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방랑
후지와라 신야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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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해 서쪽에서는 발효되고 썩어가는 것들이 눈가림되고 포장되어 건전하고 행복한 시민들 앞에서 말살된다. 썩은 오렌지 껍질, 돼지 머리, 송장, 광인, 전염병 환자, 만취한 사람, 그 모든 것들은 시민 생활의 큰길에서 격리된다.

여자가 짐승처럼 킁킁대며 몸을 뒤척였다. 영문 모를 냄새의 씨앗들이 꿈틀거린다.

그때 문득 머나먼 이국의 하늘과 한 줄기 피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스탄불의 겨울, 바다 냄새에 섞여 코를 찌르는 썩은 냄새가 풍겨오고, 파리한 불빛 속에서 길바닥에 널브러진 양파 껍질이 바닷바람에 떨고 있다. 쿠르드족 쿨리의 성난 목소리, 비웃는 통행인들, 길바닥에는 밑동까지 타 들어간 담배꽁초들이 나뒹굴고 있다. 영하 16도의 찬바람 속에서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50미터씩 줄을 서는 사람들. 나는 터키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오로지 묘사만으로 그곳의 냄새가 느껴지고, 풍경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현지의 삶과 그곳 인간들의 모습을 이렇게나 생생하게 담아낸 여행에세이는 만나본 적이 없다. 그 동안 읽어왔던 여행 에세이들은 모두 뭐였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글과 사진들이 시작부터 눈길을 사로 잡는다.

 

작가이자 사진가, 사상가, 평론가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해온 후지와라 신야는 1969년 여름 스물다섯 살 때에 떠난 인도 여행을 시작으로 10여 년간 인도, 티베트, 중근동, 유럽과 미국 등을 방랑했다. 이 책 <동양방랑> <인도방랑>, <티베트방랑>에 이은 동양 여행기’ 3부작의 결정판이다.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지중해 앙카라, 흑해, 시리아, 이란, , 티베트, 치앙마이, 홍콩, 한반도 등에 이르기까지 그가 400일 동안 느끼고, 체험하고, 생각한 모든 풍경들이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이 지역에서 우기의 비는 일본의 장맛비처럼 지루하게 내리지 않고 잠깐 퍼붓고 지나간다. 억수같이 쏟아지다가 이내 쨍하게 햇빛이 비친다. 그러면 지하수와 물웅덩이가 세균이 번식하기 딱 좋은 온도로 데워진다. 그 더러운 물을 보고 있으면 세균과 박테리아, 그 밖의 하등생물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몇 시간만 지나면 물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비릿하고 음울하고 불쾌한 냄새다. 그 냄새가 비 온 뒤의 거리에 충만하다.

무엇보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바로 여행을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가 묘사하는 풍경은 냄새부터 시작해서 길거리에 놓여진 사소한 것들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현지의 사람들, 그가 만나고, 경험하고, 이야기를 들어온 사람들이야말로 현지의 일상을 고스란히 페이지 위로 불러내고 있다.  특히 낯선 곳의 냄새, 후각에 대한 묘사가 그야말로 인상적이었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관찰하거나 이해하고 묘사하고자 할 때 후각을 먼저 사용하는데,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지만 덕분에 낯선 세계가 한번에 와락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렇게 싸구려 호텔 방의 사막 냄새, 콜카타 특유의 정액 냄새, 산양의 날고기 냄새, 코를 찌르는 향신료 냄새, 향냄새와 시큼한 지폐 냄새, 여자 냄새, 거리와 사람을 뒤덮은 인간 세상의 온갖 냄새들의 향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후지와라 신야는 날카로운 언어와 사유를 통해 인간성을 발견하고, 현지의 기후나 지형 같은 환경적 영향을 통해 문명의 특징을 통찰한다. 그의 사진 속에 종종 인물들이 담겨 있곤 하는데, 그들의 표정 너머에서 단순한 일상의 흔적 너머 역사성과 사회성 또한 함께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사람이 살면서 몇 번의 고비를 만나듯이 여행에도 빙점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던 그도, 어느 순간 눈이 흐려지고, 혀가 기뻐하지 않고, 귀가 들으려 하지 않고, 코가 냄새 맡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을 피해 풍경만 보고 다니며, 얼어붙은 채 무의미한 여행을 계속하다, 기사회생의 여행을 나선 것이 바로 이 책의 결과물이다. 그는 400일이라는 긴 여행의 시간 동안 인간을 만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변두리 유곽의 창녀에서 심산에 틀어박힌 스님까지,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을 인연으로 여기고 소중히 대했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얼어붙은 여행이 녹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이 바로 인간의 체온이라는 그의 말에 뭉클했다.

