덴마크에서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 도서관'에서 모티브를 얻은 표제작도 매우 재미있었다.

시대도, 소재도, 방식도 너무 다양한 단편들이 마치 선물 상자처럼 느껴지는 이 단편집은 그 뿐 아니라 ''에 관한 방대한 지식까지 함께 전해 주고 있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들이 끝나고 나서는 '소설 속 책 이야기'라고 해서 각각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한 지식들이 실려 있다. 인류의 놀라운 발명품인에 관한 인문학적 주제를 '이야기'로 재탄생시키게 된 계기가 된 정보들이라 소설만큼이나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의 누드 제본 방식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책에 관한 백과사전 급 단편 모음집'이라는 주제에 가장 어울리는 제본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 자체로도 아름답고, 360도 쫙 펴지는 제본이라 읽기에도 너무 좋고, ''이라는 것의 본질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방식이라 이 작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제본이라는 생각도 든다. 짧고 술술 읽히는 이야기들이지만,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멋진 작품이라 오래된 도서관의 운치만큼 여운을 남겨주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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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3
진 웹스터 지음, 김지혁 그림, 김양미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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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요람에 누워 있던 귀여운 아기를 도둑맞은 적 없으세요?

어쩜 제가 그 아이인지도 몰라요! 소설 속 이야기라면 이쯤에서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겠죠?

자신의 근본을 모른다는 건 정말이지 말도 못하게 찜찜한 일이지만, 흥미롭고 낭만적인 면도 있답니다.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는 고아 소녀가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대학에 진학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 소녀의 성장 소설이자, 풋풋한 연애편지로 된 서간체 소설이기도 하다. 아마 꿈 많던 소녀 시절에 나만의 키다리 아저씨를 꿈꾸며 설레는 기분을 느껴보지 않았던 여성 독자들이 있을까 싶다. 그 이유로 이 고전 적인 플롯은 아직도 애니메이션과 영화, 뮤지컬, 드라마 등으로 변주되어 현대에도 꾸준히 사랑 받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하다.

열정적이고 모험심 강한 고아 소녀 제루샤는 올해 열일곱 이다. 보통 열여섯 살이 넘으면 고아원을 나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제루샤는 고등학교에 다니며 규정보다 2년이나 더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덕분에 손님들이 올 때면 마룻바닥이며, 침대며 청소를 하고, 아흔일곱 명의 어린 고아들을 깨끗이 씻기고, 빗질하고, 제대로 옷을 갈아 입히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 선생님의 부름을 받게 된 그녀는 상상도 못했던 제안을 받게 된다. 주로 고아원의 남자아이들에게 지원을 했던 한 신사분이 제루샤가 쓴 수필을 읽고는 그녀를 대학에 보내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학비는 물론 용돈까지 제안한 그의 조건은 단 하나, 답례로 한 달에 한 번 감사 편지를 써달라는 거였다. 그렇게 해서 제루샤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학업 진행 상황과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익명의 키다리 아저씨게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어쨌든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최근에 알게 된 비밀 한 가지 알려 드릴까요? 절 허영덩어리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실 거죠? 그럼 말씀드릴게요.

전 예뻐요.

정말이라니까요. 방에 거울을 세 개나 두고도 그걸 모른다면 완전 바보게요?

그리하여 이 동화의 주요 스토리는 제루샤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한 쪽에서 보내는 편지로 진행되는 스토리이지만 흥미진진한 이유는 바로 발랄하고, 긍정적이고, 고아라는 처지와 후원을 받는 입장 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할 말은 하는 여 주인공의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키다리 아저씨라는 인물에 대한 미스터리함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녀가 새로운 생활을 겪고,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설레임이 묻어나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 또한 매력이다. 거기다 키다리 아저씨라는 존재에 대한 일본의 반전까지 더해 지면, 그야말로 소녀들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완벽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고전 명작을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다시 읽는 즐거움을 주는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가 리커북으로 출간되었다. <키다리아저씨>는 그 세 번째 리커버북이다. 기존의 시리즈에 비해 서정적이고 따뜻한 색감의 예쁜 일러스트는 그대로, 거기에 고전적 프레임의 더 커진 판형과 빈티지한 색감으로 클래식한 느낌을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나 삽입되어 있는 일러스트는 따로 한 장씩 떼어놓고 보더라도 작품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답다. 따스하고 포근한 색감과 터치로 그려낸 세밀한 이미지들은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쳐도 바로 현실을 잊고 추억에 빠져 들도록 만들어 준다.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는 소장용으로도, 누군가를 위한 선물용으로도 최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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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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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면서 예쁘다, 아름다워, 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 겐야가 할머니에게 배운 비밀 의식이었다.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올 거야.

