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
마이클 코리타 지음, 최필원 옮김 / 황금시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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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들이 죽었으면 좋겠어.’ 그는 생각했다. 뜨거운 눈물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놈들도 그날 물속에서 본 시체랑 같이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그들은 내가 거기서 죽었기를 바랐겠지만. 그는 절망적인 현재의 상황이 아직 실감 나지 않았다. 물론 목격자인 자신이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발상은 너무 터무니없어서 가끔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들은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어. 그들은 진정으로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어.’      p.160

 

열네 살 소년 제이스 윌슨은 우연히 채석장에 홀로 있다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목격하게 된다. 물 속에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 제복 차림의 남자들이 부대를 뒤집어쓴 남자를 무참하게 살해해 절벽 아래로 떠미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가까스로 그 현장에서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았지만, 곧 킬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소년을 뒤쫓는 것은 형제 킬러인 패트릭 블랙웰과 잭 블랙웰로 지나치게 냉혈하고 잔인한 걸로 유명한 프로들이었다.

 

그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소년은 제이스 윌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코너 레이놀즈라는 새 이름으로 몬테나 지역의 청소년 캠프에 합류하게 된다. 군 출신 생존 전문가 이선 서빈은 전국의 보호관찰관과 가석방 집행관들이 데려오는 문제아들을 산에 모아놓고 생존 훈련을 시켜왔는데, 제이스가 가짜 신문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한편 근처 산속 외딴곳에 홀로 서 있는 화재 감시탑에 전직 정예 산림 소방대원이었던 해나 페이퍼가 신참으로 온다. 그녀는 과거 산불 현장에서 민간인 소년과 동료들을 잃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살인 현장을 목격하고 킬러들로부터 몸을 숨겨야 하는 소년과 그를 보호하기 위한 군 출신 생존 전문가와 전직 산림 소방대원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가 숨가쁘게 진행된다.

 

 

 

현명한 예방책이자, 기발한 계략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분명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을 버는 데는 성공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선과 소년 모두 지나치게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년은 흔적을 바꾸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했고, 이선은 소년의 것이 아닌 흔적을 고집스럽게 쫓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이제 그는 킬러들을 소년에게로 친절히 안내하고 있었고, 아이와의 거리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p.338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목격한 이유로 킬러들에게 쫓기게 된다는 설정 자체는 새로울 게 없을지 몰라도, 압도적인 몬태나주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모든 것을 집어 삼킬듯 거대하게 휘몰아치는 화마와 폭풍이라는 요소 덕분에 굉장히 색다른 스릴러가 탄생했다. 그 동안 마이클 코리타의 작품은 국내에 네 권이 출간되었다. <오늘 밤 안녕을>, <숨은 강>, <밤을 탐하다>, <죽음을 보는 눈> 모두 현재는 절판된 상태로 이후 오랫동안 신간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었다. 영미권에서 주목 받는 것에 비해 국내에서는 그다지 사랑을 받지 못했던 작가인 편이었는데, 이번에 6년 여 만에 신간이 출간되어 너무 반가웠다. 아마도 영화가 개봉하는 덕분에 출간이 된 것 같긴 하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마이클 코리타의 작품이 계속 소개되면 좋을 것 같다.

 

얼마 전에 앤젤리나 졸리, 니컬러스 홀트 주연, 시카리오, 윈드 리버, 테일러 셰리던 연출로 동명의 영화가 개봉했다. 영화에서는 소설 속 해나 역인 안젤리나 졸리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데 반해, 원작에서는 캠프를 운영하는 이선의 비중이 조금 더 높은 편이다. 그리고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놀라운 반전이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니, 원작 소설과 영화를 서로 다른 느낌으로 각각 챙겨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될 것 같다. 특히나 산불과 폭풍이라는 배경으로 펼쳐지는 스릴러라 스크린에서 보여지는 부분이 확실히 매력적일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오랜 만에 마이클 코리타의 신작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마이클 코리타의 작품을 국내에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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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 너머 -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12가지 법칙
조던 B. 피터슨 지음, 김한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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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것이다. 그런 일들이 백 가지 천 가지 쌓이면 당신의 삶은 비참해지고 결혼 생활은 파탄 난다. 따라서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한 체하지 마라. 서로 협의해 적절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다면 상의하라. 싸움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 순간에는 불쾌할지라도 낙타 등에 붙은 작은 지푸라기를 떼어내야 한다. 모두가 사소하게 여기는 일상적인 사건일수록 이런 조언은 특히 중요하다. 삶은 반복이며, 반복되는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p.115

