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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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대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고, 흐지부지되었을 수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못 했을 수도 있고, 다 마음속에만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진짜에서 멀어지는 건 아니야. 때로는, 그래서 더욱더 진짜가 되지. 때로는 어떤 쌍을 보면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 같아.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어. 하지만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야. 모두에게 있어. 그게 단 하나의 이야기야.   P.75~76

우리가 사랑에 관해 읽었거나 배운 것은 대부분 실전에선 적용되지 않는다. 그건 우리가 열아홉에 사랑을 경험하든, 서른에 사랑을 하든, 마흔이 넘어서 사랑을 만나든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므로, 상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줄리언 반스는 말한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그것이 여전히 잊지 못할 첫사랑이든, 고백도 못해본 짝사랑이든, 처참하게 배신당한 지독한 사랑이든 간에. 모두에게 자신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그게 바로 단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 단 하나의 이야기, 사랑의 시작과 끝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한 남자가 오십여 년 전의 첫사랑을 회상하며 시작한다. 열아홉 청년이 마흔 여덟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들의 이야기는 테니스 클럽에서 시작되었다. 추첨식 혼합복식 대회가 열렸고, 제비 뽑기로 파트너가 결정되었다. '제정신이 아닐 정도의 자신감'으로 충만한 19세 청년과 스스로 '다 닳아버린 세대'에 속한다고 믿는 48세 여인이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다. 그들은 서로의 두 번째 애인이었다. 폴은 삼학기가 끝날 무렵 대학에서 만난 여자아이와 성적인 입문을 했던 적이 있고, 수전은 아이가 둘이었고 사반세기 동안 결혼 생활을 했다. 이제 막 어른이 되려 하는 열아홉 청년과 오래 전부터 어른이었던 마흔여덟의 여자가 만드는 사랑은 생각보다 순수하고, 아름답고, 하지만 깊은 슬픔과 예리한 진실이 담겨 있는 이야기를 들려 준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수전의 남편이 그녀에게 수시로 폭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폴이 알게 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폴은 그녀를 구해내고 싶었고, 결국 런던에 집을 구해 함께 떠나기에 이른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환상에서 현실이 되고, 로맨틱한 관계에서 일상의 남루함을 겪게 되는 관계가 된다. 그리고 물론, 이게 전부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너는 스물다섯이고, 이런 종류의 상황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신문에는 '중년의 여성 알코올중독자 애인을 감당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없다. 너 혼자 알아서 해야 한다. 너는 아직 인생의 이론이 없고, 그 기쁨과 고통 몇 가지를 알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을 믿고, 사랑이 할 수 있는 것을 믿는다, 사랑이 어떻게 인생을, 실제로 두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너는 사랑의 상처받지 않는 면, 끈질김, 어떤 적도 따돌리는 능력을 믿는다. 이것이, 사실 지금까지 너의 유일한 인생의 이론이다.   p.224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각 장마다 화자의 시점이 달라진다. 일인칭 ''로 시작해서 이인칭 ''가 되었다가 삼인칭 ''가 되고는, 다시 ''로 돌아온다. 첫사랑은 늘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 사랑에 빠져 있는 순간에는 오로지 나와 상대만 보이고, 주변의 모든 것들은 뿌옇게 흐려지곤 하니 말이다. 우리는 사랑이 끝나고 나서야 타인의 시선이나, 객관적인 시각에 대해서 갑작스럽게 깨닫게 된다. 나의 사랑이 끝이 나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계속 이어지니깐. 일인칭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그들이 함께 런던으로 떠나게 되는 부분까지이다. 그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이 일에 대한 내 기억은 이게 다였으면 좋겠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하지만 가능하지가 않다' 사랑의 여러 단계 중에 이제 그들은 비로소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들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폴은 남편의 그녀에 대한 폭력 때문에 분노와 연민과 공포를 느끼면서 동시에 무력감 비슷한 것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 그녀가 가정 폭력으로 인공치아 네 개를 만들면서 폴의 그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점이 이인칭으로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이후에 겪게 되는 것들은 지금이나 나중에나 폴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한 작품에서 이렇게나 시점이 많이 달라지는 것도 드물지만, 그로 인한 효과가 이렇게 놀라운 작품도 처음이 아닐까 싶다. 줄리언 반스의 작품이야 항상 문장이 좋았지만, 특히나 이번 작품은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결국 포스트잇이 여기저기 붙어서 책이 두툼해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수많은 연애 소설을 읽어 왔고, 수많은 연애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 왔고, 수많은 연애에 관한 잠언들을 읽어 왔지만, 그 어느 것도 줄리언 반스의 이 작품만큼 진실에 가깝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신이라면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당신은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는 것보다는 사랑하고 잃어본 것이 낫다'라고 생각하는가. 처음의 질문도, 두 번째 질문도 사실 우리가 선택할 여지는 없는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길을 가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처럼 불가항력에 가까운 거니까.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질지 아닐지 선택하거나, 얼마나 사랑할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번 '기꺼이'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어떻게 되는 지 잊어 버리고선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단 하나의 이야기'는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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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1 - 치명적인 남자
안나 토드 지음, 강효준 옮김 / 콤마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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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때, ‘가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그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학교에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방법으로. 나는 어느새 십 대에 봤던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있었고, 그 유치한 대사들은 내 현실이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았더라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분명한 건, 그가 내 삶 속으로 들어온 뒤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P.8

