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짓말 마틴 베너 시리즈
크리스티나 올손 지음, 장여정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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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을 내리고 전부 다시 상자에 넣은 후 내 방으로 상자를 들고 갔다. 아마도 일기장에서 손을 못 뗄 것 같다. 잠들 때까지 이걸 읽고 있겠지.

그럼 결국 토요일은 놀기보다 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말했듯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으니까.

내가 정말 지금 진지하게 죽은 사람을 변호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p.72~73

 

스톡홀름에 사는 변호사 마틴 베너에게 어느 날 바비라는 남자가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의 여동생을 도와달라고, 동생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바비의 동생은 6개월 전에 죽었고, 나쁜 놈들이 가짜 혐의를 씌워서 동생 인생을 망가뜨렸다고 한다. 그러니 죽은 여동생 사라 텔의 누명을 벗겨달라는 거였다. 게다가 그녀는 바로 다섯 건의 살인을 자백한 후 감독하에 특별 외출을 나갔다가 도주해 공판일 하루 전날 자살한 그 여자, 심각한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던 사라 텍사스였다. 바비는 당연히 못 하겠다고 두 손을 들어 보인다. 동생분이 무죄라는 증거를 갖고 있다면 경찰서로 가라고. 자신은 변호사지 사건 수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녀가 죽기 몇 달 전, 신문은 사라 텍사스에 관한 기사로 도배가 됐었다. 인형 같은 얼굴의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 연쇄살인범이었으니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죽었고, 마틴은 사설탐정이 아니라 변호사였다. 대체 무슨 수로 죽은 여자의 결백을 증명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스스로 자백했고, 무죄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사건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도사리고 있었다. 대체 왜 아무도 캐묻지 않을 세 건의 살인 범행을 자백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목격자도 없었고, 지문 등 현장 증거도 없었던 터라 그녀가 혐의를 스스로 인정하고 직접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면 아마 유죄 판결을 받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어디서 찾아내야 할진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었고, 마틴은 그게 계속 신경이 쓰여 결국 그 사건에 대한 비공식적 조사를 시작하게 된다.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묻는다. 내가 알았어야 했나? 우리가 깨달았어야 했나? 답은 분명하다. 당연히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었는지는 지금 돌이켜봐도 모르겠다.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 혐의로 기소될 위기에 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덫에 빠졌을 때 뒤따르는 결과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멈추지 않았다. 한치 앞도 모르고. 이미 균열은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고, 나는 그것도 모른 채 폼페이와 같은 운명에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었다.   p.345~346

 

스웨덴에서만 25만 부, 전 세계 320만 부 판매를 기록한 "스웨덴 범죄소설의 여왕" 크리스티나 올손의 작품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데, 대체 왜 이제야 출간되었나 싶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북유럽 누아르, 스웨덴 범죄소설의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못지 않는 스케일과 가독성, 강렬한 스토리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마틴 베너라는 인물도 꽤나 독특한 캐릭터인데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자를 꼬여낼 수 있는 바람둥이 흑인 변호사이다. 그는 네 살 난 딸을 키우고 있는데, 동생과 매제가 비행기 사고로 죽고 맡아줄 친척이 없어 위탁아동으로 가게 되자 자신이 키우겠다고 나선 거였다. 시니컬하고 잘나가는 변호사이지만, 알고 보면 가슴 따뜻한 남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마틴의 1인칭 시점으로 스토리가 진행되기 때문에 그가 삶에 대해 생각하는 통찰력이 고스란히 드러나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피의자의 자살로 이미 종결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마틴은 점점 더 혼란스럽다. 내가 자처해서 바보가 되는 길을 택한 건지, 알고 보니 결국 실체도 없는 유령을 좇고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그는 범죄 용의자로 몰리게 되고, 그의 삶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고, 주인공 마틴의 독특한 매력 역시 이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를 고대하게 만들어 준다. 스웨덴 범죄소설 작가들을 유독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정말 뛰어난 작가들이 많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마이 셰발,페르 발뢰, 밀레니엄 시리즈의 스티그 라르손, 발란데르 시리즈의 헤닝 만켈에 이어 크리스티나 올손도 그러한 명맥을 이어가는 범죄소설계의 거장임에 분명하다. 그녀의 작품들이 더 많이 국내에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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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9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지음, 천은실 그림, 정지현 옮김 / 인디고(글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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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는 가만가만 작은 사과나무로 다가가 새를 올려다보았다.

