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눈
딘 쿤츠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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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판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죽지 않았어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버번을 마시고 나서 혹시 무심결에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도로 이 방에 왔던가.....?
아니다.
필름이 끊기지는 않았다. 이 글자를 쓴 건 그녀가 아니었다.    p.39

 

티나 에번스는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낯선 이의 차에 탄 그녀의 아들 대니를 본다. 대니는 1년전 의문의 버스 사고로 죽은 그녀의 열두 살 난 아들이다. 그녀는 아직도 외아들을 잃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고, 어쩌면 대니가 그 사고로 죽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물론 아들이 죽지 않았다는 생각은 비이성적이었지만, 그녀가 다른 아이를 대니로 착각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최근에 자꾸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아직 치우지 못한 아들의 방에 있던 칠판에 '죽지 않았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게 발견되고, 라디오가 저절로 켜지고, 방 안에 있던 물건들이 저절로 움직이고, 대니가 살려달라고 외치는 악몽을 수시로 꾸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그 공간의 온도가 얼어붙을 정도로 급격히 내려갔다가, 기괴한 증상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정상 기온으로 바뀌곤 했다.

 

이 모든 일들이 대니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 티나는 대니의 무덤을 열어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1년 전 사고 당시, 관계자들이 상태가 나쁘다고 보지 말라고 했기에 아들의 시신을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호사를 통해 시신 발굴 요청을 하는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녀 주변에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아세요?"
"뭡니까?"
"무덤을 열어보고 싶어요."
"대니의 시신을 발굴하고 싶으십니까?"
"네. 아이 시신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아이가 떠났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이토록 힘든 거예요. 악몽을 꾸는 것도 그래서고요. 시체를 봤다면 아이가 죽었다는 걸 확실히 알았을 테니 대니가 여전히 살아 있을 거란 상상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p.147~148

 

이 작품은 딘 쿤츠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리 니콜스'라는 필명으로 40년 전에 썼던 소설 중 하나이다. 그 오래 전에 지금의 '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예견했다고 엄청난 화제가 되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역주행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딘 쿤츠는 스티븐 킹과 함께 서스펜스 소설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며 전세계 5억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그다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던 작가인데, 이번 작품으로 인해 아마 조금 더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재미있는 건 사실 이 작품이 홍보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코로노19 바이러스를 예견 하거나, 2020년 현재 바이러스가 창궐한 사태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작품 속에 그와 관련되어 언급되는 부분은 단 네 줄뿐이다. "그 물질은 우한 외곽에 있는 DNA 재조합 연구소에서 개발되어 ‘우한-400’이라는 이름이 붙었소. 그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인공 미생물 중 400번째로 개발된, 독자 생존이 가능한 종이었기 때문이오. (p.435)" 아주 우연히도 극중 바이러스의 이름과 배경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덕분에 1981년 쓰인 소설이 2020년 세계 각국의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놀라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러니 만약 이 작품을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재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면 읽으면서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당황할 수도 있겠다. 이 작품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주요 소재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일종의 공포소설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그의 후기작에서 나타나는 '강렬함이라든가 인물의 깊이, 복잡한 주제나 전개 방식도 없고, 목이 바짝 타오르는 공포감도 없는' 자신의 초기작이라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소설을 읽는 단순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자연스레 빨라지고, 인물이 겪고 있는 공포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함께 오싹해지며, 스릴과 유머, 매력적인 캐릭터와 감동까지 담고 있는 작품이라 누구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의 스릴러 작품들과는 다르게, 마치 고전 공포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읽게 되는 이 작품은 색다른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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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 서양철학사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부터 니체와 러셀까지
프랭크 틸리 지음, 김기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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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철학사에서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전혀 글을 쓰지 않았지만, 제자 플라톤을 통하여 서양 철학의 전체 발전에서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발휘한 진정한 사상가였다. 플라톤의 대화록은 스승과 제자의 사유가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진짜"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개진한 이론과 소크라테스를 대변가로 삼은 플라톤의 이론을 구별하는 문제는 풀 수 없다... 역사적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상화된 소크라테스를 구별하기 위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독자적인 증거는 거의 불충분하다.   p.92

