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나들이 문해력 편 - 단어 한 끗 차이로 글의 수준이 달라지는 우리말 나들이
MBC 아나운서국 엮음, 박연희 글 / 창비교육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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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즘엔 입맛이 당기는 계절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봄엔 향긋한 봄나물이 당기고, 여름엔 시원한 제철 과일이 당기고, 가을엔 밤을 활용한 여러 디저트가 당기고, 겨울엔 호호 불면서 먹는 붕어빵이 당기니 그냥 사계절 내내 입맛이 당긴다고 해야 맞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입맛이 당기는 건 괜찮아도 입맛이 땅기는 건 맞지 않습니다. 입맛이 돋우어지다의 뜻을 담은 우리말은 '당기다'입니다. 국물이 땅기는 게 아니라 '국물이 당기는데 쌀국수 어떠세요?'라고 해야 맞겠죠?                p.42


<우리말 나들이 어휘력 편>에 이어 <우리말 나들이 문해력 편>이 나왔다. 이 시리즈는 30년 가까이 방송되고 있는 「우리말 나들이」 프로그램의 그간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현시대에 유효하고 필요한 내용들을 엄선해 책으로 엮은 것이다. 「우리말 나들이」는 정확한 우리말을 쉽고 재미있게 배우자는 취지로 MBC 아나운서들이 직접 제작하는 방송으로, 생활 속 사례를 통해 우리말을 바로 쓰는 법을 알려주는 대한민국 최장수 우리말 안내 프로그램이다. 어휘력 편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에 대한 정확한 뜻풀이를 통해 어휘력을 끌어 올려 주었다면, 이번 문해력 편에서는 문해력과 문장력, 독해력에 중점을 두고 실생활에서 쓰는 말과 글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표현들을 담았다. 


월급이 '갑절/곱절'로 늘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장을 보고 났더니 '금새/금세' 저녁 시간이 되었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초주검/초죽음'이 되어서 퇴근 했어. 이렇게 일하는데도 통장은 텅텅이라 마음이 '심란해/심난해'. 월급일이 '며칠/몇일'이나 남았지? 우울한 얘기 그만하고 저녁이나 먹자. 내가 '건하게/거하게' 살게. 등등 비슷한 표기로 인해 쓰임을 혼동하는 표현, 틀린 줄도 모르고 습관처럼 잘못 사용하는 표현들을 바로잡아준다. 특히나 SNS, 업무 메신저, 이메일, 신문 기사 등 일상적인 소통 매체를 활용한 구체적인 상황을 예문으로 제시해주어 바로 실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도록 활용도를 높였다. 각각의 내용마다 OX문제를 짧막하게 넣어 알게 된 내용을 체크해볼 수 있도록 했고, 책의 후반부에 부록으로 사투리도 외래어도 아닌 알고 보면 표준어 항목과 간단한 문해력 평가 시험도 알차게 수록했다. 




술기운을 '빌어서' 고백을 했다는 말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술기운을 '빌어서' 하는 말은 바르지 않습니다. 술기운은 빌리는 거지, 비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빌리다'에는 다양한 뜻이 있어 돈을 빌리고, 남의 손을 빌리고, 관계자의 말을 빌려 말한다 따위로 쓸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기회를 이용하다의 뜻도 있는데요, 이때는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처럼 '빌어'가 아닌 '빌려'를 써야 맞습니다.             p.178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SNS에 글을 쓰고, 이메일로 업무를 처리하며, 사람들과 소통을 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 자주 쓰는 표현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사용해 본의 아니게 상대를 당황하게 하거나, 자신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이 적지 않다. 잘못된 언어 습관이 굳어지면, 그로 인해 뜻밖의 오해나 갈등이 생기기도 하니, 정확하고 올바른 언어 사용의 중요성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밤새다와 밤새우다, 배다와 베다, 벼르다와 벼리다, 보전과 보전, 비껴가다와 비켜 가다 등 혼동해 쓰이기 쉬운 우리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간지럼은 피우는 게 아니라 태우는 것이고, 겨땀이 아니라 곁땀이 표준어라는 사실, 수입산은 틀린 말이라 외국산, 수입품 등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등 일상에서 무심코 잘못 사용하고 있었던 표현들도 아주 많았다. 


