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비행
리처드 도킨스 지음, 야나 렌초바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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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저러한 것이 아주 좋다면, 왜 모든 동물이 그것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일까? 왜 돼지를 비롯한 모든 동물이 날개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일까?" 많은 생물학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날개를 진화시키는 데 필요한 유전적 변이를 자연 선택이 결코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절한 돌연변이가 출현하지 않았고, 아마 돼지의 배아 발생때 이윽고 날개로 자랄 수도 있을 작은 돌기가 나오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날개가 돋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곧장 그 답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생물학자 중에서 조금 별나다고 할 수 있다.         p.61~62

 

하늘을 날고 싶다는 생각, 누구나 한 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나 역시 리처드 도킨스가 그랬던 것처럼 새처럼 나는 꿈을 꾼 적이 있고, 어린 시절 그런 꿈을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꿈속에서는 날개가 없더라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늘 위를 날고, 높이 치솟았다가 아래로 휙 내려가기도 하면서 삼차원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다. 게다가 마녀처럼 빗자루를 타고 허공을 붕붕 날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으니, 이번 리처드 도킨스의 신작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했다.

 

 

이 책에는 신화 속 이카로스, 새처럼 날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비행을 도울 기계를 설계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부터 멸종한 익룡, 최초의 동력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비행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날개가 동물의 생존에 좋다면, 현실에서 어떤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되는지를 살펴보고, 그렇다면 모든 동물이 날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비행이 쉬울 수 있는 수학적인 조건을 짚어보고, 무동력 비행과 동력 비행의 작동 방식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그리고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 기계와 공기보다 가벼운 비행 기계의 차이에 대해서, 인류 기술의 역사를 돌아보고, 중력에 맞서는 마지막 방법인 '무중력' 상태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후반부에 수록된 식물에 대한 부분도 흥미로웠는데, 제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 왜 비행을 다루는 이 책에 등장했을까 했기 때문이다. 식물들은 공중을 날지 못하는 대신 다양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비행에 상응하는 일을 하는데, 그 내용이 아주 재미있었다. 궁금하다면 이 책을 직접 만나보라.

 

 

동물의 비행은 사람이 만든 기계의 비행보다 더 복잡하며 이해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는 치는 날개가 동물의 몸을 앞으로 밀어내는(비행기 원리) 동시에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기도(헬기와 더 비슷하게) 하기 때문이다. 새가 나는 영상을 저속으로 틀면서 지켜보면(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내려는 희망이라도 품으려면 느리게 봐야 한다), 날개가 단지 위아래로 팔락거리는 것만이 아님을 알아차리게 된다.        p.170

 

첫 페이지부터 흥미진진한 이 책은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의 신간이다. 이번 작품은 중력에 맞서 비행 능력을 발전시켜 온 생물의 진화 과정을 알기 쉽게 풀어 썼다. 비행하는 대표적인 생물인 조류부터 곤충, 몽골피에의 열기구와 라이트 형제가 만든 최초의 동력 비행기까지 비행과 관련된 거의 모든 대상을 다루고 있어 비행에 관한 백과사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이 지난 수백 년에 걸쳐서, 그리고 동물들이 수백만 년에 걸쳐서 발견한 중력에 맞서는 온갖 방법들은 놀라우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현상의 이면에 숨은 과학 원리를 깨닫게 해준다. 도킨스는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비행이 주는 이점과 단점을 분석하고, 왜 일부 동물은 날개를 버린 것인지, 유전자 생존과 자연 선택이라는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정말 술술 잘 읽힌다. 게다가 거의 매 페이지마다 삽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풀컬러와 세심한 디테일로 도킨스의 무한한 상상력을 사실적으로 구현해주고 있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페이지를 몇 장만 넘겨 보아도 사실적이면서도 화려한 일러스트들이 눈길을 사로잡을 것이다. '비행이 중력으로부터 세 번째 차원으로의 탈출인 것처럼, 과학은 일상생활의 평범함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는 도킨스의 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멋진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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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터스위트 - 불안한 세상을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힘
수전 케인 지음, 정미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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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현상을 '비극의 패러독스'라고 부르며 수세기 전부터 수수께끼로 여겨왔다. 왜 우리는 다른 때는 어떻게든 슬픔을 피하려 들다가 가끔씩 슬픔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걸까? 현재 심리학계와 신경학계에서도 이런 의문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지금까지 여러 이론을 내놓았다. '월광 소나타' 같은 곡이 상실이나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에게 치료법이 될 수 있다. 부정적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누르기보다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혼자만 슬픈 게 아님을 알게 해준다 등의 이론이다.       p.87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달콤씁쓸(Bittersweet)한 상태란 무얼 말하는 걸까. 왜 우리는 즐거우면서도 괴로운,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행복하면서도 불행한, 기쁘면서도 슬픈 양가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것일까. 내향성이 얼마나 위대한 기질인지 보여주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콰이어트>의 수전 케인은 이번 책에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인간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양립된 감정들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 다양한 연구 자료와 자전적인 이야기를 통해 들려 준다.

