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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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요리하는 것도 하루하루의 즐거움 가운데 중대한 요소다. 다른 집안일은 그저 필요하니까 할 뿐이지만 요리를 하는 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손이 많이 가고 기교가 필요한 요리는 못 만들지만 자두나 딸기, 복숭아 잼을 만들거나 빵과 달걀과 우유에 바닐라를 넣은 따끈한 과자 얼음사탕을 뜨거울 때 녹인 차가운 홍차 등은 자주 즐긴다. 매년 7월에는 솔덤 자두의 껍질을 멋기고 씨를 뺀 뒤 체에 걸러서 적포도주에 섞은 음료를 만든다. 위스키만 마시는 술고래 아들도 감탄하며 칭찬할 정도로 어른스러운 리큐어다.    p.72

모리 마리는 환상적이고 우아한 세계를 표현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인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다. 나쓰메 소세키와 쌍벽을 이룬 대문호인 아버지(모리 오가이)를 두고 남부럽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성년이 된 이후 두 번의 이혼과 가난한 살림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게다가 생활 능력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성격도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에 가까웠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자신만의 소소한 행복을 만들며 살았다. 그녀는 매일매일 자신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만들었고, 하루 세끼 식사를 맛있고 근사하게 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외롭거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콩소메와 콜드비프, 감자를 넣은 채소샐러드를 먹고, 어린 시절 만났던 메이지풍 서양요리와 양배추 말이를 좋아한다.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불끈 화가 치밀어 올라 씩씩거리며 화난 채 식사를 하고, 집에 돌아 와서도 화를 낸다. 요리하는 것을 너무 좋아하고 잘하지만, 본격적인 요리법으로 음식을 만들지는 않고 만사 귀찮아하는 편이라 지나칠 정도로 단순한 방법으로 요리를 하곤 한다. 게다가 반드시 자신이 생각한 대로의 요리를 자신이 생각한 대로 해서 먹지 않으면 아무래도 싫다며, 그 싫은 정도가 좀 병적일 정도로 심하다고 스스로 어느 정도는 미치광이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괴짜 미식가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로는 나 역시 훌륭한 식도락가다. 넘치게 훌륭해서 훌륭함이 거스름돈을 내줄 정도다. 젊은 사람이면 또 모르겠지만 이미 누가 노인이라 부를 때 아니라 말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먹는 걸 좋아하기로는 여전히 아이 못지않다. 그런데 나는 아주 마음에 드는 요릿집에서도 내가 만든 요리가 더 맛있다고 느낀다. , 내가 가는 요릿집을 변호하자면 그 가게에서는 내 지갑 사정에 걸맞은 가격으로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버터를 넉넉히 집어넣을 수도 없고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안심이나 등심 같은 식재료를 쓸 수도 없다.   P.188

괜찮아, 먹고 싶은 건 매일 있으니까!라는 말은 모리 마리의 인생 모토와도 같다. 두 번의 이혼과 정리가 안 되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 집에 살면서도, 정작 그 속에 사는 당사자는 무사태평이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러니까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와 상관없이 지금 그대로 충분히 행복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 유리를 정말 좋아해서 초록색 얇은 컵에 음료를 따르고 그 가장자리에 입술을 댈 때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라면 며칠 동안 풀로 된 밥상으로만 지내는 것도 아무렇지 않으며, 장미꽃이 새겨진 화려한 찻잔에 홍차를 달여 마시는 순간으로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행복해진다.

