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럼 다이어리
에마 치체스터 클락 지음, 이정지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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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의 언어 능력은 두 살짜리 아이와 유사하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개에게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건네야'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아이들처럼 제대로 표현만 못할 뿐이지 대부분의 말을 알아듣기 때문이다. 무슨 개가 사람 말을 알아듣냐고 타박할 사람도 있겠지만, 개를 키워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 공감할 것이다. 왜 우리가 이들을 가족처럼 여기는지, 동물처럼 대하지 않고 사람처럼 대하게 되는지 말이다. 가끔 사람에 지치고 시달려서 위로 받고 싶을 때, 묵묵히 우리 집 개가 내 옆에 기대 앉아 주는 것만으로도 든든할 때가 있다. 개는 주인과 함께 어떤 공간에 있을 때 절대 떨어져 있지 않고, 어떻게든 몸을 기대거나, 붙어 앉아 있는다. 이런 조건 없는 애정이야말로 개와 주인간의 돈독한 관계를 형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거의 평생을 강아지와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릴 적부터 강아 지와 친숙하게 지냈던 편이라 그들의 언어에도 관심이 많은데, 그래서 이번 <플럼 다이어리>라는 책을 읽으면서 공감되는 부분들이 너무 많아 막 깔깔대며 읽었던 것 같다. 우리 집 토토도 플럼 처럼 이렇게 우리 가족들과 살아가면서 매 순간, 특별한 상황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플럼이라는 강아지가 일 년 동안 꾸준히 자신의 일상을 일기를 쓰고, 저자인 에마가 일러스트를 그린 그림일기인 이 책은 그녀의 블로그 '플럼독'에 꾸준히 연재되기도 했었다. <에마가 그림으로 살짝 도와주기는 하는데, 글은 전부 제가 쓴 거라고요>라는 플럼의 주장이 그럴듯한 것이 사람이 읽어도 흥미진진한 개의 일상이 너무도 실감나게 보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5 26일 일요일

다들 외출한 지난밤, 나는 철저히 혼자 남겨졌다. 혼자 남는 것도 싫지만, 애초에 내가 왜 같이 갈 수 없는지를 몰겠다. 그들은 '라이도3'를 틀어놓고 나갔다. 라이도4라니!! 우리집 라디오에 채널이 그거 하나인가, ! 물론, 내가 평소 시사문제에 관심이 많긴 하다. 하지만, 하염없이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이 마당에 뉴스가 다 무슨 소용이람.

 

집에 혼자 남겨진 개의 일상, 주인과 산책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들, 그들 친구들끼리의 관계, 주인인 에마가 많은 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곁에서 도움이 되려고 얼쩡거리다 구박과 짜증을 견뎌야 했다는 얘기는 어쩐지 짠하기도 했다. 잠깐 쉬었으면 해서, 뭐라도 도움이 되려고 얼쩡거린 건데, 바빠서 지쳐있는 에마의 눈에는 귀찮게만 느껴졌을 테니 말이다. 개와 함께 하고 있는 우리네 일상에서 흔히들 만날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고.

 

우리 집 토토도 가끔씩 개밥을 거부할 때가 있었다. 플럼이 차라리 종이를 씹어먹지 ''밥은 못먹겠다며 아픈 척을 하는 모습 위에 토토의 모습이 오버 랩되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 밥을 안 먹으려고 할 때마다 닭고기며 통조림이며 챙겨주었던 내 모습과 에마의 모습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개 사료도 다양한 맛과 영양을 함유한 것으로 골고루 나오면 좋으련만.. 내가 봐도 매일 같은 사료를 먹는 개들의 식생활이 불쌍해 보일 때도 있었고 말이다.

 

 

 

특히나 플럼이 깜찍한 이유는 바로 책 냄새를 좋아하고, 서점을 사랑하는 개이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개를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는 건 플럼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런 이유 때문에 책을 사랑하는 개라니, 너무 기특하고도 사랑스럽지 않은가. 나는 이 책을 읽어가며 점점 플럼이 개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안되어 간다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실제 생활에서 토토라는 개를 키우면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13년이나 나와 함께 지낸 우리집 식구. 토토. ^^

 

 

