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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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는 아내인 릴리아에게 그 동안 거짓말을 해왔다. 보안 문제가 있는 회사들을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아내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사실 그는 다국적 기업이나 외국 정부 부처, 재력과 연줄이 있는 개인을 고객으로 그들의 기득권에 손해를 입히는 활동을 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보고서를 작성한다. 한마디로 스파이였다. 그러니 그는 가족에게도 자신이 실제 하는 일을 완벽히 숨겨왔던 삶의 스파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내는 그에게 언어를 엉터리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쪽지와 그에 대한 목록을 써낸 편지를 남기고는 떠나 버린다. 그녀는 자신이 고갈된 것 같다며, 긴 여행을, 그것도 혼자만 가고 싶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상냥한 사람이다. 나는 매혹적이지는 않다 해도 매우 잘생겨 보일 수는 있는 사람이며, 내가 이 삶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대체로, 당신이 나와 함께 있을 때 왠지 당신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해 주는 내 재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유혹하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결코 당신에게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며, 결코 손쉬운 칭찬이나 가증스러운 아첨을 하지 않는다. 나는 눈앞에 있는 재료로, 당신에게서, 당신이라는 천연 원광에서 다듬어 낼 수 있는 것으로 버틴다. 그런 다음 당신의 가장 은밀한 허영심에 불을 지핀다.

한국 이름은 박병호, 미국 이름은 헨리 파크. 그는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이다. 미국인 아내와 결혼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가 떠나고 홀로 남겨지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민자의 삶이 그렇듯이, 항상 온전히 자신이었던 적이 거의 없었던 시간들이었기에 말이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해야 했으므로, 말을 할 때마다 발음이 정확한지 의식을 해야 했던 삶이란, 언제나 나 아닌 타인인 척 해야 했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셨지만, 아들을 위해 미국에 건너와서는 과일과 채소를 파는 일을 했다. 아버지에게는 인생의 모든 것이 반드시 가족 문제였다. 아버지의 세계는 오로지 아들과 부인 뿐이었다. 낯선 나라에 살면서 백인과 흑인 사이의 골치 아픈 일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이, 오로지 가족에 대한 책임감만 투철했다. 미국에 온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나, 그들은 끼니마다 한국식 밥과 김치, 반찬을 먹었으며 서로를 존중하는 만큼의 애정 표현은 하지 않았던, 그러니까 뼛속까지 한국인이었다.

나는 늘 말에서 나쁜 잘못을 범하곤 한다. 나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더듬거리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억한다. 릴리아는 말을 하는 어떤 정신적 통로가 있는데, 그것은 한번 배우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도 가끔 little 대신 riddle이라고 말하고, vent 대신 bent라고 말한다. 물론 억양은 전혀 어색하지 않기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은 내가 순간적으로 생각의 흐름을 놓쳤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이 늘 두 언어의 위치를 바꾸는, 융합하는 conflate-어쩌면 큰불을 낸다conflagrate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헨리의 아들 미트는 딱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죽었다. 그리고 아내와도 본의 아니게 별거 상태가 된 그는 이제 혼자 남겨져 버렸다. 그는 미국계 한국인으로 뉴욕의 시의원이자 유력한 차기 시장후보로 거론되는 존 강이라는 인물의 뒷조사를 맡게 된다. 그를 염탐하던 헨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며 스스로의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그가 이민자로 살아온 과거에 대한 회상과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의 긴박함이 쌓이면서 페이지가 쌓여간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 가는 여정은 곧 우리네 삶과도 같다. 대부분 바쁜 일상에 치여 잊고 살지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는 여지없이 내가 제대로 살아온 걸까. 여기 내가 발을 딛고 선 이곳은 어디인 걸까. 나는 대체 누구일까. 라는 질문과 맞닥뜨리고 만다.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불안한 미래에 대한 가장 든든한 지지대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정체성에 관한 수많은 이론에서는 '타인과의 관계라는 구조 속에서만 개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민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주인공의 정체성 찾기 여정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이창래 작가의 95년 첫 장편소설이 작가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이번에 새롭게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안정적이고, 노련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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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신은
한스 라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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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원했던 일을 라이벌에게 뺏기고, 직장에선 쫓겨나게 생겼고, 건달들에게 몰매를 맞고, 차가 엉망이 되고, 이렇게 재수가 없어도 되나 싶게 안 좋은 일들만 다발로 쏟아져 내린 날, 화가 나서 폭발하기 일보직전에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이 모든 불행이 신의 탓이라며 원망을 했더니, 그의 앞에 자신이 신이라고 하는 누군가가 나타난다. 자신의 전지전능한 힘을 며칠간 줄테니, 얼마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보자고 말이다. 이것은 언젠가 보았던 짐 캐리 주연의 코미디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의 스토리이다. 이렇게 우리는 되는 일이 없을 때, 세상의 모든 불행이 다 나에게만 찾아 오는 것 같을 때, 간절히 바랬던 기대가 깨질 때 신을 원망한다. 신이시여,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라며 탄식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에게 말을 건네 온다면 어떨까. 이 책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이유는 슬프면서도 아주 간단해.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거지. 나는 힘이 점점 떨어지고 있음을 느껴.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시간 단위로 점점 약해지는 느낌이야. 게다가 예전만큼 활발하지도 않아. 그래서 정말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인간들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어.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생각한다.