 

20세기 전반에 걸쳐 미국 각 대학의 철학과 역사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교과서로 사용되었던 책이다. 서양 철학을 다루고 있는 책들이 많이 있지만, 프린스턴 대학에서 평생 철학 교수로 가르친 프랭크 틸리 교수가 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객관성과 공정성'일 것이다. 그는 철학사에서 나중에 등장하는 체계들이 앞선 학파에 대해 아주 훌륭한 비판을 제공한다는 확신을 갖고서 자신의 비판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러셀의 <서양철학사>가 저자의 개성과 주관이 강하게 반영된 책이라 철학사에 대한 공정성과 균형 잡힌 객관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데 비해, 조금 더 공정하고 균형 잡힌 철학사를 다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책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1914년에 초판이 발행되었고 이후 몇 차례의 개정을 거치는 동안, 철학 교재로 많이 채택이 되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테고 말이다.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단순히 철학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있지 않고 책을 읽는 독자들이 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명쾌하고 재미있게 쓴 책이라, 누구라도 쉽게 철학에의 입문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다소 어렵고, 딱딱하고, 지루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철학사를 객관적으로 한편 살펴보고 싶다면, 틸리의 <서양철학사> 읽어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틸리는 역사적 철학자들과 그들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명료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썼고, 이러한 명료함은 이 책 전체에 스며들어 있으니 말이다.

 

 

칸트의 철학은 수많은 문제를 암시했다. 맨 처음이며 아마 결코 어렵지 않은 과제는 철학에서 일어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다. 정신이 자연에 법칙을 규정하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그의 의도 말이다. 당대의 문헌을 보면, 그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초의 노력들 가운데 많은 것이 어떻게 실패했는지 드러난다... 어떤 사람들은 칸트의 가르침에서 종교의 역사적 토대를 파괴하고 자연주의를 증명하는 교묘한 술책을 파악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신앙-철학을 위한 새로운 토대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p.557

 

철학사란 단순히 철학 이론의 연대기적 나열과 설명이 아니라 철학 이론간의 관계, 그것들이 산출된 시대, 그리고 그 이론을 제공한 사상가들과 관련된 연구로 오랜 기간 숙고된 인간의 사유가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는 각각의 세계관을 그 고유한 상황에 놓고, 그것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지적, 정치적,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 요소와 연결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철학사를 다루고 있는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서양 사상의 모든 체계를 떠받치는 초석을 놓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한다. 당대의 환경, 정치, 문학, 그리고 종교적 기원을 살펴본 후 기본적인 그리스 철학의 개관을 짚어 보고 소피스트 이전 철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탈레스, 피타고라스 등을 거치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한 체계가 시작된 시대를 다루면서 더 깊이 있게 그리스 철학의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중세 철학과, 근대 철학, 현대 철학에 이그리까지의 과정은 그 내용도 방대하거니와 분량도 엄청나서 한번에 요약할 수도, 읽고도 제대로 다 소화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정말 교과서처럼 자주 들여다보고, 여러 번 재독해야 서양철학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할 것 같다. 어떤 철학 교수는, “철학사는 특색과 장점이 저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 종류도 또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국내에도 여러 철학사 책들이 출간되어 있는데, 각각의 장단점이 있을 테니 다양하게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서양철학사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면,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쓰인 서양 철학사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20세기에 전반에 걸쳐 오랫동안 사랑 받은 불후의 명저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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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4-24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책 바로 추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오나 2020-04-25 13:14   좋아요 0 | URL
ㅎㅎ 재미있게 읽으시길!
 