"나랑 친구가 되어 줄래? ?"

메리는 마치 사람에게 하듯이 새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의 거친 목소리도 아니었고 인도에서 하던 대로 거만한 말투도 아니었다. 너무 부드럽고 간절하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여서 벤 웨더 스타프 노인은 메리가 자신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놀란 것만큼이나 깜짝 놀랐다.   p.66

조그맣고 야윈 얼굴에 역시 조그맣고 야윈 몸, 숱이 적은 머리, 심술궂은 표정의 메리는 일하느라 늘 바쁜 데다 병치레가 잦은 아버지와 굉장한 미인이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파티에만 관심이 있던 어머니에게서 전혀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랐다. 메리의 어머니는 딸을 원치 않았고, 메리가 태어나자마자 유모에게 맡겨 버리고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메리는 병약하고 짜증 많고 못생긴 아기일 적부터 되도록 부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어야 했고, 아이가 울면 마담이 화를 냈기 때문에 하인들은 메리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었다. 그 결과 메리는 이미 여섯 살 무렵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을 만큼 이기적인 폭군이 되어 있었다.

메리가 아홉 살쯤 되던 해, 지독하게 더운 어느 날 아침 인도에 콜레라가 발병해서 사람들이 파리 떼처럼 죽어 갔고, 메리의 부모도, 하인들도 모두 죽고, 남은 이들은 겁에 질려 도망쳤다. 혼자 남겨진 메리는 영국에 있는 고모부 댁에서 살게 된다. 메리가 살게 된 그 저택은 지어진 지 600년이나 되었고, 황무지 끝에 있었으며, 방이 100개쯤 되지만 대부분은 문이 잠겨 있는 곳이었다. 저택을 둘러싼 커다란 정원과 뜰도 있고, 그림이나 오래된 훌륭한 가구도 많은 대저택이었다. 고모부는 등이 굽었고, 성격이 괴상했으며, 아내가 죽고 나서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고 더 괴상해졌다고 했다.

하녀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옷을 입어 본 적도 없고, 누군가를 배려하거나, 걱정하거나, 좋아해본 적도 없었던 심술쟁이 소녀 메리는 그 곳에서 수다쟁이 하녀 마사와 그녀의 동생 디콘을 만나면서 조금씩 달라져 간다. 우연히 돌아가신 고모가 아끼던 비밀의 뜰을 발견하게 되고, 꽃을 가꾸며 동물들과도 친해지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조금씩 배워 나가게 된 것이다.

하늘이 다시 파랗게 돌아온 날 아침, 메리는 일찍 잠에서 깼다. 블라인드 사이로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즐거워서 메리는 얼른 창가로 달려갔다.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문을 열자 신선하고 향긋한 바람이 불어왔다. 황무지는 파란색이었고 온 세상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새들이 콘서트를 위해 음을 맞추는 듯 여기저기에서 부드럽고 조그만 지저귐이 들려왔다. 메리는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햇살을 매만졌다.   p.233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 심술궂고 버릇없었던 메리와 어릴 때부터 병약해 곧 죽을 거라며 두려움에 떨던 콜린, 그리고 동물들과 이야기할 줄 아는 디콘까지..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며 조금씩 달라져 가는 모습과 버려진 뜰에 나타나는 마법 같은 변화들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그려지고 있는 작품이다. 부드러운 햇살, 신선한 공기와 따스한 바람, 연둣빛 새싹, 향긋한 꽃송이, 새들의 노랫소리들이 그림 같은 언어들과 아름다운 일러스트들과 만나서 정말 마법이 시작되는 것처럼 봄이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아홉 번째 책이다. 클래식한 패턴의 고혹적인 표지와 기존보다 훨씬 더 커진 판형으로 가독성을 높여 주었다. 소장용으로도, 선물용으로도 제격인 책이 아닐까 싶다.

