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의 다이아나
유즈키 아사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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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멀리 벤쿠버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아이를 낳았단다. 카톡으로 보내온 사진 속의 아기 얼굴에서 친구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이 친구는 중학교 1학년 때 나의 짝꿍이었던 친구이자, 내 인생에서 손꼽으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꼭 들어가는 베스트 프렌드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던 그 시기에는 누구나 그랬겠지만, 어쩐지 내가 아이에서 조금은 어른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져버렸고, 중학교에 반을 배정받아 가고 보니 여러 초등학교에서 온 모르는 애들 투성이라 어딘지 의기소침해 있었던 것 같다. 낯가림이 심해서 먼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편도 아니었기에, 나는 평소처럼 소설 책을 꺼내 들고 읽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네준 친구가 바로 이 친구이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지만 가까워지면 털털해지는 나와 달리, 밝고 리더십있고, 아기자기하고 여성스러운 면이 강했던 그 친구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모여 있었고, 그녀는 결국 반장을 맡았었다. 중학교 3년 중에 겨우 일년 같은 반이었고, 고등학교도 다른 곳으로 배정되었고, 대학도 전혀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지만, 그 친구와의 우정은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미있게도 이 친구를 비롯해서 나와 가깝게 지낸 이들은 모두 나와 성격이나 외모가 정반대인 친구들이 많다. 아무래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다른 면을 친구에게서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끌리거나, 동경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 <빨간 머리 앤>아니? 앤의 친구 이름이 다이아나야."

. 다이아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빨간 머리 앤>은 거의 베스트 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좋아하는 책이다. 줄줄 외울 정도로 볓 번이나 읽었다. 앤이라는 수다쟁이에 공상을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좋아 미칠 것 같았다. 딸리 물과 퍼프소매, 하트모양 캔디 등 귀엽고 맛난 것들로 가득한 책이다. 다이아나는 앤이 자랑하는 예쁜 친구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통하는 사이로 등장한다. 읽으면서 내내 둘의 관계가 너무 부러웠다. 이렇게 남과 책 얘기를 할 수 있다니.

나 역시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함께한 친구들이 있었기에, 이 책 <서점의 다이아나>를 읽는 내내 가슴이 쿵닥쿵닥거리며, 마치 연애를 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레였다. 앤과 다이아나 처럼, 혹은 다이아나와 아야코처럼 그렇게 학창 시절 내내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했던 그런 단짝 친구가 있었던 그 누구라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너무도 매혹적이다.

우리의 주인공 다이아나는 새 학기가 시작되어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이 오는 것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 바로 너무도 싫어하는 자신의 이름 때문이다. 외국인도 아닌데 '다이아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거기다 한자로 쓰면 뜻이 '큰 구멍'이기 때문에 항상 친구들의 놀림을 받아왔다. 아빠는 다이아나가 태어나자마자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카바레 클럽에 다니는 엄마인 티아라가 자신처럼 다이아나의 머리도 노랗게 물들여 놓아 가만히 있어도 튀는 소녀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 앞에 '다이아나는 이상한 이름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예쁜 소녀가 나타난다. 눈매가 곱고, 피부가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러운, 다른 아이들과는 뭔가가 분명하게 다른 그 소녀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책을 언급하며 다이아나라는 이름이 정말 부럽다고 말한다. 좋은 환경에서 곱게 자란 것이 고스란히 보여지는, 누구라도 친구가 되고 싶어할 그런 미소를 가진 소녀가 말이다.

가나자키 아야코의 집에 놀러갔던 4월 중순의 일요일을 다이아나는 평생 잊지 못하리라.

