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더봇 다이어리 : 인공 상태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8
마샤 웰스 지음, 고호관 옮김 / 알마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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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만 5천 시간 전쯤에 나는 라비하이랄 광산 시설 큐 정거장에서 계약을 맡았어. 임무 도중에 폭주해서 고객의 상당수를 죽였지. 그 사건에 관한 내 기억은 부분적으로 지워졌어."
보안유닛의 기억 삭제는 언제나 부분적이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유기체 부분 때문이다. 유기체 신경 조직의 기억은 지울 수가 없다.    p.49

 

먼 우주로의 여행이 일상이 된 미래, 사람들이 외계 행성을 탐사하려면 기업의 승인을 받고 보안 유닛과 함께 해야 했다. 이야기의 화자는 사람이 아니라 보안용 안드로이드인 머더봇murderbot 이다. 그는 스스로를 '살인기계'라고 부르는데, 오래 전 사람을 죽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의 지배모듈이 오작동을 일으켜, 시스템의 통제권을 잃고 자신이 보호해야 했던 사람들인 채굴 작업자 쉰일곱 명을 죽였기 때문이다. 회사는 그를 회수해서 새 지배모듈을 설치했고, 그 뒤로 3만 5천 시간이 훌쩍 넘을 동안 살인을 한 적은 없다. 대신에 그 시간 동안 영화와 드라마, 책, 연극, 음악을 즐기며 지냈다. 다운받은 드라마 보는 걸 가장 좋아하는 안드로이드, 인간에게 냉소적이고 자신을 무자비한 살인기계로서는 실패작이라고 칭하는 독특한 캐릭터이다.

 

 

이번 작품에서 머더봇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스스로를 살인기계라고 부르게 된 과거 학살, 비극의 장소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 동안 머더봇은 주로 외딴 시설이나 거주민이 없는 탐사 행성에서 하는 일을 해왔다. 하지만 화물선을 타고 돌아다니며 드라마나 보면서 남은 삶을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텅 빈 화물선을 혼자 타고 환승 고리까지 와서 자신이 자유로운 봇이며 인간 보호자에게 돌아가려는 중이라고 속이고 우주선을 얻어 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를 만나게 된다. 심술을 부릴 정도로 똑똑한 우주선 봇이 그가 탈주한 보안유닛이라는 알아보고 말을 건 것이다. 머더봇은 우주선봇과 함께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그의 도움으로 신분을 위조해 증강인간인 척하며 인간들의 팀에 합류해 그곳으로 향한다. 과연 그는 자신의 정체를 찾을 수 있을까?

 

 

"스스로 어떻게 대처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도 있는 법이에요. 그저 살아남아서 계속 나아가야 하죠."
다들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는 불안해져서 곧바로 옆에서 우리를 볼 수 있도록 가장 근처에 있는 보안카메라의 시야로 전환했다. 내 의도보다 더 강조해서 그 말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원래 세상일이 다 그랬다. 그 말이 왜 그렇게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p.143

 

이 시리즈의 전작인 <머더봇 다이어리: 시스템 통제불능>은 2018년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을 석권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작품 <머더봇 다이어리: 인공 상태> 역시 2019년 휴고상과 로커스상을 수상하며 2년 연속 세계 SF 어워드를 석권한 시리즈가 되었다. 총 4부작인 ‘머더봇 다이어리’ 시리즈는 내년에 <머더봇 다이어리: 로그 프로토콜>과 <머더봇 다이어리: 탈출 전략>으로 이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머더봇 다이어리' 시리즈가 매력적인 이유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통해 인간답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는 점 때문이다. 늘 연결돼 있지만 혼자이기를 갈망하는, 인간을 냉소하지만 필요할 때는 따뜻한 농담도 건넬 줄 알고, 드라마를 많이 본 덕분에 위기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할 줄도 아는, 소심하고 사회성 없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살인봇이라는 전대미문의 캐릭터 또한 매우 인상적이고 말이다. SF라는 장르 중에서도 스페이스 오페라는 다소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과학적 공상과 상상력이라는 것이 재미를 보장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가가 구축한 세계의 설정들을 이해했을 때 가능한 지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는 문턱이 그리 높지 않아 누구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머더봇이라는 안드로이드의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고, 가장 비인간적인 존재여야 할 인공지능이 마치 진짜 인간처럼 생각하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는 과정 또한 흥미진진하니 말이다. 이 매력적인 안드로이드와 함께하는 장대한 우주 모험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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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8-19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을것 같네요. 서재에서 이렇게 새로운 작가나 책을 만나는게 항상 좋네요.
 
