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의 나라
김나영 지음 / 네오픽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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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의 세계를 다룬다는 점에 있어서 이 작품은 소재 뿐 아니라 캐릭터에 있어서도 여러모로 영화 <타짜>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속 주인공 고니는 이 작품에선 천재 도박사 재휘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도박판에 뛰어든 선영으로, 고니의 스승 평경장은 이들의 아버지 같은 존재인 용팔, 정사정 없는 전설의 고수 아귀는 잔인 무도한 강사장, 그리고 영화 속 화투 판의 설계자인 정마담은 극중 추마담 정도로 대입하면 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스승인 평경장에서 사사 받은 기술을 통해 도박판에서 홀라당 까먹은 누나의 이혼 위자료를 되찾고, 자신의 삶을 어그러뜨린 박무석 일당에게 복수하는 데도 성공한 고니가 더 이상 노름에 손대지 말라는 스승의 경고를 뒤로 하고 정마담과 목숨까지 내걸고 화투를 하는 것처럼, 극중 선영도 재휘에게 배운 기술을 연마해 아버지를 죽게 만든 강사장에게 복수하기 위해 목숨 걸고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엄청난 판에 뛰어든다.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복수와 욕망, 그리고 분노라는 점에서 이 두 작품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파국을 향해 달리는 이 스토리들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 우리는 다른 사람의 비극에 관심이 많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평범한 샐러리맨, 조신한 현모양처가 가벼운오락을 즐기다가 인생을 송두리째 차압 당하는 건 우리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한 끗 차이로 천국과 지옥을 맛볼 수 있는데, 왜 안 그러겠는가.

이 작품은 인터파크가 주최했던 K-오서어워즈 5차 최종후보작이라고 한다. 심사위원의 만장일치를 얻은 데다, 작가가 기존에 네이버 웹소설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적도 있기 때문에 스토리를 어느 정도 맛깔나게 그려내는지는 검증된 바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지루할 틈 없이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인물들의 복수극과 로맨스가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플롯이지만,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있어 페이지가 쉽게 넘어갔다. 그리고 각각 인물들의 매력을 잘 그려내고 있고,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 전개로 흠잡을 데 없는 재미를 준다

-카드 게임에서 이기려면 도박의 신한테 잘 보여야 해.

-도박의 신요? 그런 신도 있어요?

...............

-도박의 신에게 미움받지 않으려면 욕심을 버려야 돼. 더 많이 갖겠다는 것도, 잃은 것을 찾겠다는 것도 모두 욕심이야. 때때로 신은 우리 마음을 시험하기도 하지만 그걸 이겨낸 사람에게는 반드시 값진 선물을 주고 떠난단다.

걸어 다니는 컴퓨터라고 불리던 천재 도박사 정연과 용팔은 도박판에서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정연은 부인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강 회장의 하우스에서 벌어지는 백억 대 포커 판에 참가했다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용팔은 간신히 수술비를 마련했으나 결국 부인까지 남편의 뒤를 따라가고 어린 재휘를 데리고 전재산인 천만 원으로 어떻게든 먹고 살길을 찾으려고 한다. 사람들과 도박을 하던 중 위기의 순간에 열살 짜리 재휘의 충고로 돈을 걸고는 게임에 승리하고, 그는 재휘가 아버지인 정연처럼 확률을 셈하는 게 아니라 카드 카운팅을 판만 보고도 알아차리는 천재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재휘는 양아버지인 용팔을 따라 도박판을 전전하면서 살게 된다. 하지만 재휘는 복수심에 눈 멀어 무모하게 달려들지도 않고, 지나친 승부욕으로 위기를 자처하지도 않는, 자기자신에 대한 통제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인공 정연, 그녀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게 된 엄마의 빈소에서 포커 판에서 전 재산을 말아먹고 이혼당한 아버지를 오랜만에 만난다. 막 수능이 끝나고 곧 명문대에 입학이 예정되어 있던 그녀는 지낼 곳이 없으면 같이 살자고 아버지를 용서하지만, 결국 보험금 1억이 든 통장을 들고 다시 도박 길에 나서고 만다. 강회장의 하우스에서 1억을 홀랑 탕진하고 강회장에게 애원하는 데, 아버지를 쫓아온 선영이 벌컥 하우스에 들어온다. 강회장은 10억을 걸고 단 한번의 승부를 제안하고, 어떻게든 다시 돈을 찾아오겠다는 집념이 그에게 딸을 걸고 도박을 하게 만든다. 결국 그 게임에서도 지고 나자 딸을 볼 면목이 없어진 그는 가지고 있던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선영은 그렇게 강회장에게 넘어가고 만다. 하지만 그녀는 탈출을 감행하고, 그 과정에서 재휘와 용팔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베네치안 카지노는 마카오의 하늘 꼭대기에 날개를 펼친 것처럼 크고 화려했다. 선영은 카지노 건물을 노려보며 어금니를 물었다. 온통 황금색으로 칠한 홀은 진귀한 그림과 장식으로 꾸며져 마치 천상의 세계처럼 보였지만 그녀에게는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처럼 느껴졌다.