모리 마리가 들려주는 맛있는 음식과 요리에 대한 글은 그녀의 소소한 일상들과 취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어린 아이인 채로 몸만 어른이 된 사람이라는 평가처럼 시종일관 철없고 제멋대로에, 하고 싶은 건 기어이 하고, 하기 싫은 건 떠넘기는 뻔뻔한 모습도 매력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그녀만의 확고한 행복에 대한 가치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실 생각보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항상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상대를 배려하고, 그러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은 놓치고 마는 현대인들의 생활 패턴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당당하게 어른스러워지지 않는 모습을 내보일 수 없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모리 마리의 이러한 모습이 다소 뻔뻔하고, 철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충분히 자신만의 소확행을 추구하고 멋지게 살고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밥상은 작은 우주와 같다. 사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다. 음식만큼 일상에서 손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또 있을까. 게다가 요리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것이 더욱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일상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모리 마리의 이 책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그런 포만감과 행복감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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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 모든 것을 설명하는 생명의 언어
칼 짐머 지음, 이창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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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은 매우 방어적인 책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다른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비웃는 것을 오랫동안 조용히 듣고 있었고 이들이 자신을 비웃는 모습을 오랫동안 상상해오던 사람이 쓴 책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다윈은 다른 과학자들의 반박에 하나하나 대응해나간다. 오래된 종이 조금씩 새로운 종으로 바뀐 것이라면 왜 동물들은 그렇게 서로 다른가? 여기에 대해 다윈은 이렇게 대답한다. 즉 두 가지의 유사한 종 사이의 경쟁으로 인해 하나가 멸종됐고, 따라서 오늘날 살아 있는 동물들은 과거에 살았던 모든 종에서 이런저런 식으로 선택된 종의 후예이다.   p.100

 

가끔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과학책을 만날 때가 있다. 에세이나 인문서, 자기 개발서에서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과학 도서만의 매력이 있다. 대부분의 전문서들이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그들만의 리그를 펼쳐서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진입 장벽이 높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 만난 칼 짐머의 <진화>는 굉장히 술술 잘 읽힌다. 두툼한 페이지 두께가 무색하게 진도가 쑥쑥 나가는 그런 책이라 누구나 부담 없이 '진화론'에 대해, 다윈과 '종의 기원'에 대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인류를 뒤흔든 과학적 발견이야 많지만 다윈의 진화론만큼 심하게 세상을 흔든 것은 없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발견 정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게다가 다윈의 이론은 인간 자신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시각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생명은 신이 직접 개입할 필요 없이 유전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에 이끌려 조금씩, 그리고 영원히 달라져간다는 그의 말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신의 창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진화의 산물은 수많은 종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진화론은 교과 과정에서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전공자가 아닌 이상에야 접하기 어렵다. 게다가 생물학 교과서나 <종의 기원> 같은 고전을 보더라도 높은 난이도에 좌절하기 십상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진화 관련 교양서 대부분은 세부 주제나 특정 이슈를 다루는 데 집중되어 있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건 보기 힘든 편이다. 칼 짐머의 <진화>가 현존하는 진화에 관한 책 중 단연 최고라는 해외 언론의 평이 과장이 아닌 것이다.

 

 

이런 예측이 옳다면 앞으로 수백 년간 또 한 번의 대량 멸종이 일어날 것이고 생물종의 반 이상이 사라질 것이다. 인간은 생물종이 최고로 다양해졌을 때 지구를 물려받았으므로, 그 중 절반을 잃는다면 절대적인 숫자로 보아 사상 최대 규모의 멸종이 될 것이다.

몇몇 측면에서 이번 멸종은 과거의 멸종과는 다를 것이다. 운석은 궤도를 바꿀 수 없지만 인간은 바꿀 수 있다. 멸종의 규모는 앞으로 100년간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p.289

 

