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부아르 오르부아르 3부작 1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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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4년 간의 전쟁이 곧 끝나고, 휴전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군장을 꾸려 놓고 느긋이 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남은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독일 놈들과 치고 받고 싶어 안달하는 이들이다. 휴전에 대한 기대감 속에 평온한 나날이 흘러가던 어느 날, 갑작스레 독일군 정찰 명령이 떨어졌고 정찰병으로 갔단 어린 군인과 늙은 군인이 총격으로 사망하고 만다. 분노에 휩싸인 프랑스군은 독일군 진지를 급습하기에 이르고, 전투 중에 알베르는 총격 사건의 어마어마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진상을 은폐하려는 프라델 중위 덕분에 알베르는 포탄 구덩이에 산 채로 파묻히고, 다리 부상 덕분에 멈추었다가 그를 발견한 에두아르는 포탄 파편에 맞아 얼굴의 반쪽을 잃게 된다. 한 사람의 욕심이, 단 한 순간에 앞날이 창창하던 두 사람의 인생을 지옥 끝까지 이끌게 된 것이다. 무려 4년 동안이나 전쟁 통에 부상 한번 당하지 않고, 게다가 죽지도 않고 잘 버텨왔건만, 휴전을 코 앞에 두고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그래서 한 치 앞도 볼 줄 모르는 게 인간이라던가. 그렇게 비극의 시작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작스레 다가오고 만다.

두 사람이 산 자의 세계에 돌아온 방식은 사뭇 달랐다.

오장육부를 다 토해 내며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귀환한 알베르는 포탄과 탄환 들이 날아다니는 어느 하늘 가운데서 어렴풋이 의식을 회복했는데, 이것이 그가 진짜 삶으로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프라델 중위가 시작하고 지휘한 공격 작전은 벌써 끝나 가고 있었다. 113고지는 아주 쉽게 점령됐다고 말할 수 있다. 격렬한, 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저항 후 적군은 투항했고 포로가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전 과정이 하나의 요식 행위에 불과했던 이 작전을 통해 서른여덟 명의 전사자와 스물여덟 명의 부상자(독일 놈들은 계산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다시 말해서 매우 훌륭한 결과였다.

전쟁 전에 회계원으로 일했던 평범한 알베르와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지녔던 부유한 에두아르. 이들은 결국 끔찍한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사실 인생이라는 게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전쟁을 끝내고 사회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를 벌여야만 했다. 나라에서는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기념식이나 죽은 영웅들의 기념비를 세우기에 바쁠 뿐, 전쟁을 통해 많은 것을 빼앗긴 젊은이들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골치 아픈 생존자들을 버리려 하는 국가와 가진 자들의 위선 속에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 그들은 희대의 '사기극'을 벌이기에 이른다. 국가와 국민들 모두를 향해서 말이다. 에두아르가 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이지만, 하지만 나는 그가 악행을 저지르기로 한 그 마음을 어쩐지 이해하고 싶었다. 세상에 설 자리가 없어진 그가 새로운 삶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것을 알기에 말이다.

실제로 1차 세계대전 이후 참전한 군인들은 전우의 시체를 먹으며 생명을 이어나가야 했고, 남겨진 사람들도 제각기 이유로 고통 받았으며, 아이들은 고아가 됐다고 한다. 전쟁은 종결됐지만, 그것이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마저 끝이 났다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놀랍게도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는데, 전사자들을 위한 32000개가 넘는 위령탑들이 순식간에 지어지는 와중에 팔다리가 잘리고 얼굴도 망가져버린 병사들이 간신히 목숨만 유지해서 돌아왔을 때 누구도 그들을 신경 써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가는 그들에게 일자리도, 연금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막막했을까. 피에르 르메트르는 바로 여기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오르부아르의 두 주인공 역시 그랬으니까. 뭐라고 할 수 밖에 없었던 두 젊은이들이었기에, 그들이 잃어버린 동료들을 위한 위령탑을 가지고 대국민 사기극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을 읽어나가는 데 중요한 의미가 되기도 한다.

알베르는 윤리의 이름으로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자넨 이 모든 걸 개인적인 복수로 만들고 있어." 에두아르가 썼다.

"당연하지. 난 지금 일어나는 일이 아주 개인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자넨 아니란 말이야?"

아니, 그는 아니었다. 복수는 정의 실현의 이상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충분치 않았다. 비록 지금이 평화시이긴 하지만, 에두아르는 전쟁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고, 이 전쟁을 그의 방식으로, 다시 말해서 그의 스타일로 하기를 원했다. 윤리는 그의 체질이 아니었다.