'금일'을 금요일로 혼동하고, '사흘'을 4일로 이해하거나, '심심한 사과'를 잘못 받아들여 오해하고, '우천 시 장소 변경'을 '우천 시에 있는 지역'으로 알아듣는 등 문해력 저하가 어느덧 사회적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단어뿐만 아니라, 말의 맥락도 파악을 잘 못하는 것이 요즘 현실인데, 이는 의사소통의 문제를 넘어 학습 부진과 세대 간 갈등이라는 지점까지 연결되기도 한다. 우리말을 제대로 익혀 어휘력을 끌어올리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면, 우리말 나들이 시리즈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올바른 우리말의 사용에 대해 배워보면 좋을 것 같다. 지금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책맹이 증가하고 문해력 저하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인류의 읽기 능력 자체가 위협 받는 시대이다. 디지털로 읽기가 일상화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긴 글을 읽을 때 산만해지고, 집중력은 줄어들고, 그러다 보니 읽기 능력은 떨어져가고 있다. 게다가 문해력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따로 찾아서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왜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글을 다르게 이해하는 걸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문해력을 기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단어 한 끗 차이로 글의 수준이 달라지는 걸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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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
브라이언 애터버리 지음, 신솔잎 옮김 / 푸른숲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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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판타지는 호메로스가 노래하고 셰익스피어의 배우들이 연기하던 장르다. 현대 판타지는 중세 시대의 로맨스와 초현실주의, 현대의 마술적 사실주의의 진정한 계승자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이는 여전한 사실이지만 더 이상 크게 외칠 필요는 없어졌다. 고상한 척해대는 몇몇 잡지와 노년의 교수들이 누레진 노트를 들고 수업하는 강의실을 제외하고 우리의 투쟁은 모든 곳에서 승리를 거뒀다. 판타지는 출판문화뿐만 아니라 현대 문화 전반에 퍼졌다.           p.19~20


판타지라는 장르가 주는 가장 큰 장점은 일상적인 풍경을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매혹적인 상상의 세계 안에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환상의 세계를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낸, 사실 같은 거짓말을 구축해내는 비밀이 늘 궁금했다. 판타지는 현실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인간의 내면과 사회의 구조를 더 날카롭게 비추어 낸다. '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라는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책은 판타지 문학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아홉 가지 관점으로 밝혀 나간다. 이 책의 저자인 판타지 문학 연구자 브라이언 애터버리는 판타지를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이라고 표현한다. 판타지가 어떻게 진실이 될 수 있는 걸까. 저자는 그에 대해 세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우선 판타지는 사람들이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의지한 전통적 신념과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한다. 신화는 우주를 설명할 뿐 아니라 집단, 계층, 젠더의 역할, 의례와 종교적 의무까지 보여주는데, 판타지는 이러한 전통적인 신화와 우리의 관계를 재창조하는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또한 판타지는 메타포 차원에서 진실이 될 수도 있다. 메타포는 우리가 아는 대상과 미지의 대상의 간극을 건널 수 있게 해주는데, 판타지에서는 마법을 발휘하는 장치들을 문자화된 메타포로 표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판타지는 구조적으로 진실이 될 수 있다. 판타지의 구조는 세상의 형태를, 특히 변화의 형태를 반영한다. 판타지는 성을 건설하고 왕국이 멸망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변화뿐만 아니라 성장과 욕망 같은 개인 내면의 변화가 구조화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렇게 신화와 메타포, 구조를 통해 거짓말로 진실을 말하는 판타지라는 장르에 대해 알아보았다. 겨우 여기까지가 1장의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판타지와 사실주의, 신화를 전승하는 판타지, 문학의 사회적 기능, 유토피아 문학 등에 대해 9장에 걸쳐 이야기하는데, 판타지 문학을 즐겨 읽고 좋아했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문학적 판타지는 환상 동화의 해피 엔딩을 지키는 한편 결말을 복잡하게 만들고 스토리 곳곳에 해결의 실마리를 배치해야 한다. 이로써 단순히 공주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거나 괴물이 죽음을 맞이하는 식이 아니라 한 세계가 신뢰, 사랑, 투지, 친절함, 연대감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독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공포와 트라우마를 파악하고, 이를 초월하는 방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한다... 무기로 무장된 전쟁터를 사람이 사는 동네로 바꿔놓는 시나리오야말로 이 힘든 시기에 가장 필요한 마법의 주문이다.                   p.157