"신이 자기가 만든 세상과 더 이상 보조를 맞출 수 없다고?"

이혼한 전처가 결혼 생활에 문제가 생겼다며 한밤중에 나타나 상담을 요청한다. 파산 직전의 심리 치료사인 야콥은 질투에 눈이 멀어 쫓아온 전처의 현재 남편인 프로 복서에게 맞아서 코 뼈가 부러지고 만다. 깨어나 보니 구급차 안, 시장통이 따로 없는 병원 응급실에서 야콥은 어릿광대 복장을 한 40대 후반의 남자를 만난다. 그는 야콥에게 심리 상담을 부탁하며, 자신이 신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많이 망가졌으니, 당신이 날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이다. 물론 영화 혹 짐 캐리가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한 남자를 보며 믿지 않았듯, 야콥 역시 그를 믿지 않는다. 왜 안 그러겠는가. 신이라니, 그것도 인간의 모습을 한, 게다가 어릿광대 복장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야콥은 그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쩐지 그를 그냥 내칠 수가 없어 상담을 해주기로 한다. 아르바이트로 서커스 광대 일을 하고 있는 아벨은 누가 봐도 신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모습이지만, 사실 신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니 뭐 그의 겉모습 자체는 그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와는 크게 상관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벨과 야콥은 심리 상담을 시작하고, 아벨은 자신이 신이라는 걸 야콥에서 하나씩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정신분열증 광대가 어저면 진짜 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말이다. 그런데 그가 정말 신이라면 세상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바꿔 버리면 될 것이지,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신은 말한다. 자신에게 더 이상 그럴 능력이 없다고 말이다. 왜 자신에게 부정맥이 있겠냐며, 왜 자발적으로 심리 치료를 시작 했는지 생각해보라고. 세상의 많은 것들을 바꾸고 싶지만, 손발이 묶인 느낌처럼 전혀 그럴 힘이 없다고. 신에게 힘이 없어진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을 때에만 제대로 움직일 수 있다며, 아무도 신을 믿지 않는다면 힘을 전혀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무기력증은 믿음을 잃어 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날수록 점점 커지고 있어. 이해하겠어? 나의 탈진은 곧 세상의 탈진이고, 나의 의욕 상실은 곧 세상의 의욕 상실이야!"

그래서 아벨은 야콥에게 인간들이 다시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그래서 자신의 실수가 뭔지 찾아낼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다. 글쎄, 자기 앞가림도 하기 어려운 심리 치료사가 과연 신을 도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도 절대자가 있다는 걸 믿을 수 있을까? 단 하나의 결혼 생활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수십 억 명의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물며 그 인간들이 맺는 수조, 수천 조의 관계를?    

