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작은 책방에 갑니다 - 일본 독립서점 탐방기
와키 마사유키 지음, 정지영 옮김 / 그린페이퍼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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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양이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 손님이 "고양이가 나온다면 어디 한번 볼까?" 하고 책을 집어 들 수 있다. 그렇게 평소에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도 책을 읽을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고양이라는 관심사 덕분에 새로운 작가의 책으로 독서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책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은 책방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p.37

 

프랜차이즈 서점이 등장했다 금세 사라지고, 온라인 쇼핑이 엄청나게 성장하고, 전자책 독자들이 탄생하면서 책과 서점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 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게다가 높은 임대료와 운영비, 책 값을 후려치는 대형 서점 체인 등으로 인해 서점을 운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서점의 안목으로 고른 책들,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큐레이션, 지역 특색을 가진 서점등.. 얼마나 다양한 독립 서점들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책장 사이로 걸어가면서 들리는 책들의 속삭임, 포근한 종이 냄새와 나무 냄새로 가득한 서점은 그 공간에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마저 주니 말이다.

 

이 책은 일본의 독립서점 23군데를 탐방한 에세이이다. 국내 독립 서점들을 다룬 책들은 몇 번 읽어 봤는데, 일본의 독립서점은 어떤 풍경을 보여줄지 매우 기대가 되었다. 국내의 독립서점들만큼이나 개성이 뚜렷한 작은 책방들이 일본 각지에 많이 있다. 간토 지역, 주부 지역, 간사이 지역, 주고쿠 지역, 규슈 지역으로 구분해 서점들을 소개하고, 책방의 대표나 직원을 인터뷰한 내용과 책방의 구석구석을 촬영한 사진까지 풍부한 정보들을 담았다.

 

 

책방에 좋아하는 책만 둔다니, 깔끔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책이 손에서 떠나는 것이 아쉽지 않을까? 가토 씨의 대답은 마치 벽이 없는 이 집처럼 열려 있었다.
"책을 팔더라도 이 책은 산 사람의 책장으로 이동하는 것일 뿐 변함없이 존재하잖아요. 어딘가 모르는 사람의 곁으로 간다고 하면 없는 것과 같지만, 이 집에 와 준 사람의 품으로 간다면 그것은 제 책장에 있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요?"         p.91

 

책방의 한쪽 벽면에 책방 주인이 몇 번이고 읽고 싶은, 지극히 주관적인 책들만 진열한 서점, 소년 탐정단 시리즈나 세계 명작 동화 전집 등 어린 시절에 읽었던 그리운 책들을 만날 수 있는 책방, 고양이를 키워드로 책을 모아서 진열하고 고양이와 함께 커피나 맥주를 마실 수도 있는 책방, 한 달에 두 번만 여는 독특한 책방, 책장 사이에 지구본과 다육 식물이 놓여 있고, 식물이나 동물을 주제로 한 책도 많고, 안쪽 뜰에는 거북도 살고 있는 중고 책방, 갓 구운 빵과 드립 커피를 책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책방, 창업 140주년이 된 유서 깊은 책방 등등 다양한 컨셉과 운영 철학으로 매력을 발산하는 책방들을 만날 수 있었다.

 

 

책이 가득한 풍경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데, 이 책에 수록된 서점의 풍경들 모두 마치 화보처럼 근사하다. 쉽게 서점하면 떠올리는 그런 인테리어뿐만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들과 책들로 인해 압도되는 느낌의 풍경들까지 책을 읽는 내내 눈이 호강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퀄리티 높은 사진들만큼이나 좋았던 것은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평소에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도 책을 읽을 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한 고민들과 사람들이 책을 접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어 가끔 오는 사람도 집어 들기 쉬운 책을 일부러 놓아두는 마음 등 책과 사람을 향한 그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뭉클했다.

우리나라에도 동네 책방은 계속 생겨나고 있고, 그 수가 80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영업 이익을 내기가 어려운 실정임에도 꽤 많은 수의 서점들이 여기 저기에서 작은 목소리로 책을 향한 진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매력적인 서점들을 보면서 국내의 동네 책방들에도 관심을 더 가져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언젠가 일본에 여행을 가게 되면, 이 책에서 만난 서점들을 꼭 들러봐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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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숙녀 신사 여러분
유즈키 아사코 지음, 이정민 옮김 / 리드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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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까닭 없이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정말 사소하고 민망한 일로. 엄마가 피곤한 얼굴로 할머니를 은근히 인정 없이 대할 대, 언니가 나를 보는 눈빛이 완전한 보호자의 눈빛일 때, 회사 사람들이 아빠를 별로 안 좋아하겠구나 싶은 몇몇 순간을 맞닥뜨릴 때, 남자 친구가 약간 마초적인 사고방식으로 나를 격려할 때. 전부 내 잘못인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고 나는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매일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생채기가 났다.          - 'Come Come Kan!' 중에서, p.44~45

