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임수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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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무런 악의 없이, 너무도 사소하고 평범하게, 모든 드라마의 전형적인 시작처럼. 처음에는 다들 주목하지 않았지만 일찍이 수상한 조짐들이 있었다. 물론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비밀도 마찬가지이고. 이 작품은 작은 실수가 얼마나 엄청난 파국을 불러올 수 있는지 보여주면서, 삶에 대해 묻는다. 과연 당신의 삶은 어떠했냐고.

"도무지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일이 있어요. 반장님도 아시다시피 저 역시 자신감을 잃고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살아왔어요. 나는 왜 이리 외로울까? 나는 왜 사람들과 쉽게 교감하지 못할까? 나는 왜 내 자신을 믿지 못할까?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자신에게 묻곤 했지만 답을 찾아내지 못했어요. 아마도 해답이 내가 결코 찾아낼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에 숨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우린 자주 자신에 대한 결핍을 느끼고, 늘 극복하기 위해 애쓰기도 하지만 결국 완벽한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다고 봐요. 그저 열심히 살아갈 뿐이죠."

퇴직형사 리처드 린빌은 어느 날 한밤중에 유리창이 깨지는 듯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문을 걸어 잠그고 경찰에 신고했어야 마땅한 상황이었지만, 강력계 수사 반장을 지낸 체면 때문에 곧바로 신고하지 않고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41년간 함께 살았던 아내는 3년 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고, 그 역시 다음 달이면 일흔 살이 되는 고령이지만 금연과 절주를 지속해 아직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 게다가 항상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은 덕분에 아직 체력이라면 자신 있었고, 위험한 사태에 대비해 권총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침입자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고, 3개월이 지나도록 사건은 진척이 없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된 케이트가 런던경찰국에 긴 휴가를 내고 스캘비로 내려와 독자적으로 수사를 진행시킨다. 그녀와 아버지 사이가 워낙 각별했기에 아직 그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프리랜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 조나스 크레인은 아내와 수 년 동안 인공수정을 여덟 번쯤 시도했으나 포기하고 현재는 아이를 입양해서 살고 있다. 하지만 클리닉에 다니느라 빌린 대출금도 아직 다 갚지 못했고, 집을 살 때 빌린 융자금도 많이 남아 있는데다, 아이를 위해 아내도 일을 그만둔 상태라 경제적인 부분에서 부담을 많이 느끼고 있는 상태이다. 파국이 임박한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다 번아웃 증후군을 진단받고 의사의 권유로 가족들과 일주일간의 휴가를 떠나기로 한다. 동료로부터 완전히 외따로 떨어진 지역에 있는 농장을 빌려 잠시나마 세상과 절연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노트북컴퓨터와 휴대폰도 놔두고, 그야말로 아무와도 연락할 수 없는 곳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행 직전 지난 5년간 한번도 연락 없었던 아들 새미의 생모인 테리가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며, 남자친구인 닐을 데리고 온다. 그리고 농장에 가서도 그들이 느닷없이 농장에 나타날까봐 신경이 곤두서있던 조나스의 예감은.. 그대로 실현되고 만다.

"설령 물었더라도 진실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을 거예요. 반장님은 제인이 보여주고 싶어 했던 모습만 본 거예요."

"사람들은 항상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지. 인생이 완전히 망가져갈 때조차도 어두운 실상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

케이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샤를로테 링크의 소설은 거의 모든 작품이 드라마로 제작되었을 만큼 인기가 좋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이야기들은 매범 범죄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건과 수사라는 플롯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속에 관계된 여러 인물들의 삶과 심리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아버지를 신에 버금갈 만큼 완벽한 인격체라고 믿고 살아 왔던 딸의 철석같은 믿음에 균열이 가고, 죽고 나서야 가족들에게 숨겨왔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기도 하고, 한 남자에게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여인도 등장한다. 탁월한 상황 판단력과 뛰어난 직감과 인간심리에 대한 통찰력을 두루 갖추고 있는 형사지만, 성격이 괴팍하고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 동료들로부터 언제나 배척당해야 했던 케이트는 알코올중독과 싸우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스스로를 극복한 케일럽 반장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그는 케이트를 동료 경찰의 딸 그 이상은 아니었다.

