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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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병원입니다. 병원에서 누군가 약물 쇼크를 일으켰어요. 그게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입니까? 여긴 병원인데요? 양 간호사, 말해봐요. 그렇습니까?"

양 간호사가 눈을 피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쇼크를 일으킨 환자의 담당 간호사였다.

사무장 말대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은 죽기 마련이다. 다른 곳도 아닌 병원에서. 특히 중환자실이나 일부 병동에서는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가끔은 사람들이 죽으러 병원에 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의사들이 실패할 때도 있었다.

조선소 밀집 지역인 이인시는 호황이던 조선 사업이 위기를 겪게 되자 모든 것들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업체들이 부도를 내고, 체불 임금이 늘어 이탈 인구수가 급증하고, 노동자들은 백수가 되어 거리를 배회하고, 도심에 빈집들이 늘어 갔다. 갑작스러운 도시의 쇠락은 종합 병원의 존폐 위기로 연결된다. 병원 측에서는 수익원을 찾기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 팀을 꾸리는데, 서울의 대학 병원에서 근무하다 이곳으로 오게 된 무주가 새 팀에 투입된다. 그리고 무주는 낯선 곳에서 업무를 시작할 때 막역한 우정과 배려를 베풀어 주었던 이석의 비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석은 병원에서 가장 평판이 좋은 직원이었고, 3년 전 사고로 병원에 누워 있는 아이의 병수발을 하느라 집도 팔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주는 이석의 비리를 고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가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된 것은 아내의 임신으로 곧 태어날 아이에게 당당한 아버지로 서고 싶다는 정의감과 도덕심 때문이었다.

이석은 아무런 조사 없이 갑작스럽게 해고 되었고, 약물 투여 실수로 인해 환자가 죽을 뻔했던 사건으로 병원에 내분이 일면서 이석은 자연스레 화제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상황은 점점 이상하게 돌아간다. 비리를 저지른 직원이 아니라, 그것을 밝힌 직원에게 화살이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무주가 이석과 친했음에도 그를 고발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석이 저지른 비리 내용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 무주가 이석의 작은 실수를 봐주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동료들은 무주를 멀리했고, 결국 무주는 전혀 다른 보직으로 밀려나 야간 근무를 하기에 이른다. 무주는 날마다 술을 마셨고, 무주의 아내는 유산을 하고, 결국 서울로 떠나게 된다. 헛된 공명심과 정의감에 사로잡혀 벌인 일로 인해 무주는 동료도 잃고, 아내와 아이 마저 잃어 버리고 만다.

 

"<마태복음> 8장에 이런 구절이 있어.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서 계속 곱씹었어. 예수는 인자하고 자비롭다면서 죽은 사람한테 왜 이러나, 사람이 죽었는데 이렇게 야박해도 되나.... 이해할 수 없었지. 한참 새기니까 조금 알 것도 같더라고."

"무슨 뜻인데요?"

"영혼이 죽은 자는 내게 필요 없다, 불신자는 불신자에게 가고 믿는 자들은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나를 따르는 건 믿는 자로 충분하다는 뜻이려나."