작가들과 반려동물의 사생활 에프 그래픽 컬렉션
캐슬린 크럴 지음, 바이올렛 르메이 그림, 전하림 옮김 / F(에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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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글을 써서 처음 받은 원고료로 가장 먼저 반려 동물을 입양했다. 그녀에게 빵, 월세, 신발, 정육점 대금을 지불하는 것보다 아름답고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페르시안 고양이를 데려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는 사람보다 고양이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애정 가득한 말투로 고양이만큼이나 신비한 글을 쓰고 싶다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어린 시절부터 한결같이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길렀다. 오늘날에도 헤밍웨이의 생가에 가면 그가 키웠던 스노우볼의 후손들 40여 마리가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다닌다고 한다.

 

수 세기 동안 미술가, 작가, 과학자, 철학자 등이 자신의 반려동물들과 함께 해왔다. 이 책은 반려동물과 함께한 20명의 작가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은 반려동물과 함께한 작가들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간결하게 에세이처럼 보여주고 있는데, 작가와 그의 반려동물들이 구석구석 일러스트로 함께 하고 있어 더욱 사랑스럽다. 개와 고양이, 까마귀, 생쥐, 토끼, 야생 조랑말, 공작새, 닭들까지.. 다양한 반려동물들이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있다. 에드거 앨런 포, 찰스 디킨스, 마크 트웨인,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커트 보니것, 플래너리 오코너, J.K. 롤링 등 19세기의 작가부터 21세기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가들의 일생을 모두 담고 있어 더욱 특별하다.

 

작가들이 자신의 반려동물에 대해 남긴 유명한 말들도 인상적이다. 커트 보니것은 "누구에게든지 물어보세요. 개와 고양이가 우리 사람보다 더 영특하답니다." 라고 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고양이는 절대 감정을 속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속이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지요." 라고 했다.

 

 

마크 트웨인은 "누구든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의 소개말은 필요 없습니다. 이미 나는 그 사람의 친구이자 동료입니다." 라고 했으며, 찰스 디킨스는 "고양이에게 사랑 받는 일보다 더욱 위대한 선물이 또 있을까?" 라는 말을 남겼다. 반려동물에 대한 작가들의 각별한 사랑은 조금 독특해 보이기도 했고, 가끔은 유별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충분히 공감할 만했다. 나 역시 반려동물과 오래 함께한 세월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작가라는 직업의 특성상 혼자만의 시간을 오래 가져야 하는 외로움 때문에 반려동물이 주는 위로와 위안이 특별했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의 이력과 작품 세계, 그의 대표작과 반려동물에 얽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너무 매력적이다. 그들과 반려동물의 사연 덕분에 위대한 작가들이 더욱 인간적으로,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참 좋았다. 게다가 매 페이지 마다 곳곳에 그려져 있는 작가들과 반려동물의 일러스트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소장용으로도 가치가 있는 책이다. 반려동물이 인간과 함께 삶을 살아가는 동반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작가들이 사랑한 반려동물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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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으로 생각하는 힘 - 일상의 모든 순간, 수학은 어떻게 최선의 선택을 돕는가
키트 예이츠 지음, 이충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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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기간의 시간을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에 대한 비율로 판단한다면, 지각된 시간의 기하급수적 증가 모형이 이치에 닿아 보인다. 34세인 나에게 1년은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의 3% 미만에 해당한다. 요즘 들어 내 생일은 너무 빨리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열살 꼬마는 다음번 생일 선물을 받을 때까지 살아온 생애의 10%를 기다려야 하며, 그러려면 거의 성인에 가까운 인내가 필요하다. 네 살인 내 아들이 생일을 다시 맞이하려면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의 4분의 1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p.63