테사는 이번에 엄마가 졸업하지 못한 모교에 입학한다. 한 살 연하 남자친구인 노아 역시 모든 과목에서 A를 받는 모범생이다. 올해 같이 진학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자주 만나러 오겠다고, 내년에는 같은 학교에 진학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착한 룸메이트만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테사를 기다리고 있던 룸메이트는 밝은 다홍색 머리에 지나치게 두꺼운 아이라이너, 팔에는 총천연색 타투까지 한 모습의 스테프였다. 게다가 그들이 얼빠진 모습으로 당황해 있을 때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두 명의 남자애들. 눈썹과 입술에 피어싱이 달려 있는 금발 생머리의 남자와 짜증스러운 눈빛의 까칠한 매력을 가진 남자. 스테프는 그들과 인사를 하고 곧 방에서 나간다. 엄마는 저런 애들과 함께 방을 사용할 수는 없다고 당장 방을 옮기자고 소리치고, 학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소동을 피우고 싶지 않았던 테사는 엄마를 진정시키고 자신은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테사의 대학 생활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2년 사귄 연하 남친과 키스 이상은 해본 적 없는 철벽 엄친딸 테사, 매사에 완벽해야 한다고 딸을 들볶았던 엄마 덕분에 그녀 역시 그렇게 살아 왔다. 이것저것 필요한 건 다 전화기로 알람을 맞추는 게 습관이라, 친구랑 함께 있다가도 알람이 울리면 공부하러 가는 식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면서 전전긍긍하지만, 모범적인 학생이자 의무를 다하는 착한 딸이다. 반면 테사의 삶을 뒤흔들게 되는 주인공 하딘은 헝클어진 갈색 머리에 신비로운 초록색 눈에 상반신을 뒤덮은 타투와 입술 피어싱을 하고, 건방지고 비밀스러운 인물이다. 아빠가 대학 총장에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지만, 그런 아빠는 하딘의 대학 동창인 랜던의 엄마와 곧 결혼할 예정이다. 하딘의 아빠가 새 가족들과 호화로운 저택에서 떵떵거리고 살고 있을 때, 엄마는 생활비를 벌려고 일주일에 50시간을 뼈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하딘은 그런 아빠가 가족을 버렸다고 생각하며 싫어한다. 만나는 여자마다 건드리지만 연애는 절대 하지 않는 나쁜 남자 하딘, 조신하고 순수한 철벽 엄친딸 테사,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두 사람의 로맨스가 이제 시작된다.