딜러가 카드를 돌리면 자기 패를 먼저 보지 말고, 상대의 얼굴을 봐야 한다. 카드를 확인하는 상대의 미묘한 표정을 보고, 그 찰나의 눈동자를 놓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맹수가 먹잇 감을 사냥할 때 동공이 커지는 것처럼 사람도 목표를 발견하면 자신도 모르게 눈에 드러난다고 한다. 동공의 크기는 의지로 쉽게 조절되는 게 아니므로, 그때 눈을 보면 진카인지 뻥카인지 알 수 있다고 말이다. 이렇게 도박은 치밀한 확률 계산과 고도의 심리전이 필요한 게임이다. 속고 속이는 정신 없는 무대에서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바로 낙오되고 마는 것이다. 강원도 카지노의 절대 강자 강회장을 상대로 천재 도박꾼 재휘와 그저 복수심에 불타는 여고생 정연이 어떻게 접근하고 대결을 펼칠 지가 스토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천재적인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도박꾼인 재휘는 복수심 같은 감정을 초월할 만큼 자기 컨트롤이 뛰어난 인물이고, 무모하게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부모의 복수를 하려는 정연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 캐릭터라는 점이다. 기존 복수극의 캐릭터와 조금 차이가 있는 이런 부분은 극중 스토리 라인에 확실한 힘을 실어준다. 물론 이들의 로맨스는 심금을 울린다기 보다는 상투적으로 보여 다소 아쉽긴 했다.

도박판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도박을 하게 됐으며, 도박을 하다 누굴 만났으며, 누굴 만나서 어떻게 됐을까.에 이르는 이야기는 평범한 일반인들로는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세계이다. 사기나 도박 같은 종류는 일종의 반사회적인 인물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영화나 소설의 주요 소재로 자주 사용되는 걸테고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왜 자기 죽을 곳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 가는 건지, 왜 욕심을 버리지 못해 미련하게 다 잃어버리는지 싶지만, 사실 그들 각각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이혼한 아내의 보험금으로 생애 마지막 판을 벌이려는 매정한 아버지에게도, 카지노 계의 거물이지만 자신은 직접 게임에 참가하지 않는 강회장에게도, 다 제 각각의 사연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일수록 도박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결국 끝까지 가서 지옥을 맛보게 된다고 한다. 죽거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이유는, 도박이 바로 희망을 담보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한 판만 이기게 되면, 한 패만 나에게 들어오면, 그럼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고,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도 쉽게 그것을 그만두지 못한다. 희망이라는 이름이 숨기고 있는 가혹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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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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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흑인 게토에 자리잡은 공동주택 건물의 방 안. 몸집이 커다란 흑인과, 조깅 바지에 운동화 차림의 중년 백인 남자가 마주보고 앉아 있다. 흑인은 전과가 있는 목사이고, 백인은 대학 교수이다. 흑과 백이라는 선명한 차이처럼, 뼛속까지 완전히 다른 생각과 모습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 왜 함께 있는 걸까. 이들의 대화를 잠시 들어보면 그날 아침 지하철 역에서 자살을 하려고 하던 백을 구해준 이가 흑이다. 플랫폼에 서 있던 흑은 급행 열차 선셋 리미티드에 뛰어드는 걸 우연히 보게 되고 막았던 것이다. 예수의 말을 듣는다며 예수가 자신의 머릿속에 있다는 흑과 과거에 믿던 많은 것들을 지금은 믿지 않는다는 백의 대화만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그러니까 죽으려는 교수와 살리려는 목사의 사소해 보이는 논쟁이 이 소설의 전부라는 말이다.

: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아주 약했어요. 아주 부서지기 쉬웠지요. 나는 그걸 몰랐습니다. 절대 파괴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한데 그렇지가 않더군요.

일주일에 두 권쯤, 일 년에 백 권, 그렇게 한 사십 년 가까이 책을 읽어온 백인 교수는 무신론자이다. 그렇게나 많은 책을 읽었지만, 그가 믿었던 것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존재한다고 믿는 척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며. 사실상 친구도 하나 없는 그는 그저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다. 가는 길에 자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집으로 보내준다고 할 정도로. 그러나 신을 믿는 흑인 목사는 그런 그에게 자꾸만 말을 건넨다. 그가 집을 나서려 하면 같이 가야겠다며 외투를 꺼내 들고, 그의 가족은 어떠했는지, 친구에게 오늘의 결심을 이야길 했는지 주절주절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그러니까, 목사는 다시 살아보고 싶게끔 삶에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정작 교수는 그걸 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 혹시 선생이, 그러니까, 긴 가뭄 같은 기간을 보낸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러다 보니 결국 세상이 원래 그런 거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지...어쨌거나 내 말은 말이오. 설사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해도, 그래도 해가 매일 똑같은 개의 궁둥짝을 비추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거요.

흑인 목사는 교도소에서 배식 담당에게 시비를 거는 이에게 한마디 하다 칼을 맞고, 그와 다투다 이백팔십 바늘을 꿰매야 하는 대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이 그렇게까지 아플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던 그 의무실 침대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날 이후 하느님의 은혜로 인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백인 교수는 세상에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흑인 목사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하느님이 그냥 내버려두지 말라고 했다고 대답한다. 이렇듯 이들의 대화는 평행선이다. 절대로 좁혀질 수 없는 간극, 아무리 사이를 좁히려고 해도 도저히 이어질 수 없는 두 개의 선.

