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사피엔스를 위한 뇌과학 - 인간은 어떻게 미지의 세상을 탐색하고 방랑하는가
마이클 본드 지음, 홍경탁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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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사람들을 비웃기는 쉽지만, 누구나 길을 잃을 수 있다. 낯선 길을 따라 GPS 없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가는 것(그리고 다시 돌아오기)은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인지 과제 중 하나이다.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내려면 주변을 잘 살피고, 풍경의 특징을 잘 기억해야 하고, 거리를 계산하고, 움직임을 조젏고, 자신의 위치를 알고, 방향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경로를 계획하고, 경로의 변화에 대비하고, 여러 유형의 감각 정보를 처리해야 한다. 당연하겠지만, 그러려면 뇌의 많은 부분이 관여해야 한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P.146~147

 

예전부터 낯선 장소에서 길을 잘 찾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늘 길치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스마트폰의 GPS 기능 덕분에 지도 앱을 활용하면 어디든 찾아갈 수는 있게 된 것 같다. 자동차로 이동 시에는 네비게이션을, 도보로 움직일 때는 다양한 지도 앱을 사용하게 된 현대에서 아마도 GPS없이 길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착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해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게 도와주는 편리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본드는 정말 길을 잘 찾고 싶다면 GPS를 꺼야 한다고 말한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얘기일까.

 

이 책에 따르면 언뜻 편리해 보이는 GPS 기기가 지난 수만 년 동안 인간을 살아남게 해주었던 공간 관련 능력을 사용하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인지적으로 어려운 일은 GPS를 이용하는 내비게이션에 맡기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한다. 스마트폰 앱이나 음성 안내를 그대로 따르면, 해마에 있는 위치 세포나 전전두엽 피질의 의사 결정 회로를 괴롭히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어떻게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몰라도 되며, 심지어 내가 선택한 경로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우리는 공간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대가로 위치 감각을 희생하게 되는 것이다. GPS를 이용해서 길을 찾으면 우리는 주변 환경에 무관심해질 수 있고, 주변 환경에 무관심해지면 더 이상 풍경에서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고 그만큼 무지해진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길을 잃을 위험에 처하면 불안해진다. 길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마치 뱀을 봤을 때 우리가 보이는 반응처럼 본능적으로 인간의 뇌에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하면서 길을 잃었을 때 결말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한 두려움은 문화의 바탕에 깔려 있다. 고대의 신화는 물론 현대의 동화에서도 숲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이 모티브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픽션에서는 보통 일종의 구원이 나타난다.... 하지만 현실은 대개 더 냉혹하다.    p.231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길 찾기 능력'이 인류의 생존을 좌우하는 핵심 조건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저자는 호모사피엔스를 살아남게 한 협력과 소통의 근원인 길 찾기 능력에 관해 먼저 인류학 적으로 접근한다.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는 구석기시대의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치와 목적지를 알아야 했고, 길을 찾고 공간을 인지하는 능력은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조상들이 식량의 위치를 알아내고 적을 파악하면서 발달시킨 길 찾기 능력은 인류가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과 소통하고 협력하며,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길 찾기 능력을 뇌과학적으로 풀어내는 대목이었다. 길 찾기 능력이 추상적 사고, 상상력, 기억력, 언어 등 필수적인 인지 능력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우리의 몸은 물론 마음도 지배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낯선 도시를 돌아다니는 우리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며, 처음에는 생경했던 곳이 어떻게 내 집처럼 친숙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 신경과학의 공간 인지 연구를 시작으로 뇌과학과 심리학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그 밖에도 길 찾기에 최적화된 사람들, 여자와 남자의 길 찾기 능력 차이, 길 잃은 사람과 우울증 환자의 심리적 공통점, 우리가 공간을 인식하듯 타인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이유 등등 길 찾기 능력이 인간의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들을 다양한 분야에 걸쳐 다각도로 풀어내고 있어 굉장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지난 수만 년 동안 인간을 살아남게 해주었던 바로 그 길 찾기 능력이 위협받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오늘 날 우리가 GPS에 의존하며 살아왔던 것에 대해 보다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길 찾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활동인데, 우리가 지도 앱이나 내비게이션에 의존해 길을 간다면 타인간의 상호 교류의 기회는 더 이상 얻을 수 없을 거라는 저자의 말에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게 되었고 말이다.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길을 찾으며 살아온 인간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여정은 대단히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편리한 세상은 쉽게 길을 잃을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지만, 가끔은 그러한 완벽한 길 찾기에 저항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번쯤은 목적지나 지도, 휴대폰 없이 돌아다녀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가 있는 곳과 우리 관계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사유하게 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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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
안토니오 G. 이투르베 지음, 장여정 옮김 / 북레시피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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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죄송한데, 프레디, 저 열네 살이에요. 캠프 중앙로 저 끝에 가스실이 있고 매일같이 수천 명이 그곳으로 보내지는 걸 목격했는데, 그런데도 진짜 제가 아직도 소설을 읽으면서 충격받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 디타는 받은 책을 전부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망가지거나 찢어지고 낡은, 적갈색 곰팡이가 잔뜩 핀, 훼손되기까지 한 책들이었다. 그러나 이 책들이 없으면 수세기 문명을 거쳐 전해진 지혜가 그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지리학, 문학, 수학, 역사, 언어... 전부 소중한 것들이었다. 디타는 목숨을 걸고 이 책들을 지켜낼 것이다.    p.47

