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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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친구들을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가끔 그들과 내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요즘 유행이다 싶은 것들, 혹은 이미 유행도 한참 전에 지나서 이제는 다들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내가 전혀 모르고 있는 건 당연하고, 그들에겐 소소한 일상들이 내겐 너무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 투성이였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는 생활이 3년 정도 되었는데, 나와 그들 사이의 거리는 어느 새 3억 광년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유리 볼 속 겨울' 처럼,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가 바로 내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욕실 유리컵에 꽂힌 세 개의 칫솔과 빨래 건조대에 널린 각기 다른 크기의 양말, 앙증맞은 유아용 변기 커버를 보며 그렇게 평범한 사물과 풍경이 기적이고 사건임을 알았다.

                                                                                               -'입동' 중에서

 

 <입동>에는 아이를 잃어 버린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지난 봄, 오십 이 개월이 된 아이를 잃어 버린다. 아이는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하고, 막을 수 있었다고 자책하기에는 너무도 사소한 사고로 말이다. '가끔은 열 불이 날 만큼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웠지만 딱 그 또래만큼 그랬던, 그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 제 부모를 안을 때 고사리 같은 손으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던, 이제 다시는 안아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아이'였다. '무슨 수를 쓴들 두 번 다시 야단칠 수도, 먹일 수도, 재울 수도, 달랠 수도, 입맞출 수도 없는 아이'였다. 그리고 남겨진 그들 부부에게 시간은 그렇게 멈춰 버린다. 누가 세상에서 사라졌든 말든,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흘러갔지만, 그들에겐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그대로 였다. 그들만 빼고 지구가 자전하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제자리에 멈춰 선 그들이 바라보는 바깥은 어땠을까. 이제 삼십이 개월이 된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서 그런지,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그냥 후루룩 읽어 버릴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매일 같이 생각한다. 왜 하필 그날 그 순간에 그곳에 있던 나의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때 그 장소에 있지만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어떻게든 그 순간을 모면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한시도 잊을 수가 없는 그 생각과 감정들이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생각이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이들은 부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살아가야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그 순간에 세상이 끝난 것만 같겠지만, 시간은 여전히 째깍째깍 흘러가고 우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으니 말이다. 상실과 결핍의 순간보다, 나는 그 이후의 시간들이 더 마음이 아팠다. 아침은 매일 같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어제와 같은 아침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되돌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죽음마저 초월한 그 무엇 같은 건,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 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풍경의 쓸모' 중에서

 

아이와 공원에 산책을 나가면, 매 순간 셔터를 누르게 된다. 자주 어딘가 서보라고, 여기를 보라고, 웃으라고 말하며 순간을 붙잡아두곤 한다.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바뀐다고 할 정도로 아이가 금방 자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좋은 순간, 행복한 상황은 금방 지나가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순간을 남겨 두지 않으면 시간과 함께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아는 어른이라는 사실이 가끔은 슬프다. 그냥 그 순간을 오롯하게 느끼고, 호흡하고, 눈에 담으며 즐겨도 좋을 텐데.. 나는 언제나 풍경은 보지 못하고 그 속에 서 있는 아이만 바라보고 만다. 그렇게 찰칵하는 동작과 함께 순간은 과거가 되어 버린다.

 

 

<풍경의 쓸모>에는 가족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더블폴트의 삶을 살게 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강사인 정우는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중 교통사고를 낸 대학교수 대신 가해 운전자가 된다. 그런데 그는 정우의 교수 임용에 좋은 말을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임용을 강하게 반대한다. 가족들을 남겨두고 집을 나가 재혼을 한 아버지는 돈이 필요하다고 그에게 연락을 해온다.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사진이라는 모습으로 행복한 순간을 연출하는 것이, 어차피 매순간 뭔가를 잃어버리게 마련인 삶 속에서 그나마 기대와 긍지를 담고 있는 거라는 걸 안다는 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그런데 무슨 말을 하다 여기까지 왔지? 그래, 엄마랑 아빠는....지쳐 있었어.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 던지게 돼 있거든.

