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빛의 일기 - 상
박은령 원작, 손현경 각색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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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4(1519) 8. 자연 만물이 그렇듯 바다도 계절마다 제 얼굴색을 바꾼다. 8월의 바다는 진청색이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에서 시작된 은빛 물비늘이 파도에 끌려 육지로 가까워지면서 점점 자리를 넓힌다. 열네 살의 소녀 사임당은 짙푸른 바다 위로 쏟아지는 은빛을 황홀하다는 듯 바라본다. 저 청연한 바다색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롯이 빛나는 자연 그대로의 색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자연에서 채취된 색이지만 인간의 손이 닿는 순간 색은 자연 그대로의 빛깔을 잃어버린다.

한국미술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대학교의 강사인 지윤, 그녀는 교수 임용을 앞두고 여러 차례 탈락의 고배를 마시면서 미술사학계의 실세인 민정학 교수를 위해 그의 집안일이며 연구실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러던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오백 년 된 안견 선생의 <금강산도>를 발견한 민교수가 그것이 진품임을 입증하는 논문 작업을 지윤에게 맡기게 된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미술작품을 대하는 안목만큼은 남달랐던 그녀였지만, 말로만 듣던 <금강산도>는 뭔가 이상하기만 했다. 그 의심은 학술회장에서 무심코 내뱉은 대답 때문에 일파만파 커지게 되고, 그 일로 민교수는 이탈리아 학회까지 데려가서 지윤을 위기에 몰아넣고 그녀는 연구원 해직에 시간강사 자리까지 잃어 버리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펀드 매니저로 일하는 남편 민석을 찾는 채권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난리가 난다. 지금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우연히 이탈리아 고서점에서 발견한 사임당 신씨의 일기로 추정되는 고서인데, 그 속에 금강산도에 대한 언급이 있었기에 진품에 대한 단서가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었다. 어쨌거나 삶은 지속되었고, 사는 동안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현재의 지윤이 그렇게 가정과 직장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야기는 훌쩍 과거로 간다. 때는 중종 14(1519), 열네 살 소녀 사임당이 색에 대한 관심으로 진사댁 자제로서 비단옷을 걸치고도 색을 구하려고 나무를 올라타고 산으로 강으로 들로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그 시간으로 말이다. 그녀는 진보적 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 신명화 덕분에 여자인 것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안견 선생의 <금강산도>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간 헌원장에서 장난기 가득한 눈빛의 낯선 도령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겸이다. 그들은 그림을 좋아하는 공통점 덕분에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기에 이른다. 그렇게 두 어린 예술가는 서로의 영혼을 이해하고 예술을 견인하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시대는 두 연인을 갈라놓고 마는데, 기묘사화의 여파를 무심코 그림에 담았던 사임당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이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임당은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하게 된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의 엄마가 된 사임당과 첫사랑 이겸이 다시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이어지고, 그들 사이에 질투에 눈이 먼 휘음당과 권력의 화신 민치형이 끼어 들면서 과거사는 파도에 휘청거리며 급 물살을 타게 흘러간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유민들을 바라보던 사임당은 이내 생각에 잠긴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신분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어째서 이들은 자신의 처지에 굴복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가.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부와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진 세상을 전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도, 산에 굴러다니는 칡넝쿨이라도 캐서 허기를 달래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 세상은 바꿀 수 없어도 사람의 인생은 바꿀 수 있다.

현재의 지윤이 발견한 고서를 복원해서, 그 한자들을 해석하는 이야기가 과거 사임당의 일상을 담은 일기로 교차 진행되는 스토리는, 굳이 타임 슬립 소재로 설정할 필요가 있었나 싶을 만큼 임팩트는 적지만 그 자체로 흥미로운 부분은 많다. 현재의 지윤은 여덟 살 아이를 둔 엄마이고,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모략으로 위기에 처해 있고, 남편이 가정을 어렵게 만들어 시부모와 가족들 모두의 생계를 그녀가 갑자기 떠안게 된 상태이다. 과거의 사임당은 네 명의 아이를 둔 엄마이고, 사랑 없이 결혼한 남편은 벌이가 수월치 않았고, 집까지 날려먹는 등 사고만 쳤고, 그녀의 힘으로 아이들과 함께 폐가에서 겨우 살아내야 하는 처지였다. 지윤은 사임당의 일기를 읽으며 과거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사라지고 나앉게 생긴 처지가 마치 자신의 일 같았고, 사임당의 셋째 아들 현룡은 하는 말이며 행동이 꼭 자신의 아들 은수 같았으며, 일만 저질러놓고 사라진 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지금 자신의 남편 민석과 닮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사임당이 삶을 어떻게 헤쳐 나갔을지 다음 내용이 궁금해졌다. 현실이 너무도 참담했고,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눈앞에 놓은 문제는 해결해야 했으니 말이다. 삶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었으니까.

