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새겨진 소녀 스토리콜렉터 44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독일의 남쪽,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북동쪽에 위치한 비너발트 숲. 피투성이가 된 채 반라의 상태로 노부부에게 발견된 소녀. 1년 전에 실종된 소녀는 입술을 움직여보지만, 그것이 말이 되어 소리가 되지는 못한다 게다가. 소녀의 등은 온통 불과 피, 천사, 악마 모양의 문신으로 뒤덮여 있다. 대체 누가 이 어린 소녀에게 이런 짓을 한 걸까. 대체 소녀에게 1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슈나이더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 이 자리는 빈의 오페라극장 무도회가 아니다. 우리는 특수 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하루 종일 살인 사건에 몰두하고, 시신이나 심하게 몸이 훼손된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그 누구와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 배우자에게 '오늘 아주 흥미로운 사건을 접했어. 다섯 살짜리 여자애를 성폭행하고 죽인 사건이지. 크림 좀 줄래, 자기야?' 이렇게 말하겠나? 이런 사건을 접하면서 살아가려면 전략이 필요하다. 전략 없이는 여기서 2년을 버틸 수 없다."

전작인 <새카만 머리의 금발 소년>에서 범인에게 어머니를 살해 당한 초보 여형사 자비네와 엄청난 괴짜 천재 프로파일러 슈나이더는 사건을 함께 해결하게 되면서 나름의 동료애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일반 적인 동료애와는 거리가 먼 사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뭐 슈나이더는 남을 배려할 줄은 당연히 모르고, 오로지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인물이라 그 누구와도 친분 관계를 가지기 어려워 보이는 캐릭터이긴 하다. 하지만 그 능력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기에, 항상 범죄심리 분석을 하고 싶었기에 프로파일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자비네가 그와 함께 일을 하게 된 것이 묘한 재미를 주었었다. 작품의 마지막에 슈나이더가 범죄수사국 국장과 얘기를 했다며, 비스바덴에 최고의 인재들을 교육하는 아카데미에 자비네가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을 했었다. 하지만 자비네는 슈나이더의 제안을 생각하며 세 딸을 혼자 돌보는 언니 모니카가 걱정이 되기도 했고, 그러는 마음 한 켠으로 학창 시절 사귀었던 친구 에릭 도르퍼를 떠올리며 설레어 하기도 했었다.

, 이번엔 마르틴 슈나이더와 자비네 콤비의 두 번째 시리즈이다. 매년 연방범죄수사국 아카데미에 지원서를 냈지만 늘 합격하지 못했던 자비네가 그토록 염원하던 연방범죄수사국 아카데미에 입학 허가를 받아 2년간 교육을 받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동안 매년 수 차례 지원서를 냈었으나 거부당했는데, 이번에는 시험 하나 보지 않고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도착해서 한달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이자 연방범죄수사국에서 근무하는 에릭이 수사 중에 총에 맞아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빈에서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아동 성폭행 사건을 전담하고 있는 멜라니 디츠 검사는 등에 문신이 새겨진 채 반라 상태의 피투성이로 발견된 소녀 클라라를 면담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실종된 지 1년 만에 발견된 클라라의 등에는 어깨 밑부터 꼬리뼈까지 온통 불과 피, 천사, 악마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그것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등장하는 시였다. 이후 클라라가 발견된 숲에서 3명의 여자아이 시신이 연이어 발견되고, 죽은 소녀들은 하나같이 등 전체 피부가 벗겨진 상태였다. 범인을 추적할 유일한 단서가 바로 등의 문신이었던 것이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너무 빈약한 이론이오. 분명 범행 방법이 다른 사건들이란 말이오. 그리고 혹시라도 이 세상에 실제로 매번 범행할 때마다 다른 방법을 쓰는 범인이 있다면 우리는 절대 그 범인을 잡을 수 없소.”

"그러니까 굉장히 지능적이라는 겁니다." 자비네가 반박했다.

"그럼 범인이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저도 모릅니다." 자비네는 인정했다.