                                                                                       -'가리는 손' 중에서

 

김애란의 이번 작품집에 등장하는 이들은 계절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그려지고 있다. 살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상실과 결핍의 슬픔을 견디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바깥은 여름인데 여전히 겨울을 살고 있는 삶은 계절을 느낄 수 없다. 너무 이른 아이의 죽음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사는 부부, 타인을 위해 죽은 남편을 이해해야 하는 아내, 가족 같은 개가 편하게 죽을 수 있도록 혼자 힘으로 안락사를 준비하는 소년 등.. 그들 모두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과 뜨거운 열기 가득한 여름이라는 계절은 감당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지나가고 인생은 흘러가게 마련이지만, 누군 가에게는 어느 한 순간부터 그저 상실된 시간, 멈춰진 삶인 것이다. 

 

인생이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그를 닮은 아이를 낳아, 알콩 달콩 가족을 이루는 꿈을 꾼 적이 없다. 연애를 할 때도 당시에는 죽고 못 살만큼 좋았던 그와 미래를 꿈꾸지 않았다. 그저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현재에 충실했을 뿐. 그랬던 내가 어쩌다 보니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일상에 닳고, 육아에 지쳐서 이렇게 평범한 생활을 그리워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나는 김애란의 신작을 읽으면서 내가 놓쳐버린 수많은 선택들과 내가 잃어버린 결핍들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 혹은 앞으로 손에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 버린 것, 지금은 손에 없는 것,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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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7-20 15: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나이 먹으면서 예전에 행복했던 기억들이 조금씩 잊혀져가는 걸 느껴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주위에 있는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을 소중하게 여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피오나 2017-07-20 19:52   좋아요 0 | URL
그 소소한 것들에 감사해야 한다는 걸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슬픈 현실.. 하핫..^^;;;
 
케미스트
스테프니 메이어 지음, 윤정숙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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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계속 살아 있기 위해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어두운 밤이면 때때로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회의를 느껴야 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의 질이 과연 이 정도의 노력을 기울일 만한 것인가?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 뜨지 않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끈질긴 공포와 지독한 노력보다는 어둡고 공허한 무()쪽이 매력적이지 않은가?

과학자이자 전직 비밀 요원, 그 일을 6년 했고, 이후 그들에게서 3년 동안이나 도망 다니면서 살아 왔다. 테러리스트를 심문하는 일을 누구보다 유능하게 해왔지만, 국가와 조직은 그녀를 버렸고,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였던 동료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그녀는 침대에는 가면과 가발, 그리고 분장용 피를 채운 비닐 팩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자신은 그 아래 침낭에서 잔다. 밤마다 보안 장치를 설치했다가 아침에 다시 해체하는 작업을 반복해야 하고, 그 때문에 일어나고 싶은 시간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야 한다. 약국이 무색할 만큼 많은 독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벨트에는 주사기가, 주머니에는 메스 날이, 신발에는 칼, 가방 안에는 후추 스프레이 등등 완전 무장을 하고 다닌다.

이름과 신분을 수시로 바꾸고, 다양한 변장술을 통해 모습을 감추며, 절대로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총과 방독면이 세면대 아래 수건 더미에 숨겨져 있고, 자기 전에도 방독면을 쓰고서야 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방침이 바뀌어서 그녀가 필요하다고. 여러 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운 일이 생겼고, 이 일을 해 줄 다른 적임자는 없다고. 절대 망쳐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그녀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이건 그들이 파 놓은 또 다른 함정인 걸까. 아니면 그녀도 이제는 드디어 침대 위에서 편하게 잘 수 있는 날이 오려는 걸까.

그녀는 정말 대니얼에 대해 공부하고 그의 상호작용을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상적인 사람은 이렇게 행동한다. 그녀는 그 방법을 전혀 모르거나 완전히 잊어 버렸다. 그녀는 웨이트리스를 상대하거나 칸막이 직업에 필요한 말들만 터득했다. 직장에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안다. 그녀는 불법 의사로 일할 때 환자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전에 그녀는 대상에게서 대답을 이끌어 내는 최고의 방법들을 배웠다. 그러나 미리 정해진 역할 밖에서는 항상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했다.