동물을 좋아하는 것에는 항상 그에 따른 책임이 필요하다. 단순히 예뻐하고 귀여워하는 것만으로 동물을 키울 수는 없다. 해마다 늘어나는 유기견, 유기동물들에 대한 문제가 뉴스로 보도될 때마다 개를 키우는 입장에서 참 화가 나고, 마음이 아프고 했었는데, 어리고 작은 동물을 이제 막 키워보려는 이들에게도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다. 플럼의 일상을 큭큭 거리며 따라가다 보면, 개도 엄연히 생각이 있는 존재이며, 그들 또한 존중해주어야 하는 가족이라는 점을 자연스레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책은 예쁜 판본과 사랑스러운 일러스트, 그리고 재기발랄 한 플럼의 시각으로 쓰여진 일기까지 너무너무 맘에 드는 책이다. 개나 고양이, 혹은 그 외의 다른 동물을 한번이라도 키워본 이들이라면 다들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 특히 플럼과 비슷한 류의 개를 키우는 친구들에게는 꼭 선물해주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우리집 토토에게도 읽으라고 보여주고 싶긴 하다. 어쩐지 토토가 플럼의 일상을 보며 뭐라고 한마디 툭 던질 것만 같아서 말이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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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5-03-27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희집강아지 이름도 토토예요.^^
이런 우연이~~

피오나 2015-03-27 01:17   좋아요 0 | URL
어머낫!반가워라.토토를키우고계시군요^^

보슬비 2015-03-27 22:47   좋아요 0 | URL
네. 닥스훈트 만 14살 된 토토예요. ^^
나이도 비슷해서 더 반가웠어요. ㅎㅎ
 
소아과의사 엄마의 갓난아기 건강수첩 - 초보엄마들을 위한 닥터 맘의 44가지 처방전 닥터맘 시리즈 1
모리토 야스미 지음, 황혜숙 옮김, 서정호 감수 / 에밀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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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키우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매 순간, 모든 일들이 다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 초보 엄마인 나는 언제나 실수투성이에 서툴기만 하다. 그래도 이제는 아기가 5개월이 넘어 다소의 여유가 생겼지만, 조리원을 나와서 처음 집에 왔을 때의 그 난감함이라니. 밤마다 아이가 보채고, 울어대는 이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어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던지. 아기가 보여주는 반응들 중에 혹시 아픈 게 아닐까,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상황들에 대해서는 정답이 없었기에 더욱 이런 책이 필요했었다. 소아과의사 엄마가 초보엄마들을 위해 갓난아기의 여러 상황 별 처방전을 제시해준다니, 나 같은 초보 맘들에게는 너무도 반가운 책이기도 하다.

 

 

 

저자인 모리토 야스미는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육아에 대한 고충을 깨닫고 블로그를 통해 육아만화를 연 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두 딸아이에 대한 소소한 일기에서 시작했지만, 점점 아이들의 몸과 건강에 대한 정보를 담으면서 더욱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고. 아무래도 소아과 의사이다 보니 현장 경험을 통해 평범한 엄마들은 알지 못하는 많은 정보들을 접했을 것이다. 이 책은 수년 간 그렇게 연재해 온 육아만화에 좀더 상세한 의학정보를 더한 것으로, 질문과 상황에 대한 설명, 의사의 답변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머리 숱이 없는데 좋아질까요? 머리카락은 돌 때까지 대부분 골고루 나므로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자! 혹은 모유에서 어머니가 먹은 음식 맛이 나나요? 무엇을 먹든 모유의 맛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편식하지 말고 평소대로 식사하자! 는 식이다. 거기에 더해 수유 중에 복용해도 되는 약에 대한 리스트가 있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의 상세한 리스트에, 나이에 따른 수면 시간, 국가 예방 접종 대상 무료 백신 리스트까지, 아이를 키우는 초보 맘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들이 알차게 실려 있다.

양치질은 언제부터 하면 되는지, 딸꾹질을 많이 하는데 괜찮은 건지, 모유가 충분한 건지, 이유식은 늦게 시작하는 편이 좋은 건지, 신생아는 언제부터 외출해도 되는 건지, 모유나 분유를 잘 토하는 건 왜 그런 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초보 맘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궁금해했을 만한 내용 들이 가득 있어 가려운 등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듯한 기분 마저 들었다. 누구나 첫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될 때 닥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에 대한 정리가 일목요연하게 되어 있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걱정했는데 사실 별 거 아니었구나.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구나. 다른 아이들도 다 겪는 일이네. 등의 위안마저 들었다.