어슐러 르 귄은 '판타지는 결국 가장 오래된 서사 방식이며, 가장 보편적인 서사'라고 말했다. 실제로 <반지의 제왕>, <왕좌의 게임>, <나니아 연대기>, <해리 포터> 시리즈 등 판타지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장르이자 가장 대중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이다. '지어낸 이야기지만, 거짓말이 아니'라는 점이 판타지 장르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책이 흥미진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어슐러 K. 르 귄, J. R. R. 톨킨, 조지 R. R. 마틴같이 대표적인 판타지 작가들의 작품부터 은네디 오코라포르, 헐린 웨커, 알리에트 드 보다르드 같은 현시대 작가들의 작품까지, 방대한 사례들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린 왜 판타지를 읽을까? 또는 책을 처음 접했던 어린 시절, 왜 우리가 사랑하는 그 책들에 빠지게 된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판타지 문학이 우리가 더는 견딜 수 없는 장소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는 탈출구가 되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판타지적인 이야기를 읽는 것으로 현실의 행동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세계의 이면을 바라보고, 두려움 너머를 엿볼 수 있다. 판타지가 일상을 충실히 재현하는 이야기보다 더 가치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부분 때문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판타지는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며, 때로는 그 자체로 정치적인 도구가 된다'고 말이다.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읽고, 보고, 사랑해온 판타지 세계가 실제 사회와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나가는 여정을 통해 판타지가 가진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판타지라는 문학 장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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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요리합니다, 정식집 자츠
하라다 히카 지음, 권남희 옮김 / 문예춘추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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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조우 씨가 쟁반을 건네자, 사야카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냉장 케이스로 가서 병맥주와 뽀얀 김이 서린 잔을 가져왔다. 치킨난반을 한 개 먹었다. 여전히 달고, 그리고 시다. 맥주 뚜껑을 따서 잔에 따라 단숨에 꿀꺽꿀꺽 비웠다.

"맛있네요. 밥과 술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조금 평온함조차 느꼈다.

"지금이라면 맛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난,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남편도 알아주길 바랐을 뿐인데요. 강요만 했네요."                  p.63~64


사야카는 아침, 점심 도시락, 저녁까지 하루 세 번 요리를 했었다. 2인 가족이었지만 남편 겐타로는 키도 크고 근육질 체형이라 먹는 양이 상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남편이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언젠가부터 회사 핑계로 집에서 저녁을 먹지 않는 일이 잦아지더니, 조금씩 살이 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 때문에 늦는다는 날의 대부분은 식당 '자츠'에서 술을 마시는 거였다. 사야카는 동네의 허름한 식당에서 가끔 술 한잔 하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고, 혹시 여자가 생긴 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다 남편은 이혼하자는 말을 꺼내며 집을 나가버렸고, 도저히 납득이 안 갔던 사야카는 그가 다닌다는 가게에 직접 가보기로 한다. '자츠'는 역에서 곧장 이어지는 상점가 한복판에 자리한 낡은 식당이었다. 다가 그 집 음식은 맛도 진하고 달기만 해서 자신의 요리보다 나을 것도 없어 보였다. 사야카는 수입이 줄기도 했고, 남편이 이혼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고자 '자츠'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하는데, 그녀는 남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이 작품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낡은 정식집 '자츠'를 운영하는 주인 조우와 남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이혼당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사야카, 두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호로요이의 시간>이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면 말이다. 일본 여성작가 5인이 담금주부터 사케, 칵테일, 위스키까지. 술을 소재로 여성들의 삶을 그려낸 단편집이었다. 하라다 히카는 <식당 ‘자츠’>라는 제목의 단편으로 참여했었는데, 그 이야기가 바로 이 책에 수록된 첫 번째 이야기 <크로켓>이다. 짧은 단편으로 시작되었던 이야기가 이렇게 본격적인 작품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야카와 남편은 별거 상태였었는데,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는지 가게의 전 주인과 특별한 인연이었던 것 같은 무뚝뚝한 가게 주인 조우의 과거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했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본인은 '그냥 평범한 요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금은 안다. 아내가 만든 요리는 뭐든 맛있었다. 감자조림도 채소조림도. 감자조림은 니쿠자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도 물론 맛있지만, 그리고 '자츠'에서 먹는 니쿠자가도 정말 좋아하지만, 사토는 감자를 약간 달달한 육수에 조린 것 같다. 때로는 어묵을 넣기도 하고, 실곤약이나 오징어를 넣기도 했다. 대충 만든 것처럼 보여도 언제나 맛있었다. 아, 역시 그게 먹고 싶다. 그러나 이런 요리는 너무 평범해서, 어디에서도 팔지 않는다. 사토와 함께 사라진 요리다.              p.160