한편 비스바덴의 슈나이더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자비네를 비롯한 신입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미제 사건들로 수업을 시작한다. 수감 중인 연쇄살인범의 수법을 모방해서 빌라에 살고 있던 일가족이 무참하게 살해되었고, 심리학을 전공하는 여대생이 정신병원 환자에 의해 살해당하고, 텔레비전 방송 사회자가 식인 성향을 가진 동성애자의 관습 및 의식을 연출해 살해당하고, 정치인이 S&M 장면에서 독이 묻은 채찍으로 살해되었다. 전혀 다른 범행 방법으로 공통점 없이 벌어진 살인 사건들에서 자비네는 연관성이 있다고 믿고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전혀 패턴이 다른 사건들이었기에 공통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아카데미 연수생이라는 그녀의 신분 또한 번번히 길을 가로 막는다.

전작에서 과거와 두 가지 현재가 동시 진행되면서 궁금증을 자아내는 구조로 극적인 긴장감을 유발시켰던 안드레아스 그루버는 이번 작품에서는 전혀 다른 곳, 다른 인물들이 완전히 다른 사건을 만나 조사하는 걸로 이야기를 교차 진행시킨다. 오스트리아 빈의 멜라니 검사와 독일 비스바덴의 자비네와 슈나이더가 쫓는 사건은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용의자들이 모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연쇄살인이 등에 문신이 새겨진 소녀 클라라의 실종 사건으로 이어지고, 자비네의 남자친구 에릭이 총에 맞은 사건과 만나면서 복잡한 플롯들이 하나로 정리되면서 거대한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기를 죽이고 스트레스를 주는 슈나이더의 성격도 여전하고, 사건을 재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해 절대 멈추지 않는 자비네의 무한 추진력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흥미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작가의 다른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마르틴 스나이더&자비네> 시리즈 두 번째 작품과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발터 풀라스키 형사>의 첫 번째 작품이다. 보통은 작가들이 한 시리즈를 길게 가져가거나, 시리즈 외에 스탠드얼론으로 작품을 쓰는데, 안드레아스 그루버는 각각 시리즈의 주인공인 형사만 무려 세 명이다. 그렇다고 하면 각각의 캐릭터들엑 공통점이 있거나, 비슷한 면이 있지 않을까 싶을 수도 있는데, 흥미로운 건 각 시리즈의 인물들이 전혀 다른 색깔과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출간된 각각의 시리즈를 비교해보면서 읽는 재미도 놓치지 말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캐릭터는 마르틴 스나이더&자비네 시리즈가 조금 더 매력적이라 마음이 가고, 플롯은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된 발터 풀라스키 형사 시리즈가 조금 더 복잡하고 탄탄해서 재미있었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여름의 복수> <지옥이 새겨진 소녀>의 구성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두 작품 모두 하나의 사건 재구성을 위해 전혀 다른 곳의 다른 인물 둘이 양쪽에서 교차 진행되며 사건을 파고드는 구성이다. 오스트리아의 젊은 여변호사와 독일에 조기 퇴직을 앞두고 있는 늙은 형사,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열혈 여검사와 독일의 천재 프로파일러와 경찰 아카데미 학생 신분의 여형사로 각각 진행되다 작품의 후반부에 양쪽에서 쫓던 사건의 교집합이 생기는 순간의 짜릿함이란 엄청난 재미를 선사한다. 두 작품 모두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속도감 있고, 스릴 넘치는 완벽한 스릴러 작품이기도 했고 말이다.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줄 수 있는 궁극의 즐거움을 거의 무한대로 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안드레아스 그루버는 이 두 작품으로 이제 무조건 믿고 보는 작가가 되고 말았다. 다음 시리즈도 어서 빨리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관의 조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의 직업에 무려 '긍지'라는 것을 가지고 임하기란 사실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이 실제 꿈꾸던 일이랑 전혀 상관없는 것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오랜 시간 바래왔던 일을 하고 있지만 현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름에 좌절하는 사람에게도, 별 생각 없이 매일매일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일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이 하는 일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은 어디 딴 세상 일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세상 어딘가에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가족들을 돌볼 수도 없고, 매 순간 자신의 안위마저 저당 잡혀야 하고, 그렇다고 그만큼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의 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가가야가 체포되었을 당시는 경시청 내부는 물론, 뒷 세계에서도 쾌재를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적을 만들기 쉬운 임무를 맡아 화려한 생활을 누려왔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2심이 시작되면서 가가야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각성제 수사나 권총 적발을 둘러싼 조직의 속사정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상사 명령이나 상사와의 관계에 대해 증언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경찰의 위신을 지켰다는 것이었다. 그와 연관되었던 뒷 세계나 폭력조직 관계자도 가가야를, 제 몸을 챙길 수 있었을 텐데도 그들을 팔아넘기지 않은 남자로 보기 시작했다. 폭력배들의 말에 따르면 가가야야말로 조폭 담당 형사의 귀감이라는 것이었다.

