퓰리처 글쓰기 수업 - 논픽션 스토리텔링의 모든 것
잭 하트 지음, 정세라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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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흡인력 있는 이야기는 독자를 다른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독자는 "기사를 읽는 시간 만큼은 나를 둘러싼 어떤 현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라고 말했다. 작가는 강렬한 사건에 절묘한 장면을 결합하여 독자의 주의를 끌고, 독자가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되어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도록 가상 현실을 그려낸다. 이 기술도 내러티브 논픽션 글쓰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p.51

 

한 젊은 엄마가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 죽은 사건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비극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실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곳곳에서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사고 소식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사회면의 광고 위에 빼곡히 들어가는 1단짜리 단신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좀처럼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한 기자가 단신이 아닌 서두와 본문, 결말을 갖춘 제대로 된 기사를 써낸다. 그리하여 치밀한 짜임새로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고, 화젯거리 대신 장면을 담고, 정확성을 기하되 진정성이 드러나는 5,000단어에 달하는 이야기가 탄생했다. 이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논픽션 스토리텔링에 매료시켰다.

 

이 책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 즉 '내러티브 논픽션'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이러한 글은 매체에 실리는 저널리즘이긴 하지만 육하원칙에 근거해 사실을 전달하는 전통적 기사가 아니라, 구성과 스타일 등 여러 면에서 문학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대부분의 스토리텔링 기술을 다루는 책들이 저자의 관점에서만 설명하는데 비해, 이 책은 편집자의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특별하다. 저자에 따르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야기는 비범한 재능에서 나오는 것도, 수십 년 동안 골방에 들어앉아 쓴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독자들의 공감과 열광을 이끌어내는 논픽션 스토리텔링의 비법은 무엇일까. 이 책은 어떤 소재를 만나더라도, 거기서 적합한 스토리를 입혀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콘텐츠로 만들어주는 핵심 비법에 대래 알려준다.

 

 

 

논픽션 작가는 주제를 반드시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이런저런 사실을 우리 앞에 던져 놓는다. 논픽션 전문가라면 그런 사실들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다만 일부라도 이해해야 한다. 존 프랭클린은 2001년도 니먼 내러티브 저널리즘 회의에서 이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야기의 형체 그리고 그 형체가 말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작가가 어디서 가져오는 게 아닙니다. 작가가 이야기 안에서 발견하고 뽑아내는 그 무엇이죠.”        p.269

 

퓰리처상 심사위원인 잭 하트는 170년 역사의 일간지 『오레고니언』에서 무려 25년 동안 편집장과 글쓰기 코치로 일했다. 그 과정에서 쌓인 자료와 실제적인 성과를 기반으로 이 책을 썼으며, 최상급 논픽션 작가들과 30여 년간 논픽션 글쓰기를 해오며 배운 점들을 완벽히 정리했다. 무엇보다 실제 이야기들을 마음을 움직이는 편집과 구성으로 스토리를 만들어 퓰리처상을 수상한 사례들이 여럿 수록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안면 기형을 앓는 10대 소년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리스크를 감수하고도 여러 차례 성형수술을 감행하기로 결심한 이야기, 한 음악 신동에 대한 연재 기사, 프렌츠프라이가 아시아의 맥도널드 점포에 닿는 과정을 스토리로 만들어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된 경우까지 평범한 이야기도 논픽션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하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같은 이야기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게다가 그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 실화라면 그 임팩트는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평범한 소재를 모두가 열광하는 스토리로 바꾸어주는 특급 글쓰기 코칭을 통해서 누구나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바로 실전에 적용해 볼 수 있는 현실적인 팁들이 가득하고, 스토리텔링 기술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각종 사례들을 통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논픽션 글을 주로 다루고 있지만, 픽션 글쓰기를 하는 작가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고, 기자나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유용한 정보들이 가득하다. 팔리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 작가 지망생들에게도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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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1-24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찾던 책 소개 감사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 세계적 지성이 전하는 나이듦의 새로운 태도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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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란 이런 것이다. 결말의 임시 생략, 근본적인 불확실성. 삶은 이제 탄생에서 죽음까지 날아가는 화살이 아니라 선율적 지속(앙리 베르그송), 켜켜이 쌓인 시간성의 밀푀유다... 우리는 세월이 멈추기를 바랐다기보다는 그냥 기대도 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늘어난 시간을 즐긴다는 것은 상실을 애도하는 것이다. 인생은 추리소설과 정반대로 진행된다. 결말도 알고, 범인도 알지만, 범인을 저지할 마음은 없다.       p.26~27