100만 명을 죽일 수도 있는 치명적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미국의 네 개 주에 방출하기로 한 테러리스트로 지목된 대니엘 비치. 알렉스는 그에게 접근해 자백을 받아 정보를 빼내와야 한다. 그래야 그녀의 이름이 조직의 블랙 리스트에서 사라지고,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도 구할 수 있다. 고등학교에서 역사와 영어를 가르치는 표면적으로 대니얼은 흠 하나 없이 깨끗한,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계좌에서 큰 돈이 움직인 내역이 포착되었고, 마약왕 엔리케 데 라 푸엔테스라는 인물과의 연관성도 엿보인다. 알렉스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는 그에게 접근한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너무 순조롭게 그와 말을 나누게 되고, 그를 연구실로 유인하고, 자백제를 주사해 그를 심문하게 된다. 그런데, 그에게 약물을 사용하고, 자백을 강요하며 고통을 주려고 할수록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자신이 벌써 3년이나 이 일에서 손을 뗐었기 때문에 대상에게 감정을 느끼는 거라고, 그래서 대상의 반응에 영향을 받는 거라고 애써 생각하려 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그녀가 몰랐던 엄청난 음모가 숨어 있었다. 과연 대니얼의 정체는 무엇이며, 알렉스는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지긋지긋한 도망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녀가 모르는 이 일에 숨겨진 내막은 과연 무엇일까.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작가 스테프니 메이어의 시크릿 에이전트 스릴러는 무려 730페이지나 되는 두툼한 두께의 스파이 소설이다. 제임스 본드의 소설 혹은 영화 제이슨 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주인공 캐릭터가 여성이라는 데에 스테프니 메이어 만의 특별함이 있다. 읽는 내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생존 방법과 각종 지략을 구사하는 알렉스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위기에 몰린 주인공이라는 설정 자체는 평범하지만, 그걸 이야기로 풀어내는 방식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고, 매혹적이다. 스테프니 메이어만의 주특기인 로맨스가 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 소설이지만, 국가의 안보나 국민의 생명과 연관된 공공의 안전 등은 사실 이 작품에서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주요 등장 인물은 알렉스를 포함해서 단 세 명이고, 시종일관 그들이 비밀을 파헤치고, 계획을 세우고, 그들을 쫒는 무리로부터 도망치는 모습만 그려지고 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조직의 인물들은 초반과 후반부에만 등장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지루해질 틈은 없다. 스파이 소설에 등장하는 로맨스의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그려낸 듯한 느낌이다. 역시 스테프니 메이어! 라는 찬사가 나올만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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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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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창 밖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보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요?"

"대충, 그렇습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그것은 그다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수많은 것에 눈을 감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이 우리의 눈을 가려줍니다. 이를테면 당신이 차창 밖으로 눈길을 주면 무엇인가가 보일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부지불식간에 '언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학생 시절 다니던 영어회화 학원 동료들이 10년 만에 다시 교토로 모인다. 당시에 동료들 여섯 명이 구라마에 진화제를 구경하러 갔었는데, 그날 밤 그 중 한 명이 모습을 감추었다. 홀연히 사라진 하세가와는 그날 이후로도 아무도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마치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오하시는 약속 장소 근처 화랑에서 에서 10년 전에 사라진 그녀와 비슷한 모습의 여자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특별한 그림을 보게 된다. 영원히 계속되는 밤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은 검은 배경에 하얀 농담으로 그린 풍경으로 기시다 미치오라는 동판화가의 작품이었다. 하나하나의 작품들이 모두 밤이 한없이 펼쳐져 있는 듯한 신비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날 모인 다섯 명의 동료 모두 그 야행이라는 그림에 얽힌 특별한 경험들이 하나씩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들이 들려주는 하기괴한 이야기들이 연작 단편 형식으로 이어진다.