그 동안 국내에 출간되었던 피에르 르메트르의 출간 작들은 모두 추리소설이었기에, 게다가 나는 그의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를 너무도 사랑하기에, 사실 그가 공쿠르 상을 받은 이 작품은 매우 의외였다. 왜냐하면 공쿠르상은 프랑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기 때문이다. 당시 선정위원회는 르메트르가 전후 생활에서 지속하는 공포를 잘 포착했으며 영화 같은 글쓰기에도 높은 점수를 줬다고 밝혔었다. 처음으로 추리 장르를 벗어나 쓴 작품으로 공쿠르 상을 받다니, 어쩌면 그의 내면에 순 문학에 대한 욕망이 그 동안 숨겨져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의 추리 소설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플롯과 구성, 캐릭터 모두가 엄청나게 정교하고 치밀하게 짜여져 있어, 꽤나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부분이 전혀 없이 소설의 모든 요소들이 전부 다 꼭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 있다는 그런 느낌 때문이었다. 게다가 시리즈의 주인공 카미유 베르호벤 반장은 외모적으로도 매우 독특하고, 개성적인 캐릭터인데, 그 외에도 그의 팀원들 하나하나가 모두 톡톡 튀는 이력의 소유자들이라 더욱 읽는 재미를 주기도 했고 말이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공무원과 도서관 사서를 하다가 55세에 첫 소설을 출간했다. 그것도 22개 출판사에서 외면 당하다 겨우 빛을 봤다고. 그는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 50년쯤은 기다리라고' 하며 자신이 만사에 느린 편이라 데뷔 하기에 늦은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59세에 늦둥이도 없었다고 말이다. 우리 역시 전쟁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기에, 이 작품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의 말대로 과거는 이미 지나갔지만, 문학은 그것을 바라보는 비전과 시각, 그리고 기억을 바꿀 수 있으니 우리는 이 작품을 절대 놓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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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게임 세트 : 스페셜 에디션 - 전3권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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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헝거게임> 시리즈가 영화 개봉에 맞추어 전3권이 스폐셜 에디션으로 예쁜 박스 세트로 출간되었는데, 가격도 양장본에 비해 저렴하고, 박스 세트의 디자인도 심플하고 예뻐서 소장용으로 더욱 가치가 있을 것 같다. 뭐니뭐니 해도 시리즈는 박스 세트가 폼나는 법이니까. 

 

 

 

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 3부작은 <헝거 게임>, <캣칭 파이어>, <모킹제이>는 영화로 차례로 만들어졌고, 그 네번째 영화로 대망의 파이널을 이룬다. 물론, 3년 전에 만났던 시리즈 첫 번째의 강렬함이 아직 남아 있는 탓에, 그 이후에 개봉되는 시리즈에서는 다소의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지만 말이다.

 

1권에서는 대략적인 게임의 룰과 배경에 대해서 설명이 된다. ‘헝거게임’은 독재국가판엠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일년에 한 번, 12개의 각 구역에서 추첨을 통해 선발된 십대 소년소녀 24명이 벌이는 생존 전쟁이다. 24명의 참가자들이 펼치는 치열하고 무시무시한 생존 전쟁의 전 과정은 24시간 리얼리티 TV쇼로 생중계되어 캐피톨 시민들의 오락거리가 된다. 독재국가 판엠의 피비린내 나는 공포정치를 상징하는 '헝거게임'에 맞서는 평범한 우리의 소녀, 캣니스의 등장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추첨된 어린 동생을 대신해 자청해 참가한 캣니스가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뻔한 것 같으면서도 매우 흥미로운 재미를 이끌어 준다.

2권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피타와 함께 우승한 캣니스가 사람들에게 희망의 상징으로 여겨지자, 대통령과 게임 설계자가 그녀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는 내용이다. 역대 우승자들이 모두 참가하는 스폐셜 게임을 열어 그녀를 다시 출전시키려는 그들의 음모는, 더 위험해진 경기 내용 내내 그녀의 목숨을 위협한다.

대망의 마지막 3권에서는 캣니스가 혁명의 상징 '모킹제이'가 되기로 결신하고, 혁명군이 캐피톨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는 내용이다. 영화로는 두 편으로 나뉘어 작년과 올해로 개봉을 했는데, 이번에 개봉한 더 파이널을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두 편으로 나뉠만한 이유가 여실히 드러난다고 하니 기대 중이다.