야곱은 아벨과 함께 마치 마법과도 같은 크리스마스 여행을 다녀온다. 자신이 생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앞으로도 다시는 맛보지 못할 색다른 시간, 즉 다른 세계로의 여행이었다. 가끔 나도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나도 궁금해 해본 적이 있다. <어떤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말이다. 야콥은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아벨을 통해서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까 마치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스크루지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누군가의 삶을 구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야콥이 마치 공기인 양 사람들이 그의 옆을 휙 지나가 버린다.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세계의 사람들은 야콥을 볼 수도 없고, 야콥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서로 속해 있는 세계가 다르니 말이다. 그렇게 야콥은 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본다. 아버지는 야콥의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야콥의 부모가 결혼한 이유가 바로 어머니가 야콥을 임신했기 때문이었으니, 이 생에선 그들이 결혼하지 않고 그저 복잡한 연인 관계만 유지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할 의무를 느끼지 못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그를 붙잡을 결정적인 것이 없었기에 그들은 결혼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 인생이 이런 방향 또는 저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유는 많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풍경이 아닐 수가 없다. 야콥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니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고, 동생은 은행 돈을 빼돌려 도망치지도 않았고, 어머니는 유명한 자선 단체를 이끌고 있다. 자신의 부모가 진짜 삶에서 불행에 가까운 관계였음은 분명하다. 아버지는 어머니 덕분에 예상치 못한 출세를 하고, 술을 마시기 시작해 알코올 중독이 되고,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자신의 일까지 포기했으니 말이다. 야콥은 사흘 밤의 여행을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의 인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았다는 어떤 흔적도 세상에 남기지 못할 거라는 걸, 다른 세계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벨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광대든 신이든, 혹은 그가 자신에게 보여 준 것이 진짜 기적이든 눈속임 마술이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야콥의 인생은 이제 전과 조금은 달라진다.

결국 심리치료사가 신을 치료한 게 아니라, 신이 그를 도와준 셈이 되었다. 아벨은 말한다. 신을 믿는다는 건 선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그러니 신을 믿는 사람들이 줄어든다는 것은 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을 이렇게 만든 원인인 사람, 그 중의 하나인 야콥이 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이 책은 끝난다. 종횡무진 유쾌하고, 황당하기도 한 에피소드들의 바다를 거쳐 마지막 장면은 뭔가 찡한 여운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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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섀도우
마르크 파스토르 지음, 유혜경 옮김 / 니케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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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약 쉽게 흥분하거나, 비위가 약하다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부터 악마 같은 여자의 광기를 드러내는 예를 들 생각이다. 두렵지 않다면 계속 읽어나가기 바란다. 마음 한 귀퉁이에 묻어두었던 그대의 생각이 드러날 수도 있으니.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연쇄 살인마, 게다가 여자인 그녀의 이야기는 매우 리얼해서 어떤 대목은 눈살을 찌푸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기도 하다. 오죽하면 해당 대목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독자들에게 경고까지 하겠는가. 게다가 이렇게 주의를 주는 존재는 극의 주인공인 살인마 엔리케타도, 그녀를 잡으려고 하는 형사 모이세스의 목소리도 아니다. 1인칭도, 3인칭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지적 작가 시점도 아닌 독특한 화자가 중간 중간 극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초반에는 이 독특한 화자의 스토리 전개가 낯설고, 생뚱맞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계속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너무도 끔찍한 이야기를 마치 신처럼 보이는 이 화자가 들려주는 것이 오히려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하게 해주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보이지 않는 손, 사악한 무대담당의 짓으로 드러나는 우연한 사건들이 있다. 그들은 늘 술에 취해있고 독특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다.

마치 무대극의 사회자라도 되는 것처럼. 극이 진행되기 전에 간단한 해설이나 논평이라도 들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에서는 클라이맥스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클라이맥스는 소설에 더 잘 어울린다. 소설은 설정도 쉽고 설명하기도 쉽다. 내가 마음대로 사건을 조종한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굳이 아니라고 하진 않겠다.