<피노키오>, <백설공주> 등에서 아름다운 색감과 꿈꾸는 듯한 감각적인 일러스트를 선보였던 천은실 작가의 그림들로 인해 10년간 닫혀 있던 비밀스러운 뜰에 화사한 봄이 열리는 모습이 더욱 매력적으로 재탄생되었다. 푸릇푸릇한 초록 색감의 표지부터 페이지 곳곳을 채우고 있는 산뜻한 일러스트들이 지금 이 계절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그리고 바로 그 아름다운 일러스트들 때문에 어른이 되어 다시 이 작품을 읽더라도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힐링하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해주는 것 같다.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는 예전 버전으로 다 소장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리커버북 시리즈의 고급스러운 표지와 판형이 훨씬 더 마음에 들어 소장 욕구를 마구 불러 일으킨다. 페이지 가득한 봄의 마법을 느껴보고 싶다면, 고전 명작을 오래도록 소장하고 싶다면, 소중한 사람에게 마음을 선물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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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하유지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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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버지가 영오를 무릎으로 밀어내며 화를 냈다. 정신 사납게, 저리가! 영오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 뒤로는 아버지 가까이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앉아 있든, 서 있든. 그날 아버지는 피곤했거나 일터에서 모욕을 당했거나 친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을 것이다. 아니면 몸이 아팠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있든 없든, 많든 적든, 별것 아닌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일이 가시처럼 기억에 박히기도 한다. 어떤 틈은 희미한 실금에서부터 벌어지고, 어떤 관계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죄목만으로도 망가진다.  p.69

새해를 맞이하는 순간에도 어김없이 야근 중인 참고서 편집자 영오,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나 이마에 붙인 상처 얘기가 나와 며칠 전 아버지가 살던 곳을 찾아갔던 일을 떠올린다. 엄마는 사 년 전에 폐암으로 돌아가셨고, 엄마를 간호하는 동안 몇 안 되는 친구들과도 멀어졌었다. 외가든 친가든 드문드문하던 친척들과의 왕래마저 끊겼고, 지난 가을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을 때 빈소에는 영오 혼자였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 소원해져, 사 년 동안 예닐곱 번쯤 만난 정도가 다였다. 갈 때마다 아버지는 중학교 경비실에서 근무 중이었고,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외동딸이 와도 왔냐 소리도 제대로 않는 아버지를 보며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였다. 그리고 며칠 전 아버지가 살던 곳의 집주인 연락을 받고 월세 보증금 천만 원과 밥솥 하나를 아버지의 유품으로 받아 왔다.

아버지가 남긴 밥솥에는 얇은 수첩이 하나 들어 있었다. 수첩의 앞 두어 장은 백지였고, 세 번 째 장에 크고 비뚜름한 글씨로 '영오에게'라고 써 있었다. 그 아래 세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가 기재되어 있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빚쟁이들인가 싶었지만, 아버지에겐 빚이 없었다. 아버지의 휴대폰에도 수첩 속 인물들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 이름 중 하나인 홍강주라는 사람에게 전화가 와 그를 만나게 되고, 그가 아버지가 경비원으로 일했던 학교의 수학 교사라는 걸 알게 된다. 영오는 그와 함께 나머지 두 명을 찾아 나서게 된다. 아버지는 영오에게 대체 왜 이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남긴 것일까.