 

무기력에 빠진 청년들을 향한 거침없는 독설로 유명한 조던 피터슨이 <12가지 인생의 법칙>이후 3년 만의 신작으로 돌아왔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치워라’는 말이 특히 유명한데, 그는 전작으로 전 세계에서 ‘피터슨 현상’을 일으키며 200만 부가 넘는 판매 부수를 기록했었다. 하지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이후 그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다. 딸의 수술, 아내의 신장암 투병, 그리고 자신이 신경안정제 의존증에 걸려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약을 끊으며 금단 현상을 겪고, 발작과 심한 불안을 거치며 1년 넘게 치료가 계속되었고,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이 작품을 완성했다.

 

 

이번 작품의 부제는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12가지 법칙'이다. 이번에는 실제 죽음의 위기를 겪고 나서 얻게 된 인생의 지혜들이기에, 전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조금 더 현명한 12가지 법칙이 될 것이다. 제목이 '질서 너머'라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우리가 적절하다고 여기는 행동으로 목표하는 결과를 얻을 때 우리는 질서의 영역 안에 존재하고, 그런 결과를 긍정적으로 여긴다. 하지만 질서정연한 모든 상태는 비록 편하고 안전하긴 해도 나름의 결함이 있다. 세계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예상 밖으로 변하고 있는데, 세계에 질서를 부여해 이미 아는 것을 얻은 것에 안주한다면, 그 질서는 곧 딱딱하게 굳어버리게 마련이니 말이다. 그러니 한 발을 질서의 영역에 두고, 다른 한 발로 그 밖에 있는 미지의 세계를 디뎌야 한다는 것이 피터슨의 말이다.

 

 

 

흔히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에는 부당함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널려 있는데, 다들 악행을 저지르고도 벌받지 않고 지나간다” 또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운이 좋아 건강하게 잘 사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니 얼마나 불공평한가?”라고 말한다. 이렇듯 ‘왜 나에게?’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불공평하다는 피해의식에 물들어 있다.    p.391

 

피터슨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12가지 법칙은 이렇다. 기존 제도나 창의적 변화를 함부로 깎아내리지 마라. 내가 누구일 수 있는지 상상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아라. 원치 않는 것을 안개 속에 묻어두지 마라. 남들이 책임을 방치한 곳에 기회가 숨어 있음을 인식하라.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마라. 이데올로기를 버려라. 최소한 한 가지 일에 최대한 파고들고, 그 결과를 지켜보라. 방 하나를 할 수 있는 한 아름답게 꾸며보라.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기억이 있다면 아주 자세하게 글로 써보라. 관계의 낭만을 유지하기 위해 성실히 계획하고 관리하라. 분개하거나 거짓되거나 교만하지 마라. 고통스러울지라도 감사하라. 3년 전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제시한 이후, 우리 세상은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혼돈과 질서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고 있는 피터슨이 새롭게 제시한 인생 법칙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법칙이 가장 와 닿았던 것 같다. 옷장 속에 쓰레기를 계속 쌓아두고 숨기기만 한다면 우리가 가장 준비가 안 되었을 때 그 동안 쌓인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우리를 덮칠 거라고 말한, '원치 않는 것을 안개 속에 묻어두지 마라'이다. 우리는 사소하지만 성가신 일들을 표출하거나 해결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놔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어떤 사소한 일도 매일 일어난다면 그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싸움도 두려워하지 말고, 혼돈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안개를 걷어내고, 거기 숨어 있을 것 같은 날카로운 모서리가 진짜인지 환상인지를 알아내는 과정에서 그 중 일부가 진짜일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진실을 묻어두지 않고 눈으로 확인하는 경우에는 적어도 위험을 미리 알아차리고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팬데믹으로 모두가 혼란스러운 시대, 우리는 마음과 영혼을 곧추세우고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방식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조던 피터슨의 이 책이 새로운 통찰을 얻는데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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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맵 - 에너지·기후·지정학이 바꾸는 새로운 패권 지도
대니얼 예긴 지음, 우진하 옮김 / 리더스북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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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미국의 석유 생산량은 역사상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미국은 하루 생산량 1,300 배럴을 기록하며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를 앞섰는데 이는 2008년 대비 세 배가 넘는 규모였다. 하지만 바로 그 시점에서 2020년의 대재앙이라 할 만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시작하더니 전 세계 경제가 다 함께 활동을 멈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산업 분야와 마찬가지로 역시 큰 타격을 받은 셰일 산업에선 투자가 크게 줄어들면서 셰일오일이나 천연가스의 생산량도 대폭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p.112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에너지 및 국제 관계 전문가인 대니얼 예긴은 클린턴부터 트럼프까지 미국 4개 행정부의 에너지부 자문위원회에 몸담았다.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의 흐름을 대담한 분석과 통찰로 정리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황금의 샘> 이후 10년 만에 그의 신작이 나왔다. 이번에는 ‘에너지’, ‘기후’, ‘지정학’이라는 보다 심층적인 키워드를 통해 부와 권력 그리고 기회가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 누가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으로 부상할 것인지를 들려준다.