리처드 린빌의 사건을 수사하는 케일럽 형사와 케이트의 독자적인 수사, 그리고 휴가를 떠난 조나스가 겪게 되는 입양한 아들의 생모와 그녀의 남자친구에 의해 겪게 되는 상황이 교차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처럼 흘러가다 어느 순간 교집합을 이루면서 증폭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실수, 하지만 두려움에 시작된 작은 거짓말, 가족에 대한 애정에 기인한 복수... 사실 따지고 보자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악인이 아니었기에 선과 악,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로 명백하게 판단하기에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을 법한 인간적인 동기들이니 말이다. 비록 그 사소한 일에서 시작한 그것이 결국 몇 사람을 죽이고, 몇 사람을 절망에 빠지게 하고,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어놓게 되지만.. 사실 그것은 그 누구의 의도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이번 작품에서는 평범하고, 그보다 더 부족하고 허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더욱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뜻하지 않은 실수를 저지르거나, 사소한 이기심으로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책임은 다름 아닌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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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X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박현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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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옴진리교 사건 이후 20.. 극단적 종교 단체 '교단 X'를 통해 절대 악을 그려내는 또 다른 픽션이 등장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더그라운드>에서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사건의 피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며, 피해자들의 일상을 통해서 서서히 지옥에 접근했다면..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악의 심연 속으로 직접 들어간다. 그리고 종료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비현실적인 사건들을 겪으면서 선과 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교단 안은 픽션 같았다. 과도하게 집중해서 모아진 정신의 집합이 공간을 왜곡시키는 것처럼. 컬트 종교의 내부는 대개 픽션과 비슷할지 모른다. 나라자키가 고등학생쯤이었을 것이다. 여러 대의 지하철 차량에서 독가스 사린이 동시에 뿌려지는 경악할 만한 테러리즘이 일어났다. 범인은 컬트 종교 집단이었다. 숨어 있던 픽션이 일상 속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돌발적인 픽션 앞에 일상은 무력했다. 그리고 언제나 눅눅하고 흐리멍덩하다. 일상은 픽션을 해체하고, 사형을 선고하고, 모든 걸 평균으로 돌려놓는다.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키고, 그리고 또다시 대비할 것이다. 다음 픽션을 말이다.

나라자키는 탐정사무소에서 일하는 고바야시에게 행방불명 된 연인을 찾아 달라고 한다. 자살을 예고하고 갑자기 사라진 여자, 다치바나 료코. 고바야시에 의하면 그녀는 아직 살아 있다고. 죽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녀에 관한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이름 없는 종교 단체와 더불어 뭔가 기묘한 부분들을 느꼈고, 이상한 예감이 드니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그 여자한테는 뭔가 있다고. 거기에 말려들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그를 걱정하는 고바야시에게 나라자키는 이런 말을 던진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지?"

나라자키는 고바야시한테서 받은 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다치바나 료코가 소속되어 있다는 종교 단체를 직접 방문한다. 주위에서는 종교 단체로 보고 있지만 사실 정식 단체 이름도 없고, 종교 법인으로 등록돼 있지도 않으며, 신자라는 개념도 없고, 모시는 신도 없이 그저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생각하는 모임이었다. 그렇게 수상한 종교 단체의 내부로 서서히 빠져 들어가게 된 그의 눈을 통해 우리는 옴진리교 처럼 극단적 종교 단체인 교단 X가 계획하고 있는 사상 최대의 테러리즘에 대해 알게 된다.

그의 말을 들으며 꿈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빈곤 박멸을 원하는 젊고 선량한 몽상가. 하지만 그것을 꿈같은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리는 자신에게 회의감이 든 적도 있었다. 사람이 죽어간다. 굶어서 죽고, 대국들에게 조종당해 총탄을 맞고 죽어간다. 그것을 멈추게 하려는 노력이 꿈같은 이야기가 돼버린 세상.

그는 원래 작가가 꿈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이야기를 창조하는 걸 그만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을 창조하기로 했어.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어. 내가 노리는 건 근원적인 뿌리야. 세상을 바꾸겠어."