그리고 엔리케타의 그 많은 악행들을 보아온 독자들이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려고 할 때, 그러니까 이야기가 거의 막판에 치달았을 때는 이런 식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모든 이야기에서 교훈을 찾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모든 일에는 항상 실수가 있고, 실수는 비싼 대가를 치른다.

수많은 범죄, 스릴러 소설들을 읽어왔지만, 이 책은 바로 이 화자의 역할 때문에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이야기가 끔찍하고 잔인할 수록 독자들은 감정 이입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극의 몰입도를 키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이 실화이고, 거기다 연쇄 살인마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거의 형사인 주인공만큼이나 비중이 있으니 독자들의 심리적 불편함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쌓여가니 말이다. 실화라는 것이 주는 다소의 비현실성도 극중 인물에 대한 감정 이입을 방해하는 데 한몫을 한다. 사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도 믿기 어려워 더 소설 같은 순간이 종종 있으니 말이다.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살기도 어려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그것을 과시하는 사람이 있다. 오줌 눌 요강 하나 없어 술집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있고, 건강에 좋다는 해수욕을 즐기려고 산 세바스티안으로 떠나는 부자들이 있다. 비밀을 감추기 위해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친구를 사귀려고 속내를 전부 털어놓는 사람도 있다. 엔리케타는 이 도시의 경계선을 찾아냈고 경계선을 따라 걸으면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처럼 경계선을 따라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거리가 피로 물든 혼탁한 시대의 바르셀로나, 어느 날부터 매춘부들의 숨겨진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소문이 돈다. 벌써 사라진 애들이 여덟이나 되지만, 엄마들이 매춘부이다 보니 경찰에 신고도 할 수 없고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이다. 소문은 점점 커져서 어린애들을 잡아다가 그 피를 마신다는 흡혈귀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물론 엔리케타의 실체가 점점 밝혀짐에 따라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왜 이런 소문까지 났는지 납득하게 되지만 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연쇄 살인마 캐릭터도 매우 독특하지만, 그녀를 쫓는 형사 캐릭터도 굉장히 이색적이다. 모이세스는 착한 사람이라는 것 자체를 믿지 않는 형사이다. 법을 수호하고, 시민들을 악당들로부터 지키는 정의의 사도까지는 되지 못할 망정 ''을 믿지 않는 형사라니. 그의 세상에는 오로지 두 종류의 사람만 존재한다. 자신과 같은 사람, 자신과 다른 사람. 그래서 그는 자신과 다른 이들을 축출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그러니까 세상을 더럽히는 범죄자들이 그와 다른 사람이 되겠다. 그는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 이 나라에서 태어난 모든 범죄자들을 저주한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그가 만약 범죄자들과 같은 편이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안 봐도 훤하다. 게다가 그는 동생이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셜록 홈스와 오귀스트 뒤팽이 등장하는 범죄 소설과 공포 소설을 탐독하고, 아내가 있음에도 바르셀로나 사창가의 단골이기도 하다.

20세기 초 바르셀로나의 사회가 마치 화면으로 보는 것처럼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당시 바르셀로나는 농부와 노동자가 넘쳐났으며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도 까지 더해, 빈민과 빈민가는 계속해서 늘어갔다고 한다. 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했던 가난하고 혼란스러웠던 시대였던 것이다. 가난과 좌절, 부패와 탐욕으로 가득 찬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지는 어린이 유괴와 연쇄 살인은 너무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실화'라는 이야기에 더욱 무게를 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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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용감한 친구들 2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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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셜록 홈즈라는 위대한 캐릭터를 탄생시킨 아서 코난 도일의 이야기이다. 당시에도 셜록의 인기가 얼마나 엄청났던지 작품 속에서 캐릭터가 죽은 것만으로도 신문사들이 항의기사를 쓸 정도였단다. 물론 셜록 홈즈는 여전히 지금에도 영화, 드라마 등으로 사랑 받고 있는 캐릭터이다. 그러니 그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코난 도일의 이야기라니, 그것도 줄리언 반스가 그려낸 작품 속에서, 기대가 되지 않을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아서 코난 도일과 조지 에들지라는 두 인물의 이야기이다. 조지 역시 실존 인물로 인도계 혼혈 영국인 변호사이다.