그 날을 경계로 인생이 바뀌었다. 자신이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장소가 어떤 곳인지 선명하게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야코의 집에는 다이아나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이랬으면 좋겠다고 꿈꾸던 풍경이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요리 연구가인 너그러운 엄마와 출판사 편집자인 차분한 아빠를 가진 아야코가 부러웠다. 엄마 앞에서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응석을 부리고 조잘대는 아야코의 모습이 정말 부러웠고, 자신도 그렇게 너그러운 엄마의 품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도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지켜줄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아야코는 다이아나가 살고 있는 이 집의 반짝거리는 마력에 푹 빠져 있다. 조그만 방은 마치 소꿉놀이하는 인형의 집 같다. 여기저기에 알록달록한 병이 조르륵 놓여 있고 온 벽에는 공주늠 드레스 같은 옷이 걸려 있다.....냉장고, 전기 밭솥에 이르기까지 반짝거리는 스티커와 비즈로 장식되어 있어 한없이 바라보고 싶어진다.

아야코는 다이아나가 복잡한 가정에서 동화 속 주인공처럼 자란 여자아이일 거라고 상상한다. 헐렁한 티셔츠에 더러운 실내화차림이지만, 사실은 소공녀 세라처럼 좋은 집안의 자녀일 것 같다고. 그리고 다이아나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가슴이 설렌다. 열다섯 살, 자기 이름을 스스로 짓고, 아빠를 찾아 여행을 떠나고. 어쩌면 이렇게 드라마틱할 수 있을까.

아야코와 다이아나는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경험하고, 상대를 부러워한다. 아야코는 다이아나가 순식간에 만들어준 인스턴트 음식의 강렬한 맛에 감동하고, 다이아나는 아야코의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젤리의 맛에 황홀감을 느낀다. 수수하면서 멋진 아야코를 동경하는 다이아나와 반짝반짝 화려한 다이아나를 부러워하는 아야코는 그렇게 세상에서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이유는 둘다 책을 너무 좋아했고, 그 책을 매개체로 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교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외모와 완전히 상반된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이유 만으로 친구가 되는 건 이렇게 어린 시절에만 가능한 일이다. 어른이 되고 나면 마음을 터놓는 친구를 만들기가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되니 말이다. 아야코와 다이아나는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사소한 오해로 멀어지고, 결국 그녀들이 다시 말을 하게 되는 건 그로부터 무려 10년 뒤가 된다. 쉽게 가까워지는 것만큼의 순수함이 반대로 이렇게나 긴 시간 동안의 단절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십여 년의 시간을 각기 다르게 겪어가는 두 소녀의 이야기와 비밀이 많은 호스티스 티아라, 다이아나가 찾아내는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아야코의 두 부모들을 통해서 가족에 관해, 여자들의 삶에 관해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순수했던 소녀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인생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거. 소설처럼 삶도 모든 게 멋지게 돌아가지는 않다는 걸 배워간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는 게 아닐까. 어떤 상황이라도 책을 펼치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안심이 되는 당신이라면, 분명 이 책은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처럼 설레이는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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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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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내 집인가.

나는 생각했다. 저 여자가 내 아내인가. 저 아이들은? 아내는 미소 짓는 얼굴로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있었는데, 살진 턱과 화장으로 간신히 감춘 기미와, 화장으로도 감추지 못한 눈가의 잔주름이 주는 전체적인 이미지는 우울했다......

내가, 내 아내가 아니야. 저건, 내 아이들이 아니야. 마치 낯선 집에 잘못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견고한 구조라고 여겼던 것들은 깨어지고 없었다. 오래 전부터 이미 깨져 있던 걸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린 동생들과 병든 부모를 뒷바라지 하기 위해 점심과 저녁, 2개의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하루 열 몇 시간씩 일했던 남자. 결혼 후에도 수당이 있든 없든 밤늦게까지 일했고, 상사에겐 무조건 복종했으며, 경우에 따라선 몸종처럼 봉사하길 자청했던 남자. 일이 그의 취미였고 사랑이었으며, 아내와 아이들이 일밖에 모른다고 불평해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뛰쳐 나간다.

그 동안 나는 뭐하고 살아온 거야.

나는 도대체 여태껏 뭘 해왔던가.