전작인 <경관의 피>에서 세이지, 다미오, 가즈야에 이르는 삼대가 모두 경찰로 일하는 모습을 그려내어 경찰 수사극보다는 가족 드라마에 가까운 이야기를 그려내었던 사사키 조는 이번 <경관의 조건>에서 가즈야를 중심으로 제대로 된 경찰 수사극을 보여주고 있다. 전작에서 아버지인 다미오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랐기에, 아버지와 그다지 각별하지 못했던 아들 가즈야도 결국 경찰이 되었다. 가즈야는 가즈야는 문제 경찰관을 대상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라는 임무를 받게 된다. 폭력단을 담당하는 민완 형사 밑에서 일을 배우다 언젠가 증거를 쥐고 그의 뒤통수를 때릴 수밖에 없는 비밀 업무를 맡게 되었다. 아버지가 했던 잠입 수사와 색깔은 다르지만, 어찌되었던 비밀 업무를 말이다. 가즈야의 아버지 다미오가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신결 질환으로 폭력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였고, 그 덕분에 가즈야는 살아 생전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지 못했었다.

<경관의 조건> <경관의 피>로부터 구 년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가즈야의 비밀 업무가 끝이 나면서 시작한다. 가즈야는 바로 어젯밤까지 아버지처럼 따랐던 상사 가가야를 각성제 소지 및 복용 의혹으로 상부에 고발한다. 각성제 단속법 위반으로 체포하는 건 가가야와 함께 밤을 보낸 여성 나가미 유카도 함께다. 나가미 유카는 얼마 전까지 안조 가즈야와 사귀었던 여성이다. 하지만 가즈야의 고발은 배신당한 여성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실 정해진 수순이었다. 가가야 히토시 경부는 폭력조직을 담당하는 수사원으로 도쿄의 뒷 세계에서 독자적인 정보 수집 루트를 구축했고, 권총 적발이나 각성제 거래 정보를 수집하는 데도 뛰어난 실적을 거둔 인물이었다. 다만 사생활이 엉망이라 뒷 세계와의 유착이 의심되었기에 상부에서는 그에게 부하를 붙여 그 소행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애초에 가즈야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가가야는 의원면직되고, 가즈야는 상사를 팔아 넘겼다는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되지만,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간다. 그리고 구 년 후, 마약시장의 판도가 바뀌면서 상부에서는 가가야의 복직을 통해서 그 혼란을 해결하려 하고, 가가야와 가즈야는 상사와 부하가 아니라 라이벌로서 다시 대면하게 된다

아버지, 어째서 죽었습니까?

언젠가 아버지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맹세했는데,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른 아버지에게, 어느 날 언젠가 손가락질을 하며 이제 당신이 폭군으로 군림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고 통고해줄 작정이었는데,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에 당신이 충격을 받고,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눈길을 떨어뜨리고, 몸을 작게 움츠릴 날을 기대했는데. 언젠가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 그 괴로운 사춘기를 가출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지키며 참아냈는데.

그런데 아버지, 당신은 그 기회를 내게 주지도 않고, 멋대로 떠나버렸어요. 우리 가족 중 누구 하나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마지막 순간까지 이기적으로 가족도 돌아보지 않고, 당신은 가족들 앞에서 사라진 겁니다.

