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정의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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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코는 내 친구 아니었어!? 도대체 어느 편인 거야!"

[말했잖아.]

노리코의 말투가 갑자기 무언가에 취한 듯 열정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마사히코 씨의 편도 유미코의 편도 아니야. 나는..... 정의의 편이야.]

정의의 편. 그 말이 이렇게 차갑게 느껴질 줄이야.

논픽션 작가로 활동하는 가즈키는 어느 날 연보라색 봉투로 된 우편물을 받는다. 봉투의 한쪽 면에 멋지게 꽃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어 청첩장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발신인의 이름을 본 순간 그녀는 얼어붙고 만다. 거기엔 5년 전 자신이 죽였던 친구 다가키 노리코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노리코로부터 초대장을 받은 것은 가즈키를 포함한 네 명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유미코, 미국인 남편과 사업을 하고 있는 리호, 그리고 중견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레이코. 과거 한 여자가 네 명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5년 뒤, 그녀들이 죽인 여자로부터 초대장이 도착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노리코는 왜 친구들에 의해 살해당한 걸까. 그리고 죽은 그녀가 보낸 초대장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야기는 가즈키, 유미코, 리호, 레이코 각각의 시점에서 고등학교 시절과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처음부터 범인이 공개된 상태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피해자가 아닌 다수의 가해자의 시점에서 펼쳐진다는 점이 독특했다. 게다가 다카키 노리코라는 인물은 정말 그 어디서도 만나볼 수 없었던 독특한 캐릭터였다. 정의라는 명목하에 단죄의 칼을 휘두르는 행동 자체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 과정에서 전혀 사람들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고, 궁지에 몰리는 사람들을 무표정하게 지켜보는 걸 보며 괴물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는 오직 선악으로만 세상을 판단하고 사람의 기분이란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 차가운 사이보그 같은 존재였다. 그저 머리끝부터 발톱 끝까지 정의로 똘똘 뭉쳐 백 퍼센트 올바른 일밖에 하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어긋난 행동을 하는 이들에게 벌을 주며 쾌감을 느끼는 존재. 책을 읽는 내내 무섭고 오싹했다.

전라의 정의.

정의의 누디스트.

노리코의 정의는 너무나 드러나 있고, 노골적이고, 보는 사람이 눈을 돌리고 싶게 만든다. 어디든 상관없이 상대를 가리지도 않고, 망측스럽게 '정의'를 드러내며 달려든다. 융통성과 배려라는 옷을 두르지 않은 알몸의 정의 앞에 주위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고 있을 수밖에 없다.

