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요, 라흐마니노프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2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정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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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음악이 마법을 보여 줄 때가 있다. 그 마법은 최고의 연주자와 최고의 곡목, 최고의 상황이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기적적인 순간에만 일어난다. 그 흔치 않은 기적이 지금 일어났다. 기적을 보여 준 연주자에게 청중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하쓰네를 신경 쓰면서도 하염없이 박수를 쳤다.  p.18

시가 2억 엔인 첼로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완전한 밀실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세계적인 라흐마니노프 연주자인 쓰게 학장의 손녀인 쓰게 하쓰네는 며칠 전부터 매일 스트라디바리의 첼로로 연습 중이었다. 어제도 저녁 6시까지 연주를 하고 첼로를 케이스에 넣은 채 보관실에 들어가 지정된 보관대에 되돌려 놓았다. 경비도 틀림없이 확인한 사항이었고, 입퇴실을 기록하는 카드판독기와 CCTV로 확인해도 어제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보관실에 입실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출입구도 문 하나였고, 창문도 없었고, 은행 금고나 마찬가지인 보관실에 접근한 사람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어린아이 크기만 한 악기가 사라진 걸까. 아무도 침입할 수 없고 탈출할 수도 없는 실내에서 말이다. 사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어진다. 피아노를 못 쓰게 만들고, 학장을 해치겠다는 경고장이 날아들고... 오케스트라 멤버들은 서로를 의심하느라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는데.. 과연 이들은 정기 연주회를 무사히 치를 수 있을까.

주인공 아키라는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지만,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이 유복해서 넉넉히 지원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고민이 많다. 학비를 마련하느라 아르바이트 덕분에 정작 연습에 소홀해지는 주객전도가 된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느라 콩쿠르는 꿈도 못 꿨는데, 이번 정기 연주회 무대에 오르게 된다면 밀린 학비 문제도 해결되고, 졸업 후 오케스트라에 입단할 가능성도 생길 수 있는 기회였다. 이야기는 아키라가 가을 정기 연주회에서 콘서트마스터를 맡게 되는 과정으로 시작해, 불길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상황에서 오케스트라 멤버들을 이끌게 되는 성장 드라마로도 읽을 수 있다. 경기 침체와 구직난, 그리고 꿈을 방해하는 얄팍한 주머니 사정 등은 우리의 현실 속 평범한 대학생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일련의 사건들에 숨겨진 트릭을 찾아내 범인을 밝혀내고 반전을 넘어 진실에 도달하는 미스터리로서의 이야기도 여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는 취사선택의 연속이거든. 몇 시에 일어날지. 뭘 먹을지. 뭘 하며 지낼지. 그리고 뭘 목표로 할지. 수많은 선택이 쌓여서 지금에 이른 거야. 사람들은 대부분 서툴러서 뭔가를 선택하면 그 외의 것을 버려야 해. 버린 것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선택한 것을 소중히 해야만 하지."    p.214

<안녕, 드뷔시>의 뒤를 잇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음악 미스터리인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다. 꿈과 현실 속에서 고민하는 음대생들의 리얼한 이야기 속에서 미스터리한 사건과 그것을 밝히기 위해 전작에 이어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는 피아니스트 탐정 미사키 요스케의 활약이 이어진다. 무엇보다 이 시리즈만의 장점은 굉장히 치밀하고 유려한 음악적인 묘사에 있다. 실제로 음악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아름답고 놀랍게 표현된 단어들은 새삼스럽게 나카야마 시치리라는 작가에게 감탄하게 만든다. 송곳 같은 첫 음이 하늘을 가르고, 애수와 비애가 응축되어 있는 소절이 이어지며, 마치 망치로 두드리듯 강하고 또렷한 음이 연주되고, 활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오르내린다. 완만한 음울함이 가슴속 깊이 숨어들었다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긴박감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등등.. 음악에 관한 묘사들은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든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플롯과 반전, 캐릭터 모두 좋아하지만, 음악을 글로 들려주는 경지는 단연코 최고가 아닐까 싶다.