 

책이든 뭐든 방송의 힘이야 대단한 것이, 화제가 되는 방송에서 언급되거나 소개가 되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급증하는 사례를 여럿 보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O tvN <비밀독서단>이라는 프로그램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독자 입장에서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기도 하다. 팟캐스트인 <이동진의 빨간책방>이 숱하게 '신간이 아닌 구간'을 갑작스런 베스트셀러로 만들 때마다, 이런 방송이 많으면 덩달아 책도 더 많이 판매되고, 소개가 되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책을 주제로 한 북 토크쇼 <비밀독서단>은 전문가 패널이 아니라 방송인으로 구성된 출연진이 '너무도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춰'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인데, 이 방송이 의외로 인기를 얻고 있어 매회 소개된 책들 또한 덩달아 화제가 되고 있다. 일각에선 '독서 신드롬'이라고 까지 하고 있으니, 너무도 흐뭇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 프로그램에 소개되었던 책 중에서 이번 주에 시리즈의 마지막 편 영화가 개봉한 <헝거게임>도 기억에 남는다. 원작과 영화가 둘 다 성공하기가 참 어려운데, 이 작품은 영화를 먼저 봐도, 책을 먼저 읽어도 각각 만족시킬 만큼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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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1-2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친구랑 교보문고에 같이 갔는데 농담으로 헝거세트 사달라고 해서 당황했습니다. 기분 좋으면 책 한 권은 사줄 수 있는데 세트는 가격이 부담스러워요. ^^;;

피오나 2015-11-22 20:49   좋아요 0 | URL
하핫.. 그렇긴 해요. 한권이야 좋은 사람에게 부담없이 사줄 수 있지만.. 세트는 저도 좀 그렇더라고요.ㅋㅋ
그래서 저는 1,2권 분권으로 나오는 책을 안 좋아해요. 페이지수가 많더라도 한 권으로 된 책을 선호..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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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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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이긴 해도 그나마 당신은 아들을 만났구려, 공주. 어떻게 생겼던가요?"

"건강하고 잘생긴 얼굴이었어요, 그건 기억나요. 하지만 눈 색깔이며 뺨 모양 같은 건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난 그 애 얼굴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요." 액슬이 말했다.

"분명 모든 게 이 안개 때문일 거요. 사라져서 좋은 것도 많지만 이렇게 소중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 잔인한 일이오."

얼어붙은 안개가 강과 습지 위를 자욱하게 뒤덮고 있는 고대 잉글랜드의 황야에 있는 토끼 굴 언덕 마을에 사는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있다. 이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거의 없다. 어찌 된 일인지 습지를 뒤덮은 짙은 안개가 사람들의 기억을 모두 사라져 버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주 가까운 과거의 일이라고 해도 마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흐릿한 기억 저편에서 생각나는 아들을 보러 가기로 여행길을 떠나기로 한다. 가끔 아들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날도 있지만, 다음 날이면 그런 기억 위로 베일이 덮인 것 같기에 얼굴 조차 떠오르지 않는, 왜 자신들과 함께 살지 않는지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 그들의 아들을 찾아가기로 말이다.

가족과 함께한 추억은커녕, 자식 조차 생각나지 않는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사라져서 괜찮은 것도 있겠지만, 나빴던 기억도, 괴로웠던 기억도 내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니 가지고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과거의 기억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내가 쌓아온 시간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과도 같을 텐데, 오로지 현재 만을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공허한 일일까.

"어떤 이들에게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신부님. 액슬과 저는 함께했던 행복한 순간들을 되찾고 싶어요. 그런 순간들을 빼앗긴다는 건 밤중에 도둑이 들어와 가장 소중한 걸 빼앗아 간 것과 같아요."

"하지만 안개는 좋은 기억뿐만 아니라 나쁜 기억까지 모두 덮고 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부인?"

"우리에게 나쁜 기억도 되살아나겠지요. 그 기억 때문에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로 몸을 떨기도 할 거고요. 그래도 그건 우리가 함께했던 삶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재미있는 건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이다. 그들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왔다. 마치 자신들이 아기 때부터 줄곧 함께 지낸 것처럼 느낄 정도로, 그들이 서로를 알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런 서로에 대한 신뢰는 서로에게 쌓인 시간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는 노부부인데도 말이다. 여행 초반 그들이 만났던 누더기 차림의 여자가 비어트리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라고. 이 질문은 내가 그들에게 하고 싶었던 의문이기도 하다. 격렬하게 싸웠던 일도, 함께 소중히 즐겼던 순간들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들의 사랑을 어떻게 유지시킨다는 말인가.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액슬은 '내가 기억을 하든 잊어버리든 내 마음속에서 당신을 향한 감정은 늘 똑같이 그 자리에 있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여행을 통해서 그 기억들을 하나씩 찾을 거라고 말이다.

이들의 여정에서 도깨비나 용, 기사가 등장하는데도, 그게 너무도 자연스러워 전혀 판타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이기도 하다. 길을 가면서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노부부의 모습 또한 따스하면서도 어딘지 가슴 먹먹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은 명성만 듣다 직접 만나게 된 것이 처음인데, 이 책을 덮자마자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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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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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께는 제발 말하지 말아주세요. 기억 못하실 겁니다. 그때 저는 쉰 명쯤 되는 무릎 까지고 지저분한 꼬마 중 하나였는걸요."