 

"하딘, 뭘 원해? 또 키스를 허락한 나를 비웃고 싶은 거야? 여자들은 가질 수 없는 걸 원한다고? 난 더 이상 너한테 놀아나지 않을 거야. 내겐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친구가 있어. 난 남자친구를 두고 아무하고나 즐기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그리고 넌,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야. 너랑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게임은 다른 여자랑 해. 난 사절이야."

"내가 널 최악으로 만드는구나, 그렇지?"    p.106

이 작품은 연애소설의 고전『오만과 편견』의 부활이라 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상대를 가늠하고 계산하는요즘 연애를 그리지만, 주인공의 심리나 연애의 과정은 200년 전에 쓰인 소설 『오만과 편견』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인 안나 토드 역시 이 작품 속에서 제인 오스틴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완벽하게 다른 두 남녀가 만나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로맨스 소설은 숱하게 많지만, 이 작품이 특별한 것은 내숭없이 욕망에 충실한 사랑의 모습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낯뜨거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연애의 과정들은 뻔한 것 같으면서도 색다르고, 당황스러우면서도 어느 순간 가슴 설레게 만들어 준다. 하딘을 만나 테사는 최악의 여자가 된다. 남자친구를 두고 다른 남자에게 키스를 허락하고, 하루종일 울면서 그를 미워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를 원하는 자신의 모습에 당황스럽기만 하다. 하딘은 테사를 만나 처음으로 좋은 남자가 되고 싶어졌다고 말한다. 그 순간에는 물론 진심처럼 드렸다. 하지만 그 후에도 하딘은 여러 차례 테사를 질리게 하고, 힘들게 하고, 설레게 했다가 증오하게 만들었다가,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인다. 일주일 전에는 다시 만나면 테사의 인생을 망쳐버리겠다고 해 놓고선, 오늘은 너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다고 다정한 소리를 해대니... 대체 이 남자의 진심은 뭘까.

저자인 안나 토드는 필명으로 이 작품을 왓패드에 써서 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왓패드는 캐나다 토론토에 기반을 둔 세계 최대의 스토리텔링 커뮤니티로 작가와 독자를 포함한 월간 이용자수가 약 6천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사이트이다. 이 작품은 독자들의 입소문과 압도적인 스토리에 힘입어 왓패드 1억 뷰를 기록하며 정식 출판되었고, 전 세계에 번역 출간되어 1천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그리고 현재 파라마운트 사와 계약하여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고 하니, 스크린에서 펼쳐질 테사와 하딘의 발칙한 현실 연애도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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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마음 편히 살고 싶어 - 마음속 때를 벗기는 마음 클리닝 에세이
가오리.유카리 지음, 박선형 옮김, 하라다 스스무 감수 / 북폴리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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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에 '마음 안경을 닦는 가게'가 있었다. 뭔가로 고민하는 분, 스트레스를 받는 분, 기분이 울적한 분들은 마음 안경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게 앞에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 가게의 주인인 다람쥐 엘리스는 얼마 전까지 구두 닦는 가게를 운영했다. 구두를 닦는 동안 손님들은 엘리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 오히려 편하게 말하게 되는 그런 심리 때문일 것이다.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엘리스는 마음 안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어서오세요, 마음 안경을 닦는 가게입니다.”

 

 

지금 어떤 일 때문에, 어떤 사람 때문에 힘들거나, 실수하는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불쑥불쑥 우울해지는 것은 사실 사건이나 타인 때문에 벌어지는 게 아니라고 한다. 우리의 '마음 안경'에 묵은 때가 껴서 그런 거라고. ‘마음 안경사건에서감정이 일어나는 동안 정보를 처리하는 심리 기제로 누구나 마음속에 지녔고, 저마다 다른 마음 안경을 가지고 있다. 이 마음 안경을 닦으면 인생이 한결 편안해지고 행복해진다고 엘리스는 말한다. 이 책의 부제가 '마음속 때를 벗기는 마음 클리닝 에세이'인 이유가 있었다.