<쓰리>, <왕국>, <미궁>의 나카무라 후리노리의 신작은 오랜만이었다. 그가 데뷔 10년을 앞두고 발표한 그의 열한 번째 작품 <미궁> 이후로 거의 삼 년여 만에 만나는 것이니 말이다. 그는 기존의 전작에서도 그랬듯이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은밀한 욕망과 숨겨진 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회로부터 배척당한 '교단 X'의 신자들이 오로지 성적 탐닉으로만 비참한 자신의 존재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설정 때문에 이야기는 극도로 적나라하고, 선의의 기쁨도, 동정의 가슴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오직 고통의 비명 속에서만 쾌락을 얻을 수 있는 교주 사와타리가 신을 원망하며 모든 것이 파멸하기를 바라 그만큼 우울하고 묵직하기도 하다. 인간의 결함을 파고들어 그 영혼마저 지배하는 절대악. 그 속으로 서슴없이 들어가 그 바닥을 살펴보는 나카무라 후리노리의 글은 어느 순간 선과 악의 경계선을 지우고,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마저 흔들리게 만든다.

지금 시대에 국가는 추상적인 의미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이용하기 위해서 국가 개념을 사용할 뿐이다. 국민들은 어떻게든 만들 수 있다

그 동안 만나왔던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작품은 긴장감 넘치는 추리 소설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철학적인 메세지를 던져주어 인상적이었다. 가벼운 두께의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지만, 언제나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느껴지는 여운이 긴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은 뭐랄까, 나카무라 후미노리 소설 인생의 종합판이라고나할까. 그 동안 그가 고민해온 악과 운명에 대한 탐구가 그 끝에 이른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는 일본의 정치 상황을 교단 X에 투영시켜 동시대를 뒤흔드는 혁명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우리나라의 현 상황과도 무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자의 선이나, 집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 인간의 선.. 그것들이 얽히고 무수한 사건들이 계속 일어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커다란 비극을 저지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그것과 동시에 관객으로, 그저 그 현상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짜 비극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나라의 어딘 가에서도 이렇게 무시무시한 사이비 종교 집단이 만들어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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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르주 바타유 지음, 이재형 옮김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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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굿맨은 다음과 같이 썼다. “문제는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라, 포르노그래피의 질이다.” 정확하게 맞는 말이다. 이 생각을 훨씬 더 멀리까지 확장해보자. 문제는 의식이나 지식이 아니라, 의식과 지식의 질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주체가 갖는 완성도의 질-역대 가장문제적인 기준-에 대해 고려해볼 것을 권유한다. 실제로 미치지 않은, 이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기껐해 봐야 조금 나은 혹은 잠재적인 미치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부정확한 얘기 같아 보이지 않는다.

사실 '문학 장르로서의 포르노그래피'라는 범위에 대해, 나는 전혀 아는 게 없다. 그런 작품을 접해본 적도 없거니와,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그것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러니 내가 조르주 바타유의 이 작품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는 아마 다들 짐작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르주 바타유의 그 짧은 이야기를 차마 버티지 못하고, 뒷부분에 실린 수전 손택의 해설 '포르노그래피적 상상력'과 김태용 작가의 해제 '부위의 책'을 먼저 읽어야 했다.  그는 이 책은 '여타의 해설 없이, 그리고 자신의 글도 읽기 전에 머리를 비우고 체험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글을 체험'하라는 말은 굉장히 어불성설 같지만, 이상하게도 바타유의 글은 눈으로 읽는 것보다 몸으로 체험한다는 것이 더 적합하게 느껴지긴 한다. '머리를 비우고 체험해야 하는' 글이라니 당황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이야기는 열여섯 살이 된 소년이 시몬이라는 또래의 소녀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먼 친척 간이었으므로 처음부터 급속도로 가까워졌는데, 서로 알게 되고 사흘 후, 소년과 소녀가 별장에 단둘이 남게 되면서부터 서로에게 탐닉하게 시작하게 된다. 사춘기의 소년에게 성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굉장히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들의 행각은 어찌 보면 '더럽다'고 느껴질 만큼의 수위라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오르가슴, 성욕, 성교, 수음, 음경, 엉덩이, 정액 등등... 나는 이렇게나 과도하게 성에 대한 것들을 묘사한 글을 본 적이 본 적이 없다. 엉덩이로 달걀을 깨는 기벽을 갖고 있는 시몬, 마치 이성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소년, 그들의 외설적인 모습들은 그렇게 백여 페이지 이상 이어진다.