 

이 책은 셰일 혁명은 미국의 국제적 위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러시아와 중국이 한편이 되어 미국에게 대항하는 새로운 냉전은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그 안에서 에너지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전 세계 석유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빅 3인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예측과 코로나 바이러스와 기후 문제, 에너지 전환 등이 시장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예긴은 “앞으로 ‘무엇’을 활용해 이동하느냐에 따라 일자리와 돈의 흐름, 국가 간 관계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이 한국의 미래와 더불어 새로운 에너지 및 지정학적 지도에서 한국이 갖는 위치와 새로운 지형에서 한국이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코로나19 이전만 해도 지도를 읽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읽는 이들 사이에서 그 속도와 정도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종종 심하게 일어나긴 했으나 적어도 그 방향과 흐름만큼은 누구든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코로나19라는 대유행병의 결과로 인해 지도 위에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빈틈들이 나타났고 세계는 지금 그 틈을 메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 세계 경제의 회복기 이후를 바라보려 노력하면서 우리는 어떤 에너지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p.573

 

여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는 이 책의 첫 번째 장은 '미국의 지도'이다. 미국을 세계 최대의 석유 수입국에서 세계 최대의 석유 생산국으로 변화시킨 '셰일 혁명'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셰일 혁명은 세계 석유 시장을 완전히 뒤바꿔놓았고 에너지 안보의 개념 자체를 변화시켰지만, 코로나 이후 석유 시장의 커다란 위기 속에서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이다. 두 번째 장인 '러시아의 지도'에서는 러시아의 방대한 에너지 자원과 러시아와 중국의 전략적 관계, 그리고 북극의 LNG개발에 대해 들려준다. 세 번째 장인 '중국의 지도'에서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 변화가 전 세계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대해 중점적으로 탐구한다. 네 번째 장인 '중동의 지도'에서는 중동에 세워진 국가들의 지도를 바꾸려는 지속적인 노력에 대해 들려준다. 다섯 번째 장에서는 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 자동차 등 자동차 산업의 중요성에 대해, 여섯 번째 장에서는 풍력 및 태양관 산업 등 에너지 전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일반적인 경제경영서나 미래예측서에 비해서 정치, 경제, 지리, 역사를 넘나드는 책이라 읽는 게 만만치 않았다. 복잡다단한 세계를 움직이고 부와 권력, 기회를 가를 변곡점을 한 발 먼저 읽어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 말이다. 미국 유수의 언론들은 대니얼 예긴 외에 에너지가 초래하는 거대한 국제 정세와 경제 흐름을 예긴만큼 정확히 꿰뚫어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대니얼 예긴은 여전히 현안이 생길 때마다 각국 정부와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찾는 세계 최고 에너지 전문가이니 말이다. 세계지도를 넘나들며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에너지와 지정학, 그리고 글로벌 경제의 촘촘한 연결고리가 궁금하다면, 에너지를 둘러싼 각국의 야망과 힘겨루기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이 거대한 세계를 움직이는 숨은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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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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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별로 하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책이 출판되면 홍보를 위해 티셔츠나 토트백이나 모자 같은 굿즈를 만드는 일이 꽤 있다. 각 출판사에서 "이런 것을 만들었습니다"하고 보내준 굿즈가 상당히 많다. 한 상자 가득 되지 않을까. 그런 뭐 좋은데 그렇게 받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다닐 수 있는가 하면 당연히 그런 짓은 못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Haruki Murakami'라고 대문짝만 하게 쓴 티셔츠를 입고 백주 대낫에 도쿄의 대로를 걸어 다닐 수는 없잖아요?      p.38~41

