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톰의 발라드
빅터 라발 지음, 이동현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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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저녁을 먹고, 식사가 끝나자 빅토리아 소사이어티를 나섰다. 건물의 계단을 내려오자 다시 할렘에 와 있었다. 사흘 뒤면 토미는 로버트 수댐의 저택을 방문하게 될 터였다. 이제 그 방문이 다른 우주로 건너가는 여행처럼 여겨졌다. 아버지가 두려워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들이 그렇게 멀리 가 버리려고 하니까.    p.47

 

할렘에 있는 다세대주택에서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는 찰스 토머스 테스터, 항상 기타 케이스를 들고 다니는 그를 길거리에서는 '토미'라고 불렀다. 사실 기타 연주자 토미에게 음악적인 재능은 없었다. 스무 살의 실력 없는 연주자였기에 연주보다는 도시 구석구석을 돌며 잡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토미는 특별 의뢰를 받고 온통 백인들로 둘러싸인 퀸스로 가서 작은 노란 책을 배달하고 200달러를 받는다. 그 돈이면 여섯 달 치 집세와 공과금, 식비 등을 모두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미에게 로버트 수댐이라는 부유한 노인이 다가온다. 그는 사흘 뒤 레드 훅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열 생각인데, 와서 연주를 해주면 5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계약금으로 100달러를 건네준다.

 

토미는 안전한 할렘을 벗어나 망토처럼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숲을 거쳐 특정할 수 없는 세월의 공팡내가 배어 있는 수댐의 집으로 간다. 내일 밤 파티를 위해 연주를 하는 토미에게 수댐은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자신은 어느 무시무시한 전설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믿는다며, 토미를 고용한 이유는 그가 환상을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대양의 해저에는 왕이 잠들어 계시고, 잠든 왕이 귀환하게 되면 인류의 어리석음을 싹 쓸어 버릴 거라고. 그러면 흑인, 혼혈인 들의 차별에 대한 비참함이 끝날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려 수면이 일렁이는 느낌을 보여주고, 대양이 출렁이고 솟구치는 심해의 광경을 느끼도록 만들어 준다. 그렇게 토미는 이상한 경험을 하며 수댐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오며 이제 할렘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겠다고 다짐하지만, 결국 후한 보수 때문에 수댐의 집을 다시 찾게 된다. 그날 밤, 파티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토미는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나는 가슴속에 지옥을 품고 다녔어.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수고 파괴해 버린 다음 앉아 파괴된 모습을 즐기고 싶었지."
"그럼 넌 괴물이야."
"너희들의 손으로 만들어 낸 괴물이지."     p.159

 

이 작품의 서두에는 '엇갈리는 심경으로 H.P. 러브크래프트에게 바친다'라는 문구가 있다. 빅터 라발은 공포 소설의 거장 러브크래프트의 문제작 <레드 훅의 공포>를 파격적으로 재해석해서 이 놀라운 작품을 탄생시켰다. 러브크래프트는 ‘크툴루’로 대표되는 독특한 신화적 세계관을 창조하여 오늘날까지도 굳건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작가이지만, 인종차별주의자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악명 높은 단편 <레드 훅의 공포>를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빅터 라발이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쓴 것이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전혀 상관없을 만큼, 독립적이고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이기도 하니 말이다. <레드 훅의 공포>는 말론이라는 백인 형사가 이민자들이 부글거리는 동네에서 사건을 수사하다가 고대 종교의 의식을 목격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도 '지저분한 혼혈인들'이라든지 '죄악으로 물든 가무잡잡한 얼굴들', 또는 '아시아의 원숭이들'이라는 식으로인종차별적인 묘사가 난무한다. 빅터 라발은 <블랙 톰의 발라드>를 흑인 주인공 토미를 중심으로 다시 쓰는 방법을 통해 러브크래프트에 도전하고 있다. 극중 토미에게 접근해 연주를 부탁한 로버트 수댐과 토미를 미행하고 위협했던 말론 형사는 <레드 훅의 공포>에 등장했던 주요 캐릭터들이라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올해 초에 출간된 <엿보는 자들의 밤>이라는 작품으로 빅터 라발을 처음 만났는데, 그의 매력에 푹 빠져 다른 작품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터라 이번 작품은 굉장히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었다. 러브크래프트를 읽었든, 혹은 읽지 않았든 지 간에 <블랙 톰의 발라드>는 대단히 매혹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문화와 밀교에 비상한 관심을 품고 있는 노학자, 그리고 그의 저택에서 초월적인 공포를 마주하게 되는 형사와 수댐에게 이끌려 악마 소환 의식을 돕게 되는 흑인 청년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준다. 사실 피가 난무하는 공포보다 이런 식으로 기괴하고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계속 잔상으로 무서움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공포와 환상이란 것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민자가 몰려들던 1920년대 뉴욕에서 무장 경찰과 마법이 혼재하는 특별한 이야기를 만나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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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 12가지 '도시적' 콘셉트 김진애의 도시 3부작 1
김진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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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아름다움은 권력의 풍경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무척 딜레마다. 지금은 밤이 되면 그 성에 환하게 조명을 밝혀 인상적인 야경을 연출하고 있으나, 환한 성을 볼 때마다 나는 카프카의 <성>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카프카가 상징적으로 묘사했듯이, 도시에서 권력이 펼치는 풍경은 압도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좌우할 수 있는 것이다.    p.75