 

아우슈비츠 수용소 제31블록에 작은 비밀 학교가 있었고, 거기 모여 너덜너덜해진 책 낱장을 모아 읽은 사람들이 있었다. 집이며, 재산이며, 인간의 존엄성마저 강탈당하고 당장 내일 죽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 유대인들은 어째서 한 줌의 책처럼 쓸모 없는 것을 목숨 걸고 지켰을까. 이 책은 아우슈비츠에 실재했던 세상에서 가장 작고, 가장 위험한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폭력과 핍박,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고, 그저 버티고 살아남는 것이 전부였던 사람들. 수용소에서 사람들의 유일한 관심사이자 목표는 생존이었다. 일단 몇 시간을 살아남으면 그게 하루가 되고, 그렇게 며칠을 버텨 또 일주일을 생존하는 것, 그냥 매 순간을 살아남는 것이었다. '산다'는 동사는 그렇게 현재형일 때에만 말이 되었다.

 

열네 살 디타는 가족들들과 프라하를 떠나 테레진 게토로, 또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수많은 희생자 가운데 하나였다. 역사상 모든 독재자며 폭군들은 이념과 상관없이 모두 책을 가혹하게 핍박했다. 책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들었기에, 위험했다. 아우슈비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치는 책을 금지하고 샅샅이 색출해냈다. 그 속에서 어린 소녀 디타는 유대인 지도자인 프레디 허쉬의 부탁으로 여덟 권의 책을 맡게 된다. 그 책들 때문에 가스실로 끌려갈지 모르는데도 디타는 책을 꼭 붙든 채 행복했던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목숨을 걸고 보물처럼 숨기고 지킨다. 그렇게 디타는 아우슈비츠의 사서가 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학교에 다닐 때는 많은 아이들이 책을 싫어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책은 마지 자석과도 같이 아이들을 홀리게 만든다. 제일 말 안 듣는 아이들조차, 말썽꾸러기에 장난칠 궁리만 하던 아이들조차 디타가 나타나면 본능과 호기심에 책에 자동으로 끌리는 것이다. 디타를 비롯해 많은 아이들은 책 한 권만 펼치면 그 순간만은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삶도, 나치의 끝없는 공포도 모두 다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이야기 속 세상을 경험하면서 수프 배식을 먼저 받겠다고 줄 선 사람들을 밀치거나 옆 사람 숟가락을 훔치거나 하는 이기주의가 만연한 가혹한 현실을 넘어서게 된다.