이영애, 송승헌 주연의 드라마 사임당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소설만 읽어도 왜 사임당 역할에 이영애인지 알 것만 같았다. 사임당이 보여주고 있는 엄마로서의 모습, 예술인으로서의 모습, 아내로서, 여성으로서의 모습들 모두에서 단아하고, 기품 있는 그녀의 선이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배우로서 오랜만의 복귀 작이라 엄청난 화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자체의 반응이 막 뜨겁지는 않다고 들었다. 하지만, 꼭 드라마가 아니어도 이 작품은 소설로서도 그 자체 매력이 충분하기 때문에 이것만 읽어도 누구나 그녀를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어머니상으로서의 사임당뿐만 아니라 그녀의 예술혼까지 보여주는 보석 같은 이야기라서 더욱 가치가 있을 테고 말이다. 단순히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진 사임당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이렇게 세련된 필치로 풀어내는 방식이라면, 위인들에게 관심 없는 청소년들에게 추천해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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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이펙트
페터 회 지음, 김진아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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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말하게 하는 능력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빈말들을 안 하게 만들고 싶어요. 성의없는 안부 인사, 관심없는 겉치레, 배려없는 이기심, 허세로 가득한 있는 척, 괜찮은 척 이런 것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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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기 있어요 - 봄처럼 찾아온 마법 같은 사랑 이야기
클레리 아비 지음, 이세진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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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로맨스 소설은 그다지 읽지 않는다. 유치하고, 비현실적이고, 어디선가 한번쯤 본듯한 상황 전개에, 반복되는 우연 남발까지.. 거의 만족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 로맨스 소설에 대한 나의 기대치를 벗어나는 작품을 만난다. 봄바람처럼 내 심장을 설레 이게 만드는 이 작품처럼 말이다.

문득 동생과 이 여자의 처지가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여자는 달랑 자기 인생만 말아먹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것 같다. 동생은 술을 그렇게 퍼 마시고도 운전대를 잡았다. 그랬기 때문에 앞날이 창창한 열네 살 소녀 두 명이 죽었다. 그런 인간이나 혼수상태에 빠질 것이지, 왜 이 여자일까.

 

이 여자, 등반 중 눈사태로 인한 사고로 혼수 상태에 빠진 지 20주째이다. 그리고 의식이 깨어난 지는 6주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의식이 깨어난 그녀에게 남은 감각이란 오로지 청각뿐이었고, 그녀가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란 전혀 없다. 여동생을 제외하고는 가족들도 차츰 발길을 끊기 시작했고, 그녀는 오로지 수많은 것들에 대해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매일 밤 사고가 나던 순간에 대해 꿈을 꾸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오만 가지 이미지들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남자가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이 남자, 음주운전으로 어린 소녀들을 죽게 만든 동생이 보기 싫어 병원까지 와서도 동생의 병실에 가지 않겠다고 소리친다. 그러다 우연히 잘못 들어간 병실에서 재스민 향기를 풍기며 누워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한다. 사고로 혼수 상태라는 그녀의 병명을 확인하다 그 날이 하필 생일이라는 걸 알게 되고, 무심코 그녀의 볼에 생일 선물로 뽀뽀를 하고 만다.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도둑 뽀뽀였지만,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 1년 만에 여자에게 한 뽀뽀였다. 그는 그녀와 동생의 입장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동생이 미워서 일수도 있고, 그녀가 좋은 사람 같아서 깨어났으면 했던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이 여자의 잔잔한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뚜렷한 감각. 티보가 내 뺩에 뽀뽀를 한다. 입안에서 풍미가 폭발하는 것 같은 기분. 말을 듣지 않는 뇌를 이 느낌에 집중시킨다. 키스하고 싶은 그의 입술 모양, 입매의 곡선, 장밋빛 살의 주름 하나까지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 것 같다.

