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2 - 이게 사랑일까
안나 토드 지음, 강효준 옮김 / 콤마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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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넌 날 미치게 만들어. 글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닌 미친놈으로 만든다고! 널 사랑하냐고? 그렇게 묻는 그 뻔뻔함은 대체 뭐야? 그딴 걸 왜 물어봐? 내가 어쩌다가 한 번 말했다고? 진심이 아니었다고 이미 말했잖아. 근데 왜 또 물어보는데? 거절당하는 걸 즐기는 모양이지? 그래서 내 주위에서 빙빙 도는 거잖아, 아니야?"  p.60

이 작품은 내숭없이 욕망에 충실한 사랑의 모습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는, 가장 현대적인 모습의 연애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낯뜨거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연애의 과정들은 뻔한 것 같으면서도 색다르고, 당황스러우면서도 어느 순간 가슴 설레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1권을 덮자 마자 이어지는 2권의 내용이 너무도 궁금해졌다. 사실 2권으로 완간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 페이지의 3권으로 이어진다는 문구에 실망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사와 하딘의 연애 스토리는 너무도 흥미진진해서.. 3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이어지더라도 계속 찾아서 읽게 될 것 같다.

전편에서 이제 막 대학 신입생인 테사의 파란만장한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었다. 2년 사귄 연하 남친과 키스 이상은 해본 적 없는 철벽 엄친딸이었던 그녀가 헝클어진 갈색 머리에 상반신을 뒤덮은 타투와 입술 피어싱을 한 건방지고 비밀스러운 남자 하딘을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줬었다. 이런 모습이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테사의 행동은 스스로를 당황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딘은 점점 더 그녀의 매력에 푹 빠진다. 하지만 하딘은 만나는 여자마다 건드리지만 연애는 절대 하지 않는 나쁜 남자였고, 테사는 조신하고 순수하고 모범적인 여자였다. 애초에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남녀가 티격태격하면서 조금씩 로맨스를 쌓아 가는 과정은 비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현실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게 순식간에 닥쳤다. 이해가 잘 안 된다. 나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나를 조롱하는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들과 친해지려 내가 쏟아 부었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나는 이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하딘은 왜 저기 서 있는 거야? 무슨 일이야?  p.347~348

2권에서는 대학 총장인 하딘의 아빠가 랜던의 엄마와 결혼을 하게 되고, 집에 얼굴도 잘 비추지 않던 하딘은 테사 덕분에 부모님의 결혼식에 참석도 하고, 집에서 자고 가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반면 엄마의 착한 딸이었던 테사는 남자친구 노아와 헤어지고, 하딘과 함께 하기 위해 기숙사를 나오게 되면서 엄마와 사이가 급격히 나빠진다. 결국 테사의 엄마는 하딘을 계속 만난다면 다시는 너를 보지 않겠다고, 학비며 기숙사 비용도 전혀 지원하지 않겠다고 딸을 협박하기에 이르고, 테사는 엄마가 지금 내가 행복해지려는 걸 막고 있다고, 내 일은 알아서 할 테니 참견하지 말라고 맞서게 된다. 아빠가 집을 나간 후 8년 동안 엄마가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며 외롭게 살아왔다는 건 알지만,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한다고, 엄마도 엄마의 인생을 나를 통해 보상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테사는 생각한다. 하딘을 만나기 전의 그녀라면 꿈도 꾸지 않았을 그런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하딘은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테사를 사랑한다. 그들은 만난 지 겨우 몇 달밖에 안됐고, 그나마도 매번 싸우기만 했지만, 하딘은 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얻어서 함께 살자고 한다. 테사는 결혼하기 전까진 누군가와 동거하게 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지만, 그럼에도 하딘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커서 그러기로 한다. 결혼은 정말 고리타분한 생각이라고 말하는 남자와 동거를 하게 된 테사, 그녀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출판사에서 꿈에 그리던 인턴십을 하게 되고, 매력적인 남자 친구가 생겼지만, 그녀의 일상은 언제나 스펙타클하다. 하딘은 한 시간 전만 해도 그녀를 '친구'라고 남들에게 소개했으면서, 지금은 엄마를 보러 영국에 가자고 하는 등 여전히 종잡을 수가 없는 모습을 보이고, 뜨겁게 사랑하다가도 별 것 아닌 일로 투닥거리는 모습이야 대부분의 연인이 비슷한 모습 아니겠나 싶지만... 2권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 테사에게 충격을 안겨 준다. , 과연 그녀와 하딘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3권을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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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김신회 지음 / 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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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도 완벽주의를 지향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이 다치는 게 싫어서 누군가에 대한 호감을 접고, 실패할 것이 두려워서 새로운 도전을 미룬다. 노력도 가능성이 보여야 하는 거라는 생각, 이제 와서 용써봤자 소용없다는 생각, 그래도 한번쯤은 시도해봐야겠다 생각은 하면서도 어느새 온갖 안전하지 않은 결말들에 사로잡혀 조용히 마음을 접는다. 그 과정은 참는 것만 잘하는 사람, 모든 일에 시큰둥한 사람을 만들어낸다.   p.47

