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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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마르타와 분리되어,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 물고기, , 그릇,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올라이는 생각한다     p.15~16

노르웨이의 작은 해안가 마을에서 늙은 어부 요한네스는 잠에서 깨어난다. 오늘은 뭘 해야 하나? 아내가 죽은 후로는 마치 모든 온기가 그녀와 더불어 떠나버린 듯 집안이 너무도 썰렁해졌다. 온종일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을 테니, 서쪽 만으로 산책이나 가볼까, 날씨가 그리 궂지 않으면 배를 타고 가까운 바다로 나가 낚시를 조금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매일 아침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날 역시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았다'. 그는 커피 물을 끓이고, 빵을 썰어 버터를 듬뿍 바르고는 브라운 치즈를 두툼하게 잘라낸다. 늘 먹던 음식인데, 도통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어쩐지 원래 그대로이면서 전혀 다른' 아침이었다. 그렇게 이 작품은 '여느 날처럼 모든 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 날은 '뭔가 여느 때와 사뭇 다른, 모든 것이 과거 어느 때와도 다른' 날이기도 하다.

현재 유럽을 넘어 전 세계에서 왕성하게 활동중인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2000년 발표한 소설이다. 고독하고 황량한 피오르를 배경으로 평범한 어부가 태어나고 또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꾸밈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의 시작은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어부인 올라이는 늙은 산파 안나에게 말한다. '사내아이라면, 요한네스라고 부를 겁니다'라고. 그에겐 딸이 있었지만 아내인 마르타는 그 뒤 다시는 태기를 보이지 않았고, 세월은 그렇게 흘러 갔다. 신이 더 이상 그들에게 아이를 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침내 그녀가 아들을 낳으려 하는 중이다. 그는 생각한다. '이번에는 아들이 확실해, 확실치 않은 건 단지, 아이가 살아서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인가 하는 것뿐, 이 험한 세상에, 문제는 그것뿐이다'라고. 그리고 잘생긴 사내아이가 태어나고,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다. 아기 요한네스의 탄생을 담고 있는 짧은 서두가 지나 다음 장에 이르면 요한네스는 어느덧 노인이 되어 있다. 요한네스는 아내와 일곱 남매를 두었고, 그들도 각자 결혼해서 손주도 여럿이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의 하루가 막 시작된 참이다.

자 기운 내라고, 그가 말한다.

할 수 있어, 그가 말한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선 채로 고개를 끄덕일 뿐 더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가만히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자 페테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역시 늙는다는 건 고약한 일이야, 요한네스가 말한다.    p.73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등장 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며,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한 이야기도 아닌데 이상하게 시종일관 눈을 뗄 수가 없는 마법 같은 작품이었다. 욘 포세는 연극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로 국내에도 희곡들만 출간되어 있다. 최근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는 그는 희곡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입센 다음으로 가장 많은 작품이 상연된 노르웨이 극작가로서 현대 연극의 최전선을 이끌고 있으며, 언어가 아닌 언어 사이, 그 침묵과 공백의 공간을 파고드는 실험적 형식으로 ‘21세기 베케트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짧은 페이지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극의 독백처럼 천천히 읽히며, 한 사람의 생을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과장되지 않게 담백하게 쓰여 있어 쉼표와 쉼표 사이 여백이 깊이 있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처음에는 마침표 없이 띄어쓰기와 쉼표로 이어지는 문장들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작가 특유의 리듬이 특별한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어 어느 순간 그 나직하고 고요함 속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게 된다.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다. '어쩐지 모든 것이 다르면서 여느 때와 같고,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으면서 동시에 다르다' 라는 문장으로 이야기 전체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하고도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경쾌하고, 쉬우면서도 어려운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단순한 언어로 만들어낸 가장 심오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터넷 서점의 별점 방식을 별로 선호하진 않지만, 이 작품은 별점 다섯 개를 줘도 뭔가 부족하다는 기분이 든다. 별점 다섯 개 이상 주고 싶은, 수십 권 구매해서 주변에 선물해주고 싶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여러 번 필사하고, 문장들을 모조리 외우고 싶은 그런 작품이다. 올해 단 한 권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무조건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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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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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방을 나가고 나서 침대에 누워 과거를, 오빠와 어머니와 내가 입술보다 마음으로 이야기할 때가 더 많았던 세월을 샅샅이 훑어 보았다. 은수카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것이 은수카에서 시작됐다. 이페오마 고모의 은수카 집 베란다 앞에 있는 작은 정원이 침묵을 밀어 내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p.27