음악 미스터리인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는 <언제까지나 쇼팽>, <어디선가 베토벤>, 그리고 <다시 한번 베토벤>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48세에 늦깎이로 등단해서, 그 후 7년간 작품을 28편이나 써내는 왕성한 집필 속도를 자랑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모든 작품들을 신속히 국내에 소개해주고 있는 출판사가 있어서, 독자 입장에서 매우 반갑게 기다리고 있다. 곧 출간될 나카야마 시치리의 신작은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 네 번째 작품 <악덕의 윤무곡> 과 시즈카 할머니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시즈카 할머니와 휠체어 탐정>이라고 하니 기대가 된다. 참 이렇게 다양한 시리즈의 작품을 한 꺼번에 가지고 있는 작가도 드문데, 나카야마 시치리는 각기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모두 완성도가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점인 것 같다. 그의 놀라운 집필 속도를 응원하며, 다음 작품도 빨리 만나보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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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스
워푸 지음, 유카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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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는 명확하게총격 현장을 언급했다. ‘이 자식이 정말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나무 두드리기』를 읽기라도 했단 말이야? 아니면 그냥 우연히 때려 맞춘 건가?’

그는 재빨리 자신의 메모와 소설 내용을 다시 읽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 추리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아귀가 정말로 책을 읽어봤다 한들, 이 부분 어디에 문제가 있단 말인가?    p.28

문단에서 꽤 이름을 떨치는 작가인 그는 대작 발표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순문학계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가 이번 신작은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추리소설을 발표할 예정이었기에, 모든 독자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소설 출간 전에 이미 각종 프로모션 이벤트가 잡혀 있었고, 예약 판매 일정과 언론 인터뷰도 일찌감치 이야기가 끝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익명의 독자로부터 온 메일 한 통 때문에 그는 도무지 웃음이 나지 않았다.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작품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며 대놓고 지적하는가 하면, 이 소설은 좋은 작품 축에 끼지도 못한다고 혹평하는 메일이었던 것이다. 아귀라는 서명을 쓰는 그 독자는 대체 원고를 어떻게 읽어본 것이며, 대체 무슨 목적으로 작품 속 추리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지적을 하는 것일까. 분노한 작가는 메일로 독자와 설전을 벌이게 되는데, 어이없게도 아귀가 지적한 부분들이 모두 실제로 수정을 요하는 문제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출간 일정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아귀의 정체는 누구인가.

일곱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각각의 이야기에서 한 명의 작가와 그가 쓴 하나의 추리소설, 그리고 아귀라는 네티즌이 등장한다. 모든 단편이작가와 네티즌이 미발표 추리소설을 놓고 소설 속의 누가 진범인지 토론을 벌인다라는 불가사의한 구조를 띠고 있는데, 매우 흥미진진하다. 작가와 네티즌이 작품 속 설정과 추리 과정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과정도 재미있고, 작가가 쓴 추리소설이 마치 액자소설처럼 교차로 보여지고 있어 재미를 두 배로 안겨준다.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문제가 돌고 돌아온 거다. 타이 행성 탐정은 나 행성 경찰이 제공한 단서가 정확하다고 어떻게 확신할 것인가? 그녀가 머릿속으로 그린 이 두 정권의 최고 형벌은 사형이었다. 비록 이야기에 써넣을 필요는 없겠지만, 다섯 명을 죽인 타이 행성 사람 셋은 분명 사형당하리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만일 이 세 사람이 진범이 아니라면, 함부로 세 사람의 목숨을 빼앗게 되는 것 아닌가? 그녀는 돌연 소설을 쓰는 데서 오는 중압감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p.197~198

사실 이 작품은 '작가와 네티즌이 아직 출간되지도 않은 추리소설을 놓고 소설 속의 누가 진범인지 토론을 벌인다'는 설정도 흥미롭지만, 일곱 편의 이야기가 지난 30년간 타이완에서 일어난 유명 범죄 사건 7건을 모티브로 삼아 재구성한 소설이라는 점이 정말 의미가 있다. 게다가 그 실제 사건에서 범인으로 체포됐던 이들이 모두 무고하게 누명을 쓴 것임을 탄탄한 추리의 과정을 보여주며 밝혀내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인 워푸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건이 마치 엉터리로 쓴 추리소설 같다'고 말한다. 게다가 현실 속 억울한 누명 사건 속의 '범인'은 결코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 너무도 끔찍하다고 말이다. 누군가 자신이 받아서는 안 될 어떤 형벌을 마주하게 되면, 그의 실제 삶인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그는 실제 그렇게 억울한 누명 사건들을 접하고는 자신이 '소설 형식으로 사건의 의문점에 대해 감식 증거 분실이나 추리 부분의 문제 같은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책이 그 결과물이다.