그들의 믿음을 흔든 사람은 조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 던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오늘:우리는 조지를 알고 그가 결백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3개월 뒤에:우리는 조지를 안다고 생각하고 그가 결백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1년 뒤에:우리는 조지를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그가 결백하다고 생각한다. 누가 이런 변화를 탓할 수 있겠는가.

작품은 전체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 시작들에서는 이들 두 인물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다. 꼼짝 않고 앉아 있지 못하는 기운 넘치고 고집 센 아이였던 아서는 상상력이 풍부했고,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는 의사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본격적으로 글도 쓰게 된다. 단편들이 장편소설로 성장했으며, 결국 셜록 홈즈라는 위대한 캐릭터를 통해 유명한 소설가가 된다.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조지는 상상력이 부족했고, 어떻게 친구를 만드는지 몰랐던 어리숙한 아이였다. 인도계 혼혈이었던 탓에 어릴 때부터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그들 가족은 지속적으로 협박 편지를 받으며 괴롭힘에 시달린다.

그렇게 아서와 조지의 이야기가 번갈아 교차 진행되다가, 2부 결말을 동반한 시작에 이르러 어느 순간 조지의 이야기가 비중이 높아진다. 말과 소, 양 등 가축들이 훼손되는 사건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데, 정말 희한하게도 그 사건의 범인으로 조지가 주목 받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만다. '기차 탑승객을 위한 철도법' 책을 발간하고 매우 소박하고 규칙적으로 살고 있는 사무변호사 조지. 근면, 정직, 검약, 자선,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만을 믿고 배워왔던 그에게 엄청난 닥친 시련이다. 자유인으로 태어난 영국인인 조지는 정상적인 삶을 이어가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지만, 인도계 혼혈이라는 점은 그를 매 순간 발목 잡아 넘어뜨린다. 그가 이 사건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자면, 사람들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무섭기까지 하다. 조지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아서와의 교집합은 전혀 없이 1, 2장이 끝나버린다. 그가 교도관에게 너덜너덜한 염가판 '바스커빌의 개'를 읽고 훌륭하다고 생각했다는 것 정도의 그들의 교집합이 될까.

작업에 착수하면서 아서는 친근한 감정을 느꼈다. 새 책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하나의 이야기를 생각해냈지만 아직 그것이 완벽하게 구성되지 않았을 때의 기분, 대부분의 인물들을 생각해냈지만 아직 그들이 완전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을 때의 기분, 이야기의 연결고리들이 전부 다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의 기분이었다. 아서에게 이야기의 시작과 결말은 결정되어 있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은 대단히 많은 요소들을 담고 있어야 했다... 아무튼 이는 아서에게 익숙한 작업이었다. 그는 소설을 쓸 때처럼 중요한 사안들을 정리하고 간략한 주석을 덧붙였다.

2권이 시작하자마자, 아서와 조지가 어떻게 만나는 지 그들의 만남이 드러난다. 1권 내내 그들 각각의 이야기만 거의 교집합 없이 진행되어 대체 이들이 어떻게 만나는 지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3장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셜록 홈즈 덕분에 전세계에서 온갖 요청과 요구들이 아서에게 밀려들기 시작한다. 사람이나 물건이 불가해한 상황에서 사라진 경우, 경찰이 평소보다 당혹스러워하는 경우, 부당한 일을 당한 경우등등 사람들은 홈스와 홈스를 창조해낸 사람에게 호소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독자들이 분명 실재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인물을 창조해낸 죄(?)로 아서는 이들에게 사설 탐정과도 같은 역할을 떠맡게 된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우체국에서 자동으로 '주소불명' 도작이 찍혀서 반송이 되고, 가끔 아서 경이 감동을 받거나 깊은 인상을 받아 답장을 직접 보내는 것은 극히 드물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서는 조지의 탄원서를 흥분한다. 너무도 명백하게 조지가 결백하기 때문에, 답장만 보내서 될 게 아니라 사건을 되살려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어 조지와 아서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들의 첫 만남에서 아서는 조지의 '에들지' '이달지 씨'라고 두 번이나 잘못 부른다. 조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의 이름을 잘못 발음했을 때 아서는 '온몸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표현되어 있어 이들의 진지한 분위기와 별개로 큭큭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어쨌거나 그들은 그렇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아서는 서재에 틀어박혀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고 전략을 짜기 시작한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증거들로 인해 조지에게 잘못된 선고가 내려졌으니, 그가 전적으로 무죄라는 점을 밝히고, 진짜 용의자를 밝혀내어 내무성이 잘못을 시인하도록 하고, 진범에게 유죄를 선고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서는 계획을 세우면서 그것이 이야기를 창조하고, 책을 쓰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느낀다. 재미있게도 그가 직접 셜록 홈즈 같은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도일은 자신이 언제까지 셜록 홈스를 만들어낸 벌을 받아야 할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끝없이 그의 말을 고치려 들고, 되도 않는 충고를 하고, 심지어는 꾸짖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해야만 했다. 앤슨이 아무리 도발해오더라도 성질을 내서는 안되었다.