<낮술>, <호로요이의 시간>, <우선 이것부터 먹고>, <할머니와 나의 3천 엔>, <도서관의 야식>, <헌책 식당>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하라다 히카의 신작이다. 전 3권으로 출간되었던 <낮술>이라는 작품을 특히나 좋아한다. 지킴이 일을 하는 삼십대 여성이 하루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길 수 있는 점심에 맛있는 음식과 거기에 어울리는 술 한 잔을 곁들이는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그렸던 작품인데, 음식에 대한 묘사가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만들었었다. 하라다 히카는 소설을 통해서 좋은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이 줄 수 있는 온전한 행복을 만끽하게 해준다. <우선 이것부터 먹고>에서는 대학 동창들이 만든 스타트업 회사를 배경으로 사무실에 오게 된 중년의 가사 도우미가 음식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는 이야기를 그렸고, <도서관의 야식>에서는 밤에만 문을 여는 도서관과 그곳에서 먹을 수 있는 야식이라는 설정으로 책 속에 등장하는 요리를 실제로 만들어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먹는다는 판타지를 구현시켜주었다. <헌책 식당>에서는 세계 최대의 헌책방 거리로 알려진 도쿄 진보초에 자리한 작은 서점 ‘다카시마 헌책방’을 배경으로 다양한 손님들의 이야기를 잘 차려진 한상 차림의 음식처럼 맛깔스럽게 그렸었다. 


이번 작품 <마음을 요리합니다, 정식집 자츠>의 메인 요리들은 크로켓, 돈카츠, 가라아게, 햄카츠, 카레, 그리고 주먹밥이다. 각각의 음식들이 각 장의 제목이 되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소소하고,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다. 자라온 환경도, 나이도, 성격도 다른 조우와 사야카, 그리고 자츠에 방문하는 손님의 시점으로 번갈아 가며 이야기가 진행되어,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하라다 히카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작품에 등장하는 음식들 때문이기도 하다. 하라다 히카가 페이지 위에 재현해내는 음식들은 그 맛과 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처럼 생생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보여주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묘사만으로 당장이라도 먹고 마시고 싶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하라다 히카만의 특별한 점이다. 지친 하루를 위로해주는 소박하지만 맛있는 한 끼 식사와 어떤 스트레스도 다 날려 줄 것처럼 시원한 한 잔이 있다면 오늘을 버텨내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해줄 것이다. 자, 이 책과 함께 사라진 삶의 온기를 천천히 데우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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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편지
설라리 젠틸 지음, 최주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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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의미를 가지잖아요. 그러니 작가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의미를 부여하는 건 독자에게 달린 거 아닌가요?"

"글쎄요......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의미를 찾아가죠. 발견은 독자의 몫이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작가가 보여주는 거라 생각해요. 그러니 작가의 도덕성은 작가가 제시하는 길을 독자가 신뢰할 수 있는지에 영향을 끼친다고 봐요."


미스터리 소설가 위니프레드는 보스턴공공도서관에서 글을 써보기로 한다. 문제는 도서관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하염없이 열람실 천장을 쳐다보게 된다는 것. 뭐라도 쓰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발견한다. 양팔 어깨부터 손목까지 문신이 가득한 젊은 여자는 프로이트를 읽고 있었고, 하버드 로스쿨 셔츠를 입고 있는 젊은 남자는 턱 한가운데가 갈라져 옛날 만화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같았다. 그의 왼쪽에 있는 잘생긴 남자는 노트북으로 일을 하며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프로이트 걸, 만화 주인공 턱, 잘생긴 남, 세 명으로 어떤 관계를 만들어 볼까 생각하던 중에 어디선가 날카롭고 겁에 질린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덕분에 네 사람은 서로 말을 나누게 되고, 그걸 계기로 친구가 된다.  