 

나도 여행을 워낙 좋아하고, 그에 대한 글을 읽는 걸 좋아해서 관련 에세이들을 꽤 읽어 본 편인데,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한 느낌이었다. 이런 여행에세이는 그 어디서도 만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마치 40년 전 동양의 그곳으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도 들었다. 특별한 여행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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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책상 서랍 속의 타자기와 회전목마에 관하여 - 세계를 담은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김운하 지음 / 필로소픽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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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세상의 모든 책들이 다 있답니다.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어떤 분야의 것이건, 어떤 장르에 속하건 모두 찾을 수 있지요. 또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아직 쓰이지 않은 책들, 화재로 타버리거나 세월이 갉아먹어 썩어버린 책들, 그리고 책 속에 나오는 허구의 책들까지도 모두 찾을 수 있지요."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읽다가 너무 지루해서 던져 버린 책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전개에 짜증 나서 분노했던 책들도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책에서도 배울 점은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책을 써야만 했던 작가의 욕망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평생 아무리 부지런히 책을 읽는다 해도, 읽고 싶은 책들을 전부 읽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신중하게 책을 고른다. 매일매일 책을 읽어도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고 죽을 수는 없다니 얼마나 슬픈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책을 고르고, 책과 만나고, 그 세계 속을 유영하는 중이다.

그래서 자칭 독서가, 혹은 애서가, 그리고 책중독자들을 비롯한 작가들이 쓴 독서, , 글쓰기와 관련된 책들은 거의 모두 다 읽어 본 편이다. 왜냐하면 평범한 일상 속의 인간관계에서는 나의 책에 대한 애정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문 편이니 말이다. 가끔은 나도 그 말도 안 되는 책에 대한 애정을 공감 받고 싶고, 이해 받고 싶고, 그리고 나보다 더한 애정을 표현하는 이들을 보며 그래도 나는 평범한 편이라고 위안받고 싶다. 이번에 만난 소설가 김운하의 이 작품은 저자의 표현대로 '책과 독서에 대한 애정고백서'이다. 독서의 재미를 발견하고는 자연스럽게 애서가가 되고, 책 중독자가 되었고, 심지어 희귀본 수집가로 나섰다가, 결국은 직접 글을 쓰는 작가가 된 저자의 이력은 그야말로 나 같은 독자들에게는 부러움을 가득 동반하게 한다. 책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직접 새로운 책을 창조할 수 있는 위치까지 이른다면,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결론이 아닐까.

 

 

보르헤스의 서재와 에코의 서재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이제는 마침내 확고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어느 날 불현듯 내가 책무덤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집이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라 책창고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내 삶조차 책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울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거대한 부자유, 구속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책으로 만들어진 기가 막히게 매혹적인 표지 이미지처럼, 이 책 속에는 마치 꿈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저자는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 다락방에 올라가 커다란 종이 박스들 사이를 헤집다가 순간적으로 기우뚱하고 어디론가로 추락한다. 정신이 든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천장이 아주 넓고, 벽면에 온통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서재에 있었다. 그리고 서가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말을 한다. 여기는 '당신이 늘 꿈꾸던 서재'라고. 당신이 원하고 찾기만 한다면 어떤 책이든 모두 찾을 수 있는 그런 곳이라고. 그러니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책이라도.'