병원 내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비리를 폭로한 주인공이 오히려 내부 고발자가 되어 조직 안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정작 비리를 저지른 당사자는 얼마 뒤 병원의 요직으로 복귀하게 되는 아이러니는 현실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다. 병원의 비윤리적 경영이나, 병원에서 통상 일어나곤 하는 투약 과실, 의료 사고로 인한 분쟁들은 의료기관이 비양심적이고 무책임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은 지금도 뉴스에서 숱하게 보도 되고 있는 이대 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이나, 몇몇 유명인들의 의료 사고로 인한 분쟁들을 떠올리게 만들면서 씁쓸한 현실을 자각하게 해주고 있다. 극중 이석의 말처럼 과연 평범한 사람들이 조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타락밖에 없는 것일까. 정의를 지켜내고자 했던 무주 역시 이전 병원에서는 상사의 지시대로, 관행이라는 방패 아래 비리가 저질러지는 것을 보고도 묵인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이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었지만, 결과는 더 참담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윤리적 인간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것인가. 아니면 거대한 사회의 기만에 맞서 싸우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무주의 삶이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기에, 더욱 그가 냈던 용기가 인간적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것이 이 불안정한 세상에서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살다보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상황이 매번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때 우리는 과연 아무런 고민없이 윤리의 편에 설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은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첫 번째 소설선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편혜영 작가가 2년 만에 발표하는 그녀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핀 시리즈가 흥미로운 것은 매월 25일 발간할 예정이라 '월간 핀'이라는 점인데, 한국 출판 사상 최초로 도입되는 일종의샐러리북개념이라고 한다. 게다가 출간이 예정되어 있는 후속편들 또한 멋진 작가들이 기다리고 있어 기대 중이다. 윤성희, 이기호, 정이현, 김성중, 손보미 등등... 이름만으로도 새로운 작품을 설레이게 만들어 주는 작가들의 라인업이 앞으로 이어질 핀 시리즈에 기대를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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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나라 엄마 펭귄
이장훈 지음, 김예진 그림 / 51BOOKS(오일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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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지섭, 손예진 주연의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에서 여주인공수아가 아들지호를 위해 직접 만들어 준 동화책이다. 영화를 봤던 이들이라면 실물 책으로 만나는 순간 뭉클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늘 나라와 지상 세계 사이에 눈처럼 하얀 구름 나라가 있었다. 이 곳은 하늘 나라로 가는 사람들이 지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모두 잊힐 때까지 머무르는 곳이라고 한다. 그 곳 구름나라에서 엄마 펭귄이 지상 세계를 내려다 본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대체 엄마 펭귄이 우는 이유는 뭘까.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많은 비가 쏟아졌고, 엄마 펭귄은 그 틈을 타서 빗방울 열차에 올라타 지상 세계로 향한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그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무당벌레 의사 선생님도 만나고, 친절한 곰 아저씨도 만나지만, 여전히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때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 가보니, 슬프게 우는 아기 펭귄이 있었다. , 그리고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일본에서 소설로도 영화로도 엄청난 호응을 받았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13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국내에서 리메이크되었다. 1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남자가 비 오는 날 아들과 함께 찾은 숲 속에서, 죽은 아내와 만나게 된다. 그야말로 '비 오는 날 시작된 기적'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그렇게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와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는 남자의 이야기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엄마가 아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전하는 이야기로 펼쳐진다.

 

영화 원작의 이야기만 간단히 보더라도, 이 작품 속에서 동화 <구름 나라 엄마 펭귄>이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어떨지 짐작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 동화는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감독이 만든 것이기에 더 작품 속에서 빛을 발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도 한 아이의 엄마이기에, 이 짧은 동화를 읽으면서 뭉클하고, 따뜻하고, 먹먹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같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다. 엄마 펭귄과 아기 펭귄의 이야기를 통해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서 그리고 있는 이 동화는 아이들과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고, 영원한 사랑의 의미도 자연스레 깨닫게 해 주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읽기에는 너무 슬픈 동화라는 생각도 들지만, 귀여운 아기 펭귄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라 슬픔보다는 따뜻함에 초점을 맞춰 아이에게 들려주면 될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줘야 하는 일이 생기면 안 되겠지만, 이별이라는 것이 꼭 영화 속 그것처럼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 살면서 누구와도 겪을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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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마 저택 살인사건
아마노 세츠코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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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요? 뭔가 그런 가능성이 있는 겁니까?" 다이스케가 붉어진 얼굴로 츠유키를 보았다.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츠유키는 다시 현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명백한 자살 현장이었지만 뭔가가 마음에 걸린다. 이 막연한 찜찜한 기분은 뭘까?