 

 

여기서 책을 놓칠 순 없다. 프레디 허쉬가 이런 상황에서 했을 법한 말을 디타는 떠올린다.
"노력이 많이 필요하단 건 알아요.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동안만이라도 아이들은 이가 들끓는 마굿간에 있는 걸 잊을 수 있고, 살 태우는 냄새를 맡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 시간만큼은 아이들이 행복해해요. 그것만큼은 확실해요."
마르케타는 마지못해 동의한다. "그렇지....."
"현실을 보면 분노와 혐오감만 느껴지죠. 우리에게 있는 건 상상력뿐이에요, 마르케타 선생님."      p.338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존엄성조차 지켜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이들이, 말 그대로 언제 죽을지, 앞으로 어떤 고통을 더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고, 뿌듯했고, 기뻤다. 작가인 안토니오 이투르베는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소설은 군화로 목숨을 짓밟고자 하는 자들의 잔인함이 단 한 순간도 들어서지 못하도록 튼튼한 장벽을 쌓아 올리며 타인에게 헌신한 모든 이에게 바치는 오마주이자 책에 바치는 오마주'라고 말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열네 살 소녀 디타 크라우스는 실존 인물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우슈비츠에서 숨을 거두었지만, 디타와 어머니는 살아남아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은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가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1945년 4월 모녀는 마침내 해방을 맞았고, 이후 디타는 유대인 난민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우슈비츠 집단학살 수용소 내에 있었던 아이들의 비밀 도서관에 대한 내용은 알베르토 망겔의 <밤의 도서관>에서도 짧게 언급된 적이 있다. 그곳 도서관에는 종이책이 단 여덟 권 있었고, 살아 있는 책도 여섯 명 있었다. 살아 있는 책이란, 책이 살아 있다는 게 아니라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얘기이다. 책이 금지된 끔찍한 곳에서 도서관이 존재했다는 것도, 그토록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일을 열네 살 어린 소녀가 맡아서 해냈다는 것도 사실 믿기지 않는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란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건 사실 빵과 물이고, 문화는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빵과 물만으로는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없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지 않는다면, 눈을 감고 상상력을 펼치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무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완전한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책이라는 것이 누군가에는 하찮은 구석이 있는 무용한 물건일수도 있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훨씬 중요한 물건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준 뭉클한 이야기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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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 5인 5색 연작 에세이 <책장위고양이> 2집 책장 위 고양이 2
김겨울 외 지음, 북크루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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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우면 뜨겁다고 말해주는 것. 천천히 먹고 또 많이 먹으라고 말해주는 것. 간은 잘 맞는지.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을 보내고 온 김치가 알맞게 익었는지. 미지근한 물이 필요하지는 않는지. 그래서 오늘 너의 하루는 괜찮았는지 물어봐 주는 것. 그렇게 다 물어보고 나서야 밥숟가락을 뜨고 있는 상대방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것. 진짜 어려운 건 그런 마음이다. 그러고 나면 맛이 없더라도 '이렇게 먹으니까 너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테니까. 더 먹고 싶은데 양이 적어서 억울하다는 다정한 투정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테니까.      

- 제리, '아는 얼굴' 중에서, p.70

 