 

이 책은 일상에서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수학의 영향력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기하급수적 증감을 몰라 큰 재산을 날린 투자자, 악의적 확률 해석 탓에 두 자녀 살해 누명을 쓴 엄마, 잘못된 알고리듬 때문에 파산한 기업가, 오심의 무고한 피해자, 소프트웨어 결함 대문에 피해를 입은 선량한 시민, 에이즈 (거짓) 양성 판정을 받고 지옥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 등의 실제 사건들이 모두 수학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사회의 모든 곳곳에서,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수학을 통해서 그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수학이 불쑥 튀어나올 곳을 알려주는 대신에 단순한 수학 규칙과 도구로 무장시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에는 방정식이 하나도 나오지 않으며, 수학책이 아니고, 수학자를 위한 책도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이 책의 정체는 뭘까.

 

 

우리는 읽고 보고 듣는 것을 통해 늘 수의 폭격을 받는다. 예컨대 21세기의 생활 방식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대한 대규모 코호트 연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축적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 발견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수를 다루는 기술도 증가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숨겨진 의도 같은 것은 없으며, 그저 통계 수치를 해석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렇지만 어떤 발견을 비틀어 해석하면 특정 당사자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다.      p.171

 

이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수학은 바로 확률과 패턴이다. 수백 개의 방정식이나 수많은 행의 컴퓨터 코드가 등장하진 않지만, 다양한 상황에 따른 패턴 분석을 위해 끊임없이 수치가 등장한다. 그래서 수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어려워하는 독자라면 다소의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그 모든 것들을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수치들을 이해하지 않아도, 혹은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이 책을 즐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저 저자가 들려주는 다양한 사례와 이야기들을 읽기만 해도 수학을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숨은 패턴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왜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 질병 선별 검사 결과 판정이 틀릴 가능성은 얼마나 있는지, 법정에서 수학이 잘못 사용되어 오심이 벌어지거나, 수학적 오해 덕분에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가 풀려난 경우, 어떤 모임에서 두 사람의 생일이 일치할 확률이라던가, 식당을 고를 때 실패율을 낮추는 방법, 전염병 확산 패턴을 읽어내는 수학 모형 등 우리 일상의 수많은 부분들이 모두 수학으로 설명이 되고 있어 놀라웠다. 저자는 말한다. '실제 세계에서 실행할 수 없는 시나리오들을 시험하는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때로는 놀라우면서도 직관에 반하는 결과를 내놓는 것이 바로 수리역학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말이다. 정말 알고 보니 이 세상이 수학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 책을 만나 보자. 수학이 무엇보다도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는 실용적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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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피스트
헬레네 플루드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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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뭐?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내가 뭘 알지? 남자들이 거짓말을 한다면 그 첫 번째 대상은 그들의 아내가 아닌가? 사람들은 수천 가지 이유로 가장 가까운 이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나? 나도 거짓말을 했다 - 어쩌면 자주 하는지도 모른다. 시구르에게도. 특히 시구르에게는. 나는 그에게 내 상담실이 잘되고 있다고, 겨울이라 환자를 찾기가 좀 어렵지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한다. 차고 위의 상담실에 있으면 외롭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      p.56

 

사라는 잠결에 남편이 나가며 인사하는 소리를 듣는다. 건축가인 남편 시구르는 주말 동안 친구 두 명과 함께 산장에 다녀오기로 했다. 심리치료자로 집에 상담실을 마련하고 일을 하는 사라가 금요일에 만나야 할 환자는 세 명이다. 그들 부부가 사는 집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이곳 저곳 손 볼 곳이 많았고, 그들은 빨리 집을 개조하고 싶었지만 시간도, 예산도 부족해 아직 집안 여기저기가 리모델링 중인 상태였다. 사라가 환자 한 명과 상담하는 동안 시구르가 음성 메세지를 남겼다. 친구들과 산장에 잘 도착했다는, 그저 안부 전화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남편과 함께 있어야 할 그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시구르가 오겠다고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았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그는 분명 오전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었고, 친구들에게 연락이 온 건 이미 저녁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자,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남편의 거짓말 혹은 실종에 대해서 아내가 느끼는 분노나 배신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남편의 실종 사건을 대하는 아내의 반응이 여타의 작품들과 확연히 다르다. 물론 그녀는 끊임없이 이상한 부분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고, 시어머니에게 연락을 하고, 언니를 찾아가 이야기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녀가 집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상을 보내고, 집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흔적을 통해 불안에 휩싸이게 만들어 남편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아내가 인정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무려 백 페이지 정도를 할애하면서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곧 실종 사건은 살인 사건이 되어 그녀에게 들이 닥친다.