 

고등학생 캄빌리는 나이지리아에서 식음료 사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두었기에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권위와 폭력을 일삼으며 가족들에게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인물이었다. 어머니는 가정폭력으로 인해 수차례 유산을 했고, 최근에도 어렵게 아이를 가졌다 같은 일을 겪는다. 캄빌리와 오빠인 자자 역시 아버지가 짜 놓은 일과표 대로 움직여야 했고, 아버지의 명령은 무엇이든 따라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자가 영성체를 하지 않겠다고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캄빌리는 이 사건을 '우리 집이 풍비박산 나기 시작'했다고 여겼다. 그녀의 일상은 이 사건 이후로 엉망이 되지만, 그 과정에서 캄빌리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기 시작한다.

엄청난 고생 끝에 이룬 자수성가, 가톨릭교로 귀의한 원리주의자인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행하는 많은 것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딸의 발에 뜨거운 찻물을 붓고, 반항적인 행동을 했다고 발로 걷어 차는 등 폭력적인 면모도 그렇지만, 일상의 소소하지만 불합리한 명령들, 규칙들 역시 그러하다. 가족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사회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봉사와 헌신으로 추앙 받으며,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투사이기도 하니 말이다. 캄빌리는 다른 도시에 사는 고모네 가족을 만나면서 자신과는 다르게 자유롭고 자주적인 사촌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억압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하던 소녀가 주체적인 자아를 찾아 나서는 여정은 만만치가 않지만 말이다.

 

 

 

성 베드로 예배당에는 성 아녜스 성당에 있는 것 같은 커다란 촛대나 화려하게 장식된 대리석 제단도 없었고,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가능한 한 많이 가리게끔 두건을 묶지도 않았다. 봉헌 행렬을 위해 나올 때 보니 어떤 여자들은 속이 비치는 검은 베일을 머리에 쓰기만 했고 어떤 여자들은 바지를, 심지어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가 봤다면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여자가 하느님의 집에서 머리카락을 보이면 안 되지. 여자가 남자 옷을 입으면 안 되지, 특히 하느님의 집에서는! 아버지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p.291

 

이 작품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엄마는 페미니스트>로 세계에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전한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데뷔작이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문단의 격찬을 받으며 영미권 문단에 "아프리카 문학의 거장 치누아 아체베의 21세기 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한다. 전부터 궁금했던 작가였는데, 이번에아디치에, 소설읽기온라인 서포터즈로 만나게 되었다.

 

캄빌리의 일상이 마치 소설로 보는 나이지리아식 「스카이 캐슬」을 방불케 할 정도라는 소개 문구처럼, 이 작품 속에서 교육에 집착하는 아버지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녀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교육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본문에 나이지리아 토착어들이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그리 두껍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서사 자체가 쉽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인 면에서 우리와 너무도 먼 나라인 나이지리아의 그것이 한국인들에게 공감이 되거나 이해될만한 여지가 많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새로운 가족의 형태, 그리고 진정한 교육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아디치에, 소설읽기두 번째 작품인 '아메리카나'에 더 기대를 갖고 있다. 선명한 색상 대비의 인상적인 표지 때문이기도 하고,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발랄한 페미니즘으로 꼬집고 있다고 하니, 더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젊은 포토그래퍼 김강희와 콜라보레이션한 표지로 책을 읽기도 전부터 이미지와 작품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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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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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거짓말을 하면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아십니까? 거기에 살인자들까지 보호한다면?"

"아가야, 내 나이엔 그 무엇도 위험이랄 게 없다는 걸 아느냐?"

