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들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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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아주 다를 수도 있었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고, 시야를 넓게 가지기만 했더라도. 일부가 그랬듯, 충분히 이른 시기에 짐을 싸기만 했더라도., 그래서 그 나라를 떠나기만 했더라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바보같이 그 나라가 내가 그토록 오랜 세월 몸담았던 나라와 같다고 믿고 있었다... 두 갈래 길이 노란 숲속에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간 길을 갔다. 그런 길이 다 그렇듯 그 길에도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당신도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나의 시체는 그 가운데 없다.     p.98~99

1985년 출간된 <시녀 이야기>의 34년만의 후속작이자, 작년 부커상 수상작이다. 이야기는 <시녀 이야기>로부터 15년 후를 그리고 있으며, 각기 다른 환경과 직업을 가진 세 여성의 증언을 바탕으로 전작에서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와 함께 길리어드 정권의 몰락 과정을 다루고 있다. 원서처럼 양장본으로 나오길 고대했기 때문에, 양장이 아니라 다소 아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아름다운 표지이다. 표지에 그려진 녹색의 소녀는 또 다른 증언자인 '아그네스'를 상징한다. 붉은 옷을 입은 '시녀'와 대비되는 녹색 옷은 결혼을 앞둔 소녀의 복장으로서, 사령관의 양녀로 키워지나 결국엔 팔려가듯 다른 사령관과 결혼해야 하는 위기에 처한다. 이와 함께 전작에서 독자들의 가장 큰 궁금증을 부른 주인공 오브프레드의 생사와 그녀의 빼앗긴 딸에 대한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고 하니 매우 기대가 되었다.

 

 

'길리어드'라는 나라가 있었다. 여자는 직업도 못 갖고 차도 몰지 못하고, 여러 계급으로 분류하여, 교묘하게 통제하고 착취하는 끔찍한 곳이었다. 특히 '시녀'라는 계급은 국가를 위한 출산의 의무에 동원되어 암소처럼 임신을 강요당하는 곳이었다. 전작인 <시녀 이야기>는 평범하게 살던 한 여인 오프브레드가 어느 날 갑자기 남편과 딸을 뺏기고, 사령관의 '시녀'가 되어 삼엄한 감시 속에서 그와 주기적으로 관계를 갖고 임신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상황을 그렸다. 여러 가지 원인들이 겹치고 겹쳐 인류에게 끔찍한 재앙이 벌어졌고, 대부분의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상태에 놓이게 되자, 국가에는 임신이 가능한 여성들을 강제로 징집해 관리하고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들은 신체적 기능에 의해 하녀, 아주머니, 시녀, 아내 등등의 역할로 규정되고 그들에게 더 이상의 개인적인 삶은 허락되지 않았다. 푸른 옷을 입은 사령관의 아내들, 하얀 베일을 쓴 사령관의 딸들, 그네들의 초록색 하녀들, 그리고 출산이 가능한 생식능력을 가진 여성들로 구성된 '빨간색' 시녀들. 고위층 부부에게 할당되어, 그들 부부에게 '자궁'만을 임대해주는 도구에 전락한 여성의 시선으로 쓰여진 이야기는 그만큼 놀라웠고, 충격적이고, 강렬했다. 이야기는 그녀가 낯선 이들의 도움으로 탈출을 시도하면서 끝이 났다. 그것이 자신의 끝이 될지 새로운 시작이 될지 알 길이 없었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암흑 혹은 빛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딛으면서.

 

 

몇 개월이 흘렀어요. 까치발을 하고 다니며 몰래 엿듣는 삶이 이어졌지요. 들리지 않게 듣고 보이지 않게 보려고 열심히 노력했어요. 문틀의 갈라진 틈새와 거의 닫힌 문들, 복도와 계단에서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기둥들, 벽체의 얇은 부분들을 발견했지요. 내가 듣는 것들은 대체로 조각조각 쪼개지고 심지어 침묵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 파편을 맞추어 말하지 않은 문장을 빈칸을 채워 넣는 재주가 늘고 있었죠.    p.145

독자들은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했고, 오랫 동안 후속편을 갈망해왔다. 그리고 마거릿 애트우드는 "<시녀 이야기>에 대한 독자들의 질문이 이 책에 모든 영감을 주었다"고 말하며, 무려 34년 만에 후속작을 출간했다. <시녀 이야기>에 대해 반복적으로 나오는 독자들의 질문은 '길리어드는 어떻게 붕괴했는가?'였고, 작가는 <증언들>을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썼다고 말한다. <증언들> <시녀 이야기>의 시점으로부터 15년 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길리어드와 엮인 세 여성의 증언을 담고 있다.