나카이는 갑작스럽게 집을 나간 아내를 찾아간 오노미치에서 아내와 꼭 닮은 낯선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곳 호텔에 로비에 걸린 야행이라는 동판화를 보며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기분을 느낀다. 언덕의 폐가에 사는 아내와 너무 닮은 여자, 그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녀의 남편. 게다가 직접 오라고 초대를 했던 아내와는 연락도 되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다케다는 회사 동료와 그의 연인, 연인의 여동생과 함께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여행 중에 미래를 본다는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할머니는 그들 네 명 중에 두 명에게서 사상이 나왔다며, 지금 당장 도쿄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과연 할머니의 예언은 믿을 만한 것일까. 그러나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기로 하는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호텔을 나와 산조 명품 거리의 상점가를 통과했다. 학생 시절, 이렇게 조용한 거리를 영어회화 학원 사람들과 걸었던 적이 있었는데,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밤의 거리를 걷다 보면 학생 시절의 그 밤과 그대로 연결될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나카이 씨는 기쁜 듯 웃었다.

"그래.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 묘하군."

"신기하죠."

"10년 전으로 시간 이동을 한 것 같아."

여행과 밤, 기차로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무더운 한 여름 밤에 읽어도 등줄기가 서늘해질 만큼 오싹하다. 어느 순간 내가 그들과 함께 야행 열차를 타고 그 기묘한 시간 속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도 들고 말이다. 불타는 집 옆에 서 있던 묘령의 여인, 초등학생 무렵의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난 그 시절 친구의 모습, 죽음을 보는 할머니의 예언, 낯선 장소에서 만난 아내처럼 보이는 낯선 여인,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스님과 기묘한 분위기의 여고생...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항상 '야행'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실제 바깥에 펼쳐진 밤의 어둠만큼이나 작품 속의 세계 역시 완전한 어둠이었다. 영원한 밤의 세계, 그 속에 등장하는 묘령의 여인. 끝도 없이 어둠 속을 계속 달려가는 열차. 무서운 것 같으면서도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것 같으면서도 오싹하고, 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독특한 작품이었다.

모리미 토미히코의 작품은 <유정천 가족>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만나는 신작이라 기대가 됐는데, 기존 작품들의 분위기와 다소 달라진, 서늘하고 오싹한 세계를 그리고 있어 더욱 흥미로웠던 것 같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동판화가의 그림을 표지화한 것 같은데, 표지 이미지도 너무 아름답고 여름 밤에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어딘가 기묘하고, 괴이한 경험담과 현실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판타지, 그리고 특유의 이야기꾼다운 문체와 스토리가 깊은 밤, 당신의 더위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여름의 교토라는 매력적인 시공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야기는 잠시 나마 여름 더위를 잊어 버리게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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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고바야시 미키 지음, 박재영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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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어 매순간 삼인분의 삶을 살아내면서, 단조롭고 반복적인 엄마 생활은 종종 외로움을 불러왔다. 양육의 기쁨과 양육의 고통은 거의 같은 크기였고, 엄마라서 행복하고 엄마라서 불행했다. 결혼이라는 가부장제 가족 제도에 편입되는 순간, 여자인 나는 계속 뭔가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올라오는 일도 다반사였다. 다행히도 남편은 육아와 집안일을 나몰라라 하지 않았고, 시부모님 역시 전혀 간섭하지 않으시고 나를 딸처럼 예뻐해주셨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런 나도 이런데 하물며, 독박 육아, 독박 가사에 고통받는 아내들의 속마음이란 어떨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속마음이 실제로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이 모든 걸 겪기 전인 결혼 전의 상황이었다면, 아마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최근 들어 따뜻한 밥과 된장국을 몇 번이나 먹었던가? 아들에게 밥을 먹이고 나면 딸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엄마 제비가 새끼 제비에게 음식을 계속 날라다가 입속에 넣어주는 것과 같았다. 자신은 늘 뒷전으로 미루고 제대로 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

'생선구이는 일일이 뼈를 발라내야 하니 먹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먹곡 싶네. 현미밥이라도 천천히 씹어 먹고 싶어. 30분이라도 좋으니 혼자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어봤으면 좋겠다. 느긋하게 앉아 신문도 읽고 싶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싶어. 아이를 돌보느라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대충 머리를 감는 것이 아니라 여유 있게 천천히 머리도 감고, 미용실에 가서 커트도 하고 싶어. 갓 뽑은 뜨거운 커피도 마시고 싶은데 아이가 매달리면 위험하니까 안 되겠지.'

