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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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을 선물로 받는 게 더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꽃이라든가, 초콜릿이라든가, 연필 같은 것. 남지 않는 것들. 그걸 영영 간직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들. 그런 선물이라야 주고받는 마음이 홀가분했다. 사물에 사연이 쌓여가서 추억이 사물보다 더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풍경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그 시절의 나는 여렸던 것임이 틀림없다. 실은 선물에 대한 부담이라기보다 나 자신의 여림에 대한 불만 쪽에 더 가까운 심사였을 것이다.   p.22

<마음 사전> <한글자 사전>으로 마음을 이루는 낱말 하나하나를 자신만의 시적 언어로 정의했던 김소연 시인의 신작 신문집이다. 시인은 기존의 산문집과 다르게 경험한 것들만 쓰겠다는 다짐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상을 자세히, 섬세한 시선으로 적어보고자 시작했고 오직 직접 만났거나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옮겼다고 하니 더 기대가 되었다. 생각하는 바와 주장하는 바가 아닌, 다만 실제로 경험한 일들만을 글로 쓰는 산문집은 어떤 느낌일까.

 

'나를 뺀 세상의 전부'라는 의미심장한 제목부터 마음에 와 닿았던 책이다. 시인은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고 말했다. 누구나 타인과 관계를 맺어 가면서 살 수 밖에 없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화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 성향도 달라지고, 취미와 생활 환경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환경이 달라지는 것에도 우리는 영향을 받고, 소소한 일상의 작은 것 하나도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모르는 동네의 골목을 구석구석 누빌 때 내가 누구인지를 잠깐 잊고 있었다. 얼마나 바빴는지, 당장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안중에 없었다. 매일, 하릴없이 산책이나 하면서 들꽃이나 꺾으면서 빵이나 사먹으면서, 길거리에서 서성이면서 살아왔던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와 유리병에 수돗물을 담아 쑥부쟁이를 꽂았다. 비좁은 마음속에 자그마한 자리가 생겨났다.   p.195

 

함께 시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서 온 문자 한 통, 지인의 개인전 오프닝 행사에서 만난 다섯 살 아이의 말 한마디, 소설을 읽고, 시를 읽으며 소개하는 문장과 단상, 친구와 나누던 꿈 얘기, 압력밥솥에서 밥이 익기를 기다리며 들리는 소리,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 어린 시절 비밀기지였던 다락방에 대한 추억 등등... 소소하다면 소소하고,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도 있지만, 누구의 일상에서나 쉽게 마주칠 법한 시인의 하루하루가 이어진다. 단어에 대한 예민하고 특별한 감각이 있는 저자라서 그런지, 문장들이 하나하나 콕콕 가슴에 와서 박힌다. 갈수록 개인주의가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리는 삭막한 세상에서, 누군가와 더불어 산다는 것에 대한 사유가 뭉클하고, 따뜻했다.

모든 글들이 다 좋았지만, 특히나 와 닿았던 것은 저자가 읽는 책들에 대한 사유였다. 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러하겠지만, 완벽하게 일상의 삶을 잊어 버리고 잠시 나마 허구의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 점이 독서의 목적이자 가치일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잠자코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의 심연에 불쑥 물컹한 손을 집어넣었다가 뺀다.' 라고. 그렇게 '소설을 읽는다는 자의식을 놓고, 그냥 그 세계에 들어가 잠시 동안 무언가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인물이 되면서' 소설을 읽었다고. 그리하여 '잠에서 깨어난 듯 책을 덮고 났을 때에 나를 둘러싼 방 한 칸이 낯설어질 만큼 그 세계에서 살다 나온다'라고 말이다.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행간의 여백에 담겨 있는 무엇까지 완벽하게 김소연 시인만이 쓸 수 있는 표현과 정서로 빼곡한 페이지들이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므로 완성되어간다'는 문장을 호흡 하나까지 모두 이해하고 싶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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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귀환 스토리콜렉터 7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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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님 정도는 아니지만 저도 흉악 사건 피해자 시신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에는 상궤를 한참 벗어났습니다. 시체 손상은 원한 때문에, 해체는 이상 심리로 인해, 혹은 운반하려고 그랬다면 납득이 가지만 이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두부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용해시키다니... 완전히 인간을 장난감으로 보고 있어요."