 

오래 전에 어떤 드라마를 볼때 이런 장면이 있었다. 우연히 첫사랑 오빠를 만나게 된 여인이 자신의 딸에게 말한다. 참 많이 좋아했던 오빠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갑기는커녕 서글프더라고. 사람이 늙는다는 것이 참 불쾌하고도 서글픈 일이라고. 얼굴에 진 주름이 서글픈 게 아니라, 이왕 늙을 거면 몸 따라 마음도 같이 늙어야 하는데, 마음은 청춘인데 몸만 늙는 게 서글프다고. 엄마 나이 쉰 둘인데, 그 첫사랑 오빠를 보는 순간 꼭 열 몇 살처럼 느껴졌었다고 말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내가 꼭 나이인 것은 아니라는 것, 실제 내 나이와 스스로 느끼는 내 나이 사이의 간극은 나이를 먹을 수록 점점 더 벌어져 간다는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20대 까지는 한해, 두해 나이를 먹는 것을 체감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30대부터는 숫자에 조금씩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서류에 나이를 기재할 일이 있거나, 누군가 나이를 묻는 상황이 생기면 꼭 나이를 세어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이 책에서  ‘나이듦’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제안한다. 그는 50세 이후, 젊지 않지만 늙지도 않은, 아직은 욕구가 들끓는 중간 시기에 대해 살펴본다. 평균 수명이 길어진 시대를 살고 있지만, 사실 50세가 되면 인생이 정말로 짧아지기 시작한다. 생이 짧아지면 치열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고, 남아 있는 나날 동안 후회되는 부분을 바로잡거나 잘한 부분을 오래 유지하려고 애쓰게 되기도 한다. 우리가 삶과 맺는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하지 않은 행동, 하지 않은 말, 내밀지 않은 손. 우리는 어떤 사람을, 큰 타격이 되었을지도 모를 어떤 이야기를 놓쳤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에 상상할수록 망연자실하다. 우리는 기회를 잡지 않았다. 그때 그 자리에서 뭐라도 해야 했다. 두려움, 충격, 수줍음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바뀔 수 없던 순간들을 놓쳤다. 우리 대신 그 기회를 용감하게 잡은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그토록 심약했던 자기 자신이 용서가 안 된다. 다음에는 절대로 이러지 말아야지.       p.179

 

어떻게 나이들 것인가. 황혼은 완성의 시간인가, 또 다른 사춘기인가.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포기, 자리, 루틴, 시간, 욕망, 사랑, 기회, 한계, 죽음, 영원’이라는 10가지 주제를 통해 새로운 황혼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파스칼, 몽테뉴, 프로이트, 니체 등 풍부한 인용과 문학적인 이야기 솜씨로 유려한 사유를 보여준다. 그는 어떠한 호기심도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자기 능력을 시험하라고, 시시한 일상이 우리를 구하게 마련이니 루틴으로 생활의 뼈대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당장 죽을 듯이, 영원히 죽지 않을 듯이 지금을 누리라고, 헛된 희망에 흔들리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라고, 일이 내 뜻대로 닥치기를 바라지 말고 늘 최악에 대비하라고 말한다.

 

인간의 평균 수명은 1800년대에 30~35세였는데, 1900년대에는 45~50세가 되었고, 현재는 1년에 세 달 꼴로 수명이 연장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껏 인류사에서 그 누구도 살아본 적 없는 긴 수명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현대인에게 ‘나이’란 이전보다는 덜 절대적인 숫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나이'는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설명해주고 있을까? 오래 살고 싶다기 보다, 의미 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지만, 어느 순간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싶은 마음이 들면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현명하고, 충만하게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기대와 설렘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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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들
에마 스토넥스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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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에워싼 이 바다가 사람에게 헛것을 보게 만든다. 주임이 말해줬다... 사막의 신기루, 바다에서도 똑같은 신기루가 나타난다. 당신이 믿지 못할 온갖 색깔들. 물보라와 소용돌이, 수면 위에서 훨훨 날아다니다가 사라지는 형체들. 평평한 바다에서도 물은 잘게 쪼개지고 부서지며, 검은색을 띠는가 하면 밤새 바깥에 내놓은 쓰레기 봉지처럼 떨면서 다가온다. 당신은 하늘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에 손가락을 찔러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만져볼 수 있을 것 같다... 날마다 바다와 함께 살다 보면, 바다는 당신 안에 무엇이 있든 그것을 꺼내어 비춰준다.       p.205