얼마 전에, 4개월차 예방접종을 맞히고 온 날이었다. 무려 주사를 세 방이나 맞혀야 했기에, 열이 날 수도 있다며 해열제를 처방해주어 받아 왔는데, 2개월차 때도 열이 오르는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갔기에 별 걱정 없이 집에 왔었다. 그런데 그날 밤, 아기를 안는데 이상하게 너무 뜨겁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체온을 재봤고, 무려 38.7도까지 올라가자 얼마나 놀랐던지, 체온이 38도가 넘으면 해열제를 먹여야 하는데, 나는 처방전만 덜렁 들고 왔던 터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늦은 시간이라 동네에 있는 약국에 우선 전화를 해봤더니 해당 약이 없다고 하며 곧 문을 닫는다고 하고, 급하게 24시간 오픈을 하는 약국을 찾아내어 무려 40분이나 걸려 한밤중에 아기와 함께 급하게 다녀왔던 기억이 난다. 해열제를 먹이고 밤새 잠든 아기를 바라보며 뜬눈으로 지새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야 뒤돌아보면 아기를 키우면서 누구나 한번쯤 겪을 수 있는 에피소드이지만, 당시에는 난생 처음 겪는 초보엄마에게 너무도 버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런 책 한 권 있다면 나처럼 허둥대지 않고, 좀더 적극적으로 여유롭게 육아의 여러 상황들을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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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바스티안 피체크.미하엘 초코스 지음, 한효정 옮김 / 단숨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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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마음에 들지 않아!'

린다가 지친 표정으로 희생자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몇 시간째 그 남자에게 몰두 중이었다. 털이 수북한 배에 꽂힌 칼은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밖으로 튀어나온 창자와 살인범인 여인의 모습이 새겨진 허공을 향한 무표정한 눈도.

'하지만 피가 진짜같이 보이지 않아. 또 망쳤어.'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실제로 사람이 죽는 장면을 본 적이 있거나, 시체를 가까이서 보지 않고서는 실감나기 묘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죽음이란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워낙 추리, 스릴러 분야에 관심이 많다 보니 언젠가 법의학 관련된 책까지 읽게 되었는데, 거기서 본 실제 부검 현장, 살인사건 현장은 일반적인 범죄 소설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었다. 단순한 상황 묘사로는 이렇게 시각으로 확인하는 끔찍 함까지는 그려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내가 마치 실제 부검현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독특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국내에선 <눈알 수집가>로 알려진 제바스티안 피체크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법의학자인 미하엘 초코스와 함께 합작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특히나 재미있는 것은 직접 부검을 하는 이가 법의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완전 생 초보라는 점이다. 죽음과 폭력장면을 묘사하는 일을 가장 어려워하는 여류 만화가가 법의학자의 지시를 전화로 듣고 실제 시체를 부검하게 된다. 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법의학자 파울 헤르츠펠트는 여느 때처럼 부검 실에서 잔혹하게 손상된 여자 시체를 부검 중이었다. 그는 해골 부위에서 엑스레이 사진으로 작은 이물질을 발견하고 핀셋으로 꺼낸다. 금속으로 된 캡슐처럼 보이는 그것을 열자 아주 작은 쪽지 하나가 들어있었는데, 현미경을 통해 본 그것에는 몇 개의 숫자와 여섯 개의 작은 알파벳 글자였다. 그런데 그걸 보는 순간 그의 맥박이 뛰기 시작하고, 이마에 땀이 흐르며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쪽지에 쓰인 알파벳 들을 조합하면 '한나'라는 그의 열일곱 살 된 딸의 이름이 되기 때문이었다. 해당 번호로 전화를 걸자 음성사서함으로 남겨진 절박한 딸의 목소리가 재생된다. 그는 이혼 후 딸을 거의 만나지 못했고, 수주일 만에 딸의 목소리를 도움을 외치는 공포 섞인 목소리였던 것이다. 절대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선 안되며, 추가적인 지시 사항을 기다리라는 딸의 말에 그는 천식을 앓고 있는 딸의 상태가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만화가인 린다는 자신의 전남자친구이자 스토커인 대니를 피해 헬고란트라는 섬에 도망쳐와 있는 중이다. 폭풍주의보가 내려진 헬고란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피를 한 상태이고, 점점 더 나빠지는 기상은 누군가 섬에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할 수없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헬고란트라는 섬은 현재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상태인 셈이다. 하지만 그녀는 시시각각 자신의 집에서 대니의 짓이 분명한 행동들을 알아차리고, 점점 두려워한다. 욕실의 수건이 젖어 있고, 침대 위에서 그의 스킨로션 냄새가 나자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 나간다. 폭풍 속으로. 그리고 해안가에서 우연히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헤르츠펠트는 딸을 찾으려면 납치범이 내는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고, 그럴려면 해안에서 발견된 그 시체를 부검해서 단서를 발견해야만 한다. 하지만 헬고란트 섬은 현재 폭풍으로 인해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섬에서 시체를 발견한 만화가 린다는 메스라는 걸 들어본 적도 없는 일반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체 해부를 감행한다. 법의학자인 미하엘 초코스와의 합작품이라 그런지 부검을 하는 장면은 매우 실감나게 잘 쓰여져 있다. 특히나 부검을 하는 인물은 난생 처음 메스를 쥐어본 여성이라, 독자 입장에서 감정 이입하기도 매우 수월하고 말이다. 어떤 사실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그런 인식에 따라 실제 행동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니, 우리는 린다라는 여성이 부딪히게 되는 상황에 서서히 동화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더욱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말이다.