그러니까, 진짜 살아 있는 것 같은 너무도 리얼한 탐정을 만들어낸 대가는 아서가 조지의 사건을 조사하는 내내 치룰 수 밖에 없다. 사실 무려 2015년인 지금도, 셜록 홈즈는 진짜 살아 있는 캐릭터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그렇지만 덕분에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장면들을 이 책을 읽는 내내 목격하게 된다. 그가 바로 셜록 홈즈의 창시자이기 때문에 특별해지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 아서가 결국 조지의 결백을 밝히는지에 관해서는 직접 책을 읽어보면서 알게되어야 하므로, 더 이상 자세한 줄거리 언급은 하지 않겠다. 그저 상상력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아이 아서와 영특했지만 상상력은 부족했던 조지가 어떻게 법의 영역 안에서 정의를 찾아가는지 그 여정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리하여 "아이는 보고 싶어한다"로 시작하는 아서의 이야기가 "그는 무엇을 볼 것인가?"로 끝나는 조지의 이야기로 이어져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줄리언 반스는 독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써내는 대단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야기란 이런 것이다. 시작이 있고, 결말이 있고, 과정을 이루는 인물들이 있고, 그리고 여운을 남겨주는 시작을 동반한 결말. 독자들은 보고 싶어한다. 세기의 명탐정 셜록 홈즈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마치 홈즈 처럼 뛰어난 추리와 수사를 해서 위기에 빠진 평범한 누군가를 구원해주기를. 더 이상 무엇 설명이 필요하랴.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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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나는 내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고전들을 탐독했다. 나는 한 소설가의 책들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작품들을 읽고 있었다. 어느 작가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본 결과 그의 인간 됨됨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품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 작품보다 더 중요했다. 작가의 삶이 영웅적이거나 명예로우면 소설들이 한결 재미있었다. 반면에 사람의 됨됨이가 혐오스럽거나 시시껄렁하면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시간을 허비하는 게 싫었던 미셸이 보기에 정말 쓸모 있는 일은 책을 읽는 것밖에 없었다고. 아침에 일어나 불을 켜면 책부터 집어 들었고, 다 읽을 때까지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탓에 어머니는 책에 코를 쳐 박고 있는 그의 모습에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어머니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저녁 먹으라고 불러도 소용이 없자, 방의 전기를 아예 끊어버리는 사태에 이르기까지. 결국 하는 수 없이 주방에로 내려와 식사를 하면서 책을 읽다가 이제는 아버지의 역정을 사고 만다. 그는 이를 닦거나 용변을 보면서도 책을 읽고, 걸어가면서도 책을 읽다 종종 지각을 하고, 수업시간에도 종종 책을 넓적다리에 올려놓은 채 독서를 계속한다. 강박에 쫓기듯 책을 탐하는 독서가의 모습이 어느 시절의 내 모습 같아서 뭉클했다. 물론 작품에는 작가의 삶을 넘어서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말처럼, 작가를 선택할 때 작품을 봐야지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따지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는 밤에 몰래 빠져나갔다 어머니에게 흠씬 두들겨 맡지만, 그 와중에도 피에르에게 받은 <화씨 451>이라는 책이 손상되지 않았을까 걱정한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를 켜고 소설을 읽어간다. 그는 브래드버리의 그 책을 읽으며 저항할 줄 알아야 하고,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며 힘의 지배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물론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을 벌하는 나름의 방식이 고작 가족들에게 침묵으로 보호막을 치는 거였지만. 책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 그걸 몸소 실천하려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수염이 헙수룩한 남자가 커튼 뒤로 사라졌다. 천이 해어지고 여기저기 얼룩이 묻은 레인코트 차림의 남자였다. 이런 계절에 저런 차림으로 뭘 하러 들어가는 거지? 몇 주째 비가 내리지 않던 때였다. 나는 호기심에 이끌려 커튼을 젖혔다. 문에 서툰 솜씨로 써놓은 글귀가 보였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내 평생 그토록 크게 놀라보기는 처음이었다.