 

아이가 생긴 뒤로 나는 절대로 꿈꿀 수 없는 그런 것들을, 사실 남편은 아주 쉽게 하고 있는 걸 볼때마다 억울하기도, 부럽기도, 분하기도 하다. 가끔은 남편도 똑같이 부모인데, 왜 나만 이 모든 걸 감수해야 하는지 싶어 화가 나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에 오래 휘둘릴 시간 조차 엄마인 내게는 사치였다. 아이가 스스로 앞가림할 때까지 엄마는 혼자 있을 권리, 차분히 먹을 권리, 푹 잘 권리, 느리게 걸을 권리 같은 기본권을 몽땅 빼앗기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육아의 보람과 기쁨을 그 위안으로 삼기엔 그것과 맞바꿀 대가가 너무 크고 길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거나, 내 선택에 대해서 재고해볼 여지가 없을 만큼 일상이 정신없이 바쁘다는 건 단점이기도 하지만, 장점이기도 하다. 그저 매 순간을 살아내기에 바빠서 우울증에 걸릴 시간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들의 모든 사연에 공감을 하진 않았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든든한 위로를 받았다는 느낌은 들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 나보다 더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도 많다는 것만으로도 기운을 얻을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들을 겪엇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제목은 무시무시하다. 책장에 꽂아 놓기에는 어쩐지 꺼림직할 만큼. 혹시라도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이 본다면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괜히 민망할 것도 같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제목이 두 가지 버전으로 제작되어 있다. '어쩌면 내 아내도 꾸는 꿈'이라는 책등을 바깥으로 보이게 놔둔다면, 저 무시무시한 제목은 감춰질테니 말이다. 그런데 '아내가 꾸는 꿈'이라는 제목은 단지 진짜 제목을 감추기 위한 임시방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의미심장하고, 슬프기가지 한 제목이긴 하다.

저자인 고바야시 미키는 이 책에서 워킹맘, 전업주부, 중년 여성 등 남편에게 살의를 느끼는 아내 14인을 취재했다. 그리고 그녀들의 삶을 찬찬히 되짚으며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꿈이 피해망상에서 비롯된 비윤리적 희망사항이 아님을 설명하고, 독박 육아 및 독박 가사를 피할 수 없는 일·가정 양립의 현주소를 구석구석 조명한다. 또한 아내에게 생명을 위협받지 않기 위한 남편의 행동 지침을 제시하고, 행복의 기초가 되는 가정을 바로 세우기 위한 사회의 의식 변화,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어디가서 말도 못하고 속을 끓여햐 했던 수많은 주부들에게는 속 시원한 사이다와도 같은 책이 아닐 수 없다

남편이 휴무를 신청한 날은 고작 이틀이었다. 그의 업무를 방해한 적이 없었다. 업무에 지장을 주는 일은 전부 아내이자 엄마인 사토코가 짊어졌다. 고마워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남편은 "회사에서 아이 얘기는 하지 말라고 상사한테 혼났어"라며 앞으로는 절대로 아이 때문에 쉬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토코는 남편의 상사까지 얄미웠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여성들의 삶은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고스란히 우리 나라로 가져와도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유사한 상황들이 많다. 아마도 평생 아내, 엄마, 여자만 불리한 사회 구조 때문일 것이다. 독박 육아, 독박 가사에 고통받는 여성들도, 맞벌이를 하면서 육아까지 책임져야 하는 워킹맘의 경우에도 말이다. 남자도 부모라는 것을 꽤 많은 남편들이 잊어 버리곤 한다. 이 에피소드의 경우처럼 아이 일로 휴무를 신청하기 어려운 회사 분위기라서 너무 자주 휴무를 신청해서 해고라도 당하면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책임을 똑같이 일하는 여자에게만 미뤄서는 안 되지 않을까. 어차피 한 사람 한 사람이 말하지 않으면 이 사회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텐데 말이다. 내가 그 '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이라 문제이지만, 막상 여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누군가는 사회 개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것이다