"하지만 그때도 이 집을 좋아했던 거네요?"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을 만큼요."

헌드레즈홀에서 일했던 유모의 아들 패러대이는 삼십 여 년이 지난 지금, 의사가 되어 대저택을 다시 방문하게 된다. 그가 처음 헌드레즈홀을 보았던 것은 전쟁이 끝난 이듬해 여름, 열 살 때였다. 당시 그에게는 천하에 둘도 없는 완전무결한 대저택으로 보였던, 집의 외양 하나하나에 매혹되었던 그 기억은 삼십 여 년이 지난 뒤 몰라보게 변한 모습에 등골이 오싹해지도록 만든다. 에어즈가의 주치의에게 응급환자가 생기는 바람에 그가 대신 오게 된 것이었다. 저택 곳곳에서 보이는 쇠락의 징후는 엄청나게 거대하고 견고한 건물이라 더욱 무시무시해 보였다.

이 거대한 저택에 현재 살고 있는 에어즈 가문 사람들은 엄마와 딸, 아들, 그리고 하녀 한 명이 전부이다. 전성기에는 고용인이 스무 명은 족히 되었을 만큼 커다란 대저택이었지만, 재산을 거의 다 날리고 이제는 빚에 쪼들리며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집안의 유일한 남자인 아들은 전쟁 중에 부상을 입어 불편한 다리로 힘겹게 가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패러대이는 그의 다리를 무료로 치료해보겠다는 제안을 하고, 매주 일요일에 헌드레즈홀을 방분하게 된다. 그렇게 로더릭의 다리를 치료하고 그의 어머니와 누이인 캐럴라인과 차를 마시는 것이 그의 일과가 된다.

"그렇게 치면, 선생님이 이 집에 온 뒤로 쭉 문제만 생겼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내 말을 제대로 안 듣는군요. 그 소음과 전화벨이 다 신호였던 거예요. 벽에 쓰여 있던 낙서까지도. 어제 전성관에서 들렸던 목소리도-어머니는 막연히 그냥 숨소리라고 하셨지만, 어머니는 그게 수전의 목소리라고만 짐작했어요. 그게 바로 어머니가 듣고 싶어하셨던 거니까. 어쩌면 사실 로드의 목소리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목소리 따위는 아예 없었소!" 내가 말했다. "소리 같은 게 들릴 리 없지. 전화벨에 관해서라면.... 그 얘기는 이미 끝났잖소. 혼선이 돼서....."

화려한 전성기를 가진, 낡고 거대한 대저택은 고딕 호러의 단골 소재인데, 오랜만에 만나는 고딕 장르는 새라 워터스의 손을 통해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작품이었다. 특히나 이야기가 패러대이의 시점을 통해 일인칭 관찰자로 진행되는데, 무려 700페이지나 되는 두툼한 페이지의 무게 감을 이겨내고 따라가다 보면 바로 이 시점에 특별한 재미가 숨겨져 있다. 독자가 화자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도 될까? 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할 때, 정말 오싹해지기 때문이다. 화자가 일인칭일 경우, 독자들은 그의 시점을 벗어나 전개되는 상황을 알 수 없기에 대부분 화자에게 동화되어 감정이입을 하게 마련인데, 그런데 바로 그 화자의 이야기가 어딘지 믿음직스럽지 못하거나 수상하다면? 그렇다면 머릿속에서 뭉개 뭉개 피어 오르는 의심 덕분에 화자에 대한 신뢰도는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낡은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들과 초자연적인 낯선 존재들의 흔적으로 평범한 고딕 소설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을, 바로 이 화자 덕분에 독특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 되고 있다. , 방대한 분량의 스토리를 충분히 인내하면서 따라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폴라 호킨스의 <걸 온 더 트레인>에서도 기억을 믿을 수 없는 불안정한 화자 덕분에 아찔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 작품 역시 화자를 너무 믿다간 수수께끼의 많은 부분들이 풀리지 않아 한참 헤매게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하길. 하지만 아무리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교육해도, 그 상황이 되면 어김없이 낯선 사람을 따라가고 마는 아이들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다. 낯선 사람은 호기심을 자극하니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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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 꽃잎보다 붉던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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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생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중에 함께 침대를 함께 쓰고, 그를 닮은 아이를 낳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단 한 사람이다. 사랑이란 깨지기도 쉽고, 투명해서 오해하기도 쉬운 거라 누가 누군가를 평생에 걸쳐 사랑했다고 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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