에세이 새벽 배송 서비스 '책장위고양이' 두 번째 시즌이 책으로 출간되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구독자에게 에세이를 보내는 서비스 첫 번째 시즌에서는 김민섭, 김혼비, 남궁인, 문보영, 오은, 이은정, 정지우, 이렇게 일곱 명의 작가가 고양이, 작가, 친구, 방, 뿌팟퐁커리, 비, 결혼, 그리고 커피와 쓸데없는 것에 대한 주제로 글을 썼었다. 이번 시즌 2에서는 분위기가 좀 달라 졌다. 유튜버 김겨울, 음악을 하는 박종현, 작가 이묵돌, 출판 일을 하는 제리, 그리고 원더걸스 출신 싱어송라이터 핫펠트, 이렇게 다섯 명의 작가가 고양이, 삼각김밥, 북극, 망한 원고, 후시딘, 눈, 지하철, 버리고 싶은, 게임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에세이 샛별 배송 프로젝트'라는 마치 아침 일찍 받아보는 샐러드 같은 느낌이 드는 글들이라 그런지 전반적으로 가벼운 편이다. 아침부터 골치 아프게 심각한 글을 읽을 필요야 없을 테니깐, 가볍게 커피 한 잔 마시는 느낌으로, 잠깐 머리를 쉬게 해주는 듯한 기분으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게다가 각각의 글들이 분량이 매우 짧기 때문에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마음에 드는 글들부터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순서대로 처음부터 정독해야 할 필요가 없기에 정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에세이집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어떤 시간들은 애초에 단단하거나 쌓이고 짓눌리며 단단해지는 반면, 어떤 시간들은 겉면을 휘돌다 흩어져 시간조차 아니게 되는 것이지. 바다 같은 거겠지. 가장 깊은 곳의 해류 위로 몇 겹 혹은 수십 겹의 물덩이들이 각기 또 같이 흐르는 동안 표면 위의 포말들, 물결들은 다만 잠시 있다가 사라지게 되는 그런 이치인 거겠지. 빙하에도 충돌이 있다지. 한때는 눈이었던 것들이 쌓이고 눌리어 새로운 결정으로 화한 깊은 곳의 얼음들.    

- 박종현, '쌓이거나 쌓이지 않기를' 중에서, p.190

 

첫번째 주제는 바로 '고양이'였다.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 어떻게든 고양이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 우연히 찾아온 길고양이를 돌보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의 풍경들이 이어진다. 다음 주제는 '삼각 김밥'인데, 저렴하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편의점 음식의 대표적인 메뉴이다. 사실 혼자 살거나, 주머니 사정이 좀 그렇거나, 밥을 먹을 시간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굳이 손이 가지 않는 메뉴이기도 하다. 작가들은 바로 그런 '삼각김밥'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을 풀어낼까. 재미있었던 주제는 바로 '북극'이었다. 나처럼 언젠가 '북극'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가 등장하기도 했고, 북극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는 소감이 있기도 했다. 아무도 실제로 북극에 가보았거나, 북극과 관련된 일을 했다거나,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기에 색다른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도 한번쯤 북극을 꿈꾸었던 사람으로서 반가웠던 주제였다.

 

이렇게 여러 작가들이 글이 모인 앤솔로지 같은 경우에는 같은 소재를 두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분위기도, 문장도, 생각도 완전히 달라 각각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는 덕분에 지루할 틈 없이 읽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초단편 정도의 짧은 분량들인데다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들의 일상과 맞닿아 있는 글들이라 사유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부분은 다소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책장위고양이' 두 번째 시즌은 전문 작가들보다는 서로 다른 분야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는 이들의 글을 모았기에, 그만큼 개성이 뚜렷하고 색다른 느낌으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을 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그런 다정함이 필요한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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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산문선 열린책들 세계문학 256
조지 오웰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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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강하고, 이기적이며, 게으르고, 가장 밑바닥에 깔린 동기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책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고 기나긴 병치레와 같아서 끔찍하고 기진맥진한 싸움이다. 저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악마에게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 그런 일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악마는 아기가 관심을 끌려고 울부짖는 것과 똑같은 본능이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고 끊임없이 싸우지 않는 한 읽을 만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창유리와 같다.   p.18

 

조지 오웰은 뛰어난 소설가인 동시에 민주적 사회주의자이자 반파시스트인 진보적 지식인이기도 하고, 영국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가이자, 문학의 역할을 고민하는 사색가이기도 했다. 그는 <1984>와 <동물 농장>등 소설 만으로도 20세기 영문학의 독보적인 작가이지만, 사실 여러 매체에 수많은 빼어난 에세이들과 칼럼들을 기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은 오웰의 가장 유명하고 높이 평가 받는 20여 편의 산문들을 종류별로 골고루 엄선한 선집이다.