우선 전작에서도 등장했던 '아주머니'들의 대표자인 리디아, 그녀는 길리어드의 여성 관련 제도롤 만들고 총괄하는 권력자이다. 길리아드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는 판사였던 그녀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모든 권한을 빼앗기고 수치심을 자극하는 오랜 고문과 압박을 견디며 지금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 과정을 들려준다. 그리고 체제에 복종하며 귀하게 길러진 상류층의 딸 아그네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계모에 의해 비밀경찰 ''의 지휘관인 저드 사령관에 시집을 가게 될 처지가 되는데, 자신이 사랑했던 어머니의 친딸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고 실의에 빠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캐나다에 살면서 TV로만 옆나라인 길리어드를 접해온 '데이지', 그녀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길리어드 시위에 참석한다. 그리고 얼마 뒤 부모님이 탄 자동차가 누군가의 폭탄 테러로 폭발하고,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고 몰랐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이들의 비밀 기록과 녹취록은 서로 교차하며 하나의 이야기로 정교하게 이어지고, 길리어드라는 체제가 어떻게 유지되어 왔고, 또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한 전체주의 국가 길리아드가 국민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모습을 그리는데 치중했던 전작이 충격적이었다면, 이번 신작에서는 광기에 휩싸인 독재국가 길리어드 정권의 비밀과 이에 맞서는 비밀 조직과 여성들의 투쟁을 들려주며 대단원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다. <시녀 이야기> 1985년에 출간되었고, 2017년에 드라마 <핸드메이즈 테일>로 제작되어미투 운동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 대한 반대 운동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하얀 보닛에 빨간 옷을 입은시녀의 복장은 여러 나라에서 낙태죄 폐지 등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데 사용되었고, 덕분에 <시녀 이야기>는 영문판 누적 판매부수만 1,000만부에 육박하는 인기를 얻었다.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와 인권의 소중한 가치를 되찾고자 싸우는 약자들의 반란은 비단 소설 속 상황만은 아니다. 실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소설 속 상황과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길리어드의 조혼, 대리모 문제는 제3세계 여성들이 지금도 겪고 있는 문제이며, 여성에게 재생산 기능만을 강조하며 낙태와 유산을 죄악시하는 규범은낙태죄를 둘러싼 논란을 시사하기도 한다.

나는 되풀이해 거듭 읽고 싶어지는 소설들을 사랑한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하다. 현실에 단단히 발 딛고 서 있는 판타지이자, 세상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담고 있는 소설이며, 그 의미와 가치를 따지지 않더라도 서사 자체만으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한 작품이니 말이다. 드라마 <핸드메이즈 테일>을 보며 충격을 받았었다면, <시녀 이야기>를 읽고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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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1-19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얼렁 사서 읽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말들
천경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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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주로 ‘과거’ ‘기억’으로 이야기되지만 사실은 과거를 담은 ‘현재’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기억은 미래를 향해 지속적으로 변화될 준비를 하고 있다. 학교에서 배워온 사진의 전통적 방식, 순간을 최대 속도로 잡아내고 대상과의 일방적인 관계 맺기에 대한 나의 회의가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였다. 스튜디오 안에서 대상이 되는 인물들간의 교감으로 일어나는 미세한 기운들, 우리가 모르던 감각들을 깨우는 사진을 통한 이 경험들이 과정만을 드러내는 퍼포먼스의 발단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사진이 없는 확장된 사진, 비로소 시간의 양quantity이 아닌 시간의 질quality에 대한 필연적 구상들을 시작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p.189~192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버리고 싶거나 타인에게 주고 싶은 물건 하나를 가져오십시오." 인도 뭄바이의 기차역에서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요청한 질문이다. 익명의 여행자들을 참여자이자 조력자로 초대해 완성하게 된 공동작품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물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주인을 떠난 수백 개의 때 묻은 사물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타인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들, 하지만 할 수 없었던 질문들'을 여러 나라 100명의 참가자들로부터 모아 전시하기도 한다. 당신이 오늘을 잃는다면 미래를 잊게 될까요? 당신은 오늘 하루 한 번 이상의 거짓말을 하였습니까? 질문은 반드시 답을 필요로 할까요? 당신은 벙어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까? 지금 울고 싶나요? 누군가의 물건을 훔쳐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의 삶이 오늘 끝난다면 그것에 동의하겠습니까? 등등 생각에 잠기게 하는 질문도 있었고, 바로 대답이 나오는 질문도 있었고 다양했다.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문의 내용도, 그에 대한 대답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누군가와의 만남이자 대답할 때의 나를 지각하는 시간 그 자체라고 말이다.