 

이 작품은 문학, 미술, 철학,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등 전방위적 영역에서 파란만장한 지적 자취를 남기며 프랑스 68혁명 이후 현대 지성사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조르주 바타유의 첫 문학적 시도이자 현대 문학사에서 가장 강렬한 에로티슴 소설로 손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뚜렷한 결심 없이, 특히 자신이 개인적으로 될 수 있거나 할 수 있는 것을 잠시만이라도 잊고 싶은 욕망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상상에 의해 꾸며진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자신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도 말하고 있다. '매우 음란한', 즉 엄청나게 파렴치한 근원적인 이미지, 폭발이나 착란을 일으키지 않고는 그것을 견뎌낼 수 없는 의식이 그 위에 무한히 미끄러지는 바로 그런 이미지가 일치하는 정신의 어떤 심오한 지점에서, 이처럼 비정상적인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내가 여기에 몇 자를 더 끄적인다고 해도 나는 이 작품을 온전하게 '체험하거나'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에로티슴의 거장이라 불리는 조르주 바타유의 자전적 첫 소설을 만났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수전 손택의 날카롭고도 통찰력 있는 글이 거의 바타유의 소설만큼의 비중으로 실려 있기에 그 글을 통해서 이 작품을 느껴보기로 한다. 아마도 수전 손택의 글과 김태용 작가의 글이 없었더라면, 나 같은 무지한 독자들은 이 책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 조르주 바타유, 그가 이 작품 이후 칠 년 후에 탈고한 장편소설<하늘의 푸른빛>은 또 어떤 충격을 안겨줄 지 두려우면서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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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본다 미드나잇 스릴러
클레어 맥킨토시 지음, 공민희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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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습관의 동물이야. 당신도 다르지 않지.

당신은 매일 아침 같은 코트를 걸치고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선호하는 좌석이 있어. 어떤 에스컬레이터가 가장 빠른지, 어떤 개찰구로 통과해야 하는지, 어떤 매점 줄이 가장 짧은지 정확히 알지.

나도 당신의 그런 점들을 알고 있어.

...............반복되는 일상은 편할 거야. 친숙하고 안정적이겠지.

안심하게 만들겠지. 하지만 그런 일상이 당신을 해칠 수도 있어.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사무 업무를 보는 조는 어느 날 지하철에서 신문을 보다가 광고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진지하고 편안한 만남을 원하는 기혼 여성이라는 모토로 간단한 숫자와 웹주소만 기재되어 있는 그 데이트 광고 속 여성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얼굴로 보였다. 걱정이 되어 집에 도착해 가족들에게 신문을 보여주지만, 누군가 장난을 친 것이거나, 그저 그녀와 닮은 누군가 일 거라고 치부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조 역시 자신일 리 없다고, 자신의 사진을 신문에 내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냐고 생각한다.

소매치기 전담팀에서 석 달 동안 근무한 순경 캐시는 다시 지구 치안팀으로 복귀한다. 그런 그녀에게 소매치기 전담팀의 마지막 날 수사했던 피해자에 관한 제보가 들어온다. 피해자의 사진이 <런던 가제트>의 광고란에 실렸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열쇠를 잃어버리기 직전에. 그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조, 그녀는 자신의 사진도 같은 서비스 광고에 실렸다고 제보하고 캐시는 더 이상 자신의 소관이 아니었지만 사건의 연관성을 깨닫고 수사를 하기 시작한다. 열쇠를 잃어버린 캐시는 얼마 뒤 자신의 집에 누군가 다녀간 흔적을 발견해 열쇠를 바꾸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조는 살인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를 보다가 피해자가 바로 어제 광고에 실린 여성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날부터 지하철에서, 집에서, 어디서든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뒤쫓고 있다고 느끼면서 점점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한다.