알고 보니 프로이트 걸 마리골드는 심리학을 공부하는 하버드 대학생이었고, 만화 주인공 턱 윗은 부모가 변호사인 법대생, 잘생긴 남 케인은 책을 출간한 적이 있는 작가였다. 그날 그 사건은 보스턴공공도서관에서 청소부가 젊은 여성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소식으로 뉴스에 보도가 된다. 누군가 죽는 순간을 귀로 듣고 함께 목격했다는 사실로 네 사람은 아주 특별한 관계가 되는데, 서로가 서로의 알리바이가 되는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날 살해당한 여성에 대해, 사건의 범인에 대해 추측하면서 점차 친밀한 사이가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작가인 프레디와 케인이 가까워진다. 하지만 케인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는데, 겨우 한 달 만에 친구에서 연인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의 사이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사건 당시 한자리에 있던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어떻게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지를 추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이 이야기는 점차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섞이고, 이리 저리 관계가 얽히면서 복잡해진다.




내면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소설의 형태로 공개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신의 한 수예요. 인정해요. 잘 보이는 곳에 숨는 것이랄까요. 하지만 말이 되죠. 살인자는 사람들에게 발각되고 싶지는 않지만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들키지 않고 교묘히 빠져나간데 대해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거든요. 자기 행위를 소설에 자세하게 집어넣는다면 완벽할 거예요... 그때 내가 범죄 현장 사진을 몇 장 보냈었어요. 이번 이메일에는 또 다른 사건에서 찍은 사진을 첨부했어요.              p.303


‘The Woman in the Library’라는 원제부터 호기심 가득했던 책이다. 특히나 국내 버전에서는 책 표지에 찍힌 피묻은 지문, 띠지 뒷면에 첨부된 사진 등 책의 물성도 소설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색다른 디자인의 작품이라 읽기 전부터 매우 기대가 되었다. 책의 날개가 편지봉투처럼 전체를 감싸고 있어, 스티커의 봉인을 떼면 돌이킬 수 없다는 점도 몰입감을 더해준다. 이야기는 유명한 소설가 해나가 집필 중인 <도서관 비명 살인 사건>이라는 소설과 각 장의 원고를 읽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하는 작가의 오랜 팬 리오의 편지로 교차 진행된다. 액자 구성으로 보스턴공공도서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설 속 이야기가 주요 서사로 진행되는데, 작가가 쓰는 대로 매 장을 읽고 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리오의 편지가 매우 디테일하게 작품을 분석해 나가는 과정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호주에서 집필 중인 작가가 쓴 작품이기에 보스턴에 거주하는 리오가 미국식 표현과 뉘앙스, 실제 장소의 분위기, 캐릭터의 배경과 작가의 의도에 대해 하나씩 짚어 내는 것이 그만큼 세심할 수밖에 없었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리오의 편지 내용이 점차 수위를 넘기 시작한다. 실제 벌어진 범죄 현장의 사진을 보낸다거나, 시체를 둘 적절한 장소를 알려준다거나, 소설 속 범인과 공범의 존재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점점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편지는 점점 어둠을 잠식해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만든다. 리오는 단순히 작가의 열성팬인 것인지, 그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지, 극중 도서관 비명 살인 사건의 범인은 네 사람 중 누구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압도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활자 안에 갇혀 있어야만 할까? 그에 대한 대답을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와 겉으로 보여지는 물리적 경험을 통해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이 놀라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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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리를 불태운다
브루노 야시엔스키 지음, 정보라 옮김 / 김영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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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는 이미 오래전에 공장에서도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길고도 단조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곳은 부자도 빈민도 없고 공장은 노동자의 소유이고 노동은 구속이 아니라 찬양이며 해방된 신체의 건강을 위한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믿지 않았다. 괴물 같은 기계를 제자리에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미 땅속으로 몇 미터나 뿌리를 내렸다. 기계는 이미 기억할 수 없이 오래전부터 작동하기 시작해서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맨손으로 톱니바퀴를 붙잡겠다고? 기계는 멈추지 않고 손만 뜯겨나갈 것이다.             p.49