저자는 이 책을 '가볍고 흥미로운 단편소설집이고, 소설의 형식으로 창작 기법을 설명하는 소설집이며, 한 권의 추리소설'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작가들은 아귀와 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마치 창작 강의안 같다', '문예 창작 수업의 강의안처럼 보인다'라고 생각한다. 아귀는 이야기의 구성 요소인 전제, 주제, 인물, 플롯과 설정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의 잘못된 추리로 인해 누군가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 수도 있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픽스FIX’라는 단어에는 이처럼 잘못 쓰인 작품을고치고’ ‘바로잡고’ ‘보완하며동시에 이 이야기들을마음 깊이 기억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니,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마지막 작가 후기에 이르면 실제로 벌어진 사건에 대한 무게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설 창작의 세계와 타이완의 30년 사회 현실, 그리고 원죄 사건과 그것을 풀어내는 특별한 추리소설을 통해서 새삼 이야기가 가진 의의와 대체 불가능한 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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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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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을 죽이고 싶다. 누구든 상관없다. 이유도 딱히 없다. 그냥 죽이고 싶다.

속이 후련해질지도 모르니까. 그게 다다. 특별히 재미있어 보인다거나 즐거워 보여서 이러는 건 아니다. 엽기 살인 사이트 등을 보는 사이에 감화되어 흥미가 생긴 것도 아니다. 여하튼 세상에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우둔한 쓰레기들뿐이다. 하나같이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그저 멍하니, 의미 없이 살고 있다.   p.9~10

발견된 시신 주변으로 두부가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흩어져 있다. 아무리 봐도 시체는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부라니. 두부처럼 부드러운 걸로는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하더라도 살인의 도구로 사용할 수 없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엉뚱하고도 파격적인 제목과 표지 이미지가 시선을 사로 잡는 작품이다.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로 알려진 구라치 준의 단편들을 모은 미스터리 작품집으로 여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본격 미스터리와 일상 미스터리, 바카미스적 트릭, 패러디, SF적 상상력 등 다양한 소재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어 흥미롭다.

<ABC 살인>은 제목 그대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걸로 보인다. A, B, C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차례로 살인당한다는 모티브를 가져와 구라치 준은 동생을 죽이고 싶어하는 주인공이 묻지마 살인 사건을 알파벳 연쇄 살인으로 조작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사내 편애>라는 작품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종의 SF작품인데, 짧지만 임팩트있는 이야기를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관리하는 시스템에 불필요한 것이 너무 많다는 발상에서 시작해 개발된 시스템이 한 회사의 인사 관리를 하는 마더컴퓨터로 활용이 되고 있다. 회사 안의 컴퓨터는 전부 마더컴과 연결되어 있었고, 모든 사원들이 이 시스템의 지도하에 놓여 승진, 연봉 인상, 인사이동 등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마더컴이 특정 한 인물을 편애하기 시작하고, 그 사실을 회사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리고 있다. 발상도 신선했고, 진행되는 스토리도 유쾌했던 작품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건 대체 뭔가?”

나도 처음부터 그것이 걸렸다. 시체의 머리 부분을 중심으로 하얀 것이 산산조각 나서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두부다. 앞으로 쓰러진 시체와 그 주변에 흩어진 두부. 게다가 시체의 후두부에는 사각 물체의 모서리로 구타한 상처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1944 12월 초순. 제국육군특수과학연구소 2-13호 실험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p.157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것은 유독 기묘하고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작품들이었다. 표제작인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도 그렇고, 입에 하얀 대파가 꽂히고 시신 주변으로 케이크가 놓여 있는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등 기발한 살인 현장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다만 그 설정의 참신함에 비해 트릭이나 반전은 다소 약해서 아쉽긴 했다. 특히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2차 세계대전 당시 이상한 연구를 하는 미치광이 과학자에게 욕을 먹었던 병사가 살해당하면서 시작하는데, 결말이 좀 어처구니 없다고 할까. 여기서 진행되는 실험 자체도 좀 말이 안 된다 싶을 정도로 엉뚱했는데, 살인 사건의 결말 역시 다소 의아하다 싶을 만큼 이상하고 싱거웠다.