"희생자를 범인으로 만드는 전체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오."

슈빈토프스키가 설명했다.

"그것은 모든 실종자 신고접수와 함께 수색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과도한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경찰의 문제이고, 아동강간범보다 탈세범을 더 엄하게 처벌하는 사법 당국의 문제이고. 내가 소유하고 있던 불법 카지노에 대해서는 나를 독방에 처넣고 싶어 하면서, 성폭행범들에게는 그들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즉시 감옥 밖에서 노역할 기회까지 줄 것을 권고하는 심리학자들의 문제이기도 하오. 그리고 당연히, 이른바 법치국가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법의학 기관의 문제이기도 하오. 거기서 하는 일이란 게 결국에는 범인에게나 유용한 것이고, 희생자들을 두 번 벌하는 거나 다를 바 없소."

 

고립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심장 쫄깃해지는 긴장감과 속을 알 수 없는 동행자와 함께하는 범인 추격전은 흡사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피체크가 데뷔작인 <테라피>를 출간하고 했던 인터뷰에서 <’긴박감을 무너뜨리는 모든 것을 삭제하겠다는 생각으로 최종 수정해 원고의 3분의 1을 버리고 나니, 다음 장을 읽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끔 원고가 잘 마무리된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만큼 그의 작품에는 군더더기가 없이, 플롯에 꼭 필요한 것들만 남아 있어 스토리 진행이 매끄럽다. 지루하거나, 늘어지거나, 불필요한 상황 묘사가 길어지거나, 중언부언 설명조의 대사가 있거나, 이런 요소들이 작품의 몰입도를 방해하는 요소인데, 피체크의 작품에선 거.. 이런 대목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한번 페이지를 잡기 시작하면 내리 끝까지 멈출 수가 없게 만든다. 여지껏 단 한번도 그의 책을 이틀에 걸쳐 읽었다거나, 읽다가 앞 페이지로 돌아가 뒤적인 적이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번 작품에서는 너무도 심각하지만, 사회에 관행처럼 퍼져있는 사람들의 습관, 인식으로 인해 그저 당연하게만 알고 있는 법의 맹점을 차갑게 고발한다.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난 후 에필로그처럼 덧 붙여져 있는 몇몇 신문 기사를 보라. 일곱 살 난 딸을 무려 282회에 걸쳐 지속적으로 성적 학대를 해왔던 아버지에게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다. 네 살 난 아이를 학대한 남자는 22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지만, 변호사들이 검사와 법원을 상대로 합의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에 비해 주식 사기범에게는 5 6개월의 징역이 선고되었고, 탈세와 투자사기범에게는 징역 7년이 선고되었다. 과연 법의 처벌이 그 죄의 무게에 맞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법치국가의 규정이라는 것이 범인들에게는 빠져 나갈 구멍을 이리도 쉽게 만들어주면서, 정작 희생자를 위한 처우는 개선되지 못하고 그들을 두 번 죽이는 것 같은 고통을 주는지 말이다. 이 작품에선 피체크 특유의 독보적인 반전이나 복잡한 플롯도 없고, 범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너무 빨리 들어나 버려 살짝 김이 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주제의식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거운 주제를 인물을 통해 설교하는 식으로 늘어놓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묘한 여운으로 남게 만드는 그 능력 때문이다. 그것이 여전히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 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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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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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굳이 나에 대한 책을 쓰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당혹스러웠지만 나는 진심을 얘기했다. 당신이 흥미진진한 인생을 살고 있기, 또는 살았기 때문이라고. 어떤 시제를 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설 같은, 아슬아슬한 인생, 역사 속으로 몸을 던지는 위험을 택한 인생.

