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타이어
이케이도 준 지음, 권일영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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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하지만 말이야, 조직이라는 게 나 혼자 아등바등해봐야 어쩔 수 없는 때도 있거든."
"그건 거짓말이야." 에리코가 일축했다.
"어떤 조직도 누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 모든 사람이 '나 혼자 애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고 체념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뿐이지.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자기가 나서야 하지 않겠어?"     p.129

 

도로를 달리던 트레일러에서 타이어가 빠져 날아가는 바람에 인도를 걷고 있던 사람의 등에 부딪치고 만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안타깝게도 즉사였고, 운전자는 법정속도를 아슬아슬하게 지켰고 속도위반은 전혀 하지 않았다. 사고가 나기 전에도 운전자는 아무런 이상 증상을 느끼지 못했는데, 타이어가 왜 갑자기 빠진 것일까. 사고는 언론의 주목을 받아 보도되었고, 사고 차량을 운행하던 아카마쓰운송은 누가 보더라도 '가해자'였다. 운전기사에게 과실이 없다면, 정비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 밖에 없었고, 경찰 역시 정비 불량으로 결론을 내린다.

 

40년간 아카마쓰운송을 이끌어온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 뒤를 이어 10년째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사장 아카마쓰 도쿠로는 정비 불량이라는 결론에 도저히 납득하지 못한다. 정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어가 빠졌고, 경찰 역시 그에 대한 증거를 찾지는 못했기 때문에 체포를 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조사인 대기업 호프자동차는 사고 원인이 아카마쓰운송의 정비 불량이라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그에 대한 보고서와 부품을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사고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하던 아카마쓰는 이전에도 비슷한 사고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비 불량이라 망가졌는지, 구조적 결함이라 망가졌는지에 따라 책임 소재는 전혀 달라진다. 하지만 과연 영세한 중소기업이 매출액 2조 엔을 자랑하는 대기업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싸우지 않을 건가요, 그 회사하고?"
"절대로 용서가 안 됩니다. 용서할 일도 없겠죠... 하지만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과거는 바뀌지 않죠. 그렇다면 미래를 바꿀 수밖에 없어요. 전 더는 그 호프자동차라는 회사에 삶을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 계속 싸우면 다에코가 남긴 즐거운 추억까지 일그러지고 말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제겐 다른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애를 위해, 아내도 틀림없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거예요."
운명은 왜 이리 잔혹한 걸까. 왜 이리 슬픈 걸까. 그렇지만 남겨진 사람은 다들 살아가야만 한다. 이런 슬픔을 넘어서서.         p.784~785

 

이 작품은 2020년에 국내에 출간되었던 작품으로 절판되어 만날 수 없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소설 이전에 영화나 드라마로도 유명했던 작품이라, 영상화된 버전으로 먼저 만나본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픽션이긴 하지만, 사실 2000년대에 실제로 벌어졌던 미쓰비시자동차의 대형 트럭 타이어 분리에 의한 사상 사고와 미쓰비시의 리콜 은폐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특히나 이케이도 준 작가 자신이 1988년부터 1995년까지 미쓰시비은행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 더욱 실감나는 현실성이 장점이다. 극중 아카마쓰운송은 이 사고로 인해서 큰 거래처를 잃고, 은행으로부터 융자도 거절당하고, 용의자 취급받으며 경찰 수사를 당했고,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아들 또한 학교에서 왕따와 괴롭힘을 받았으며, 부품 반환을 둘러싸고 호프자동차와 끊임없이 실랑이를 벌여야했다. 애초에 누가 보더라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대기업의 수법은 비열했지만 그렇다고 재판을 걸어 법적 수단에 호소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자금 조달도 어려워 회사를 더 이상 운영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마쓰는 멈추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케이도 준은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가장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작가이다.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는 무려 네 권짜리로 엄청난 분량의 작품이었지만,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이 '읽는 재미'를 안겨주는 소설이었고, 이후에 나온 <변두리 로켓> 시리즈와 <일곱 개의 회의>, <루스벨트 게임> 등 출간된 모든 작품들이 탄탄한 구성과 생생한 캐릭터를 통해 완벽한 재미를 선사했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만난 <하늘을 나는 타이어>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팔백 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에 등장인물만 70명에 달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페이지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을 정도로 뛰어난 사회파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사고의 진상 규명이라는 하나의 플롯을 중소기업의 사장과 대기업의 직원, 은행원과 주간지 기자, 경찰 그리고 사건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인물의 시점으로도 바라보면서 여러 각도에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조직과 그 속의 개인에 대해 사회적으로 문제 제기를 묵직하게 해내고 있다. 소설적 재미에 의한 엔터테인먼트로서도, 사회의 어둠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로서도 아주 뛰어난 작품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케이도 준이 있게 한 그의 모든 작품의 근간이자 원점이라 할 수 있기에, 이 작품은 놓치지 말고 챙겨 보기를 적극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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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 너의 집, 우리의 집 - 2016 볼로냐 라가치상 스페셜 멘션 수상작 웅진 모두의 그림책 45
루카 토르톨리니 지음, 클라우디아 팔마루치 그림, 이현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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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번화가, 몬티 지구에 있는 자코모네 집에는 물건이 많아 빈틈이 없다. 창 밖으로 콜로세움이 보이고, 벽에는 그림이 빼곡히 걸려 있다. 마테오 네 집은 아주 좁은데, 식구들이 무려 열한 명이나 된다. 엄마, 아빠, 누나와 누나의 남자 친구,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와 고모부, 고모부의 아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멀리 떨어져 살던 먼 친척까지 함께 살고 있는 중이다.