사사키 조야 워낙 경찰 소설의 대가이지만, 새삼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경찰이라는 조직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탐구, 조사 없이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가야가 조직의 비정한 음모 속에서 경시청과 조폭단 양 조직으로부터 전설이 되는 과정도 대단하고, 이후 다시 만난 가가야와 나름 자신의 자리에서 동분서주하는 가즈야와의 대립 구도도 매우 흥미진진하다. 특히 실제 일본에서 화제가 되었던 유명 연예인 각성제 사건을 모티프로 경찰의 조직개편 관련된 이야기는, 사사키 조가 이 작품의 구상부터 집필에 이르기까지 무려 사 년이라는 시간을 들였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경관의 피> <경관의 조건>은 모두 가즈야가 부는 호루라기 소리로 끝이 난다. 경찰의 필수 소지품인 호루라기는 범죄자를 쫓는 순간에도, 위험에 직면했을 때 동료를 부르기 위해서도 사용되는 소품이다. 가즈야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재직 중에 몇 번이고 긍지를 품고 불었을 그 호루라기의 음색을 듣는다. 그리고 자신이 배신했던 상사의 진심을 뒤늦게 알아 차리고 오열하듯이 호루라기를 분다.

가가야와 가즈야의 매우 흥미로웠던 구도가 마지막 장면에서 "대부님." "속 썩이기는."으로 마무리되면서, 아무래도 이 다음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되기도 한다. 사실 주인공은 가즈야였지만, 캐릭터로서의 임팩트는 다소 약했고, 가가야라는 인물이 훨씬 압도적이었어서 시리즈가 더 이어질까 우려가 되긴 하지만 말이다. <경관의 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호루라기가 <경관의 조건>에서는 더욱 묵직한 감동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시종일관 앞으로 달려가기만 하던 이야기의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해주고 있다. 그 호루라기는 상관을 과감히 고발했던 가즈야도, 부패와 탐욕의 상징이었던 가가야도, 그리고 자살로 처리되어 순직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던 할아버지 세이지도, 공안부의 스파이 노릇을 하다 불안신경증을 얻게 되어 아들의 존경을 받지는 못했던 아버지 다미오도, 역시나 모두 경관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코야마 히데오도, 곤노 빈도 일본 경찰 소설하면 언제나 제일 먼저 거론되는 작가들이지만, 사사키 조만큼 인간적인 경찰을 그리고 있는 작가는 없는 것 같다. '경관 안조' 시리즈 외에도 '제복경관 카와쿠보' 시리즈도, 나오키 상 수상작이었던 단편집 <폐허에 바라다>에서도 범죄를 수사하는 인물의 마음까지 그려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6-07-0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이달의당산적으로 적극 추천합니다

피오나 2016-07-04 12:04   좋아요 0 | URL
아이고 이런..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판타지는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허구의 이야기에서 뛰어난 상상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공중에 떠 있으면 읽는 동안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감정 이입이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출발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의 비약과 과장마저도 마치 진짜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가 넓어진다. 그런 면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장편 소설 <>은 출간된 지 벌써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당대의 현실 속에서 읽힌다. 무려 노예 제도가 나오고, 흑인 여성으로서의 불합리한 삶에 대해 그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루퍼스는 내가 지켜보는 동안에도 성장하고 있었다. 내가 지켜본 덕분에, 계속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에 자라고 있었다. 나는 루퍼스에게 최악의 수호자였다. 흑인을 열등한 인간으로 보는 사회에서 흑인으로서 그를 지켜야 했고, 여자를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자로서 그를 지켜야 했다. 내 몸 하나 지키기도 벅찬 곳에서 말이다.