오늘은 도지마 신노스케 회장의 65세 생일이다. 축하 파티를 위해 유럽의 고전적인 저택 구조를 모방한 대저택에 온 가족이 모인다. 장녀인 소노코와 맏사위 나오아키, 그리고 손자 히로키, 장남인 다이스케의 친구 타구마와 약혼녀인 카나에, 차녀인 키와코와 막내인 아카리, 그리고 아카리의 직장 동료이자 친구인 사에코이다. 거기에 가정부인 키요미와 신노스케 회장의 친구이기도 한 셰프 미야모토가 오늘 요리를 위해 저택에서 한창 준비중이었다. 음식 준비가 마무리 되고 저녁 시간이 되어 다들 신노스케 회장을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나타나지 않아 식구들이 찾으러 가지만, 그는 집 안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거실 테라스 아래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고, 경찰이 방을 수색하고 조사를 하지만 자살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유서도 없었고, 아무런 자살 동기도 짐작되지 않아 다들 의아했지만, 딱히 범죄라는 증거도 보이지 않아 사건은 그렇게 자살로 종결될 것처럼 보였다. 나이에 비해 지극히 건강했고, 병력도 없었으며, 독극물이 검출된 것도 아니고, 우울증이었다는 증거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형사 츠유키는 뭔가 마음에 걸린다. 츠유키는 역시나 그 자살 사건이 뭔가 의심스러웠던 팀원 시마와 타가미와 함께 이상한 점들을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인의 정체는 점점 더 모호해지기만 한다.그리고 사건 일주일 후 칠일재 제사를 위해 저택에 그날 밤 거실에 모였던 이들이 모두 모인 날, 그곳에서 또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온다. 어찌 보면 완벽한 밀실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도지마 가의 저택에서, 다들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족들과 지인들이 모여 있는데, 대체 범인은 어떻게 살인을 저지른 걸까.

 

 

"그렇지, 이틀밖에 없어. 아니, 이틀이나 있어.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제대로 써야 해. 알겠나?. 모두가 단순히 주변 정황에 현혹되고 있어. 아주 표면적인 모습에 말이야. 그래서 한여름에 눈이 내리는 모순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 이 모순에 집착하고 있는 건 우리뿐이야."

작가인 아마노 세츠코는 무려 60세에 작가 데뷔에 성공했는데, 데뷔작이었던 <얼음꽃> 은 당시 일본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 역시 후지TV에서 방영된 스페셜 드라마시선의 원작 소설이다. 일드의 여왕 나카마 유키에, 연기파 배우 야마모토 코지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방영 당시 일본에서 크게 화제를 모았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추리소설에서 전통적인 밀실 트릭의 기법에 초점을 맞추어 미스터리로 읽어도 흥미롭고, 섬세하고 세밀한 인물 묘사를 따라가며 그들의 관계와 드라마에 중점을 두고 읽어도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범인이 누구이냐, 밀실 트릭은 어떻게 벌어진 것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살해 '동기'이다. 주도 면밀하게 계획한 살인사건에서 범인이 증거들도 없애고, 확실한 알리바이도 세우더라도, 사실상 절대 없앨 수 없는 것 하나가 바로 동기이니 말이다. 무차별 살인 사건이 아닌 이상, 항상 범인에게는 동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작품처럼 범인이 특정 장소 안에 있었던 사람, 가족을 비롯해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인물들도 한정이 될 때는 바로 그 동기가 드라마를 만들어 내고, 극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반전을 완성시키며, 서스펜스를 불러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반전은 놀라움보다는 뭔가 서글프고 씁쓸한 감정이 들게 한다.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럴 만한 배경에도 어느 정도의 이해와 공감이 생기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작가인 아마노 세츠코가 빛을 발하는 지점이고, 그래서 유독 그녀의 작품이 자주 드라마로 만들어져 사랑 받는 이유일 것이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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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하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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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에서 열심히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욕심도 버리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고, 내 집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들을 얻기 위해 무조건 열심히 살고 싶지는 않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라니. 열심히 살지 못해 죄송합니다.도 아니고 말이다. 살면서 평생 노력해야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만 들어왔던 우리들이기에, 더욱 와 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제목부터 시선을 확 사로잡는 이 책은 일명 '야매 득도 에세이'이다. 저자는 말한다. 불혹이라 불리는 마흔 살을 두 달 앞둔 시점에, 내가 어디로 이렇게 열심히 가고 있는 건지 마음이 싱숭생숭했을 때, 소중히 품어왔던 사표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고 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사표를 낸 후였고, 아차 싶었지만 없던 일로 하기엔 자존심이 상했고, 게다가 흔쾌히 퇴사를 반기는 회사까지. 모두가 열심히 사는 세상에서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황당한 소리를 하는 그의 이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나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은 말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그러나 이제 어른이 되어 버린 우리들은 알고 있다. 노력이란 것이 항상 정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애초에 인생이란 공평하지 않은 것이니 말이다. 6년차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는 자신이 무명배우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대입 4수를 거쳐서 오랫동안 투잡을 해왔다. 열심히 회사를 다니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지만 그렇게 열심히 해도 전혀 사는 게 나아지지 않았고, 열심히 살았는데 겨우 이 정도라면 너무도 억울했다고. 차라리 열심히 살지 않았더라면 덜 억울했을 텐데, 계속 누군가에게 지는 느낌이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케세라세라.