스스로에 대한 자각은 자신이 형편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게 만들었고, 급기야 '난 실패한 인생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러 시도 때도 없이 멍해지고, 밥맛도 없어지고, 이제까지의 삶이 수치스럽기도 하고 억울해지기도 한 것이다. 전에 없던 건망증, 마음 속의 분노 들은 어떤 울분으로 이어져 결국 아내와의 말다툼 끝에 평생 처음으로 아내의 뺨을 때리게 만들고 만다.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살던 평범한 남편이자 아빠였던 남자의 삶은 어느 날 문득, 그렇게 금이 가버리기 시작한다. 회사에서 자금 담당 이사로 근무 중인 50대 중반의 남자는 그리고 시인이자 화가인 천예린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를 예전에 만났더라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지도 모르지만, 하필이면 자신의 생에 대한 후회와 자각을 하게 된 그 시점에 만났기에, 뻔한 일상에 사로잡힌 평범한 아줌마인 자신의 부인과 너무도 달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동안은 미처 자각하지 못했지만 너무도 뻔한, 기계로 찍어낸 싸구려 공산품 같았던, 황폐하고 부식된 삶을 그제야 깨닫게 되면서 말이다. 그러니 아무런 긴장과 감흥이 없는 무난한 부부 관계는 도발적이고, 퇴폐적이면서도 진취적이고, 자신보다 무려 네 살이나 위였지만 어느 순간에는 30대 초반처럼 보이기도 하는 매력적인 여자 천예린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버리고 만다.

 

그것은 사멸한 줄 알았던 내 옛 꿈의 작은 단서였다. 네 회화적 직관이 놀랍구나, 라고 하던 선생님의 말소리도 선연했다. 천예린,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완전히 잊었던 삽화들이었다.

 

아내와 아이를 버리고, 회사의 공금을 횡령해서 도주한 남자 김진영은 천예린과 단어 그대로 '미친' 사랑을 한다. 생애 한 번쯤은 이렇게나 난폭하고, 모든 걸 다 버리고, 바닥까지 가보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하여 부도덕한 남편이자 무책임한 아빠가 된 그 남자의 사랑의 여정은 그렇고 그런 수순대로 이어진다. 섹스는 했으나 사랑은 하지 않았던 천예린에게 버림받고, 그녀를 쫓아서 케냐로, 모로코로, 카사블랑카로, 스코틀랜드로, 그리고 시베리아로 무작정 여정을 시작한다.

이 작품이 그저 부도덕한 러브 스토리나, 막장 불륜 스토리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행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불치의 병을 앓고 있어 죽음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천예린은, 그녀의 성격대로 앉아서 죽음에게 유린당하지는 않겠다고 말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김진영도 물론 알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벌거벗고 함께 시시덕거리며 밥 먹고 똥 싸고 살 때조차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떠날 때까지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다. 작품 속의 화자는 대부분 김진영 자신이지만, 부분 부분 남겨진 그의 아들의 목소리로 말한다. 아버지가 회사 공금을 챙겨서 여자를 쫓아 떠나가고, 온 나라에 IMF 한파가 몰아닥치고, 아파트가 압류되고, 어머니가 쓰러져 뇌 수술을 받고, 아버지 대신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그의 아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불편한 여정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지만, 남겨진 가족들의 모습에서 현실적인 그림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아버지 자신에겐 목숨마저 걸 정도로 절박한 사랑이, 남겨진 가족에겐 어떤 상처가 되는지 말이다.