 

바다 한가운데의 등대에 남자 셋뿐이다. 거기에 특별한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냥 세 명의 남자와 바다가 전부다. 사방 수 킬로미터 내에는 바다, 바다, 그저 바다밖에 없다. 외로움, 고립감, 단조로움이 함께 하는 그 생활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바로 등대원의 삶이었다. 네 명의 남자가 교대로 세 명씩 8주간 등대에서 일을 하고, 4주간 집으로 가서 휴가를 보내는 교대 근무를 반복해 왔다. 그 날은 지긋지긋한 폭풍우 때문에 며칠이나 배를 띄우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날씨가 풀려 교대할 등대원을 데리고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바다 한가운데 솟아 있는 타워 등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있어야 할 등대원 세 명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 빠져나간 징후도, 도주한 흔적도 없고, 등대원들이 어디론가 떠났음을 암시할 만한 단서도 보이지 않았다. 출입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두 개의 벽시계는 같은 시각에 멈춰 있었으며, 식탁에는 식사를 앞둔 듯 식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주임 등대원의 기상 일지에는 폭풍이 타워를 맴돌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날 하늘은 맑았다. 이곳에 있던 세 남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어떤 기이한 운명이 이 불운한 세 남자에게 닥쳤던 것일까.

 

 

 

가보지 않은 길이 수없이 많아요. 만약에 내가 아서를 만나지 않았다면? 만약에 패딩턴 역의 매표소 줄에 서 있던 나에게 그이가 인사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그이가 등대 관리소에 취직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우리가 휴가를 가지 않았다면, 또는 그 여름 별장이 지어지지 않았다면, 또는 그 남자가 월요일에 출근하기로 결심해서 돈을 더 많이 벌고, 그래서 여기가 아닌 외국에, 투산의 언덕배기에 작고 예쁜 집을 지었다면? 만약 내가 그날 목욕을 하지 않았다면?         p.382

 

1900년 스코틀랜드 앞바다에 있는 엘런모어 섬에서 등대지기 세 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건이 있었다. 이 작품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등대원들이 사라진 미스터리와 감춰진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타워 등대에서의 삶에 대한 일화와 경험 가운데 일부는 실제 등대원들의 회상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작가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이다. 1972년에 등대원 세 명이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나고, 20년 뒤인 1992년에 해양 미스터리에 감춰진 진실을 밝히러 나선 모험소설가가 등대원의 아내들과 연인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식으로 교차 구성이 되어 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각각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어, 전체 사건의 퍼즐을 맞춰 가는 과정 내내 긴장감 넘치는 몰입감을 안겨 준다.

 

대부분의 범죄 소설에서 피해자의 가족, 친구, 주변인물들을 지배하는 것은 '회한'이라는 감정일 것이다. 시간이 그대로 박제되어 머릿속에서 '만약'이라는 단어를 지울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때 왼쪽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갔더라면 이라는 선택에 대한 후회,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만, 다시 한번 시간의 끝을 잡고 돌아가고 싶은 회한의 선택들. 하지만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한들, 나라는 인간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결국 내가 하는 선택은 같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생에서 하는 수많은 결정들로 인해, 결국 우리의 미래가 달라진다는 것, 그러니 모든 이야기에는 한 가지 이상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세 남자가 고립된 등대에서 느끼는 생각과 감정의 변화,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털어 놓는 진실과 거짓말이 안겨주는 충격이 파도처럼 읽는 이를 뒤덮는 작품이다. 책을 읽는 내내 파도가 솟구치고, 바닷물이 뱃머리를 들이받고 부서져 내리는 장면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했다. 그 속에 엷은 안개와 함께 위엄 있게 서 있는 고독한 등대 속에서 벌어진 미스터리 속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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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
디파 아나파라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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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납치된 거라면, 우리가 사건을 해결하면 되잖아." 내가 말한다. "<경찰 순찰대>를 보면 실종자를 찾는 방법이 다 나오거든. 먼저......"
"어쩌면 정령이 데려갔을 수도 있어." 목에 건 닳아빠진 검은 줄 목걸이에 달린 금색 타위즈를 만지면서 파이즈가 말한다. 그 부적이 파이즈를 사악한 눈과 못된 정령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다.
"정령이 어디 있다고 그래. 아기들도 안 믿겠다." 파리가 말한다.     p.36