마지막으로 분량이 가장 긴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은 구라치 준의 기존 작품에서도 만나왔던 네코마루 선배가 등장하는 밀실 추리물이다. 정해진 직업 없이 여기저기 불쑥 나타나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면 득달같이 달려와 참견하는 오지랖 넓은 한량 캐릭터, 네코마루 선배 캐릭터를 좋아한다면 매우 반가울 것 같다. 무심한 듯 다정한, 엉뚱하지만 매력있는 캐릭터라 이번 단편에서의 활약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작품도 있었고, 다소 아쉬운 작품도 있었지만, 작품 수가 그다지 많지 않은 구라치 준의 다양한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집이 아닌가 싶다. 본격 미스터리와 일상 미스터리를 넘나들며미스터리계의 교과서로 불리지만, ‘좀처럼 일을 안 하기로 정평이 난 작가라는 농담이 떠돌 정도로 과작인 작가이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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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을유사상고전
버트런드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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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하거나 반증할 문제는 없습니다. 유일한 문제는 플라톤이 바란 국가를 좋아하느냐 싫어 하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이 플라톤의 국가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선하고, 싫어 한다면 악한 셈입니다. 만일 여러 사람이 좋아하는 동시에 또 여러 사람이 싫어 한다면, 플라톤의 국가가 선한지 악한지는 이성이 아닌 실제로 행사되든 은폐되든 무력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철학에서 생겨난 쟁점 가운데 하나로 여전히 미결로 남아 있다. 쟁점을 둘러싼 양측에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 있지만, 플라톤이 주창한 견해가 아주 오랫동안 거의 논박되지 않은 채 주류를 차지했다.   p.181

 

을유사상 고전 <한 달 읽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가 고른 책은 <러셀 서양철학사> 1,056페이지의 분량을 자랑하는 두툼한 책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 버트런드 러셀이 고대 그리스철학부터 현대 분석철학까지 서양 철학사를 분석적 방법으로 꿰뚫은 책으로 2500년 동안 발전해 온 서양 철학에서 일관된 철학적 주제를 하나하나 찾아내 흥미진진하게 논의하고 있다.

이번에 국내 출간 10주년을 맞아 재편집한 내용과 새로운 디자인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는데, 사철 제본과 PUR 제본이 합쳐진 페이퍼백이라 두꺼운 페이지에 비해 무게가 굉장히 가볍다. 물론 가벼워지고 가격도 내려갔지만, 페이지 마다 글자 수는 더 빼곡하게 들어 차 있어 여전히 진입 장벽이 높은 책이긴 하다. 그래도 작은 판형과 가벼운 무게로 인해 휴대가능한 판본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고, 개정판에는 관련 도판도 60여 점이 새롭게 수록되어 더욱 가독성을 높여 주고 있다. 사실 너무 유명한 책이지만, 누구라도 쉽게 엄두를 낼 수 있는 분량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나온 개정판은 보급판의 느낌이고, 표지며 판형, 디자인 등등이 모두 접근하기 다소 쉽게 만들어 졌다. 그러니 기존에 읽고 싶었는데 도전하지 못했던 이들이라면 놓치지 말고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학설에는 명백한 논리적 난점이 있다. 덕이 현실적으로 유일한 선이라면 자비로운 섭리는 오로지 덕을 이루기를 바라야 하는데도, 자연의 법칙은 무수한 죄인을 양산한다. 덕이 유일한 선이라면, 잔혹한 행위와 불의가 피해자에게 덕을 실천하는 최선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도 없어진다. 스토아학파는 이러한 난점을 지적하려 애쓴 적이 한번도 없다. 만일 세계가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면, 자연 법칙들이 내가 유덕한 존재가 될지 부덕한 존재가 될지 결정할 것이다. 만일 내가 사악하다면, 자연이 강제로 나를 사악해지게 한 것이고, 덕이 준다고 가정된 내게 가능한 것이 아니다.   p.342~343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저자의 개성과 주관이 강하게 반영된 책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사를 보는 관점이란 마냥 객관적일 수만은 없다고도 생각한다. 옮긴이 역시 러셀의 분석적 방법이 몇몇 사람의 오해와 달리 특정 학파가 주관적으로 선호하는 방법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토론하는 모든 사람이 이성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먼저 고대 철학은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문명의 발전으로 시작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분석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헬레니즘 세계와 스토아학파 등으로 이어진다. 중반부의 가톨릭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부터 르네상스까지 유럽 사상을 지배한 철학들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근현대 철학이었는데, 중세를 벗어나 교회의 권위가 낮아지고, 과학의 권위가 높아진 시대였다. 또한 근대의 철학은 대체로 개인주의와 주관주의로 기울었기에, 지금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사상가들이 많을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카를 마르크스 등등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상들과 그들의 철학이 사회, 정치 환경과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는지를 알 수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내용은 거창한 두께와 무게에 비해서 너무 술술 잘 읽혀서 놀랐고 생각보다 재미있는 대목과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은 책이었다. 방대한 분량과 엄청난 페이지 수에 비해 책장은 참 술술 넘어 가서 읽으면서 의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방대한 두께의 책을 아무리 재미있게 읽었기로서니,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기란 철학에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 없는 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러셀이 단순히 철학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있지 않고 책을 읽는 독자들이 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명쾌하고 재미있게 쓴 책이라, 누구라도 쉽게 철학에의 입문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히 말하고 싶다. 그러니 당신도 도전해보시길. 서양 찰학사에 관해 가지고 있던 '어렵고, 딱딱하고 지루할 것 같다는 모든 편견'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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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피치,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서귤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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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기 전에 동물원 사이트에 들어가 라이브 캠으로 판다를 보곤 한다. 화면 속 판다는 자거나 졸거나 멍때리거나 가끔 대나무 잎을 먹고 있다. 그 통통한 삼각김밥 모양의 뒤태를 보며 하루를 반성한다. 너무 부지런히 살았던 건 아닌지. 돈벌이에 눈이 멀어 나의 귀여움을 뽐내는 걸 소홀히 했던 건 아닌지. 내일은 더 대충 살자. 다리가 짧아 엉덩이 대신 허리로 앉는 판다처럼.    p.19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카카오프렌즈! 라이언, 어피치, 튜브, , 무지, 프로도, 네오, 제이지, 저마다의 개성과 매력의 사랑스러운 여덟 캐릭터와 젊은 작가들이 만났다.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그 두 번째는 바로 귀여운 악동 어피치와 울리다 웃기기 전문 악동 작가 서귤이다. 애교 넘치는 표정과 행동으로 카카오프렌즈에서 귀요미를 담당하고 있는 어피치의 핑크핑크 에너지가 가득한 책이다.