"내가 알기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지구상에서 가장 잔혹한 생물이에요. 그 중에서도 개구리 남자라는 존재는 인격이 다를 겁니다....."    p.105

잔혹하게 훼손된 시체, 마치 어린아이가 쓴 듯 삐뚤빼뚤한 글씨의 쪽지, 마치 아이가 장난감 대신 시체를 가지고 논 듯한 느낌의 유아성에 기인하는 순수한 잔인함..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마치 개구리 가지고 놀 듯 엽기적인 살인 수법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일명 '개구리 남자'가 돌아왔다! 전편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시리즈로 이야기가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못했기에 매우 기대가 되었다.

이야기는 오마에자키 교수의 집에서 일어나는 폭발 사건으로 시작된다. 오마에자키 교수가 전작에서 한노시 50음순 연쇄 살인 사건의 관계자였기 때문에, 와타세와 고테가와도 현장으로 향한다. 교수의 시신은 사방으로 흩어진 정도가 아니라 산산조각이 났고, 지난 사건에서 개구리 남자가 남겼던 범행성명서와 흡사한 메세지도 현장에서 발견이 된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얼마 전 퇴원만 도마 가쓰오로 그는 과거 오마에자키 교수와 이상적인 주치의와 환자 관계였다. 목격자도 없었고, 폭발물 파편으로 인해 증거 조사만으로도 시간이 좀 걸리는 상태였지만, 와타세는 기존 사건 과의 유사성을 인정한다. 사람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시체 처리나 기호화 등 자신의 광기를 숨기려 하는 범인을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전 사건을 정확하게 좇는 모방범이라는 면에서는 완벽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완벽한 모방범이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개구리 남자의 귀환인 것일까.

 

", 도마 가쓰오의 심리와 악의에 질려버렸다는 애기군."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이제 와서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야."

와타세는 고테가와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니까 그런 짓을 하는 거야."   p.226

개구리 안에 폭죽을 넣어서 불을 붙여봤더니, 개구리가 불꽃놀이처럼 폭발했다. 뭐든지 녹인다고 하는 황산에 개구리를 넣어봤더니, 연기가 나고 개구리가 눈깜짝할 사이에 녹았다. 뭐든지 납작하게 만드는 전철은 굉장하다. 그래서 개구리를 선로에 떨어뜨려봤다.  등등.. 이번 작품에서도 개구리 남자의 잔혹한 살해 방법과 어린 아이가 쓴 듯한 유치하고 투박한 범행성명서는 여전 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단지 이름만으로 벌어지는 무자비한 연쇄 살인에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로 인해 혼란에 휩싸인다.

와타세 경부 시리즈와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가 각각 별도로 있지만, '개구리 남자' 시리즈에서도 이들이 수사의 주체와 관계자로 등장해 캐릭터들의 매력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확실한 캐릭터를 여럿 가지고 있는 작가이고, 각각의 시리즈도 완성도 있고 재미있지만, 이렇게 캐릭터들이 전혀 다른 작품에서 만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 팬들에게 색다른 즐거움도 주고 있다. 전작에서 제기했던 문제인과연 심신상실자에게는 죄를 물을 수 없는가’에 대한 주제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 지고 있고, 후반부에 등장하는 기막힌 반전과 끝나지 않는 결말의 놀라움까지 페이지 터너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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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서울대학교 최고의 ‘죽음’ 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1
유성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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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사망한 사람의 경우에 타살을 의심하지 않더라도 그 적확한 사망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나 역시 부검할 때 자살자와 사망 원인이 불명했던 경우가 굉장히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이와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자살자를 왜 부검하는지 궁금해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타살의 의혹이 없는지 정확히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나는 월요일마다 죽은 자들을 만나러 간다.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나는 죽어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p.27

10월의 어느 밤, 생후 11개월 된 아이가 의식을 잃은 상태로 응급실로 급히 후송된다. 아이는 여러 검사를 거친 뒤에 경막하출혈로 진단이 되었는데, 담당 의사는 의아해했다. 넘어져 땅에 머리를 부딪치거나 벽에 머리를 굉장히 세게 박을 경우 생기는 경막하출혈은 키가 작은 어린 아이에게는 자주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엄마는 눈 주위가 벌겋게 충혈된 채 말한다. 아까 오전에 보행기 없이 걷다가 넘어져서 울기는 했는데, 그것 말고는 어디에서 떨어지거나 하는 등의 사고는 없었다고. 머릿속 출혈을 제거하기 위해 응급 수술이 진행되었지만, 아이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며칠 후 사망했다. 이제 의사가 사인 란에 '병사'라고 적으면 그대로 장례가 진행되고, 아이의 미심쩍은 사망 원인에 대해선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담당 의사는 뭔가 석연치가 않았고, 사인을 '외인사'로 적었다. 절차에 따라 병원 행정실에서 경찰에 신고했고, 검사는 부검을 지시했다. 엄마와 아빠는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부검은 진행되었고 추락 또는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경우로 보인다는 소견으로 아이 엄마를 취조해 자백을 받아 낸다. 어쩔 수 없는 결혼과 원하지 않는 아이로 인해 벌어진 비극이었다.