 

<김어준의 뉴스공장>, <알쓸신잡>에서 만났던 도시건축가 김진애의 도시 3부작 첫 번째 책이다. '도시란 모쪼록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쓴 책들로,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는 신간이고, 나머지 시리즈 두 번째 ,세 번재 책은 2003년에 나온 <우리 도시 예찬>과 2009년 출간된 <도시 읽는 CEO>를 각 개정판으로 출간해 시리즈로 함께 묶었다. 20년에 걸쳐 완성된 '도시 3부작'이라 세 권의 책을 함께 읽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수많은 다양한 인간과 욕망으로 가득한 공간인 도시, 그렇지만 너무 크고 또 복잡해서 한눈에 포착하기에는 어렵고 낯설다. 저자는 익명성, 권력과 권위, 기억, 예찬, 대비, 스토리텔링, 디코딩, 욕망, 부패에의 유혹, 현상과 구조, 돈과 표, 돌연변이와 진화라는 12가지 도시적 콘센트를 제시한다. 이 책을 읽으며 일하고 거닐고 노니는 우리의 공간에서 도시적 삶의 가능성을 탐색 해보자.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스토리이며,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 속의 공간에 대하여 자기만의 이야기를 할수록 우리의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우리는 많은 공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도할 수 있다. 이야기할 단서들이 아주 풍부한 공간도 있고, 이야기가 될만하다고 보이지 않는 공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나 사람의 상상력과 칭의력이 작동한다. 누가 어떤 공간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는 일종의 사건이다.   p.176

 

도시란 무엇인가? 도시란 복합적인 실체라서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생활, 정치, 심리, 산업, 지리, 환경, 공간, 건축, 기술, 도시계획 등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다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저자에 따르면 '도시적 삶'이라는 측면에서 정의해본다면 '도시란 모르는 사람들과 사는 공간'이다. 이렇게 도시의 근본 조건인 '익명성'과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길'과 길의 한 부분으로서의 '광장'이 만날 때에 매우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광장은 도시의 익명성을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공간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광장이라는 공간에서, 혁명, 또는 집회라는 이름으로건, 혹은 '축제'라는 이름으로건 간에 열린 공간에서 같이 할 때 우러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익명성 속에서 오히려 도시의 무한한 자유가 커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부족 사회나 신분제 사회와는 달리, 도시적 삶 에서는 서로 모르는 낯선 사람과 함께 살기 때문에 더 자유롭고 정의롭게 관계 맺기를 할 수 있다는 저자의 긍정적인 시선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외에도 우리의 현대사에서 그리 순탄치 않았던 권력 공간의 생성을 비롯해, 영화감독들이 우리 나라의 이곳저곳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잘 담아내어 보여주는 여러 사례들도 흥미로웠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부산의 40계단과 달동네의 미로와 같은 골목, <박쥐>에서 일본풍과 근대풍과 전통 한복집의 혼성적 공간이 풍기는 기묘한 세계, <플란다스의 개>에서 고층 아파트 단지의 외피가 품고 있는 공간들 등등... 영화적 상상력 속에서 우리의 도시 공간이 다시 태어나는 모습들은 나 역시 관객 입장에서, 그리고 도시에 사는 시민으로서 공감하는 부분들이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도시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점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도시에서 태어났고, 여전히 도시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들과 낯설게 느껴졌던 도시의 이모저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말이다. 도시라는 무대에서 인간이 펼치는 드라마를 보고 즐기고 또 의미를 찾아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도시는 영원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도시 이야기는 영원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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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버니, 어디서든 나를 잃지 마
에스더 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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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이라도 모든 것을 내가 짊어져야만 하는 줄 알았어요.
내가 힘들다고 말하지 않으면, 내가 손을 놓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해요. 내가 없이는 모든 게 무너질 거라 생각했지만 인생은 계속됩니다.    p.83