그러자 그의 입에서 나를 경악케 만든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피식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개떡 같은 인생이지, 한마디로."

<한때 알고 지냈던 삐딱한 깡패 작가, 쫓기는 게릴라 전사, 책임감 있는 정치인, 잡지의 <연예란>에 애정 생활 관련 기사가 실리는 유명인>, 도무지 일관성 있게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 이 상반된 이미지들은 하나의 인물이다. 바로 우크라이나 출신의 깡패로 출발해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의 아이돌, 맨해튼의 거지, 억만장자의 집사를 거쳐 파리의 인기 작가로, 발칸 반도를 헤매던 사병으로, 그리고 이제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혼란기에 청년 무법자들의 당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늙은 보스로 변신해있는 러시아의 작가이자 정치인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이다. 저자는 실존 인물인 리모노프의 삶을 추적해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 스토리를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문학적 다큐멘터리>, <기록 문학> 등으로 일컬어지는 카레르 특유의 서술 방식으로 쓰여져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작가 자신의 인생과 리모노프의 삶이 함께 진행되고 있다. 그러니까 작가인 카레르가 리모노프의 삶을 글로 쓰려고 하는 과정과 이유, 그리고 실제 그의 삶이 같이 보여지는 소설인 셈이다. 워낙 실존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탓에 러시아 현대사에 문외한인 나 같은 독자라면 여러 번 길을 잃고 갈팡질팡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읽는 다른 책들에 비해 그렇게 많이 두껍다고 볼 수 없는 분량이었는데도, 읽는데 한참 걸렸으니 말이다. 1989년 이후 소련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점에서는 아주 큰 도움이 될만한 소설이긴 하지만, 이렇게 드라마틱한 인물의 삶을 끝까지 따라가려면 어느 정도의 인내 또한 필요하다.

오만함도 잠시, 방 한가운데서, 관심의 한가운데서, 모든 것의 한가운데서, 이놈은 어딜 가나 한가운데지, 바로 루돌프 누레예프를 발견하자 에두아르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참 운도 없지. 무표정하고 거무스름하고 잔인한, <>라는 존재만으로도 곧 이 고상하게 문명화된 인간들의 무미건조함이 까발려지겠구나, 하며 몽골의 정복자를 자처하는 순간, 살토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궁벽한 두메산골 바시키르, 그 질척질척한 오지에서 태어나 이토록 높이까지 올라온 상태, 사람의 탈을 쓴 야만의 유혹으로 광채를 발하는 악마 같은 누레예프와 맞닥뜨리고 만 것이다.

정치 관련 뉴스에서 아직도 심심치 않게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 작가이자 정치인의 삶이란, 굳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너무도 많은 일들이 파도처럼 벌어지는 인생이었다. 인생을 롤러코스터에 비유할 때 천천히 낮은 곳을 달리다 점차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클라이막스에 정점을 찍는 것이 보통 일 텐데, 어쩐지 리모노프에겐 계속 극과 극을 달리는, 그러니까 시동을 걸 필요도 없이 높은 곳을 내리 달리는 롤러코스터 같다고나 할까.

줄리언 반스는 프랑스 작가의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리모노프의 행동과 신념은 1898년 이후 소련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 혼란, 분노, 절망, ‘거친 서구식 자본주의, 올리가르히들의 경제 침탈, 보통 사람의 바닥난 저축, 매일매일 이어오던 일상의 상실 같은 것들….” 누군가의 인생이 한 시대를 보여준다면, 그렇다면 그의 삶은 충분히 소설이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카레르가 리모노프의 삶을 소설로 쓴 이유가 "그의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인생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소련 해체 후 혼란에 휩싸인 러시아를 통과해가는 영웅의 목소리를 읽어야 할 것이다. 역사 속으로 온 몸을 던져, 자신의 전 생애를 거는 인물은 좀처럼 보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거기다 읽는 이들을 분노에 휩싸이게 만드는 행동을 천연덕스럽게 하다가도,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안쓰럽게 보이기도 하고, 이처럼 극과 극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인물은 단연코 리모노프 외에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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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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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비밀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그 실수 때문에, 혹은 과거의 어느 순간이 발목을 잡아, 스스로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그런 비밀을 남보다 잘 감추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고 싶은 진실이 과연 사실인가.에 있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게 마련이니까. 이 작품은 모르고 살았다면 좋았을, 숨겨진 비밀이 밝혀지면서 일어나는 드라마를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렇지만 당사자가 나는 아니었으면 싶은 그런 일들 말이다.