좀처럼 자신을 설득하려는 목사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자, 교수는 돈을 좀 드리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댁한테 큰 신세를 졌으니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거다. 목사는 댁이 청산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믿는 거하고 믿지 않는 건 완전히 다르다"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에게 끊임없이 희망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 댁은 모든 걸 흑과 백으로 보는군요.

: 실제로 흑과 백이지.

재미있는 건 만신창이가 되어 병원 침대에 묶여 고통에 울고 있을 때 신이 자신을 구원해주었다는 흑의 주장보다, 세상에 희망은 없기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는 게 당연한 거라는 백의 주장이 어쩐지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는 것. 미래가 어떻게든 달라질 수 있다고 믿으며 성격을 내미는 흑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데, 백은 그런 그에게 삶이 죽음보다 더한 악몽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소설에서는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해서 패배를 인정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의 구원을 희망으로 그리겠지만, 매카시가 보는 세상은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세상에 희망 따위란 없으며, 당신이 믿고 있는 모든 것은 사실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이 치열한 공방전의 결말은 이제 '되돌아가는 것도, 바로잡는 것도 불가능'한 무의 희망밖에 없다는 걸로 끝난다.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절대 믿지 않는 흑이 아니라 꿈이나 환상 없이 가능한 빨리 죽고 싶다는 염세적 세계관을 가진 백의 손을 들어주면서.

이 작품은 출간 이후 꾸준히 연극 무대에 올랐고, 2011년에는 매카시의 열렬한 팬임을 자처하는 토미 리 존스의 연출로 미국 HBO 채널에서 드라마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고 한다. 토미 리 존스가 백인 역을 겸했고 새뮤얼 잭슨이 흑인역을 맡았다고 하는데, 어쩐지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한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보이는 것 같다. 매카시는 이번 작품에서 <로드>의 형식과 주제를 보다 극단적으로 밀어붙였다고 하는데, 최소한의 등장 인물과 간결하고 건조한 문장, 희망이 없는 세계에 묵묵히 맞서는 인물들은 과연 매카시답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가끔 너무도 끔찍한 일을 당한 이들을 볼 때, 신이란 존재가 정말 있기나 한 걸까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학대 당하는 어린이들, 누군가를 이유없이 살인하는 사람들, 자기 혼자 살겠다고 수백 명의 목숨을 내팽개치는 몰지각한 사람들.. 이런 사건 사고 속에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런데 대체 왜 하느님은 이런 일들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거냐는 말이다. 신은 대체 왜 이런 인간들의 비극을 지켜보고만 있느냐. 신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이냐는 의문이 들 때면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세상에 희망이란 있는가. 글쎄 희망이 어떻게 생겨먹었더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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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 실리콘밸리의 자유로운 업무 방식 - 구글 애플 페이스북 어떻게 자유로운 업무 스타일로 운영하는가
아마노 마사하루 지음, 홍성민 옮김 / 이지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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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본 기사에서 실리콘 밸리의 평균 명목 임금은 2014 100,983달러(한화 약 1 1천만 원)이라는 걸 읽었다. 이는 미국 전역의 평균임금, 58,623달러(한화 약 63백만 원)보다 크게 웃도는 수치이고,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28,739달러(한화 약 31백만 원)에 비해서도 엄청난 수치이다. 그렇다면 평균연봉이 무려 1 1천만 원인 실리콘 밸리의 사람들은 어떻게 일을 할까 궁금해진다. 세계에서 가장 핫한 스타트업의 천국이라 불리는 실리콘 밸리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반도 초입에 위치하는 샌타클래라 일대의 첨단기술 연구단지이다. 첨단기술분야에서의 기술혁신, 벤처비즈니스, 벤처캐피털에 의해서 일대 산업복합체가 형성되어있는데,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이 있으며 국내기업으로는 삼성, 엘지 등의 회사들이 진출해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창출해내는 기업들이 모여있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비즈니스 시스템은회사나 조직 중심과는 거리가 멀다. 조직보다 개인의 자질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한다. 이 책은 19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저자가 일본과 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느낀미래형 업무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애플, 구글, 어도비시스템즈, 인텔, 오라클, 휴렉팩커드, 야후, 페이스북 등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전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하고 있는 이들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은 조직보다는 개인의 자질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차별이나 고정관념이 없고, 실수를 인정하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고 응원하며 개인의 재량으로 자유롭게 일할 수 잇는 것이다.

