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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란히 계절을 쓰고 - 두 자연 생활자의 교환 편지
김미리.귀찮 지음 / 밝은세상 / 2025년 4월
평점 :

정신없이 일의 세계를 유영하다보면 가끔은 수면 위로 나와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을 잊기도 하잖아요. 대충 라면이나 끓여 먹자 싶은 마음이지만 그 마음을 떨치고 텃밭으로 나가는 것이 핵심이자 결정적 고비입니다. 먼저 텃밭에 무엇이 열렸는지 보고 그 채소로 할 수 있는 간단한 레시피를 검색해요. 인터넷에 계신 여러 요리 스승님들의 가르침에 따라 채소를 씻고, 다듬고, 조리합니다. 그러면서 조록조록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싱그러운 채소의 향을 맡고, 나무 도마에 칼이 탁탁탁 부딪히는 감촉을 느끼고, 오묘하게 바뀌는 요리의 색깔들을 봅니다. p.64~65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고단한 일상에 지쳐 언젠가 나이들면 시골에 집을 짓고 살 거라고, 혹은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선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고,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매번 상상 속에서 집을 짓고 텃밭을 가꾸다 상상의 시간이 끝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올 뿐이다. 오늘 하루, 과연 몇 시간을 나를 위해 쓸 수 있을지 모르는 삶, 일주일은 7일인데, 회사가 5일을 갖고 나는 2일만 가지는 것을 늘 당연하게 여겼던 삶...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을까.
결정이 쉽지는 않다.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세상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이니까.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매달 통장에 들어오던 월급이 사라진다는 뜻이니까.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게 아주 많지만,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돈이 없으면 진짜 중요한 것보다 돈 생각을 더 많이, 더 자주 하게 되니깐. 그런데 여기, 바로 그런 상상을 현실로 구현시킨 사람들이 있다. 번아웃에 시달리다 숨구멍을 찾듯 시골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해내야 하는 일로만 점철된 삶을 멈추고 싶었기에, 자신이 원했던 삶의 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도시와 회사 밖 삶을 선택한 그들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사계절의 풍경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자연 속에서 사는 삶이란 어떨까 궁금해졌다.

이 책은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 <아무튼, 집>의 김미리 작가와 <이번 생은 망하지 않았음>, <귀찮지만 매일 씁니다>를 쓴 귀찮 작가가 사계절 동안 서로에게 쓴 교환 편지다. 김미리 작가는 시골 폐가를 사서 고친 후 평일은 서울에서 밥벌이를 하고, 주말엔 시골에서 텃밭을 돌보는 생활을 하고 있고, 귀찮 작가는 회사원의 삶을 정리하고 시골에 내려와 일 년의 대부분을 시골에서 보내고 있는 중이다. 각자 서로 다른 시골 마을에 터를 잡고, 한 명은 턱시도 고양이 소망이와, 또 다른 한 명은 앙칼진 말티즈 마루와 함께 살고 있는 두 사람은 하는 일도, 성격도 다르지만 결국 자연으로 돌아와 안정을 찾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이 책은 봄에는 예정에 없던 완두콩을 심으며 텃밭의 봄농사를 시작하고, 여름에는 잡초 뽑기를 하느라 고생하다 가을에는 친구들와 양파 모종을 심고, 겨울에는 동파를 대비해 집안 곳곳을 손보며 사계절의 풍경들을 그려낸다.

밭을 매고 작물을 보살피며 단단한 믿음이 생긴 것 같아요. 오늘 한 만큼 내일 티가 날 거란 믿음이요. 딱 가꾼 만큼 정직하게 태가 나는 텃밭처럼, 내일은 내가 가꾼 오늘 하루에 달렸단 것. 그걸 생각하면 밭일이든 쓰고 그리는 일이든 뭐든 성실한 하루를 보내고 싶어져요. 어쩌면 우리가 사계절을 나며 부지런히 주고받은 스물네번의 글은 훗날 우리 스스로에게 부치는 편지 아니었을까요? 당장 눈앞의 결과나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결국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떤 형태로든 만나게 될 테니까요. p.305
김미리 작가는 예정에 없던 완두콩을 심으며 봄을 시작한다. 텃밭의 봄농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이웃 어르신이 완두콩을 한 주먹 쥐어주고 가셨기 때문이다. 꽃은커녕 싹도 틔우지 못할 것 같이 말라 비틀어진 모양새였는데, 포슬포슬한 흙 속에 자리잡은 쪼글쪼글한 완두콩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름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귀찮 작가는 자신의 방임형 텃밭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토마토, 오이, 고추, 파, 상추, 가지 등은 잡초 뽑기를 성의없게 하고, 방임형으로 키워도 척척 잘 크는 작물들이라고 한다. 당근이나 생강처럼 섬세한 관심 없이는 키우기 힘든 까다로운 작품들이 아니라 이런 작품들을 키우는데서 작가의 성격이 엿보이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조그만 작물에게 준 다정함이 귀여운 연둣빛 자태로 돌아오는데서 대견한 마음이 들고,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제 막 시작한 벼를 보면서 힘을 얻고, 하등 쓸모없다 생각했던 작은 잡초도 나름의 중요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세상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을 통해 책을 읽는 내가 힐링이 되는 듯한 느낌이다.

시골살이라는 것이 마냥 낭만적인 일은 아니라는 것, 그럼에도 불편한 삶을 고집하는 이유에 두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아무리 방임형 텃밭이라고 해도 한없이 늘어지는 줄기들을 지주대에 묶어주어야 하고, 누렇게 시들어버린 죽은 잎사귀를 정리해야 하고, 과실이 너무 익기 전에 따주어야 한다. 조그만 텃밭에도 해야 할 일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것이 시골살이의 진짜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골이기에 가능한 이웃 어른들과의 정겹고 따스한 일들도 많다. 30도가 넘는 무더운 여름에 무성한 잡초들을 뽑기 시작했는데, 하필 해가 가장 높이 뜬 시간에 텃밭에 쭈그려 앉아 있는 걸 본 이웃 어르신이 한 마디 건넨다. "젊은 사람은 뭐, 목숨이 여러 개여? 왜 땡볕에서 일을 하고 그랴. 쓰러져. 일어나믄 다음 생이여." ㅋㅋㅋ 이 귀여운 유머때문에 책을 읽다가 빵 터졌다.
조금 귀찮고 힘들어도 자연에 기대어 살 수 있는 삶, 막막하고 힘들면 언제든 달려가 자연에게 위로받을 수 있는 일상이라니... 참으로 부러웠다. 자연에서 얻는 위로와 감상이 삶 속의 어떤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되지 못할지라도 그걸로 또 오늘 하루를 버텨낼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지 않을까. 누구나 살면서 수없이 흔들리고, 이 길이 맞는 건지 불안해하고, 이 방향이 괜찮은 건지 의심하면서 성장해 나간다. 중요한 것은 늘 자신만의 리듬을 찾는 자연처럼, 자신에게 잘 맞는 페이스를 찾는 일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부지런하고, 단단하게 하루하루를 빚어나가는 이 책 속 두 작가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