세 명의 딸을 둔 세실리아는 오늘도 정신 없는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다 문득 언젠가 친구와 함께 주웠던 베를린 장벽 조각을 찾으러 다락방에 올라가고, 그곳에서 우연히 낡은 편지 봉투를 발견한다. 편지 봉투에는 남편 존 폴의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의 아내 세실리아 피츠패트릭에게

반드시 내가 죽은 뒤에 열어볼 것

그녀는 생각도 하기 전에 그 자리에서 편지를 뜯어보려고 하지만, 마침 전화벨이 울렸고, 그렇게 다락방에서 내려오자마자 정신 없이 흘러가는 일상생활에 뛰어들게 되어 남편의 이상한 편지는 냉장고 위에 올려놓고 우선 일들을 처리한다. 중요한 주문을 처리하고,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오고, 저녁에 먹을 생선을 사오고... 가정 주부들의 일상이란 뻔하지만, 그렇게 뻔해서 오히려 빈틈없이 꽉 찬 일상에 틈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나서야 그녀는 그 이상한 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남편은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편지는 아주 오래전에 쓴 게 분명했는데, 왜 그는 죽음을 생각했던 걸까? 그러다 그녀는 그저 웃음을 터뜨린다. 그저 몇 년 전에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이 된 존 폴이 이런 편지를 썼던 거라고. 그러니까 신경 쓸 일은 절대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어진 남편과의 전화 통화에서 그녀는 발견한 편지에 대해 이야길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던 남편은 예정보다 3일이나 먼저 집에 도착한다. 거기다 폐소 공포증 때문에 다락방에 올라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그가 자신이 잠든 사이에 편지를 찾으러 다락방에 올라갔던 걸 알게 되자 그녀는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던 그 편지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고 결국 뜯어서 읽어보고 만다.

이런 세상에, 존 폴. 대체 이 편지가 뭐기에 그런 거야?

, 이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말았다. 때론 알지 못하고 지나가는 게 더 나은 일도 세상엔 많다. 편지에는 남편이 저질렀던 끔찍한 일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다. 그것이 만약 세상에 알려진다면 그녀의 가정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인생도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일 앞에서 그녀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옳은 일을 하고 싶지만, 밝히자니 가족들이 다칠 것이고, 그저 침묵하기엔 진실의 무게가 너무 크기만 하고 말이다. 이럴 때는 독자인 나도 세실리아가 되어 함께 고민에 빠져들고 만다. 정의를 위할 것인지, 내 가족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그 어떤 것을 선택해도 행복할 수만은 없으니 말이다. 예전에 티비에서 인생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다. 두 가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진 주인공이 '그래, 결심했어'라며 그 중 한 가지를 선택하면 그에 따라 그 후 벌어질 인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다. 아마도 그 프로그램이 당시에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재미로 웃음을 주기 위해 만드는 상황이 우리네 인생과 너무도 닮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내가 결코 알지 못하고 지나가버리는 수많은 사실과 그날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달라졌을 꽤 많은 일들을 영원히 알지 못하는 채로 살아간다. 어쩌면 사소한 나의 선택 하나로 순식간에 모든 것이 바뀌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지금 나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과 아주 많이 달라졌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한 번에 단 한가지의 선택 밖에 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세실리아, 테스, 레이첼 모두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고민하고 분노하고 고통 받으며 살아가지만, 이들이 어느 순간 마치 퍼즐처럼 연결되는 것처럼 실제 우리네 인생도 사실 우리가 모드는 큰 그림 속에는 하나의 퍼즐 조각에 불과한 건지도 모르니 말이다. 일주일 동안 벌어지는 엄청난 충격과 파국의 스토리가 마무리되고 나서, 덧붙여진 에필로그는 이 긴 이야기보다 더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아주 많다는 걸 이제 나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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