이 책은 '진화'라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 그것이 자연과 인간의 경이로운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해내고 풀어내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진화론의 역사, 진화의 핵심 개념과 주요 원리, 관련 이슈를 총망라해서 '한 권으로 끝내는 진화의 모든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동물의 진화 과정을 알기 위해 생물학자들은 괴물을 만들기도 한다. 유전자 하나만 바꿔주는 걸로 돌연변이를 만들어 그로부터 유전자의 비밀을 밝혀낸다. 멸종에 적용된 진화의 법치에 대한 챕터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고생대가 끝나고 중생대가 끝나는 시기인 2 5,000만 년 전에 일어났던 대량 멸종으로 생명체의 90퍼센트가 사라졌다. 이것은 오늘날의 현상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과거의 멸종으로 인해 지구의 생명이 어떤 영향을 받을지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이고 엄밀한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탄탄한 줄거리와 풍부한 스토리텔링으로 마치 서사 문학을 읽는 것처럼 독자들을 매혹시키는 이 책은 매 챕터가 흥미로웠지만 '양성의 진화'라는 테마는 특히나 충격적이었다. 성선택은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고자 하는 욕구를 통해 공작의 화려한 깃과 수탉의 커다랗고 붉은 볏을 비롯, 영아 살해, 이타주의와 같은 자연의 미스터리를 훌륭하게 해결하는 것을 보여준다. 진화생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양성 간의 갈등은 동물들 세계의 난잡한 그것을 넘어서 인간들의 생식과 유전자에 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에 적용이 되어 놀라웠다. 연대, 배신, 속임수, 신뢰, 질투, 간음, 모성애, 자살로 이어지는 사랑 등 이 모든 것들이 동물의 수컷, 암컷 세계와 인간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론과 사례들을 읽다 보니 동물의 암컷과 수컷은 어쩔 수 없이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결코 좁혀질 수 없는 양성 간의 갈등이 인간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류의 기원은 진화 과학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분야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40억 년에 걸친 생명의 진화는 그야말로 복선과 반전이 가득한 장엄한 흥미로운 드라마'였다. 그리고 진화론이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 이렇게나 유용한 것이라는 사실 또한 매우 놀라웠다. 이 책 덕분에 생명의 다양성과 자연의 경이가 새삼 아름답고 경이롭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소설만큼이나 '재미있는' 과학책이니, '진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던 분들이라면 꼭 읽어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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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 혼자여서 즐거운 밤의 밑줄사용법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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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좋아지는 순간은, 더 이상은 단 한 줄도 고치지 못할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입니다. 그때 눈 감고 딱 한 번 더 고칠 수 있다면, 소설은 좋아집니다.

비약적 도약이 아니라 점진적 발전인 것이죠.

진정한 재능이란 지루한 반복을 견디고 지속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에요.

지구인에게는 지구력이 필요합니다.    p.130

 

한때 온라인 서점 직원으로 일했던 그녀는, 서점 직원에게 가장 부족한 건 정작 책 읽을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오랫동안 소설가가 꿈이었지만, 소설을 쓰는 대신 소설 리뷰를 쓴 시간이 더 길었다. 소설가가 되는 대신 소설가를 인터뷰했다. 대신 인생. 나쁘지 않았다. 좋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에 잠겨 걷던 늦은 퇴근길, 멍한 얼굴로 정류장에 서 있다가 놓쳐버린 버스가 막차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궁색한 청춘이었던 그로부터 7년 후, 그녀가 놓친 버스에 장편소설 출간을 알리는 광고판으로 그녀의 얼굴이 붙게 된다. 과거의 그녀가 현재의 그녀 모습을 알았더라면.. 그때 조금 덜 힘들었을까. 막막하고 답답했던 시간이 조금 편했을까.

이 책은 1년에 500여 권의 책을 읽는 '활자 중독자'이자 '문장 수집가'인 백영옥 작가가 오랫동안 차곡차곡 모아온 밑줄 가운데서 고르고 고른 '인생의 문장들'을 소개하는 에세이다. 힘들었던 시절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으면, 책 속의 글자 하나하나가 울먹이는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것 같았다는 그녀. 백영옥 작가는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길에서 마주친 글귀에서 문득문득 마음을 흔들었던 문장들을 꼼꼼하게 모아, 위로가 필요할 어느 날, 누군가를 위해 밑줄 처방전을 만들어왔다고 한다. 평소에 분야를 가리지 않고 시와 소설, 산문집, 자기계발서 등을 다양하게 읽고, 세상 곳곳 삶의 모습에 관심이 많은 그녀의 성격 덕분에 이 책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중요한 건 시를 눈이 아닌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 겁니다. 또박 또박, 한자 한자, 쉼표 하나까지 밥알을 꼭꼭 씹어 넘기듯 말이에요. 그러면 시란 본래 읽기 위한 게 아니라, 아름다운 노래처럼 듣기 위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세상에 누구도 없는 듯 아픔이 찾아오면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위로의 말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해요. 이 시를 서랍 안에 포개어 잘 넣어두세요. 저처럼요.   p.222

 

시인은 세상의 흩어진 단어를 고르고 골라, 가장 적확한 말들을 우리에게 쥐어준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렇다면 소설가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독자들이 잠시 동안 현실을 잊어 버릴 수 있도록 완벽하게 허구로 만들어진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이 아닐까. 백영옥 작가의 에세이가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소설가'가 쓴 '에세이'라는 점이었다. 비슷비슷한 종류의 에세이들이 엄청나게 쏟아지는 요즘이다. 누구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하고 흔한 문장들과 사적인 일기장에다 쓰여야 할 것 같은 보통의 사유들 속에 공감하거나, 감탄할 만한 지점을 찾기란 사실 어렵다. 그렇게 겉멋으로 글을 쓰는 것과 오랜 시간 책을 읽고, 책과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만들어 왔던 이가 쓰는 글이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백영옥 작가의 글은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평범한 일상을 그리고 있지만, 그 속에 진심이 새겨져 있고, 문장들이 아름다우며, 깊이 있는 사유가 담겨 있다.