 

 

로레나네 집은 수백 년 전에 지은 오래된 건물이고, 신델네 집은 나무외 쇠붙이로 만든 오두막처럼 생겼다. 하루 종일 바이올린 음악이 흐르는 밈모네 집은 넓고 아름답고, 오타비오네 집은 영화관 위에 있어 방에서도 영화가 상영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닷가에 있는 집도 있고, 엄마 아빠가 운영하는 호텔에 사는 아이도 있다.

 

 

이 책에는 열 명의 아이가 사는 열 개의 집이 등장한다. 집들은 모두 다르면서도 비슷한 풍경을 가지고 있다. 장소와 모양과 크기만 다른 게 아니라 그러한 집들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과 삶의 흔적들 또한 각기 다르다. 각자의 집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놀이를 하고, 공부를 하고, 꿈을 꾸며 아이들은 그렇게 성장해 나간다. 사는 환경은 생활 습관과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고, 함께 있는 가족들과의 관계 역시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되는지 그 과정을 형성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집이란 세상 그 자체와도 같다.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사회와 부딪치게 될 일이 아직은 적고, 집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니 말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는 자신만의 공간, 자신이 안정을 느끼는 집이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10명의 아이들이 사는 집들을 통해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꿈을 꾸며 살고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이탈리아의 그림책 작가, 클라우디아 팔마루치와 루카 토르톨리니는 이 작품으로 볼로냐 라가치상 스페셜 멘션상을 수상했다. 특히나 이번 한국어판에는 클라우디아 팔마루치 작가가 한국어판만을 위해 새롭게 작업한 본문 그림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작품 속 호텔을 묘사한 그림에서 호텔을 찾은 여러 손님들의 모습을 통해 다양한 삶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잘 살릴 수 있는 새로운 표지와 한국어판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림을 통해서 세계 유일 버전의 <나의 집, 너의 집, 우리의 집>이 탄생했다.

 

내가 어렸을 때 자라온 집들이 지금의 나를 형성했을 것이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현재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 누구나 꿈꾸는 자신 만의 집이 있을 것이다. 수영장이 있는 집, 근사한 정원을 꾸밀 수 있는 집, 복층으로 된 집, 세련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집, 뷰가 좋은 고층 아파트 집 등등 상상하는 데는 한계가 없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내가 꿈꾸던 집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이 그에 얼마나 근접했는지도 생각해 본다. 집이란 나의 매일매일이 쌓이고 있는 공간, 어린이들의 매 순간이 기록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니, '사람이 추위나 더위를 막고 들어가 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훌쩍 넘어 선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작가인 클라우디아가 어린 시절 꿈꿨던 상상의 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모두들 자신이 어린 시절 바랬던 집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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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단어 - 생활견 키키와 반려인 진아의
임진아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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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먹고, 정성 들여 쉬고, 하루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매일이 모여 만들어진 책이다. 책 속에 쓰인 언어가 내 몸 어딘가에 딱 들어맞아 지친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훌훌 넘겨 가며 가볍게 읽는 것만으로 좋은 곳에서 근사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충만한 기분이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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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
후루우치 가즈에 지음, 남궁가윤 옮김 / 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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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라는 건 언제든 비참한 법이야. 지금도, 옛날도. 지금은 전쟁 중인 세상하고는 전혀 달라도 너희에게는 너희만의 힘든 일이 있겠지. 하지만 난 그 사람이 보여준 아름다움을 마음에 쭉 간직하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시게루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인생은 고생스러운 법이란다. 그러기에 더더욱 단것이 필요하지.”
그러면서 스즈네의 눈앞에 팥 찐빵 접시를 내밀었다.         p.212

 

스즈네는 대학을 졸업하고 오잔호텔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한 지 7년째 되는 해에 동경하던 애프터눈티 기획팀에서 일하게 되었다. 원래 애프터눈티를 담당하던 선배가 육아휴직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빈자리를 채우게 된 것인데, 꿈에 그리던 부서에 왔으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고 의욕을 불태우는 중이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보지만 파티시에 다쓰야에게 번번이 거절당하고 마는 처지이긴 하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여전히 노력 중이다.