 

책의 서문에 달콤씁쓸함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테스트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내가 어떤 경향을 띠고 있는지 파악한 뒤에 이 책을 읽으면 더 흥미로울 것 같다. 수전 케인은 고대의 4가지 체액설, 즉 우울질(슬픔), 다혈질(행복), 담즙질(공격성), 점액질(침착성) 중에서 우울질에 방향을 맞춰 '달콤씁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이 갈망과 그리움과 슬픔의 감정에 잘 빠지는 성향이라면 아주 공감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빛과 어둠, 생과 죽음은 언제나 항상 붙어다니곤 한다. 이는 삶의 비극은 희극과 피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들도 있으며 모든 상처가 다 치유되어야 하는 건 아님을 서로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 말고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서로서로 기억해줘야 해요. 사별의 슬픔이 여러 가지 감정을 일으킨다고요. 슬플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또 그러기 마련이라고요. 같은 해나 같은 주에, 심지어 같은 숨을 내쉬는 순간에도 슬픔과 사랑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다고요."       p.308~309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픈 감정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하버드 대학의 연구 결과 우리 중 3분의 1은 슬픔과 비애 같은 감정을 가진 것에 대해 자책감을 느낀다고 한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우는 건 꼴불견인 것 같고, 슬픔은 침울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달콤씁쓸한 기질과 슬픈 감정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살면서 기쁜 일보다는 슬픈 일이, 달콤한 경험보다는 쓰디쓴 경험이 더 많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슬픔과 고통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척할 때가 많다. 수전 케인은 더 이상 괜찮은 척, 행복한 척하지 않아도 된다고, 슬픔과 같은 힘든 감정들을 진솔하게 토해내면 우리의 인생은 놀라운 가능성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슬픔과 갈망, 초월이 창의성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한 연구도 흥미로웠다. 한 경제학자가 언어분석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음악가들이 일생 동안 쓴 서신을 연구했다. 그 중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언급한 경우를 추적해 그 시기에 작곡한 음악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본 것이다. 결과 부정적 감정 중에 슬픔이 주의력을 더 예리하게 해주고, 집중력과 꼼꼼함을 높여주며, 기억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 완전히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수전 케인은 <콰이어트>에서 사회가 선호하지 않았던 내향적인 사람들에 관한 새로운 힘을 발견했었는데, <비터스위트>에서도 사람들에게 등한시되고, 외면당하고, 왜곡당했던 슬픔이라는 감정 상태에 대해 놀라운 발견을 들려준다. 무엇보다 인간의 감정에 대해 아주 세밀하고도, 독창적인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어 흥미로웠다. '긍정의 횡포' 속에서 진정성 있는 삶과 일을 이어가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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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바리스타 첫걸음 - 집에서 시작하는
황호림 외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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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어쩌다 한 두끼를 안 먹더라도 상관없지만, 하루라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히는 사람, 바로 나다. 아주 어린 시절 꼭 식사 후에 커피를 타서 마시는 엄마를 보며 쓰기만 한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맛있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너도 어른이 되면 커피 맛을 알거라는 식으로 말을 했었는데, 나 역시 이제는 커피가 없으면 안 되는 나이가 되고 말았다.

