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야 하는 밤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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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이아나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독일 국민 8,000만 명이 8N8 사냥감의 적이다. 어린이, 노인, 환자, 교도소 수감자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수천만 명이 대대손손 편하게 먹고 살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8N8 사냥감을 죽이려 들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이 이런 황당한 얘기를 진지하게 믿는다면 그렇겠지.

시청자 절반이 팩션 드라마를 다큐멘터리로 여기는 나라라면 안 될 것도 없다.

누군가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을 바꿔 놓을 아주 중요한 질문이라고.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세요?

 

당신이라면 누가 떠오르는가. 그리고 만약 정말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실행해 옮길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출발한다.

한 때 잘나가는 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며 자작곡을 연주했었던 벤은 현재 커버 밴드에도 못 끼는 곳에서 해고 당한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해고였고, 술이나 마시려고 가려던 차에 어디선가 젊은 여자의 비명이 들린다. 남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해가며 구해줬더니 소녀는 아저씨 때문에 다 망쳤다며 돈이 날아갔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찾아간 딸의 병원에서 전부인인 제니퍼는 딸이 자살을 시도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실 벤의 딸 율레는 4년 전 자신이 운전하던 차로 교통 사고가 나 두 다리를 잃었고, 일주일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현재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미심쩍은 상황들 때문에 딸이 살인미수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굳어 지려는데, 갑자기 건너편 호텔 옥상의 대형 스크린에 벤의 사진이 뜬다. 아까 자신이 구해줬던 여자의 이마에서 본 것처럼 얼굴에 8자가 그려진 채로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정부에서 살인 복권을 발행한다. 단돈 10유로만 내면 누구나 죽이고 싶은 한 사람을 추천할 수 있고, 88일 저녁 88분에 추천된 모든 후보자들 중에서 한 명을 뽑는다. 제비 뽑기로 선정된 8N8 사냥감은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약 12시간 동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더라도 절대 처벌받지 않는다. 대통령이 살인을 포함한 모든 위법행위를 용서하겠다고 공표하고, 사냥감을 포획하여 죽이는 데 성공한 사냥꾼은 상금 1,000유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독일 국민 전체, 수천만 명이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사냥감을 죽이려 들 수 있다는 얘기다. 벤은 생각한다. 이런 쓰레기 같은 상황이 진짜일 리 없어. 장난일 거야. 하지만 올해의 살인 복권이 추첨되고, 그 대상자로 베를린에 사는 심리학과 여대생과 벤이 지목된 것이다. 과연 벤은 온 세상이 참여하고 있는 살인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까. 모두가 그를 죽이려고 들텐데, 그는 누구를 믿고 믿지 말아야 할까.

 

“벤, 만나서 반가워요. 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당신의 삶을 바꿔놓을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준비되셨나요?”

벤은 끄덕였다. 그런 다음 다이아나의 요구를 알아차리고 얼른를 터치했다.

“고마워요, . , 그럼 물을게요.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세요?”

벤은 스마트폰을 내리고 주위를 살폈다.

만약 오늘, 지금, 현재, 하룻밤 동안 범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추방자 한 명을 추천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를 추천할까? 당신이라면 이런 살인 복권에 누군가를 추천하겠는가? 혹은 당신이 사냥감으로 선출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믿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의 상금을 마다하고 당신을 숨겨줄 그런 사람이 있을까.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재미는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음'에 있다. 그 동안 만나왔던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두툼한 페이지를 숨쉴 틈 없이 달려가 범인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도 해결과 해소의 안도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그 어떤 예정된 것에 대한 불안감, 그러나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한 기대감까지 차오르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은 오직 피체크의 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의 전매특허나 다름 없다. 이번 작품 역시 초반부터 온 세상이 지목한 살인 게임의 사냥꾼이 된 남자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는 과정은 심장이 쫄깃해지도록 긴장감을 부여하고, 숨 막히는 도심 속 추격전은 흡사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제바스티안 피체크는 영화 <더 퍼지>를 보고 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는 미국 정부가 하루 동안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를 허락하는 미래 세계가 등장하는데, '미래에 모두가 모두의 적이 된다'는 비현실적인 아이디어에 매력을 느꼈다고. 거기서 그는 '현재 모두가 한 사람의 적이 된다'는 현실적 아이디어로 이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누가 당신을 해치고 모욕하고 화나게 했나요?