 

그날은 다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작가인 케빈과 작가 지망생인 다나 부부는 이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참이라 너무 지쳐 있었기에, 둘 다 생일을 기념할 계획이 딱히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책이 엄청나게 많았기에 책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방 안이 흐릿해지고 주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나는 그렇게 집도, 책도, 전부 다 사라지고, 난데없이 야외에서, 나무가 자란 흙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앞에 있던 넓은 강 한가운데에 어린아이 하나가 허우적거리고 비명을 지르며 빠져 죽기 직전이었고, 다나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강으로 달려가 아이에게 헤엄쳐 가 아이를 구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물가에 있던 아이의 엄마는 구해준 자신을 주먹으로 공격하고, 화가 난 남자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평생 처음 보는 긴 총신이 내려다 보였다. 그렇게 자신이 총에 맞는다는 생각에 딱 얼어붙은 순간, 다나는 다시 케빈 곁으로 돌아온다. 온통 젖고 진흙투성인 채로. 다나가 체감한 시간은 몇 분 정도였지만, 케빈은 실제 그녀가 사라진 시간은 기껏해야 십 초에서 십오 초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곳으로 가게 되는데, 처음 만났던 소년 루퍼스가 커튼에 불을 붙여 위험에 처했던 순간이었다. 소년은 처음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였고, 루퍼스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나는 그곳이 무려 100년 전인 1815년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흑인이 검둥이라 불리며 천시받고, 백인들이 노예들에게 채찍질을 해대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게다가 다나는 흑인 여성이었다. 그리고 루퍼스는 다나의 아주 먼 조상이었다. 이후 다시 현실로 돌아온 후 다나와 케빈은 자신이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선지 루퍼스가 위험한 순간이었고, 다시 현재로 오게 되는 것은 다나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대체 언제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건지, 어떻게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고, 속수무책으로 닥쳐온 현실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세 번째 경험에선 그 증상이 나타났을 때 케빈이 다나를 끌어 안았고, 케빈도 그녀와 함께 100년 전 시간 속으로 이동하게 된다.

나는 총을 보고, 그 총을 쥔 청년을 보았다. 계속 루퍼스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루퍼스는 계속 내가 틀렸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나는 그곳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맞아보기도 하고, 정신을 잃을 만큼 심한 벌을 받기도 하고, 흑인으로서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보며 당시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질병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변변한 의술도 약도 없었으며, 흑인들은 백인들이 남긴 음식을 먹었으며, 주인의 눈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채찍을 맞거나 멀리 다른 곳으로 팔려가는 시대였다.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인종과 젠더 문제를 다른 소설들은 그 동안에도 꽤 읽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 내용들이 마음으로, 몸으로 와 닿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을 전혀 겪지 못한 세대가 전쟁 이야기 자체를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너무도 비현실적인 부분이라 공감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흑인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극중 다나가 겪는 수많은 경험들과 생각들이 리트머스 종이처럼 고스란히 나에게 흡수되는 느낌이랄까. 이토록 생생하게, 이토록 무참하게,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하게 1800년대의 풍경을 그려내다니 책을 읽는 내내 너무 압도적이라 페이지를 덮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손목을 다쳤어? 출혈로 죽을 수도 있었어! 설마 직접 그은 거야?"

". 그래서 집에 올 수 있었어."

"더 안전한 방법이 있었을 텐데."

나는 조심스럽게 손목을 문질렀다. "죽음 직전에 이르는 안전한 방법은 없어. 수면제는 무서웠어. 혹시...... 혹시 죽고 싶어지면 죽을 수 있게 챙겨간 수면제인데, 집에 오려고 그걸 썼다가는 당신 앞에서 죽거나, 어느 의사가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낼까 봐 겁이 났어. 아니면 죽지는 않더라도 소름 끼치는 부작용이 남을지도 모르잖아. 괴저라든가."

 

애초에 '타임 슬립'이라는 소재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단골 소재이다. 타임슬립은 판타지 및 SF의 클리셰로, 요즘에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TV 드라마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초자연현상 탓에 유발되는 타임슬립은 시간여행을 하게 된 맥락이나 과정을 설명하기 귀찮아하는 게으른 작가들에게 안성맞춤인 핑계꺼리이기도 해 허술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작품들도 꽤 많다. 타임슬립이 그저 이야기를 강요하기 위해 과거나 미래로 가는 가상의 복선에 지나지 않다면,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논리적 설명 따위야 별 관심을 두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타임 슬립' 이라는 소재를 진부하고 허술한 장치라고 생각했기에 그다지 반기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생각을 바꿔야 했다. '타임 슬립'이라는 소재를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사용할 수도 있구나 감탄해야 했으니 말이다.