"어떤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게 정상일까, 그대로 다 안 되는 게 정상일까?"

"원하는 대로 안 되는 거."

"빙고! 그러니까 네가 이 모양인 것도 지극히 정상이라는 얘기야."

"... 위로 맞지?"

이 작품이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위트 있는 일러스트들이다. 만화의 한 장면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 심각한 대사를 하거나, 노골적인 그림으로 당황스럽게 만들어 놓고서 촌철살인의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다. 글은 매우 진지한데,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는 일러스트들이 피식 웃게 만들고, 가끔은 깔깔거리게 만들면서 무거웠던 고민들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너무도 리얼하고, 가감 없는 일러스트에서 전달되는 그것은 현실을 꿰뚫는 날카로움과 답답한 사회에 한 방 훅 날리는 시원함이다. 갑작스레 아무런 대책 없이 사표를 내던진 비현실적인 상황에 있으면서도,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굉장히 현실적이라 누구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것들이기도 하다.

 

나도 가끔 생각한다.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한 듯 바쁘게 움직이며 살고 있지만, 내가 가는 길이 제대로 된 방향인지 말이다. 어떤 날은 종일 엉덩이 붙이고 앉아 쉬지도 못했구나 싶은 날도 있었고, 수험생도 아니면서 자는 시간이 아까워 억지로 졸린 눈을 비벼 가며 뭔가를 했던 날도 많았다.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치열하게 사는 걸까. 가끔은 아무 목적 없이 산책도 하고, 느긋하게 앉아 음악도 좀 늦고, 또 가끔은 정말 별 생각 없이 멍 때리는 시간도 필요한 게 아닐까.

 

열정과 노력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반대의 경우에는 뭔가 도태되는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것에 대한 부담이 어느 정도 덜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나도 굳이 열심히 아둥바둥 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어떤 기준 없이, 특별히 바라는 것 없이, 그러니까 기대 없이 인생을 사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이제는 견디는 삶이 아니라, 순간을 즐기는 삶도 한번 시작해보고 싶어 졌다.

,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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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에 갇힌 여자 스토리콜렉터 63
로버트 브린자 지음, 서지희 옮김 / 북로드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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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친년 취급받는 것쯤은 감수할 수 있어요. 제가 못 참겠는 건 말입니다, 이 여자애들한테 일어난 일이에요. 아무런 노력도 안 해보고, 오늘 밤에 발 뻗고 주무실 수 있겠어요? 우리가 처음 경찰이 됐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젠장, 수색에 드는 비용은 저한테 청구하세요. 인사 위원회에 회부해서 저를 해고하셔도 돼요, 지금 그딴 건 아무 상관 없어요."

