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을 보면 밖을 보면 웅진 모두의 그림책 18
안느-마르고 램스타인.마티아스 아르귀 지음 / 웅진주니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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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가 여행을 떠났을 때, 그곳이 도시라면 항상 야경을 보고 온다.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들로 수 놓인 빌딩숲은 낭만적인 야경을 만들어 너무도 아름답다. 여행지에는 아예 야경 투어나 야경을 볼 수 있는 관광지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밤의 경치는 그렇게 그림처럼 예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그 풍경들은 천차 만별일 것이다. 화려한 조명의 빌딩숲에는 야근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다크 서클이 내려 앉은 직장인들이 가득할 지도 모르고, 고층 아파트의 집들엔 화목한 가정도 있겠지만, 다툼을 하거나, 서로를 미워하거나, 혹은 각자 자신의 방에서 고독해하는 사람들 등 여러 모습일 테니 말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바로 그렇게 여러 대상의 안과 밖 풍경을 번갈아 보여 주며 한쪽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현상의 이면을 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어,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 책은 웅진 모두의 그림책 18권으로, 2015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 작가 안느-마르고 램스타인 & 마티아스 아르귀 듀오의 작품이다. 제목과 표지에서부터 작품 의도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데, '안을 보는' 것과 '밖을 보는' 것은 마치 거울의 이면처럼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글자도 거꾸로 쓰여져 있고, 표지 앞면의 그림과 뒷면의 그림이 안에서 보는 풍경과 밖에서 보는 풍경을 각각 보여주고 있다.

안에서 보면 깎아 지른 절벽 위에 있는 성 주변으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 하지만 밖에서 보면 이는 스노우볼 안에 있는 미니어처 장식이다.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는 작가의 말이 책을 읽는 동안 누군가의 ''을 들여다보도록 했었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잘 차려입은 여인이 강가로 피크닉을 와서는 사과를 베어 먹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안에서 보면 잘 익은 빨간 빛깔의 먹음직스러운 사과 내부는 이미 애벌레가 다 파먹은 상황이다. 안에서 보면 운전자의 시선으로 멋진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데, 밖에서 보면 운전자의 차 뒤로 차들이 줄지어 길게 늘어서 있는 정체 상황이다. 이런 식으로 이 그림책은 안과 밖의 풍경과 그 온도차이를 보여 주면서 세상의 다양한 이면을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물 안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개구리처럼, 살다 보면 바깥세상의 형편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경험이 적어서 보고 들은 게 별로 없어서 일수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편협한 시각으로 한쪽 방향만 바라보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바로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하다. 그림책은 아이들만 보는 거 아니냐고? 천만에. 이런 그림책은 어른들에게도 마법처럼 특별한 시간을 선사한다. 바로 우리가 잊어버리고 사는 세상 혹은 계속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놀라운 상상력을 선물하는 그림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광산, 들판, 바다 등 드넓은 자연 세계는 물론 <미운 오리 새끼> <라푼젤> 등 고전 동화까지 경계 없이 넘나들며 세상 곳곳의 안과 밖을 보여 준다. 명암을 생략한 채색과 본질적 형태를 강조한 형상으로 이미지를 그려내는 작가들의 작품이라 이야기가 없어도 이미지만으로 서사를 만들어 낸다. 대상의 안과 밖 풍경이 만날 때 비로소 탄생하는 마법 같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반복되는 일상에서 매일 같은 일만 하다가 머리가 굳어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면, 아이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선을 가르쳐주어 상상력을 키워주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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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코노히 2 - 시무룩 고양이
큐라이스 지음, 손나영 옮김 / 재미주의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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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떴다 하면 수많은 리트윗과 하트 세례를 받는 일본에서 지금 가장 핫한 고양이네코노히'의 단행본, 드디어 2권이 출간되었다. 고양이 네코노히가 그려내는 일상 속 소소한 실패들이 내 얘기 같아서 깔깔 대고 웃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었는데,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또 어떤 에피소드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뚱뚱하고 소심한 고양이네코노히의 시무룩한 표정이 매력인 네 컷 만화로 대사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마다 공감! 을 외치게 되는 너무 재미있는 책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다. 네코노히와는 일상의 모든 순간이 극과 극으로 다른, 럭셔리한 토끼님 되시겠다. 네코노히가 아침으로 토스트를 먹을 때, 토끼는 풀 코스로 차려주는 식사를 하고, 네코노히가 일반 칫솔로 양치를 할때, 토끼는 전동 칫솔을 사용하고, 네코노히는 만원 지하철에서 사람들 틈에 끼여 있을 때, 토끼는 넓은 전용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는 식이다. 일반인과 귀족 신분처럼 비교 되는 이들이 같은 장소에서 만난다. 매직쇼 간판과 모자 속에서 나오는 토끼의 모습이 그려진 포스터를 보니 그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하얀 토끼가 1권 마지막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바로 그 토끼였던 것이다. 그때는 마술 장면에서 잠깐 등장해 모자 속에서 짜잔. 하고 등장했었는데, 2권에서는 에피소드의 시작과 끝을 같이 하고, 중간 중간 자주 등장해 재미를 더해준다.