벤투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자신을 응시하는 100세 노인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그녀가 옳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허리가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진 할머니를 어떻게 굽히게 한단 말인가? 이 심문의 길도 평탄치 않고 꼬부라질 조짐이 뚜렷했다.    p.41

이야기는 102세 할머니와 경찰의 대치 상황에서 시작된다. 베르트 할머니는 자기 집을 포위한 경찰들에게 총을 쏜다. 정확히 스물두 방, 그리고 법무사 이웃의 엉덩이도 쏘았다. 수사관 벤투라는 자신의 경찰 인생을 통틀어 가장 놀라운 용의자를 심문하고 있는 중이다. 총기와 범상치 않은 입담으로 무장한 이 빠진 노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녀는 2차 세계대전부터 두 차례 전쟁을 겪었고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나치 군인과 가정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을 거침없이 죽여버렸다. 이 작품은 현재 경찰서에서 할머니의 험한 욕설과 유머가 뒤섞인 취조 과정과 그녀가 태어났던 1914년부터 과거 회상 형식으로 교차 진행되며 102세 할머니의 삶을 그리고 있다. 100년을 관통해온 킬러 할머니의 삶은 그야말로 한 편의 누아르와도 같았다.

베르트 할머니는 전날, 도망자인 두 남녀를 자신의 집에 들여서 먹을 것을 주고 보살펴 주었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도망자가 된 사연이 그녀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며칠 전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진 두 남녀, 폭력적인 전남편을 피해 여자를 지키려다 남자는 그를 살해하게 되고, 이렇게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베르트는 죽고 못 사는 두 연인에게 꿍쳐둔 현금도 쥐어 주고, 자신의 자동차 열쇠도 넘기며 그들의 도주를 도왔고, 그 결과 이렇게 경찰서에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도주 중인 두 남녀를 쫓던 경찰은 황당하게도 불법무기를 소지하고, 경찰에게 총질을 해대는 황당한 할머니를 마주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할머니의 자백을 듣다 보니 그녀가 이미 세 차례의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고, 지하실에서 시신 일곱 구가 발견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체 102세 할머니의 집 지하실에 사람 뼈와 동물 뼈가 가득 널브러져 있었던 이유는 뭘까. 어떤 취조에도 능청을 떨며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이 할머니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 다시 시작할까요? 시신이 총 일곱 구가 발견됐고, 부인은 세 차례의 살인을 자백했어요. 나치 한 명과 두 남편. 나머지 네 명은 누구죠?"

베르트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장난은 끝났다. 그들의 뼈가 수면 위로 떠오른 이상, 고약한 기억들을 다시 파헤쳐야 했다.

"마찬가지야."

"마찬가지라니, 뭐가요?"

이번엔 100세 노인의 목소리에 공포가 스며들었다.

"괴물들이라고. 또 다른 괴물들."      p.202~203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시작으로 프레드릭 배크만의 <오베라는 남자>, 도로시 길먼의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 그리고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의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까지 노인 캐릭터들이 활약하는 작품들이 꽤 많았는데, 대부분 노년의 주인공들이 굉장히 매력있고, 개성 넘치게 등장했었다. 그 중에서도 이번 작품에서 만난 102세 베르트 할머니는 단연코 압도적이다. 페미니스트이자 연쇄살인범에 괴팍하기 짝이 없는 독설가라는 캐릭터도 흥미롭지만, 할머니의 삶 뒤편에 있는 '모든 폭력적이고 저급한 남성들에 대한 응징'을 보여주고 한 작가의 시선이 더욱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생 법과 정의를 믿으며 살아왔던 벤투라 형사가 베르트 할머니를 취조하면서, 자신이 항상 존재한다고 믿었던 법과 정의가 그녀를 지켜주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는 것 또한 독자 입장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실제 현실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라는 강렬한 제목만큼이나 가부장, 여성 혐오를 깨부수는 속 시원한 블랙 코미디로서도 매력적인 작품이고, 그 익살스러운 유머 이면에 있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과 횡포, 아동 학대, 사회적 약자 비하라는 주제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페미니즘 스릴러로서도 멋진 작품이다. 그래서 시종일관 유쾌하게 즐겁게 읽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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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1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로 만들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썸씽 인 더 워터 아르테 오리지널 23
캐서린 스테드먼 지음, 전행선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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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건너다본다. 구겨진 방수포 둔덕. 그 아래 살과 피부와 뼈와 이가 놓여 있다. 죽은 지 세 시간 반 된 시체가.