고개를 돌려 두 눈을 뜨고 싶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내가 그럴 수 있기도 전에 온기가 스러져간다.

 

스물 아홉의 엘자, 그녀는 누가 봐도 다시 깨어날 가망이 없는 환자이다. 혼수 상태인 몸 안에 갇혀 있는 그녀의 삶이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 같은 삶이기도 하고 말이다. 의사들은 그녀가 회복될 확률이 2퍼센트도 될까 말까 하다고, 만의 하나 깨어난다고 해도 심각한 외상 때문에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얼마나 돌아올지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가망이 없다고,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연명 치료를 중단해야 한다고 선고하고, 가족들의 동의가 떨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결정한다. 그녀가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서른 넷의 티보, 그는 음주운전으로 어린 소녀를 두 명이나 죽인 동생이 회복되지 않고 영영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용서할 수가 없다. 1년전 자신을 배신한 여자 친구에게 받은 상처로 아무도 만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동생의 면회를 오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오면서도 한사코 동생을 보지 않으려고 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혼수 상태의 엘자에게 이상하게 자꾸 관심이 생긴다. 처음에는 그저 그곳이 시간이 멈춘 인큐베이터처럼 느껴졌기에,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도, 스트레스도, 고민도 다 잊어버리고 잠시라도 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점점 그녀가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지게 된다.

사실 이 작품은 굉장히 이상한 로맨스 소설이다.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남자라니,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인가 말이다. 움직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도 없는 여자에게, 그것도 심지어 모르는 사이였던 환자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다니. 그렇게 이 작품은 말도 안 된다 싶을 만큼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만들어 준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게 되면 죽어버린 연애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무덤덤해진 내 심장도 쿵쿵 뛰게 만들었으니, 설레는 이 계절 싱숭생숭해지는 마음들을 위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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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계 사건부 - 조선총독부 토막살인
정명섭 지음 / 시공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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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 <쌍옥적>을 읽으면서, 정탐소설이라는 명칭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탐정소설이나 미스터리의 장르를 100여 년 전에는 정탐소설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당시의 사람들도 이런 류의 소설을 즐겨 읽었던 건지가 참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정명섭 작가의 신작을 설명하는 데 '경성 정탐소설'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이 작품 속에는 당시에 이런 류의 소설을 사람들이 즐겨 읽었는지, 어떻게 읽었는지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묻어나 있어서 실제 내가 경성으로 들어가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류경호는 사건에 휘말린 이후 처음으로 분노를 느꼈다. 독립 운동가도 아니고 친일파는 더더욱 아니었던 그는 정탐소설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죽은 이인도 기수는 모험가를 꿈꾼 몽상가였고 말이다. 그런 두 사람 중 한 명은 토막이 나서 비참하게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살인자로 몰렸다. 단지 그곳에서 일하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류경호가 박길룡에게 물었다.

10여 년의 공사 끝에 완공을 코앞에 두고 있는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설계와 시공을 맡았던 조선인 총독부 건축과의 조선인 기수가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그것도 살해당한 후 토막 나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대자 형태로 여기저기 흩뿌려진 채로 말이다. 얼마 남지 않은 조선총독부 낙성식을 앞두고 일본 경찰은 조사는커녕 조용히 덮으려고 하고, 이 일로 조선총독부 내의 조선인들이 위기에 처하자 육당 최남선의 부탁으로 류경호가 범인을 찾기 위해 나선다. 류경호는 흥미위주의 사건과 가십들을 주로 다루는 잡지사 별세계의 기자였다. 그는 집안에서 서자였던 터라 유학까지 다녀와서도 가족과의 문제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던 차에 정탐소설에 빠져 소설의 주인공처럼 추리하는 버릇이 생겼고, 똑똑하고 관찰력이 좋았던 터라 실제로 주변의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해주었던 이력도 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다는 상징이나 다름없는 총독부 안에서 벌어진 토막살인사건은 거대한 미로 같았다. 총독부의 거대하고 압도적인 이미지에 류경호는 난감했지만, 이 살인 사건을 제대로 밝히지 않을 경우 그곳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이 모두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사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사건 해결은 녹록지 않았고, 총독부 안의 조선인들은 단지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삶을 송두리째 파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극중 류경호가 셜록 홈즈의 팬이기 때문에, 작품 곳곳에 그것을 이용한 추리도 등장해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물론 추리 소설 자체로서의 매력보다 경성을 배경으로 한 시대 소설로서의 장점이 더 두드러진 작품이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한 사람의 경력과 인생이 걸린 문제일세. 그 사람은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고 독립운동가는 더더욱 아닐세. 지금 이 땅에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만 살고 있겠는가? 대다수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일세. 최소한 그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없도록 해야지."