 

일러스트레이터 에스더 김은 LA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10대를 보낸 한국계 미국인이다. 이러한 다문화적 성장 배경으로 작가는 세 도시의 어느 한곳에도 마음을 두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는 완벽한 한국인도, 그렇다고 완벽한 미국인도 되지 못했던 정체성에서 오는 외로움을 담아 한쪽을 향해 있는 큰 귀와 글썽이는 눈망울이 특징인 폭신한 토끼 '에스더버니'를 탄생시켰다. 이 책은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에스더버니의 첫 그림에세이이다.

 

 

이 책에는 귀여운 것을 좋아하고 패션과 문화에 열정적인 리본버니, 감성적이고 사려 깊으며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로즈버니, 워커홀릭에 스스로에게 부정적이고 엄격한 옐로우버니, 작은 일에서 즐거움을 찾고 가진 것에 감사하는 라벤더버니, 조용하고 생각이 깊으며 소녀다운 취미를 가지고 있는 크림버니까지.. 겉모습도, 성격도 너무 다르지만 각각의 버니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러한 버니들이 모두 나라는 것을 깨닫고 다양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즐기기로 했다고 말한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한다. 남자친구에게는 한없이 다정했던 사람이 엄마에게는 투덜대고 소리만 질러대는 딸일 수 있고, 직장에서는 날카로운 카리스마로 가까이 가기에 먼 인상을 주던 사람이 친구들 사이에서는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비행기에 타면 항상 승무원들이 말하죠.
비상시 산소마스크는 자신이 먼저 쓰고 다른 사람이 쓰는 것을 도우라고요.
나를 사랑하는 것도 똑같아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나를 사랑해줘요.    p.211

 

리본버니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쇼핑 테라피를 하고는 한다. 예쁜 것들을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는 느낌이 뭔지 아마 대부분의 여성 독자들이 알 것이다. 옐로우버니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늘 행복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닫는다. 일이 너무 많아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시간이 전혀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운 좋은 일인지 스스로 상기하고 있다.

 

늘 상대방에게 멋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 치장해둔 꽃 뒤에 살그머니 숨어 있는 로즈버니는 누군가 숨어 있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싫어할까봐 두려워한다. 사실 모든 사람이 날 싫어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지만, 내가 나를 싫어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 타인의 시선은 보다는 나 자신에게 더 애정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라벤더버니는 잘한 일이 있을 때는 스스로에게 아낌없이 칭찬해주고, 혹시 실패하더라도 기운내라고 응원을 해준다. 그리고 항상 자신을 격려하고, 칭찬이라는 영양제를 매일 챙겨 먹는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다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폭신폭신 솜사탕 토끼 ‘에스더버니’의 여러 모습을 색상으로 구분해 다채롭게 담고 있고,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그림들이 너무도 달콤하게 가득 담겨있어 참 사랑스럽고, 예쁜 책이다. 섬세한 소녀스러움이 묻어나는 솜사탕 토끼 에스더버니를 통해서,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언제나 내가 ‘나’를 잃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 보자. 나 자신의 행복을 우선시하고,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살 수 있는 용기를 안겨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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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일 때 더 잘한다 -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내향인의 섬세한 성공 전략
모라 애런스-밀리 지음, 김미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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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형인 자신을 사랑하라. 하지만 은둔 성향이 자신의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라. 자신을 돌볼 때는 열심히 사랑해주고, 외부 세계와 마주하기로 했을 때는 온전한 자신으로 소통하라. 매일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지키면서도 세상에 긍정적으로 관여하며 건강한 은둔형 인간이 되도록 스스로를 독려하자. 당신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때를 위해 최상의 모습을 아껴두고 있을 뿐이다.    p.104