법의학자들은 아이의 시신을 검사할 경우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고 한다. 죽은 아이가 끝내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증거 없는 살인에서도, 완벽하게 사고사로 보이는 시신에서도, 전혀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사건에서도 법의학자들은 숨겨진 죽음의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법의학자는 매일 죽음을 마주하는 직업이다. 그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늘 고민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법의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죽음은 어떤 것인지 다양한 사례와 경험들을 소개하며, 모호하고 두렵기만 했던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시하고 있다.

 

법의학자로서 특별히 죽음과 인연 깊은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인연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아닌 삶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도인은 아니지만 죽음을 생각하고 살피고 돌아보는 과정에서 삶의 경건함과 소중함이 더욱더 절실해지는 것이다. 더 나아가 법의학자로서 우리 사회에 죽음을 숙고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그래야 우리들 삶이 행복해지겠다는 깨달음 아닌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이다.   p.166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각 분야 최고의 서울대 교수진들은 2017년 여름부터서가명강이라는 이름으로 매월 다른 주제의 강의를 펼쳤으며, 매회 약 100여 명의 청중들은 명강의의 향연에 감동하고 열광했다. 이 배움의 현장을 책으로 옮긴 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시리즈 그 첫 번째 작품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의 교수이자,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자문을 담당하고 있는 유성호 교수의 교양강의를 바탕으로 한 책이다. 서울대 학생들이 듣는 인기 강의를 일반인들도 듣고 배울 수 있다는 것으로도 궁금증을 유발시키지만, 법의학자의 예리한 시선과 인문학적 통찰로 풀어낸 죽음 지침서라는 점에 있어서도 매력적인 책이다.

이 책은 법의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에서 시작해서, 실제 사건에 대한 사례를 통해 법의학이 진실을 밝히게 되는 과정을 들려주고, 법의학의 전문 지식 등도 포함해 죽음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주고 있다. 범죄를 포함한 죽음의 사회적 현상, 그리고 죽음의 역사적 맥락 및 인식의 변화, 현재 사회 병리학적 현상으로 여겨지는 사라 등의 문제와 의료 분쟁, 보험 사고 등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이슈를 만나볼 수 있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의 삶이 있고 100가지의 죽음이 있다. 저자는 말한다. 나만의 고유성은 죽음에서도 발휘되어야 한다고. 죽음과 친숙한 삶이야말로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죽음으로 삶을 묻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이 책을 읽고 보니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어떠한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의미가 깊어질 거라고 나 역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현재 우리의 삶을 위해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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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9-02-07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 엄청 기대됩니다. 요새 온라인 서점 핫한 책에 이 책 계속 올라오더라고요. 멋진 리뷰를 정성들인 사진과 함께 읽으니 더욱 독서욕구 자극받습니다.

피오나 2019-02-07 22:28   좋아요 0 | URL
ㅎㅎ 그죠? 저도 라인업을 보니 앞으로 이어질 서가명강 시리즈가 모두 궁금해지더라고요. ^^
 
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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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 이후의 이야기, 어느 해 여름에서 겨울까지의 이야기다. 베어타운과 그 옆 마을 헤드의 이야기, 두 하키팀 간의 경쟁이 돈과 권력과 생존을 둘러싼 광기 어린 다툼으로 번진 이야기다. 하키장과 그 주변에서 두근대는 모든 심장의 이야기, 인간과 스포츠와 그 둘이 어떤 식으로 번갈아 가며 서로를 책임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의 이야기, 꿈을 꾸고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 중 몇 명은 사랑에 빠질 테고 나머지는 짓밟힐 테고, 좋은 날도 있을 테고 아주 궂은 날도 있을 것이다. 이 마을은 환희를 느낄 테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타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끔찍한 충돌이 벌어질 것이다.   p.15