                              '조직'이 아닌 '개인'

                                           '대규모'가 아닌 '벤처'

                                '상하 사회'가 아닌 '수평 사회'

                                                          '계속'이 아닌 '변화'

변함없는 매일이 가장 안심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다. 뜻밖의 일로 갑자기 지붕 꼭대기에 올려진 상태다. '얼른 내려줘'하고 바로 지붕에서 내려와버리면 우발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지붕 위에서 경치를 즐기며 '세상은 이렇구나, 좀 더 멀리 가볼까' 하고 반응하는 것이 우발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성장' 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인생이 바뀌는 순간을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우발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라고 말한다. 예상치 못한 일로 지금까지의 생활에서 균형이 깨져서 더 이상 안정된 매일을 기대할 수 없을 때가 바로, 더 나은 미래로 향하는 도약의 시발점이라고 말이다. 일에서든 인생에서든 우발적인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차이에 따라 미래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우발적인 일에 반응하지 않으면 변화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발적인 일이 일어난다. 그것에 반응한다. 극복한다. 이렇게 3단계를 여러 번 경험해 커리어를 쌓은 사람이 비즈니스 전문가가 된다고 한다. 고생하고 싶지 않고, 실패하고 싶지 않고, 안정된 상황에서 지내고 싶어하면서 돈도 벌고 출세도 하고 싶어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꿈의 기업으로 불리는 구글의 업무 환경과 복지는 전세계 젊은이들의 로망이다. 미국 내 30만개 기업을 대상으로 연봉과 복지가 가장 좋은 직장의 순위를 매겼는데, 단연코 1위는 구글이었다. 평균 연봉도 높지만 직원들에 대한 스톡옵션과 자녀 장학금 등의 혜택 덕분이다. 구글은 사망한 직원의 배우자에게 사망 직원이 받던 월급의 50% 10년간 지급하며, 사망 직원의 자녀들은 19살이 될 때까지 매월 1000달러씩 장학금을 받는다고 한다. 이와 함께 사내 병원, 물리치료, 금연 프로그램, 요리 강좌 등 다른 복지 혜택도 빼놓을 수 없을 테고 말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꿈꾸는 꿈의 기업은 구글 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기업들이 새로운 업무방식을 통해서 만들어내고 있다. 야근, 접대, 조직의 벽, 대인관계의 스트레스 없는 그런 세계 말이다. 이 책에서는 정답을 찾아 커리어를 쌓는 방식이 아니라과정우발성을 중시한 새로운 업무 방식을 시작으로 새로운 업무 방식을 실천하고 있는 실리콘밸리의 모습, 그리고 실제로 실리콘밸리에서 일할 때 필요한 지식실리콘밸리 취직 계획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4장에 소개되어 있는 '실리콘밸리 취업 활동 작전' '2년에 달성하는 실리콘밸리 취직 계획'은 매우 실용적이고 흥미로웠다. 취업 준비 생들이 주목해서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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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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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내가 이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 내 삶은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불안한 토석 위에 서 있었다. 뭘 해도 자꾸만 넘어졌고, 여기 저기서 태클을 거는 사람들이 불쑥 나타났으며, 간절히 염원했던 일은 내 기대를 배반했고, 매일 매 순간은 마지막 한번 만 더 참아보자는 식으로 버텨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나는 점점 더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의 앞날은 절대로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두 주먹으로 꽉 쥔 손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와도 같았다. 말이 줄어든 만큼 나는 틈만 나면 책을 읽어댔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주로 스릴러, 추리 소설들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악당 들을 물리치는 히어로가 있었으며, 그들이 가진 엄청난 매력과 능력은 거의 대부분 나에게 대리만족의 쾌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던 중에 만난 <경관의 피>라는 작품은 그 명성에 비해 나에게는 너무도 심심하고, 분량만 많은, 절대 미스터리 작품 같지 않은 그런 작품이었다. 어떤 상을 받았고, 명성이 어떻고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현실의 불행한 나를 위한 영웅, 내가 응원하고, 감정이입하고 싶은 등장 인물이 반..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캐릭터가 전혀 없었던, 그저 평범한 동네 아저씨 같은 경찰의 일상이 주욱 나열되고 있는 이 작품이 당시의 나에게 와 닿지 않았던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다시 만나게 된 이 책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그런 간극은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내가 확연히 달라진 것만큼의 깊이일 것이다.

요즘은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두 번씩 읽을 기회가 흔치 않다.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는 속도를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늘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잔뜩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감탄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감동을 받았던 책이라도 다시 그것에 시간을 투자하기란 만만치가 않은 일이다. 6년 전에 출간되었던 버전의 개정판으로 분권이 합본으로 재 탄생한 <경관의 피>는 이번에 다시 읽게 되지 않았다면 나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하나의 작품이었을 지도 모른다. 종종 언제 보느냐가 결정적인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그 작품이 당신에게 제 시간에 도착했을 때 그 감흥이 거의 죽고 싶을 정도로 당신의 마음을 흔들 때가 있다는 걸 잊지 말자. 그러니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작품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만났을 때, 내가 명성만큼의 감동을 받지 못했다면 시간을 좀 두고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한다.

"단속할 상대를 닮아가는 게 형사야. 강력범을 상대하다 보면 강력범처럼 돼. 사기꾼을 상대하면 사기꾼처럼 된다더군."