 

딱히 물건을 모으는 데 흥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이런저런 물건들이 '모이는' 인생이 되었다는 무라카미 하루키. 다 듣지 못할 양의 LP 레코드, 아마도 다시 읽을 일 없을 책, 잡지 스크랩, 짧아진 몽당연필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모인' 티셔츠들.. 값싸고 재미있어서 사고, 여기저기에서 홍보용으로 받고, 마라톤 완주 기념으로 받고, 여행 가면 그 지역 티셔츠를 사다 보니 어느새 잔뜩 늘어나서 상자에 담아서 쌓아 놓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는 이렇게 모인 티셔츠 얘기로 책까지 내게 되었다.

 

 

이 책은 하루키가 마음에 들어 하는 낡은 티셔츠를 펼쳐놓은 뒤 사진을 찍고 거기에 관해 쓴 짧은 글을 모은 것이다. 현지에서는 시티보이 잡지를 표방하는 《뽀빠이》에 일 년 반 동안 연재되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운 백여 장의 티셔츠 사진, 권말에 특별 수록된 ‘티셔츠 인터뷰’는 보너스로 소설만큼이나 에세이도 빛나는 하루키의 매력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책이다.

 

 

티셔츠 하면 여름, 여름 하면 맥주..... 잖습니까. 아니, 뭐 굳이 여름이 아니어도 난로 앞 흔들의자에 앉아 무릎 위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가운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는 것도 인생에서 큰 행복 중 하나죠. 네? 난로도 없고 흔들의자도 없고 고양이도 없다고요? 그거 안됐군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 집에도 그런 건 하나도 없다. 고양이조차 없다. 다만 그런 상황은 분명히 멋질 거라고 상상해보았을 뿐이다. 상상력이란 중요하니까.      p.151~152

 

서핑, 햄버거, 위스키, 레코드, 동물, 맥주, 도마뱀과 거북이, 독서, 슈퍼히어로, 곰... 등 하루키는 각각의 티셔츠들을 이러한 주제들로 선별했다. 그 중에는 디자인이 좋아서 자주 입는 것도 있고, 이런 저런 이유로 자주 입지 않는 것들도 있다. 미국 독자가 <태엽 감는 새 연대기>를 읽고 영감을 받아 만들어준 멋진 디자인의 티셔츠, 마우이 섬 시골 마을에서 단돈 1달러에 산 티셔츠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소설이 영화화까지 된 덕에 가장 아끼는 티셔츠가 되었다는 일화 등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

 

 

여름에는 오로지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거리를 누빈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티셔츠 사랑은 애틋하면서도 각별하다. "티셔츠가 이 정도 있으면 여름이 와도 뭘 입을지 걱정할 일 없고 말이죠. 매일 갈아입어도 여름 한 철 내내 다른 걸 입을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 그의 말처럼 티셔츠는 사시사철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는 아이템이다. 자유롭고, 느긋하면서도, 독특한 하루키의 일상과 닮아 있는 느낌도 들고 말이다.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그만큼 디자인도, 색상도 다양한 티셔츠! 누구나 옷장 가득 차지하고 있는 패션 아이템일 것이다. 물론 하루키처럼 이렇게 수백 장의 티셔츠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하루키의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옷장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티셔츠들을 떠올려 본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다거나, 좋아하는 공연의 기념품으로 구입한 티셔츠라던가, 해외 어느 여행지에서 산 것 등등 나 역시 입지 않고 모셔만 두고 있는 티셔츠들이 꽤 있다. 그리고 각각의 티셔츠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바로 거기에 자신만의 취향을 수집하는 재미가 있는 것일 테고 말이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사랑한다면, 하루키만큼 이런저런 물건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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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헤일메리 앤디 위어 우주 3부작
앤디 위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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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모든 것의 의미는 한 가지뿐이다. 헤일메리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왕복이 아니라 편도다..... 나는 자살 임무를 수행하러 왔다. 존, 폴, 조지, 링고는 집에 돌아가지만, 길고도 험난한 나의 여정은 여기에서 끝난다. 이번 임무에 자원했을 때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기억상실증에 걸린 내 두뇌에게는 이 정보가 새롭기만 하다. 나는 여기에서 죽는다. 혼자서 죽게 된다.     p.111