아직 따뜻할지 궁금하다. 내 남편. 만져보면 따뜻할 것이다. 구글로 이미 검색해봤다. 어느 쪽이든 놀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p.17

한밤중 깊은 숲 속에서 혼자 무덤을 파고 있는 여자가 있다. 꽉 찬 두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땅파기를 멈춘 그녀, 구덩이의 깊이는 대략 9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다. 성인 남자도 혼자 무덤을 판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체 왜 그녀는 이 오랜 시간과 힘을 들여,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덤을 파고 있는 걸까. 그녀의 곁에는 죽은 지 세 시간 반밖에 안 되어 아직 몸이 따뜻한 시체가 놓여 있다. 그녀의 이름은 에린, 지금 파묻으려는 시체는 남편 마크이다. 은행가인 마크와 다큐멘터리 감독인 에린은 뜨거운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린 신혼 부부였다.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나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마도 당신이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극중 화자인 에린은 이렇게 말하며 독자들을 세 달 전, 그들의 기념일 아침으로 데려간다. 그날은 그들이 처음 만난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그들이 서로에게 한 눈에 반했던 순간부터,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과 결혼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보라보라섬으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그곳 열대의 바다에서 셀 수 없이 많이 지폐와 다이아몬드, 그리고 한 자루의 권총이 든 가방을 발견하게 된다. 그 아래 깊은 바닷속에는 추락한 비행기와 가방 주인으로 보이는 시체들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뭔가 잘못되어가기 시작한다. 과연 이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적응 능력은 놀라울 정도다. 그렇지 않은가? 식물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담겨 있는 그릇에 맞게 자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때로는 자신의 그릇을 선택할 수 있다. 몇몇은 그러한 기회를 얻는다. 그것은 얼마나 멀리 나아가고 싶은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알렉사를, 그녀의 어머니를, 그들의 결정과 그들의 작별을 생각한다. 때때로 우리가 하는 선택은 놀랄 만큼 아름답다. 현재 상황에 나는 확실히 적응했다. 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거울에 비쳐 사방에서 나를 에워싼 그녀의 모습을 본다. 확고하고, 인정사정없는.      p.251

<다운튼 애비>, <어바웃 타임>의 배우 캐서린 스테드먼의 소설 데뷔작이다. 그녀는 뜨거운 나미비아 사막에서 촬영하던 중 눈부시게 반짝이는 바다를 생각하다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3개월 만에 글을 써 내려가 이 소설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영화배우 리즈 위더스푼은 이 책을 직접 읽고첫 페이지부터 나를 사로잡은 심리스릴러다. 책을 덮을 때까지 멈출 수 없었다.”라고 극찬하며 그녀의 북클럽인 헬로 선샤인 북클럽 도서로 선정했다. 이후 위더스푼의 영화사 헬로 선샤인 프로덕션이 소설의 영화 판권을 사들이면서 영화화 또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갓 결혼한 행복한 커플이 신혼여행 중에 돈과 다이아몬드, 권총이 든 가방을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는 심리스릴러로서 어느 정도 예상대로 진행되는 부분이 있지만 가독성만큼은 매우 뛰어난 작품이었다. 만약 당신이 우연히 돈과 보석으로 가득 찬 가방을 줍게 된다면? 게다가 주인은 이미 죽은 것이 분명하고, 당신이 가져가는 걸 아무도 목격하지 못한다면? 살짝 위험해 보이는 이 행운을 움켜잡을 것인가, 아니면 외면하고 안전한 일상에 머무를 것인가?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드는 시원한 표지만큼 올 여름 더위를 잊게 해줄 만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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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하는 뇌 - 뇌과학자와 예술가가 함께 밝혀낸 인간 창의성의 비밀
데이비드 이글먼.앤서니 브란트 지음, 엄성수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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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동물들도 드문드문 창의력을 보이지만 인간만큼 뛰어난 창의력을 보이는 동물은 없다. 무엇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주는 걸까? 인간의 뇌는 감각적 자극과 반응 간의 구역에 보다 많은 뉴런이 있어서 신경회로에 더 많은 추상적 개념과 경로가 생길 수 있다. 더구나 인간은 유난히 사회성이 뛰어나 서로 상호작용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함으로써 서로에게 정신적 씨앗을 뿌린다. 때로 인간의 창의력은 기적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 간의 협력으로 뇌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p.67