그 동안 만나왔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작품이 '조국의 독립을 위한 항일 투쟁'이라는 소재였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과 무장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의 리더 간의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이 펼쳐졌던 영화 <밀정>, 그리고 일제강점기였던 1933년을 배경으로 한국 독립군 저격수와 폭탄 전문가 등이 모여 친일파 암살작전을 벌였던 영화 <암살>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이들과 조금 다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역사에 의해 다들 잊고 있던 사실, 일제 강점기에도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거다.

이 땅에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만 있는 줄 아십니까? 99퍼센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대체 무슨 명목으로 그들의 삶을 파괴하려는 겁니까?

사실 일제강점기라면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들만 존재했을 것 같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그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위해 지냈고, 하루하루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연찮게 접한 <별건곤>이라는 잡지에서 우리가 몰랐던 그 시대의 사람들 이야기를 접하고, 자신이 알던 역사 속에는 그들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에 아무런 족적을 남겨놓지 않았던 삶이라도,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조선 총독부 건물에서 대한제국을 암시하는 토막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잡지사 기자와 조선인 건축사들을 비롯한 보통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일제 강점기의 경성을 배경으로 실존 인물과 가상의 인물이 함께 등장하고, 실존 취미잡지 <별건곤>에서 영감을 받아 극중 통속잡지 '별세계'가 만들어져 기자 류경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추리소설 이전의 명칭인 '정탐소설'로 불리길 바란다는 작가의 말처럼, 격동의 시대 경성이 매우 리얼하게 그려져 있어 마치 타임슬립이라도 떠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언론인 최남선과 도쿠토미 소호,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박길룡 기수 등 실존 인물들의 생생함과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이 중간중간 등장하면서 당시 시대상을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지게 만들고 있어 더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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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토리노를 달리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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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국내 첫 에세이가 동계 올림픽 관전기라는 게 사실 놀랍지는 않다. <마구> <백은의 잭>, <질풍론도> 등 스포츠를 소재로 한 추리 소설들을 그 동안 발표해왔었고, 스노보드 마니아답게 스키점프 등 동계 스포츠를 워낙 사랑하는 걸로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관전기를 정말 유쾌 발랄하게 풀어낸 작품이 바로 이 책이다.

"전에 얘기했지만 이 녀석은 원래 고양이야. 그래서 여권 같은 거 없는데 괜찮을까?"

아저씨는 무책임한 말을 했지만 구로코 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에게 여권이 필요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소설이니까 괜찮겠죠."

"그렇겠지."

". 아무 문제없습니다. , 가시죠."

간단히 말이 정리돼버렸다. 뭐 이렇게 대충인 사람들이 있을까. 평소에도 늘 이런 식으로 "소설이니까 괜찮을 겁니다" 라고 말하는 게 틀림없다.

이 책이 정말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이거다. 바로 그의 애묘인 유메키치가 이 책의 화자라는 것. 어느 날 갑자기 고양이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나이는 스무 살쯤 되었을까. 거울로 보기에는 상당한 미남이라고, 유메키치가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람이 된 유메키치에게 아저씨(히가시노 게이고)가 피겨스케이트 경기를 보며 말한다.

"! 올림픽에 나가라. 금메달을 따서 나한테 은혜 갚으라고."