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
이마무라 나쓰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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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치마와 친구가 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궁리하는 사이 점점 시간만 흘러간다.
느닷없이 말을 거는 건 이상하다. 아마 보라색 치마는 지금껏 한 번도 “저랑 친구 하실래요?”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경험이 없지 않을까. 그런 식의 만남은 부자연스럽다. 헌팅하는 것도 아니고.    p.15~16

 

동네에 '보라색 치마'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보라색 치마를 입고 다니는 그녀는 대개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상점가 빵집에 크림빵을 사러 간다. 그리고 공원으로 향해 '보라색 치마 전용석'이라 불리는 벤치 한가운데 자리잡고 막 사온 빵을 먹는다.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나'는 이른바 '노란색 카디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쉽게도 '보라색 치마'와 달리 '노란색 카디건'은 그 존재를 특별히 알아주는 사람은 없지만 말이다. '나'는 '보라색 치마'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그녀가 내 언니를 닮은 것 같다고, 전직 피켜스케이팅 선수인 방송인을 닮았다고, 그러다 초등학교 친구 메이를 닮았다고 생각해보다 전에 살던 동네 마트의 캐셔 여자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의 집이 어디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백수일 때는 어느 곳으로 면접을 보러 가는지에 이르기까지 지켜보는 중이다. 그러다가 자신이 다니는 직장의 구인광고가 나온 전단지에 표시를 해서 그녀의 전용석에 몰래 갖다 놓기에 이르고, 결국 그녀와 같은 호텔에서 근무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객실 청소원으로 일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도록 친해지기는커녕, 제대로 된 대화 조차 나누어보지 못했다. 어딘가 사회부적응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직원들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해 어수룩해 보였던 '보라색 치마'는 점점 새로운 일에 적응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녀가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정상적으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자 오히려 화자인 '나'의 모습에서 불안한 점들이 엿보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사실 '나'의 행동들은 모두 완전히 낯선 상대를 '스토킹'하는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기도 하고 말이다.

 

 

보라색 치마가 객실 청소원이 된 지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좋건 나쁘건 직장생활이 몸에 익었는지도 모른다. 왠지 쓸쓸한 기분도 들지만 별수없다. 여자가 대다수인 직장에서 화제에 오르는 건 대개 누군가의 뒷담화니까. 관심이 없어도 있는 척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이 사람, 내일은 저 사람, 쉴새없이 대상이 바뀌면서 뒷담화는 계속된다. 늘 누군가가 누군가의 얘기를 한다.    p.79

 

이 작품은 2019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다. 이 상은 일본 현대문학의 지표이자 신인 작가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로 통하는데, 이마무라 나쓰코는 현재 일본 문단에서 가장 주목 받는 여성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가벼운 분량에다 담백한 문장으로 앉은 자리에서 금방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상한 건 책을 다 읽고 나서의 기분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그런데 이게 뭐지? 내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읽은 거지?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에서는 독자들이 대부분 화자가 생각하는 대로, 화자가 보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스릴러 장르에서 자주 사용되는 장치인 '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방식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서 극 초반부터 '보라색 치마'라는 도시전설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인물을 화자인 '나'가 지켜보고, 친분을 갖고 싶다는 선망을 가지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거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이렇게까지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대체 왜 '나'는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관계가 되어서까지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렇게 지켜보기만 하는 걸까, 이상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잘 모르는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 혹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마음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보통 인간 관계라는 것이 시작되는 것도 이러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상대의 일상을 염탐하고, 주위를 맴돌며, 관찰을 넘어서 집착을 하게 된다면 문제가 있다. '나'라는 인물이 하는 행동은 다소 지나치게 느껴질 정도로 진지하고, 상식적인 수준을 살짝 넘어서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주인공의 심리가 어느 순간에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이상한 점일지도 모르겠다. SNS 등을 통해서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것이 일상화가 된 현대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매력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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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 2020-08-05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리뷰 잘 쓰시네요!
 
실버 로드 - 사라진 소녀들
스티나 약손 지음, 노진선 옮김 / 마음서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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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죽기라도 한 거야?”
“아마 그럴 거야. 확실한 건 아무도 몰라.”
여학생은 이끼 위에 침을 뱉고는 나른하게 메야를 바라보았다.
“이 시궁창 같은 마을에서 성자가 되고 싶으면 연기처럼 사라지면 돼. 그럼 다들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하려고 경쟁할 테니까.”    p.115

 