영화 어벤져스에서는 지구의 안보가 위협당하는 위기의 상황에서 슈퍼히어로들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함께 모여 힘을 모은다. 이들은 초인적인 능력으로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정의의 히어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이 등장할 때마다 건물이 무너지고, 자동차가 부서지며, 주위의 자연들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허둥지둥 도망친다. 그렇다면 가공할 악에 대항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적인 정의가 과연 옳은 것인가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우리에겐 모두 각자의 도덕적 나침반이 있다. 누구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어디가 북쪽이고, 어디가 남쪽인지. 우린 그 나침반을 믿어야 한다. 하지만 가끔은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다. 아키요시 리카코의 이 작품은 바로 그 정의란 것에 대해 아주 극단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정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거라고 믿는 한 여자. 다카키 노리코. 그녀는 언제나 단 한 번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결코 타인의 죄를 용서하지도 않는, 그야말로 '절대정의'의 신봉자였다. 이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정의감이 맹목적일 경우 초래할 수 있는 무서움'이 너무도 현실적이었다. 사실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규칙을 지키며 살아야 하고,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고. 정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곳이고, 그런 세상 속에서 융통성과 배려 없이, 타인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행동은 어울릴 수가 없다. 위법인가, 위법이 아닌가. 올바른 것인가, 올바른 것이 아닌가. 단지 그것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무차별하게 단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읽기 시작하면 쉽게 손에서 뗄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 있는 전개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너무도 독보적인 캐릭터도 인상적이었던 작품이었다. '정의'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지는 작품이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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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토애셋, 암호자산 시대가 온다
크리스 버니스크.잭 타터 지음, 고영훈 옮김 / 비즈페이퍼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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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토애셋의 세상은 때로 공상과학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말이다.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그 점을 이해한다. 하지만 변화는 기회가 되기도 하므로 독자 여러분이 크립토애셋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한 뒤 행동하길 바란다.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이후 벌써 10년이 지났다. 당시 미국의 금융 시장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파급 된 대규모의 금융 위기 사태는 1929년의 경제 대공황에 버금가는 경제적 혼란을 초래했었다. 최근에 한국이 1979년 외환위기, 2008년 외화유동성 위기에 이어 또다시 위기국면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금융위기 10년 주기설이 대두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취업자 수 증가폭이 10만 명 아래로 추락했고, 청년 실업률이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아, 고용 사정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수준으로 나빠지고 있다는 뉴스도 있었다. 이제는 경제와 무관한 일반일들도 금융시장의 원리와 실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금융 분야의 가장 뜨거운 기술로 떠오른 것은 바로 블록체인이다. 이것은 블록에 데이터를 담아 체인 형태로 연결해서 수많은 컴퓨터에 동시에 이를 복제해 저장하는 분산형 데이터 저장 기술이다. 거래에 참여하는 모든 사용자에게 거래 내역을 보내 주고 정보를 공유해 데이터 위조나 변조를 할 수 없도록 해킹을 막게 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사토시 나카모토가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해 암호화폐인 비트코인을 개발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사태를 통해 중앙집권화된 금융시스템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개인 간 거래가 가능한 블록체인 기술을 고안한 것이다. 그리고 비트코인은 기존 글로벌 금융 시스템과 과학기술 시스템을 재고시키며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그렇다면 '크립토애셋'이란 무엇인가. 통상 암호화폐라고 불리는 이것은 현재 비트코인을 포함해 800개가 넘는 종류가 전 세계 시장에서 흘러 다니고 있다. 크립토애셋 시장은 돈을 생각하고, 사용하고, 불려나가는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투명하고 효율적이며 공정한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주식조차 초기 몇 세기 동안에는 불안정했다. 그렇다, 수세기 동안이었다. 대부분 조작된 이야기에 기초해 사람들이 사고 팔기 위해 경쟁하면서 투기 경향을 띄었을 뿐만 아니라 참여자들의 이익에 반해 시세가 조작된 경우도 많았다. 허위 전망, 주가 조작, 분식 회계, 위조지폐 발행은 모두 손실로 이어졌다. 오늘날 가장 신뢰받는 시장의 일부도 미국 서부 개척 시대와 같은 초창기를 겪었다.

비트코인은 들어 봤지만, 그 외의 암호화폐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온 나에게 처음 이 책은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현대의 금융시장에 대해서, 그리고 비트코인이라는 것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했던 터라 읽게 되었는데, 차근차근 크립토애셋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세계적 트레이더이자 애널리스트로 꼽히는 크리스 버니스크와 금융 전문가이자 엔젤 투자자로 활동하는 잭 타터가 크립토애셋 투자의 정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투자 수단으로서 크립토애셋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투자자들에게도, 혹은 나처럼 가상화폐라는 개념 자체가 아직 어려운 초보들에게도, 요즘 금융시장 돌아가는 실상이 궁금한 일반인들에게도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 줄 것 같다.