누구나 한 번쯤 상상 속의 서재를 꿈꿔보지 않았을까. 나는 주로 소설 속 이야기에 등장하는 허구의 책들이 궁금한 적이 많았다. 예를 들어 이런 책들이다. 스티븐 킹의 <파인더스 키퍼스>에 등장하는 천재작가 로스스타인의 <러너, 전쟁에 나서다> 같은 책. 극중 로스스타인의 이 작품은 미국 문학사상 <앵무새 죽이기>, <호밀밭의 파수꾼>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묘사된다. 스티븐 킹이 이런 분위기의 작품을 실제로 써주시면 어떨까 작품을 읽는 내내 상상하는 것으로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조엘 디케르의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에 등장하는 두 소설가의 작품들도 궁금했다. 이야기 속에서는 미국을 대표하는 지성, 위대한 소설가로 극중 묘사되는 해리 쿼버트가 살해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소녀의 유해와 함께 그의 대표작의 타자원고가 발견된다. 그 원고를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의 제자이자 미국 문단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른 마커스 골드먼이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무려 이백만 부나 판 소설도 실제로 읽어보고 싶었고 말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인다. 김운하 작가는 상상 속의 저에서 어떤 서재 목록들을 써내려갔을까. 그리고 그 책들을 정말 만날 수 있었을까.

 

책중독자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책에 대한 애정 넘치는 에피소드들과, 지독한 애서가가 밝히는 '쾌락주의 독서법' 그리고 사랑하는 작가를 위해 기꺼이 스토커가 되고자 하는 독자들의 마음과 상상 속에서 마법의 타자기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들이 다 너무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독서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내지는 책이란 이런 것이다.는 식의 잘난 척이 없고,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책에 대한 지독한 애정을 표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독서와 책과 작가에 대해 사유하게 만드는 책이라 더욱 좋았던 것 같다. 나도 저자처럼 평생토록 오직 책만 읽다 죽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한번쯤 해 본 적이 있다면, 당장 이 책을 만나 보시길!

*'이 서평은 필로소픽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쓴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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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그림 엽서북 : 옐로우 에디션 - 마음 가는 대로 상상해 그려보는 손그림 엽서북
공혜진 지음 / 인디고(글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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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한 점 하나, 선 하나로

누구도 따라 그릴 수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그림을 완성할 수 있어요.

마음 가는 대로 즐겁게 그려보세요!

아이와 함께 색칠 공부를 하거나, 그리기 놀이를 하다 보면 가끔 아이의 상상력에 깜짝 놀라곤 한다. 쓱쓱 자기 마음대로 그려 놓고는 그것이 나무도 되고, 물고기도 되고, 음식도 되었기 때문이다.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는 나무는 이래야 하고, 물고기는 이렇게 생겨야 하고, 딱 정해진 틀대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아무렇게나 그린 선 하나, 점 하나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기는 아이였을 때밖에 없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손그림 엽서북>이라는 책을 만났다.

뭔가 그려보고 싶지만 타고난 곰손이라서, 그리다 망쳐버릴 것 같아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지 못한 이들을 위한 책이라는데 굉장히 독특했다.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꽃과 식물, 익숙한 물건들을 배경으로, 가벼운 선 긋기를 하는 것만으로 그림을 완성시킬 수 있다. 나뭇잎이 빨간머리 앤의 얼굴이 되기도 하고, 꽃잎이 이티가 되기도 하며, 소라가 음악을 듣는 귀로 재탄생하고, 와인 따개가 부엉이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책에는 완성 그림엽서 48장과 같은 배경의 그림 연습용 배경 48장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저자가 그린 그림을 그대로 따라 해봐도 되고, 내 마음대로 원하는 그림을 그려도 좋다. 판형도 작고 가벼운 책이라 그림 그리기 좋은펜 한 자루만 있다면, 어디든 가지고 다니면서 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어도