 

이 책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온 사진작가이자 공공미술가 천경우, 그의 지난 20여 년간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기록한 첫 에세이집이다. 인도 뭄바이의 기차역, 스페인의 작은 섬마을, 프랑스 교외 지역, 런던올림픽 현장, 뉴욕 타임스 스퀘어, 중국 허난성의 시골 마을, 서울 한복판 을지로, 경남과 전북의 사찰 등 전 세계 곳곳의 전혀 다른 별개의 공간을 무대로 그곳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질문(요청)을 던진 후, 그들이 질문에 반응하여 어떤 경험과 조우하는지를 '예술적 중계자'로서 제안하고 지켜본다. 이 책은 그러한 작품들의 준비, 진행 과정에서의 다양한 에피소드, 참여자들과의 시간 그리고 그 후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그간 꺼내놓을 기회가 없었던 퍼포먼스의 여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작가 노트'이기도 해서 더욱 흥미로웠다.

 

 

사진을 촬영하는 일은 돌이켜보면 온통 모순투성이이다. 카메라 뒤에서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은 작가가 정작 보지도 못한 순간이며 필름 카메라 안에 맺힌 상은 늘 거꾸로이다. 대상의 방향도 반대이지만 음과 양도 반대여서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형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별반 다르지 않은 우리의 눈 역시 실제로는 대상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그저 조그만 뇌에서 균형을 잡는 훈련에 익숙해 있을 뿐임을 되새겨보면 가끔 눈이 잘 안 보이는 무력감에 대해 위안을 받기도 한다. 어쩌면 이 시대에는 모든 것을 선명히 볼 수 없음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p.253

 

이 책에 수록된 익명의 수많은 참여자들과 함께한 소셜 퍼포먼스들은 굉장히 낯설었지만, 그만큼 호기심을 자극했다. 파리의 환경미화원들에게 일과를 마친 후 자신이 새벽 거리에서 청소를 하면서 떠올리는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연필로 도화지에 그려달라고 하거나, 스페인에서는 스카프 크기의 보자기를 만들어 "당신이 생각하는 고통의 무게만큼의 돌알 모아 보자기에 담아주십시오"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과연 고통의 무게를 측정할 수 있을까. 암스테르담에서는 참가자들에게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1분 동안 떠오르는 대로 벽면에 적어주십시오"라는 요청을 했고, 이 퍼포먼스는 6일간 이루어졌다. 인도의 고아에서는 긴 테이블에 서로 알지 못하는 참가자들을 앉혀 놓고 '테이블에 놓인 음식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순서와 선택으로 앞에 앉은 상대에게 먹여줄 것'이라는 지침을 알려 준다. 한 사람이 먹는 음식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하니, 이 퍼포먼스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궁금해지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퍼포먼스들에 대한 과정과 완성된 작품들이 모두 글과 사진으로 수록되어 있어, 공공미술이라는 장르가 낯선 독자라고 해도 무리 없이 빠져들어 이 과정에 참여하게 될 것 같다.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 교감을 중시한 독특한 작품세계를 일구어온 예술가답게 대단히 인상적인 퍼포먼스들이 많았다. 시간과 경험, 기억과 반응, 관계와 소통, 실재와 부재에 대한 질문들 앞에서 그저 이 책을 읽는 독자인 나 조차 직접 참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당신은 지금 카메라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 앞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라는 저자의 말을 변주해, 나는 독자로서 이 책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미처 몰랐던 나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만큼 저자가 보여주는 '소통과 교감의 소셜 퍼포먼스'는 놀라웠고,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답을 찾으면서 나의 기억과 경험들과 조우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작은 공감이 불러일으키는 일상의 기적'을 만나보고 싶다면, 진짜 소통과 교감의 순간을 체험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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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관 살인사건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8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강원주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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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구가 시즈코는 박식하기 짝이 없어. 하지만 그녀는 색인 같은 여자야. 모든 기억이 장기판 조각처럼 정확하게 배열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 그야말로 정확성은 비길 데가 없지 그래서 독창성이나 발전성과는 인연이 없는 거야. 첫째, 그렇게 문학에 감각이 없는 여자에게서 어떻게 비범한 범죄를 계획할 만한 공상력이 나오겠나?"
"도대체 문학이 이 살인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야?" 검사가 따졌다.    p.104