그럼 이 남자들은 누굴까?

당신의 친구, 아버지, 형제, 친한 친구, 이웃, 상사들이지. 당신이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사람들이야. 직장과 집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당신은 충격 받을 거야. 그들을 더 잘 안다고 생각했을 테니.

하지만 당신이 틀렸어.

'감시'라는 주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소설 속 이야기만으로 치부되지 않는 민감한 부분이기도 하다. 어디를 가든지 안전을 이유로 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게다가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까지 더해져 더 이상 누군가의 사생활도 완벽하게 보장받을 수 없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에게 반복되는 일상이란 습관이 되어 버려서 매일매일이 크게 다르지 않다. 출근길 지하철을 타는 위치와 시간, 점심 시간의 이동 경로, 퇴근길과 주말의 행보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행사나 일정이 있지 않는 한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지만 편할 것이고, 그 낯설지 않음이 안정적일테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그런 당신의 일상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면 어떨까. 당신의 그 사소한 습관들을 매일같이 기록하고 감시해왔다면, 그러던 어느 날 늦게 퇴근해서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낯선 발소리가 가까워진다면 말이다. 주위엔 당신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 둘뿐이라면? 생각만 해도 오싹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바로 내일 나한테 벌어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상황이니 말이다. 일상의 친숙함이 공포로 바뀌는 그 순간, 이 작품 속 이야기는 현실이 되어 다가올 수밖에 없다.

클레어 맥킨토시는 12년 동안 영국 경찰로 재직하며 범죄 수사과 형사와 공공질서를 담당하는 총경을 지낸 이력을 가진 작가이다. 전작인 <너를 놓아줄게>가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끝까지 범인을 추적하는 경찰들과 비극 이후 완전히 달라져버린 인물들의 풍경들이 지루할 틈 없이 끝까지 달려가는 이야기로 인상적이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흥미로웠다. 21세기 감시 사회라는 누구라도 한번쯤 생각해봤을 만한 문제를 가지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라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기에 더욱 오싹하기도 했고 말이다. 현대의 감시 사회라는 모티프는 다른 여타의 작품에서도 다뤄진 적이 많은 소재이지만, 클레어 맥킨토시가 전직 경찰이었던 작가이기에 좀더 탄탄하게 이야기를 풀어내었던 게 아닌가 싶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유독 민감한 요즘이라 더욱 이 작품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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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타 할머니, 라스베이거스로 가다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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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타, 우리 다섯 사람의 나이를 다 합하면, 거의 5백 년이야, 알기나 해? 지금 이게 우리 나이에 할 짓이야?"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완전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매우 우아하고 섬세하기까지 한 노인 판 로빈 후드를 만나게 된다.

은행 강도 연습을 하는 것과 실제로 은행 강도를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절대로 우리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돼. 다시 말해,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일들을 국가가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우리는 개입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해! 이 점을 잊지 마."

갈퀴는 속으로 생각했다. '21세기의 로빈 후드가 되겠다는 거야? 하지만 셔우드 숲속의 영웅이 할망구와 비교되는 것을 좋아할지 모르겠군..............'

전작인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에서 이들 노인들은 다이아몬드 요양소의 운영방식에 반발해 강도가 되기로 결심했다. 누구도 다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강도 짓을 해서 현행범으로 잡히는 것이 목표이다. 피를 안 보고도 충분히 감옥에 갈 수 있는 금융 사건을 계획하는데, 세금도 안 내면서 돈만 모으는 부자 놈들의 돈은 훔쳐도 괜찮으니 그들의 것을 훔쳐보자는 것이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는 매력 만점의 이 캐릭터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계획해서 범죄를 저지르기로 모의하는데, 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하고, 이들의 활약(?)은 그야말로 글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의 흥미로움이 가득하다. 특히나 메르타, 천재, 갈퀴, 스티나, 안나그레타까지 다섯 명의 캐릭터들만의 색깔도 뚜렷해서 앞으로 이야기가 시리즈로 전개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두 번째 이야기로 돌아왔다.