블록체인 기술은 현금 없는 세상, 다시 말해 지폐도 실제 은행도 중앙집중적 통화 정책도 필요 없는 세상을 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물론 크립토애셋의 세상이 '가상'이라는 점때문에 아직까지 그 실체를 접해보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리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했고 말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미래는 필연적으로 오늘이 된다.' 어쩌면 이미 여기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이 책을 통해 확실한 최신 정보로 크립토애셋의 역사부터 일반 투자 전략과 새로운 자산의 클래스에 대한 기초를 다잡아 이들이 말하는 '혁신적 투자자'로 거듭나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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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기원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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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용기로 살았어야 해.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죽을 용기와 살 용기, 그것은 과연 같은 종류의 용기일까. 나는 맑스와 마르크스, 그리스인과 희랍인, 자정과 0, 두 번의 침묵, 분명 같은데 서로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죽을 용기로 살았어야 한다는 그 말에 대해 영이 무어라고 답을 할지 상상해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상상 속에서 어떤 동의나 항변도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타인이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들을 조금도 짐작할 수 없다. 각자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부분들만 보여주면서 살기 때문에, 감춰져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우리는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말처럼 '모든 이야기에는 언제나 미리 삭제된 몇 개의 장면이 존재하며, 언제나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바로 그 삭제된 장면들이다. 그곳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죽음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천희란 작가의 첫 소설집은 다양한 삶의 방식 속에서 죽음을 이야기하며, 생이 다하는 순간에서야 완성되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표제작인 '영의 기원'에서 나는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왔던 친구 영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된다. 영은 나를 찾아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저 가지고 왔던 시들지 않는 꽃과 편의점 비닐봉투 속의 편선지 세트와 볼펜, 과자, 술을 남겼었다.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었던 나는 영의 영정 사진을 마주하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트럭에 갑자기 뛰어 들었다는 영의 죽음은 사고였을까. 자살이었을까. 나는 동전을 던지면서 영의 죽음이 사고인지 자살인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죽을 용기와 살 용기는 과연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우리는 그가 이해하는 바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완전히 삼켜버리도록 늪과 같은 그림자 속에 자신을 던진 바, 그의 아내가 보여주려 하지 않았기에 드러나지 않았던 그 사건들처럼, 그가 스스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것을 우리 또한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언제나 미리 삭제된 몇 개의 장면이 존재하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삭제된 바로 그 장면들이다. 나는 영원히 달아나지 못한다. 다만, 이제 불을 끌 시간이다.

사람들이 돌연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아무런 징후도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 종말의 날짜가 모두에게 공표되고 하루하루 종말의 도래를 기다리는 세상 속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시체안치소에서 깨어나는 남자의 이야기, 자신은 죽지 않는 불멸의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화가와 미술기자가 눈앞에서 그의 자살을 겪게 되는 이야기, 화성 여행의 시대가 도래한 세상에서 화상을 다녀온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내의 일기장 속에서, 아내의 자살 원인을 추적하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가 이 소설집 속에서 말을 건넨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지만, 누군가에게 그것은 너무 늦게 찾아 오고, 또 누군가에게는 억울할 정도로 빨리 찾아 오곤 한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지는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보편성과 개별적인 특수성 사이를 오가는 이야기들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세계란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설다.

천희란 작가는 등단 3년도 안 돼 소설집 한 권이 묶일 만큼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말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매번 유서를 쓰는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쓰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녀가 이토록 죽음으로 가득한 책을 써야만 했던 이유에 대해서 조금 더 심사 숙고해서, 더 진지한 사유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이 책을 다시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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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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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인간이 백 살을 넘겨 살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계속 살아 나갈 의지가 없기 때문에, 지겹게 반복되는 생각과 인생에 지쳐 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언젠가는 살아오면서 숱하게 봐 온 미소나 몸짓에 진저리를 치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모든 것이 영영 깨지지 않는 사이클 안에 갇혀 버린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여기, 현재와 과거 사이를 오가며 사는 남자가 있다. 그에게 순간은 언제나 지금과 그때 사이에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그에게는 조금 특별하게 흘러간다.

 

 

그녀가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펜을 똑딱거린다. 한 번의 똑딱거림은 한 순간이다. 한 번, 그리고 잠시 멈추었다가 또 한 번. 오래 살수록 점점 힘들어진다. 순간을 붙잡는 것. 각 순간들이 도착하는 즉시. 과거와 미래가 아닌 무언가에 갇혀 사는 것. 이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