 

 

시무룩 고양이 네코노히의 스토리는 우리가 흔히 겪는 일상 속 소소한 실패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관에 갔는데 하필 앞자리에 덩치 큰 사람이 앉아서 시야를 다 가린다거나, 너무 뜨거운 음식을 기대하며 먹다가 입천장을 다 덴다거나, 음식점 메뉴판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주문을 했는데, 실물은 애걔..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비주얼이었다던가, 모처럼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마음 먹은 날 비가 쏟아져서 그 핑계로 집에서 그냥 간식만 먹었다든지 하는 그런 순간들.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마치 내 얘기 같은 그런 이야기들이다.

 

 

 

뭐 이리 간단한 일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지 화가 나거나, 혹은 어이없어 헛웃음 짓게 되는 그런 상황들이 이 책 속에 가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 너무 열심히 하는 네코노히 덕분에 괜찮아, 이번에는 꼭 성공해서 'SUCCESS'라고 외칠 수 있을 거야. 라고 응원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고양이의 삶도 이런데 우리 인생도 소소한 실패에 연연하지 말자는 생각도 슬슬 하게 된다. 되는 일 없어 세상 억울한 네코노히의 석세스 도전기가 긍정 마인드를 심어 주는 것이다.

 

이 작품은 보통의 네 컷 만화들과는 다르게 짧은 네 컷 안에서 대사라고 할 만한 것은 의성어, 의태어 정도 밖에 없다. 대사 없이 상황에 대한 모든 것을 단 네 컷의 그림 안에 다 표현해내고 있어, 한번 읽기 시작하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멈출 수가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물론 그 속에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네코노히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우리를 힐링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고, 2권에서는 네코노히와는 상반된 매력으로 이야기에 재미를 더해주는 하얀 토끼가 활약하고 있으니 꼭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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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모르는 여자가 말을 건다 앗코짱 시리즈 2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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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천재지변이 일어나 출근을 못 했으면 좋겠다. 아니, 조금이라도 회사에 늦게 도착하게 지하철이 연착하는 것도 괜찮다. 그러잖아도 이 노선은 출발 할 때 뛰어드는 사람이 많아서 운행시간보다 늦어지는 일이 잦았다. 모르는 누군가가 죽어도 상관없으니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될 정당한 이유가 생기길 바랐다. 그 바람이 최악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럼 차라리 자기가 선로에 뛰어들면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상사인 다카하시에게 야단맞지 않아도 된다.    p.11

