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죽였을까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7
하마오 시로.기기 다카타로 지음, 조찬희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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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모두 소설가의 공상입니다. 아하하하. 꽤 재미있지 않나요? ? 어디 안 좋으십니까?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백작 호소야마 히로시는 휘청취청 일어서서 간신이 문에 손을 대고 말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내가 사람을 죽였다니. 그 녀석 참 괘씸하군. 자살이야! 자살이라고!"     p.132

 

평소 도쿄 근교 피서지로 인기가 있는 K 마을의 어느 별장에서 무시무시한 참극이 일어났다. 오다 세이조라는 젊은 실업가와 그의 아내 미치코가 별장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것이다. K 마을은 해수욕과 피서지로 유명했고, 최근 들어 중상류층의 주거지까지 들어서게 되면서 매우 번화한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느닷없이 참극이 일어났으니,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오다 가문은 선대가 무역상을 해서 상당한 자산가였는데, 세이조는 선천적으로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어서 사건 당시에는 별장에서 요양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아내인 미치코는 유명한 대학교수의 딸로 총명하고, 상당한 미인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주변에는 젊은 남자들이 끊이질 않았었는데, 이들 부부의 결혼이 연애가 아니라 중매였다는 사실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못하다는 소문이 계속해서 들려 오던 참이었고, 세이조가 아내를 학대한다는 소문과 미치코가 젊은 학생들과 교제하는 것을 보고는 품행이 방정하다는 소문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범인은 사건 현장에서 흉기를 손에 쥔 채로 하인들에게 발견되어 바로 체포된다. 고데라 이치로라는 대학생으로 미치코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대학의 학생으로 오래 전에 큰 신세를 졌던 적이 있다. 그는 미치코와 같은 나이로 이들 부부와도 매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고, 사건 당일에도 다른 지인과 함께 넷이서 늦은 시간까지 마작을 하다 별장 1층에서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어떻게 이들 부부를 살해하게 되었는지, 그 방법과 동기에 관해서는 체포된 후 계속 묵비권을 행사해 알 수 없다가 결국 자신이 범인임을 인정하고, 사형 판결을 받게 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바로 고데라의 변호사였는데 중반쯤 이야기가 진행되면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피고가 공소를 포기해 그대로 사형이 집행되어 버린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가 죽고 나서 옥중에서 기록한 수기를 손에 넣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하마오 시로의 첫 번째 단편소설 '그 남자가 죽였을까'이다.

 

"신경증이라는 녀석은 평소에는 알 수 없는 인간의 심오한 마음을 감지하지. 이런 사례는 우리 정신과 의사에게 매우 적절한 연구 대상이네."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또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과연 이 날 밤,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매우 기묘한 사건이었다. 어쩐지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신경증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어떤 부분이 관련이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p.240

 

1880년대 후반 일본에 처음 서양 추리소설이 유입되었을 당시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의 주요 추리소설을 엄선하여 연대순으로 기획한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그 일곱 번째 작품이다. 가능한 한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선정하여 번역하고자 했다는 취지에 맞게 이번 작품 역시 처음 만나는 작가이다. 하마오 시로는 일본 탐정소설 문단의 제2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30년대에 활약한 작가이고, 기기 다카타로는 '일본탐정작가클럽' 회장을 역임하며 문단을 이끌어온 작가라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두 작가가 소설가가 되기 전 법조계와 의료계라는 전문 분야에서 활동했고, 소설에 자신의 전문 지식을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하마오 시로는 변호사 겸 추리소설가로 검사로 재직 당시 범죄 에세이를 여럿 발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변호사로 개업하면서 자신의 법률 지식을 활용한 본격 추리물을 발표했다고 한다. 기기 다카타로는 대뇌 생리학자이자 추리소설가로 생리학을 전공했고, 러시아 유학 당시 조건 반사학을 연구했으며, 의학 평론가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작가의 작품들은 일본 법정 추리소설과 의학 추리소설의 고전에 해당하게 되는데, 오래 전에 쓰였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다. 일본 추리소설의 원류를 이해하고 시대별 흐름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이 시리즈만의 매력이지만, 그냥 작품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아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시리즈이다. 현대의 익숙한 추리소설의 틀에서 벗어나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고, 현대의 미스터리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을 만난다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나름 추리, 미스터리 장르의 책들을 많이 읽어 왔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일본의 초창기 추리 소설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 하면,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밖에 몰랐다면, 그들의 작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도 우리가 이 시리즈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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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가 있었다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김예진 옮김 / 검은숲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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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읽는 궁극의 즐거움은 시리즈로부터 온다. 지속되는 시리즈는 한 권짜리 이야기보다 더 많은 것을, 한 순간만을 엿보는 것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약속한다. 오래 전 셜록 홈즈는 '일상의 따분한 반복과 관습 너머에 있는 기이한 사건들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며, '경찰 보고서를 읽다 보면 일상사만큼이나 기이한 것'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엘러리 퀸의 <노파가 있었다>는 그러한 기이함의 극대치를 보여주고 있다. 허드슨 강을 바라보는 뉴욕 한복판에 버티고 있는 웅장한 저택 안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올 법한 기상천외한 토끼 굴처럼 기묘하기 짝이 없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집처럼 알록달록하고 굴뚝에서는 녹색 연기가 흘러나오는 별장이 있는가 하면, 수수께끼 같은 물질을 끓여대는 미친 과학자의 기괴한 탑도 있고, 하트 여왕처럼 신문기자들을 향해 독설과 총을 쏘아대는 노파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체커 게임을 하고 있는 노년의 남자 들도 있다.