 

통칭 ‘흑사관’이라고 불리는 후리야기 성관에는 오래 전부터 언젠가 괴이한 공포가 생겨날 것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후리야기 성관은 호화스럽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켈트 르네상스 양식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볼거리였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퇴색되어 거칠고 황폐해지더니 언제부터인가 저택 주위를 안개 같은 것이 둘러싸기 시작해 비밀스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성관에서 기괴한 죽음을 연상시키는 변사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동기 불명의 사건이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연이어 성관의 주인인 산테쓰 박사마저 기괴한 방법으로 자살한다. 그리고 1년 뒤,  4중주단원 중 한 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 현악 4중주단을 이루었던 네 명의 외국인들은 어릴 때부터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성관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으며 감금된 채 길러졌다는 소문이 무성했었다. 이렇게 갖가지 억측이 낳은 환상으로 둘러싸인 그곳,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넣어둔 성관과 닮았다고 하여 ‘흑사관’이라 불리는 그곳으로 노리미즈 탐정과 하제쿠라 검사, 구마시로 수사 국장이 투입된다.

 

자. 살인사건이 벌어졌고, 명탐정이 등장해 수사를 하기 시작한다. 여느 추리소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구성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초반부터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 작품이다. 수사 진행은 매우 느리고, 탐정은 사건 해결보다 자신의 편집광적 지식 나열에 더 열을 올릴 뿐이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분명 단어 자체게 크게 어려움은 없는데도, 대체 내가 무슨 내용을 읽고 있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점이다.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노리미즈의 어마어마하게 광범위한 현학적 지식 나열이다. 그는 시종일관 신비주의, 점성술, 이단 신학, 종교학, 물리학, 의학, 약학, 문장학, 심리학, 범죄학, 암호학 등에 대한 지식을 읊어대는데,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 극중 함께 등장하는 이들도 대놓고 불평을 해댈 정도이다. '아아, 미칠 것 같은 이야기군' 이라던가, '도대체 문학이 이 살인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야?' 라던가, '이제 저는 당신의 그 현학주의에 구역질이 납니다'라고 직접적으로 쏘아붙이기도 한다. 독자 입장에서도 노리즈미에게 한 소리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등장 인물이 대신 해주니 속이 시원할 법도 하지만 사실 그런 걸 느낄 겨를도 없이 탐정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질리는 게 더 먼저라는 사실이 아이러니긴 하다. 일단 상황이 이러하니, 추리소설 자체의 재미를 느끼기 보다 역대 가장 현학적인 탐정 캐릭터를 만난다는 데 의의를 두고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일시에 정지한 것 같았다. 마침내 가면이 벗겨지고 이 광기 어린 연극은 끝났다. 항상 심미성을 잊지 않는 노리미즈의 수사법이 여기에서도 또 초기 화약 기술과 연관된 종교전쟁으로 장식되어 화려하기 짝이 없는 결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검사는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담배를 입에서 뗀 채 멍하니 노리미즈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노리미즈는 빈정거리는 듯 웃으며 하트의 역사책을 뒤져 그 페이지를 검사에게 내밀었다.    p.314

 