역사 교사인 톰 해저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관해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당시에 살았던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인 셰익스피어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톰은 그가 우리처럼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작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사업가이기도 했고, 연극 제작도 했었고, 우리와 똑같이 숨을 쉬고, 잠을 자고, 또 화장실도 들락거렸으며, 입냄새를 심하게 풍기기도 했던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그가 입 냄새를 심하게 풍겼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마치 그 시절에 살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날 톰은 동료 교사인 카미유와 대화를 나누다 그녀가 읽고 있었던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라는 책을 본다. 그녀가 이 책을 읽어 봤냐고, 어땠냐고 물어보는데 그는 머릿속 무수한 기억들 속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 그는 지금 런던 학교의 교무실에 앉아 있지만, 그와 동시에 파리의 호텔 바에도 들어와 있었다. 두 세기, 두 곳의 장소와 두 개의 시간 사이에 갇혀 버린 것이다. 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40대로 보이는 톰은 세월이 흘러도 외모가 변하지 않는 독특한 병에 걸린 사람이다. 애너제리아라는 명칭의 이 병을 앓는 사람들은 노화의 속도가 정상인들에 비해 15배쯤 느리다. 그리고 면역 체계가 강화되어 거의 모든 바이러스성 감염과 세균성 감염으로부터도 안전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만 시간이 멈춰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들도 언젠가는 죽는다. 슈퍼히어로는 아니라는 얘기다. 단 이들이 죽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구백오십 살쯤 돼서 자다가 죽거나, 아니면 폭력에 의해 심장이나 뇌가 손상되어 죽거나. 주인공 톰 해저드는 4백여 년 전에 태어났다. 중세 시대였기에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늙지 않는 외모 덕분에 마녀로 몰려 익사했다. 게다가 평생 유일하게 그가 사랑한 여인 로즈는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 모든 세월을 거쳐 홀로 남은 그는 현재 439살이다. 자신의 변하지 않는 외모를 주변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8년마다 계속 신분을 바꾸며 평생을 떠돌아 다니며 외롭게 사는 그에게 유일한 삶의 목표는 로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매리언을 찾는 것이다. 그의 딸 역시 자신처럼 늙지 않는 병에 걸려 사람들로부터 도망쳐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2초 만에 벌어진 일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4세기만에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제스처 하나 때문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는 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눈 깜빡할 새 한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파악될 때가 있다. 모래알만 보고 우주를 이해할 수 있듯이. 한순간에 빠진 사랑은 첫눈에 반한 사랑과는 또 다른 것이다.

무려 사백 년이 넘는 시간을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마녀사냥과 전염병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중세 시대를 거쳐, 셰익스피어가 활약한 엘리자베스 시대, 재즈가 흘러 넘치던 19세기 초의 파리를 지나 피츠제럴드와 찰리 채플린이 살던 뉴욕을 거쳐, 21세기 현재에 이르는 그 긴 시간의 여정이라니. 이야기는 끊임없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가 살았던 과거 속 각각의 시대상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나 셰익스피어와 피츠제럴드가 등장하는 장면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1599년의 런던, 셰익스피어가 <뜻대로 하세요>를 공연할 때 필요한 류트 연주자로 톰을 캐스팅하게 된다. 톰은 그와 함께 무대에 오르고, 작가가 아닌 배우로서의 셰익스피어를 바라보기도 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셰익스피어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1928년의 파리,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외로웠던 톰은 우연히 화려한 커플 옆자리에 앉게 된다. 톰에게 블러디 메리라는 칵테일을 추천한 바로 그 남자는 스콧 피츠제럴드, 그는 아내와 함께였다. 사백 년 이상 살다 보면 세상 그 누구를 만나도 흥분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톰이지만, 침대 옆에 놓아 둔 책을 쓴 작가와 우연히 마주하게 된 그날의 사건은 그에게도 무척 특별하게 기억된다. 그리고 독자인 나에게도 이런 순간들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다. 셰익스피어,  피츠제럴드와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고 싶다. 그런 바람을 품어온 지 꽤 되었다. 한 사백 년쯤.