이 책에는 아픈 사랑과 답이 안 나오는 관계와 막막한 꿈에 대해서, 그리고 평소 지나쳐버리기 쉬운 풍경들과 매일 넘기는 페이지 속의 문장들이 담겨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약해지는 일인지, 때로는 약함을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진짜 용기라는 것, 누군가를 믿는 다는 것의 의미, 진정한 재능이란 한 순간의 천재적인 반짝임이 아니라 지루한 반복을 견디고 지속하는 힘이라는 것 등등... 그녀가 알려주는 독서 노하우와 수많은 책들 속에서 밑줄 그어 수집한 문장들로 쓰인 이 책에도 나는 종종 밑줄을 긋게 된다.

 

 

매일 읽고 매일 쓰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그 매일이 모여 좋은 책이 되게 해주세요.

 

부디 그녀의 바람이, 그녀의 그 마음이 변치 않고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래본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내게 와준 고마운 것들에 대해, 내가 숨쉬는 이 순간의 소중함에 대해 깨닫게 되는 밤이다. 바로 이 책 덕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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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손톱과 밤
마치다 나오코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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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슬슬 때가 된 건지도 몰라."

 

늦은 밤 잠에서 깬 고양이가 문득 생각한다.

"틀림없어."

"오늘 밤이야."

 

고양이는 조용히 집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향하는데..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람들이 모두 잠든 시간, 고양이들만 알고 있는 비밀스럽고, 특별한 밤 이야기가 펼쳐진다.

 

평소 애묘인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화가 마치다 나오코의 매력 넘치는 고양이 그림책이다. 마치다 나오코는 여덟 살에 입양하여 어느덧 열일곱 살이 된 고양이시라키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작품 <고양이 손톱과 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표지에서 묻어나는 이미지 그대로, <슈렉> '장화 신은 고양이' 같기도 하고, 시크하고 도도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고양이이다.

 

저기에서도 고양이.

여기에서도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

 

주인공 고양이를 비롯해 마을의 수많은 고양이들이 모두 모인다. 스토리는 짧고 단순한 동화지만, 여운이 남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생생한 색채 표현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 수많은 고양이들의 표정이 모두 제각각 개성 넘치게 표현되어 있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고양이와 오래 함께 생활해왔던 작가의 각별한 애정이 페이지마다 넘쳐나는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저자는 말한다. 귀여운 아기 고양이도 사랑스럽지만, 살짝 뚱해 보이는 다 자란 고양이도 따뜻한 눈길로 봐달라고.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친해지면 분명 고양이의 많은 비밀들을 가르쳐줄 거라고 말이다.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들은 하나 같이 뭔가 비밀을 품고 있는 존재로 그려지곤     한다. 실제로 환상적인 비밀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에 그들 만의 특별한 밤을 보내는 것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고양이는 정말로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러한 고양이의 모습을 너무도 환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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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맨 앤드 블랙
다이앤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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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벨맨이 열 살하고도 나흘이 되었을 때 떼까마귀들은 자신들의 슬픔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위험한 곳에서 떠났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나무를 볼 수 있다. 그렇다. 바로 지금, 당신의 시간에서. 그러나 그 가지에서 떼까마귀는 한 마리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떼까마귀들은 생각과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p.167