마더 구스 동요의 '신발 속에 사는 노파'로 불리는 기괴한 노파 코닐리아 포츠와 여섯 명의 자식들이 사는 그곳은 광기와 무논리로 가득했고, 바로 그 점이 이 작품만의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꾸며진 연극 무대 같은 비현실성이 돋보이는 이야기지만, 살인 사건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고, 그 속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엘러리 퀸은 사소한 단서들을 놓치지 않는다. 탐정 소설에서 주인공의 역할이란 평범한 환경도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고, 그냥 보는 대신 관찰하며, 듣는 대신 경청하고, 평범한 속에서 특별한 것을 주목하는 것인데, 엘러리 퀸은 이번 작품에서도 여지 없이 멋진 활약을 보여 주고 있다.

 

 

 

 

"천재적인 만화가는 커다란 저택을 하나 그렸습니다. 아마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있는 포츠 대저택을 비유하려는 모양이었겠죠? 그런데 중요한 건 그 건물을 구두코가 뾰족한 구식 신발처럼 그렸다는 겁니다. 그 마더 구스 풍의 일러스트레이션 속에서 코닐리아 포츠는 '신발' 밖으로 굴러 떨어지는 여섯 자식들을 데리고 있는 늙은 마귀할멈처럼 그려졌죠. 그리고 밑에는 이런 해설이 달려 있었습니다... 아무튼 덕분에 별명이 완전히 굳어지고 말았죠. 그 이후로 코닐리아 포츠는 노파가 된 겁니다."    p.21~22

 

코닐리아 포츠, 검은 태피터 치마와 목에 두른 가느다란 검은색 레이스 초커, 새침한 검은색 보닛 차림만 보면 '귀여운 늙은 요정'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닐리아 포츠 부인은 결코 70년 이상의 시간을 살아온 귀부인답게 걷지 않는다. 게다가 이기적이고 심사 비뚤어진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두 눈에선 사악한 빛만 뿜어냈다. 그녀는 바로 미국 사람이라면 누구다 다 아는 '어디서나 3.99달러'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포츠 신발의 수장이었다. 그녀에겐 첫 번째 결혼으로 생긴 세 자식과, 두 번째 결혼으로 얻은 세 자식이 있었다. 첫 남편이었던 바커스는 실종된 상태로 세상에서 사라져버렸고, 첫째인 설로는 부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별로 하는 일은 없다. 그저 모든 일에 분노하는 사람으로, 벌써 서른 일곱 번째 명예 훼손 재판을 거는 편집증 환자이다. 둘째인 루엘라는 위대한 발명을 하겠다고 실험실에 틀어 박혀 있고, 셋째인 히레이쇼는 동화를 쓰며 장난감감에 둘러 싸여 피터패처럼 사는 인물이다. 현재의 남편인 스티븐의 자식들은 좀 멀쩡한 편인데, 일란성 쌍둥이인 로버트와 매클린은 판매와 광고 및 홍보 부사장을 맡고 있다. 가장 어린 실라는 가문의 변호사인 찰리 팩스턴과 사랑에 빠졌지만, 노파의 결혼 반대에 부딪친 상태이다.