 

겐야는 고모 기쿠에가 여행 중 온천지의 여관에서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기쿠에 고모는 남편이 1년 전에 죽었고, 딸도 여섯 살 때 죽어, 로스앤젤레스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가족도, 친척도 딱히 없었기에 화장 절차는 일본에서 진행하기로 하고, 유골을 남편 묘 옆에 묻어주기 위해 겐야는 고모의 집으로 향한다. 미국에서 고모의 변호사를 만나게 되는데, 고모가 겐야에게 42억 엔이 넘는 유산을 남겼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유언장에서 여섯 살때 백혈병으로 죽었다고 알고 있었던 레일라가 사실은 유괴를 당해 행방불명 된 것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고모는 만약 레일라를 찾게 되면 겐에게 물려준 유산의 70퍼센트를 레일라에게 주었으면 좋겠지만, 찾지 못하면 레일라 같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회운동에 유용하게 썼으면 좋겠다는 문구를 썼었다.

겐야는 애초에 42억 엔이나 되는 유산을 상속받을 생각도, 그 돈으로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그보다 27년 동안이나 딸의 생사를 모르고 살았을 고모의 괴롭고 힘든 나날에 마음이 쓰여, 되든 안 되든 레일라를 찾아 보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고모가 홀로 생활했던 커다란 저택에서 비밀 상자에 있던 의문의 편지를 비롯해 작은 단서들을 발견하고, 사립탐정을 고용해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국에는 행방불명인 채 생사도 모르고 몇 년이나 지난 아이들만도 수만 명이었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레일라를 찾는 일은 그야말로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비밀을 감춘 채 생을 마감한 고모의 일생을 돌아보며, 과거에 있었던 그 날의 진실에 점점 다가갈 수록,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시종일관 잔잔하게 흘러가던 이야기가 도달한 것은 그야말로 반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파격적인 진실이었다.

 

 

 

 

겐야는 끓기 시작한 브로도에 잘 저은 달걀과 소시지를 넣어 충분히 섞고, 다시 한 번 끓었을 때 바로 가스 불을 끄고는 로잔느가 놓은 수프용 접시 두 개에 담았다.

"이건 굉장해요. 오늘 이렇게 호화로운 저녁을 먹을 수 있다니......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인생에는 살아보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행복이 무진장 흘러 넘친단다, 하고 늘 말해주었어요. 주술처럼 말이에요."

 

미야모토 테루는 일본 서정문학의 거장이라 불린다. 국내에 소개된 <환상의 빛> <금수>라는 작품 역시 그에 걸 맞는 작품이었고 말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어느 정도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고 해서 더 기대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모토 테루 특유의 담백하고, 잔잔한 감성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죽은 고모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된 남자가 숨겨진 비밀을 찾게 되는 과정 자체는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형식이지만, 이 작품에 긴장감이나 서스펜스 같은 요소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이 겪게 되는 상실의 아픔을 그렸던 전작처럼, 이 작품 또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선택과 그로 인해 달라져 버린 삶과 운명에 대해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수수께끼 자체가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미야모토 테루가 왜 서정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겐야의 고모가 살던 대저택에는 여러가지 꽃과 나무들이 가득했고, 넓은 정원이 숲을 이루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겐야는 경찰도 수사를 포기해버린 지 이미 20수년이나 지난 사건을 조사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건지 고민하거나, 레일라의 생사를 비롯해 자신에게 닥친 미래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질 때 정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풀꽃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꽃과 풀들에게 말을 건넨다. 너희들이 레일라를 위해 기적을 일으켜달라고. 겐야는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식물에게도 마음을 담아 칭찬하면, 반드시 응해오는 법이라고 말이다. 후반부에 숨겨졌던 비밀이 밝혀지고 나면 정원의 꽃들은 또 다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이 작품의 제목이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도 하고 말이다. 잔잔하고, 아름답고, 기품 있게 흘러가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 품고 있는 미스터리를 놓지 않고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있어 더욱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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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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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은 자기 위로 함정의 입구가 철커덩 닫히는 게 느껴진다. 다시금 눈물이 솟구친다. 난 끝장이야!