"성실한 지역 주민들을 상대하면 성실한 지역 주민으로 있을 수 있어요. 그렇죠? 주재 경관이 되어요. 출세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전쟁이 끝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시절, 공습으로 타다 남은 본채에 다다미 석 장짜리 방을 덧세워 더부살이로 얹혀 사는 부부가 있다. 어느 날 남편은 아내에게서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제대로 된 직장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경시청에서 대대적으로 순사를 모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순사가 만 명이나 부족하다는 기사를 읽었던 것이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전쟁 전의 경찰과 달리 민주 경찰이 되었다며, 융통성 없이 옹고집으로 질서정연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세이지는 그렇게 순사가 되기로 한다. 그렇게 그의 경찰 생활이 시작되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부부의 성격이다. 아내인 다즈는 그가 계급이 올라가서 너무 경찰관다워지는 것을 걱정한다. 세이지 또한 출세를 바라지 않는 대신 주재 경관이 되는 것을 목표로 아내와 아이들이 우선인 가장이다. 결국 그는 염원하던 주재 경관이 되고 덕분에 그들은 방이 두 개 딸린 주택에 가족과 함께 살면서 근무를 하게 된다.

대부분의 경찰이 퇴근 시간도 늦고, 외근도 잦아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는 반면에 주재소는 경관이 거주하는 집과 주재소 집무실이 함께 있으므로 아이들이 아버지의 직업과 인생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는 편이다. 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족으로서의 모습도, 직업인으로서의 모습도 모두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외근 경관은 근무할 때만 성실한 경관으로 있으면 되지만, 주재 경관은 이십사 시간 내내 훌륭한 경관이 아니면 안 돼."

이렇게 스토리는 미스터리 물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는 상태로 진행된다. 한 경찰의 삶이 그저 담담하게 펼쳐지면서 그가 겪는 사건들이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정도이다. 그 중에 그가 경찰 일을 하면서 겪는 사고 중에 미결로 끝난 두 가지 사건이 있다. 우에노 경찰서 공원 앞 파출소에서 근무할 때 젊은 남창 하나가 연못 옆에서 살해당한 사건과, 그들이 살던 셋집 바로 뒤에서 시체로 발견된 젊은 철도원의 살해 사건이다. 그 두 사건이 어딘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그는 개인적으로 사건을 조사하게 되고, 결정적인 단서를 찾게 되던 날 의문의 추락사로 죽고 만다. 그것도 주재소 바로 옆에 있던 오층탑 화재 사건이 발생했을 때 현장에서 떨어진 육교 아래에서 발견된 탓에, 그는 순직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책임감 없이 담당구역을 벗어난 그는 자살로 처리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살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로 이모사카 육교 아래로 추락했던 게 아닐까. 사고라면 사고여도 상관없다. 아니, 그것이 역시 자살이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것이 증류수처럼 명백한 진실임을 제시해준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세이지가 죽고 아들인 다미오는 세이지의 동료였던 가토리, 하야세, 구보타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니고, 경시청 경찰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가정 형편상 대학은 가지 못했던 그에게 경찰학교의 졸업이 다가왔을 때 공안의 가사이 경시가 나와 그에게 대학을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급여도 주고, 학비도 모두 지원해주겠다고 말이다. 경시청 공안부로서는 적군파가 신원을 의심하지 않을 수사원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마침 다미오가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며 내부의 사정을 수시로 보고하고, 잠입 수사해 공을 세우지만 그는 "저는 공안경찰관이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아버지처럼 주재 경관이 되는 것이 꿈입니다." 라며 공은 세웠지만 자신에게 외사과나 공안 수사원은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역시나 아버지인 세이지처럼 출세나 성공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이, 그저 아버지 같은 경찰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학생운동의 동향을 캐기 위해 경시청 공안부의 스파이 노릇을 하다 극도의 불안신경증을 얻게 되고, 이후 그 일을 그만두고 평범한 경찰 업무를 할 때조차도 그것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좋지 못한 이유로 술을 마셨을 때 아내인 준코에게 자기도 모르게 손찌검을 하게 되는 등 후유증이 꽤 가지만, 어렵게 극복하고 그도 결국 주재 경관이 된다. 하지만 지명 수배범이 인질을 붙들고 난동을 부리는 걸 막다가 총격에 죽고 만다. 자신은 비번인 날이었음에도 주재소 경관이라는 책임감으로 인질을 살려냈기에 그는 죽음과 동시에 2계급 특진과 순직으로 처리된다.

"한 가지만 말씀해주십시오. 이 임무에 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뜻밖의 질문이었을까?

오이카와가 다시 가즈야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피다. 자네에게는 훌륭한 경관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런 변칙적인 임무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아버지인 다미오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랐기에, 아버지와 그다지 각별하지 못했던 아들 가즈야도 결국 경시청 경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순직 경찰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일종의 경의를 표하는 경찰서의 분위기에서 아버지의 경우는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이대, 삼대 경찰관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이들을 그릇되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증명이기도 하고, 아이가 아버지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할아버지는 순직 처리되지 못한 자살이라 오히려 다른 시선을 받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가즈야는 문제 경찰관을 대상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라는 임무를 받게 된다. 폭력단을 담당하는 민완 형사 밑에서 일을 배우다 언젠가 증거를 쥐고 그의 뒤통수를 때릴 수밖에 없는 비밀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했던 잠입 수사와 색깔은 다르지만, 어찌되었던 비밀 업무를 말이다.