중학생이던 미셸은 그곳 체스 클럽에서 장폴 사르트르와 조제프 케셀을 보며 무엇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든다. 그는 프랑크와 세실에게 자신이 본 놀라운 소식을 전하지만, 세실은 카뮈를 더 좋아했고, 사르트르를 떠받드는 프랑크는 카뮈를 싫어했다. 그들이 카뮈냐, 사르트르냐에 대해 논쟁한 덕분에 미셸은 하루에 케셀과 사르트르와 카뮈를 동시에 알게 된다. 미셸은 다시 클럽에 갔고, 차츰차츰 클럽의 회원들을 알아나간다. 그렇게 그는 테이블 풋볼을 함께 즐기던 친구들을 버리고, 클럽의 최연소 회원이 된다. 이 클럽은 소년과 동유럽과 그리스에서 넘어온 망명자들의 체스 클럽이다. 국적도 다르고 망명 이유도 제각각인 그들 중에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믿지만 해결책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이들도 있고, 고국을 그리워하며 사회주의와 절연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모두 무국적자였고, 누구나 역경에 빠져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 책은 미셸이라는 소년이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차츰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의 삶을 그리고 있다. 배경이 프랑스의 1959년에서 1964년까지의 시기인 만큼 역사의 큰 사건들과 개인의 삶이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들이 그려져 있다. 외부의 사건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시대적 변화를 겪으면서 그 와중에 낙천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 번 쯤 생각해 보게 만들어준다.

"아름다운 것은 기억밖에 없어. 나머지는 먼지고 바람이야."

체스 클럽 망명자들의 이야기와 미셸 가족들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들려지는데, 소소하게 펼쳐지는 미셸의 풋사랑, 부모에 대한 반항, 로큰롤, 테이블 풋볼 그리고 책에 대한 엄청난 열망들과 가족과 사랑을 두고, 이념을 버려야 했던 망명자들의 에피소드는 너무도 이야기 거리들이 풍성해 두툼한 책 두 권을 읽는 내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미셸이 동경하던 피에르가 군데에서 불의의 죽음을 맞고, 복무 중이던 미셸의 형 프랑크는 살인 사건에 휘말려 종적을 감추고, 그 일로 의견 충돌이 있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국 이혼에 이르고. 주변에서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미셸은 체크 클럽의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어수선한 시대에 휘말려 평범하지 않은 사춘기를 보내는 미셸의 삶은 소설 첫 머리에 실린 문구 "나는 비관주의자로 살면서 언제나 똑똑하게 굴기보다 실수를 저지르며 낙천주의자로 살고 싶다"로 고스란히 연결된다. 사실 지금 우리의 시대도 그렇지 않은가. 매일같이 뉴스에서 들려오는 사회에 대한 불신들을 치솟게 하는 소식들은 삶을 낙관하기 어렵게 만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우울한 시대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살아나가야 한다. 어차피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면, 살아남아야 한다면 비관하고 우울해하기 보다는 낙관하고 희망의 끊을 놓치지 않는 게 스스로에게 더 좋지 않느냔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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