제목만큼이나 이력이 독특한 책이다. 이 작품은 1999 '침묵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2600여 매나 되는 긴 분량이었기에 두 권으로 간행되었다. 박범신 작가는 자신이 지나치게 말이 많았거나 참을성 없이 비명을 질러댄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그 책을 잘 보이지 않는 뒷줄 책장에 처박아두고 그것으로부터 떠나려고 애썼지만, 무려 7년이 지나서 그 책을 다시 꺼내 든다. 어차피 떠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마주치는 게 낫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긴 소설을 1500여 매 이하로 아프게 깎아냈고, '주름'이라는 이름으로 2006년 다시 출간한다. 그리고 다시 9년여 시간이 지나, 다시 300여 매쯤 깎아내고 결정적인 장면의 서술을 일부 바꾸어 다시 출간된 것이 바로 이번에 출간된 버전이다. 이후에 다시 7~8년이 지난 뒤에 또 깎아내는 짓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것은, 한 권의 책을 통해 시간의 주름을 켜켜이 쌓아가는 대단한 감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단 한 줄로 삶의 유한성이 주는 주름의 실체를 그려낼 수 있게 된다면' 작가로서 성숙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거라는 박범신 작가의 겸손함은 글쓰기에 대한 그의 깊은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나는 기존에 출간되었던 다소 긴 버전의 이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지금 출간된 버전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많은 것을 상상하고, 추측하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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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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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쇼노스케는 서책을 베끼는 일을 한다. 인쇄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서책은 지은이가 직접 쓴 단 한 권이었으므로, 그것을 널리 읽히게 하기 위해선 필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이렇게 필사본으로 책을 읽어야 했던 이런 시대가 어쩐지 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의 책들은 모두 활자가 인쇄되어 나오므로, 저자의 필체를 느낄 수 있는 책은 없는데 필사본은 글을 쓴 사람의 맨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날 테니 말이다. 나의 초, 중등 시절에는 책 대여점이 한참 인기였는데, 학생이라 용돈이 빠듯했던 나 역시 읽고 싶었던 책들을 전부 사볼 수 없었으므로 주로 대여점에서 빌려서 보았다. 보통 책을 한 권 빌리면 하루 만에 다 읽고는, 나머지 대여 기간 동안 나는 노트에다 필사를 하곤 했다. 왜냐하면 책을 반납하고 나면 두 번 다시 이 책을 읽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여러 번 빌려 볼 만큼의 여유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음을 움직였던 문구들을 모조리 외울 수도 없었기에, 노트에 부지런히 옮겨 적었던 그 시절에 나를 떠올려보니 쇼노스케가 하는 일이 눈 앞에 그대로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글자가 웃고 있습니다".

"글자가 웃나요?"

"웃기도 하고, 화도 내고, 새침한 표정도 짓죠."

글씨에서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 <사라시나 일기 표주>도 국문학자가 만든 사본을 읽을 때와 와카 씨의 사본을 읽을 때 조금 다르게 이해될 겁니다. 물론 글 뜻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글씨체가 다르면 감정이 전달되는 방식도 달라지니까요."

똑같은 사람이 장소에 따라, 또 상대방에 따라 약간은 다른 얼굴을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와카의 얼굴이 환해졌다. "서책은 살아 있다는 말씀이네요."

사람들이 성격과 체질이 각기 다른 것처럼, 그들이 쓰는 글씨체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필적이 다른 것은 본래 저마다 눈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본 것을 그리게 마련이오. 글씨든, 그림이든 마찬가지지. 보는 것, 보이는 것이 다르면 그것을 베껴 쓰고 그리는 것도 다른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소"

글자를 쓸 때는 마음을 담아 써야 한다고, 마음을 담으면 못 써도 예쁘게 보인다고 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별 의미 없이 하는 수많은 일 들 중에 글씨를 쓰는 것조차 마음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 처음 친구를 사귈 때나, 새로운 선생님을 만날 때 글씨체에 따라 그들의 성격과 얼굴까지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었는데, 그게 아마도 글씨에 마음이 어느 정도 깃들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음악을 연주하는 피리를 뜻하는 한자를 쓰다니 무사의 자식답지 않게 연약한 이름이라고 어머니는 무척 싫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억지로 지어주신 겁니다.

이 아이가 생황의 음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인간으로 자라도록.