 

오랜 수면 끝에 눈을 뜬 나에게 로봇 팔들이 다가와 몸에 연결된 관을 제거하고, 컴퓨터가 질문을 한다. 2더하기 2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벽은 플라스틱처럼 보이고, 방 전체가 둥근 이곳은 어딜까. 나는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 외에 두 대가 더 있고, 각각에 있는 남자와 여자는 이미 사망한 상태라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자신이 잇는 방의 중력이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곳은 지구가 아니었고, 알 수 없는 우주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면서, 자신이 분자생물학 박사이자 과학 교사였던 라일랜드 그레이스라는 걸 알게 되고, 이곳이 헤일메리 호라는 것을 생각해낸다. ‘헤일메리Hail Mary’는 미식축구 용어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주 낮은 성공률을 바라보고 적진 깊숙이 내지르는 롱 패스를 뜻한다.  그리고 우주선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지구는 미지의 생명체인 '아스트로파지'로 인해 멸망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아스트로파지는 태양의 온도를 떨어트려서 태양의 출력이 서서히 감소하게 만들고 있었다. 태양광이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할 경우, 그러니까 태양이 죽어가게 되면 지구의 생명체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인류를 구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고,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레이스 박사가 헤일메리호를 타게 된 것이다. 아스트로파지를 조사하고,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면서 진행되고, 그 과정에서 그레이스 박사는 자신이 왜 우주 한복판에서 깨어난 것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아스트로파지를 없앨 해결책을 자신이 찾게 된다고 하더라도 기술적인 한계로 지구로 정보를 보낼 수 있을 뿐, 자신은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애초에 헤일메리호는 왕복이 아니라 편도였고, 자신은 험난한 여정을 끝내고 나면 우주에서 혼자 죽을 예정이었던 것이다.

 

 

제정신인 사람이 우주선을 저런 모양으로 만들 리는 없다. 제정신인 지구인이라면 말이다. 나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몇 차례 눈을 깜빡인다. 침을 꿀꺽 삼킨다. 저건...... 저건 외계의 우주선이다. 외계인이, 우주선을 만들 정도의 지능이 있는 외계인들이 만든. 인류는 우주에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방금 우리의 이웃을 만났다.
"이런 씨발!"         p.179

 

기억이 아직 모두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죽을 임무를 띠고 우주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레이스 박사는 죽어야 한다면, 최소한 의미 있게 죽자고 마음 먹는다. 그리고 홀로 우주선에서 아스트로파지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애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자신의 우주선 바로 옆에 다른 우주선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한 것은 선체 전체가 거대하고 납작한 표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최악의 방법으로 만든 우주선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다. 저건 우주선을 만들 정도의 지능이 있는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과연 그는 지구를 구하기 위한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잘(?) 죽을 수 있을까. 거의 700페이지에 가까운 두툼한 두께의 이 작품은 엄청난 과학적 지식과 놀라운 상상력, 그리고 앤디 위어 특유의 유머 덕분에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이 끝을 향해 달려간다. 그야말로 '페이지터너'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웬만한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 보는 것보다 더 신나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화성에서 조난당한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로 소설은 물론, 영화계까지 제대로 접수했던 <마션>, 달의 도시를 입체적으로 구현해 끝내주는 이야기로 탄생시켰던 <아르테미스>에 이어 앤디 위어는 이 작품 <프로젝트 헤일메리>까지 우주 3부작을 완성했다. 그는 행성들의 궤도를 파악하고 지구와의 통신 소요시간, 우주선의 항해 궤도 등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 직접 코딩을 하고 프로그램을 짰을 정도로 소설들에 나오는 과학적 지식에 진심이다. 애매한 형태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지식으로 토대를 쌓아 올린 이야기들이기에 그 누구라도 설득시킬 수밖에 없는, 굉장히 대중적이면서도 완벽한 SF 작품이 된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문장은 딱 하나였다. 앤디 위어는 천재다! 이렇게 잘 읽히고, 쉬우면서도 재미있고, 놀랍도록 과학적이면서 엔터테인먼트적인 작품이 또 있을까. <프로젝트 헤일메리> 역시 영화화가 확정되었다. 라이언 고슬링 주연으로 만들어질 영화 버전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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