 

 

오잔호텔은 애프터눈 티 붐의 선구라고 할 만한 존재로, 매체에도 여러 번 소개가 되었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 최근에는 혼자 애프터눈 티를 먹으러 오는 손님들도 늘었는데, 새로운 애프터눈 티가 나올 때마다 혼자 라운지를 찾는 단골들이 있다. 회사원 스타일의 중년 남성과 역시나 평범한 회사원으로 보이는 여성이다. 이들은 라운지 직원들 사이에서 '솔로 애프터눈 티의 달인'이라고 은밀히 불리는데, 한 입 먹을 때마다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을 짓곤 해서 지켜보던 스즈네까지 기뻐하게 만드는 손님들이다.

 

 

원래 애프터눈 티의 유래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한 귀부인의 배고픔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 귀족의 식사는 하루에 두 번뿐이었고, 아침 식사 후 밤 8시부터 시작되는 저녁 만찬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나 종일 코르셋을 입고 있어야 하는 여성은 가볍게 간식을 먹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남의 눈을 피해 몰래 홍차와 과자로 티타임을 즐기게 된 것이다. 그렇게 침실의 '은밀한 다괴회'는 순식간에 여성 귀족들 사이에서 퍼져나갔고, 점차 화려하고 호화로운 차 모임이 되어간 것이다. 그러니 애프터눈 티는 사교 목적뿐만 아니라, 혼자서 느긋하게 즐기는 것 또한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 이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과자는 결코 필요불가결한 존재는 아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즐겁고 아름답다. 앞으로도 향기로운 차와 보석 같은 과자를 즐기는 애프터눈 티의 시간은 힘겨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에 색채를 더해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겉모양이 예쁜 가토나 귀여운 프티 푸르의 단맛을 돋보이게 하려면 짜디짠 소금 약간이나 씁쓸한 술이 소량 필요하다니, 세상은 이 얼마나 만만치 않단 말인가.       p.330

 

애프터눈 티, 은색으로 빛나는 3단 트레이에 담긴 귀여운 마카롱과 타르틀레트 등의 프티 푸르, 갓 구운 스콘, 손가락 크기의 고급스러운 샌드위치까지.. 향기로운 홍차와 함께 대접받는 우아하고 화려한 궁극의 간식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애프터눈 티세트를 종종 즐기러 가곤 했다. 웬만한 식사 비용보다 더 비싼 가격의 디저트이지만, 눈으로 보는 것도 즐겁고, 맛은 더 훌륭하고, 천천히 다양한 디저트를 맛보며 즐기는 여유로운 시간도 좋아했기 때문이다. 애프터눈 티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비일상을 연출해내는 화려한 판타지라는 점도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우리 나라에서 파는 애프터눈 티세트는 대부분 2인 이상을 기준으로 판매되고 있어서, 한 번도 혼자서 즐길 생각을 못해본 것은 아쉬운 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혼자서 느긋하게 즐기는 것이 사실 애프터눈 티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굉장히 놀라웠다.

 

 

이 작품은 호텔의 애프터눈티팀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그곳을 찾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계절에 걸쳐 아름답게 변하는 호텔 정원 묘사도 근사하고, 호텔의 명물인 애프터눈 티에 대한 묘사는 그 향과 맛이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다. 평소에 선뜻 낼 만한 가격은 아닌 사치스러운 간식이지만, 그러기에 열심히 애쓴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너무도 공감되었고, 그 속에서 신 메뉴를 개발하고, 각자의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뭉클한 작품이었다. 계약직 직원과 정직원의 관계, 일과 육아 사이에서의 고민, 보이지 않는 차별 등 현실적인 문제들을 세심하게 그려내면서도 힘든 일상을 위로해주는 크고 작은 기쁨들을 놓치지 않는 따뜻한 작품이기도 했다. '단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맛보는 시간과 여유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휴식 같은 힐링을 안겨줄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다.