우리 각자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면

나만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몇 년 전부터 컬러링 북이 서점가에 열풍이었다.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 해봤음 직한 단순 색칠 놀이처럼 보이지만, 성인대상으로 나오다 보니 조금 더 복잡하고, 세밀한 도안들로 다양한 컬러링북이 출간되어 나도 해본 적이 있다. 채색을 하다 보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게 되어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컬러링 북의 특성 상 채색을 할 수 있는 색연필의 컬러가 다양할 수록 더 좋고, 그걸 굳이 가지고 다니기에는 좀 번거로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세밀한 그림일수록 생각보다 예쁘고, 완성도 있게 채색이 되지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이 책처럼 간단한 손그림을 그리는 거라면, 가지고 다니기도 편하고, 굳이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도 덜하고, 무엇보다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더욱 좋은 것 같다.

 

부드러운 연필, 세밀한 표현에 좋은 샤프, 선 굵은 그림을 그리기에 좋은 사인펜 등 다양한 펜으로 그림을 그려보면, 펜에 따라 그림 느낌도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내 손으로 완성한 그림들은 엽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떼어낼 수 있다. 내가 그린 그림 엽서라고 말하면서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뭘 그릴까 고민하면서 수록된 배경 이미지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미있어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회사에서, 가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길 없는 직장인과 주부들에게 적극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특히나 아이가 있다면 그림을 보여주면서 상황을 재미있게 설명해주고 나서 같이 할 수 있어서 더욱 특별한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통한 손그림 그리기를 통해서 우리가 잊고 살았던 동심과 순수함을 되찾는 듯한 기분도 들었고, 스트레스 해소뿐만 아니라 일종의 '명상' 효과도 있어 현실을 잠깐 떠나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취미가 될 것 같다. 마음을 담은 엽서로, 허전한 벽을 채울 멋진 그림으로.. 내 손으로 그린 개성 넘치는 그림이 작품이 될 수 있도록 부지런히 그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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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래빗 전집 (양장 스페셜 에디션)
베아트릭스 포터 지음,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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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썸과 헝카멍카는 위층으로 올라가 식당을 들여다 보았어요. 그리고는 기뻐서 찍찍 탄성을 질렀지요! 식탁에는 아주 아주 먹음직스러운 근사한 식사가 차려져 있지 않겠어요! 철로 된 숟가락, 납으로 된 나이프와 포크, 그리고 인형 의자 2 -- 얼마나 근사한지!

-'못된 생쥐 두 마리 이야기' 중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토끼 캐릭터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토끼는 피터 래빗일 것이다. 베아트릭스 포터에 의해 그림동화 속 캐릭터로 탄생한 티퍼 래빗 이야기는 1902년 초판 출간 후 전 세계적으로 무려 2억부 이상이나 판매가 되었다. 피터 래빗과 숲 속 친구들이 엮어가는 소박하고도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은 전체 23편의 시리즈로 되어 있고, 이번에 만나게 된 전집에서는 본편에 더해 미출간작 4편까지 모두 수록되어 있다.

 

맥그레거 씨네 정원에 숨어들었다가 생각지 못한 모험을 하게 된 개구쟁이 아기 토끼 피터 래빗 이야기. 오래 전부터 읽어 왔고,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였는데, 오랜 만에 다시 읽어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무엇보다 수채화톤의 그림들이 너무 예뻐서,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랑 함께 읽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첫 번째 피터 래빗 이야기는 서두부터 무시무시하다. 엄마 토끼가 아기 토끼 네 마리에게 말한다. 들판이나 오솔길에서는 놀아도 되지만 맥그레거 아저씨네 정원에는 가면 안 된다고.

 

"아빠가 거기 갔다가 사고를 당했거든. 맥그레거 아저씨가 아빠를 파이로 만들어 버렸지 뭐니."