애너제리아를 앓는 사람들의 모임인 '소사이어티'는 평생을 떠돌아 살아야 하는 톰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는 대신, 8년마다 완전히 정체를 바꾸어야 하고, 그들이 의뢰하는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톰은 평범한 사람들인 하루살이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자신과 같은 증상을 앓는 이들을 찾아 모임에 가입하도록 권유한다.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부득이한 방법을 쓰더라도 그들의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서. 왜냐하면 자신이 수백 년 동안 찾아 헤매고 있는 딸 매리언을 소사이어티가 찾아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딸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4세기만에 처음으로 마음을 흔드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절대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는 소사이어티의 규칙을 지킬 수 있을까. 이야기는 긴장감 넘치는 미스터리처럼 진행되다가, 가슴을 설레게 하는 로맨틱 드라마가 되기도 하고, 수세기의 시간을 넘나들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판타지가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눈을 뗄 수 없는 탄탄한 구성과 흥미진진한 전개 덕분에 페이지 위의 글들이 영상화되어 눈 앞에 보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으로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하는데, 영화화는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매트 헤이그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건데,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진행되는 스펙터클한 스토리에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마치 그림 그리듯이 장면들을 그려내고 있어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과거라는 것이 조용히 쌓이고 쌓여 현재를 만들고, 그 시간의 축적이란 모든 물체와 단어 사이에 유령처럼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너무도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는 1950년대였다가 이내 1920년대로 바뀌기도 하는 그 순간들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마치 마법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근사한 작품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방법이란 없다. 아마 이 책을 읽게 되는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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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ffee Dictionary - 커피에 대한 모든 것 The Dictionary
맥스웰 콜로나-대시우드 지음, 김유라 옮김, (사)한국커피협회 감수 / BOOKERS(북커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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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블렌딩하는 것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우리 가게만의 특별한 마스터 블렌드/하우스 블렌드를 맛보세요"라는 상술의 타깃이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로스팅 전문가들이 블렌딩을 하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서로 다른 향미 특성을 섞기 위해서고, 둘째로는 비용 절감과 커피()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서다. 블렌딩을 함으로써 로스터는 커피 공급에 있어 계절 변동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일관적인 상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밥은 어쩌다 한 두 끼를 안 먹더라도 상관없지만, 하루라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이들을 위한 완벽한 책이 나왔다. 그야말로 커피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모든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는 '커피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커피 사전이다. 이 책은 영국바리스타챔피언십에서 세 번 우승한 세계적인 바리스타 맥스웰 콜로나 대시우드의 [Coffee Dictionary] 한국어판이다.

 

이 책에 수록된 약 200개의 키워드들은 커피콩이 한 잔의 커피가 되기까지, 커피의 여정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A부터 Z까지 담고 있다. 커피를 만드는 다양한 기구들, 커피의 맛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단어와 로스팅 및 추출의 원리, 그리고 커피의 역사와 종류, 재배 방법과 커피를 둘러싼 문화에 이르기까지 가볍고 흥미로운 이야기들과 전문적인 지식들까지 풍성하다. 게다가 다소 딱딱한 정보성 지식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 예쁜 일러스트들 덕분에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

 

향기, 소리, 커피콩이 요동치는 모습, 열기..... 로스팅 과정은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특히 커피 입문자에게 있어 인상적인 첫 경험은 1차 크랙 소리를 듣는 것일 테다. 팝콘 튀기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팡 터지는 소리보다는 탁탁 부딪치는 소리에 가깝다. 크랙이라는 명칭은 원두에 가해지는 물리적 과정에서 기인했다.

커피가 맛있다는 곳을 일부러 찾아가서 마실 만큼 나도 커피 성애자이다. 아주 어린 시절 꼭 식사 후에 커피를 타서 마시는 엄마를 보며 쓰기만 한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맛있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너도 어른이 되면 커피 맛을 알 거라는 식으로 말을 했었는데, 나 역시 이제는 커피가 없으면 안 되는 나이가 되고 말았다. 그 동안 카페에서 파는 다양한 종류의 커피 외에도, 집에서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커피를 즐겨 왔다. 커피포트, 핸드드립, 프렌치프레스, 더치커피, 캡슐커피를 거쳐 요즘은 모카 포트를 애용하고 있다. 커피는 원두의 종류에 따라, 로스팅하는 방식에 따라, 그리고 추출하는 방법에 따라 너무도 다양한 맛을 내는 음료이다. 그래서 알아 갈수록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먹어보고 싶어진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요즘은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보다는 각자의 개성을 살린 자그마한 커피숍들이 더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은 스페셜티 커피 문화에 열광하는 나라이고,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큐그레이더 자격 보유자가 있다고 한다. 덕분에 소규모 로스터 분야에서 그 어떤 나라보다 큰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니, 커피를 둘러싼 전 세계적인 흐름은 물론 커피와 관련된 기본적인 용어와 테크닉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세계적인 바리스타가 들려주는 커피에 대한 모든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만나보게 된다면, 아마도 커피를 더욱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커피와 사랑에 빠진 당신에게 주는 완벽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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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상곡(夜想曲) 2018-06-14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녹차파 커피비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