혹시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마녀사냥이 먼 이야기가 아닌 요즘, 살인 복권이라는 작품 속 설정이 허구의 그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은 과연 누구의 이름을 적을 것인가. 혹시 누가 내 이름을 적지는 않을까. '내가 죽어야 하는 밤'이라니, 상상만해도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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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실레스트 잉 지음, 이미영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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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해 부인은 모든 것을 잘해냈고 좋은 삶, 자신이 원하는 삶,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을 꾸렸다. 지금 여기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자, 사과 한마디 없이 자기만의 규칙을 만드는 듯한 미아가 있었다. 거미 무용수의 사진처럼 리처드슨 부인은 이런 삶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클리블랜드의 고요하고 우아한 지역사회 셰이커하이츠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규칙이 많은 곳이었다. 도로 구획부터 주택 외벽 색깔 등 셰이커하이츠의 모든 것은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 지역 신문 기자가 된 리처드슨 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변호사 리처드슨은 네 자녀들과 함께 풍요롭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슨 부인은 부모가 물려준 작은 집을 세놓고, 그곳에 미혼모인 미아와 그녀의 딸 펄이 이사를 오게 된다. 예술가인 미아는 그들 모녀가 겨우 먹고 살 정도만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제 일자리를 얻어 일을 했고, 그 외의 시간은 매일 자신의 예술 작업을 하면서 보냈다. 그들 모녀는 미아의 프로젝트에 따라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이동해왔고, 이번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정착하기로 한다.

리처드슨 가족의 네 자녀들은 고3인 렉시, 2인 트립, 1인 무디, 그리고 열넷인 막내 이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디는 금방 펄과 친구가 되고, 매일 같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 펄은 무디와 함께 그의 집에서 리처드슨 가족들과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면서 태생과 배경이 전혀 다른 두 가정의 아이들은 서로의 삶에 이끌리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펄은 리처드슨가의 아이들이 꾸미지 않은 편안함과 자신감, 리처드슨 부부의 고상함을 동경했고, 반대로 무디는 미아 모녀의 예술적인 떠돌이 생활 방식을 낭만적으로 느낀다. 렉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동생 이지보다 펄과 더 자매처럼 지내게 되고, 펄은 잘생기고 매력적인 트립과 사랑에 빠진다.

 

 

 

"그게 신경쓰이는 거군요, 그렇죠? 당신은 상상할 수 없는 것 같네요. 왜 누군가는 당신과 다른 삶을 선택하는지. 왜 누군가는 넓은 잔디밭이 딸린 큰 집과 멋진 차와 사무직 말고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지, 왜 누군가는 당신이 선택한 것과 다른 것을 선택하는지."

이제 미아가 리처드슨 부인을 살필 차례였다. 부인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얼굴에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듯이.

"당신은 두려운 거예요. 무언가를 놓쳤을 까봐. 자기가 원하는 줄도 몰랐던 무언가를 포기했을 까봐."

평생 질서 있고 엄격한 삶을 살았던 리처드슨 부인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자, 사과 한마디 없이 자기만의 규칙을 만드는 듯한 미아가 묘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리처드슨 부인의 오랜 친구인 린다가 버려진 아기를 입양하게 되면서 그들의 미묘한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친모가 나타나 양육권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미아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리처드슨 부인이 분노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기자라는 것을 이용해 미아의 뒷조사를 하게 되는데, 상상치도 못했던 숨겨진 과거의 비밀들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대단히 영리하고, 굉장히 놀라운 작품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예리한 문장, 탄탄하게 짜임새 있는 구조, 페이지를 바삐 넘기게 만드는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삶에 대한 질문들. 이 정도로 묵직한 울림을 남겨주는 작품들은 대부분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내는 과정이 지난하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너무도 술술 읽힌다. 마치 티비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 전개되는데, 인물 한 명 한 명의 사연들이 모두 공감되고, 이해되는, 그래서 나의 이야기이기도, 혹은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영리한 소설이다. 이 작품에는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모녀 관계가 등장한다. 리처드슨 부인과 막내 이지의 관계, 그리고 미아와 펄의 관계. 자세한 이들의 사정은 언급하지 않겠지만, 절대 평범하다고는 볼 수 없는 관계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각이 처해 있는 독특한 상황을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이해의 눈으로 보고 싶게 만드는 힘 또한 작가의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인물들의 대사, 사소한 행동,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 그들이 품고 있던 생각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서 뒤에 이어질 사건의 단서가 되고, 복선이 된다. 누구나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불씨처럼 지니고 있는 삶에 대한 의문과 억눌렀던 욕망들이 있게 마련이니까. 이 작품은 바로 그 불씨를 피어 오르게 만드는 발화점과도 같다. 때로는 이렇게 모든 걸 완전히 태워버리고 나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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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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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서른 한 살 때 자신의 첫 작품이었던 <유럽의 교육>에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폴란드를 배경으로 숲 속에 숨어 살며 독일 점령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 속에서 부모를 잃은 열네 살 소년 야네크는 추위와 배고픔, 희망이 사라진 전쟁의 한 가운데서 쇼팽의 폴로네즈를 듣고 감동한다. 독일 군인들에게 정보를 캐내기 위해 몸을 파는 열 여섯 살 소녀 조시아가 원하는 건 오직 사랑하고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뿐이었는데, 그 소박한 바램조차 어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로맹 가리는 극중 인물 중에서 가장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인물인 도브란스키를 통해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후 예순 한 살 때 그는 에밀 아자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한다. 이 작품의 화자는 열네 살 소년 모모이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와 그녀가 맡아 기르는 여러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로자 아줌마는 성매매를 하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맡기거나, 부모가 버린 아이들을 맡아 키우고 있었다. 모모 역시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로자 아줌마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강제로 수용되었던 끔찍한 기억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고, 늙고 뚱뚱해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의 칠층을 오르내리는 것을 힘들어 한다.