 

아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형 마트 푸드 코트에서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몽땅 성형 수술비로 쓰려고 결심한다. 전부터 외모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남자 친구 한 번 사귄 적이 없는데, 마스크가 필수가 된 이후 사람들로부터 외모로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된 것이다. 왜 여자들이 예뻐지려고 하는지 그제야 깨닫게 된 아코는 성형 수술을 받아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성형외과 대기실에서 무심코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읽게 되고, <빨간 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 <소공녀 세라> 등 소녀를 위한 명작 동화에서 공통점을 찾게 된다. 어느 이야기든 예외 없이 가난한 여자아이가 부자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거였다. 사랑이나 용기가 아니라 빈곤층이 부유층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에 감동한 아코는 자기 자신을 바꾸기보다, 자신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 줄 후원자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녀는 현실에서 키다리 아저씨를 만날 수 있을까.

 

한적한 주택가 맨션 지하에 있는 회원제 이탈리안 창작 초밥집은 불륜 커플 명소이기도 했다. 검은색 계열로 내부 인테리어를 한 가게는 네 팀 정도 앉으면 거의 꽉 차는 공간에 어둑한 간접 조명으로 다른 손님의 얼굴은 잘 알아볼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장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체격 좋은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회색 추리닝 차림에 거대한 아기를 아기 띠로 가슴에 묶어 매달고, 달콤한 젖내를 주위에 퍼뜨리면서. 모유 수유를 하느라 술과 날 생선에 굶주려서 죽을 것 같았다는 그녀는 셰프의 곤혹스러움과 주위 손님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천연덕스럽게 요리를 주문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굵고 낭랑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주문을 하는 것만 보아도 그녀가 대단한 미식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리던 다른 여성 손님들도 점차 아기 엄마가 이곳에서 초밥과 요리를 충분히 즐길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으로 따지면 채 한 시간도 머물지 않았던 아기와 엄마의 등장은 그곳의 분위기를 묘하게 바꾸어 버린다.

 

 

 

아이 외에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 시야가 좁아지는 것은 당연하고, 시간에 쫓기다 보면 가장 먼저 손을 놓는 것이 문화생활이다... 마사미가 경멸해야 할 사람은 그 여성이 아니라, 어쩌면 옆에 있는 남자가 아닐까. 그들이 이렇게 다림질이 잘된 셔츠를 입고 젊은 여자와 고급 초밥을 먹는 사이에, 그 등 뒤에는 집안일과 육아에 쫓기는 여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가게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은 본래는 숨어야 할 존재가 갑작스럽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기 띠와 불륜 초밥' 중에서, p.157

 

유즈키 아사코의 신작이다. 이 작품집은 2016년 5월부터 2022년 10월까지 월간 문예지 〈올요미모노〉에 발표한 단편 일곱 편을 엮은 것으로, 연작이 아닌 독립된 이야기로 구성된 작가의 첫 작품집이기도 하다. 명작 동화의 교훈을 색다르게 재해석한 <키 작은 아저씨>, 바람 피운 남편과 헤어지려고 아이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얼결에 시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서 있으면 시아버지라도 이용해라〉, 불륜 커플 명소인 고급 초밥 레스토랑에 아기 띠를 메고 등장한 여성의 유쾌한 식도락 〈아기 띠와 불륜 초밥〉, 번번이 편집자에게 퇴짜 맞는 신인 작가에게 어느 날 대문호의 동상이 말을 걸어 오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Come Come Kan!〉 등 고정관념과 편견을 뛰어넘는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유즈키 아사코는 그 동안 여성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고 다정하게 그려왔다. 이 작품에서는 사회의 선입견에 가뿐하게 맞서는,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통쾌한 매력의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해 신선한 재미를 안겨준다. 타인에게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고 도움을 받는 것이 꼭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남을 의식하며 스스로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는 것도 괜찮다는 것을, 여자라고 해서 예뻐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필수는 아니라는 것을, 직장에서 돈을 버는 것보다 집에서 아이를 보며 가사 노동을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경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음식과 맛에 대한 묘사에 출중한 유즈키 아사코답게 〈아기 띠와 불륜 초밥〉이라는 작품에서 근사한 미식의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어 더 좋았다. 어딘가 코믹하면서도 진지한,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여운이 남는, 감각적이면서도 담백한 유즈키 아사코의 단편들은 장편만큼이나 매력적이다. 유즈키 아사코의 전작들을 재미있게 읽어 왔다면 이번 작품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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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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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잠자는 감각을 일깨우고, 욕구를 채워주고, 자아상을 규정하고, 매혹의 가마솥을 휘젓고, 위험을 경고하며, 유혹에 무릎 꿇게 하고, 종교적인 열정을 부채질하고, 이곳을 천국으로 변화시키고, 스타일을 만들어주며, 쾌락에 젖게 해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냄새는 가장 필요가 적은 감각, 즉 헬렌 켈러가 극적으로 표현한 대로 "추락한 천사"가 되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인간이 냄새를 통해 하등동물이 지각하는 것과 똑같은 정보를 지각한다고 주장한다.         p.74