 

쓰레기장과 높다란 장벽을 사이에 두고 신도시와 마주 보는 빈민가에 사는 아홉살 소년 자이. 작은 양철 지붕 집들이 마구 뒤섞여 있는 이곳에선 공중화장실에도 돈을 내야 사용이 가능하다. 경찰들은 지저분한 마을을 통째로 밀어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었고, 그들을 다 쫓아내는 날이 언제 찾아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자이와 같은 반 친구인 바하두르가 실종된다. 바하두르의 아빠는 최악의 주정뱅이였고, 엄마는 일하느라 일주일 정도 집을 비운 터라, 아이가 사라진 지 벌써 5일째였는데 이제야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바하두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일까, 아니면 정령들이 데려간 걸까.

 

<경찰 순찰대>와 <범죄의 도시> 같은 드라마를 좋아하는 자이는 바하두르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확신한다. 수백 편의 드마라를 봤고, 탐정들이 나쁜 놈을 어떻게 잡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이는 가장 친한 두 친구 파리와 파이즈를 조사원으로 고용하고 탐정이 되어 실종된 친구를 찾기로 한다. 자이 탐정단, 일명 ‘보라선 정령 순찰대’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빈민가의 아이들은 계속해서 실종된다. 마을 사람들은 혹시라도 자신의 아이가 납치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사건의 실마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오늘은 바하두르와 다른 아이들이 사라지기 전의 어느 날 같다. 내가 탐정도 아니고 찻집 종업원도 아니었을 때의 어떤 하루 같다. 좋은 날, 어쩌면 가장 좋은 날이다. 탐정이 되는 건 너무 힘들다. 어쩌면 나는 탐정이 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자수스 자이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이쯤에서 은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커서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내가 받아 온 성적표를 볼 때마다, 파리는 회계사나 지방공무원이 될 거고 나는 파리의 하인이 될 거라고 말한다.        p.283~284

 

'아이들에 관한, 오직 그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라고 작가가 말했듯이, 이 작품은 빈민가 아이들의 유쾌함과 당당함이 페이지마다 묻어나는 작품이다. '보라선 정령 순찰대'의 멤버인 자이와 파리, 파이즈가 각각 성격이 달라 귀여운 매력을 발산한다. 자이는 공부는 잘하지 못하지만, 수사 드라마를 수백 편 본 애청자로 그렇게 쌓은 수사력을 적극 활용한다. 파리는 늘 도서관 책을 끼고 사는 지적인 소녀로 팀내에서 지식 부족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해준다. 파이즈는 팀의 행동대장격으로 정령에 대한 많은 지식으로 수사에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수업을 빼먹고 보라선 열차를 타기도 하고, 값비싼 보라선 전철 푯값때문에 시장의 찻집에서 일을 하고, 찻집 종업원이라는 신분은 유령시장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며 유령시장과 빈민가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드는 자이 탐정단의 활약은 시리즈로 이어져도 좋을 만큼 흥미로웠다.

 

2021년 에드거 상 수상작으로 디파 아나파라는 데뷔작인 이 작품으로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을 아우르는 영미 문단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인도 출신 영국 작가인 디파 아나파라가 뭄바이와 델리 등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던 당시의 경험과 인도에서 나고 자란 기억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하루에 180명이나 되는 어린이가 실종되고 있으며, 이런 사건은 유괴범이 체포되거나, 혹은 잔혹한 범행이 세간에 알려져야만 비로소 뉴스에 나온다고 한다. 언론은 범인들에게만 관심을 쏟는데 반해, 디파 아나파라는 사라진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빈곤 가정의 실종된 아이들이 통계수치로 전락하지 않도록, 숫자 뒤에 숨겨진 아이들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인도의 빈민가라는 이국적이고 낯선 풍경을 실제 그 거리를 걷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어, 인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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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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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는 그 모든 상념으로부터 물러나 공구창고 안의 시원한 새벽 그늘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곳에 있기로, 떠나지 않기로 했다. 갑자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마치 추락하고 있는 것처럼, 발밑의 땅이 사라지고 행성의 중심부까지 떨어질 것처럼. 기쁨인가, 공포인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심장이 뛸 때마다 그의 피가 뼈와 근육에 똑같은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떠나지 않을 것이다.      p.28

 