 

이 대사 옆에 그려져 있는 삽화는 바로 파이 요리가 담긴 그릇을 들고 있는 맥그레거 씨네 가족들의 모습. 어린 시절 피터 래빗 동화책을 읽을 때는 이런 장면에서도 그다지 무섭다고 느끼지 않았었는데, 많은 것을 경험하고 나서 어른이 되고 나니 이 짧은 대사 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 구나 싶었다. 분명 토끼를 비롯해 숲 속 동물들이 옷도 차려 입고, 말도 하며 의인화되어 있는 동화 속 세계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인간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망쳐야 하는 동물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후에 진행되는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도 동물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계속 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에, 포터의 동화가 착한 세계만 그리는 여타의 동화들과는 뚜렷한 차별점을 보이는 것이다.

 

상추를 너무 많이 먹으면 "졸음"이 온다고 하죠. 난 상추를 먹어도 졸린 적이 없어요. 하긴 난 토끼가 아니니까. 하지만 플롭시의 아기 토끼들은 상추를 먹으면 졸렸답니다!

-'플롭시의 아기 토끼들 이야기' 중에서

무엇보다 베아트릭스 포터의 그림책이 너무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모든 이야기들이 아름다운 전원을 배경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녀가 시골에서 자라 다양한 동식물들을 관찰해 왔기도 하고, 자연애호가이자 평생 환경 보호에 헌신한 환경 운동가이기도 한 점이 농장과 지역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사랑스러운 삽화들을 그리게 한 배경일 것이다. 피터 래빗이라는 캐릭터가 탄생한 것은 애초에 시작이 가정교사의 5살 배기 아들이 아팠을 때 위로해 주고자 썼던 그림 편지였는데, 단순하고 귀여운 동화이면서도 현실 세계를 반영하고 있어 어른을 위한 동화로도 손색이 없는 것 같다.

 

이번에 양장본으로 새로운 옷을 입은 <피터 래빗 전집> 스페셜 에디션은 적절히 큰 사이즈를 채택하여 그림들을 최대한 크고 예쁘게 담았다. 그리고 각각의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에 '이 이야기에 관하여'라고 해서 작품의 탄생 배경과 소개 글이 수록되어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덕분에 '벤저민 버니 이야기' '피터 래빗 이야기'와 내용이 이어지는 속편이고, 벤저민 버니는 실제로 포터가 집에서 길렀던 애완토끼의 이름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그외에도 이야기의 배경 그림을 포터가 언제 스케치해두었는지, 그녀가 특별한 애정을 가졌던 작품은 무엇인지, 처음 출간 당시의 제목과 달라진 작품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한 사소하면서도 재미있는 내용들이 가득 담겨 있어 본편 이야기만큼이나 재미있다. 그리고 정식 출간된 적이 없는 미출간 작품 네 편은 기존 그녀의 화풍과 굉장히 분위기가 달라서, 더 다양한 화법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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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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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평하게 흐르고 모든 걸 시들어가게 만든다.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늙어가긴 마찬가지이지만, 그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들은 '내가 정말 늙어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두려워하기도 하고, 늙어 가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에 자신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에 낯설어 하기도 한다. 나이를 먹을 수록 더 성숙해지고 깊이를 더해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더이상 젊은 시절처럼 일하기를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여기 이 두 늙은 여인처럼 말이다.

 

 

"그래, 사람들은 우리에게 죽음을 선고했어! 그들은 우리가 너무 늙어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여기지. 우리 역시 지난날 열심히 일했고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잊어 버렸어! 그래서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친구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 해보고 죽자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게 아니라 말이야."