 

모모는 엄마가 자신을 보러 오게 하기 위해 복통과 발작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도둑질을 하고, 위험한 무단 횡단을 하며, 마약 하는 친구들을 사귀는 등 문제 행동만 골라서 한다. 하지만 모모는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로자 아줌마가 병을 앓고 죽어갈 때 곁에서 그녀를 보살핀다.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상처받고, 가진 것도 없는 두 사람이 좁고 냄새 나는 아파트에서 서로 손을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은 뭉클하고, 아름다웠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박하차를 가져다 주는 드리스 씨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한 번만 읽어도 충분한 소설은 읽고 나서 가급적 책꽂이 멀리, 한 구석에 놔둔다. 한번 더 읽고 싶은 소설은 서재에서 내 손이 가장 잘 닿는 위치 혹은 잘 보이는 곳에 놓아 둔다. 그래서 언제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으면서 단어와 문장과 행간과 이야기 속을 들여다보곤 한다. <자기 앞의 생>은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뒤로 십여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몇몇 문장들과 몇몇 장면들을 나는 바로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된 버전은 무려 일러스트 버전이다. 사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세계 문학들에는 대부분 삽화가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글자가 빽빽하고, 페이지가 두꺼운 책을 선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자에서는 미처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이미지만이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열네 살 소년 모모와 그 눈에 비친 세상이 세피아톤의 일러스트 약 80컷으로 보여지고 있는 이 작품은 원래의 이야기와 일러스트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느껴진다.

극 초반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을 겪고 난 뒤 모모는 생각한다. 사랑해야 한다고.

열네 살 소년 모모가 깨우치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생의 비밀을 이렇게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만날 수 있다니 너무 감동적이었다. 아름답고, 뭉클하고, 눈부신 작품이었다. 아직까지 이 작품을 만나보지 않은 분들은 꼭 일러스트 버전으로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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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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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당신만은 행복해져야 해요. 그와 반드시 헤어지세요. 햇빛 아래서 활짝 피는 꽃이 되세요.”

-'당신만은 행복해져야 해요. 그와 반드시 헤어지세요'중에서

얼마 전에 어떤 프로그램을 보다가 분통이 터졌던 적이 있다. 한 여자가 남자친구에게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이냐고 묻는데, 상대방 남자는 우리가 사귀는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당황한 여자는 함께 잠을 자고, 데이트를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사귀는 게 아니고 뭐냐고 되묻는다. 남자는 네가 좋아서 함께한 것은 맞지만, 자신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고, 너랑 사귀거나 결혼할 생각은 없다는 거였다. 여자는 울며 매달린다. 그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자신을 만나 달라고. 그러자 남자는 말한다. 지금 여자 친구와 헤어지기는 어려운 상황이고, 너만 괜찮다면 지금 이대로도 나는 좋다. 다만 네가 힘들어질 테니 결정은 네가 하라는 거다. 여자는 고민한다. 내가 과연 이 남자를 계속 만나도 괜찮은 걸까.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저런 남자라면 그 동안 함께한 시간마저 아까우니 당장 헤어지라고 여자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사랑은 그 다음이라고. 그리고 이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나는 오래 전부터 내 연애 문제를 누군가에게 상담하기 보다는, 남의 연애 문제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 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의 다양한 연애 상황들에 대해서 듣고, 같이 분노하고, 같이 안타까워했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사랑을 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라 누가 잘하고 있고, 누가 잘못하고 있다고 객관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 공통점은 누구든, 혹은 어떤 방식의 사랑이었든 간에 그것이 끝나고 났을 때 쉽게 훌훌 털어버리거나, 자책하지 않거나, 과거의 연인에게 집착하지 않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였다. 사랑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돌보기 시작하는 당신에게, 사랑이 끝나고 당신은 더 좋아질 거라고 말해주는 이 책은 따뜻한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스킬은 사랑하는 법도 사랑 받는 법도 아닌 이별하는 법입니다. 이별을 통해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우고 더 나은 사랑을 위해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더 잘 이별하기 더 잘 사랑하기'중에서