 쇼노스케에게 이렇게 멋진 뜻을 담은 이름을 지어주신 그의 아버지 소자에몬은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할복 자살을 하고 만다. 검소하게만 살았던 그는 뇌물 혐의에 대해서 전혀 금시초문이었지만, 그를 고발한 이에 따르면 확고한 문서로 증거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문서의 필적은 당사자인 소자에몬이 보기에도 자신의 것으로 보였으니,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이냐 하겠다. 그 와중에 부인인 사토에가 아들의 관직을 위해 뒤에서 로비를 한 일까지 불거져, 그녀와 아들을 지키기 위해 소자에몬은 죄를 뒤집어 쓰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부부 사이가 각별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세 번째 혼인을 한 사토에는 애초에 남편에게 애정이라고는 없었던 데다, 그녀는 두 아들 중에 아비와 정 반대인 첫째 가쓰노스케에게만 기대를 걸고, 남편과 닮아 얌전한 쇼노스케에게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바랐던 쇼노스케는 에도로 와서 필사 일을 하면서, 문서를 위조했던 이를 찾는데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인물들의 삶도 평범한 가족이 그리 많지 않다. 큰 아들과 의절하고 작은아들에게 대를 잇게 한다는 유언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짜 유언장을 만들고, 수십 년 키워준 정을 무시하고 자신의 부모에게 가서 키워준 부모의 돈을 가로채려 하고, 심약하고 기골이 없는 아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비의 뒤를 이어 평범하게 살 바에야 천륜을 꺾어서라도 자신의 앞길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자식이 있는 가 하면, 맨날 싸움만 하는 모녀 사이도 있고 말이다. 현실에서도 숱하게 만날 수 있는 그런 가족의 여러 형태들이 미야베 미유키의 시선을 통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왜 후루하시 가에 태어난 거지? 내가 원해서,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야."

그 누구도 부모를 선택해서 이 세상에 태어날 수는 없건만, 어찌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천륜이라 함은 부모, 자녀간이나 형제간에 맺어진 관계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도리로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천륜이기에, 부모가 자식을 버리지 못하듯 자식도 부모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채널만 돌리면 나오는 티비 연속극에서도,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사건 사고 뉴스 기사 속에서도, 우리는 천륜을 끊겠다는 이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곤 한다.

쇼노스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와카의 눈가에 웃음이 어렸다. 미소 띤 눈이 쇼노스케의 가슴을 환히 비쳐주었다.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불끈불끈 치솟았다.

오늘은 자주 불끈거리는 쇼노스케이지만, 결코 발칙한 '불끈불끈'이 아니다. 학생들 때와 마찬가지다. 친밀한 분위기를 공유하는 즐거움이 자아내는 기쁜 설렘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모를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부모에게 사랑 받지 못하더라도 단지 그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소중한 걸 잃은 건 아니라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족의 소중함은 잘 알고 있지만, 가족이 만능은 아니라는 것, 피를 나누었다는 속박으로 오히려 불행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의 다양한 인물들의 가족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쇼노스케가 수취증서를 쓴 필사의 달인을 찾는 미스터리와 그가 와카라는 독특한 처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알콩 달콩 로맨스, 그리고 쇼노스케가 필사 일을 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물들의 드라마까지. 이 작품에 실린 네 편의 이야기는 단편 처럼 읽기에도 손색이 없고, 연작으로 읽으면 그 재미가 더욱 배가 되는 재미있는 장편 소설이다. 특히나 나는 미야베 미유키가 사람을 그려내는 그 시선을 참 좋아하는데, 그녀의 작품 속에서는 악인이든 선인이든 각각의 처해진 상황과 입장이 그려져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나쁜 놈, 착한 놈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쓰다 보니 리뷰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이 책에 여러 가지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다고 해두자. 감동적인 드라마도, 퍼즐을 풀어가는 재미도, 귀여운 연애 이야기도, 가슴이 철렁해지는 숨겨진 진실도, 모두 한데 뒤섞여 큰일을 낸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니 말이다. 작품의 원제인 벚꽃박죽 처럼 이런 일 저런 일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사이기도 하니 그저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한번 따라가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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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토어 밀리언셀러 클럽 138
벤틀리 리틀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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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은 상점들이 사라지고, 점점 거대 체인점들로 도배되는 거리를 보면서 언젠가는 저러다 동네 전체가 거대 기업의 자본에 먹혀 좌지우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지역 사회에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자본의 힘은 실제 현실에서도 너무 자주 겪고 보아오던 거라 어느 정도 짐작이 될 것도 같지만,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풍경은 입이 떡 벌어지는, 그러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이럴 수도 있겠구나, 설마 이렇게까지? 말도 안돼.에 이르는 그것은 진짜 공포란 바로 현실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니 이 작품은 벤틀리 리틀이 브람스토커 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다.