우리는 살아 오면서 평생 부모님에게, 선생님에게, 어른들에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매사에 노력해야 하고,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 것이고,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며, 좋은 집에 살게 될 거라고.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 무조건, 열심히 살아 왔다. 그런데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에세이의 제목들을 보고 있자니, 순간 멈칫하게 된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라든가, <아무 생각 없이 마음 편히 살고 싶어> 혹은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라니 말이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은 말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그러나 이제 어른이 되어 버린 우리들은 알고 있다. 노력이란 것이 항상 정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애초에 인생이란 공평하지 않은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더 이상 열심히 살지 않기로 해도 되지 않을까. 가끔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의 저자 김신회는 일 년 반 전쯤, 갑자기 오른손 집게손가락에 불편함을 느끼게 됐고, 그 손으로는 일을 하는 것도 무리여서 어쩔 수 없이 일을 쉬어야 했다고 한다. 덜컥 무기한 휴가가 주어졌지만 그녀는 쉬는 법을 몰랐다. 성과는 없어도 끊임없이 움직여대던 일중독자였으니 말이다. 우리는 열정과 노력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반대의 경우에는 뭔가 도태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래서 그녀처럼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뭔가 일을 만들어 하거나, 목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산다. 쉬는 날에도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겠고, 진짜 휴식이 뭔지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열심히 사는 사람밖에 없는데, 정작 자기 삶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없으니, 그렇다면 우리는 뭘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거란 말인가.

 

 

왜냐하면 우리는 이유 없는 일에 화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화를 내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사 정당한 사람은 못 되더라도, 우리의 분노는 정당하다. 우리는 종종 나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기분은 나쁜 게 아니다. 설령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일단 그렇게 우기고 본다. 그래야 이 험준한 삶을 버텨낼 수 있지 않겠는가.    p.160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이 불안해서 끊임없이 자책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말한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다고, 그러니까 편하게 있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누구보다 나에게 야박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기댈 데 없는 나를 제대로 돌보는 법을 하나씩 실행해나가면서 '나에게 관대해지는 법'을 알려준다. 그녀가 들려주는 여러 에피소드 중에 바로 실천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휴일엔 맥모닝'. 아무도 쉬라는 말을 안 했어도 스스로에게 휴가를 주는 하루의 시작에는 세수도 건너뛴 채 제일 먼저 냉장고로 향한다. 그러고는 맥주 한 캔을 골라 냉장고 문 앞에서 벌컥벌컥 마시는 거다. 시원한 맥주 줄기가 혀를 적시고, 시린 이를 간질이다 식도를 통해 배 속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비어 있던 배가 맥주 딱 300cc만큼 불러온다. 그녀는 이것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궁극의 해방감'이라고 부른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물 대신, 밥 대신 먹는 맥주 한 캔의 행복. , 생각만해도 기분이 시원해진다. 이렇게 쉬는 날에는 휴일인 만큼 최대한 마음 가는 대로, 게으른 하루를 보내 보면 어떨까. 가급적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그 어떤 생산적인 일을 도모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남들이 게으르다고 손가락질할 까봐, 이러는 동안 뒤처질 까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불안해했다. 하지만 눈 뜨자마자 맥주를 마시고, 종일 시간을 허비하면서 그렇게 허투루 하루를 한번 보내보자. 주어진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지만, 사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세상을 잘만 굴러 간다.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지 못할 까봐 전전긍긍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어차피 나는 나, 세상에 내가 있어야 타인도 존재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먼저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 동안 나 자신에게 너무도 인색하게 살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나에게 관대해지는 법을 배우게 되자, 나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노력을 하든 안 하든 나는 계속 나일 것이고, 어차피 세상에 혼자라 해도 내 옆에 나는 남는다. 대단한 걸 이루지 않아도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며, 앞으로도 그 쓸모를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 생각이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견디게 해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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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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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말이 맞았다. 동희는 미국에 살아도 한국에 나와 있는 지금도, 뭐가 하나는 쑥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뭘까. 그 커다란 빈 구멍은. 한국 국적을 재취득하면 좀 나아지려나. 동희는 자신도 모르게 상념에 빠져들었다.