 

현대 사회에서 '내성적'이라는 말은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다. 경력 관리, 인간관계, 직장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드높이며 자신을 전시하는 시대, 이 같은 편견에 맞서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책을 만났다. 마케팅 회사 대표, 포브스 팟캐스트 진행자, 칼럼니스트로 활발히 활동 중이지만 스스로를 ‘은둔형 사업가’라 칭하는 저자가 ‘내성적이어도’가 아닌 ‘내성적이어서’ 이뤄낸 성공담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의 필수 조건 대부분이 실제로는 모두 헛소리라고. 그녀가 인터뷰한 150명 이상의 회사 중역들의 고백이 이를 증명하고 있으며, 자신 역시 선천적인 은둔형 인간으로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회의나 강연이 두렵고, 집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로 영업을 담당하고 있으며 성공적으로 회사를 이끌고 있는 사업주이다. 타고난 성향만 보자면 거의 매일 화장실에 숨어 있어야 하며 집을 떠날 수 없는 사람임에도 그녀는 어떻게 성공한 사업가가 된 걸까.

 

 

나는 두둑한 월급보다 지금 당장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 시간에 대한 통제권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하는 시간을 줄인 만큼, 타인의 기대보다 적게 일한 만큼 돈, 명성, 승진, 한창때라는 느낌을 잃게 된다.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일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부분적인 유연근무제나 근무 시간 분할 등의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당신의 시간은 당신의 것이며, 어떻게 사용할지 전략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p.139

 

저자는 서른 살도 되기 전에 회사를 아홉 번이나 옮겼고, 거의 모든 날마다 화장실에서 울었으며, 공황발작을 겪은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많은 미팅과 넘쳐나는 커뮤니케이션을 피해 ‘혼자 숨어 있고 싶은’ 욕망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쉬고 다시 일하며 유연한 일상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이다. 사교적이지 않아도, 24시간 치열하게 일하고 싶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진짜 '나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 그녀는 내향인들만의 깊은 사고력과 그에 기반한 창의성, 고객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진중한 태도 등의 장점을 어떻게 사업적으로 발현시켜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균형 잡힌 일과 여가를 구성하는 방법부터 집 밖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않고 인터넷상에서 인맥을 관리하는 방법까지 불안과 씨름하는 이들에게 각자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처방전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인터뷰한 100여 명 이상의 유명인사와 CEO들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혼자 있는 시간의 힘과 고독의 가치, 검증된 비즈니스 기술, 현실적이어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실제 사연들도 고스란히 담고 있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타고난 성향이나 성격을 고치거나 연기하지 않고도 내재된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화장실에서 우는 사람은 당신만이 아니다. 혼자여도, 불안해도, 숨고 싶어도 괜찮다. 내향적인 성격이 약점이 아니라고, 다수가 아닌 혼자일 때 더 충만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자기계발서는 흔치 않을 것이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자신을 긍정하고 싶다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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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땐, 책 - 떠나기 전, 언제나처럼 그곳의 책을 읽는다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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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축으로 진행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시간은 죽음이라는 일방통행로를 따라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이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데 비해 공간은 유동적이며 탄력적이다. 선택의 가능성이 있기에.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 찰나의 스치는 만남, 이런 것들이 어떤 공간에서는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결과로 변할 수도 있다. 삶에서 예외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상상을 열어주는 공간'이다. 어떤 장소는 우리의 상상을 현실화시키고, 더 나아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 삶을 열어주기도 한다.   p.68~69

 