 하계 올림픽에 비하면 동계 올림픽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지 않은 스포츠이다. 나만 해도 봅슬레이는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 도전을 보면서 처음 알게 되었고, 스키 점프는 영화 국가대표를 통해서야 멋진 스포츠라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동계 올림픽의 스포츠 종목들에 대해 팬심을 자랑하며 열변을 토하는 귀여운 아저씨 히가시노 게이고와 얼렁 뚱땅 자신에게 올림픽 출전을 시키려는 주인이 어이없는 애묘 유메키치의 모습은 이우일의 일러스트와 너무도 잘 어우러져 읽는 내내 킥킥 거리며 배꼽잡고 웃게 만들어 주었다. 올림픽 마법으로 고양이가 사람이 되어 함께 올림픽 관람을 한다는 유쾌 발랄한 상상이 어처구니 없다기 보다 낯선 스포츠들을 친근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고 할까. 암튼 이 책은 역대 가장 웃긴 올림픽 생중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가 자국의 동계 스포츠 선수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각 경기 별로 막 설명하는 모습을 보니, 내년 우리의 평창 올림픽도 국내 소설가들이 평창 올림픽 관람기 같은 걸로 써주면 참 좋겠다 싶은 마음도 들고 말이다.

달력을 보고 겨울이 왔다는 것을 알아도, 일본 어딘가에서 눈이 내리고 때로 재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저씨에게 그걸 깨닫게 하는 게 스노보드이다. 스노보드에 빠지면서 아저씨는 설국을 알았다. 아저씨는 일기예보를 체크하며 훗카이도와 니가타의 기후를 예상하는 게 취미인데, 최근 들어 눈보라와 대설, 눈사태 피해를 걱정하게 되었다.

겨울과 싸우며 살아간다.........그 상징이 동계 스포츠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야생을 되찾는 일 아닐까. 겨울의 마법은 그것을 내게 알려주었는지 모른다.

다들 알다시피 2018년 동계 올림픽이 내년 2월에 강원도 평창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나가노 동계 올림픽 이후 20년 만에 3번째 개최이고, 대한민국에서는 최초로 개최되는 동계 올림픽이며 1988년 하계 올림픽 개최 이후 30년 만에 대한민국의 두 번째 올림픽이다. 이걸 계기로 국내에서도 동계 올림픽 종목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는데,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책은 그 가이드로 제 역할을 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선 동계 스포츠 자체에 대해 관심이 생겨야, 선수에게도 호기심이 생기고, 관람을 할 때 포인트도 생길 테니 말이다.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 역시 일본 내에서 위상이 낮은 편인 동계 올림픽의 부흥을 노려 이런 에세이를 쓰게 된 걸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하고 있을 땐 너무 힘들지만 골인했을 때의 그 커다란 성취감 때문에 계속 하게 된다는 동계 스포츠만의 매력은 엉뚱한 고양이 청년과 투덜대는 소설가에 의해 무심한듯 시크하게 보여지고 있다.

"아저씨, 진심으로 나한테 스키점프를 시킬 셈이야?"

"무슨 소리야. 당연히 진심이지. , 우물쭈물하지 말라고."

금메달을 따서 주인에게 은혜를 갚으라는 소설가와 언제까지 나를 고양이 취급할 거냐며, 아저씨한테 갚을 은혜 같은 건 없다는 고양이 청년의 우격다짐은 정말 만화처럼 유쾌하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동계 스포츠의 배경과 각 선수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동계 올림픽 경기 분석까지 틈틈이 이어지며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중간중간 툭툭 던져진 이우일의 재치 넘치는 일러스트 또한 너무 재미있어서 스포츠에 관심이 없던 이들마저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고 말이다. 작년에 만났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200년 시드니 올림픽 관전기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고 할까. 히가시노 게이고가 동계 올림픽, 무라카미 하루키가 하계 올림픽을 관전해서라기 보다, 각 작가 특유의 문체와 분위기가 자아내는 재미가 너무도 달라 비교해서 읽는 맛도 있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이우일의 일러스트가 함께 하는데, 그가 그려낸 히가시노 게이고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너무도 작가들의 특징을 잘 잡아내고 있어 놀랍다. 스포츠나 올림픽 따윈 관심 없다고? <시드니> <꿈은 토리노를 달리고>를 읽어보자. 아마도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올림픽 스포츠에 빠져 들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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