"어디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어디에서 죽느냐의 문제더라고. 체류 기간 2년 동안 잘 생각해봐요."    p.30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그곳에서 살던 동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면 한국 국적은 자동 상실된다고 하니, 그녀는 이곳에서 국적상실 신고를 하든 국적 재취득을 하든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냐고 묻는다. 한국을 떠날 때 왜 떠나느냐고 물었던 것처럼. 그녀는 그와 비슷한 말을 미국에서도 들었다. 왜 미국에 왔냐고, 왜 한국을 떠나 이곳으로 왔냐고, 왜 힘들게 정착한 미국을 다시 떠나려고 하느냐고. 동희는 그때마다 단답형의 대답을 찾아보려 했지만 늘 명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이유 같았고 모든 것이 이유가 아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원래 그렇게 명쾌하거나 속 시원한 대답을 안겨주지 않는다. 사실 어디에 사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극중 동희가 만난 여자의 말처럼 어디에서 죽느냐가 문제일 수도 있겠고, 어디에서 살든 어떤 모습으로 현재를 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든 혹은 거기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자꾸 경계에서 서성거리게 되는 삶일 지도 모르겠다. 임재희 작가는 이 작품에서 한국인 이주민들의 삶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이민자의 삶'이라고 하니 제일 먼저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인 이창래 작가가 떠오른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했고, 이후 그곳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그는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된 존재들을 소설 속에 등장시키면서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아마도 이민자의 삶이란 그런 모습일 것이다.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해도 그 안에 스며있는 문화의 차이는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곳에서 그곳의 언어로 생활하고 그곳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확인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평생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공허할까. 얼마나 서글플까. 소속감이라는 것이야말로 타인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뭉클한 온도인데 말이다.

어쩌면 엄마가 정작 그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집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긴 여정을 생각하는 시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문득 자신들도 길 위에서 쉬지 않고 달려왔음을 떠올렸다. 태엽이 감긴 인형들처럼 움직임을 멈춘 적이 없었다. 계속 학교라는 곳을 다녔고, 계속 무언가를 배웠고, 계속 시험이라는 것을 치렀고, 계속 보이지 않는 적들을 만났다. 부모의 갈등을, 병을, 상처를, 분노를 헤아릴 여유도 없이 마주치고 흡수했다. 언제부턴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오고 있었고, 그래야 한다고 여겼다.    p.236