 

다이앤 애커먼의 <감각의 박물학>이 2004년 국내 출간된 이후 19년 만에 새롭게 단장한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세련된 표지 이미지가 시선을 사로잡는 이번 개정판은 판형이 조금 작아졌고, 대신 페이지수가 늘어났다. 다이앤 애커먼은 에세이스트이자 시인, 이라고 소개되지만 '자연의 언어를 문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시각, 공감각까지 인간의 여섯 가지 감각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예술과 철학, 인류학과 과학을 넘나들면서 우아하게 풀어내고 있다. 다이앤 애커먼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감각이 만들어지고 성장하고 변화하여 소멸하는 그 모든 과정'은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다양한 역사적, 과학적 사례는 물론 사적인 경험을 곁들여 풀어내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너무도 아름답다.

 

후각, 즉 냄새는 우리를 수천 미터 떨어진 곳으로 많은 시간을 건너뛰어 데려다 주는 힘센 마술사다. 냄새는 모든 감각 가운데 가장 직접적이고, 시각이나 소리보다 더 확실하게 심금을 울린다. 기억하기 쉽다는 것도 냄새만의 특징이다. 우리는 특정 향기를 통해 어린 시절의 여름을 떠올리기도 하고, 해변에서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기도 하며, 가족들과의 저녁 식사를 기억하기도 한다. 냄새의 뇌관을 건드리면 모든 추억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냄새가 생존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상실과 고립을 느끼게 된다. 그에 비해 촉각은 가장 오래된, 필수 불가결한 감각이다. 촉각은 시각과 더불어 우리가 삼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촉각을 느끼는 피부는 우리와 세계 사이에 있다. 피부는 우리에게 개인적인 형태를 부여해주고, 외부로부터 보호해주며, 필요에 따라 우리를 시원하게도 따뜻하게도 해준다.

 

 

 

색깔은 세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다. 오래된 역설적인 질문을 떠올려보자. 숲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는데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없었다면, 소리는 울린 것인가? 시각에 관한 비슷한 질문이 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의 눈이 없어도, 사과는 정말 붉은 것인가?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사과는 우리가 의미하는 붉은색으로 붉은 것이 아니다. 다른 동물들은 고유의 화학적 과정에 근거해서 우리와는 다르게 색깔을 지각한다.         p.438~439

 

다른 감각들은 혼자서도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즐길 수 있지만, 미각은 대단히 사회적이다. 혼자 식사하는 것을 꺼리는 인간에게 음식은 대단히 사회적인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를 가나 중요한 사업은 식사를 하는 동안 이루어지고, 결혼식은 피로연으로 끝나며, 친구들은 기념 만찬 자리에서 재회한다. 미각이 사회적 감각이라는 것도 흥미로운데, 청각 역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우리는 소리를 피와 살이 있는 구체적 힘이라기보다 뭔가 초자연적인 것, 공기보다 가볍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소리'라 부르는 것은 크든 작든, 어떤 물체의 움직임과 함께 시작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공기 분자의 파동이다. 소리의 파동은 물결처럼 퍼져서 귀까지 도달해 고막을 진동시키고, 인체에서 가장 작은 뼈들을 움직인다.