"인간의 마음은 일어나는 일에 따라 흐트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흐트러지는 것이다."

 

사건이 직접적으로 감정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가지고 있는 그 사람만의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마음 안경이 정보를 처리하는 결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좋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생각을 바꾸면 쓸데없는 고민이 사라진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감정이 정해진다는 것은 너무도 쉽게 공감할 수밖에 없어서,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안에 있는 마음 안경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감정의 묵은 때를 만들어버리곤 한다. 일반적인 상식이나 가치관에 맞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더하게 되면서 일종의 집착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떤 상황에도 반드시 잘 해내야 한다. 모두에게 미움을 받으면 안 된다.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무엇이든 스스로 해야 한다. 절대로 타인 앞에서 창피를 당하면 안 된다. 상황이나 환경은 항상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등등.. 그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던 것들이 묵은 때가 되어 우리의 마음 안경 렌즈를 어둡게 만들고 만다. 불필요하게 고민에 빠지게 하고, 쓸데없이 괴롭히게 되는 원인이 바로 이러한 것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마음 안경 렌즈는 스스로 닦을 수 있다는 것. 이 책 속 엘리스는 마음 안경의 묵은 때를 닦아 내는 방법을 6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이란 것은 생각보다 무척 간단하고 쉬워 보인다. , 끈기 있게 지속해야 하지만 말이다.

 

이 책의 저자 가오리와 유카리 자매는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앨버트 엘리스의 임상심리학을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그림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앨버트 엘리스는 수많은 임상경험을 통해 사고의 틀을 바꾸어 합리적인 신념을 갖게 하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문제를 치료할 수 있다고, 수동적으로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의 기존의 정신분석과 달리 내담자에게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는 치료법으로 정신분석에서 새로운 문을 여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책은 다람쥐 캐릭터 엘리스를 통해서 앨버트 엘리스가 창시한 REBT(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심리 치료를 받는 듯한 효과를 느낄 수 있다.

제목은 '아무 생각 없이 마음 편히 살고 싶어' 이지만,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살자고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다. 사는 게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분들, 스트레스로 인해 지쳐 있는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하고, 우울하고 의기소침한 감정이 드는 빈도수를 줄어들게 하는 '마음 클리닝'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도 평온함을 느낄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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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외딴 성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서혜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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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코로에게는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었다.

'사나다 미오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주세요.'

비 냄새를 비웃은 그 애가 고코로 앞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소원이 고코로의 등을 밀기라도 하는 양, 고코로는 양손을 거울 표면에 대고 마치 성문을 밀어젖히듯이 힘껏 밀었다.   p.81

중학교 1학년인 고코로는 입학한 첫 달인 4월만 학교를 가고 그 뒤로는 가지 않고 있다. 등교거부아들을 위한 마음의 교실이라는 스쿨에도 가기로 했다가 아침이면 배가 아파 가질 못한다. 학급의 중심인 미오리네 그룹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나서부터 고코로는 학교가 싫어 졌다. 그리고 이제는 학교뿐만 아니라 아예 집 밖에도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매일 방에서 텔레비전만 틀어 놓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방에 있던 전신거울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한다. 이상하다 싶어 손을 뻗자 그대로 거울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만다. 그곳은 마치 서양 동화에서나 볼 법한 웅장한 성문이 달려있는 성이었다. 늑대 가면을 한 어린 소녀가 어안이 벙벙해있는 고코로에게 말한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이 성에 초대받으셨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성으로 들어오게 된 일곱 명의 아이들에게 늑대가면의 소녀는 성의 규칙에 대해 설명한다. 오늘부터 내년 3월까지 이 성 안에서 소원의 방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찾아내면, 그 한 사람은 원하는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성은 오직 그 기간 동안만 열려 있고, 기간 동안 열쇠를 찾아내지 못하면 열쇠는 소멸, 그 안에 누군가 열쇠를 찾아 소원을 이루면 성은 닫힌다. 매일 성이 열리는 것은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이며, 이후에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 후까지 성에 남아 있으면 늑대에게 잡아 먹힌다고 한다. 추리닝 차림의 얼짱 남자아이, 포니테일의 똑 부러진 여자아이, 안경을 낀 성우 목소리의 여자아이, 게임기를 만지작대는 건방진 남자아이, 주근깨투성이의 차분한 남자아이, 조금 살찌고 마음 약해 보이는 남자 아이, 그리고 고코로. 이들은 대체 왜 이곳에 불려온 걸까.