결국 이들은 삼대에 걸쳐 자신의 아버지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 뭔가 다른 이유로 죽었던 게 아닐까, 라는 죽음의 진상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 경찰관에 지원하고, 그 일을 해나가면서 답에 가까워진다. 아버지의 뒤를 계승한다는 그런 거창한 직업적 소명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아버지 같은 경관이 되고 싶다. 라고 자연스럽게, 마치 물 흐르듯 그렇게 같은 직업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된 손자가 그들의 죽음에 얽힌 비밀과 맞닥뜨리는 순간은 두툼한 페이지만큼 쌓인 시간의 두께덕분에 더욱 묵직한 울림을 안겨준다. 전후 일본의 풍경과 현대사 육십 년이라는 시간이 서사로 밑바탕이 되어 있는 이야기라 더 그럴 것이다. 이 작품은 스릴 넘치고, 긴장감에 땀을 쥐게 하는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쓱쓱 편하게 페이지를 넘기다 어느 순간 그 페이지의 무게만큼 이들 삼대의 삶을 체감하게 된다. 한 권의 책에 이렇게 수십 년의 시간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다는 것 자체도 대단하지만, 세이지, 다미오, 가즈야 각각의 스토리 자체가 독립되어 완성도와 재미가 있다는 점 또한 엄청난 필력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경관은 경계에 있다. 흑과 백, 어느 쪽도 아닌 경계 위에 서 있어."

어떻게 보면 경찰 소설인데 주인공이 사명감이 투철한 영웅도 아니고, 특출한 재능을 가진 뛰어난 천재도 아니고, 너무도 평범한 인물인데다 스토리마저 '수사'보다는 경찰관의 '일과'에 맞춰 흘러가는 이야기라 그다지 임팩트가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 나도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잘 쓴 소설이지만 재미는 없고, 나에게 별로 감동을 주지는 못했던 작품으로 느꼈으니 말이다. 그런데 꽤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게 된 이 작품은 '경찰 수사극'이 아니라 '가족 드라마'에 가깝게 느껴졌다. 1대 경찰관인 세이지는 모범적이고 전통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 경찰관이 된 2대 경찰관인 다미오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신결 질환으로 폭력적인 가장의 모습으로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이어 3대 경찰관인 가즈야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살아 생전 가깝게 지내지 못했지만 경찰이 되어 아버지와 유사한 업무를 하면서 비로소 그의 모습을 이해하는 아들이 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라고,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큰다고 하지 않나. 어린 시절 한없이 커다랗게만 느껴지던 아버지의 등이 어느 순간 작고 초라해 보인다고 느끼는 어른이 되면, 그제야 우리는 아버지의 굽은 등 속에 숨겨진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길가다 무심코 발에 채이는 돌맹이나, 매일같이 숨쉬고 있어 깨닫지 못하는 공기처럼 특별한 것 없는 시간들이 쌓여 누군가의 인생을 완성시킨다. 극중 다미오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가족의 얼굴로 기억한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몇 살 때 무슨 일이 있었다, 아이가 몇 살 때 무슨 일이 있었다. 이렇게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이렇게 많은 분량으로, 이렇게 긴 시간을 통해 삼대의 이야기를 했던 이유일 것이다. 가끔은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이, 보여지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법이다. 그러니 이 작품은 문장보다는 행간으로 읽어야 하는 미스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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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15-03-1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사키 조를 `폐허에 바라다`로 처음 만났는데 그 작품이 너무 좋아서 사사키 조를 찾아 읽게되었어요. 말씀하신 그 느릿느릿함이 마음에 들었달까요. 리뷰에도 썼지만 사사키 조는 뭐랄까 산책자의 어조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요즘 미스터리의 속도와는 다르게(더구나 일본 미스터리 소설은 더욱 빠르죠.) 완만한 걸음의 시선으로 공간과 사람을 담아가는 게 저는 좋더군요.
저는 아직 절반 밖에 못 읽었지만(준코와 결혼하고 프락치 경험 때문에 아내를 구타하고 후회하는 장면까지 읽었어요) 행간으로 읽어야 하는 미스터리다라는 말씀에는 100% 공감합니다. `경관의 피`를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

피오나 2015-03-11 12:29   좋아요 0 | URL
오.. 산책자의 어조..라는 표현 딱인 것 같아요. ㅎㅎ 천천히 읽어야 하는 미스터리는 흔치 않아서 호불호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두 번째 읽는 <경관의 피>는 멋진 작품임에 분명하네요. ^^

[그장소] 2015-04-15 0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을 분명하게 기억하는데도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이토록 맛이 달라지고 마는 소설의 세계..
돌아가서 다시 들춰 보고 싶어졌어요. 후기는 이런 글쓰기 여야 한다..라는 걸 교과서 처럼 보여 주신 듯 합니다.
모범적인 글쓰기의 한 정례 를 보고 자세를 바로 하게 될 만큼이요.
새삼스럽지만 신선하였습니다.생각하면 독서 후기란 읽는이의 인생관이나 삶이 더해져서 말이죠.
끝나고 나면 이미 그 글은 그 원작의 소설과 도 다른 형태의 새로운 창작물이 아닌가... 결론지어지고 말아요.
이 글은 피오나 님의 멋진 새 글인 경관의 피를 담은 다른 차원의 소설인 게 아닌가...그러는 거죠.