 

 

포츠 가문의 명예훼손 재판에 아버지와 함께 참관하게 된 엘러리는 팩스턴 변호사로부터 포츠 집안에 대해 듣게 된다. 그리고 재판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자 총을 사서 집안의 명예로운 이름을 모욕하는 놈에게 사정없이 쏴 죽이겠다고 소리친 설로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 포츠가의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하기로 한다. 마더 구스 동요의 '신발 속에 사는 노파'로 불리는 기괴한 노파 코닐리아 포츠와 여섯 명의 자식들과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자리는 그야말로 이상했다. 그 와중에 로버트와 설로가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설로는 동생이 자신을 모욕했기에 명예 회복을 위해 결투를 해야겠다고 선언한다. 게다가 두 사람은 각자 실제 총기를 하나씩 고르고, 다음 날 새벽에 만나서 결투를 하기로 하는데.. 대체 이게 무슨 괴상한 농담일까싶지만, 설로는 굉장히 진지하기만 하다. 엘러리의 아이디어로 탄환이 하나 들어 있는 권총을 몰래 가져와 속을 비운 약협을 끼워 두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새벽의 결투에서 실제로 살인이 벌어지고 만다. 그리고 이어지는 살인 사건들이 모두 마더 구스 동요의 노랫말과 정황이 맞아 떨어지게 되는데.. 과연 엘러리 퀸은 광기와 무논리로 가득한 이곳에서 어떻게 수수께끼를 풀어 나갈 것인가.

 

 

 

 

"경사님 가설에서 희한한 점은 잘못된 부분이 아니라 옳은 부분에 있어요."

경감은 아들을 빤히 쳐다보았고, 벨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러리가 다급히 덧붙였다.

", 그 가설이 맞았다는 게 아니에요. 당연히 틀렸죠. 하지만 올바른 노선을 타고 있어요. 논리적인 가설이라는 뜻입니다. 부조리 위에 합리성을 세우려 애쓴 흔적이 보여요. 그리고 그건 정확히 옳아요, 아버지."    p.205

 

검은숲독서클럽 2주차 도서로 만나게 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마더 구스 동요를 소재로 한, 마치 한 편의 환상적인 동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초기 국명 시리즈의 또박또박한 연역추리와 비현실적인 퍼즐 미스터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더욱 흥미진진했다. 이 작품은 라디오와 영화 시나리오 등의 영향으로 한동안 리얼리즘을 지향했던 엘러리 퀸 형제가 초기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비현실적인 퍼즐 미스터리 포맷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마더 구스 동요와 맞아떨어지는 살인 사건이라는 스토리 형식에 맞추기 위해 리얼리즘을 포기하는 것이 불가피하기도 했으나, 다양한 계층과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라디오와 영화에서 제한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복잡하고 흥미로운 트릭들을 소설 속에서 마음껏 보여준다. 광기와 무논리로 가득한 뒤죽박죽 토끼 굴 같은 무대에서 사소한 단서로 이성적인 범죄자의 두뇌를 발견하고 사건을 극적으로 해결해내는 엘러리 퀸의 활약상을 만나볼 수 있어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개인적으로 검은숲의 '엘러리 퀸 컬렉션'은 내지가 특히 예뻐서 좋아하는 시리즈인데, 엘러리 퀸의 작품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면 소장용으로도 너무 근사하고 아름다운 책이니 놓치지 마시길!! 게다가 지금 엘러리 퀸 도서 구매 시 '엘러리 퀸 컴플리트 가이드' 북을 받을 수 있어 초심자들에게는 엘러리 퀸의 세계에 입문하기 좋은 시기인 것 같다. 26편의 작품에 대한 설명과 7편의 칼럼이 담겨 있어 엘러리 퀸 초심자부터 마니아까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완벽한 가이드북이니 놓치지 마시길. 올 여름, 20세기 최후의 미스터리 거장 엘러리 퀸을 시작해보자. 그의 작품들이 왜 미스터리의 고전인지, 그리고 그런 고전을 왜 지금 다시 읽어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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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가 만만해지는 이과식 독서법 - 필요한 만큼 읽고 원하는 결과를 내는 힘
가마타 히로키 지음, 정현옥 옮김 / 리더스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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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오래 참기 대회가 아니다. 세상에는 근성을 시험하기 위해 쓰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난해한 책이 있다. 그럴 때 자기 머리가 나빠서라고 탓하는 사람이 많은데, 오히려 저자의 설명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저자의 머리가 나빠서이지 독자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백 보 양보해서 훌륭한 내용이 적힌 책이라 해도 글쓰기 방식이 나쁘고 초심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저자의 책임감 부족이다. 그런 책을 만났다면 읽기를 당장 그만두는 게 좋다. 더욱 알기 쉽게 쓰인 책을 분명 찾아낼 수 있다.   p.46