알래스카 극지방 유목민들은 언제나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그 해 겨울에는 맹추위가 닥쳐 위협적인 한기만 휘몰아칠 뿐 생명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아무리 애를 써도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었고, 그 중 몇 명은 기아로 인해 죽어갔다. 그위친 부족 안에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돌봐온 늙은 여자 둘이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불평을 해댔고, 자신들이 늙고 약하다는 것을 과시했다. 족장은 곧 닥칠 혹독한 날들에 대해, 이 겨울 동안 살아남기 위해 고민했고, 결국 나이든 사람들을 두고 가기로 결정한다. 두 늙은 여자 중에 무리 안에 딸과 손자가 있었던 칙디야크는 자신의 딸이 족장의 결정에 항의하지 않음에 깊은 충격을 받는다. 이윽고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의 커다란 대열이 천천히 멀어져 간다.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두 늙은 여자를 남겨두고.

 

살을 에는 맹추위가 닥친 알래스카, 그 땅에서 늙은 여자 단둘이 남겨져 스스로 삶을 꾸려가야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여든 살, 일흔 다섯 살이었던 그들은 아직 죽을 때가 되었을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걸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한 것이다. 모욕감과 분노에 휩싸인 칙디야크에게 친구가 말한다. 여기 앉아서 기다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죽고 말테고, 사람들에게 우리의 무력함을 증명하게 될 거라고.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아니지 않냐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 해보고 죽자고 말이다.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어, 친구. 요컨대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어. 그저 이 땅이 과거에는 정말 살기 수월한 곳이었는데 이제는 날 원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마 관절이 너무 아파서 이런 불평을 하게 되는 것 같아."

칙디야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자인 벨마 월리스는 알래스카의 외딴 마을, 전통적인 아타바스칸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실제로 십여 년 동안 혼자 생활하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사냥과 덫 놓기 기술을 익히며 살았다. 책 속에서 북극권 사람들의 생존 기술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 건 바로 그녀가 자신의 부족에게서 배웠고, 그렇게 살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딸들에게 대대로 전해주던 알래스카 인디언의 전설적인 이야기, 바로 두 늙은 여인과 그들의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써냈다. 이 작품은 젊은 이들의 호의와 보살핌으로 남은 생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보내려던 두 늙은 여인이 얼어붙은 호수를 걷고, 수없이 눈 위에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혹한의 기온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젊은 시절 배운 사냥 기술을 활용하고, 토끼털로 담요도 만들고, 옷가지들도 만들고 힘겨운 겨울을 버텨낸다. 특히나 아타바스칸족 토박이인 짐 그랜트의 삽화들이 두 노인과 동물들, 그리고 알래스카의 풍경들을 보여주며 더욱 이야기에 온도를 더해주고 있다.

냉장고에 넣어둔 과일이나 채소가 색이 변질되고 형태가 망가지는 걸 누구나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달콤하고 상쾌하던 것이 갈색 덩어리로 변해서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무엇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간이 자연히 나이를 먹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원한 젊음이란 없으니까. 언젠가 나도 남겨질 누군가를 걱정해야 할 만큼, 이제는 어느 날 갑자기 어떻게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나이라는 걸 스스로 알게 되는 그 순간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 영혼, 육신이 견뎌낼 수 있는 한계는 시간이 갈수록 짧아지면서 느껴지는 노후된 육체. 나이가 든다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그렇게 지독하고도 슬픈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벨마 월리스는 노인이라서 당연히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다고, 삶에서 뭔가를 성취하는 데에는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노년의 성장소설'이라는 특별한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나는 멋지게 늙는 것이 오래 전부터 꿈이었다. 그래서 젊음을 추억하지만 그것을 그리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에게 늙음이란 무언가를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 되기를,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성숙해지고 단단해지고 깊이 있어 지기를, 그리하여 십 년 전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포기하지 않고, 생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기를 언제나 바래왔다. 이 작품 속 두 늙은 여인은 나에게 그 오래 전 나의 다짐을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이가 들어도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고, 뭔가 이루어낼 수 있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시도해볼 수만 있다면, 젊음을 부러워할 필요도, 늙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주 특별한 알래스카 인디언의 이야기는 그렇게 뭉클했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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