 

그 동안 카페에서 파는 다양한 종류의 커피 외에도, 집에서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커피를 즐겨 왔다. 커피포트, 핸드드립, 프렌치프레스, 더치커피, 모카 포트를 거쳐 요즘은 편리하다는 이유로 캡슐커피를 애용하고 있다. 

 

 

커피는 원두의 종류에 따라, 로스팅하는 방식에 따라, 그리고 추출하는 방법에 따라 너무도 다양한 맛을 내는 음료이다. 요즘은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보다는 각자의 개성을 살린 자그마한 커피숍들이 더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은 스페셜티 커피 문화에 열광하는 나라이고,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바리스타 자격 보유자가 있다고 한다.

 

 

나도 커피를 굉장히 오랜 시간 마셔왔고, 온갖 커피 추출 도구를 사용해보았고,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서 시간과 돈과 수고를 들여 왔다.  그러다보니 종착점은 자연스레 홈카페가 되는 것 같다. 홈 카페의 가장 큰 장점은 저렴하게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더 신선한 원두로, 추출 방식의 변화에 따라 각기 다른 커피 맛을 편하게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렇게 커피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홈 바리스타 바이블이다.

 

 

이 책은 상세한 사진 설명과 함께 동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QR 코드를 수록해 다양한 추출 방법을 쉽게 따라 해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커피 레시피도 수록되어 있다. 카페오레, 비엔나 커피, 카푸치노, 아이리시 커피, 카페 콘파냐 등의 메뉴를 카페가 아니라 집에서 따라 해볼 수 있으니 홈카페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눈여겨 보게 될 것 같다.

 

그 외에도 커피의 역사, 커피 잔의 종류와 선택 가이드, 커피의 신선도를 확인하는 방법, 커피 메뉴와 이름에 숨겨진 비밀 등 관련된 정보들도 풍부하다.

 

 

언젠가 커피에 관한 통계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한해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신 커피가 약 250억잔에 달한다는 기록이었다. 전체 인구를 5천만명이라고 할때, 1인당 연간 500잔의 커피를 마신 셈이다. 전 국민이 하루에 최소 한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는 것이니, 커피는 우리의 일상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음식이다.

 

커피의 산미, 바디감 등 그 향미의 차이를 느끼고 원두 취향이 생기기 시작하면 커피가 더욱 좋아지고, 맛있는 커피에 대한 욕심이 생기게 되면 직접 해보고 싶어진다. 이 책 하나면 집에서 커피를 쉽게 볶고 추출할 수 있고, 다양한 레시피를 활용해 웬만한 카페 못지 않게 맛있는 커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커피와 바리스타에 대한 전문성을 집에서, 책 한 권으로 마스터할 수 있다니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커피에 대한 기본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은 입문자들에게 더 없이 친절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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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곳은 무덤이었다
민이안 지음 / 북폴리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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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부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나도 여전히 나라고 할 수 있어? 인간인 주인님도 그런 나를 예전의 나와 같다고 인정해 주실까? 너 같은 최신형들은 어떻게 생각하도록 프로그램되었는지 모르겠는데, 구형인 우리한테는 꽤나 어려운 문제거든."
달의 진지한 대답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저 막연히 매우 높은 인공 지능을 가진 로봇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깊은 사고와 관념적 고민을 지닌 존재를 단순히 기계라고 치부해도 괜찮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p.47~48

 