 

"기껏해야 학굔데 말이지."

"기껏해야 학교?"

".'

고코로는 놀라운 그 말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학교는 자신의 전부였기 때문에 가는 것도 안 가는 것도 굉장히 괴로운 일이었다. 도저히 '기껏해야 학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p.480

영미권의 소설이었다면, 이러한 초기 설정 이후 이야기는 소원의 방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곱 명의 아이들 간의 서바이벌로 진행될 것이다. 소원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소원을 이루는 자도 단 한 명뿐. 게다가 어떤 이유로 불려온 지 알 수 없는 너무도 다른 개성과 스타일을 소유한 일곱 명의 아이들이 모였으니 자연스레 경쟁 구도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츠지무라 미즈키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아마도 저자가 교육학을 전공했고, '일 년 내내 매일 즐겁게 학교에 가는 학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가야 하는 곳이 자신을 벼랑으로 내몰고 목숨까지 끊고 싶을 정도의 마음이 들게 만든다면 도망쳐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어른들의 시선으로 등교거부 학생을 바라 본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사람 혹은 게으르고 꾀병을 일삼는 무기력한 사람 내지는 사회 부적응자, 낙오자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츠지무라 미즈키는 그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 본다. 학교가 싫은 사람은 싫어해도 괜찮다고. 죽을 만큼 학교에 가는 것이 힘들다면 도망쳐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 쯤은 내가 속해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누구에게 기댈 수도 없고, 타인에게 상처 받고, 마음속으로는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고립되는 듯한 느낌도 들고, 지독하게 외로울 때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봐 주고, 이해해주고, 나와 비슷한 상처를 경험해 봤던 이가 공감해주고, 마음을 다독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등교 거부 중인 현실과 거울 속 세계인 환상을 넘나 들며 펼쳐지는 이 작품은 바로 그런 판타지를 따뜻하고 뭉클하게 그려내고 있다. 판타지스러운 설정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이고, 또한 너무도 세심하게 인물들의 심리를 그려내어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거울 속 세계의 정체, 그리고 과연 누가 소원의 이룰 수 있는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 뿐만 아니라 왜 하필 일곱 명의 학생들이 선택된 것인지, 그들 각각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고코로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미스터리로서도 너무 매혹적인 작품이고, 우리 모두 한 때 겪었던 시기를 거쳐가는 한 소녀의 성장 소설로도 너무나 훌륭하다. 특히나 후반부에 가서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에는 정말 왈칵 눈물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감동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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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 욥기 43장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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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목사님이 화재 현장에서 제대로 빠져 나오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금식 탓이 클 거예요. 장로님 말씀대로 목사님은 그날부터 계속 금식하면서 기도했으니까요. 밤늦게까지 교회에 머무르는 날도 많았고.... 주일예배 설교할 때도 보니까 얼굴이 거무튀튀하고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게.... 좀 조마조마했거든요. 저러다가 쓰러지고 말지, 저러다가 큰 병 나고 말지... 제가 그만두시라고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그 와중에 화재가 나버린 거예요.  P.61