이 작품은 벌써 국내에서 세 번째 출간되는 버전이다. 2005년에 동서 미스터리 북스로 출간되었었고, 2011년에 북로드의 스토리콜렉터로도 나왔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상미디어의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여덟 번째 작품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이 시리즈는 가능한 한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선정하여 번역하고자 했다는 취지로 기획되어 그 동안은 다소 낯선 작가들의 작품이 출간되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오구리 무시타로의 작품을 새롭게 번역하여 다시 선보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개되었던 것이 9년 전이니, 지금의 독자들에 맞춰 현대의 어법과 표현으로 바꾸어 가독성을 높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추리소설 마니아들에게는 '악명 높은 책'으로 알려져 있다. 유메노 규사쿠의 <도구라 마구라>와 나카이 히데오의 <허무에의 공물>과 함께 일본 추리소설 사상 3대 기서 중 하나로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현학적 문장의 나열이 가장 큰 장애물로, 그 난해함으로 인해서 읽고 있는데도 이해가 어렵다거나,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는 등의 평가를 받고 있는데, 나 역시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평범한 독자들에게 '완독하기 어려운'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명탐정의 지루한 장광설로 완독 포기자 속출'한다는 그 명성 때문에 오히려 추리 소설 독자들에게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추리소설 마니아라고 자부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만나 보아야 할, 끝까지 완독하는 걸 도전해봐야 할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이 작품이 1935년에 일본에서 처음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때, 서문을 썼던 가가 사부로는 “탐정소설계의 괴물 에도가와 란포가 등장한 지 만 10년째 되는 해에 똑같은 괴물 오구리 무시타로가 출현했다”고 말했다. 함께 서문을 썼던 에도가와 란포는 서문에서 “이 작품은 이미 쓰인, 또 이제부터 쓰일 모든 탐정소설의 소재가 집대성된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고 말이다. 자, 이제 도전 욕구가 샘 솟는다거나, 정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거나, 대체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아마도 추리소설 마니아일 것이다. 그러니 당신에게 이 특별한 추리소설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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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갈 곳이 없을까요? 웅진 세계그림책 197
리처드 존스 그림, 공경희 옮김 / 웅진주니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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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없이 혼자 떠도는 개, 페르. 새까만 털은 비에 흠뻑 젖었고, 발밑은 축축한 풀 때문에 차갑다. 페르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두들 어딘가 갈 곳이 있어 보였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달려가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페르는 온종일 돌아다닌다. 들어가 보고, 나오고, 올라가 보고, 내려오고.. 하지만 그 어디서도 페르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페르는 어디로 가야 할까.

 

<눈구름 사자>의 그림 작가 리처드 존스가 보여주는 따뜻한 색채의 감성들이 쓸쓸함를 그리면서도 다정함과 위로를 품고 있어 더욱 인상적인 작품이다. <눈구름 사자>에서 아무도 모르는 세계이지만 나에게 힘을 주는 세계인 환상의 존재를 탄생시켰던 그이기에, 이번 작품에서도 갈 곳 없는 페르에게 누군가 따뜻한 힘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갈 곳 없이 혼자 떠도는 유기견이야말로, 함께하는 친구가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지만, 한때는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 존재였을 페르의 모습이 마음이 아팠다. 유기견 문제는 현실에서도 숱하게 벌어지곤 하니 말이다. 이 추운 계절에 갈 곳 없이 떠도는 현실 속 페르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따뜻하고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하는 리처드 존스는 작품 속에서 동물들을 자주 등장시켰다. 사자, 고래, 그리고 개 등등.. 그들은 어떤 작품에서는 현실에 디딘 발이 힘을 잃을 때 우리의 안부를 물으러 찾아오는 환상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에서는 도시 한가운데 유리 어항에 갇혀 사는 외로운 존재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다른 책에서는 집을 잃고 버려진 존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따뜻한 색채와 위로가 되는 감성이 아닐까 싶다. 색채가 너무 푸근하게 느껴지고, 뾰족하지 않고 둥근 느낌을 주는 그림체도 말랑말랑한 기분을 안겨준다.

웅진 세계그림책 197번째 작품은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한 유기견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어릴 때는 예쁘니까 쉽게 키우려고 하지만, 키우다가 병이 들거나, 귀찮아지면 너무도 쉽게 버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명이 가지는 무게감을, 소중함을 종종 잊어 버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이다.