문장보다는 행간으로 읽어야...이건 띠지로...
경관의 피는 부제로
피오나 님이 지으실 님 만의 제목을 정한다면? ...(인터뷰 입니다.^^)

두 분의 (헤르메스 님과 피오나 님) 근사한 정담 잘 새겨듣고 갑니다.많이 배우고요..

개인적으로 사사키 조˝ 하면 그의 이름에서 음악같은 악상..연주하듯 자연스럽게..가 떠오릅니다.
행복한 시간 고맙습니다.^^

피오나 2015-04-19 18:00   좋아요 1 | URL
하핫..그장소님.. 이리 멋진 댓글을 달아주시다니..감사해요.
제가 댓글을 이제 봤네요. 댓글이 자주 달리는 곳이 아니라... ^^;;;

제목을 딱히 생각해 본 건 아닌데요. 그저 `삶`이 묻어나는 느낌의 제목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긴 해요. 근데 제목까지 그러면 정말 경찰 소설 같지 않아 질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말씀대로 `음악같은 악상. 연주하듯 자연스럽게`가 사사키 조의 작품과 너무도 잘 어울리네요. ㅎㅎ
올해는 <경관의 조건>이 출간될 예정이래요. <경관의 피>에서 9년 후의 이야기라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관이 된 가즈야의 이후 이야기도 기대중입니다.

그장소님의 정성 스런 댓글 덕분에.. 저도 행복한 시간이 되었네요. ^^

[그장소] 2015-04-19 19:21   좋아요 0 | URL
인사는 제가 해야..^^ 이후로 제 글을 보니 어찌나 비어 보이던지..
좋은 글쓰기임에도 개인적 체험과 양념을 잘 버무린 분들의 글을 만나면 반갑고 기쁘면서 역시 제가 쓸때는 감각만을 옮기게 됩니다.

경관의 조건 ㅡ보기에 조화롭고 아름다울 것..(??여경인게요?)ㅋ

경관의 피 ㅡ쌍피 보너스
앗싸 !한장씩 내놔! 하는 소리 들리는..ㅋㅋㅋ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

비오는 주말 저녁 마무리도 즐겁게 잘 하시길 바라고요.
저도 경관의 조건 기대하며..후기도 또 기다리겠습니다.
그럼..달디단 밤....^^

[그장소] 2015-04-19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s.인터뷰 답글 또한 고맙습니다.
장난처럼 한 것인데 성심성의껏...^^
북플 에러로 제가 이글만 세번째 다시씁니다.ㅎㅎㅎ
그게 하나도 귀찮지 않을만큼 고마웠네요.
 
녹스머신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박재현 옮김 / 반니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언젠가 파일로 밴스가 등장하는 책을 읽다가 S.S. 밴 다인의 작가 이력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는 건강 악화로 의사에 지시에 따라 2년간 장기 요양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담당 의사는 독서를 금지시켰다. 지나치게 많은 집필 활동으로 인한 건강 악화였기에 내려진 특단의 조치였는데, 밴다인은 의사에게 미스터리 소설만은 읽을 수 있도록 요청했고 의사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는 요양하는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미스터리 소설들을 읽어댔다. 그는 에드거 앨런 포부터 연대순으로 현대 작품까지 읽기 시작했고, 자신이 읽은 것들을 정리하고 체계화했다. 결점이 분명하게 드러난 미스터리 작품들이 쇄를 거듭하여 팔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경험과 연구가 월등한 자신이 더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다고 여겼다. 거기서 새로운 탐정 캐릭터를 구상하고 풍부한 교양과 현학적인 묘사가 흘러 넘치는 입담의 파일로 밴스라는 탐정이 탄생한다. 그는 탐정 소설을 쓸 경우에는 매우 명확한 법칙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글쓰기 원칙들을 간결하게 정리해 '탐정 소설을 쓰기 위한 스무 가지 규칙'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먼저 <녹스의 십계>의 각 항목을 수식으로 기술해 10차원의 매트릭스를 구성한 뒤 이것을 '녹스장'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 녹스장에 저자와 독자의 대결 방식에 기반한 '2-제로섬-유한[확정[완전정보형 게임'의 알고리즘을 채우고 쿠머와 후마얀의 스토리 생성 방정식을 거꾸로 돌려 해의 분포를 그림으로 그린다.