'라스트 북스토어'에서 동생 부부가 사는 미국에 여든을 훌쩍 넘긴 노모를 모시고 다니러 온 나는 엘에이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는 헌책방에 간다. 알고 보니 올케는 우울증약을 먹어야만 겨우 일상을 버티는 중이었고, 그런 아내와 함께 피아노를 전공하는 딸과 이제 대학에 들어간 아들을 키우는 일은 동생에게 만만치 않아 보인다. '천천히 초록'에서 어정쩡하게 미국에서 살다가 어정쩡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사는 나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부모의 흔적을 되짚는 중이다. 그녀는 말한다. 왜 그렇게 오랜 세월 한국을 떠나 살다가 되돌아왔냐고 묻지 말라고. 뭔가 실패한 기분이라고. 이민 가서도 비슷한 질문을 숱하게 들었다고. 이제와 한국에서 삶을 다시 살면서 시간의 한 부분이 뭉텅 잘려나간 듯한 느낌이 든다고. 머리와 다리만 있는 몸으로 사는 느낌, 그런 기분은 대체 어떤 걸까. 그래서 나는 그 지워진 부분이 뭔지 찾기 위해 고향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을 되짚어본다. 남편과 이혼한 뒤다른언어를 쓰는 곳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꽃집 여자, 어린 나이에 미국에 입양된 소년, 한국인 엄마를 뒀지만 한국어보다 영어가 익숙한 남자 등 한국에 머물러 있지만 한국 사회에 속하지 않는 인물들이 자신의 근원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민자는 '미국으로 간 이민자', '한국으로 돌아온 귀환자', 그리고 '한국에서 사는 한국인'의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 경계인 혹은 주변인, 세상으로부터 어딘가 배제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 한 곳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어딘가를 떠도는 그들의 삶. 하지만 저자는 극중 인물들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도 미국도 아닌 현재 서 있는 곳"이 결국 내가 실존하는 그 곳이라고. 실제로 저자 역시 한국에서 태어나 스물 한 살 때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대학 생활을 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미국인과 한국인의 중간에 선경계인’”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영어로 의사소통은 하지만 거기에선 아무런냄새도 나지 않으며, “한국어는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고 하니,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풍경들은 모두 실제 그것을 닮아 있을 것이다. 떠나는 자, 돌아온 자, 머무는 자들이 자신의 근원을 향해가는 여정은 그리하여 쓸쓸하고, 고독하지만, 누구나 상실을 겪어 왔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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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이브스 3 - 5천 년 후, 완결
닐 스티븐슨 지음, 송경아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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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북극 위 높은 곳에서 전체 모습을 '내려다보며') 묘사하듯, 지름이 84,000킬로미터인, 머리카락처럼 얇은 고리가 30억 명의 인구 전부가 사는 세계였다. 그 중심에 잇는 희고 푸른 행성의 지름과 비교하면 대략 일곱 배였다. 그 고리를 이루는 물체들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커 보이겠지만, 고리의 전체 규모에 비교하면 더없이 작은 입자였다. 최대한 가느다란 보석 목걸이, 여인의 목에 걸린 보일까말까 한 백금의 실을 상상해보라. 그런 목걸이를 지름 10미터짜리 완벽한 원으로 만든 다음 그 전체 크기에 비교하면 실이 얼마나 얇을지 그려보라.   p.34

'어느 날 아무런 전조도, 이렇다 할 원인도 없이 달이 폭발했다.' 에서 시작한 <세븐이스트>가 드디어 3부까지 전 권이 출간되었다. 달의 폭발 이후 1년 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1부에서는 달은 일곱 개의 큰 덩어리와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조각들로 붕괴되었고, 증가하는 유성충돌이 '화이트 스카이'사태로 이어지고, 며칠 뒤 '하드레인' 현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해 과학자들은 2년 안에 최대한 많은 인원과 장비를 궤도로 쏘아 올려야 했고, 노아의 방주와 같은 우주선에 인류를 대변할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을 태워 우주로 보낼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달이 붕괴하고 예상대로 2년 후 하드레인이 시작된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2부에서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명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인듀어런스 호가 클레프트에 도달하기까지 3년 동안 인구의 대다수는 여러 가지 원인, 즉 우주 방사선, 자살, 암 등으로 사망하게 되었고, 그들이클레프트라고 하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에 도달할 무렵 우주에는 단 여덟 명의 생존자만이 남게 된다.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이미 폐경기에 접어든 사회학자 루이사를 제외하면 가임기의 인구는 일곱 명, 세븐이브스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유전학 실험실을 이용하여 인류의 재건에 필요한 자원을 보유하고자 한다.

그들 일곱 명의 여자들이 남자 없이 스스로 임신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자손을 이을 수 있는 실험을 하게 되고, 그로부터 5,000년 후의 이야기가 3부에서 펼쳐진다. 5.000년 후, 이제 우주에는 30억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하드레인에서 살아남은 세븐이브스, 그리고 그들에게서 뻗어 나온 일곱 종족. 각 종족을 대표하는 일곱 명이 비밀리에 소집되고 이들세븐멤버는 지구에서 발견된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1권에서 하드레인으로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 다이나의 아버지가 지하 깊은 곳에 대피한다고 했었는데, 그들이 생존해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잠수함을 타고 바다 속으로 대피했던 이들 역시 생존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5천 년 동안 각기 어두운 광산과 깊은 바다 속에서 삶을 영위해온 두 종족은 사회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다르게 진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싸움은 방법을 알아서 하는 게 아니야." 타이가 말했다. "결심하기에 달린 거지."

"난 그냥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게 말이지, 5천 년 전 우리 이브들이 내린 결정이 우리 행동을 통제할 때가 있어. 어떨 때는 우리가 무력할 정도지. 너는 뒤로 물러서서 관찰하고 분석하도록 되어 있어."