회사에 가고 싶지 않다. 방금 출근했는데 퇴근하고 싶다. 갑자기 교통사고라도 나서 며칠 쉬면 좋겠다. 등등.. 이런 생각들 한번쯤 해보지 않은 직장인이 있을까. 27살 직장여성 아케미 역시 그랬다. 마지막 휴일이 언제였는지 이제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지쳐 있었다. 동기들은 몸과 마음을 다치고 하나 둘 그만두었고, 그 땜빵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입사 5년차가 된 참이었다. 아침마다 지하철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회사에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위잉, 하는 요란한 기계음이 나서 돌아보니 주스 판매대의 키 큰 여자가 초록색 액체를 믹서로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주스판매대 안쪽에 선 체격 큰 여성이 아케미를 부른다. 그리고는 너무도 당당한 모습으로 걸쭉한 녹색 액체 컵을 내민다.

"시금치랑 고마쓰나랑 사과 스무디예요. 무료 캠페인 중입니다. 마셔 봐요."

지하철이 도착한다는 방송이 울려 퍼지고, 다급한 마음과 얼떨결에 아케미는 음료를 마시는데, 쓸 뿐만 아니라 아린맛과 풋내에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고 만다. 그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이 정체모를 음료를 마셔 보라는 강압적인 상황은 반복되지만 아케미는 저항 한 번 못한다. 그렇게 화요일에는 당근과 망고 스무디, 수요일에는 적양배추와 거봉 스무디, 목요일에는 시금치, 셀러리, 멜론이 들어간 스무디 등을 반 강제로 먹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앗코짱의 반복되는 간섭을 통해서 평소 상사의 폭압적인 태도에도 성희롱에도 저항 한 번하지 못하며 자신의 감정을 죽여왔던 아케미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게 뭐야...."

도코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신음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느꼈지만, 이제 아무래도 좋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어째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거야."

놀랍게도 눅가가 뜨거워졌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몇몇 과거가 머리를 스치며, 이대로 웅크리고 싶어졌다. 이래서야 옛날과 다를 게 없다.    p.157

일본에서 출간 즉시 10만 부를 돌파했고, 출간 다음해 NHK의 드라마로 제작되는 등 앗코짱 신드롬을 일으켰던 '앗코짱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다. 전편이었던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에서 앗코짱은 소심한 파견직원 미치코와 일주일 점심 바꾸기를 통해 그녀의 성장을 도왔었다. 평소 함께 외식할 친구도 없고, 돈에 여유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제대로 된 외식을 거의 해본 적 없었던 미치코는 앗코짱이 남긴 메모와 지폐를 들고 식당을 찾아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며 음식을 먹는 경험을 했다. 언제나 수동적으로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던 삶의 태도가 조금씩 적극적으로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은 소소하지만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작품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모르는 여자가 말을 건다>에서는 아케미가 미치코의 역할을 하게 된다. 게다가 한층 성장한 미치코도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해 반갑기도 했다.

'소설계의 셰프'라 불리는 작가 유즈키 아사코 답게 이번 작품에서도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자주 등장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다양한 채소와 과일로 만든 색색깔의 스무디들과 두번째 에피소드에서 출장 티 서비스를 통해서 매력적인 애프터눈 티세트를 보여준다. 월요일에는 홍차 얼그레이와 쇼트 브레드, 화요일에는 홍차 다르질링과 오이 샌드위치, 수요일에는 우바 홍차에 우유를 넣은 밀크티와 빅토리아 샌드위치 케이크, 목요일에는 홍차 아삼과 스콘, 금요일에는 샴페인과 크리스마스 푸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일러스트로 해당 음식들이 페이지마다 삽입되어 있어 눈이 호강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누구에게나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매번 설레이고,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만 두고 싶은 직장을 참고 다니고, 지루한 학교 생활을 졸업을 위해 이어가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육아와 집안일 전쟁 속에서 매일을 버텨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렇게 일상을 견디는 사람들을 향한 응원 같은 책이다. 언제나 황당무계하고 꿈을 꾸는 것 같은 말만 하며, 고압적인 모습으로 자신감 넘치는 앗코짱이 세상에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대신 해야 할 말을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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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 히어로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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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래야만 한다. 스탤론 덕분에 그녀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리즈는 일어났다.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스튜디오의 현관문 열쇠를 쥔 손에 힘을 모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    p.26