 

 

덧.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예전에 즐겼던 애프터눈 티 사진들을 찾아 보았다. 마지막으로 갔던 곳이 2019년 11월30일이었으니, 코로나 이후로는 한 번도 가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거리두기 중에도 가려고 마음먹었다면 갈 수 있었겠지만,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이제 거리두기도 끝이 났고, 차츰 일상이 회복되고 있으니.. 조만간 나를 위한 근사한 선물로 애프터눈 티를 즐기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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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의 여름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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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가르쳐줄까?” 처음으로 만난 해, 미카는 말했다. “사실은 엄마와 같이 살고 싶어. 기슭의 아이들처럼.” 중대한 비밀을 전하는 것처럼. 애초에 부모와 떨어져서 살아가는 배움터의 아이들은 노리코와 달리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것이 당연하기에 그것을 쓸쓸하다고 생각하거나 가엽다고 생각하는 쪽이 실례라고 노리코는 생각했었다. 그것을 그대로 전하자 미카는 미소 지었다. “그래?” 하고.
“쓸쓸한 건 쓸쓸하고, 슬픈 건 슬퍼.”
어떤 표정이었는지 안다.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잔혹하다. 미카의 얼굴은 확실히 떠오르지 않는다.     p.16

 

미래 학교라고 불리는 단체 시설 부지에서 여아의 백골 사체가 발견된다. 정식 학교 법인은 아니었지만 많을 때는 100명 가까운 아이들이 생활했었고, 그들 대부분은 미래 학교의 이념에 찬동하는 부모의 아이들이었다. 발견된 백골 사체가 자신의 손녀가 아닌지 확인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변호사 노리코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매년 미래 학교에서 여름방학의 일주일을 보냈었다. 여름방학 캠프 형식으로 외부의 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에게도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문답을 통해 사고력을 기르는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노리코는 잊고 있었던 30년 전 그 여름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본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여름학교에서 발견된 백골이 당시 친구였던 미카의 것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적한 시골에 자리 잡고 있는 대안교육시설인 미래 학교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신흥종교시설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내부에서 생활하던 아이가 백골 시체로 발견이 되었으니, 그 죽음이 살인이나 학대에 의한 것은 아니었을까, 학교 측에서 죽음을 은폐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견들이 분분했던 것이다. 과연 어린 소녀의 죽음은 사건인가, 사고인가. 30년 전 여름에 있었던 ‘그 사건’의 진상은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 순간, 노리코의 머릿속에 뭔가가 번쩍였다. 노리코가 시게루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큰애가 하루카, 작은애가 가나타."
통렬하게 가슴이 옥죄어왔다.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너무나도 큰 아픔에 놀랐다. 뒤늦게 이해가 되었다.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남매의 이름. 그 이름을 붙여준 부모의 바람을 알기 때문이었다.          p.552

 

외부인들에게는 신흥종교시설처럼 보이는 대안교육학교에서 발견된 소녀의 백골사체에 대한 미스터리는 대부분의 추리 소설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진행된다. 실제로 미래 학교라는 곳이 뭔가 수상한 곳이라는 의심을 독자들이 하게 되는 것은 이야기가 시작되고 150여 페이지가 지난 다음이다. 그 전까지는 소녀들의 시선으로 풋풋하고 두근거렸던 여름 학교의 추억이 그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어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뭔가 수상쩍게 느껴질 수도 있는 미래 학교이지만, 그 속에 있던 아이들의 시점으로 보여지는 그곳 풍경은 여름의 태양과 지저귀는 새들, 숲속 오솔길, 그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신비한 샘으로 기억되는 설레이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누군가의 비밀, 샘에 비는 소원, 첫사랑과 우정, 그리고 쓸쓸함과 슬픔, 마음이 둥실 부풀어 오르던 순간들과 깊은 안도감, 다정한 유대로 가득한 추억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내가 믿고 있었던 '진실'과 어른이 되어 다시 바라보게 된 '기억'이 같지 않다면 어떨까. 과거의 자신은 그저 어른들이 구축한 세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고, 알고 있던 것들이 실제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면 말이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게 마련이지만, 사실 그 시간을 체감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더 많다.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려 가느라, 매일 하루치의 삶을 견뎌 내느라,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호박에 갇힌 곤충 화석처럼, 시간을 멈추고, 추억을 결정화하고 하게 된다.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시간은 흘렀을 텐데, 이미 그 곳으로부터 멀어진 나에게 그들은 시간 속에 박제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츠지무라 미즈키는 너무도 세심하게 인물들의 심리를 그려내어 그들에게 공감하고,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 모두 한 때 겪었던 시기인 유년시절부터, 그 아이가 어른이 되고, 한 아이의 부모가 되는 삶의 순환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아이의 시간과 어른의 시간이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을 눈부시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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