주말 내내 내린 눈이 눈보라가 되어 흩날리는 한겨울, 런던의 차가운 호수 아래 얼음 속에서 젊은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절대적인 힘을 지닌 상류 노동 귀족의 딸로 사교계의 명사로 소개되던 아름다운 앤드리아였다. 마쉬 총경은 이 중대한 사건을 위해 경시청 소속 에리카 경감을 소환해 수사를 맡긴다. 스물 셋의 앤드리아는 오는 여름 약혼자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억만장자의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 왔던 그녀가 외딴 호수에서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에리카 경감은 기존 수사팀의 책임자였던 스팍스 경감의 적의와 사사건건 간섭하려 드는 앤드리아의 아버지 사이먼 경의 압박 사이에서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사실 에리카 경감은 과거 여섯 명의 소녀를 살해한 공으로 서른아홉밖에 안 된 나이에 경감으로 승진했던 스타 경찰로 주목받았다. 경찰이던 남편을 작전 수행 중에 잃고 나서 죄책감과 슬픔으로 한 동안 일을 쉬었고, 아직도 그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하지만 그녀는 뛰어난 직감과 올곧은 원칙으로 사건을 파헤치고, 주위의 어떤 방해나 제약에도 굴하지 않고 집요하게 범인을 쫓는다. 아직도 먼저 떠난 남편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범죄 피해자들의 애달픈 삶에 마음이 흔들리는 감상적인 면도 가지고 있지만, 사건 해결을 위해서는 윗선과의 충돌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강한 면모도 보여 주고 있다.

 

모스는 거의 매일 목숨을 걸고 칼과 총, 복수심과 원한으로 무장한 미치광이들을 상대했다. 반면 제이콥이 아는 세상은 두 엄마와 장난감, 머리 위에서 느릿느릿 돌아가는 모빌과 점점 사그라드는 편안한 노랫소리가 다일 터였다. 에리카는 처음으로 자기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는 일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나쁜 놈 하나를 잡는 동안 열 놈이 더 생기는 현실에 살고 있었으니까.

에리카는 사건을 조사하다 미결로 묻혔던 매춘부 세 명의 죽음과 앤드리아의 죽음이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를 목격한 증인이라고 생각했던 여인마저 시체로 발견되고, 조사를 위해 방문한 술집에선 주인이 공식 항의서를 제출하고, 윗선에선 그녀의 과거 이력을 들먹이며 정신감정을 의뢰하겠다고, 면직 조치를 내리고 만다. 그리고 그날 밤, 범인으로부터 메시지를 받게 되는데, 과연 에리카 경감은 범인의 경고와 경찰관 정직이라는 최후의 통첩으로부터 어떻게 사건을 해결할 것인가.

시리즈로 이어지는 스릴러 작품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캐릭터일 것이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해 페이지 바깥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올 것 같은 현실성을 부여해야만, 독자는 이야기에 빠져 들 수 있다. 왜냐하면 피가 난무하고, 잔인한 사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는 현장이야말로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비현실성'의 표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완벽하진 않더라도 어딘가 사람냄새 물씬 나는, 그래서 정말 살아 숨쉬는 인물처럼 느껴지는 캐릭터가 등장해야 우리는 이야기에 비로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로버트 브린자의 범죄 소설 데뷔작인 이 작품은 그야말로 시리즈로 갈 수밖에 없는, 성공적인 캐릭터를 탄생시킨 것 같다. 스릴러에서 흔치 않은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 덕분에 피해자에게 공감하고, 사회 기득권층에 분노하고 맞서는 그녀의 모습에서 깊은 공감과 짜릿한 통쾌함마저 느끼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에리카 경감 시리즈는 <밤의 스토커>, <어두운 바다>, <마지막 호흡>, 그리고 최근 출간된 <콜드 블러드>로 이어지고 있다. 어서 빨리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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