육아라는 시련을 겪으면서 애정이 살의로 변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에피소드들은 사실 너무도 평범하고 소소해서 공감을 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매일 아침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아이들과의 고군분투 속에서 모른 척 도망치려는 남편들, 남편이 곁에 있었는데도 혼자 출산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게 하는 상황들, 아내의 육아휴직을 당연하게 여기고 부추기는 사회의 인식과 편견, 가사와 육아 분담을 당연한 일이 아니라 서비스라고 여기는 남편의 의식 변화, 딱히 나쁜 점이 없는 남편이지만 가정에서 제대로 역할을 해주지 않아 아내가 점점 강해지게 만드는 그런 가정,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면 지옥의 문이 열리는 전업주부의 저주받은 일상까지... 저자가 인터뷰한 부부들의 삶은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비슷한 고민과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삐걱거리는 부부 관계의 원인을 상피적인 성격 차이로 분석하는 여타의 책과는 전혀 다르게, 이 책에서는 권위주의 사회가 묵인하고 조장하는 아내의 희생을 면면이 살피며 문제의 근본 원인은 구시대적 성 역할 의식과 그에 따른 남녀 노동 환경의 격차임을 강조하고 있다. 매우 속시원하게도 말이다.

'육아휴직? 그럼 당신이 먹여 살릴 거야?'

'아이랑 놀기만 하고 좋겠네.'

'나만큼만 벌어 오면 집안일 할게'

당연히 육아는 아내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남편도, 억울한 마음으로 꿈과 커리어를 포기하고 전업주부가 된 아내에게 종일 집에서 아이를 노니 좋겠다고 생각하는 남편도 있다. 거기서 더 이기적인 남편은 자신이 돈을 벌어오는 경제력을 과시하면서 아내를 무시하기도 한다. 아직 미혼인 사람들은 설마 결혼 생활이 그렇기만 하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거의 대부분의 가정이 비슷한 모습이다. 남편이 얼마나 아내를 이해하고, 육아와 가정 일을 도와주고 하는 문제와 별개로, 사회가 만들어놓은 아내와 남편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기란 사실상 어려운 게 현실이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처럼 베이비 붐 세대 아내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은 '더 이상 남편 따위 필요 없다'라는 생각에 까지 이르른다. 한때 황혼 이혼이 유행처럼 뉴스에 보도되었던 것처럼, 그녀들은 수십 년 동안 희생하고, 참고,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며 견뎌왔던 자신의 삶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이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단지 젊은 혈기나 한 순간 욱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슬프다. 그렇게 40대와 50대를 보내고, 남편이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부부 관계는 섬뜩할 정도로 살벌해진다.

이 책에 실린 에피소드 중에 '어느 아내가 감행한 40년 만의 복수'는 전업주부였던 70세 아내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마음 한 켠이 짠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작품의 후반부로 가면 육아에 참여하는 아빠들의 현실과 이상을 보여주며 '남편이 살아갈 길'을 제시한다. 농담처럼 들리는 제목이지만, 그야말로 리얼한 현실적 제안인 셈이다.

가끔 생각한다. 엄마들은 왜 평생 좋은 음식 한번 마음껏 못 사드시고 살았을까. 사랑이 아니라면 기나긴 인생, 결혼 생활은 대체 어떻게 살아지는 걸까. 왜 엄마들에게 행복은 늘 충족 유예 상태로만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내일을 위해 오늘을 인내하는 삶, 자식을 위해 자신은 포기하는 삶이 너무도 당연했던 우리 엄마들의 세대는 더 이상 존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엄마들도 행복하고 싶다. 엄마들도 남이 차려준 따뜻한 밥을 먹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자격이 있다. 구시대적인 성 역할 의식과 노동 환경이 한 순간 달라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변할 거라고 믿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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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비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그 그림이다, 라고 하쿠로는 확신했다. 가즈키요가 죽기 직전까지 그렸으나 결국 완성하지 못한 그 그림. 실물은 발견되지 않고 사진마저도 사라졌다는 것인가.

어떻게 된 일인가. 하쿠로는 고민에 빠졌다. 이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감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밝혀진 것이 있었다. 그림의 제목이다. 그곳에는 '제목:관서의 망'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관서'라는 단어의 듯을 알지 못해서 하쿠로는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았다. '관서:죄와 허물 등을 너그럽게 용서함'이라고 나왔다.