40년이라는 세월은 누군가에게는 평생이고, 누군가에게는 그 이상이다. 행성 콜로니 3245.12는 지구를 떠나 인류가 40년째 거주하고 있는 행성이다. 그러던 어느 날, 콜로니 거주를 관리하는 컴퍼니가 사업권 상실을 이유로 주민들에게 이주 계획을 발표한다. 컴퍼니 대리인들은 주민들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고, 모든 것이 제공될 거라고 말했지만, 이주 경험이 있는 오필리아는 짐을 가져가려면 이주 준비에 30일 이상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필리아는 콜로니 정착 초기부터 이곳에서 남편과 자식들의 죽음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아이를 키우며 살아온 것이다. 컴퍼니는 이제 칠순인 오필리아가 생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이주 비용을 개별적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직업 없이 정원과 집을 가꾸고 요리를 거의 도맡아 한다는 이유로 쓸모없다는 취급을 당하면서 오필리아는 분노가 치민다.

 

이미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그녀의 다짐은 굳건해졌고, 아들 부부에게 말한다. 내가 남으면 너희가 비용을 부담할 필요도 없고, 어차피 난 극저온 탱크에서 견디지 못할 거라고. 여기 남아 있겠다고 말이다. 오필리아는 그 어떤 요구도, 충고도, 폭력도 가해지지 않는 혼자만의 세상, 자유를 꿈꾼다. 결국 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혼자 남게 된 오필리아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텅 빈 행성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방해도 없고 성난 목소리도 없고, 그것은 그만두고 이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에 살아남은 생명체가 자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100여 개체의 아주 큰 갈색 동물,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동물들이 등장한 것이다. 버려진 마을에서 먹을 만큼만 정원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려던 오필리아의 계획은 그렇게 달라진다. 그런데 지난 40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괴동물들이 대체 왜 오필리아에게 접근한 것일까. 혼자 남겨진 70대 노인은 그들과 어떻게 공존하게 될까.

 

 

 

외로움이 돌처럼 무겁게 오필리아를 내리눌렀다. 억지로 정원을 돌보고 억지로 소와 양을 살피러 가면서 간신히 하루하루 버텼다. 정신을 차려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얼어붙어 입을 헤벌린 채 들릴 리 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들과 며느리와 그가 거의 평생 동안 알고 지낸 이들이 떠났을 때는 이렇지 않았으면서. 그때 그는 자유롭다고 느꼈다... 이제 오필리아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좁은 장소에 갇힌 것 같았다.     p.106

 

정말 오랜 만에 출간된 엘리자베스 문의 신작이다. 그녀의 작품은 <어둠의 속도>이 2007년에 국내에 출간된 이후로 소식이 없었는데, 이번에 개정판과 신작이 함께 출간되어 너무 반가웠다. 네뷸러 상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한 <어둠의 속도>만큼이나 이 작품 역시 세계 주요 SF문학상인 로커스상, 휴고상,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상 최종 후보작으로 오르며 화제였던 작품이다. 특히나 '외계인과 인간 여성 노인'이라는 존재의 만남이라는 설정으로 70대 노인의 행성 생존기를 그리고 있어 굉장히 색다르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엘리자베스 문은 그 동안 장애를 '다름'이 아니라 '결핍'으로 보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회가 정한 쓸모와 무쓸모의 경계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 왔다. <어둠의 속도>에서 자폐인의 일인칭 시점으로 섬세하게 이야기를 그려냈다면, <잔류 인구>에서는 70대 여성 노인을 등장시켜 사회가 정한 기준과 시선을 속시원하게 부숴 버린다. 보통 외계생명체가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첫 만남의 대상을 노인 여성으로 설정하는 경우란 흔치 않다. 그것도 사회로부터 가치없고, 쓸모없다는 이유로 버려지다시피 했던 존재로 말이다. 오필리아는 과학자나 인류학자들도 어려워했을 일을 거뜬해 해낸다. 외계 생명체와의 만남을 돌봄능력과 인내심등을 활용해 배려하고, 인내하며 소통하고, 더 나아가 그들만의 '공동체'를 꾸려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야기가 후반부에 이르렀을 때 오필리아가 다시 찾아온 사람들과 외계 생명체들과의 사이에서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해주는 장면이 있는데, 어리석은 그들에게 현명한 진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어 굉장히 뭉클했다. 무지로 인해 외계생명체들을 공격하려는 이들에게, 단호하게 그들이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설득하는 모습은 70대 노인이 아니라 마치 여전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동안 만나본 적 없던, 아주 특별한 SF소설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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