"내가 이렇게 범죄자가 될지는 나도 몰랐는데, 여하튼 그건 내 책임이 아니야. 국가가 먼저 나서서 조금 더 책임감 있게 일을 해주었다면 나 같은 힘없는 늙은이들이 이렇게 나서지는 않았을 거야....."

이번에는 스웨덴을 떠나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로 향해 대담하게도 카지노를 털기로 하는 노인 강도단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자국에서 이미 지명 수배를 받고 있기에 그 동안은 이곳에서 모두들 조심하며 몸을 사려 왔지만, 다른 건 다 참아도 지루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이들이 제대로 일을 벌이려고 하는 것이다. '부자들은 갈수록 더 부자가 되고 없는 사람들은 갈수록 더 가난해지는 세상에서, 노인 강도단은 가장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돈으로 노인과 청소년 시설, 문화 시설 등에 익명으로 기부를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돈이 중간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우연히 획득했던 다이아몬드 마저 세관원과 실랑이를 하다 실수로 잃어버리고 만다. 게다가 새로 구한 그들의 빌라 이웃에는 폭주족 클럽의 두목들이 살고 있었으니, 수상한 노인들과 더 수상한 폭력 조직원들이 엮여서 스토리를 점점 더 스케일이 커지고 꼬여 재미를 더 해준다. 훔친 돈을 다시 도둑맞고, 실수로 잃어 버리고, 그것들이 더 나쁜 놈들의 손에 들어가 다시 찾아와야 하는 일련의 상황들은 아이러니하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메세지들이 곳곳에 등장해 웃으면서도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현실과 극중 의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이지. 어떻게 해서든 우리 기금에 돈을 집어넣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소외되고 헐벗은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우리의 선행은 끝이야. 그런데 우린 단 하루도, 아무 잘못한 것이 없는 노인들이 형편없는 환경에서 사는 것을 우두커니 지켜볼 수가 없어. 노인들만이 아니잖아. 노숙자들도 있고 예산이 줄어들어서 쩔쩔매는 학교와 문화 시설들.... 무언가를 해야 돼, 우리가!"

"하지만, 메르타, 우리가 세상 사람 모두를 구할 수는 없잖아! 지구 전체를 구하겠다는 메르타의 갸륵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는........"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시작으로 프레드릭 배크만의 <오베라는 남자>, 도로시 길먼의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 그리고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의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까지 노인 캐릭터들이 활약하는 작품들을 만나는 일이 이제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아졌다. 백세의 알란, 쉰 아홉의 오베, 육십 대 초반의 폴리팩스 부인, 그리고 여든을 코 앞에 두고 있는 메르타 할머니까지.. 이들은 그 나이라고는 절대 믿기지 않을 만큼의 압도적인 추진력을 자랑하는데, 덕분에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눈 팔지 않고 시원하게 달려나간다. 지루할 틈 없이 그야말로 유쾌하고 상큼 발랄하게 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황당무계하다고 느껴질 만큼의 설정이 바로 다섯 명의 노인 강도단이 등장하는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가 아닐까 싶은데, 이상하게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들의 이야기에 설득 당하고 만다. 회 양극화와 노인 문제로 차별을 겪은 적이 있었다면, 혹은 유사한 상황에서 분개한 적이 있다면, 그야말로 통쾌함을 느낄 수 있을만한 이야기인데다, '정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웃길까'를 나도 모르게 상상하게 되는 말도 안 되는 전개가 이들의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어우러져 진심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주요 플롯이 일종의 범죄 소설 스토리라는 점에 있어서는, 다소 황당하다 싶을 정도의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쉽게만 진행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사실 그런 부분 쯤은 눈감아 주고 싶을 만큼 재미있다는 점이 아마도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가만히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는 무기력한 노인이 아니라, 공포에 굴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당차고 유쾌한 노인들의 모습은 언젠가 내가 나이를 먹어서 되고 싶은 이상향에 가깝기도 하다.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는 멋지게 나이를 먹는 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해주는, 그리고 노인이야 말로 그가 보내온 세월의 두께만큼 현명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게다가 그 와중에 배꼽 빠지게 웃음 폭탄까지 선사하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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