 

섹시한 뒤태와 아름다운 분홍빛을 무기로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어피치! 뒤집어진 복숭아 모양이라 엉덩이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귀염뽀짝 뽀샤시 캐릭터라 그런지, 이번 에세이의 제목도 너무 그럴 듯하다. 그런데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하다니, 무슨 뜻일까.

저자는 말한다. 길바닥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문득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토실토실 말랑말랑, 그 어떤 거친 바닥에서도 나를 폭신폭신하게 받쳐주는 엉덩이. 심한 말, 못된 말, 독한 말을 들은 하루 몽실몽실 내 마음을 감싸주는 마음의 엉덩이가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고 말이다.

너는 가장 최근에 달려본 적이 언제냐고 물었고, 나는 생각이 나질 않아 입을 다물었지.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어.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려본 게 언젠지. 어느 순간 알아버렸거든. 내가 달리든 걷든 기든 이 고만고만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이를 테면 이번에 신호등을 건너든, 4분 후에 건너든 나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p.182

이 글을 읽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웬만한 순간에는 달리질 않는 어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려본 건 너무도 까마득하다. 단순히 귀차니즘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조금 빨리 간다고 해서 인생사 뭐 크게 달라질 거 있나 싶은 마음가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길을 가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을 보면 그들의 그 에너지가 눈부시게 느껴지곤 했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유치하다고 느껴질 만큼 가벼운 글들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유머와 밝음이 위로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타켓층은 정확히 10 20대 사회 초년생 정도가 아닐까 싶다. 30대만 넘어가도 오글거리는 감수성으로 느껴질 테니 말이다. 어피치를 좋아한다면 무조건 읽어야 하고, 평소에 책을 별로 읽지 않는 이들에게도 추천한다.

카카오프렌즈가 사실 글보다는 라이언이나 어피치등 카카오 프렌즈 친구들이 더 눈에 들어오는 책이긴 하지만, 사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책을 집어드는 사람들도 꽤 많을 것이다. 그러니 뭐 꼭 에세이가 진지하고 심오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힐링과 위로라는 테마로 쓰인 에세이들이 모두 겉모습은 다르지만, 내용은 비슷비슷하기도 하고 말이다. 사랑스럽고 너무도 익숙한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들이 페이지 곳곳에 나타나서 그 귀여운 자태를 뽐내주는 것만으로 마음 속에 작고 동그란 행복들이 가득 차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책이라... 다음에 나올 카카오프렌즈 시리즈도 기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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