그 사슴은 불길한 징조였고, 앞으로 올 일의 전조였다. 그때도 그는 그것이 이상하다, 심지어 섬뜩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사슴의 죽음이 완전히 사악해 보였다. 마치 표지판을 세운 결과 그 사슴이 죽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땅이 밀리면서 다른 동물들도 이렇게 죽은 것이다.

그들은 건설의 대가로 죽은 것 같았다.

여느 때처럼 집에서 나와 아침 조깅을 하던 빌은 초원에서 새 표지판을 보게 된다.

2

더 스토어가 옵니다.

그는 초원 한가운데 들어서는 거대한 새 건물을 상상하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표지판 기둥 사이에서 죽은 사슴의 시체 때문에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집에 돌아온 그는 업무를 위해 컴퓨터를 켜고 뉴스 헤드라인들을 훑어보다, '한 달 동안 세 번째 더 스토어 대학살'이라는 기사를 보게 된다. 여러 지점의 더 스토어 판매원이 동료 직원들을 무차별로 쏘아 사람들을 죽이고, 부상시킨 사건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죽은 사슴을 떠올리며 오싹한 한기를 느낀다. 하지만 그의 딸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주니퍼 읍내 주민들은 더 스토어가 들어온다는 사실에 모두들 흥분해있다. 할인 체인이 아니라 마치 고급 백화점이라도 들어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더 스토어는 예정대로 오픈을 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쇼핑을 하면서 필요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는 더 스토어가 천국 같다고 느낀다. 필요한 물건을 살 때마다 시내에 나가야 했던 그들에게 그곳은 온갖 최고 상점의 온갖 최고 물건들을 모두 가져다가 한 상점에 모아놓은 백화점과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적이고 최신식인 소매점안, 최신 물건들이 가득한 곳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가득한 그곳은, 외견만 봐서는 동물의 이유 없는 죽음이나 수수께끼 같은 사건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인다.

더 스토어의 모든 부서, 모든 복도, 모든 구석에는 비디오카메라가 숨겨져 있어. 카메라는 하루 24시간 켜진 채 우리 상점 경계 안의 모든 활동을 기록하지.

할인 마트에 CCTV가 설치된 것이 뭐가 이상하겠는가. 문제는 탈의실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사람의 모습과 특정 부위를 클로즈업까지 하면서 훔쳐 볼 수 있는 비디오카메라까지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우리는 빌의 딸인 서맨시가 대학 등록금을 위해 파트타임 업무를 지원하면서 말도 안 되는 면접 방식을 목격하게 된다.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하기 위해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벗으라고 하질 않나, 테스트 과정에서 남자와 오럴 섹스를 해본 적이 있냐고 묻질 않나, 약물 시험을 위해 소변 샘플이 필요하니 당장 그 자리에서 치마를 벗고 유리병에 소변을 채우라고 하지를 않나.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면접이 있고, 그에 응하는 이 사람들은 뭔가 싶은 그런 상황을 말이다. 물론 면접 중에 아무도 그녀의 머리에 총을 대고 억지로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심리적인 압력인지 감정적인 무능력인지 그녀는 수치스럽고, 무서웠지만 그 과정을 참아내고 더 스토어의 직원이 된다. 마지막으로 업무에 투입되기 전 과정은 비밀 유지 서약과 '집중 공격'을 견뎌내야 하는 것인데, 그 실체는 직접 작품 속에서 만나보라. 당황스럽고, 어이없지만 내가 그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하면 소름 끼치도록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충격적인 상황들은 모두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상황들이 계속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더 스토어라는 거대한 체인 마트가 조그만 지역 사회를 말 그대로 '장악'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도 현실적이고, 그럴 법하기도 한 풍경이라 더욱 오싹하기만 하다. 그들이 지역 상권을 어떻게 붕괴시키는지, 그들이 고객을 어떻게 노예로 만들어가는지, 그리고 그들이 경쟁자들을 어떻게 제거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피라미드처럼 쌓여가 말도 안 되는 공포가 완성되어 간다.