 

시각, 즉 보는 것이 눈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뇌에서 이루어진다는 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며칠 전, 심지어 몇 년 전의 광경을 기억하기도 하고, 상상 속의 일을 눈앞에 그려볼 수도 있으니, 생생하고 자세하게 보는 일에 눈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감각을 느끼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인지 능력의 화석'이라 불린다. 여러 가지 감각을 동시에 느끼는 공감각에 대한 부분은 여섯 가지 감각 중에서는 가장 적은 분량이 담겨 있지만, 사실 나머지 다섯 가지 감각에 대해 워낙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터라 그 감각들에 대해 완전히 인지한다면 공감각도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이앤 애커먼의 글은 그 어떤 시보다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웬만한 문학 작품보다 섬세하고 우아해서 읽는 내내 눈이 호강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감각'을 통해 인간과 자연, 세상을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신비롭고, 매혹적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세상이 얼마나 황홀하고 감각적인지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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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도 언젠가 잊혀질 거야
스미노 요루 지음, 이소담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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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면 여기가 딱 꿈에서 깰 시점이네."
왠지 뭔가 치카가 기뻐할 만한 말을 하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 느꼈을 내 의지에 조금이라도 부응하기 위해 치카의 말을 받았다.
"그러네, 그래도 개지 않았으니까 이게 꿈이 아닐 가능성도 조금은 커졌어. 이렇게 차근차근 진실의 농도를 높여갈 수밖에 없겠다."
진실의 농도, 우리가 여기 있다는 증명의 점도. 전쟁도 타인도 상식도 상관없이, 다른 누구도 아닌 진짜인 우리. 이 세계를 꿈에서 현실로 바꿔갈 방법.           p.123

 

누구나 살면서 기댈 곳이 하나쯤 필요하다. 이 고루한 삶을 버티게 해 줄 무언가.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이겨낼 수 있는 무언가.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사는 게 너무도 지루하고 하찮게 느껴지는 고등학생이다. 그는 어느 날 자신만의 아지트라고 할 수 있는 버려진 정류장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를 만난다. 자신과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이 분명한 그 존재로 인해 그의 삶에도 붙잡을 것이 생긴 것이다. 그로 인해 시시했던 일상이 특별해지기 시작한다. 오로지 눈과 손발톱만 빛나는 소녀 치카의 세계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년 카야는 그녀의 세계와 영향 관계를 확인하려고 평소에는 안 할 행동을 해보기도 하고, 각자의 세계에 알 수 없는 동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세계에 있든 다른 세계에 있든, 사람과 사람이 진정으로 공감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카야와 치카는 각자의 세계에는 없는 개념을 배우고, 각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며 그들만의 시간을 쌓아 나간다. 치카는 연인이라는 개념이 뭔지, 연애가 뭔지를 알지 못한다. 그녀는 결혼이라는 것이 단순히 가족을 만드는 수단 중 하나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녀에게 카야는 오직 한 사람, 특별한 존재 연인에 대해 알려주게 되고, 점점 치카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풋풋한 연애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 오글거리지 않고 담백하며, 풋풋하고 신비롭다.  그렇게 카야의 시시한 일상에 치카가 점점 스며들어 오는데, 이것은 일시적인 꿈인 걸까, 영원히 깨지 않는 몽상인걸까. 

 

 

 

"잊어버리면 전부 거짓이 돼."
이번에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두 번 왕복했다.
"거짓이 되지 않아. 우리는 잊어버려. 아무리 강렬한 마음도 조금씩 닳아서 얇아지고 사라져. 그렇다고 그때 우리의 마음이 거짓이 되지는 않아. 그때, 죽을 만큼 지루했던 것도, 마음을 쏟을 밴드와 만나 바뀌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카야가 치카를 좋아했던 그 마음도 전부 거짓이 아니야."             p.426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만나는 장소인, 카야에겐 한밤중의 버스정류장이고, 치카에게는 피난소인 그곳에 다른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서로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이 연결된 것은 장소가 아니라 두 사람뿐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카야의 눈에만 보이는 치카는 그의 공상, 혹은 망상 속 존재인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의 만남 자체가 부정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공상인지, 어디까지가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모두 흡사 현실처럼 꿈을 꾼다. 태어나서 지금까지가 깨지 않는 꿈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치카는 꿈속이라도 너랑 만나서 기쁘다고, 자신은 그걸로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카야는 자신들이 만나는 세계를, 자신만이 아는 치카라는 존재를, 꿈에서 현실로 바꾸고 싶다.