여행지를 정하고, 숙소와 티켓을 예약하고 현지에서의 계획을 세운 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여행 가방을 싸는 일이다. 꼭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가져가는 것이 목적이라 옷이든 화장품이든 짐을 가볍게 하는데 우선 순위를 두고 짐을 챙긴다. 하지만 책을 서너 권 넣고 나면 항상 망설이게 된다. 이 책을 더 넣을까, 아님 이 책을 빼고 이 책을 데려갈까. 그러다 어느 날에는 겨우 2박 3일 일정의 여행인데, 책을 열 권을 챙겨간 적도 있다. 그렇게 책으로 가득 차 돌덩이가 든 것처럼 무거운 가방을 가져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데리고 오는 여정이 만만치 않았던 기억이 난다. 비행기에서 읽을 책, 호텔에서 자기 전에 읽을 책, 현지의 어느 곳을 방문했을 때 그곳과 어울리는 책들도 데려가고 싶은 마음에 짐을 챙기다 보면, 이건 사람이 여행을 가는 건지 책이 여행을 가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이 여행만큼이나 설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 '걷기 여행' 붐을 일으킨 도보여행가이자 한국 대표 여행작가인 김남희 역시 여행 가방의 필수품이자, 삶의 필수품을 '책'으로 꼽는다. 그녀는 말한다. 근사한 집이 없어도, 든든한 통장이 없어도, 다정한 연인이 없어도, 독서와 여행이 가능한 삶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행은 몸으로 읽는 책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기에, 여행과 독서는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그녀의 여행 역시 배낭에 넣어갈 책을 고르는 일로 시작된다고 한다. 이 책은 작가가 여행을 떠나기 위해, 혹은 여행지에서 습관처럼 펼쳐 든 책들의 이야기가 작가가 머문 그곳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순간들을 담고 있다.

 

 

불빛이 비치는 서점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드넓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기분이다. 슬며시 서점 안을 둘러보며 주인의 취향을 가늠해볼 때면 나쁜 짓이라도 하는 듯 심장이 두근거린다. 시류에 호응하는 책들 사이에 놓인 비주류의 책이 고집스러운 주인의 취향을 은근히 드러낼 때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소중히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 취향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다.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 빼내 손에 들 때면 묻어 있는 먼지조차 사랑스럽다.   p.137


 느릿느릿 흘러가는 치앙마이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천천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고요한 언덕의 도시 리스본에서는 리스본을 사랑한 작가의 소설을 골라본다. 불과 얼음의 땅,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자연이 살아 있는 레이캬비크에서는 범죄 소설이 어울릴 것 같아 평소라면 잘 읽지 않을 장르의 책에도 과감히 손을 뻗어본다. 마음의 그물이 느슨해지는 여행지에서는 독서의 취향조차 넉넉해지곤 하니 말이다. 그리스의 작은 섬 이드라는 어디서건 고양이들을 만날 수 있는 '고양이 섬'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매일 고양이와 함께하는 날들을 보내며 그녀는 후지와라 신야의 책 <인생의 낮잠>을 떠올린다. 네팔 포카라의 호숫가 카페에서 처음 읽었던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끝으로 누르며 한동안 호숫가를 서성이게 만들었고, 브라질의 마나우스까지 들어가 신청한 아마존 투어를 했지만 아마존을 제대로 알지 못해 놓쳐 버린 많은 것들의 아쉬움을 달래 주었던 건 생물학자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의 <나무의 노래>였다.

 

그 외에도 이 책에는 수많은 여행지와 함께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등장한다. <그리스인 조르바>, <바닷마을 다이어리>, <섬에 있는 서점>, <인투 더 와일드>, <안나 카레니나>, <작은 것들의 신>, <모스크바의 신사>, <스노우 블라인드> 등등... 많은 책들이 여행과 함께 하고 있다. 서른네 살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세보증금과 적금을 빼서 세계 일주를 떠났던 모험 이후, 여행자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이제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여행이 매혹적인 이유는 여행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과 후, 우리는 결코 같은 사람이 아니다. 여행을 통해 낯선 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어떤 경험을 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 상 멀리 떠날 수 없을 때는 책 속으로 떠나면 된다. 독서라는 행위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이 준비 없이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점이니 말이다. 숨 막히게 답답한 이 세계를 잠시나마 벗어나 책 안의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삶이든 선택할 수 있다. 여행과 책이라는 환상의 콜라보에 당신을 초대한다. 언젠가는 우리가 여행지에서 책을 든 채 마주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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