이 책의 저자인 디제이 아오이는 일본에서 35만 명의 SNS 구독자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은 상담자로 이미 유명하다. 저자는 말한다. 깨진 사랑 앞에 덩그러니 남은 자신이 싫어지지 않도록, 이별이 할퀴고 간 상처의 통증을 견딘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그런 마음을 담아 이 책을 썼다고. 이별을 당한 사람에게, 혹은 사랑의 유효기간이 다 됐을 때 노력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애초에 상냥한 이별 따윈 없으니 깔끔하게 헤어지는 연인인 척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충고를 하기도 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 친구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여자에게 사랑 운운할 때가 아니라고, 한시라도 빨리 물리적인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만나선 안 되는 나쁜 남자들의 속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이별을 겪었을 경우, 충분히 사랑했으니 마음껏 이별하고, 그걸로 인한 상처를 받았다면 아픔을 딛고 성장해야 한다고 말해준다.

가끔은 '애인이 없는 사람보다 애인밖에 없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고' '쓸데없는 연애 따위 할 필요 없다고' 따끔하게 조언하기도 하고, 상대의 행동이나 말 때문에 상처 받은 이들에게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으니 반드시 그와 헤어져 행복해져야 한다'고 토닥여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상대를 너무 사랑하느라 나 자신을 돌보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주체적으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너무도 와 닿았다. 그리고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니고,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찾아올 테니 미련을 떨쳐 버리고, 나답게 살 수 있도록 위로해주는 말들이 참 따뜻했다.

 

사랑이란 누구에게나 어렵게 마련이고, 이별로 인한 슬픔 역시 매번 겪을 때마다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신, 사랑이 끝나고 나서 더 멋진 내가 될 수 있도록, 떠나는 사람보다 앞으로 만날 사랑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보자. 미련 따윈 집어 던져 버리고, 징징댈 바엔 엉엉 울어버리고 툭툭 털어내 버리자. 아프다고? 정말 다행이다. 안심하고 마음껏 울어 보자. 세상에 흘려서는 안 되는 눈물 따위 존재하지 않으니까. 오늘 내리는 비는 내일 피는 꽃을 위한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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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리커버 에디션)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시공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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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여자들의 마음을 얻을 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는 대담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아주 조그만 소리로 덧붙였다.

"그럼 세상을 팔아 치울 수도 있다니까요!"

스무 살 드니즈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두 남동생을 데리고 큰아버지를 찾아 파리로 상경한다. 여자 관계로 항상 사고만 치는 열여섯 장과 이제 겨우 다섯 살인 어린 동생 페페는 드니즈를 부모처럼 의지하는 철없는 동생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사정을 딱히 여긴 큰아버지가 파리에 오면 방을 내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은 이미 1년 전의 일이었고, 그들은 지금 큰아버지에게 미리 연락도 하지 않고 찾아온 참이었다. 직물 전문점을 하고 있는 큰아버지는 가게 맞은편에 커다란 백화점이 생긴 이후 장사가 어려워 그들을 거두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마침 백화점의 여성 기성복 매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지만 만만치가 않다. 촌스럽고 어리숙해 보이는 드니즈를 매장 직원들은 대놓고 무시했고, 은근한 박해로 인해 제대로 실적을 올릴 수도 없었다. 매장에서 종일 쌓이는 피로는 엄청났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언제라도 해고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다. 동생 장은 틈만 나면 찾아와 돈을 달라고 온갖 사연들을 만들어 앓는 소리를 해댔고, 거기에 페페의 보육료를 내고 나면 그녀는 암흑 같은 빈곤함 갈아입을 옷도, 신발도 없이 버텨야만 했다.