 

강주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작년에 자살한 학생. 살아 있었다면 이번에 졸업이죠. 내가 가르친 애는 아니에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 녀석. 다들 쉽게 말하지만....."

택시가 우회전했다. 거리가 밝아지면서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차들의 속도도 빨라졌다. 모퉁이 하나로 다른 세상에 들어선 듯했다. 영오는 달라진 세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알겠어요. 사람들은 몰라요. 아무도, 아무것도."   p.150

이야기는 참고서 편집자인 영오가 죽은 아버지가 남긴 수첩에 적힌 세 사람을 찾아 나서는 여정과 영오가 일하는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질문을 퍼붓는 열일곱 소녀 미지의 사연으로 진행된다.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미지와 회사에서 잘린 아빠는 집에서 쫓겨난다. 그들이 예전에 살던 아파트를 팔지도 않고 세를 놓지도 않은 상태로 두었던 터라, 엄마에게 쫓겨난 부녀는 당분간 예전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엄마가 치킨 집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충분했지만, 백수 남편이든 백수 딸이든 안 된다는 엄마는 나가서 정신을 차리든가 속을 차리든가 하라고 했다. 옆집에는 성격이 괴팍한 할아버지가 고양이를 키우며 살고 있었고, 미지는 버찌라는 고양이와 친해지며 할아버지와도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이 작품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세상과의 관계가 서투르다. 하지만 각자 어떤 계기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닫힌 마음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서게 된다. 이제 서른 셋이 된 영오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넌 정말 개떡 같은 책이야.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어.'라고. 그렇지만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여기서 다치고, 저기서 넘어지고, 삶의 길목마다, 일상의 고비마다 상처를 받고, 흉터를 만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서른세 살 영오와 열일곱 살 미지가 살아가는 녹록하지 않은 삶의 여정들이 공감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이 역시나 뭔가 부족한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삶을 채워가는 이야기는 담백하게 유머스럽고 가볍게 진행되고 있지만, 분명 어딘가 뭉클한 지점이 있다. 그건 바로 이들의 이야기가 나와 당신의 그것이기도 해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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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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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하나 상자 속 나라에는 손을 댈 수 없다. 상자 밖은 무방비다. '죽음'도 존재한다 어린 시절, 아득히 멀리에 있던 그것은 점점 가까워진다.

삼촌이 세상을 떠나고 이불 속 유해를 마주했을 때, 한순간 무서웠다. 그러나 깨끗이 닦고 관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니, 무언가가 훅하고 바뀌었다.

유해는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두려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안도였다.   p.46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보니, 이제는 안다. 아주 오래 마음에 남아있게 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아주 보통의 어떤 날이라는 것을. 그저 스쳐 지나갔던 일상의 수많은 날들 중에 어느 한 순간이 오래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남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한해, 한해 나이를 먹을 수록 조금씩 더 좋아지는 것이 바로 마스다 미리의 작품이다. 사실 마스다 미리의 작품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에 굉장히 특별한 사건이나, 엄청난 감정의 변화를 겪게 만드는 일들은 없다. 그녀는 그저 지극히 평범하고도 사소한 일상의 모든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시간들 속에서 위로 받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당신의 하루 또한 절대 별 볼 일 없지 않다고, 일상의 수많은 그 순간들이 쌓여 당신이라는 세계를 만들어 간다고, 그러니 당신의 오늘은 너무도 소중한 시간들이라고 말이다.