수의사인 하쿠로에게 어느 날 이복동생 아키토의 아내라며 연락이 온다. 가족들과 거의 연을 끊고 지내왔던 터라 동생이 결혼을 한 지도 몰랐던 하쿠로이지만, 아키토가 행방불명이라고 벌써 며칠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그녀의 말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어 그녀를 만나기로 한다. 시애틀에 있던 아키토와 가에데는 아버지가 위독하니 임종을 하려면 어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급히 귀국을 했는데, 귀국한 지 이틀 째 되는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거다. 병원에 가기로 한 날 작은 쪽지만 남기고 행방불명이 되었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는 상황이라, 그에게 병문안을 함께 가달라는 거였다. 친척들이 남편의 실종에 관계가 있지는 않은 지 궁금했던 가에데 덕분에 하쿠로는 그녀와 함께 아주 오랜 만에 가족들을 마주하게 된다.

하쿠로의 아버지는 무명 화가였기에 생계는 거의 간호사로 일하던 어머니가 책임졌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일찍 세상을 뜨고, 남겨진 어머니가 의사인 야가미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이복 동생인 아키토가 태어났고, 어머니가 16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서는 야스히루 집안과는 거의 왕래를 하지 않고 지냈었다. 집안의 유산 배분과 관련해서 가족들이 모이게 되고, 하쿠로와 가에데를 비롯해서 친척들 간의 복잡한 심리전이 진행된다. 거의 중반까지 이들 집안의 수많은 인물들과 관계, 그리고 유산 상속을 둘러싼 이기심과 과거의 사정들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자칫 히가시노 게이고스럽지 않아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중반을 넘어서자 이야기는 특유의 속도감을 가지고 끝까지 달려가기 시작한다.

"맞아요. 다만 일반적인 서번트 증후군과는 약간 달랐어요."

"다르다면, 어떻게요?"

"야가미 선생님은 후천성 서번트 증후군이라는 단어를 쓰셨어요."

"후천성? 하쿠로는 가에데와 마주 본 뒤 니무라 가나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것도 있습니까?"

 

리만 가설, 뇌 과학, 서번트 증후군, 그리고 그들이 그려내는 의문의 그림들까지 이 작품은 SF적인 상상력과 과학 이론의 삽입 등 다양한 소재들로 버무려진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언젠가부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에서 순수 추리, 미스터리의 느낌보다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적인 요소들이 다분히 늘었는데, 이번 작품은 그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의 미스터리는 단 하나가 아니다'라는 카피 문구처럼, 여러 미스터리들이 얽혀서 하나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실종된 남편을 찾는 아내, 의학계 명문가의 유산상속을 둘러싼 비밀과 거짓말, 뇌의학 계의 숨겨진 발견과 아버지의 병에 대한 진실, 사고인 줄 알았으나 의심스러웠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상.. 거기다 소소한 로맨스까지 버무러져 이야기는 정신 없이 달려간다.

뇌의학과 수학계의 난제라는 미스터리를 어렵지 않게 접근해서 풀어내면서, 주인공의 직업을 이용해 다양한 반려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며, 과학을 변명으로 동물실험을 하는 것에 대한 윤리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원칙을 중요시하며 매사에 똑부러지게 옳은 소리만 하는 동물 병원의 조수 가게야마 모토미도 매력적이고, 멋진 몸매에 속을 알 수 없는 신비스런 분위기의 가에데는 어딘지 수상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이들 두 여자 사이에서 나름의 갈등을 겪는, 고지식하고 순진한 하쿠로와의 스토리도 아기자기하게 재미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작품들보다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장르적인 재미에 더 중심을 두었던 작품들이 더 좋지만, 종합 엔터테인먼트 소설을 지향하고 있는 최근의 작품 경향이 더 많은 이들을 그의 작품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소수의 독자들을 만족시키느냐, 다수의 대중들에게 어필하느냐는 작가의 선택이니 말이다. 확실히 이번 작품은 추리, 스릴러 장르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도 만족시킬 만한 요소들이 많고, 어렵지 않아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는 이들에게도 훌륭한 선택이 될 것 같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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