언덕이 겨울의 허물을 벗고, 녹은 서리가 땅 밑으로 흘러가고, 빛이 밤을 다 먹어 치운 뒤 곳곳에 침투해 환히 밝히는 계절이었다. 밤에도 태양이 지지 않는 백야, 렐레는 낡은 볼보를 몰고 밤마다 실버 로드를 따라 딸 리나를 찾아 다닌다. 그저 잠을 자느라 낭비하기에는 너무 짧은, 그에게는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곧 햇볕이 서서히 사라지고,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썩고 얼 것이며, 겹겹의 폭설 밑에 감춰질 것이다. 지난 3년간 리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년 전 렐레의 열일곱 살 딸 리나는 아침 일찍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사라졌다. 목격자도 단서도 없이 사건은 미궁에 빠졌지만, 렐레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딸을 찾기 위해 어두운 숲과 안개 낀 습지, 인적 드문 농가와 폐가를 샅샅이 수색하고 있다. 그런데 또 다시 동일한 사건이 반복된다. 리나와 너무도 닮은 외모와 키까지 같은 열일곱 살 소녀가 캠핑장에서 실종된 것이다.

 

한편, 열일곱 소녀 메야와 엄마 실리에는 인터넷으로 만난 남자 토르비요른의 집으로 이사를 온다. 그들 모녀는 지긋지긋하게 가난했고, 실리에는 자신들을 돌봐줄 남자가 있다면 기꺼이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수십 번의 이사를 거치며 메야 모녀는 스웨덴 북부의 적막한 마을에 이르렀다. 딸이 집에 있든 말든 남자와 거침없이 섹스하고, 집에서는 거의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릴 때가 아니면 약에 취해 있거나 술을 마시는 엄마로부터 메야는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얼마나 파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알기에, 그런 엄마를 지키고 감시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야는 인근에 사는 삼형제의 막내 칼 요한을 만나게 되고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의 가족은 기술문명과 교육을 거부하고 숲에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독특한 사람들이었는데, 안정된 가정을 꿈꿨던 메야는 칼 요한과 그의 가족들과 함께 살기로 하고 그들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살아 있는 밤은 뒤틀린 나무 사이로 축축한 입김을 거르고, 호수와 강 위로 안개를 날려보내 춤추게 만들었다.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렐레는 자동차 보닛에 몸을 기댄 채 담배 연기와 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어둠 속에서 전조등이 겨우 3,4킬로미터 앞까지 밝혔다. 인적 없는 실버 로드가 그를 기다리며 죽음의 덫처럼 옆에 누워 있었다. 밤새 뒤지고 다녀봐야 길을 잃을 것이다.    p.133~134

 

이야기는 3년 전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여전히 수색을 멈추지 않는 렐레와 제대로 된 가정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소녀 메야가 남자친구네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는 두 갈래로 진행된다.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따로 전개되던 두 이야기는 또 한 번의 여름이 지나고 다시 본업인 고등학교 선생으로 돌아간 렐레가 전학 온 메야를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교집합이 생겨난다. 렐레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외로워 보이는 메야가 신경이 쓰였고, 그녀를 보면서 딸 리나를 떠올린다. 메야 역시 실종된 딸을 찾아 다니는 아빠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선생님이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처럼 불쌍해 보여 마음이 쓰인다. 차곡차곡 두 인물의 시선을 따라 번갈아 가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을 쌓아가며 후반부의 섬뜩한 반전에 다다른다. 과연 실버 로드에서 사라진 소녀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스티나 약손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2019년 ‘유리열쇠상’ 수상작이다. 북유럽 최고의 장르문학에 수여하는 유리열쇠상을 신인 작가가 데뷔작으로 받는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국내에 출간되었던 유리열쇠상 작품들만 보더라도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요 네스뵈의 <박쥐>, 그리고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스티그 라르손, 유시 아들레르 올센 등 엄청난 작가들이 포진하고 있으니, 그 위상을 짐작할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탄탄한 구조와 매혹적인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뛰어난 계절과 장소에 대한 묘사와 섬세한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백야의 풍경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에 더욱 매혹적이다. 푸른색이 감도는 무섭도록 적막한 숲과 진물이 나는 상처처럼 퍼지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늪,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깊고 시커먼 호수, 그리고 그림자들이 춤을 추는 자작나무 가지 아래서 들리는 바스락 소리, 검은 수면 위에 둥둥 떠 있는 눈부시게 새하얀 수련... 그 숲의 심연에 고여 있는 어둠을 마치 손에 잡힐 것처럼,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어 누구라도 책을 읽는 동안 스웨덴 북부의 적막한 마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섬뜩하지만 매혹적이고, 강렬하지만 우아한, 아주 놀라운 북유럽 스릴러를 만났다. 스티나 약손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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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가는 유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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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휘두르고 고함을 지르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복종하며 스스로를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 좁고 허름한 집, 늘 똑같은 식사와 똑같은 옷, 둘이 나눠 쓰는 학용품, 게다가 게임도 스마트폰도 없이 하루하루 살다 보면 기분이 암울해질 따름이다. 그런 생활이 기본이었던 우리에게 1년에 하루라고는 하나 남과는 다르게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정신적인 구원이었다.     p.38