 

 

흥미로운 에세이들이 많았는데, 책과 문학, 서평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글들이 유독 흥미로웠다. 우선 <책과 담배>라는 글에서 '책을 사는 것, 책을 읽는 것이 너무 값비싼 취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당 비용의 관점에서 독서에 정확히 얼마나 드는지' 분석하고 있다. 우선 자신이 가진 책들의 가격을 전부 더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헌책으로 구매한 책들, 받았거나 도서 상품권으로 구매한 것들, 서평용 책이나 증정본 등등으로 구분해 권수를 파악하고 각각에 맞는 가격을 책정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가진 책은 총 9백권에 가깝고, 비용은 165파운드 15실링, 이것은 대략 15년 동안 축적된 결과이다. 거기서 1년 독서에 드는 비용과 15년간 총 독서 비용을 계산하고, 이것을 다른 비용과 비교해본다. 결론은 독서 비용이 담뱃값과 술값을 합친 금액을 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책값과 우리가 책에서 얻는 가치의 관계를 정립하기는 어렵겠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글이었다.

 

 

모든 책에 서평을 쓸 가치가 있다고 당연히 생각하는 한 그 무엇도 고칠 수 없다. 수많은 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절대 다수의 책을 과찬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책과 전문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한 절대다수의 책이 얼마나 나쁜지 알지 못한다. <이 책은 쓸모없다>가 객관적으로 진실한 비평인 책이 열 권 중 아홉 권을 넘을 것이고, 서평가의 진실한 반응은 <이 책은 나에게 그 어떤 흥미도 주지 못했고, 나는 돈을 받지 않았다면 이 책의 평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돈을 내고 그런 평을 읽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겠는가? 독자는 추천하는 책에 대한 안내를 원하고, 일종의 평가를 기대한다.      p.107

 

이 책에는 파리 15구의 어느 병원에서 몇 주를 보내면서 가난한 이들은 어떻게 죽는지에 대해 쓴 글도 있고, 부랑자 임시 수용소에서 지냈던 리얼한 경험을 쓴 글도 있으며, 헌책방에서 책 장사라는 일을 하면서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었다는 글도 있고, 뉴스에 수록되는 영국의 살인 사건들의 대한 통계와 논평도 있다. 무엇보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들이 뛰어난 점은 거의 대부분의 글들이 '경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의 에세이들에는 그의 사상과 문학을 이루는 기초가 된 단상들과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실제로 오웰은 자신의 에세이들을 발전시켜 여러 장편소설을 완성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밖에 그의 에세이들에는 어린 시절 괴로웠던 학교생활에 대한 기억, 대학에 갈 학비를 마련할 수 없어 경찰 공무원에 지원하여 버마로 향하고, 그곳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실상을 목도하며, 환멸과 자괴감으로 이내 사표를 던지게 되었던 그의 삶들이 고스란히 녹아 들어 있다. 특히나 국내 최초로 완역 수록된 꽤 분량 있는 에세이 '사자와 유니콘: 사회주의와 영국의 특질' 이라는 글도 포함되어 있으니, 오웰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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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펄 천 개의 세계 1
이윤하 지음, 송경아 옮김 / 사계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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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펄은 전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강력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손에 들어가는 위험을 가만 보고 있을 수는 없어. 생각해 보게, 후보생. 드래곤 펄이 척박한 세계 전체를 탈바굼시킬 수 있다면, 그 세계에 숲과 바다를 생성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말은 즉 그 세계를 파괴해 생명 없는 사막으로 만드는 일도 그만큼이나 쉽다는 의미야. 그런 요술은 최고 입찰자에게 팔리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당국의 통제를 받아야 해."     p.167