 

스미노 요루 특유의 감수성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쉬운 문장으로 섬세하게 그려나가는 이야기는 어느 순간 먹먹한 감동을 자아낸다. 우리는 모두 매일, 평소와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 속에서 진심으로 특별하다고 여길 존재를 만나고, 일평생 사라지지 않을 마음을 가슴에 품게 되는 순간이 없다면 삶은 시시하고 지루하고 의미 없는 시간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지금'을 쌓아 올리는 수밖에 없다. 현실 속에서도 각자만의 판타지가 필요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이 세계를 꿈에서 현실로 바꿔갈 수 있는 방법을 다정하게 보여준다. '이 세상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감정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인물을 통해 아주 신비롭고 특별한 세계를 경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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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서점 - 잠 못 이루는 밤 되시길 바랍니다
소서림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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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던 할머니. 잠자리에서 흘러 지나간 환상들. 그 기억들은 여태 연서를 지탱하던 것들이었다. 현실에서 조금만 빗겨나가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공상. 그런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가슴이 떨렸다. 이 아이에게도 어쩌면 그런 환상이 만들어지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연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갈게요. 저도 어릴 때 누가 책 읽어주는 걸 정말 좋아했거든요."            p.32

 

어느 날, 어느 밤, 가던 방향을 잃었을 때쯤 만날 수 있는 서점이 있다. 벽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책장이 그득하고, 바닥에는 진녹색 카펫이 넓게 깔려있다. 마치 오래된 고목에 낀 이끼 같은 장소. 보통의 서점과는 다르게 음침하고 기묘한 분위기로 가득한 곳이다. 하지만 책을 살 필요도 없으며,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은 무한정이다. 게다가 원한다면 서점주인의 낭독을 감상할 수도 있다. 서점주인은 무척이나 온화한 목소리로 끔찍하고 섬뜩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그런 다음 공포를 느끼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둥, 화를 돋우는지 달래는 건지 모를 말을 덧붙인다. 이곳은 바로 허상과 실재가 공존하며, 기억과 미래가 혼재하는 곳, 환상서점이다.

 

연서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동화작가가 되겠다고 나선 뒤 2년째다. 그동안 총 일곱 번, 얼굴도 보지 못한 출판 편집자들에게 거절의 메일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 받은 거절의 메일에는 해피엔딩이 아닌 결말에 대한 아쉬운 부분이 있어 유독 화가 났다. 자신은 동화의 그런 결말을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글이 그들의 말대로 상업성이 전혀 없는 것인지, 문득 이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진 연서는 산행을 결심한다. 하지만 어두운 산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길을 헤맨 끝에 절벽앞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자진의 서점으로 연서를 안내하고, 그곳에서 검푸른 빛깔에 묵직한 두께의 책을 펼쳐 읽어 준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너머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 이야기가 듣고 싶어 연서는 울적한 날이면 서점을 찾게 된다.

 

 

 

여기엔 어떤 환상적인 이야기가 얽혀있을까? 그녀는 자주 하던 대로 허황한 상상을 했다. 그리고 웃었다. 돌이켜보면 이게 바로 그녀가 동화를 쓰려고 한 이유였다. 말도 안 되는 환상을 떠올리는 단 한순간, 잠시 현실을 잊고 쉬어가는 찰나, 그런 때를 사람들에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걸 이제야 다시 깨닫다니. 괜히 길을 헤맨 기분이었다. 아니, 헤맨 덕에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 서점처럼.        p.163

 

이 작품은 '밀리의 서재'에서 오디오북으로 먼저 공개되어 사랑받았던 작품이다. 오디오북이 소설화되어 전자책이 나오고, 이후 전자책이 종이책으로 출간되는 방식은 처음이지 않을까. 게다가 단순한 매체 전환이 아니라 각 매체의 특성을 고려한 유기적 세계관 연결을 구현해 내며 최초의 역주행 열풍을 일으켜 출판 시장의 새로운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오디오북을 일부러 찾아 듣지는 않는 편이라, 이 작품 역시 종이책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역시나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유명 성우들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오디오북도 궁금해졌다. 고풍스러운 잔혹동화 스타일의 이야기와 동양풍의 판타지가 빚어내는 서사가 왜 오디오북으로 그렇게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는지 자연스레 짐작하게 만들었기때문이다. 특히나 종이책 버전이 오디오북의 서점주인이 들려주던 기묘한 이야기에서 세계관을 넓고 깊게 확장시킨 버전이라고 하니, 더욱 오디오북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환생을 거듭하면서 질기도록 이어지는 인연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이야기라 배우의 연기가 곁들여지면 더 근사할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한 사람은 영원을 살고, 또 한 사람은 영원히 기억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한,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마법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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