 

 

누구나 사랑받고 존경받고 싶어 한다 - 인간이라면 당연한 거다. 하지만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상대가 나를 봐주지 않는 것 - 그래, 그것도 나쁘다 - 하지만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 숲속에서 비명을 질렀는데 아무도 대답이 없다면, 비명을 질렀다고 할 수나 있을까?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는데도 남편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 일이 일어나기는 한 것인가?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 나라는 그 작은 존재가 당신이 집과 침대를 공유하는 남자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가?     p.285

 

대단히 근사한 작품이다. 아마도 내가 읽었던 심리 스릴러 장르의 작품들 중에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당분간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은 없지 않을까 싶었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사실 유사한 장르의 작품들을 너무 많이 읽어 왔기에,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초반 100~200페이지 정도만 읽어도 대충 답이 나온다. 이 작품을 끝까지 다 읽어야 할지 말지, 후반부의 내용이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유사한 플롯, 비슷한 구성, 평면적인 인물들과 깜짝 효과만을 노린 반전 등등.. 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가끔 정말 바쁜 경우에는 초반부만 읽고 중반부터는 대충 훑어 보기만 하고 리뷰를 작성하곤 했다. 실제로 스릴러 장르에서 '서스펜스'를 독자들에게 안겨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심리' 스릴러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작품들 대부분이 독자들에게 불안감과 긴박감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그 호흡을 끝까지 지속하지 못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다르다. 초반 100여 페이지가 지나기도 전에, 나는 앞으로 내가 이 작가의 작품을 계속 챙겨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헬레네 플루드는 실제 심리학자로 일하고 있으며 그녀의 전문 분야는 폭력성, 재피해자화, 트라우마와 연관된 수치심과 죄의식이다. 바로 그 '심리학자가 쓴 심리스릴러'라는 점 때문에 이 작품이 여타의 심리스릴러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매력을 발산하게 된다. 사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 초반에 극중 사라가 환자 세 명과 심리 상담을 하는 장면이 있다. 아직 남편의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전이라 그저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녀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부모와 남자친구와 문제가 있는 열여덟의 베라, 부모의 이혼으로 과격한 옷차림에 뚝 떨어진 성적으로 엄마에게 반항 중인 크리스토페르, 게임에 중독되어 있어 부모님의 골칫거리인 트뤼그베. 작가는 이들 세 명을 대하며 사라가 생각하는 것들, 상담하는 과정들만으로도 독자들이 사라라는 인물에 대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그려내고 있다. 사실 줄거리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아무 의미없을 정도로, 이 작품은 직접 문장들을 읽고, 그 분위기를 체험해봐야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스펜스로 가득하고,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며, 대단히 우아하고 뛰어난 문장으로 쓰인 작품이니 말이다. 내년에 출간될 예정인 작가의 다음 작품을 빨리 만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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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왕국 프로이센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박병화 옮김 / 마티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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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늘 곁에 두고 책으로부터 자극을 받고 싶은 프리드리히의 욕구는 너무도 본능적이어서 그는 원정 기간용으로 만든 이동식 '야전도서관'까지 갖추고 있었다. 글쓰기(언제나 프랑스어로)도 중요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하는 소통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 피난처였다. 그의 글에는 철학자의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행동하는 남자의 대담성과 발랄함을 결합하려는 열망이 담겨 있다. 이 두 가지 인간 유형은 '철인왕'이라는 치기 어린 자기 묘사 속에서 결합되었다. 철인과 왕 두 가지 역할 중 어느 것 하나만으로는 자신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p.265

 

지금은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곳, 한때 독일 인구의 62퍼센트, 면적의 65퍼센트를 차지한 거대한 땅이자 권력이었지만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지워져 버린 프로이센.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언급되던 것을 빼고는 전혀 들어볼 일 없었던 그 프로이센에 관한 엄청난 책을 만났다.