 

열세 살 민은 열다섯 살이 되자마자 '천 개의 세계' 우주군 입대 시험을 봐서 준 오빠를 따라 군에 들어가려고 남은 날짜만 세고 있다. 네 명의 이모와 엄마, 그리고 사촌 세 명과 함께 살고 있는 민은 언제나 일찍 일어나서 집안일을 잔뜩 해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사실 이들은 인간인 척하며 살고 있는 구미호로 사람들은 대부분 여우들이 멸종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민은 여우 요술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말라는 경고를 평생 들으며 살았기에, 변신 능력이나 '홀리기'를 사람들에게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잠에서 깬 민은 오빠 준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서 사라져서 탈영 혐의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보 조사원은 준이 드래곤 펄을 찾아 떠났다고 말한다. 드래곤 펄이란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신령한 구슬로 전설적인 유물이었다.

 

하지만 민이 알고 있는 오빠는 절대 우주군을 탈영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준 오빠에게 우주군은 모든 것을 의미할 정도로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엄청 열심히 노력했었던 것이다. 조사원은 준이 떠나기 전 마지막 보고를 남겼는데, 거기에 민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며 그걸로 준의 위치나 드래곤 펄의 위치를 찾을 단서를 파악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메시지 내용 자체는 평범했지만, 민은 거기에 뭔가 숨겨진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오빠는 민에게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민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조사원을 공격하고 집에서 뛰쳐 나간다. 오빠를 찾고 드래곤 펄에 얽힌 수수께끼를 직접 풀기로 한 것이다. 민은 오빠가 배정된 전함인 창백한 번개호에 탑승해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조사하기 시작한다.

 

 

상황이 더 나쁠 수도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전염병에 감염된 행성 위에 고립되어 있고, 귀신들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숨 쉴 공기는 있었다. 어떤 행성은 대기권이 유독하거나 아예 공기가 없었다. 아니면 너무 춥거나 더웠다. 초자연적인 생물들마저도 여러 가지 장비가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 정도로.
"하는 데까지 해 보자."      p.334

 

SF 장르가 현대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한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바탕으로 둔 작품을 말한다면,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는 과학적 사실보다는 상상력에 의존하여 실현이 불가능하거나 아주 먼 미래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작품들을 말한다. 우주를 무대로 무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스토리라고 보면 되는데, 보통 작가가 구축한 세계의 설정들을 이해했을 때 가능한 지점들이 많은 장르라 독자 입장에서 보자면 다소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다. 시작부터 처음 듣는 낯선 용어들이 잔뜩 등장해 겁에 질리게 만들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기도 전에 완전히 새롭게 구축되어 있는 특정 세계관을 이해하도록 거의 강요하게 마련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윤하의 신작은 SF나 스페이스 오페라를 처음 접한 독자들에게도 추천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읽을 수 있고, 누구라도 재미있게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SF장르에서 구미호, 호랑이, 귀신과 용 등 한국적인 캐릭터들을 조합해 매우 색다르고도 매력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를 만들어 내고 있다.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이긴 하지만,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가 한국의 전설을 SF라는 장르 속에서 녹여내었다는 점도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내에 먼저 번역되었던 <나인폭스 갬빗>을 비롯해 해당 시리즈 3부작이 모두 휴고상과 제뷸러상에 노미네이트 되어 국내 독자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전작의 SF 세계관이 다소 어려웠다면, 이번 신작 <드래곤 펄>은 누구라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이니 아직까지 이윤하의 작품을 만나 보지 않았다면 바로 이 작품부터 시작하면 더 좋을 것 같다. 한국적인 감수성을 토대로 구축된 색다른 SF 세계를 만나보고 싶다면, 기존에 전혀 만나볼 수 없었던 독특한 SF 작품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한국적인 소재가 SF 장르와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니 감탄하면서 읽게 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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