나는 온 세상이 새하얀 덩어리 천지인 곳에서 눈을 뜬다. 정체 모를 새하얀 덩어리들 사이 어딘가에 끼어 있는 상태라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아래쪽으로 빛줄기가 길게 새어 들어왔고,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지며 겨우 팔과 다리를 빼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썬 비현실적인 광경과 마주하게 된다. 커다란 공터에 새하얀 마네킹들이 쌓여 작은 둔덕을 이루고 있었고, 쌓여 있는 마네킹의 산 속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안드로이드 세계 업사이클 센터로 일종의 쓰레기장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만난 구형 안드로이드 달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정체에 대해 깨닫게 된다. 파란 피 타입, 4세대, 일련번호 1101로 자신도 역시 인간이 아니라 안드로이드였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나는 스스로를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비록 내 몸은 현재 이런 상태지만, 나는 분명 인간이 맞다' 라고, 나는 자신이 왜 이런 몸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내려고 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제대로 기억나는 것도 없고, 딱히 의지할 곳도 없었던 나는 달의 비밀스러운 임무(파란장미 찾기)에 동참하게 된다. 함께 여행하며 안드로이드인 달에게 인간적인 유대감을 표현하고, 임무를 모두 완수한 뒤에도 지금 처럼 곁에 있어 달라고, 계속 같이 있자고 말한다. 그들은 이 여정을 계속 함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망가진 메모리의 백업 데이터를 찾고, 자신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될까.

 

 

 

그렇다면 협상을 해야만 했다. 내 곁에 있겠다는 선택지를 골랐을 때에 충분한 메리트가 될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제시하면서.
“나에게는 은혜를 갚고 싶어 하는 특성이 있어. 그러니까 네가 내 곁에 있어준다고 하면, 난 너와 함께 바다에 가는 명령어를 설정할 거야. 지금 아까워서 쉽게 지우지 못하고 있는 바다 속의 기억들, 전부 다 지워도 괜찮아. 나랑 다시 가서 채우면 되니까. 지구에서 가장 깊은 해구든, 지구에서 가장 뜨거운 열수분출구든, 너의 메모리에서 그 데이터가 지워질 때마다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그러니까, 계속 같이 있자.”       p.106

 

김초엽 작가의 작품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된 이후로 한국 작가들의 SF소설이 많아졌다. 덕분에 천선란, 정소연, 듀나, 배명훈 작가 등 다양한 색깔을 지닌 여러 스펙트럼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서 좋은 것 같다. 특히 최근에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가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한국 SF소설이라는 장르가 더 주목받게 되었고 말이다. 물론 한국 SF소설의 계보는 꽤 오래 되었다. 하지만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라는 인식 탓에 그다지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인데, 최근에 나오는 작품들은 동시대적 이슈를 적극 수용한 젊은 작가들의 선전에 힘입어 국내 SF소설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최근 몇 년 사이에 SF 문학상도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번에 만난 작품도 그렇게 발굴된 반짝반짝 빛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 제1회 SF소설 공모전 ‘상상 현실이 되다’의 대상작이다. 중편 정도의 분량으로 가볍게 읽히는 작품이지만, 과학적 상상력을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풀어내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한국 SF 소설이 주목받고 있는 지금,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SF라는 장르만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은, 현실을 넘나드는 상상력에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세상을 벗어나, SF라는 무한한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 보자.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파란 장미의 환상이야말로 우리가 책 속 페이지를 펼치고 있는 동안 내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모험이 되어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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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의 손길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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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생각했는데, 다이라 선배는 흉부외과 집도의에 너무 집착하는 거 아니에요?" 스와노는 차갑게 말하고 캔 커피를 흔들었다.
"무슨 소리야? 만약 여기서 집도의가 못 되면 지난 팔 년의 고생이 허사가 된다고."
"팔 년이 허사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선배는 정말 자기 평가가 너무 낮아요. 무엇보다 선배는 대학 때부터 흉부외과만 보고 달렸잖아요. 대체 그 열정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p.133