대저택의 페허에 숨겨진 가족의 비밀이 드러나는 고딕 미스터리 <열세 번째 이야기> 이후 다이앤 세터필드는 장장 7년에 걸친 자료조사와 집필 끝에 두 번째 소설을 발표한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최초의 장례용품 전문점이 문을 연다. <벨맨 앤드 블랙>은 죽음을 전시하고 애도를 파는 가게를 중심에 두고 미스터리를 품은 빅토리아 스타일의 유령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19세기 영국 휘팅포드의 작은 마을, 주인공 윌리엄 벨맨이 열 살이 되고 나흘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강과 숲 사이의 들판에 있었고, 그곳은 떼까마귀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먹이를 찾아 땅을 쪼아대는 들판이었다. 윌리엄은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자주 있을 법한 허세로 아주 멀리 있는 나뭇가지의 새를 맞출 수 있다고 자신한다. 사정권을 한참 벗어나 들판 중간쯤에 있던 그 새를 맞추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고, 소년들은 그의 허세를 터무니없다고 비웃었다. 윌리엄 자신 조차 말이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높고 멀리 날아간 돌멩이가 자신의 여정을 마쳤고, 아직 부리가 검은 어린 새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며 죽었던 것이다. 열 살배기 영웅이 으레 그러듯 윌리엄은 미소 지었고, 우쭐해 했지만, 멀미가 났고 창피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랫 동안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된다.

 

 

"벨맨&블랙요. 장례용품을 파는 엠포리엄."

"블랙 씨 되시나요""

벨맨은 가슴이 철렁했다. "전 벨맨입니다."

"그렇다면, 벨맨 씨, 장례용품이라면 제대로 만드셔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니까요. 그게 곧 미래죠, 안 그런가요? 나의 미래. 당신의 미래. 모두의 미래."    p.233~234

이야기는 벨맨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그가 결혼을 해 가족을 꾸리고, 방직 공장에 이어 장례용품 전문점을 새롭게 열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죽음을 전시하고 애도를 파는 가게'라는 설정이 너무도 고딕 미스터리와 잘 어울려서 시작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부분이 나오는 것은 두툼한 페이지의 중반 이후 2부에 가서야 비로소 시작된다. 윌리엄 벨맨은 영리하고 잘생겼으며, 교회 성가대의 스타였고, 아가씨들의 인기를 한 몸에 누리던 소년이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지만 백부는 그를 믿고 벨맨 방직공장에 고용해주었고, 노련한 사업가적인 기질을 타고난 그는 방직 공장이 전에 없던 성장을 거듭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본격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은 런던으로 무대를 옮긴 2부에서부터이다. 가족들이 하나 둘 열병에 걸려 죽어가면서부터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벨맨이 어린 떼까마귀를 본의 아니게 죽였던 그 순간부터 얼핏 등장했던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가족들의 장례식 장에서도 끊임없이 벨맨의 눈에 띈다. 아마도 죽음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는 이 존재는 벨맨의 눈에만 보이는 존재로, 그는 검정색 차림의 남자를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급기야 그가 영국 최초의 죽음에 대한 물건을 파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도 블랙이라는 남자와의 동업으로 진행된다. 생각보다 도처에 널려 있는 죽음들이 벨맨의 삶을 끊임없이 침투한다. 죽음은 그를 슬픔에 잠기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시종일관 그의 삶에 등장하는 의인화된 죽음이 그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애도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복잡한 계산에 심취한다. 애도의 단위는 무엇인가? 슬픔을 어떻게 세고, 무게 달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그렇게 암울한 계속을 하며 마음속 주판알을 튀겼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과 거래를 하기에 이르게 된다.

 

"예전에는 죽은 자를 석조 제단에 올려놓고 떼까마귀들이 뼈를 바르도록 방치했지요.  그거 아셨어요? 아주 오래전. 우리의 십자가들과 첨탑들과 성경책들이 생겨나기 이전. 그리고 이 모든 것들......"

 

모두 누군가를 잃는다. 또 누군가는 모두를 잃는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울고 애도한다. 당연히 죽음은 유행을 타지 않으니, 벨맨이 구상한 사업에 대한 수익은 장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강한 자나 약한 자,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들 모두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점이 벨맨 앤드 블랙의 사업을 번창하게 만든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이야기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는, 망자를 ‘저세상’으로 인도하고 돌아오는 존재인 떼까마귀에 대한 묘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둡고 음습하고 불안한 기색이 만면에 깔려 있는 이야기지만, 다이앤 세터필드의 이야기는 여전히 아름답다. 전작인 <열세 번째 이야기>에 등장했던 비다 윈터의 말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마치 가족과도 같아서, 우리가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을 잃었다고 해도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있으니까. 그들에게서 멀어지거나 등을 돌려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에게나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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