해마다 점점 일자리가 사라지고, 인구도 줄고, 매 계절마다 숲이 혜가를 집어삼키는 조그만 도시 베어타운, 그 곳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아이스 하키라는 스포츠에 대한 사랑이었다. 주목할 만한 게 거의 없는 곳이지만 이곳이 하키 타운이라는 것만은 모든 주민들의 자랑이자 그들을 유일하게 흥분시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들에게 도시의 경제와 자존심과 주민들의 생존이 걸려 있던, 청소년 하키팀의 준결승을 앞두고 무슨 일이 벌어진다. 그들은 결승전까지 진출했지만 그 경기를 가장 뛰어난 스타플레이어 없이 치러야 했고, 그래서 아깝게 패배했다. 하키팀의 스타였던 남학생이 여학생을 성폭행했기 때문이다. 팀의 에이스였던 케빈은 하키팀 단장의 딸인 마야를 성폭행한 걸로 조사를 받았지만 경찰 측에서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했기에 그냥 풀려 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가해자인 케빈의 편을 들었고, 피해자인 마야를 비난했고, 그녀의 아버지를 하키단 단장직에서 해고하려고 했다. 그때 사건 당시 그 집에 있었던 증인이 등장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경찰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마을은 침묵했고, 어른들은 마야를 도우러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밤에 무슨 일인가가 벌어진다. 그것이 전작인 <베어타운>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나는 그 뒤로 이들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을 지 매우 궁금했다. 비극이든 해피엔딩이든 간에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모든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 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내게 <베어타운>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라도 페이지 바깥으로 뚜벅뚜벅 그들이 걸어 나오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들에게 마음을 고스란히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어타운에서 벌어진 그 비극이 너무도 가슴 아팠고, 먹먹했고,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프레드릭 배크만은 마지막 장면이 시작하기 전에 십 년 뒤 누군가는 프로 선수로 활약할 지도, 누군가는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었을 지도, 또 누군가는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슬쩍 흘렸으니, 나는 너무도 이 작품의 후속작이 기다려졌다.

 

벤이는 숲의 다른 쪽을 혼자 달리고 있다. 몇 년 동안 쌓은 무수한 훈련을 토대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는다. 그는 그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어린애들이나 거저 이루어지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예를 들면 단짝 친구가 늘 곁에 있는 것.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원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제 벤이에게는 그 어떤 것도 거저 이루어지지 않기에 그는 뇌에서 산소를 달라고 헐떡이고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때까지 숲 속 더 깊숙한 곳을 향해 계속 달린다. 그러다 나무 위로 올라간다. 거기서 바람이 불길 기다린다.   p.90

<우리와 당신들>은 바로 그 <베어타운>에서 벌어졌던 비극 이후 겨우 두어 달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한다. 전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벌어졌던 그 날 이후로, 갑자기 케빈이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고, 그가 정신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번지는가 싶더니, 어느 날 아침, 그와 그의 가족이 아무 소리 없이 마을을 떠난다. 하지만 이걸로 다시 평화가 찾아오게 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항상 복잡한 진실보다 단순한 거짓을 선택하곤 하니 말이다. 진실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면 거짓은 쉽게 믿을 수만 있으면 된다. 사건 이후 케빈의 아버지는 아들의 소속 팀을 베어타운에서 헤드로 바꿨고, 코치와 후원사와 우수한 선수들을 거의 모두 설득해 함께 데려갔다. 베어타운 아이스하키단이 없어진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고, 사건 당시 사람들 앞에서 증언을 했던 하키 신동 아맛도, 케빈의 단짝이었지만 우정을 버리고 마야의 편을 들었던 벤이도, 이제 더 이상 하키를 할 수 없게 된다. 마야와 그녀의 동생 레오를 향한 사람들의 증오는 커지고, 하키단이 사라지면서 인생 전체가 사라져 버린 페테르는 절망한다. 과연 이 지독한 비극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지, 이야기는 전편보다 더 묵직하고, 먹먹하게 펼쳐진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오베라는 남자> <브릿마리 여기있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에> 등의 작품을 모두 읽었고 좋아했지만, 사실 이제 그의 대표작은 바로 <베어타운>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두 번째 이야기인 <우리와 당신들>을 읽고 나니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 입에 척척 달라붙는 음식처럼 눈에 쏙쏙 들어오는 묘사들,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노련한 구성과 스토리의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삶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이 아름답고 우아한 문장들로 완벽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일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럴 리 없다. 속으로는 우리도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것을. 우리의 잘못이라는 것을.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은 좋은 사람인 동시에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인 동시에 나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은 삶의 많은 순간들이 선과 악, 옳고 그름으로 분명하게 나눌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현실은 흑과 백보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다른 색들로 훨씬 더 많이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원제인 '우리 대 당신들'처럼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고 편가르기를 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작품은 그저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고 용기를 낸 어느 조그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읽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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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9-01-31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어타운의 뒷 이야기네요. 기대됩니다!