리즈는 친구들과 함께 실베스터 스탤론의 영화 <록키3>를 관람한다. 영화에서 세계 챔피언으로 승승장구하던 록키는 자만심과 매너지즘에 빠져 무너지게 되는데, 모든 것을 잃고 쓰러질 뻔한 순간에 다시 혹독한 훈련을 재개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결국 타이틀을 되찾게 된다. 영화가 끝나고 남자 친구인 미셸과 친구 부부는 이 작품 보다 <록키1> <록키2>가 더 좋다고 말한다. 리즈는 두 작품 모두 보지 못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록키3>를 보고 나서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밖으로 나와 걷는 동안에도 영화에 삽입되었던 음악의 전주곡이 울리고, 스탤론이 샌드백을 치고, 뛰는 모습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고열에 시달리느라 병원에 출근하지 못했고, 기력이 회복되면서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록키 발보아처럼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다시없는 기회였다. 그녀는 중단했던 의과대학 공부를 다시 시작해,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 먹는다. 사실 그녀는 가장 힘든 예과 2년 과정을 마친 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집을 떠났었다. 집으로 돌아가 5년 전 공부하던 책들을 가져오고, 이번에도 인내심이 없어 중도에 포기할 거라고 말하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 친구와 헤어진다. 그리고 결국 몇 년 후 의사가 되고, 새로운 사랑인 장과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산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서 스탤론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자신의 히어로를 향한 리즈의 애정은 순수하면서도 엉뚱하고, 진지하면서도 유치하다. 스탤론의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한 그녀는 스탤론이 가난해지게 될 경우에 대비하여 그녀가 버는 돈의 10퍼센트를 저금하는 예금 계좌를 개설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가 웃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웃음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차츰 호흡을 가다듬었다. 리즈가 이런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스탤론. 어떻게 그런 생각을! 시치미를 뚝 떼고서. 그는 한순간도 아내가 성실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스탤론을 도와주기 위한 저금이라니!     p.54

엠마뉘엘 베르네임은 20년 동안 100쪽 남짓한 소설 다섯 편만 발표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작품은 '100페이지의 미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출간할 당시부터 너무 짧고, 너무 간결하고, 너무나 건조한 문체의 독특한 작품으로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던 작가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그가 발표했던 100쪽 남짓한 다섯 편의 소설 중 가장 마지막으로 발표된 것으로, 실제로 작가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은 1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으로 60여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책의 후반부에 <씨네21>의 이다혜 기자와 <코끼리는 안녕,>의 이종산 소설가가 작품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을 나눈 대담이 수록되어 있다. 대담의 내용만 40여 페이지이니, 이건 뭐 거의 작품의 분량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얘기이다.