유안의 짐작이 옳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해의 분포는 황금기의 탐정소설 작가들이 점점 더 똑똑해지는 독자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지혜를 짜내 고안해낸 정교한 속임수나 플롯의 이노베이션 곡선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탐정 소설을 쓰기 위한 작법 그 자체보다 수많은 미스터리물을 읽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화해서 이론화한 그의 능력에 감탄했는데, 사실 이것은 장르 소설만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밴 다인의 규칙은 관점에 따라, 혹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부분이 물론 있으나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들을 분석해서 추려낼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있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만약 현대의 범죄, 미스터리, 추리 소설들도 그 수많은 작품들을 전부 다 분석하고, 규칙을 파악할 수 있다면, 만약 그것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넣고 돌릴 수 있다면, 그걸 토대로 완전히 다른 작품을 '오로지 그 규칙들을 통해서'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의 손으로 이야기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언젠가는 정말 뛰어난 컴퓨터 프로그램이 기존에 출간된 작품들의 장점을 추려 모으고, 단점을 정리해서 보완할 수 있다면 새로운 작품을 써낼 수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 공상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노리즈키 린타로의 신작 <녹스머신>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감탄과 공감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이런 소재로 이렇게나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다니! 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 책은 일반 적인 미스터리와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다소 머리가 아플 수 있고, 혹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아 헤맬 수도 있음을 미리 말해주고 싶다. 그러나 정말 획기적으로 새롭고,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만큼 행복한 재미를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야기는 2058년의 어느 날, 상하이 대학의 유안 친루가 국가과학기술국으로부터 소환장을 받는 걸로 시작한다. 소환장에는 유안의 박사논문에 관해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유안 친루는 문학수리해석을 전공한 문학 연구자이다. 배경은 컴퓨터로 제작하는 오토포메틱스 문학이 노벨 문학상까지 받는 그야말로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대이다. 누군가에 의해 이야기 생성 방정식이 발표되자, 인간의 뇌와 손이 창작해내는 문학은 내용 면에서나 비용 대비 효율 면에서 '오토포에틱스'를 대적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완전히 자동화된 이야기를 창작하겠다는 꿈이 현실화된 세상인 것이다. 주인공 유안의 전공인 문학수리해석은 시나 소설 작품에 사용되는 단어나 관용구의 빈도를 정밀 분석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학문으로 이것을 통해 어구의 수준부터 문장의 결합, 작품 구조 해석에까지 연구 범위가 확대되고, 작가 고유의 문체를 통계학 기법으로 완벽히 되살려낼 수 있게 된다. 분명 이것은 소설 상의 설정일 뿐인데, 나는 어쩐지 이것이 미래의 언젠가 실제로 현실로 이루어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런 세상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사람 냄새 나지 않는 문학이 삭막할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유안이 발표했던 논문은 로널드 녹스가 발표한 탐정소설의 규칙 '녹스의 십계'에 관한 것이었다. 선배 연구자들 대부분은 밴 다인의 '잠정소설 작법의 20법칙'을 해석 모델로 사용했으나, 자신이 보기에 그것은 융통성이 없고, 엄밀성이 결여된 기술도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과학기술국 장관은 바로 그 논문에 양방향 시간여행의 난제를 해결할 결정적인 실마리가 있다며, 유안에게 녹스가 이 책을 집필하던 13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그들의 가설이 옳다면 역사상 최초의 양방향 시간여행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용기를 내어 밝히겠다. 솔직히 크리스티 여사가 나를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그의 전기작가 지위에서 물러나게 만들면 어쩌나 두려웠다.

들러리의 전통이라거나 탐정소설의 공정한 플레이라는 식의 그런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크리스티 여사의 심경 변화로 포와로와 쌓아온 오랜 우정이 깨지는 것은 아닐까? 두 번 다시 포와로의 모험에 함께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가? 오직 그 점만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라는 작품이 셰퍼드 의사의 수기로 발표된 탓에 나만 따돌림을 당했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총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표제작인 <녹스머신>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수록된 〈논리증발 - 녹스 머신 2〉에서 기묘하게 완성된다. 〈들러리클럽의 음모〉는 불멸의 고전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존 왓슨 박사, 헤이스팅스 대위 등 들러리들이 모여 애거서 크리스티와 벌이는 색다른 두뇌싸움이 주요 스토리인데, 정말 유쾌하고 기발하고 매력적이다. 〈바벨의 감옥〉은 기존의 그 어떤 탈옥소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색다른 스토리를 자랑한다. 특히 이 작품은 일본어 세로쓰기에 맞춘 트릭으로 구성된 작품이라, 중간중간 경상인경이 주고 받는 메세지가 세로쓰기로 구성되어 있어 더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다. 이 리뷰를 쓰면서 정작 작품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보다 작품의 배경에 대한 단상을 더 길게 언급한 이유는 이 작품만의 새로움을 글로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혹은 최소한의 정보만 가지고 이 책을 읽어야 오롯이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스텔라가 천만 돌파를 하는 요즘에 시간여행, 양자역학 같은 현대물리학 지식을 총동원한 미스터리라 너무도 흥미진진하고, 기발한 상상력에 정점을 찍는 이야기생성에 관한 아이디어는 너무도 매혹적이다.

그동안은 작가의 이름 '노리즈키 린타로'와 같은 이름의 탐정이 등장하는 노리즈키 린타로 시리즈만 읽다가, 이번에 출간되는 책은 무려 SF 미스터리 집이라고 해서 더욱 궁금했던 작품인데,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최근에 읽었던 미스터리물 중에서 가장 색다르지만 공감되고, 복잡하지만 명확하며, 어렵지만 재미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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