 

저명한 화산학자이자 교토대 교수로 학생들로부터 해마다가장 수강하고 싶은 교수 1로 꼽히는 저자는 명문대에 들어온 신입생들이 책 읽기를 고문처럼 여기며 전공서와 씨름하는 것을 보며 특별한 처방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 책은 과학 연구와 행정, 교육직을 두루 거치며 수많은 책과 논문과 문서를 읽고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해온 저자가 40년의 경험에서 추출한 자신만의이과식 독서 노하우를 명쾌하게 알려주고 있다.

물론 독서 방법에 관한 책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지만, 이 책의 특징은 바로 '책 읽기에 소질이 없는 사람을 위한 독서법 입문서'라는 점이다. 책 읽기가 어려운 초심자들에게, 독서가 너무 힘든 대학생들에게, 독서가 살아가면서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즐거움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일종의 처방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미 책 읽기가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저자가 알려주는 '아웃풋 중심의 독서법'을 통해서 '이과식 독서 노하우'를 배운다는 점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 같다.

 

이과계 사람들의 독특한 사고방식 중 하나로 '요소분해법'이 있다. 어려운 일에 직면하면 그 일을 먼저 개별 요소로 쪼개 해결하는 방식이다. 나도 현장에서 어려운 과제에 직면할 때마다 과제를 작은 요소로 분해해 해결의 실마리를 붙잡았다. 난해한 책도 마찬가지다. 미뤄두기와 요소분해를 활용하면 편리하다. , '모르는 것은 망설이지 말고 덮어버리기' 그리고 '조각 내어 생각하기' 기술을 접목하는 것이다. 길고 복잡한 문장 앞에서도 기죽을 필요 없다. 주어와 술어 짝에 표시를 해두고, 이 짝이 이루는 단문을 각각 읽어나가면 된다.   p.90

 

생각보다 책 읽기를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다. 한 달에 한 권은 고사하고,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이들이 대다수이고 책이라는 것이 자신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물건인 것처럼 취급하는 경우도 여럿 보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학창 시절에는 책을 꽤 읽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교과 과정을 따라 가기 위해 억지로 읽은 거였든, 그저 재미를 위해 시간 때우기 용으로 읽었든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여전히 책 읽기를 어렵게만 느끼는 것일까. 이 책에서 알려주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바로 '책이 어렵다면 저자를 탓하라'는 항목이었다. 사실 책 읽기에 너무 익숙한 나 같은 독자도 가끔 아무리 읽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내용이 어려워 알 수가 없는 그런 책을 만난다. 그럴 때 그 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독자인 내 탓이 아니라, 저자의 설명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개는 실제로 그렇다, 라는 저자의 단언이 어쩐지 재미있으면서도 예리하게 진실을 꿰뚫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여기서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과 맞지 않는 책이라면 읽기를 바로 멈추자'는 것이다. 자신과 어울리는 책, 읽기 쉬운 책을 만날 때까지 끊임없이 갈아타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책읽기라는 것이 익숙해질 것이며, 책 읽기의 재미를 발견하리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과 사람들은 편해지기를 꿈꾸는 종족'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에너지를 덜 쓰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지 늘 궁리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책 읽기에 응용한 '이과식 독서법'의 가장 큰 특징 역시 쉽고 간편하다는 것에 있다. 미뤄두기와 불완전법, 이과의 요소분해 사고법, 각종 속독법을 무시하는 방법인 '지독법' 등등이 그에 해당하는 방법인데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책을 고르고 정리하는 '이과식 책 정리'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이 어렵다면 저자 탓, 작심삼일은 의지가 아니라 시스템 탓이라 단언하는 저자의 관점이 궁금하다면, 책과 마음의 담을 쌓은 사람이라면, 책 읽기가 너무 어려워 숙제처럼 느껴진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괴짜 이과대 교수의 특별한 읽기 처방이 당신의 고민을 싹 해결해 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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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살짝 비켜 가겠습니다 - 세상의 기대를 가볍게 무시하고 나만의 속도로 걷기
아타소 지음, 김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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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잖아", "결혼 안 해?", "그런 옷 입고 다니면 남자한테 인기 없어" 같은 무례한 참견을 당하는 일도, 쓸데없는 말에 상처 받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할머니니까. "여자이길 포기했네", "여잔데 왜 그래?" 같은 말도 듣지 않게 될 거고. 만약 내 성별을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갖다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차라리 할머니가 되어 내게 필요 없는 여성적인 부분을 완전히 버리고 싶다.    p.42