한적한 시골 마을 목양면의 한 교회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여전히 화재가 발생한 원인은 오리무중이다. 이야기는 화재의 원인을 추리하는 마을 사람들 각각의 증언을 통해서 진행된다. 다들 각자의 상황에서, 각자 주관적으로 알고 있던 정보들과 경험한 일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거라 모두 제각각이다. 하지만 분명 화재는 인위적인 사고로 보이고, 누군가 일부러 그랬다면 과연 누가 방화 사건을 저지른 것일까. 열두 명의 서술자들은 마치 경찰에게 취조를 당해 자백을 하는 듯한 느낌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는데, 결국 화재 사건의 범인은 밝혀지지만, 이 소설의 미스터리는 방화를 누가 일으켰는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번 화재로 사망한 이들 중에 지하 1층 교육관에 혼자 있었던 최요한 목사도 있었다. 그는 이 교회를 세운 최근직 장로의 아들이다. 그리고 최근직 장로는 젊은 시절 사고로 아내와 아이들을 잃고 극도의 절망 속에 스스로 생명을 놓을 결심을 했으나 하나님을 만난 이후 제2의 삶을 사는 인물이다. 누군가는 바로 그 최요한 목사가 스스로 불을 냈다고 하고, 누군가는 당시 금식 중이어서 화재 현장에서 제대로 빠져 나오지 못했을 뿐이라고, 누군가는 그가 모범생 스타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일도 혼자 속으로 삼키고 기도하는 그런 성격이라고, 또 다른 이는 목사를 그 새끼라 부르며 애 엄마에게 푸념을 늘어 놓으며 자신의 언니에게 수작을 걸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목양면 방화 사건의 숨겨진 전말은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그 목사가 그런 거라죠? 그 새끼가 불낸 거라죠? 내가 그 새끼가 무슨 큰 사고 칠 거 같아서 불안 불안했는데.... 지난달에도 언니한테 이사가자고 했는데... 씨발, 추석만 지나면 알아보려고 했는데... 좆같은 새끼... 죽으려면 지혼자 뒤질 것이지....

진정이 안 되니까 이러는 거 아니에요.... 뭘 아직 몰라요? 조사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불이 거기에서부터 난 거라는데.... 어후, 나 진짜 속에서 열불이 뻗쳐서.... 진짜로 막 여기가, 내 가슴이, 막 다 타버릴 거 같다구요!    P.65~66

이번 이기호 작가의 신작에는 '욥기 43'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기호 작가는 꽤 오래 전부터 <욥기>의 후속편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가 읽은 구약 속 욥은, 자신의 자식들이 고통 속에서 죽은 뒤에도 여호화의 이름을 찬송하는 이상한 아버지였기에, 젊었을 때도 나이가 들어 아버지가 된 후에도 여러 번 읽었지만 좀처럼 욥이라는 인물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전체 42장으로 이루어진 성경 「욥기」의 번외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욥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과연 그는 자식을 두 번이나 잃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하나님의 뒤로 숨어버린 현실의 욥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이 소설은 총 열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은 모두 다른 열두 명의 서술자가 등장하여 방화 사건의 원인에 대해 추리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흥미로운 건 작가가 열두 명의 증언자 중 하나로 하나님을 세우고, 신성이 아닌 하나님의 인성을 드러내며 절대 신의 존재를 희화화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하여 무거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이기호 특유의 유쾌함이 종교를 잘 모르는 이들도 술술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게 만들고 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그 다섯 번째 작품은 이기호 작가의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이다.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편혜영 작가를 시작으로 박형서, 김경욱, 윤성희 작가에 이어 이기호 작가의 작품까지 출간이 되었다. 이 시리즈는 매월 25일 출간되는 월간 핀이기도 한데, 이후에 이어질 작가들의 라인업 또한 매우 기대감을 갖게 한다. 정이현, 정용준, 김금희, 김성중, 손보미 등...현재 한국 소설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기도 해서 핀시리즈로 만나볼 그들의 작품이 손꼽아 기다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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