시체를 감춰야 한다. 하지만 어디에? 어떻게? 만일 오두막을 부수지 않았다면, 레미를 그 위로 올려놓으면 아무도 거기까지 올라가서 찾을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프랑스의 시골 마을인 보말에 사는 열두 살 소년 앙투안은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6년 전 이혼한 아버지는 한 번도 보발로 돌아오지 않았고, 앙투안은 고독한 어머니에 대해 책임간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별로 외향적이지 못한 천성이라 약간 우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친구들이 새로운 게임기에 정신이 빠져 있어 그의 친구는 옆집 데스메트 가족의 윌리스라는 개가 유일했다. 그런데 어느 날 윌리스가 자동차에 치였고, 앙투안은 데스메트 씨가 죽어가는 개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엽총으로 쏴 폐기물 담는 자루에 넣는 걸 보게 된다. 앙투안은 너무나도 괴로웠고, 그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자신을 따르던 데스메트 씨의 여섯 살 아들에게 순간적으로 화풀이를 하고 만다. 분노에 휩싸여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오른 앙투안은 윌리스의 죽음이 가져온 쇼크와 분노로 들고 있던 작대기로 아이를 후려치고 만다.

그렇게 단 몇 초 사이에 앙투안의 삶의 방향이 달라져 버린다. 열두 살짜리 소년이 살인범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겁에 질린 그는 아이의 시체를 숲에 있는 나무 둥치 구멍에 숨기고, 이후 실종수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지지만 시체는 발견되지 않는다. 12년 후, 의사가 되어 파리에서 살던 앙투안은 가급적 고향과 멀리 하며 살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요청으로 고향을 방문하게 되는데,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사건이 벌어지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열두 살 소년 시절의 비중이 가장 많다. 죄를 지었지만 그것이 발각되지 않았을 때, 결코 죄 지은 자는 편하게 발 뻗고 잠을 잘 수 없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책하고, 발생할 수 있는 미래의 경우 수를 떠올리며 불안감에 떨고, 그냥 붙잡혀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과 그저 이곳을 피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고민하게 마련이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 작품에서 서스펜스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그리는 데 더 치중하고 있다. 인물을 지배하던 죄책감과 불안감을 결국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이 무심코 저지른 아주 사소한 행동이라는 아이러니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세월과 함께 변한 것, 그리고 앙투안을 슬프게 하는 것은 이제 여기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중요성의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사실, 이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그가 죽인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의 모든 노력, 그의 모든 정신은 자기 자신에게로, 안전과 무사함에 대한 자신의 열망으로 향해져 있었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추리, 스릴러 작품으로 더 많이 알려진 작가이다. <오르부아르>가 공쿠르상을 수상하면서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공쿠르상과 추리 소설 관련 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가란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그의 위치가 독특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올해 <오르부아르>의 후속작인 <화재의 색깔>을 발표했고, 이는 '전쟁 3부작'으로 연결된다. 이번 신작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은 이 두 작품 사이에 위치한 작품으로 분량 때문인지 일종의 간주곡과도 같은 작품이라 평가 받기도 한다.

 

무대를 옮겨 다시 추리, 스릴러 작가로서 르메트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설명에 기대를 했지만,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을 추리, 스릴러라는 카테고리에 넣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문학성 넘치는 스릴러' 내지는 '문학적 추리 소설'이라는 평도 있지만, 글쎄 이 작품은 <오르부아르> 이후 완전히 달라진 그의 작품 세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어 기존 그의 미스터리들을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작품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르부아르> 이전에 보여줬던 그의 작품 스타일이 더 좋았던 것 같다. 플롯과 구성, 캐릭터 모두 엄청나게 정교하고 치밀하게 짜여 있었던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를 좋아했다. 각 권이 모두 꽤나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부분 전혀 없이 모든 요소들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과정에서 변화 무쌍한 플롯으로 인한 반전까지 훌륭한 시리즈였으니 말이다. 그의 '전쟁 3부작'이 기대가 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 같은 작품을 더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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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디블 가족 - 2029년~2047년의 기록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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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감정의 영향을 받아. 모든 값어치는 주관적이야. 따라서 돈은 사람들이 느끼는 딱 그만큼의 가치를 갖지. 사람들이 재화와 서비스의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은 돈을 믿기 때문이야. 경제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종교에 가까워. 수백만 시민들이 통화를 믿지 않으면 돈은 그저 색을 입힌 종잇장에 불과해. 마찬가지로 채권자들 역시 미국 정부에 돈을 빌려주면 그 돈을 결국 받는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돈을 빌려주지 않겠지. 그러니까 믿음은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야. 유일한 문제라고."