 

다이라 유스케는 준세이카이의대 대학병원 흉부외과에서 팔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도의 심장 수술을 하기 위해 지식과 기술을 길러 왔다. 환자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하고, 자곡과의 시간을 줄이면서까지 일에 모든 것을 바쳐 온, 고지식하고 성실한 의사였다. 어느 날 그가 존경하는 아카시 과장으로부터 세 명의 인턴을 가르치는 지도의가 되어달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아카시 과장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흉부외과 의사이자 의국 최고 권위자였다. 오래 전 다이라의 어머니를 수술을 성공시켜 그가 의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유스케가 원하는 후지제일 종합병원으로의 파견을 조건으로 인원이 부족한 흉부외과에 인턴들을 입국시키라는 거였다. 셋 중 둘 이상 입국시키면 유스케의 오랜 꿈인 일류 흉부외과 의사로서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단 실패하면 오키나와의 작은 병원으로 파견되어 의사로서 성장할 아주 중요한 시기를 놓치게 된다. 하지만 인턴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행동을 오해하고, 결국 그들에게 반감을 사고 만다. 게다가 아랫사람에게 무례하기로 소문난 흉부외과 의국장 히고의 미움을 사게 되어 수술실 퍼스트 어시에서 배제되는 등 괴롭힘을 당하게 되고, 그 와중에 의국에 아카시 과장의 부정에 대한 고발장이 도착해 병원 전체에 난리가 난다. 그리고 유스케는 고발장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조사하는 일까지 맡게 되는데, 과연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후지제일로 파견을 나갈 수 있게 될까.

 

 

 

"여동생을 살리지 못한 것은 자네 탓이 아니야."
유스케가 부드럽게 말하자 우사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럼..... 그럼 누구 탓인가요? 동생은 왜 죽어야 했나요?"
우사미는 젖은 눈가를 닦지도 않고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유스케는 살살 고개를 저었다.
"누구이 탓도 아니야.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없어도 부조리한 일은 일어나니까. 그게 현실이야. 그리고 의사는 그런 부조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네."            p.252

 

치넨 미키토가 실제로 의사로 활동했다는 이색적인 경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 동안 병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작품들이 많았다. <차가운 숨결>, <무너지는 뇌를 끌어안고>, <가면병동> 등 그 동안 만나왔던 작품들 모두 자신만의 장점을 잘 살려 생사의 생사의 갈림길을 매일 마주하는 의사로서의 고뇌와 병원에서 지내는 환자들의 모습을 현실감있게 그려냈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치넨 미키토가 처음으로 도전한 의료 현장이 배경인 ‘휴먼 드라마’다. 메디컬 미스터리가 아니라 메디컬 휴먼 드라마라고 해서 더욱 궁금했다. 특히나 이 작품은 치넨 미키토가 소설가로서 데뷔했을 무렵부터 구상해온 이야기라고 하니 말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한 인간의 일과 인생에 대한 갈등을 그린 휴먼 드라마에 도전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영화 못지 않게 따스하고,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작품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인 다이라 유스케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의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카리스마 넘치는 면모를 선보이는 캐릭터도 아니며, 대단한 연줄이 있다거나 집안이 좋다거나 그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평범한 인물이다. 사내 정치가 돌아가는 데는 전혀 관심없고, 오로지 환자의 마음을 돌보는 데만 온 힘을 다하지만 그걸 또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일류 흉부외과 의사가 되어 많은 환자를 구하겠다는 꿈 하나로 그 어떤 시련도 견뎌낼 수 있다고 믿으며 여기까지 달려 온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단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아무리 사람이 좋더라도 요령이 없다면 어리숙하게 이용당하기도 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매 순간 느끼면서 살고 있다. 그렇게 그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인물이라는 점이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방점이 된다. 가슴 뭉클한 메디컬 휴먼 드라마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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