한편 이 거대한 백화점의 젊은 사장 무레는 관리 시스템의 운용에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완벽하고 안정적으로 충족시키고자 다른 이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부추기는 방향으로 백화점을 운영해나가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엄청난 세일을 기획하고, 백화점의 확장을 위해 주변 소상인들을 돈으로 포섭하는 것을 서슴지 않으면서 주변 상인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갔다. 그는 다정하고 상냥한 태도로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 다니며 애정을 남발했지만,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여자라는 존재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랬던 무레가 조금씩 드니즈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 그는 한 여자가 파리라는 도시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타락해가는지를 보고자 하는 짓궂은 호기심에서 관심을 가졌으나, 점차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변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과 두려움에 연민이 뒤섞인 것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모든 것을 가진 백화점 사장이 가난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일종의 '신데렐라 스토리'로 볼 수는 없다.

이 작품 속에서 '백화점'이라는 장소는 이야기의 배경이 아니라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주체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백화점 '봉 마르셰;를 모델로, 19세기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인 만큼, 그에 걸 맞는 스케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거대 자본과 소상인의 갈등과 그 속에서 그 메커니즘을 실제로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들의 노동 문제와 백화점이라는 것의 존속을 하게 해주는 여성들의 쇼핑 중독으로 인한 가정의 붕괴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19세기에 쓰인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읽어도 여전히 현대사회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엄청난 작품이기도 하다.

 

그녀의 눈길이 주느비에브에게서 콜롱방으로, 그리고 다시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으로 차례로 옮겨갔다. 그랬다, 저 백화점은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아비에게서는 재산을, 어미에게서는 자식을, 그리고 딸한테서는 10년 전부터 기다렸던 남편감을 앗아 갔던 것이다. 드니즈는 이 저주받은 가족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면서 잠시 자신이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보았다. 이 가엾은 가족을 짓누르는 거대한 기계에 자신이 힘을 보태려는 것은 아닐까?

대학 신입생 때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백화점의 명품관이라는 곳을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나에게는 처음 그곳을 둘러 보았을 때의 이미지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잡지 카탈로그에서나 봤던 수백, 혹은 수 천 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옷과 악세사리들이며, 그것들로 몸을 치장하고 우아한 몸짓과 말투로 손님들을 맞이하는 샵마스터의 모습까지 당시의 나에게는 신세계였던 것이다. 물론 지금이야 그들이 매일같이 부유한 고객들을 상대하다 보니 나와 별 차이 없는 판매원이었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부르주아들의 몸짓과 말투가 몸에 배어서 혹은 그저 그런 여인네들을 흉내 내는 그들의 허세라는 걸 알고 있지만 사회 경험이 전무했던 당시의 내가 그런 사실을 깨달았을 리가 만무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백화점의 특정 세일 기간이 되면 그곳이 치열한 전쟁터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했고, 백화점 오픈 시간에 맞춰 입구에서 줄 서서 기다리다 문이 열리자 마자 우르르 몰려서 들어오는 손님들의 행렬을 신기하게 구경하곤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130여 년 전의 파리에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현대적백화점이 존재했다는 점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 인간 군상의 모습들이 지금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점이 굉장히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던 것 같다. 소비의 신전이라 불리는 백화점이 보여주는 다양한 마케팅 기법들도 재미있었고, 상세하게 묘사된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백화점 안팎의 모습, 매장들의 분위기와 판매원들 간의 관계, 다양한 쇼핑객들의 모습, 그리고 고객과 판매원과의 관계 등은 마치 19세기 파리로 시간 여행을 떠난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 더욱 이야기 속에 빠져들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번에 출간된 리커버 에디션은 합본에인데다 너무도 우아한 표지로 갈아 입고 나와서 정말 보고 싶었던 작품이기도 한데, 이야기 자체도 너무 너무 재미있게 읽히지만 책도 소장용으로 정말 우아하고 아름답다. 기존의 두 권에서 합본으로, 무선 제본에서 고급 양장본으로 탈바꿈한 것도 마음에 들지만, 표지 이미지와 색감부터 너무도 고급스럽고 작품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드러내어 훌륭하다. 그리고 리커버 에디션 출간 기념으로 받을 수 있는 사은품 양장 노트도 같은 울트라바이올렛 톤으로 만들어져 책과 잘 어울린다. 그야말로 여자들의 마음을 얻을 줄 아는 에디션이라고나 할까. 실물을 보면 마음을 뺏길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책이다. 게다가 고전문학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도 술술 읽히고, 흥미진진해서 전혀 고전스럽지 않다는 점 또한 이 작품의 굉장한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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