지금도 거리를 떠도는 수많은 생명들을 기억하며, 사람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고대하며, 길 위의 작은 생명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래본다. 이리 저리 헤매고 다니다 어느덧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페르 앞에 손을 내밀어 주는 작은 존재가 바로 우리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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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버드 수학 시간 - 삼수생 입시 루저의 인생 역전 수학 공부법
정광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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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수학은 우리 일상과 더 밀접해질 것이다. 더 와닿게 얘기하자면 앞으로 이런 것들이 산업이 될 것이고 직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수학 교육은 1980넌대 후반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과 큰 차이가 없다. 당시 유명했던 <수학의 정석>이 지금도 여전히 학생들에게 제1의 수학 교재인 상황이니 말이다. 물론 시험 자체가 새로운 변화에 뒤처져 있는 것이 문제이지, 이 책이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p.44

 

학창시절이 끝나자 마자 가장 먼저 잊어 버린 학문이 아마 '수학'이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대학생이 되고 나서, 이제 다시는 들여다 볼 필요없겠구나 싶어서 제일 좋았던 과목이 '수학'이었고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대체 이런 교과목은 왜 필요한가, 살면서 아무 짝에도 쓸 일 없는 이런 학문을 위해서 왜 우리는 이렇게 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가 말이다. 쓸모 없고, 재미없고, 어렵고, 지루하고...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두 번 다시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은 그런 공부가 수학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늘 수학을 사용하고 있다며, 수학은 그냥 학교 교과목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이 책은 한국의 삼수생이 미국에서 새롭게 수학을 배워 하버드에 들어가고 보스턴 최고의 수학 강사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좌충우돌 미국 수학 적응기와 교습 노하우를 바탕으로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수학 공부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나이 마흔에 하버드대 익스텐션 스쿨에 입학, 수학 교육 전공으로 2년 만에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지 보스턴의 스타 강사로 수많은 제자들을 하버드대, MIT, 존스홉킨스대 등 명문대에 진학시켰다. 평범한 수학 투덜이가, 삼수를 하고도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던 그가, 영어라곤 "예스, 노"만 하는 수준이었던 그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수학을 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앞선 세 유형 중 등반가가 돼라. 산을 오르는 것은 결국 본인이다. 다만 나는 먼저 그 길을 올라본 선배로서 좀 더 효율적으로 올라가는 팁을 알려줄 수 있을 뿐이다. 현명한 체력 안배, 알맞은 등산화, 적절한 수분과 당분 보충, 안전한 등산 스틱 사용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빠르고 쉽게 정상에 도달할 테니까. 마찬가지로 수학에 왕도(王道)는 없어도 정도(正道)는 있다.    p.172

 

왜 수학은 이토록 어려울까? 문제 풀이와 공식 암기가 전부인 양 공부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의 수학 교육의 현주소를 짚어주고, 뭐가 문제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미국의 수학 교육과 비교해가면서, 맥락과 의미를 따라가면 수학 공부는 생각보다 쉽고 즐겁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수학 교육은 '컴퓨터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그들의 수학 교육은 '컴퓨터 쓰는 법'을 배우는 거라는 얘기다. 이 차이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수학과 결코 친하게 지낸 적이 없던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자신이 겪은 무수한 시행착오, 직접 지도한 학생들의 사례, 하버드에서 경험한 새로운 수업 스타일 등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가 제시하는 '수학을 이기는 5가지 방법' 또한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나, 수학 계통도를 보며 개념 간 연결 고리를 파악하라.
둘, 기초 쌓기엔 개념서 다독보다 문제 풀이가 더 좋다.
셋, 쉬운 문제 여럿보다 어려운 문제 하나를 붙들어라.
넷, 매일 10분보다 하루를 제대로 투자하라.
다섯, 무조건 암기하기보다 묻고 이해하며 공부하라.

 

저자는 개념 간 연결 고리를 표현한 수학 계통도를 항시 살피며 공부할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의미와 맥락을 좇아 공부할 때 수학은 생각보다 쉽고 재미있어진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초등 수학부터 고등 수학까지 6개 핵심 줄기로 한 번에 꿰는 수학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차함수의 최댓값과 최솟값이 NASA 우주 탐사 프로젝트로, 소인수분해가 미래 암호 기술로, 행렬과 통계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알고리즘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하며 '진짜' 수학의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수포자'였던 과거가 있는 사람들부터 현재 수학 공부가 너무 힘든 학생과 자녀의 수학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들에게도 매우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수학? 누구나 잘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방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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