"당신은 영웅이 되도록 만들어져 있고요."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p.272

이 작품이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에 무게를 두고, 탄탄한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쓴 '하드 SF' 장르이기 때문에, 사실 쉽게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다소 문체도 다소 딱딱하고, 낯선 용어들과 설정 들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이야기인 3권은 상대적으로 매우 잘 읽힌다. 물론 앞선 1권과 2권의 과정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이지만 말이다. 닐 스티븐슨은 눈부신 상상력과 천재성으로 인류사를 다시 쓰는 장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행성의 충돌로 시작해 지구가 파괴되고, 세계의 해체와 재건의 시간을 지나 인류의 재탄생이라는 우주 대서사극이 그렇게 만들어 졌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우주물리학, 양자역학, 로켓공학, 로봇공학, 인공지능, 생물학, 유전공학, 무선전신 및 프로그래밍 언어학, 철학, 문화인류학, 심리학, 정치학 등 방대하지만 검증 가능한 이론들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 장점이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어려운 장벽을 제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꼭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천체물리학자였던 스티븐 호킹 박사는 “2020년까지 화성과 달에 식민지를 세우고 그곳에 노아의 방주처럼 보관 시설을 세워 인류가 살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소행성 충돌의 위험, 지구 온난화와 자원고갈 등으로 새로운 우주 식민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계속 높아지고 있는 요즘, 소행성 충돌을 미리 알기 위한 조사 작업이 활발히 진행 중이기도 하다고 하니, 닐 스티븐슨이 그려낸 세계를 단순히 공상과학소설 속 허구의 그것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멸망과 재건이라는 주제 자체는 SF장르에서 드물지 않지만, <세븐이브스>만큼 높은 과학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은 흔치 않을 것이다. 첨단 과학 기술 아이디어들이 얼마나 매혹적인 스토리를 만나 빛을 발하는지, 꼭 한번 만나보길 추천한다. 이 작품이 제대로 된 과학소설의 세계로 안내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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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머더 레이코 형사 시리즈 6
혼다 데쓰야 지음, 이로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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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산산조각이 난 시체도, 깔려 죽은 시체도, 독살된 시체도, 썩어 문드러진 시체도 보았다. 죽음이 공존하는 현장에서 소중한 동료까지 잃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자신도 '스트로베리 나이트'의 경험자인지 모른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준으로 하여 현재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오쓰카의 죽음을 머리와 가슴에 새김으로써 자기 눈에 비친 사회를, 도쿄라는 도시를 다시 정의한다.   p.166

가석방으로 출소한 지 엿새 만에 조직폭력단의 두목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시신의 상태는 참혹했다. 총상도 없고 자상도 보이지 않고, 큰 출혈이나 심한 상처도 없었다. 대신 얻어맞았다는 상흔만 50군데가 넘고, 골절은 20군데도 더 되는 등 온몸의 뼈가 부스러진 상태였다. 대체 누가 이런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범행을 저지른 것일까. 게다가 피해자는 현역 조폭 두목이었다. 범인이 폭력단 관계자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어 이케부쿠로 일대를 중심으로 폭력을 일삼아온 사람들이 잇달아 처참하게 살해된다. 온몸의 뼈라는 뼈는 전부 부러뜨리는 방식으로. 세 건의 범행은 동일범의 짓이 분명해 보였는데, 대체 범인의 목적이 뭐였을까. 레이코는 탐문 중 만난 외국인 여성으로부터 결정적인 제보를 받게 된다. 동네에 소문이 파다한 그 괴물을 사람들이 '블루 머더'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블루 머더는 오로지 조직폭력배, 폭주족 출신 한구레, 중국계 마피아 등 각종 악인들만 살인의 타깃으로 삼으며, 이미 수많은 악인들이 그에게 당해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이다. 악당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없애는 살인자라니, 지나치게 잔인한 살해 방식 때문에 마치 괴물처럼 느껴지는 블루 머더의 정체는 누구이며, 대체 범행 동기는 뭘까.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히메카와 레이코는 열일곱 살 때 성폭력 피해를 입었고, 그 일로 인해 경찰이 되기로 결심했다. 대부분의 경찰들이 현장, 물증, 자백을 중시하는 데 비해 그녀는 직감에 의존하는 수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런 근거 없이 범인을 짐작해서 맞히고 행동을 읽는 게 가능한 이유가 범인들과 지극히 비슷한 사고회로를 가졌고,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범인의 의식에 동조하기 때문이라는 동료의 평가도 있었다. 직급이 같은 동료에게는 나이를 불문하고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하는 등 자신감 넘치는 모습 때문에 그녀를 아니꼽게 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형사로서의 감 혹은 그것과 비슷한 영감을 가진 점만은 누구든 인정한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스트로베리 나이트> 사건 당시 스물 아홉이었던 히메카와 레이코는 이번 신작 <블루 머더>에서 서른 셋이 되었다. <인비저블 레인> 이후 히메카와 반은 뿔뿔이 흩어지고, 레이코는 경시청에서 이케부쿠로 서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래서 수도 없이 죽였어. 수백, 수천, 수만 번이나 머릿속에서 그 놈을 죽이며 살아왔지. 찔러 죽이고, 총으로 쏘아 죽이고, 목을 졸라 죽이고, 때려서 죽였어. 텔레비전에서 살인 사건 뉴스를 볼 때마다 실제로는 어떻게 해서 죽였을까, 하고 혼자서 상상을 해. 그런 상상은 언제부터인가 점점 더 소름 끼치는 아이디어로 변해가더군. 저 범인이 나였다면 이렇게 했을 텐데, 저놈을 이렇게 죽이는 거라고 보여주었을 텐데, 하고 말이야.... 맞아, 난 그런 생각만 미친 듯이 하면서 살아왔어. 그 사건 이후의 인생을."   p.417