이야기의 배경은 세계 대공황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9년의 미국이다. 서민들은 심각한 물 부족 사태와 실업난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들은 샤워를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제한하고, 그나마도 초절수 샤워기를 이용해 안개처럼 분사되는 물로 씻어야 했다. 그렇게 물 부족으로 인해 평상시에도 재활용수를 사용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그렇게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뉴욕의 식당들은 붐볐고, 증권시장은 활황이었으니까.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국은 그 동안 숱한 위기를 겪어 왔다. 2001년의 911테러로 미국의 심장부를 공격받았고,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뒤이은 세계경기 침체, 그리고 2024년에는 스톤에이지 사건으로 주요 인터넷 인프라가 마비되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사회는 예상보다 빨리 안정세로 회복되었지만, 이번에는 엄청난 일이 발생한다. 바로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한 금융 쿠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2029년의 어느 날, 미국 대통령은 중국, 러시아 동맹국을 상대로 무혈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하룻밤 사이에 달러의 가치가 폭락하고, 새로운 기축통화가 이를 대체하면서 정부는 보복성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게 되는데... 고삐 풀린 인플레이션은 국가의 위기를 넘어 시민들 모두의 돈도 순식간에 집어삼키면서 위기를 겪게 된다. 이야기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에, 저작권사를 운영하며 저명한 소설가들을 유치하여 큰돈을 벌어 들인 더글러스 맨디블의 가족들이 이 위기 상황을 겪어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더글러스의 장녀는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장녀 에놀라와 뉴욕 타임스의 저널리스트 카터, 그리고 카터의 두 딸과 막내아들, 그들의 가족들이 있다. 주요 스토리는 카터의 큰딸로 노숙자 보호소에서 일하는 플로렌스와 그녀의 가족, 사설 클리닉에서 환자를 돌보며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둘째 딸 에이버리와 그녀의 가족들이 보여 주고 있다.

 

"도덕적 해이에 대해선 아버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미국인들 가운데 가장 손해를 많이 본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잖아. 미래를 위해 저축한 사람들. 미래를 믿은 사람들. 자기 자신을, 그리고 미래를 믿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사기 당한 기분을 느끼고 있거든. 거대한 몹쓸 장난에 당한 기분이라고."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누구나 생각했지만 아무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 가장 시니컬하고 강렬하게 사회를 비판하는 작가이다. <케빈에 대하여>에서는 소시오패스 아들을 둔 엄마의 모성애를 다뤘고, <내 아내에 대하여>에서는 의료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에 대해, <빅 브러더>에서는 사회적 문제인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 문제인비만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이번 작품 <맨디블 가족>에서는 금융 쿠테타로 인한 통화의 위기로 인한 서민의 삶을 통해 정부와 사회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가장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날을 각자의 입장에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맨디블 가족에게 통화의 위기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꿈처럼 현실로 다가온다. 오랫동안 부를 축적해 왔고, 미국에서 가장 호화로운 노인 원호 생활시설에서 여생을 즐기던 더글러스부터, 플로렌스의 외동아들로 어른보다 더 경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관심이 많은 열세 살 윌링에 이르기까지 맨디블 가족들은 4대에 걸쳐 각자 다양한 모습과 방식으로 재정적 파탄을 경험하게 된다. 중요한 인프라나 금융을 포함해 모든 거래는 오프라인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법이 제정되어 종이 계좌 내역서와 수표책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민간 대중교통이 사라지고, 국가는 개인이 보유한 모든 금을 회수하겠다고 선언한다. 주식 시장이 붕괴되고, 자본가들의 연금이 날아가 버리고, 군인들이 집들을 다니며 숨겨둔 금을 찾아 개별 수색을 하기 시작한다. 담보대출 이자는 계속 치솟았고, 월급의 물가 수당이 올랐지만 실제 물가 상승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시작에 불과했다.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이 작품을 집필하기 위해 엄청난 연구 조사를 했고, 그 철저한 자료 조사와 치밀한 논리를 토대로 경제적 디스토피아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해내고 있다.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지만, 너무도 리얼하게 현재를 반영하고 있어 더 오싹하고, 공감되는 무서운 작품이기도 하다. 맨디블이라는 한 가족의 삶을 통해 패권전쟁으로 생존 위기에 직면한 서민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과연 돈이란 무엇인가, 그 돈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고 있다. 등장 인물들에겐 하나 같이 대사가 빽빽하게 주어져 있고, 마치 경제학 책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경제와 관련된 전문적인 이론들이 난무하는 작품이라, 읽기에 수월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라이오넬 슈라이버가 이 작품 속에서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그저 허구의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현재를 너무도 소름 끼치게 반영하고 있다. 라이오넬 슈라이버 만큼 현대 사회를 예리하게 읽어내고, 시대를 탁월하게 포착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 2018년 현재, 우리가 이 작품을 꼭 읽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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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0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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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2 2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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