'타임 슬립'이 등장하는 작품에선 보통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을 거슬러 과거 또는 미래에 떨어지게 되는데, 대부분 과거로 돌아간 이가 뭔가를 변화시켜 미래를 바꾼다는 설정이 많았다. 그래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라는 아쉬움과 후회를 돌이키고 싶다는 열망이나 혹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때로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시간의 흐름 속으로 뛰어 들어간 인물들의 모험이 주된 플롯인데, <>에서 주인공이 겪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SF가 미래나 우주뿐 아니라 시간 그 자체에 대해, 공간에 대해, 역사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기존에 출간되었던 작품 <야생종>에서 서로를 미워하지만, 서로를 죽이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도로와 안얀우 처럼 <>에서 다나와 루퍼스 또한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애증의 관계이다. 루퍼스를 잃어버린 아들처럼 사랑했지만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던 다나와 그녀를 자신의 반쪽처럼 생각했지만 다나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소유욕이 먼저였던 루퍼스는 그렇게 시종일관 극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미국의 노예 제도와 선과 악, 그리고 목숨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묵직한 주제는 이 작품 속에서 매우 아름답고도 고통스럽게 녹아 들어 읽는 이의 심장을 툭툭 건드린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 그리고 일 년에 가까운 인생과,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귀한 줄 몰랐던 편안함과 안전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라는 이 작품의 처음을 열었던 문장의 의미는 500여페이지가 지나서야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다.  '' ''이라는 개념은 결코 완전하지 않고, 무언가를 얻을 때는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작가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이 문장은 작품 전체의 압도적인 서사에 방점을 찍으며 이 책을 결국 또 다시 읽게 만들어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쪽을 택하겠는가, 아니면 두려워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는가? 글쎄,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로지 순간을 즐기며, 오늘만을 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다 갑자기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들이 모조리 잘못된 거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면? 애초에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렇다면 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까?

20여 년 전쯤에 쓴 일기장에서 이런 내용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재빨리,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한다. 이제 그 말을 다시 해볼까. 천천히, 곱씹어서. '.... 두려워할 것 없다."

쥘 르나르는 말한다.

"가장 진실한, 가장 정확한, 가장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이다."

한때, 그러니까 어렸던 내가 죽음에 매혹되게 된 계기는, 요절한 천재 작가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이었다. 나는 이 책 덕분에 작가의 삶 자체에도 어떤 환상 같은 걸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영화로도, 책으로도 출간되었던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류의 작품들이 인기를 얻고 있던 터라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래 전이라 출간 순서나 내가 먼저 만났던 작품이 어떤 건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아뭏튼 이 두 작품 때문에 감수성 풍부했던 그 시절 나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고, 인생은 짧고 굵게, 불꽃처럼 살다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후에 꽤 나이가 든 후에 동생이, 난 그때 언니가 스무 살 까지만 살겠다고 해서, 당시에 진짜 무서웠다고 말해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 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어느 정도 성인이 되고 지금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는 게 바빠서인지 '죽음'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도 주변에서 가까운 누군가 죽거나 했던 적도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줄리언 반스의 이 책을 읽으면서 아주 오랜 만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줄리언 반스가 죽음을 이야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도 자살과 기억의 문제가 등장했고,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도 사별과 살아남은 삶에 대해서 그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해왔던 '죽음'이 이번에는 전면에 나섰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에서는 반스의 가족과 친구, 지인들을 아우르며 회고록 같은 분위기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고도 유쾌하게 사유하고 있다. 신을 그리워하는 태도를 질척하다고 일갈해버리는 철학과 교수 형,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자 어머니, 전신을 지배하는 병마와 싸우다 병실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등 줄리언 반스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그들의 죽음과 함께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는 가벼운 에세이처럼 읽히기도 하고, 어느 순간 묵직한 철학서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러다 허구의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줄리언 반스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여자들은 자식들이 집을 떠날 때 자신이 죽을 날을 전에 없이 예민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물학적 기능은 완료되었으니, 이제 우주가 그녀들에게 바라는 것이라곤 죽음뿐일테니까.