히메카와 레이코는 전작인 <인비저블 레인>에서 폭력단 조직원 살인 사건을 수사하다 조직폭력배와 금지된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 당시 그녀는 경찰관으로서 처벌을 받는다 해도 그를 향한 마음에는 거짓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행동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레이코의 눈앞에서 칼에 찔려 죽었고, 당시의 그 사건으로 인해 부하들이 모두 뿔뿔이 해체되어야 했고, 그녀 역시 본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게다가 레이코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서로 알고 있었지만, 그가 좋아한다고 딱 부러지게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던 부하 기쿠타는 그 사건 이후 동료 경찰과 결혼을 했다. 레이코는 열일곱의 여름에 겪었던 사건 이후, 누군가를 제대로 좋아하고, 연애를 하는 일에 아직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레이코 형사 시리즈는 경찰 조직에 대한 묘사도 탁월하고, 잔혹한 범행 수법이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지만, 주인공이 미모의 여형사라 그런지 그녀와 남자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비중을 두고 이야기가 진행되어 왔다. 물론 약한 모습을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레이코의 의지 덕분에 겉으로는 강한 척하는 모습에 다들 속고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사실 근본적으로 강한 사람이 아니다. 항상 나이와 성별을 의식했고, 그런 중압감을 전혀 못 느끼는 척, 아닌 척하는 버릇이 있었지만, 내면은 지극히 평범한 여자였다. 그리고 이번 신작에서 그녀는 범인과 대치하는 극한 상황에서 부하였던 기쿠타를 구하기 위해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번에 혼다 데쓰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 신작을 만날 수 있게 되어 너무 설레었다. <스트로베리 나이트>, <소울 케이지>, <시머트리>, <인비저블 레인>, <감염유희> 이후 6년 만에 여섯 번째 작품인 <블루 머더>와 일곱 번째 <인덱스>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일본의 경찰 소설 대가하면 사사키 조, 곤노 빈, 다카무라 가오루 그리고 혼다 데쓰야를 꼽을 수 있다. 그 중 혼다 데쓰야는 독특하게 성장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미모의 여형사가 주인공인 시리즈로 유명하다. 게다가 이 시리즈는 범죄 묘사에 있어 그로테스크할 만큼 잔인하다는 점이 특징이기도 하다. 혼다 데쓰야의 작품은 레이코 형사 시리즈 외에도 지우 시리즈, 무사도 시리즈 등 시리즈 소설이 많으며, 그 외 단행본도 작품 수가 꽤 많다. 가장 최근 작품이었던 <짐승의 성>도 꽤나 잔혹하고 끔찍한 묘사가 많아 읽기 조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혼다 데쓰야는 시리즈 물에 더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고, 그 중에서도 단편보다는 장편이 더 훌륭한 작가이다. 레이코 형사 시리즈는 <블루 머더> 2012년 작이었고, <인덱스> 2014년 작이었다. 그리고 작년 11월에 나온 <노 맨스 랜드>라는 작품이 아직 남아 있는데, 곧 국내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새로운 표지로 옷을 갈아입고 개정판과 신간이 함께 나왔으니,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이 시리즈가 사랑 받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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