이 책의 저자인 아타소는 외모에 자신이 없거나 연애와 결혼이 잘 안 풀린다고 고민하는 여자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글로 트위터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외모를 싫어했고, 붙임성 없는 성격과 솔직하지 못한 점과 자신감이 없는 것 등등.. 수많은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특히나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자신감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주변 여자들과 스스로를 비교해, 같은 '여자'인 것이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끄럽다고 생각할 정도이니, 사실 좀 심각하다. 하지만 그녀처럼 사회가 기대하는 대로 '여자답게' 행동할 수 없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거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위로이자 응원 같은 책이다.

저자가 못생기고 형편없는 외모를 오랫동안 콤플렉스로 가지게 된 것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못난이라고 불렀던, 칭찬을 거의 하지 않았던, 무심한 어머니에서 비롯되었다. 다행히도 이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못난이로 살아온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거기서 느꼈던 감정들과 생각들을 글로 꺼내어 과거의 나를 구원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밝히고 있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 등등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심하지만 적극적으로나다운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사람을 기다리는 것, 남자에 의해 내 행복이 좌우되는 인생 따위는 분명히 재미없다. 자신보다 멍청해 보이는 여자와 결혼해서 여자보다 우위에 서려는 남자는 내가 먼저 거절한다. 나는 남자가 가져다 주는 행복을 기다리지 않는다. 혼자서도 똑바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 내 능력을 인정해줄 곳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 힘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고 싶다... 나는 인생에 기본적인 단계가 있음을 강요 받는 분위기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있지만 끝까지 내 안에서 행복을 찾길 바란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내가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p.161~162

여자다움이란 대체 뭘까. 여자라서 이래야 하고, 여자이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고.. 세상에서 규정하는 여자다움이란 사실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여자니까 이래야 해. 남자는 이래야 돼. 라는 식으로 남녀의 선천적 특성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것들은 사실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기질은 아니다. 저자는 여자라면 겉모습을 깔끔하게 유지해야 한다거나, 요리를 잘한다거나, 손톱 정리와 화장을 빈틈없이 해야 한다거나, 외식을 할 때는 남자에게 술을 따라줘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사회적 시선에 반기를 든다. 급기야 가끔은 빨리 늙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한다. 할머니가 되면 여자이기 때문에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말은 최소한 듣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에 끼워 맞출 필요도, 눈치 볼 필요도 없다. 세상에는 외모가 예쁜 여자도 있고, 결혼 안 하는 여자도 있으며, 중성적인 스타일로 옷을 입는 여자도, 털털한 선머슴 같은 성격의 여자도, 화장을 하지 않는 여자도 있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나답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저자와 같은 고민들을 해본 적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이야기들이 대부분 공감되고, 이해가 되었다. 남자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조금도 노력한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이기에 느끼는 욕망과 여자로서 날씬해지고 사랑스러워지고 싶은 자신의 감정에는 솔직한 그녀의 모습이 사회의 기준과는 다를지라도 멋지게 보였기 때문이다. 남이 정해준 행복은 필요 없다. 나는 내가 가장 나다운 모습일 때 행복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자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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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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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메리카나'라는 단어와 비시 생각에 박장대소하며 신이 나서 네 번째 음절을 길게 늘여 발음했다. 비시는 그들보다 한 학년 아래의 여학생이었는데 여행차 잠깐 미국에 갔다 오더니 갑자기 요루바어를 못 알아듣는 척하고 모든 영어 단어에 흐릇한 r을 덧붙여 발음하는 등 이상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근데 기니카, 난 지금 네 입장이 될 수만 있다면 정말 뭐든 할 것 같아." 프리예가 말했다. "네가 왜 가기 싫어하는지 모르겠어. 언제든 돌아오면 되잖아."    -1, p.115