여러 책에서 이다혜 기자의 추천사를 읽고, 팟캐스트를 통해서 그녀가 소개해주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그녀가 써낸 여러 에세이들을 읽어 왔기에, 특히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것 같다. 아마도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이다혜 기자와 이종산 소설가의 대담이 소설보다 더 재미있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이종산 소설가는 이 작품에 대해 '장식을 제거하고 골격만 남겨놓아도 소설이 되는구나, 충분히 많은 걸 느낄 수 있구나' 싶었다며 간결하다고 해서 어떤 요소가 빠진 게 아니라 모두 풍부하게 응축되어 살아있다고 말한다. 이다혜 기자는 베르네임의 장점이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에 어디서 얘기가 끝날지 짐작할 수 없다는 건데, 이 작품은 전작들에 비해 미묘하게 비관주의적인 태도가 사라지고 더 낙관적으로 변한 것 같아서, 전작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낯설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작품 외에도 작품 세계 전반을 아우르며 폭넓고 다양한 시각에서 흥미진진한 논의를 들려준다.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연애나 결혼과 같은 것일 테고, 또 누군가에는 작품 속 리즈처럼 나만의 히어로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히어로가 스크린 속 배우가 아니라 부모나 스승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만약 그날, 리즈가 <록키3>를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한 여자의 강한 의지와 인생을 바꾸는 최고의 덕질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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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프리다 웅진 세계그림책 189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공경희 옮김 / 웅진주니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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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책장에 꼭 한 권쯤은 있을 법한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이 아닐까 싶다.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매우 간결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그림들이 인상적인 작가이다. 그림책을 잘 모르는 누가 보더라도 앤서니 브라운 그림이라고 알아볼 수밖에 없는 그만의 독특한 색깔이 있는 작가로 유명하기도 하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앤서니 브라운이 멕시코를 여행하던 중 깊이 알게 된 예술가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여 지은 그림책이다. 프리다 칼로라니... 강렬하고 독특한 화풍만큼이나 매우 화려하고 연극적인 삶을 살았던 화가 아닌가. 앤서니 브라운과 프리다 칼로의 만남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질 지 너무 기대가 되었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아홉 달 동안 누워 지내야 했던 소녀는, 나은 후에도 다를 절며 걸어 다녀야 했다. 소녀는 친구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외톨이가 되었다. 자면서 종종 날아가는 꿈을 꿨던 소녀는 생일 선물로 날개를 받았고, 비행기가 아니라 실망했지만 마음을 감추려고 날개를 달아 본다. 창문에 입김으로 그림을 그렸더니 갑자기 문이 되었고, 소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본다. 그 순간만큼은 너무도 자유로웠다.

기운이 다 빠지도록 뛰고, 또 뛰다 보니 바로 앞에 목장이 있었고, 작은 문을 찾아 기어 들어갔더니.. 천천히 땅속 깊이깊이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밀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현실과 상상 속의 세계가 놀랍게 연결되고, 외로운 소녀는 상상 속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우정을 나누게 된다.

 

실제 프리다 칼로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었고,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십대에는 버스 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기도 하는 등 병마와 사고에 시달렸다. 그로 인해 내성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프리다는 소아마비를 앓는 동안 다리를 절지 않는 상상 속 친구를 만들고, 일기장에 이 친구와의 만남에 대해 적었다고 한다.

그녀는 사고로 인한 신체적 고통과 남편 리베라 때문에 겪게 된 사랑의 아픔을 극복하고자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했기 때문에 특히 자화상이 많다. 어린 시절 상상 속 친구를 기억하며 그린 작품도 있고, 독특하게도 두 명의 자신을 그린 <두 명의 프리다>라는 그림도 있었다. 프리다는 이 작품에 대해, 어릴 때 경험한 '마법 같은 우정'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앤서니 브라운은 바로 그 상상 속 친구를 만났던 프리다의 어린 시절에서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특히나 어린 시절에 겪어 내기 힘든 부분임에 틀림없다. 다르다는 것이 틀리다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가진 편견은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병마와 사고, 곱지 않은 세간의 시선과 외로움을 일상처럼 견뎌온 어린 소녀는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런 소녀를 버티게 한 것은 바로 마법 같은 우정이었다. 비록 그것이 상상 속의 친구였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누구나 마음 속에 이런 친구 한 명쯤 가져본 적 있지 않을까. 내가 외로울 때마다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을 들어줄 수 있는, 언제든 부르면 대답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 말이다.

프리다 칼로의 잔잔한 고백과 그녀의 예술에 매료된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초월적 교감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동화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뭉클한, 그리고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앤서니 브라운만의 색깔로 재 탄생한 그림을 만나보는 놀라운 경험도 해볼 수 있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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