2007 1 9일 스티브 잡스는 무대에서 "가끔 혁명적인 제품이 나와 모든 걸 바꿔 놓습니다. 오늘, 애플은 전화기를 재발명하려 합니다." 라고 말한다. 여러 해 동안 이어진 무성한 소문과 추측 끝에 드디어 아이폰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위대한 혁신의 특징이 그대로 담겨 있는 아이폰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었다. 대개 발명은 한 순간에 이뤄진다고 생각하지만, 갑자기 '유레카!'를 외치며 놀라운 계시 같은 걸 받는 건 아니다. 이런저런 사람과 아이디어가 한데 모이면서 힘을 축적해, 몇 개월 혹은 몇 년 또는 몇 십 년을 거치면서 혁신 기술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훗날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창의력은 그저 이것저것을 연결하는 일이라고. 그들은 단지 무언가를 봤을 뿐이고, 거기에 자신의 경험을 연결해 새로운 것으로 합성하는 거라고 말이다.

이 책은 세계적으로 촉망받는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 그리고 예술과 과학을 접목해 인간 정신을 연구해온 작곡가 앤서니 브란트가 뇌와 창의성의 비밀을 밝혀가는 지적이고 흥미진진한 여정을 담고 있다. 뇌과학자와 음악가라고 하니 어쩐지 너무 다른 분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창의성의 근원을 밝히는 것은 과학적 접근과 예술적 감각이 모두 필요한 것이기도 하니 그야말로 기가 막힌 조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은 '넷플릭스' 화제의 과학 다큐 <창의적인 뇌의 비밀>의 원작이기도 하다.

우리의 뇌는 신축적이다. 뇌는 딱딱한 돌에 새기듯 고정불변을 지향하기보다 끝없이 그 자체의 회로망을 바꾸며 변화를 추구한다. 우리 뇌는 나이가 들어도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신축성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놀라움을 안겨준다. 뇌 속 회로의 끝없는 재창조로 우리 삶은 날로 노련해지는 작품처럼 발전한다... 만약 인간의 창의성을 보다 잘 이해한다면 교실에서 중역 회의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p.224~225

저자인 뇌과학자와 작곡가가 함께 밝혀낸 인간 창의성의 비밀은 3가지 전략으로 정리할 수 있다. 바로 휘기(Bending), 쪼개기(Breaking), 섞기(Blending)이다. '휘기'에서는 원형을 변형하거나 뒤틀어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난다. 안무가 마사 그레이엄의 혁신적인 안무나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보여준 곡선 형태의 건축물, 영화 <300>에서 슬로 모션과 패스트 모션을 번갈아 사용하며 시간을 뒤튼 것이 그 예가 된다. '쪼개기'에서는 전체를 해체한다. 하나의 원형을 해체해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새로운 창조의 재료를 만드는 것이다. 피카소가 평면을 분해해 그림 조각 맞추기 같은 입체적 형상을 탄생시킨 것, 통신 지역을 셀(cell)로 나눠 현대 휴대 전화(cellphone)의 기반을 만든 것이나, 하나의 화면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세 결정 수백만 개로 이뤄진 LCD TV 기술이 여기에 해당한다. '섞기'에서는 2가지 이상의 재료를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한다. 이는 다른 유전적 조직을 하나의 개체에 담는 유전공학, 과거 음악의 노랫말이나 멜로디 등을 수정하고 섞어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힙합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인간의 창의성은 언제 어디서든 주변의 모든 것을 원재료로 삼아 휘고 쪼개고 섞고자 한다. 이 세 가지 전략은 각자, 때로는 둘 이상 협력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혁신을 완성한다. 인간의 창의성이 특별한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왜 소는 인간처럼 몸을 이용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춤을 안무하지 못할까? 왜 다람쥐는 나무 꼭대기까지 쉽게 먹이를 운반할 수 있는 승강기를 만들지 못할까? 왜 악어는 쾌속정처럼 훨씬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발명하지 못할까? 이 책은 그 답이 자신의 기대를 깨뜨리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가 발전해 만들어진일탈하는 창의성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 속 창조와 혁신의 비밀,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 수많은 창의적 아이디어로 가득한 이 책을 통해 인간 창의성의 비밀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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