그러나 주요한 논점은 당신이 죽은 후에 당신의 자식들이 '당신을 이어 살아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절멸하는 게 아니며 이런 선견지명이 의식적인 혹은 잠재의식적인 차원에서 위안이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이 책을 읽으면서 죽음이란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는 말과도 같다. 줄리언 반스 처럼 자신이 그린 최고의 죽음까지 꿈을 꿀 필요까진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언젠가 자신에게 죽음이 온다는 생각을 자각한다면 말이다. 이렇게 묵직하고, 어둡고, 우울한 주제를 이렇게나 경쾌하고, 깔끔하고, 가볍게도 그려낼 수 있다니 새삼 줄리언 반스의 글에 감탄한다. 여전히 그의 에세이보다는 소설이 더 좋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놓친다면 당신은 언젠가 꼭 후회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플레
애슬리 페커 지음, 박산호 옮김 / 박하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수플레는 재료가 매우 간단하다. 계란과 설탕, 바닐라 시럽과 크림 그리고 버터와 소금 조금이면 된다. 달걀을 노른자와 흰자로 분리하고, 노른자에는 바닐라 시럽과 크림을, 그리고 흰자를 따로 거품 내어 두 가지를 잘 섞은 뒤 오븐에 구우면 완성이다. 레시피 또한 재료만큼이나 간단한데, 사실 완벽하게 부풀어 오른 수플레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븐 안에서 멋지게 부풀어 오른 수플레라도 조금만 있으면 푹 꺼져 버리기 때문에 누군가에 대접하기 위해선 오븐에서 갓 구워져 나온 따뜻한 수플레를 내어 줘야 하는 까다로움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라니. 마치 구름을 떠먹는 것 같은 맛이다. 우리네 인생 또한 수플레와 닮아 있다. 한껏 부풀어 오른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푹 가라앉아 바닥을 치게 만드는 게 삶이니 말이다.

여기, 완전히 다른 세 나라 세 도시의 전혀 다른 부엌에서 하나의 수플레가 만들어지고 있다

수플레는 변덕스러운 미인과 같다. 아무도 그녀의 기분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다. 그 어떤 책에도 수플레를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이 없다. 그 어떤 사람도 수플레를 완벽하게 만드는 법을 말할 수 없다. 오븐에 넣고 25 30초가 됐을 때 꺼내야 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 어떤 오븐을 써도 완벽한 온도를 맞출 수 없다. 모든 요리사는 수플레를 수없이 만들어보면서 자신만의 최선의 조리법을 찾아낸다. 그릇과 오븐을 수십 번도 넘게 써서 시도해본 후에야 최고의 수플레를 만들어낸다. 그릇과 오븐이 닳도록 만들어보고 마침내 아주 긴 전쟁 끝에 생긴 자제력을 얻고서야 그런 수플레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아니와 릴리아는 30년이 넘는 결혼 생활을 이어오다 최근 몇 년 전부터 각방을 쓰고 있다. 베트남에서 입양한 아이들 장과 덩에게 그들은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무한한 사랑을 주며 정성을 다해 키웠지만, 자식들은 자라면서 점점 부모가 소원해졌고, 정부에서 입양으로 보조금을 받으며 자신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었다고 오해하고 비난했으며, 가끔 집에 놀러 와도 한 시간 이상 머무는 법이 없었다. 결국 아이들을 위해 장만한 방 일곱 개와 무수한 벽장들과 욕실이 네 개나 딸린 거대한 집에 아니와 릴리아 단 둘만 남았다. 남편인 아니는 우아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자신의 습관과 시간을 존중하길 원했고, 릴리아는 점점 더 고독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녀는 남편이 뇌혈관 이상으로 쓰러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마크와 클라라는 22년 동안 결혼하고 줄곧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왔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클라라를 위한 널찍한 부엌 외에는 침실 하나에 매우 작은 아파트였지만, 그들은 너무도 행복하기만 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지만 입양은 원하지 않았던 그들이었기에, 둘만의 생활에서 안정을 찾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둘이 공유하는 사소한 일상의 목록들이 늘어가는 만큼 행복은 커져만 갔다. 여느 때와 같았던 금요일, 마크는 화랑에서 일찍 퇴근해 집으로 가는 길에 케이크 가게에 들러 디저트를 몇 개 샀다. 하지만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평소처럼 커피 향이 나지 않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자 클라라가 부엌 조리대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여전히 수플레 실험을 계속했다. 이제 웬만한 조리법은 다 외워서 특별한 종류의 수플레에 들어가는 재로를 볼 때만 그 책을 한 번씩 보면 됐다. 그렇게 만든 수플레 한가운데가 금방 꺼져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가끔은 꽤 오랫동안 부풀어 오른 채 있기도 했다. 릴리아는 수플레의 맛과 그 조리법에 완전히 빠져버렸다....수플레가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그 흥분된 순간과 그에 따른 실망이나 행복한 감정은 그녀의 의미 없는 일상에서 가장 달콤한 부분이 됐다. 얼이 금요일 밤마다 해가 지기 18분 전에 촛불을 켜는 것처럼, 카노가 해가 뜰 무렵에 기도를 하고 울라가 가부좌를 틀고 무릎에 손을 얹은 채 명상을 하는 것처럼 릴리아는 그런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위로를 받았다.