 

 

모든 언어를 막론하고 프로이센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 받는 이 책은 프로이센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지워졌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무려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때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위풍당당해 보였던 국가가 어쩌다 그렇게 급작스럽고 감쪽같이, 그 어떤 애도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량의 압박을 견뎌야만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을 만큼 흥미로운 책이었다.

 

책의 서두에 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의 역사를 보여주는 여섯 개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1415년 무렵의 지도부터 1918년 독일제국 시절의 프로이센을 보여주는 지도까지 시간대 별로 변두리 소국으로 출발해 독일을 통일시키고 제국으로 발돋움하기까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프로이센은 베를린 시를 중심에 둔 4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지역인 브란덴부르크에서 시작되었다. 그저 단조로운 자작나무와 전나무 숲이 대부분의 땅을 뒤덮고 있던 시골 지역이었다. 토양은 척박해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윤지로 둘러싸여 방어를 위한 어떤 종류의 자연경계선도 없었다. 그렇다면 장래성 없던 이 영지가 어떻게 강력한 유럽 국가의 심장이 되었을까.

 

 

1860년 <타임스>의 머리기사를 보자... 프로이센은 언제나 누군가에 의지하는 사람 같았다. 언제나 자신을 도와줄 상대를 찾으면서 결코 자립할 의지가 없는 사람, (...) 회의에는 참석하지만 전투에는 빠지는 사람, 얼마가 되었든 이상이나 감성은 있지만 현실 앞에서는 수줍음을 타는 사람 같았다. 프로이센은 대군을 거느렸지만 그 군대는 전투의지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 어떤 나라도 프로이센을 우방으로 여기지 않으며, 어떤 나라도 프로이센을 적으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떻게 프로이센이 강대국이 되었는지는 역사가 말해주지만, 왜 프로이센이 아직도 강대국인지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687~688

 

대부분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프로이센의 연대기 역시 온갖 굵직굵직한 전쟁들을 통과한다. 30년 전쟁, 북방전쟁, 7년전쟁, 프랑스혁명, 나폴레옹 전쟁,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무슨 전쟁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 속에서 주요 통치자들과 사건들, 그들의 과거부터 이력에 이르는 것들을 낱낱이 다루면서도 이 책은 당시 살았던 평범한 백성들의 이야기도 놓치지 않는다. 전쟁이 민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실제 진격 중인 군대가 지나가는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대중 문화에 어떤 재앙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수백 년에 걸친 프로이센의 정치, 사회적인 변화들을 이렇게 구체적이고, 점진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7년 연합군 점령 당국은 프로이센이 전쟁을 일으킨 독일 내 주범으로 지목 당해 프로이센 주와 그 중앙정부, 그리고 그 정부기관은 프로이센이라는 이름과 함께 모두 폐지된다. 저자는 이러한 프로이센의 서사를 다루면서 선악을 나누거나 그 경중을 가리지 않으려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여전히 프로이센을 둘러싼 논쟁이 생기면 양극단으로 갈리고는 있지만, 이 책은 거기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프로이센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프로이센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국내에 그 동안 한 권도 없었기에, 출간 만으로도 굉장히 의미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주요한 정치적, 외교적 사건을 도식적으로 나열하는 것에 그치는 책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사회문화적으로 유려하게 엮어내고 있어 만만치 않은 두께만큼의 읽는 재미도 선사하는 책이었다. 물론 읽을 때 재미있는 것과는 별개로 방대한 분량 때문에 막상 리뷰를 쓸려니 난감한 책이긴 했지만, 한 번쯤 시간과 비용을 들어 읽어 볼만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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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5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20-08-16 23:38   좋아요 1 | URL
ㅋㅋㅋ 책을 읽으면서 저도 정말 이동식 야전 도서관 같은 걸 가지고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하루 남은 연휴 기분 좋게 보내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