그녀의 만화를 읽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진 적이 있었다. <오늘의 인생>이라는 작품이었는데, 원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시선을 사로 잡는 표지처럼 따뜻하고 활기차고 기분좋은 작품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작품이 나온 그 즈음에 나는 아버지의 완전한 부재라는 상실을 겪고 있었고, 마스다 미리 역시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일상을 보내는 에피소드가 짧게 나마 등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하나의 에피소드 때문에 그만 감정의 둑이 툭 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슬픈 책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밤에 눈이 퉁퉁 부어서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나 마스다 미리 특유의 담백한 그림과 대사가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슬픔을 강조하지 않고, 억지로 감정을 짜내려고 하지 않기에 그 뒤에 숨어 있는 마음들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이번 작품 <영원한 외출>에서는 본격적으로 아버지와의 마지막 시간들과 죽음 이후 슬픔과 상실감을 보여 준다. 하지만 역시나 '신파'가 아니라 작가 특유의 덤덤한 문장으로 이어지는 에피소드라 더욱 애틋하고 뭉클하다.

 

 

같이 가주었더라면 좋았을걸.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때 같이 가고 싶지 않았던 내가 아버지의 딸이다.

정말로 가고 싶으면 혼자라도 갔을 터.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어주길 바란 게 아닐까. 그러나 "아빠, 다녀오시죠? 혼자 가볍게." 하고, 두 번 다시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쓸쓸한 일이었다.   p.94

이야기는 삼촌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삼촌이 세상을 떠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상태가 나빠진다. 구급차에 실려가 병원에서 암선고를 받고, 남은 시간이 대략 6개월이라는 통보를 받은 다음 날 아버지는 퇴원한다. 검사고 치료고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던 아버지는 어째선지 목소리에 생기도 돌고, 더 건강해진 느낌이다. 마스다 미리는 그렇게 아버지와의 소소한 일상을 이어간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 듣게 되는 그 시절의 아버지 모습을 떠올려 본다. 하지만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갑작스럽게 찾아 온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든, 사고를 당하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든, 전혀 예상하지 못했든 간에 말이다. 그리고 가족을 떠나 보내고, 장례를 치르고, 여러 가지 행정 절차를 해야 하고, 일상이 다시 이어진다. 누군가 죽는다고 해서 당장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니까, 살아 있는 이들은 또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아무렇지 않게, 가끔은 웃고, 가끔은 후회하고, 또 가끔은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나 역시 마스다 미리처럼 아버지와는 유독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나의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성격이었고, 성미가 급해서 자주 발끈하셨고, 애정 표현에 서툴었고, 바로 그런 성격 때문에 손해를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식 걱정 많은 아버지였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아도 늘 뭐라도 챙겨주고 싶어하는 아버지였다. 사실 나는 성인이 되어서는 독립해서 따로 살았기 때문에 본가를 떠난 지 꽤 오래 되었고,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 연락하거나 명절 때마다 찾아가는 자주 미루던 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한 동안은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실감이 나지 않은 채 일상을 보냈다. 아이와 일상을 전쟁처럼 보내느라 늘 녹초였고, 바빴고, 피곤했다. 그러다 가끔 생전에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식을 보게 되면 시간이 멈추곤 했다. , 이제 아버지는 더 이상 이 음식을 드시지 못하는 구나.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마스다 미리의 말처럼 '소중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잃었다고 해도 있었던 것을 내가 알고 있으니 그걸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는 나는 이렇게 살아서 무언가를 먹고 있지만, 그것이 어쩌면 그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분인지도 모르겠다는 그녀의 말이 너무도 따스한 위로 같았다.

 

마스다 미리는 말했다. 인생은 계속 이어진다고. 오늘의 인생을 넘기면, 그 다음의 오늘의 인생이 있고, 내일의 내가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내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가까운 이의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 이후의 삶에 더 포커스를 맞춰 아버지의 딸의 삶을 그리고 있어 더 공감되었고,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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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기본 - 의식주 그리고 일에서 발견한 단단한 삶의 태도
마쓰우라 야타로 지음, 최윤영 옮김 / 인디고(글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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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누구를 만나도 괜찮다. 어느 때고 내가 나답게 있을 수 있다. 바짝 긴장되면서 자신감이 살짝 붙는다. 이런 느낌을 주는 질 좋은 흰색 셔츠가 나의 기본 아이템입니다.