페르다는 파리에 사는 딸 오이쿠와 매주 금요일 아침에 긴 통화를 하는 걸 낙으로 살고 있다. 지난 6년 동안 파리에 살아온 딸과의 통화로 마치 한집에 살면서 같은 문제를 공유하는 것처럼 느꼈고, 덕분에 막내딸이 그리워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 여느 때와 같았던 아침, 딸에게 온 전화라는 생각에 설레며 전화를 받은 그녀에게 어머니의 이웃에게서 연락이 온다. 어머니가 넘어지면서 뼈가 부러진 것 같다고, 최대한 빨리 오라고 말이다. 페르다의 어머니인 네시베 부인은 여든 두 살 된 노인으로 엄살이 아주 심하기로 유명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부터 엄마를 모시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뉴욕, 파리, 이스탄불 세 도시에서 가정에 헌신해왔지만 남편과 자신들에게 소외된 고독한 릴리아와 삶의 전부였던 아내를 잃게 된 마크와 다치고 나서 점점 더 괴팍해지는 엄마를 모시면서 한 순간도 편히 살 수 없게 된 페르다, 세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소소하게 펼쳐진다. 특히나 이들에게는 각각의 소울 푸드가 있는데, 음식이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 더 이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릴리아는 어렸을 때부터 불행하다고 느껴지거나 피곤해지면 항상 닐라가가 먹고 싶었다. 감자와 고기와 생선 소스를 넣은 양배추 수프가 바로 지금 그녀에게 필요했다. 그 친숙한 냄새가 그녀를 감싸고 위로해주며, 그 냄새가 그녀를 두 팔로 껴안고 잠시지만 모든 상처를 어루만져줬던 것이다. 페르다는 기운이 없거나 울적하거나 낙담할 때면 언제든지 살렙을 한 잔 만든다. 오이쿠는 야생 난초 뿌리로 만든 이 음료를 맛보고는 차이 라떼와 똑같은 맛이 난다고 했다. 페르다는 이 음료에 계피가루를 뿌려 마시면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마크가 아프거나 울적해할 때면 클라라가 몇몇 제철 채소를 알맞게 익혀 요리를 만들어주곤 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며, 몇 분만 있으면 자신의 따뜻한 품과 이 요리가 마법을 발휘할 거라며 그를 꼭 안아주곤 했었다. 그렇게 아내가 남긴 추억 속에는 항상 요리가 함께 했었기에,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게 되고 만다. 이들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이유로 수플레를 만들면서 부엌에서 만들어내는 작은 기적들은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준다. 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