이페멜루는 나이지리아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십삼 년이 된 어느 날, 나이지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현지에 있는 가족들은 미국 생활이 그녀를 돌이킬 수 없게 바꿔 놓았을 거라고 생각해 돌아와서 적응할 수 있겠느냐, 미국 시민권이 있으니 언제든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다. 미국에 있는 동료나 지인들은 그녀가 미국에서 십오 년이나 살았는데, 다시 나이지리아로 돌아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녀와 삼 년 동안 함께했던 남자친구 블레인 역시 그녀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놀라고,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사실 그녀에겐 이유랄 게 없었다. 그저 켜켜이 쌓여 왔던 불만이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마침내 그녀를 움직였던 것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미국에서의 무엇이 그녀의 삶을 다시 나이지리아로 향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녀는 익명으로 <인종 단상 혹은 (과거에는 니그로로 알려졌던) 미국인 흑인들에 대한 비미국인 흑인의 여러 가지 생각>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인종 문제는 완전히 과대 포장되어 있다는 걸 흑인들은 깨달아야 한다. 이제는 계층 문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문제만이 중요하다. 드레드록 머리를 한 미국인 백인 남자라고 해서 전부 다 흑인 편은 아니다. 등등 특유의 독설과 유머를 혼합해 그녀가 실제로 미국에서 겪어 온 인종 차별의 순간들을 매우 현실적이고도 발랄하게 표현해 왔다. 한편 중학생 때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웠던 그녀의 첫사랑 오빈제는 이제 결혼해서 처자식이 있었다. 그녀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 버린 뒤로, 그들이 서로 연락하지 않은 지도 수년이 흘렀다. 이페멜루는 나이지리아로 돌아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오빈제에게 이메일로 알리고 계속 연락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야기는 이페멜루와 오빈제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역경을 겪고, 변화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한 성장 소설의 배경에는 나이지리아와 미국의 정치 경제, 인종, 종교, 이민, 페미니즘, 계급 갈등 등 수많은 사회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알렉사와 다른 손님들, 어쩌면 조지나조차도 누군가가 전쟁으로부터, 또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난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억압적인 무기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오빈제 같은 사람들, 즉 유복하게 자랐지만 불만에 빠져 있고 태어날 때부터 고국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도록 길들여진, 진정한 삶은 그 다른 곳에 있다고 영구불변하게 확신하는 사람들이 단지 떠나기 위해 - 그중 어느 누구도 굶주리거나 강간당하거나 마을이 불타지 않았지만 그저 선택의 가능성과 확실성에 목말라서 - 위험한 일, 불법적인 일을 하기로 결심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 p.87

‘아디치에, 소설읽기온라인 서포터즈로 만나게 된 두 번째 작품이다. 지난 번에 읽었던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응고지 아다치에의 데뷔작으로 2003년 작이었고, 이번에 읽은 <아메리카나>는 그로부터 10년 뒤에 쓰여진 2013년 작품이다. 그녀가 작가로서 그 기간 동안 얼마나 놀라운 성장을 했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라, 읽으면서 내내 감탄했다. 사실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좋은 작품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술술 잘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기에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그에 비해 <아메리카나>는 첫 장부터 시선을 확 사로잡는 문장과 사유들이 인상적이었고,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이라는 다소 예상 가능한 플롯으로 쓰여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강렬하게 현실을 그려내고 있어 지금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동시대성이 피부로 고스란히 와 닿았던 것 같다.

특히 이 작품은 2015년 민음사 모던클래식을 통해 출간되었는데, 이번에 젊은 포토그래퍼 김강희와 콜라보레이션한 표지로 번역 편집 전반을 다듬어 출간되었기에 이번 기회에 만나 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선명한 색상 대비의 인상적인 표지는 책을 읽기도 전부터 이미지로 작품의 분위기와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솔직하고 톡톡 튀는 묘사로 미국 인종주의의 민낯을 보여주고,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발랄한 페미니즘으로 꼬집고 있는 이 작품이야 말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묵직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소설 자체는 전혀 어둡거나 무겁게 느껴지지 않도록, 시종일관 경쾌하게 풀어나가는 방식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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