피오나 2019-02-06 23:02   좋아요 0 | URL
ㅎㅎ 베어타운을 읽으셨다면 꼭 만나 보시길! 전편 못지 않은 흥미진진한 작품이었어요 ^^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
야마구치 슈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초당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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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같이 분업이 표준화된 사회에서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각조차 못 한 채 거대한 악행에 가담하고 있기 쉽다. 수많은 기업에서 행하고 있는 은폐와 위장은 바로 분업에 의해 가능했다. 이러한 행위를 막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떠한 체계에 속해 있는지, 자신이 하고 있는 눈앞의 일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짚어 보고 공간적, 혹은 시간적으로 큰 테두리 안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p.122

우리는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집에서는 세상 다정한 아빠가 회사에서는 부하들에게 엄하고 무서운 상사가 될 수도 있다. 애인에게는 너무도 상냥한 사람이 엄마와 통화할 때는 퉁명스럽게 짜증만 낼 수도 있고, 학교에서는 매사 똑 부러지고 성실한 사람이 친구들 사이에서는 덤벙거리고 실수투성이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소속된 회사나 학교, 가정, 친구관계 또는 동호회나 사교 모임 등과 같은 여러 커뮤니티 속에서 다양한 입장과 역할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반드시 일관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인격을 유지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인격 가운데서 외부와 접촉하는 외적 인격을 페르소나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융은 실제 자신의 모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가면이 페르소나라며, 이를 개인과 사회적 집합체 사이에서 맺어지는 일종의 타협이라고 정의했다. 가정과 직장, 그리고 개인이라는 세 가지의 인격 요소에 대한 융의 이론을 이렇게 현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 받는 컨설턴트인 야마구치 슈는 철학이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학문이라는 말을 강하게 부정한다. 그리하여 난해하거나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빼고, 바로 지금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문제와 그 해결책에 주목한다. 현실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철학 개념으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 있어서 이 책은 매우 쉽고, 흥미진진하다. 일과 삶의 모든 과제를 철학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안이하게 궁극의 이상으로 내건 '공정하고 공평한 평가'는 정말로 바람직한 것일까? 그 이상이 실현되었음에도 '당신은 뒤쳐져 있다'고 평가 받는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직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그러한 사회와 조직은 정말로 우리에게 이상적인 것일까? 공정이라는 개념을 절대적인 선으로 받들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p.249

이 책은 철학자들이 남긴 다양한 개념들을 사람, 조직, 사회, 사고라는 네 가지 컨셉에 따라 정리하고 있다. 타인과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에 관해 통찰하게 하는 '사람', 집단에 속한 인간이 보이는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조직', 사회의 성립 과정과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사회', 그리고 모든 일을 깊고 예리하게 고찰하기 위한 돌파구를 마련해 주는 '사고' 항목이다. 이미 철학에 관련된 입문서들이 꽤 많이 출간되어 있지만, 그 책들과는 다르게 이 책은 철학 사상의 중요성보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실용성을 토대로 쓰여진 점이다. 저자는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 중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 만을 기준으로 평가해 담았다고 말한다. 그러한 핵심적인 철학 사상 외에 경제학, 문화인류학, 심리학, 언어학에 관한 내용도 다루고 있어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 또한 프로세스에서 배울 점은 풍부하지만 아웃풋에서는 배울 게 거의 없다는 점만 보아도, 이 책이 지향하는 바는 명백하다. 현대 사회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고, 현실의 쓸모에 기초한 철학적 사고법이라고 하니, 어느 자기계발서나 인문서 못지 않게 실용적인 책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철학이라는 것이 실생활에 전혀 쓸모 없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삶 가까이에 선명하고 확실한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철학을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철학이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알게 된다면, 이제부터 철학이 당신의 경쟁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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