이곳에 이상한 것이라곤 없었다. 이건 정상적인 할인 소매점이었다. 몇 가지 불운이나 부정적인 사고가 우연히 겹쳐 일어났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어디서나, 내내 일어난다.

우리나라에서도 불리는 기업형 슈퍼마켓이 가속화되면서 골목상권과 재래시장들이 거의 다 전멸해가고 있는 것은 벌써 몇 년이나 된 뉴스 거리이다. 작가인 벤틀리 리틀은 실제 월마트 등 미국의 마트 체인들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단순히 공포 소설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부족할 만큼 리얼해서 무섭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무시무시해서 섬뜩하다.

예전에 SSM 규제에 대해서 홈플러스 회장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질 좋은 상품을 값싸게 파는데 이 사람들은 질이 나쁠 수도 있는 것을 비싸게 판다"면서 대형마트 규제는 서민들이 싼 것을 사 먹지 못하게 하는 반 서민 정책이라고 말이다. 물론 누가 봐도 적반하장이나 다름 없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름 그들만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고, 약자의 편이 아니라 강자의 편에서 보자면 사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더라도 누군가에게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납득시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 '카트'나 현대 차 노조 등 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 분개하는 근로자들의 현실 따위 나는 관심 없다, 혹은 안 그래도 팍팍팍 노동계 현실을 굳이 소설 속에서까지 머리 아프게 만나야 하겠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걱정은 전혀 마시길. 이 작품은 진지하고 현실적인 배경이라는 재료에 치명적인 스토리를 얹어, 공포로 양념을 치고, 디저트로 충격적인 반전까지 더해 놓은 제대로 물 만난 완벽한 엔터테인먼트 작품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저 이 무시 무시한 공포 소설을 오롯이 즐겨라. 그 뒤에 따라오는 여운과 현실에 대한 경각심은 그저 보너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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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사는 동네 1,2
공살루 M. 타바리스 (지은이) | 엄지영 (옮긴이) | 열린책들

 

폴 발레리, 이탈로 칼비노, 로베르트 발저, 칼 크라우스, 앙드

레 브르통, 베르톨트 브레히트, 로베르토 후아로스, 앙리 미쇼,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T. S. 엘리엇... 이들이 한동네에 모여 산다면? 이라는 설정만으로 무조건 궁금해진 책이다.

 

 

 

 

 

 

 

트렁크 
김려령 (지은이) | 창비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너를 봤어> 모두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김려령의 신작은 그저 읽어봐야 할 것만 같은 기대감을 준다. 다양한 사랑과 결혼의 모습이 그녀의 손끝에서 어떤 이야기로 탄생할지 궁금하다.

 

 

 

 

 

 

 

한국이 싫어서/장강명/민음사

 

다른 분들의 추천을 보고 나니, 사실 제목만 보고도 요즘 같은 시국에 너무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아 진짜, 한국이 싫어지는 요즘이다.

 

 

 

 

 

 

 

 

 

 

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은이), 정영목 (옮긴이) | 문학동네

 

2012년 돌연 절필을 선언한 필립 로스의 마지막 작품이다.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어느 포수 이야기l 낭만픽션 2
구마가이 다쓰야 (지은이) | 이규원 (옮긴이) | 북스피어

 

일본 최초로 야마모토 슈고로 상, 나오키 상을 석권한 전대미문의 작품이라고 한다. 북스피어의 낭만픽션 두번째 작품인데, 흥미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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