경제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프랑스, 공장들은 일주일에 며칠씩만 가동했고, 인력을 줄였다. 피에르 역시 하루 아침에 공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로 다시 일자리를 찾아 다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무도회에 가기 위해 새구두가 필요하다고 말한 여자 친구 자네트에게 해고당한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집세가 밀려 집에서도 쫓겨나고 보니 갈곳이 없었던 피에르는 거리를 배회하다 자네트가 잘 차려입은 남자와 호텔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격분해 주먹을 휘둘렀다가 그대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뒤, 굶주림에 지쳐 쓰레기통을 뒤지는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다 벤치에서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자신을 깨우는 손짓에 눈을 뜬다. 경찰관인줄 알았던 그는 친숙한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친구 르네를 통해 피에르는 드디어 일자리를 찾게 된다. 


시립 정수장 수압관리탑에서 근무하게 된 피에르는 르네가 일하는 세균 연구소에 실험실에 있는 미생물들의 정체에 대해 듣게 된다. 세상에 알려진 모든 전염병이 시험관 안에 있었던 것이다. 르네는 그 기구들을 매일같이 정성스럽게 돌보고 먼지를 닦고 광을 내면서 자신의 부주의한 손가락이 단 한 번 조심성 없이 움직이기만 해도 깨져버릴 물체들의 존재를 느끼고 마음을 쓰게 되었다고, 자신의 생각을 피에르에게 말한다. '굉장하지 않아? 상상해봐,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이 시험관에 든 형제들을 전부 뿌리면 어떻게 될지.. 어떻게 생각해, 우리 파리에 남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의 말은 세상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던 피에르를 자극했고, 결국 그는 파리의 수압관리탑에 흑사병 균을 살포하게 된다. 다음 날인 7월 14일, 프랑스의 혁명기념일에 파리에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하면서 도시는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자기 손으로 진흙을 이겨서 자기 집을 만들 벽돌을 굽고 건물의 토대를 닦고 땅 위로 한 층 한 층씩 쌓아 올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형은 알아? 새롭고 단단하고 더욱 완벽해진 삶을 건설한다는 것… 나 자신이 그 엄청난 인간 눈사태의 핵심이 되어 날아올라 미래를 향해 간다고 느끼는 것… 그 눈사태는 내 위로 더욱 커져서 눈덩이가 뭉치듯 굵은 덩어리가 돼. 그리고 내가 그 심장인 거야…내 몸이 그 피가 돼서 혈관에서 혈관으로 스며들어...”             p.274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폴란드 작가 브로노 야시엔스키는 이 작품에서 전염병으로 자본주의 도시가 붕괴된 뒤 새로운 유토피아적 공동체가 건설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대도시의 생존이 위협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이 작품은 작가가 당시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온 것처럼 매우 파격적인 형태로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문학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20여 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발견한 정보라 작가가 기획, 번역을 맡았다. 정보라 작가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브루노 야시엔스키가 어떤 작가인지에 대한 정보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수록했는데, 작품을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작품은 출간당시 강렬하고 선동적인 내용 때문에 출판사를 찾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파리의 출판계에 인맥이 닿아 잡지 <뤼마니테>에 연재하게 되었고, 결국 이 작품은 야시멘스키가 프랑스에서 추방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우리가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팬데믹을 겪었기 때문에 이 작품 속 상황이 더 와닿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이야기는 허구의 상황이지만 실제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겪어냈던 기억이 있기에 더 공감되고,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 실직한 공장 노동자가 흑사병 균을 살포하게 된 과정은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낸 헤프닝 같은 사고였지만,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전염병이라는 재난으로 인해 사회는 점차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파리를 꿈꾸는 공산주의 활동가, 미국 자본가에게 접근해 탈출을 꿈꾸는 유대인 구역의 지도자, 볼셰비키 혁명 이후 파리로 망명해 빈곤한 생활을 이어가다 권력을 잡게 되는 러시아 고위 장교의 아들, 등 이 작품은 국적과 계급, 정치성향이 다른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시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각기 다른 야심을 품은 이들이 자치정부를 세우고, 흑사병이 파리에서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게 된 뒤, 탈출한 일부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토피아가 만들어지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20세기 어느 혁명가가 뜨겁게 상상했던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작품이다. 거의 백년 전에 쓰였지만 여전히 현대 사회의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도발적인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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