레귤러 칼라 셔츠, 싱글 커프스의 지극히 정통파적인 것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리넨을 걸치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옥스퍼드 옷감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p.22

일본 셀렉트 서점의 시작으로 평가 받으며, 책을 사랑하는 여행자들이 찾아가는 명소가 된 카우북스의 대표이자 41세의 젊은 나이에 잡지 「생활의 수첩」의 편집장에 취임하는 등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온 프로패셔널 마쓰우라 야타로가 자신만의 기본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먼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알고,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생활 속 자신만의 기본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나다움'이라고 그는 말한다.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보편적인 취향이 아닌,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 있는 무엇을 찾는 분위기는 아마도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이 책은 생활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다움을 표현하는 옷차림의 기본, 나 자신에게 좋은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한 생활의 기본, 그리고 나만의 규칙을 세우는 일의 기본이라는 세가지 카테고리로 나뉘어 나만의 기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질 좋은 기본 셔츠 한 장만 있으면 다양한 스타일을 즐길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결국 질 좋은 셔츠는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진다고. 무슨 셔츠 하나에 이런 힘이 있겠냐 싶은 생각이 든다면, 한번 잘 생각해보라.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출근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자신이 어떠했는지. 불편한 셔츠를 입었을 때 남 앞에서 겉옷을 벗게 되는 상황이 생기면 얼마나 난감했는지를 말이다. 물론 값비싸고 화려한 옷일 필요는 없다. 그저 자신에게 잘 맞는, 자신의 스타일과 잘 어울리는, 어떤 옷과도 스타일링을 해볼 수 있는 그런 기본 셔츠면 충분하다.

'할 생각이다'라는 말은 버리세요. 깨끗하게 인정하는 게 좋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요. 엄격한 규칙이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않으면 일을 잘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만 하고 아무것도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안일하고 애매한 마음가짐으로 일터에 나와서는 안 됩니다.   p.218

저자의 집에는 아내와 딸과 자신, 각각 세 사람의 개인 공간이 있다고 한다. 모든 방에 천연섬유로 된 커튼이 걸려 있고, 각자 침대가 있고, 사소한 소지품이나 공유하지 않는 개인 소유물은 모두 자신의 방에 둔다고 한다. 문은 잠겨 있지 않으나 서로의 방에 들어가거나 간섭 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이렇게 '개인 공간' '세 사람의 공유 공간'을 선명하게 나누어 생활하는 가족을 본 적이 없는 터라 굉장히 낯설고 새롭게 느껴졌다. 그런데 '각자가 개인의 세계를 가지면서 공동생활을 한다'는 가족의 모습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가족도 소중히 여긴다는 말에도 공감이 되었고,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피난처가 필요하다는 말도 너무나 이해가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가족과 함께 살 때 온전한 '개인'인 나로 있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비로소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진정한 유대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이런 방식도 너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무엇을 입고 먹고 생활하고 어떻게 일을 하느냐가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일상에 밀착되어 있는 의식주와 일을 중심으로 생활 속에서 발견하는 기본적인 것들이 사실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결국 그러한 것들이 나라는 한 인간을 만들고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사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나답게'라는 말을 잊고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가면서, 어느 정도는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써야 하는 어른이 되면서 나만의 개성, 색깔 그런 것들을 누르고 지내다 보니 점점 더 나다움이란 게 없어지는 게 아닐까 싶으니 말이다. 그러니 겉치레와 시답잖은 자존심에서 생겨나는 거짓으로 치장된 모습으로 살아온 것이 비단 저자의 이야기만은 아닐 거란 말이다. 그렇게 피곤한 일상에서 벗어나, 내 마음을 온전히 열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돌아보고, 나의 기본을 찾는 과정을 통해서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일과 생활, 인간관계를 잘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기본이라는 건 매우 심플한 것이다.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그것을 생활 속 자신만의 기본으로 삼는 것 역시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 책을 통해서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있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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