 

쌍둥이 형제인 유가와 후가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그걸 방임하는 어머니 밑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에게 아무 이유 없이 걷어차이고, 얻어맞았고, 남편의 폭력에 기를 못 펴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형제가 선택한 유일한 무기는 바로 '공유'였다.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만큼 혼자보다는 함께인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늘 함께 다녔고, 오로지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중에 서로가 있었던 장소가 서로 뒤바뀌는 증상을 경험하게 된다. 갑작스레 찌릿찌릿 떨리고 막에 감싸인 듯한 감각이 밀려오면 그 자세 그대로 굳어서 바로 다른 장소에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순간 이동은 1년에 단 하루, 그들의 생일에만 두 시간 간격으로 일어났다. 이 특별한 능력은 불운으로 점철된 우울한 형제의 일상에 작은 탈출구가 되어 준다.

 

그저 잠깐 동안의 이동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수도 있지만, 남들처럼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하고 있던 유가와 후가 형제에게는 아주 큰 힘이 되어 주었다. 1년에 단 하루라도 남과는 다르게 특별할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이들에게 일종의 '정신적인 구원'이었으니 말이다. 이들은 생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그리하여 이들 형제는 이 특별한 순간 이동 능력을 이용해 왕따를 당하던 친구를 도와주고, 어른들에게 착취당하던 여자 친구를 구출하기도 하며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악한들을 응징한다.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나와 후가가 사회에서 엇나가지 않기 위해 익힌 지혜 중 하나에 따르기로 했다. 바로 '모르는 게 있으면 아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구하라'다. 그게 제일 손쉽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당연히 아는 것도 모른 채,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도 갖지 못한 채 살아왔다. 유치원 때까지 저녁을 매일 먹는다는 것도 몰랐을 정도다.    p..164

 

겉모습은 똑같은 쌍둥이 형제였지만, 유가와 후가는 성격도, 취향도 완전히 달랐다. 공부를 잘하는 형 유가는 과거와 미래만 신경 쓴다. 그에 비해 운동을 잘하는 동생 후가는 지금 이 순간만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후가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욱하는 터프한 성향이 있는데, 유가는 그런 동생의 앞날이 걱정되는 성향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들 형제를 보고 어쩐지 '천사와 악마 같다'고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렇게 얼굴은 같은데 완전히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라서, 이들이 순간 이동 능력을 통해 상대를 당황시키거나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나쁜 상황을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앞에 놓여진 현실이 바뀌는 일은 없다. 그들 역시 ‘세상에 슈퍼히어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냉소하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의 특별한 능력을 이용해서 고통 받는 약자들에게 조금씩 도움을 준다.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에는 그 어떤 위험하고 진지하고 무시무시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유머가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닥친 그 상황과 상관 없어 보이는 무심한 유머를 툭툭 뱉어내며, 이야기는 가벼운 재미를 추구하는 것처럼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묵직한 여운을 남겨준다. 이 작품 역시 아동 학대와 왕따, 납치 및 살해, 청소년 범죄의 폐해 등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거운 이야기들이 계속 등장하지만,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슈퍼히어로'들과는 다르지만, 이사카 고타로식 히어로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색다른 유쾌함과 순수한 따뜻함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이사카 고타로의 초기작들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이번 작품이 더 마음에 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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